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 시리즈의 3탄이 나올까? 하필 1997과 1994를 불러낸 이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했겠지만 나는 조금 아쉽다. 이왕이면 나의 20대가 소환되었다면 더 행복했겠지 싶은 개인적 아쉬움이다. 경상도에서 10대를 보내고, 서울에서 20대 이후를 주~욱 보낸 40대라 1997과 1994 모두 친숙했다. 그러나 내게 더 특별했던 것은 1994다. 주변 아줌마들 이야기로는 1997이 더 재미있었다지만, 1994의 하숙생 이야기는 내내 나의 하숙시절과 겹쳐졌기 때문에 나는 1994가 더 좋았다. 아마 1997이 더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빠순이 문화’에 내가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빠순이 세대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밝게 자라지 못했다. 궁핍했고 어두웠다.

  대학 3학년 때 옮긴 하숙집이 나정이네와 비슷했다. 충청도에서 농사를 짓다 땅을 팔고 올라와 하숙을 처음 시작한 집이었다. 퉁퉁한 아줌마와 빼빼마른 아저씨, 그리고 초등, 중등의 아들과 딸이 있는 주인집이었다. 1층에는 주인식구와 나와 내 룸메이트가 살았고 2층에는 열 명 가량의 남학생들이 시끄럽게 뒹굴며 살았다. 수시로 친구들을 데려와 밥상머리에 앉혀도, 밥시간이 훨씬 지나 부엌을 덜커덕거리며 수선을 피워도 눈치 주는 일이 없었다.

  밤이 없던 하숙촌은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러웠다. 누구라도 과외비를 받으면 그때 막 유행하기 시작했던 양념치킨을 사들고 이층 거실에 모여 앉아 때로는 밤을 새며 기타를 치고 술을 마셨다. 한번은 참다못한 건너편 집 이층의 젊은 남자가 내복 차림으로 플래시를 비추며 욕설을 퍼부어댔지만 대거리를 해가며 우리는 술판을 접지 않았다. 거기는 치외법권 하숙촌이었고 우리에게 규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고성방가나 소음죄로 신고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경찰은 늘 우리 가까이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셔틀버스 앞에서 가방을 뒤지거나 이단옆차기로 데모하는 학생의 얼굴을 가격하는 것이었다.

  하숙촌에 살 때는 거기가 세상의 전부였다. 학교와 하숙집을 오가며 보는 세상이 전부였고, 서울에서 4년을 살아도 그 작은 세상 밖을 나가본 적이 별로 없었다. 과외를 하러 오가던 강남의 아파트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데모대에 휩쓸려 쫒아 다녔던 신세계 백화점 앞과 여의도 정도가 잠깐씩 엿보았던 세상 밖의 다른 세상 이었다.

  그때도 복학생들은 그렇게 말했다. 여기 참 많이 변했다... 군대 3년 만에 단골 막걸리집도 없어지고 서점도 없어지고, 학생들은 되바라졌다고. 치마 입고 화장을 한 여학생들이 교정을 부끄럼 없이 돌아다닌다고. 졸업하고 취직을 한 뒤 얼마 있다 다시 찾은 하숙촌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이야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 사이 하숙촌은 고시촌으로 변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주변의 산동네들은 모두 철거되고 아파트촌이 들어섰다고 했다.

  학교와 하숙집 사이 등산로 입구의 감자탕 노점상들은 그래도 여전할까. 시뻘건 기름 위로 통감자들이 둥둥 떠 있던 그 커다란 국솥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그 길에서 왈칵 쏟아냈던 서러운 눈물, 수업을 빼먹고 만화광장에서 보았던 허영만의 숱한 만화들... <오! 한강>

  <응답하라~>에 온 세대가 열광했다. 70년대도 80년대도 열렬히 응답했다. 우리는 무엇에 응답했던 것일까? 90년대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시대를 불러내었고, 그 때의 우리 젊음에 열렬히 응답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단지 추억만이 아닌 그 무엇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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