곰동씨는 이제야 그 영화 <설국열차>를 보았다. 영화관에서 진즉에 사라진 그 영화가 TV VOD 상자에 덜커덩 나타난 것이다. TV를 끄고 컴퓨터 앞에 앉은 곰동씨의 얼굴은 괜스레 발개졌다. 굿 뒤에 날장구 치는 놈이 겸연쩍은 것은 당연지사, 그래도 곰동씨는 자판을 톡, 치기 시작했다. “영화는 ....”

 

곰동씨는 생각했다. 너무 노골적이야... 이거 좀 심한걸... 봉준호 감독의 메시지는 딱 하나였다. 너무 분명해, 말 깨나 한다는 어떤 평자도 이견을 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사실 곰동씨는 작년 개봉전후에 쏟아져 나오던 평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 볼 것이니까. 그런데 해를 훌쩍 넘긴 것이다. 여하튼 그러므로 지금부터 곰동씨가 중언부언하는 것은 곰동씨 딴에는 새로운 것이다. 남들은 이미 예전에 열을 올리다 이제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들이겠지만.

 

곰동씨의 머리에 맨 처음 떠오른 것은 지젝이었다. 이 영화는 지젝이 귀 딱지가 앉도록 외쳐대는 ‘환상을 횡단하기’ 다. 나쁜 것이냐? 더 나쁜 것이냐? 의 선택. 월포드의 ‘order' 는 나쁜 것이다. 그러나 열차 밖의 얼어붙은 땅은 더 나쁜 것이다. 행복한 삶은 고사하고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땅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얼어붙은 눈 위의 첫발자국을 선택해야 하는가? 봉준호의 답은 그렇다, 이다.

 

시스템 안에서는 어떤 미친 지랄도 궁극에는 시스템의 봉사자로 기여한다. 종교적 구원도 유혈 봉기도 시스템의 손바닥 안에 있을 뿐이다.

 

길리엄도 월포드 만큼이나 체제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존재한다. 종교란 늘 그래왔다. 굶주리고 헐벗은 자의 옆에 서지만, 그 자리는 늘 같은 곳이다. 가난한자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꼬리칸에. 곰동씨는 아! 나쁜 감독이라, 속삭인다. 종교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까대다니. 구원의 한 가닥 줄마저 잘라버리는 잔인한 인간 같으니!

 

커티스는 어떤가? 목숨을 건 봉기가 체제 전복이 아니라 체제 안정의 도구였음을 알게 된 커티스에게 월포드는 자신의 자리를 제안한다. 체제를 지키는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라! 다 때려 부수어도 좋다. 단, 열차 안에서라면. 커티스 네 녀석도 알게 될 것이니. 인류의 생존은 열차에 달려있고, 열차는 질서와 균형에 의해 달린다는 진리를! 커티스가 엔진을 장악한 것이 아니다. 엔진이 인간을 장악한 것이다. 곰동씨는 속삭인다, 자본주의처럼. 자본에 대한 어떤 비판도 상품으로 만들어 자본주의 화하는 괴물. <괴물>이 괴물에 잡아먹혔던 봉준호의 그 영화처럼. 그 때 <괴물>이 싹쓸이한 스크린이 몇 개였더라?

 

그래서, 엔진은 완전한가? 시스템은 영구적인가? 톱니처럼 돌아가는 엔진 틈새로 쪼그려 앉아 뭔가를 닦던(?)) 그 꼬마 아이. 곰동씨는 악! 놀라는 동시에, 오! 감탄했다. 부품을 대신하고 있던 그 아이, 엔진의 치명적 결함을 은폐하는, 동시에 드러내는, 그 유색인 아이. 그 조그만 이물질. 라캉의 대상a ! 시스템의 불완전성을 체현하고 있는 아이. 하.하.하... 괴물 같은 시스템이, 그 영구적인 엔진이, 그 무한궤도의 설국열차가 한낱 이물질에, 조그맣고 깡마른 고사리 손에 달려 있다.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는 아이, 그 아이가 가리고 있는 것은 시스템의 구멍이다. 아이가 부품을 대신하여 구멍을 가리고 있는 한 엔진은 영구적이다. 아이가 빠져나와 그 구멍이 그대로 드러나면 엔진은 멈추고 시스템은 마비된다. 시스템은 처음부터 불완전한 전체이다. (W)hole ! whole인 동시에 hole인. 대상a는 hole을 whole로 만드는 스크린이자, whole이 hole일 뿐임을 가리키는 지시자이다. 곰동씨는 또다시 속삭인다. 이건 대상a에 대한 최고의 사례가 되겠어, 정말.

 

엔진이 멈추고 콰쾅~ 폭발! 열차는 궤도를 이탈하고, 아니 궤도 자체가 날아가고, 세계는 파멸한다. 누군가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무엇도 미래를 보증하지 못한다. 대타자는 없다. 폭발과 함께 인류는 멸종할 수 있고, 운 좋게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 위험을 무릅쓸 미친놈이 아니고는 시스템을 파괴할 수 없다. 시스템 내에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자의 최대치는 커티스다. 커티스인가, 남궁민인가? 남궁민의 한국말은 방언이다. 약에 쩐 놈의 중얼, 중얼, 중얼. 설국열차 안의 사람들에게 남궁민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미친놈, 그래서 선지자이다. 죽음의 땅 너머 가나안을 예언하는 선지자, 그러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곰동씨는 감탄한다. 봉준호는 영리하다. 한국말은 선지자의 방언이며, 주변부 감독의 자부심이다. 곰동씨의 동족들은 열광한다. 오~ ‘어린쥐’ 위로 툭툭 던지는 ‘시발’의 쾌감이란!

 

지배자도, 지도자도, 선지자도 아니다. 살아남은 자는. 너머를 보는 눈을 가진 요나와 시스템의 이물질,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꼬마. 여자 하나, 남자 하나. 인류는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눈밭위에 이들은 생존할 수 있을까? 아무도 답하지 못하지만, 저 멀리서 이들을 일별하는 흰 곰 한 마리. 그래, 곰동씨의 조상은 곰이었지, 웅녀가 보우하사 새로운 나라 만세? 귀여워라 봉준호.

 

궤도를 달리던 열차는 날아갔다. 궤도는, 좌표는 없다. 맨 땅, 언 땅에서 길을 만들어야 한다. 루쉰이 말했다. “원래 땅 위에 길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아니 장자가 먼저 말했던가? 곰동씨는 그사이 까먹었다. 라디오 고전읽기에서 분명히 들었는데, 뤼쉰의 길 운운은 장자에서 따온 것이구나 생각했는데, 고 문장이 생각이 안나네 웅웅;. 머리 한번 따콩 쥐어박고. 다시 돌아가자, 길로. 그런데 새로운 길은 더 좋은 세계로 맞닿아있을까? 곰동씨는 그것이 늘 걱정이다. 그러나 영화는 언제나 그 전에 끝난다. 시원하게 부쉈으면 됐지, 더 뭘 바래? 영화는 그렇게 곰동씨에게 눈을 흘기는 것 같다. 눈 밖에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세상은 설국열차의 질서와 균형 잡힌 세계 보다 더 나을까? 누구도 답하지 않는다. 답할 수 없다. 누구도 모르니까. 가지 않은 길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니, 나지도 않은 길에 무엇이 있겠는가? 곰동씨의 말장난에 의하면, less than nothing 이 있을 뿐이다. nothing 보다 못하지만 nothing은 아닌 것. 곰동씨도 무슨 방언을 하는 걸까? 곰동씨도 선지자? ㅋ ㅋ ㅋ 온 세계에 무능함과 부패함을 널리 알리느라 정신없이 바쁜 곰동씨의 앙칼진 정부가 독이 잔뜩 오른 채 유언비어를 엄단하겠다는 이 시절에 무슨 그런 혹세무민의 농담을! 곰동씨는 그저 주워 읽은 것을 툭 한번 던져 보았을 뿐이다, 말이 되거나 말거나. 여하튼 <설국열차>는 곰동씨를 허연 눈벌판에 내려놓았다.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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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답하라 ~> 시리즈의 3탄이 나올까? 하필 1997과 1994를 불러낸 이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했겠지만 나는 조금 아쉽다. 이왕이면 나의 20대가 소환되었다면 더 행복했겠지 싶은 개인적 아쉬움이다. 경상도에서 10대를 보내고, 서울에서 20대 이후를 주~욱 보낸 40대라 1997과 1994 모두 친숙했다. 그러나 내게 더 특별했던 것은 1994다. 주변 아줌마들 이야기로는 1997이 더 재미있었다지만, 1994의 하숙생 이야기는 내내 나의 하숙시절과 겹쳐졌기 때문에 나는 1994가 더 좋았다. 아마 1997이 더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빠순이 문화’에 내가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빠순이 세대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밝게 자라지 못했다. 궁핍했고 어두웠다.

  대학 3학년 때 옮긴 하숙집이 나정이네와 비슷했다. 충청도에서 농사를 짓다 땅을 팔고 올라와 하숙을 처음 시작한 집이었다. 퉁퉁한 아줌마와 빼빼마른 아저씨, 그리고 초등, 중등의 아들과 딸이 있는 주인집이었다. 1층에는 주인식구와 나와 내 룸메이트가 살았고 2층에는 열 명 가량의 남학생들이 시끄럽게 뒹굴며 살았다. 수시로 친구들을 데려와 밥상머리에 앉혀도, 밥시간이 훨씬 지나 부엌을 덜커덕거리며 수선을 피워도 눈치 주는 일이 없었다.

  밤이 없던 하숙촌은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러웠다. 누구라도 과외비를 받으면 그때 막 유행하기 시작했던 양념치킨을 사들고 이층 거실에 모여 앉아 때로는 밤을 새며 기타를 치고 술을 마셨다. 한번은 참다못한 건너편 집 이층의 젊은 남자가 내복 차림으로 플래시를 비추며 욕설을 퍼부어댔지만 대거리를 해가며 우리는 술판을 접지 않았다. 거기는 치외법권 하숙촌이었고 우리에게 규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고성방가나 소음죄로 신고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경찰은 늘 우리 가까이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셔틀버스 앞에서 가방을 뒤지거나 이단옆차기로 데모하는 학생의 얼굴을 가격하는 것이었다.

  하숙촌에 살 때는 거기가 세상의 전부였다. 학교와 하숙집을 오가며 보는 세상이 전부였고, 서울에서 4년을 살아도 그 작은 세상 밖을 나가본 적이 별로 없었다. 과외를 하러 오가던 강남의 아파트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데모대에 휩쓸려 쫒아 다녔던 신세계 백화점 앞과 여의도 정도가 잠깐씩 엿보았던 세상 밖의 다른 세상 이었다.

  그때도 복학생들은 그렇게 말했다. 여기 참 많이 변했다... 군대 3년 만에 단골 막걸리집도 없어지고 서점도 없어지고, 학생들은 되바라졌다고. 치마 입고 화장을 한 여학생들이 교정을 부끄럼 없이 돌아다닌다고. 졸업하고 취직을 한 뒤 얼마 있다 다시 찾은 하숙촌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이야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 사이 하숙촌은 고시촌으로 변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주변의 산동네들은 모두 철거되고 아파트촌이 들어섰다고 했다.

  학교와 하숙집 사이 등산로 입구의 감자탕 노점상들은 그래도 여전할까. 시뻘건 기름 위로 통감자들이 둥둥 떠 있던 그 커다란 국솥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그 길에서 왈칵 쏟아냈던 서러운 눈물, 수업을 빼먹고 만화광장에서 보았던 허영만의 숱한 만화들... <오! 한강>

  <응답하라~>에 온 세대가 열광했다. 70년대도 80년대도 열렬히 응답했다. 우리는 무엇에 응답했던 것일까? 90년대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시대를 불러내었고, 그 때의 우리 젊음에 열렬히 응답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단지 추억만이 아닌 그 무엇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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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가까이 위장약을 먹고 있다.

김치도 못먹고, 밀가루 음식도 안먹고,

밥하고 김, 밥하고 계란말이, 시금치죽, 양배추죽, 미역국죽

같은 것들만 먹고 있다.

이제 속쓰려 새벽에 일어나는 일도,

하루 종일 꺽꺽거리며 가슴을 치는 일도,

물을 먹고도 목이 메는 일도

없어져 간다.

 

두 달 동안 살이 많이 빠졌다.

20대 이후 없어져 버린 허리 라인도 생기고,

바지가 줄줄 흘러내릴만큼 허리 둘레도 줄었다.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졌다.

 

조금만 먹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많이 먹으나 조금 먹으나 활동하는 데 별반 차이가 없다.

한창 속이 힘들 때는 입맛도 없었다.

규칙적인 식습관을 위해 때가 되면 의무적으로 찾아 먹었을 뿐이다.

이제 상태가 좋아지니 입맛이 돌아온다.

먹고 싶은 것도 생기고,

한 번 입에 넣으면 위가 당기는지도 모르고 먹으려고 한다.

과식이 제일 나쁘다.

줄어든 위의 용량 보다 많이 먹으면, 바로 탈이 난다.

문제는 시간 차다.

위는 항상 입 보다 늦다.

입에서 당기는대로 먹고 나면, 뒤늦게 위가 신경질을 낸다.

 

나이를 먹으면서 체념하는 것들이 늘어간다.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몸에 맞춰 몸을 달래며 산다.

위가 무능해지면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하고,

허리가 삐긋거리면 일 욕심을 버려야 하고,

이가 흔들거리면 딱딱한 것을 먹지 말아야 하고,

눈이 침침하면 책 보는 것을 삼가야 하고...

 

마음은 날아가는데, 몸은 기어가는 그 불일치의 고통이

이제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

아스팔트 틈새로 피어나는 들풀처럼

고통 속에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 간다.

 

 

오늘은 치즈케잌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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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다하다 별 거지같은 수를 다 쓴다 싶었다. 캔디 이야기의 관건은 별 볼일 없는 캔디에게 왕자님이 폭 빠지게 되는 그럴듯한 사연을 만드는데 있다. 캔디가 얼마나 밝고 예쁘고 씩씩하건 캔디 그 자체는 평범한 여자들의 범주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캔디’라는 일반명사의 정의이자, 시청자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자님의 트라우마가 캔디를 빛나는 태양으로 만들뿐이다. 캔디의 별것 없는 특성은 트라우마로 왜곡된 왕자님의 눈에만 태양처럼 빛난다. 그러므로 캔디 드라마의 승패는 왕자님의 트라우마와 캔디의 특성이 얼마나 딱 맞아 떨어지느냐에 있다. 이 똑떨어지는 궁합을 맞추는 것이 우리 시대 로맨스 드라마 작가의 과업이다.

 

  드라마 〈주군의 태양〉은 궁합 맞추기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도 있고, 갈 데까지 간 한계를 드러냈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을 배반하고 죽어버린 옛 사랑과 그 죽은 귀신을 볼 수 있는 캔디. 왕자 주군의 트라우마와 주군 앞에 귀신을 데리고 나타난 캔디는 똑 떨어져도 너무 똑 떨어지게 맞아 떨어진다. 남은 건 귀신을 매개로 서로 알콩달콩 밀고 당기는 작업의 정석이다. 소지섭의 어색한 듯 멋진 자태와 공효진의 자연스러워도 너~무 자연스러운 캔디는 더 보탤 말도 뺄 말도 없게 만든다. 거기다 홍자매라면 진짜 더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현란한 기교에 가슴은 콩콩거리고, 목울대는 따끔 거리고, 눈물은 소리 없이 잘도 흐른다. 가끔 정신이 살짝 돌아 올 때면 우리가 귀신까지 봐가며 신데렐라 스토리에 넋을 놓는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되나 싶기도 하지만 70여분의 시간은 잘만 지나간다. 어린 시절 불량식품처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바로 그 맛이다. 박근혜 정권이 4대악으로 규정한 그 불량식품, 어른들도 끊어야 되지 않나 싶지만, 과연 불량식품 근절이 가능할까? 입 안에 착착 감기는 그 맛이라도 없으면 세상은 너무 고달프고 막막한데 말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전부 그 나물에 그 밥은 아니다. 요즘은 신데렐라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그 ‘캔디’는 사실 신데렐라 스토리의 계보로 보면 엄청난 도약이다. 점진적인 발전이라기보다는 한 번에 바꾸어 버린 변이, 양자역학의 전자처럼 도약하는 것이다. 잠깐 삼천포로 빠져서 EBS 다큐프라임의 <빛의 물리학> 은 진짜 흥미롭다. 학생 때 보았더라면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좋았을 텐데, 이제는 따라가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너무 재밌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보기에 최상의 교재가 아닐까 싶다. 거기에 양자역학이 나온다 ㅋ. 다시 신델렐라로....

  고전적 신데렐라는 그냥 착하고 순종적인 여자다. 왕자님은 왕자라는 이름자체가 그 실체를 보증해주는 완전한 존재고. 신데렐라는 순종의 대가로 마녀의 도움을 받아 왕자님과 행복하게 맺어진다. 캔디는 환경에 순응하지 못한 변이형이다. 예쁘지도 않고, 순종적이지도 않다. 그런 캔디가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신데렐라가 되기 위해서는 왕자님 또한 변종이 되어야 한다. 테리는 귀족 아버지의 혼외아들이자 배우 엄마의 숨겨진 자식이다. 고전적 왕자가 되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상처받은 왕자다. 그런데 살아남은 것은 이들 변이다. 다아윈은 진화가 점진적인 발전이 아니라 변이라고 했다든가 어쨌다든가, 들은풍월이므로 정확성은 없다. 하여튼 변종 신데렐라와 왕자가 살아남아 드라마 세상을 평정했다.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리라. 왕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 아니 시장 자본주의에서 생존우위는 괴팍하고 불안한 왕자와 잘난 것은 없어도 자존심 하나는 드센 캔디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디 드라마는 여전히 신데렐라 드라마다. 도약이 있긴 했으나 좌표 자체를 뒤바꿔 놓는 혁명적인 변화는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항이 다시 자본주의에 흡수되어 은밀하게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과 같이 신데렐라에 대한 탈주 역시 다시 신데렐라의 자장 안으로 포섭되었다. 괴물이나 설국열차 같은 봉준호의 영화가 그렇듯이 말이다. 내용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있으나 그것이 만들어지고 상영되는 방식은 자본주의의 첨단 기획과 마케팅에 의해 이루어진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신데렐라들은 결국 하나같이 사장님의 직함을 단 왕자님의 품으로 달려간다. 자본주의 시대에 딱 맞는 로망이다. 책을 사랑하는 왕자님, 정의로운 왕자님 따위의 왕자님은 없다. 왕자님의 핵심은 돈이다. 사랑과 행복을 보증하는 은밀한 손은 자본이다. 뭐 딱히 은밀할 것도 없지만.

  시청률이 높았고 화제가 무성했던 캔디 드라마들은 이 신데렐라의 자장 안에서 튀어 오르거나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를 써온 것은 사실이다. 일 년에도 몇 편씩이나 만들어지는 신데렐라 드라마에 질리지 않게 시청자를 사로잡으려면 딱히 다른 생각이 없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긴 하다. 생각나는 것들을 꼽아보면 <내 이름은 김삼순> <시크릿 가든> <청담동 앨리스> 정도다.

 

 

  내 기억으로 <내 이름은 김삼순>의 가장 큰 특징은 ‘이라이자’의 변화다. 사랑을 방해하는 이라이자가 나쁜 년에서 그럴 만한 사연이 있는 괜찮은 년으로 변신했다. 그것이 드라마에서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내가 봤던 드라마가 그렇게 많다고 할 수는 없으니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여하튼 삼식이를 버리고 간 이라이자 희진의 배신은 배신이 아니라 일종의 배려였다. 그러나 사랑은 이미 변했다. 기억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삼순은 말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돌아온 희진이 삼식이의 기억 속 희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희진이 변한 것이 아니다. 삼식이 희진 속에서 보았다고 믿었던 그 무엇은 희진이 가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은 그렇다고 한다. 사랑을 매개하는 것은 서로가 가진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가지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눈에는 보이는 그 무엇, 그 X라고. 삼식의 기억 속에서 그 X는 자라고 커졌지만, 돌아온 희진에게서 삼식은 더 이상 그 X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그 X는 삼순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다. X는 상대방에게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신의 눈이 보고자 하는 그 무엇이니까.

 

  <시크릿 가든> 은 서로의 영혼을 바꾼 드라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과 내 영혼이 하나가 되면서 둘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각자의 영혼이 바라보는 것은 마주하고 있는 각자의 몸이다.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상대의 눈에 비친 자기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길라임의 꿈이라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버지를 잃은 소녀가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잠재된 꿈이다. 왕자님의 트라우마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므로, 그가 라임을 보는 순간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다음은 그저 신데렐라 스토리의 정석을 밟기만 하면 된다. 외톨이가 되어 장례식장 바닥에 쪼그려 잠들어 버린 소녀의 이 잔혹 동화는 애처롭다. 왕자님도 없이 혼자 헤치고 나가기에 소녀의 미래는 너무 어두울 것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꿈속에서도 두렵다. 인어공주가 되어 사라져 주어야 할까봐. 세상이 자신마저 빼앗으려 할까봐. .... 뭐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뻗친다. 이렇게 봐도 신데렐라 드라마가 맞기는 맞다. 가장 비참한 곳에서 꿀 수 있는 유일한 꿈, 그것이 신데렐라 스토리다. 그저 드라마라고 생각하며 보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이미 신데렐라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이 아니고는 더 이상 꿈꿀 그 무엇이 여기, 오늘에는 없기에.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것이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겠는가?

 

  <청담동 앨리스>는 신데렐라의 자장 밖으로 가장 멀리 도약하려 했던 신데렐라 드라마다. 신데렐라는 흑조가 된다. 그물을 치고 왕자님을 유인한다. 이 시대에 순박한 신데렐라는 없다고 말한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더 이상 꿈이 아니라 계략의 산물이다. 왕자님이 지배하는 냉혹한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욕망을 버릴 수도 없다면, 신데렐라가 바뀌어야 한다. 세경과 인찬은 세상의 벽에 부딪힌다. ‘노력이 나를 바꾼다’ 는 신조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 온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빚더미와 시간제 비정규직뿐이다. 인찬이 먼저 사랑을 버리고, 세경은 버려진 사랑에 오히려 안도하며, 신데렐라가 되기로 결심한다. 윤주의 약점을 잡아 신데렐라 되기 작업을 꾸미고, 그 작업은 실패하지만, 뜻하지 않은 우연이 혹은 예정된 필연이 결국에는 세경을 왕자님의 품으로 데려다 준다. 드라마는 내내 신데렐라 스토리를 전복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안전하게 신데렐라 스토리 안에 머물며 행복하게 끝난다. 세상은 바뀌지 않고, 왕자님은 건재하고, 신데렐라를 만들어 주는 것은 여전히 계략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다.

 

 

  <주군의 태양>은 캔디가 아니라는 태양의 반복된 부정에도 불구하고, 너무 착실한 신데렐라 드라마다. 신데렐라 스토리에 로맨틱 코미디를 버무려 놓았으니 어차피 갈 곳이 없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보여준 사랑에 대한 고찰도 없고, <시크릿 가든>의 역설도 없다. <청담동 앨리스>의 전복적 시도는 애당초 싹수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달달하고 사랑스러워 흠뻑 빠졌다 깨어나면 그것으로 좋은 그런 신데렐라 스토리다. 이대로도 ‘좋지 아니한가?’ 이지만, 자기 변주만 되풀이하기에는 홍자매의 능력이 참으로 출중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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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의 제국> 이 끝났다. 박경수 작가의 전작 <추적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예전 기사에 의하면 작가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작품은 <추적자>가 아니라 <황금의 제국> 이었다. 그러나 성공한 드라마는 <황금의 제국>이 아니라 <추적자>이다. 작가로서야 아쉽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황금의 제국>은 실패한 드라마다.

  기대와 믿음을 갖고 본방을 지켜봤지만, 몰입해 보기에는 인물들이 천편일률이고, 느슨하게 보기에는 사건의 전개가 너무 빠르고 복잡했다. 한마디로 보다가 지쳐버렸다. 작가는 아는 것도 할 말도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주요 인물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모든 인물들을 다 동원해 그걸 말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등장인물의 수만큼이나 각자의 스타일이 다양해야 할 텐데, 거의 모든 인물들이 다 최동성 회장처럼 아니, <추적자>의 박근형(의 역)처럼 멋지게 말한다. 걸핏하면, ‘오빠가 열 살 때 말이야....’, ‘요술램프가 있었는데...’, ‘고구마 두 개를 주웠는데...’ 따위로 시작한다. 과거를 회상하지 않고는 오늘을 말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인용하지 않고는 눈앞의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최서윤, 최민재, 장태주는 물론 주변의 조역들까지 하나같이 비유법 대 마왕이 되어버렸다. 말투도 비슷하다. “ ~ 했네요.” 주어가 말하는 사람 본인인데도 죄다 “ ~ 했네요.”체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뚜렷하게 구분지어 놓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 그 개성을 다 지워버렸다.

 

  내용은 단순하고도 복잡하다. 성진그룹이라는 황금의 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세 명의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합집산, 거듭되는 배반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누구 하나 마음을 붙일 인물이 없다. 모두 다 악하고 모두 다 측은하다. 맨손으로 시작한 태주가 우리 편인가 하면, 이놈은 어느새 악마와 손을 잡고 있고, 서윤이 측은한가 싶으면 제국의 공주님은 태생답게 차갑고 잔인하다. 욕망이 재능을 앞지르는 민재가 우리 모습이지 싶으면, 이놈은 또 교활하고 치사하다. 자본주의에는 도덕이 없다는 이 냉혹한 진실이야말로 작가의 뚜렷한 의도겠지만, 도무지 감정이입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드라마의 힘을 빼버린 다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의 여신 정이’ 같이 너무 번연한 구도만 짜증이 나는 줄 알았지, 이렇게 너무 복합적인 구도 역시 짜증이 날줄은 나도 몰랐다.

 

  사건의 전개 역시 현기증이 난다.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0년의 우리나라 경제사 자체가 어지러울 만큼 급변했다고 쳐도, 이것을 배경으로 주요인물들이 이합집산 하는 속도는 드라마계의 LTE라고 해야 할 것이다. 24회를 이어가는 동안 매회 반전이 일어나고, 매번 배반하고 손을 잡고 또 뒤통수를 치고 또 손을 잡고, 그렇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반전에 반전’을 몇 번이나 흥미롭게 보아 줄 수 있을까? 몇 번 거듭되다 보면 자동적으로 또 반전이 일어나겠지 싶고, 그 반전이 하나도 신선하지 않다.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가시영역은 제한되어 있다. 파장이 너무 긴 적외선이나 파장이 너무 짧은 자외선을 우리는 볼 수 없다. 그 가운데 가시영역만이 다채로운 색깔을 빛내며 우리 눈에 아름답게 들어온다. 우리 마음 역시 그러한 것 같다. 너무 느리게 번연하게 진행되는 ‘불의 여신 정이’ 같은 것도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않지만, 너무 빨라 따라갈 수 없는 <황금의 제국> 역시 우리 마음을 파고들지 못한다. 이 드라마의 한계는 너무 많아 모자라고, 너무 풍부해 부족하다.

 

 

 

  그러나 드라마로서의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황금의 제국>은 탁월하다. 이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없다는 것이다. 착한 자본은 없다. 빌 게이츠가 천문학적인 자선을 한다고 해도, 그의 인도주의적인 측면과는 관계없이(? 혹은 은밀한 관련성으로) 그는 무자비하다.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 사업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빌 게이츠의 자선은 경제적 착취를 가리고 있다. 선진국들의 원조 역시 마찬가지다. 후진국의 빈곤에 그들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감춘 채 인도주의적 자선을 베푼다. 이것은 빌 게이츠가 두 얼굴을 가진 악마라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황금의 제국>은 그에 대한 답이다.

 

  <황금의 제국> 마지막 회는 누구나 예상했을 것처럼 태주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성진 그룹은 서윤이 끝끝내 지켜냈으나, 모두가 떠난 빈자리에 홀로 남은 이 제국의 공주는 사무친 울음을 터뜨렸다. 민재는 욕망을 털어내지 못한 채 검찰에 연행되었다. 파국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모두를 덮쳤다. 황금의 제국이 선택하는 인간은 인간성을 제거한, 철저한 자본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미 2세대를 넘어 3세대 경영이 시작된 우리나라의 자본가들은 더 이상 무식하고 탐욕스럽지 않다. 고급문화와 폭넓은 지식의 수혜를 받아 점점 품격 있는 귀족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제국의 공주 최서윤의 형상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서윤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소설을 쓰고 싶었던 인문학자다. 최동성 회장으로부터 그의 상징인 만년필을 물려 받긴 했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착한 자본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최동성 회장은  말한다. “서윤아, 좋은 사람이 되지 마라. 남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라.” 사랑하는 딸이 황금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착한 심성을 버려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애비는 비통하게 당부한다.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의붓어머니 한정희, 사촌 오빠 최민재 그리고 남편 장태주와 길고도 힘겨운 싸움을 치러나가며 서윤은 동생을 버리고, 오빠를 버리고, 언니를 버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처럼 자신을 가르치며 보좌하던 박전무를 버린다. 홀로 댕그라니 남겨진 서윤은 하나씩 버려야 했던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바로 자신이었음을, 그래서 버림받은 것은 바로 자신임을 깨달은 듯 서럽게 오열한다.

  그러나 황금의 제국의 주인이 되려는 자, 누구라도 자신을 버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자본이 가르쳐 준 냉혹한 진실이다. 서윤은 성재처럼 따뜻하게 살고 싶다는 여리고 여린 꿈을 버렸다. 민재는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동생을 잃었다. 태주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철거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이들은 제국이 필요로 하는 무자비한 자본가가 되었다. 제국이 이들을 바꿔놓았다. 욕망을 미끼삼아서.

  제국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제국 그 자체이다. 절대반지처럼 그것을 가지려는 자는 누구나 그것의 지배 아래 놓인다. 자본가가 냉혹한 것은 그들의 인간성이 차갑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도 황금의 제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눈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 제국의 제단 앞에 광기에 휩싸인 태주는 끝끝내 아버지를 제물로 봉헌한다. 아버지 같이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던 마지막 다짐을 배반하고, 보상도 없이 강제 철거를 지시한다. 진압 과정에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태주는 수술비마저 거부하고, 그 철거민은 아버지처럼 병원 침대 위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태주의 질주를 멈추기 위해 설희는 검찰에 태주를 고발한다. 자신이 대신 옥살이를 한 살인 사건의 진범이 태주임을 밝힌다. 폭발할 듯한 태주 앞에 민재가 미끼를 던진다. 설희에게 횡령죄와 무고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태주는 절대반지를 버리고 아버지와 설희에게 되돌아온다.  그러자 황금의 제국은 눈앞에서 사라진다. 성진그룹과 웃음이 넘치는 식탁 둘을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태주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손에 피를 묻힌 태주는, 무엇보다 황금의 제국을 엿보아 버린 태주는 쉽사리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주는 믿었다. 황금의 제국은 지옥이지만 그 지옥에서 살아남으면 거기가 곧 천국이 될 것이라고. 사랑하는 설희와 천국에서 살 것이라고. 그러나 태주는 마지막에 홀로 광활한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황금의 제국>이 세밀하게 보여주는 것은 자본 형성의 추악한 과정이다. 장태주는 최동성을 반복한다. 이미 성진그룹이라는 제국을 일군 최동성은 신화적 인물이 되었지만, 그가 그룹을 키워온 과정은 장태주가 보여주는 편법, 탈세, 사기, 탈취와 동일한 것이다. 장태주는 자신도 최동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최동성의 시대는 지났다. 6.25 전쟁과 전후 재건의 혼란기, 황금의 30년을 구가하던 경제성장의 시기를 틈타 자본을 축적하고 기업을 세우고 족벌을 형성할 수 있었던 기회의 시대는 끝났다. 이미 자본은 탄탄하게 뿌리를 내렸고 맨 손으로 제국에 덤벼드는 돈키호테의 파국은 시작부터 예정된 것이다. 그나마 한 번 주어진 기회가 IMF 경제 위기였다. 10억 달러로 제국의 심장부에 들어 갈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

  그 제국 한 가운데에서 태주는 황족들의 실체에 경악한다. 맏아들은 무능하고, 큰 딸은 어리석고, 사위는 탐욕적이고, 며느리는 이기적이다. 태주는 자만한다. 이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아 제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훨씬 뛰어나니까. 그러나 태주는 몰랐다. 이들 각각은 무능하고 어리석지만, 제국 자체는 이미 탄탄하게 짜여있다는 것을. 그물망처럼 뒤덮인 정보력, 인맥, 조직력, 거기에다 성공한 자에 대한 세간의 존경까지, 실제로 제국을 지탱하는 것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런 구조라는 것을.

  바다로 뛰어들기 전 태주는 서윤에게 말한다. 당신에게 진 것이 아니라고. 최동성 회장에게 진 것이라고. 태주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았다. 제국이라는 구조에 자신이 철저하게 패배했다는 것을. 내가 당신들이 만든 제국 안에서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냐고 태주는 말한다.

 

  이미 떠돌이 무사가 왕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20년의 격변을 거치며 자본은 더욱 견고해졌고, 제국은 고귀한 혈통을 가진 자에게만 세습된다. 최동성과 장태주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 해도 장태주의 패배는 그가 가난한 집 안에 태어났을 때 이미 정해져 버린 것이다. 최동성 역시 빈손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성공 신화가 지금 이 시대의 청춘에게 전혀 어떤 위안도 희망도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리 방송이, 책들이, 멘토가 희망을 떠든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또 하나의 고문, ‘희망 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고문의 끝에는 바다로 뛰어든 태주가 있다.

 

  태주와 서윤은 각자의 방식으로 파멸했다. 착하게 성공하는 동화를 꿈꾸었던 그들에게, 그들의 성공신화를 기대했던 우리에게, 작가가 들이민 진실은 냉혹하다. 우리가 자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을. 제국의 공주마저 자신을 다 내주어야 비로소 제국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 SBS <황금의 제국> 공식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나라 경제사의 개요이다. 드라마의 빠른 전개를 따라가는데 도움을 준다.

 

1990년 신도시 개발

1997년 IMF

1998년 빅딜과 구조조정

2000년 벤처 열풍

2002년 부동산 광풍

2003년 카드 대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2010년 부동산 거품이 꺼져가는 시기

 

** 공식홈페이지에서 하나 더,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이란?

 

전 국민이 황금의 투전판에 뛰어들었던 욕망의 시대.

그 욕망의 싸움터에 뛰어든 청년 장태주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씨줄로,

국내 굴지의 재벌, 성진그룹의 가족사와 후계다툼을 날줄로,

우리 모두의 부끄러웠던 지난 20년의 욕망을 배경색으로 그려낸

우리 시대의 세밀화이며,

장쾌하고 비극적인 현대판 서사 영웅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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