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하다 별 거지같은 수를 다 쓴다 싶었다. 캔디 이야기의 관건은 별 볼일 없는 캔디에게 왕자님이 폭 빠지게 되는 그럴듯한 사연을 만드는데 있다. 캔디가 얼마나 밝고 예쁘고 씩씩하건 캔디 그 자체는 평범한 여자들의 범주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캔디’라는 일반명사의 정의이자, 시청자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자님의 트라우마가 캔디를 빛나는 태양으로 만들뿐이다. 캔디의 별것 없는 특성은 트라우마로 왜곡된 왕자님의 눈에만 태양처럼 빛난다. 그러므로 캔디 드라마의 승패는 왕자님의 트라우마와 캔디의 특성이 얼마나 딱 맞아 떨어지느냐에 있다. 이 똑떨어지는 궁합을 맞추는 것이 우리 시대 로맨스 드라마 작가의 과업이다.

 

  드라마 〈주군의 태양〉은 궁합 맞추기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도 있고, 갈 데까지 간 한계를 드러냈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을 배반하고 죽어버린 옛 사랑과 그 죽은 귀신을 볼 수 있는 캔디. 왕자 주군의 트라우마와 주군 앞에 귀신을 데리고 나타난 캔디는 똑 떨어져도 너무 똑 떨어지게 맞아 떨어진다. 남은 건 귀신을 매개로 서로 알콩달콩 밀고 당기는 작업의 정석이다. 소지섭의 어색한 듯 멋진 자태와 공효진의 자연스러워도 너~무 자연스러운 캔디는 더 보탤 말도 뺄 말도 없게 만든다. 거기다 홍자매라면 진짜 더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현란한 기교에 가슴은 콩콩거리고, 목울대는 따끔 거리고, 눈물은 소리 없이 잘도 흐른다. 가끔 정신이 살짝 돌아 올 때면 우리가 귀신까지 봐가며 신데렐라 스토리에 넋을 놓는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되나 싶기도 하지만 70여분의 시간은 잘만 지나간다. 어린 시절 불량식품처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바로 그 맛이다. 박근혜 정권이 4대악으로 규정한 그 불량식품, 어른들도 끊어야 되지 않나 싶지만, 과연 불량식품 근절이 가능할까? 입 안에 착착 감기는 그 맛이라도 없으면 세상은 너무 고달프고 막막한데 말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전부 그 나물에 그 밥은 아니다. 요즘은 신데렐라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그 ‘캔디’는 사실 신데렐라 스토리의 계보로 보면 엄청난 도약이다. 점진적인 발전이라기보다는 한 번에 바꾸어 버린 변이, 양자역학의 전자처럼 도약하는 것이다. 잠깐 삼천포로 빠져서 EBS 다큐프라임의 <빛의 물리학> 은 진짜 흥미롭다. 학생 때 보았더라면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좋았을 텐데, 이제는 따라가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너무 재밌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보기에 최상의 교재가 아닐까 싶다. 거기에 양자역학이 나온다 ㅋ. 다시 신델렐라로....

  고전적 신데렐라는 그냥 착하고 순종적인 여자다. 왕자님은 왕자라는 이름자체가 그 실체를 보증해주는 완전한 존재고. 신데렐라는 순종의 대가로 마녀의 도움을 받아 왕자님과 행복하게 맺어진다. 캔디는 환경에 순응하지 못한 변이형이다. 예쁘지도 않고, 순종적이지도 않다. 그런 캔디가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신데렐라가 되기 위해서는 왕자님 또한 변종이 되어야 한다. 테리는 귀족 아버지의 혼외아들이자 배우 엄마의 숨겨진 자식이다. 고전적 왕자가 되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상처받은 왕자다. 그런데 살아남은 것은 이들 변이다. 다아윈은 진화가 점진적인 발전이 아니라 변이라고 했다든가 어쨌다든가, 들은풍월이므로 정확성은 없다. 하여튼 변종 신데렐라와 왕자가 살아남아 드라마 세상을 평정했다.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리라. 왕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 아니 시장 자본주의에서 생존우위는 괴팍하고 불안한 왕자와 잘난 것은 없어도 자존심 하나는 드센 캔디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디 드라마는 여전히 신데렐라 드라마다. 도약이 있긴 했으나 좌표 자체를 뒤바꿔 놓는 혁명적인 변화는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항이 다시 자본주의에 흡수되어 은밀하게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과 같이 신데렐라에 대한 탈주 역시 다시 신데렐라의 자장 안으로 포섭되었다. 괴물이나 설국열차 같은 봉준호의 영화가 그렇듯이 말이다. 내용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있으나 그것이 만들어지고 상영되는 방식은 자본주의의 첨단 기획과 마케팅에 의해 이루어진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신데렐라들은 결국 하나같이 사장님의 직함을 단 왕자님의 품으로 달려간다. 자본주의 시대에 딱 맞는 로망이다. 책을 사랑하는 왕자님, 정의로운 왕자님 따위의 왕자님은 없다. 왕자님의 핵심은 돈이다. 사랑과 행복을 보증하는 은밀한 손은 자본이다. 뭐 딱히 은밀할 것도 없지만.

  시청률이 높았고 화제가 무성했던 캔디 드라마들은 이 신데렐라의 자장 안에서 튀어 오르거나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를 써온 것은 사실이다. 일 년에도 몇 편씩이나 만들어지는 신데렐라 드라마에 질리지 않게 시청자를 사로잡으려면 딱히 다른 생각이 없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긴 하다. 생각나는 것들을 꼽아보면 <내 이름은 김삼순> <시크릿 가든> <청담동 앨리스> 정도다.

 

 

  내 기억으로 <내 이름은 김삼순>의 가장 큰 특징은 ‘이라이자’의 변화다. 사랑을 방해하는 이라이자가 나쁜 년에서 그럴 만한 사연이 있는 괜찮은 년으로 변신했다. 그것이 드라마에서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내가 봤던 드라마가 그렇게 많다고 할 수는 없으니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여하튼 삼식이를 버리고 간 이라이자 희진의 배신은 배신이 아니라 일종의 배려였다. 그러나 사랑은 이미 변했다. 기억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삼순은 말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돌아온 희진이 삼식이의 기억 속 희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희진이 변한 것이 아니다. 삼식이 희진 속에서 보았다고 믿었던 그 무엇은 희진이 가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은 그렇다고 한다. 사랑을 매개하는 것은 서로가 가진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가지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눈에는 보이는 그 무엇, 그 X라고. 삼식의 기억 속에서 그 X는 자라고 커졌지만, 돌아온 희진에게서 삼식은 더 이상 그 X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그 X는 삼순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다. X는 상대방에게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신의 눈이 보고자 하는 그 무엇이니까.

 

  <시크릿 가든> 은 서로의 영혼을 바꾼 드라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과 내 영혼이 하나가 되면서 둘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각자의 영혼이 바라보는 것은 마주하고 있는 각자의 몸이다.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상대의 눈에 비친 자기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길라임의 꿈이라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버지를 잃은 소녀가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잠재된 꿈이다. 왕자님의 트라우마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므로, 그가 라임을 보는 순간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다음은 그저 신데렐라 스토리의 정석을 밟기만 하면 된다. 외톨이가 되어 장례식장 바닥에 쪼그려 잠들어 버린 소녀의 이 잔혹 동화는 애처롭다. 왕자님도 없이 혼자 헤치고 나가기에 소녀의 미래는 너무 어두울 것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꿈속에서도 두렵다. 인어공주가 되어 사라져 주어야 할까봐. 세상이 자신마저 빼앗으려 할까봐. .... 뭐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뻗친다. 이렇게 봐도 신데렐라 드라마가 맞기는 맞다. 가장 비참한 곳에서 꿀 수 있는 유일한 꿈, 그것이 신데렐라 스토리다. 그저 드라마라고 생각하며 보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이미 신데렐라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이 아니고는 더 이상 꿈꿀 그 무엇이 여기, 오늘에는 없기에.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것이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겠는가?

 

  <청담동 앨리스>는 신데렐라의 자장 밖으로 가장 멀리 도약하려 했던 신데렐라 드라마다. 신데렐라는 흑조가 된다. 그물을 치고 왕자님을 유인한다. 이 시대에 순박한 신데렐라는 없다고 말한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더 이상 꿈이 아니라 계략의 산물이다. 왕자님이 지배하는 냉혹한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욕망을 버릴 수도 없다면, 신데렐라가 바뀌어야 한다. 세경과 인찬은 세상의 벽에 부딪힌다. ‘노력이 나를 바꾼다’ 는 신조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 온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빚더미와 시간제 비정규직뿐이다. 인찬이 먼저 사랑을 버리고, 세경은 버려진 사랑에 오히려 안도하며, 신데렐라가 되기로 결심한다. 윤주의 약점을 잡아 신데렐라 되기 작업을 꾸미고, 그 작업은 실패하지만, 뜻하지 않은 우연이 혹은 예정된 필연이 결국에는 세경을 왕자님의 품으로 데려다 준다. 드라마는 내내 신데렐라 스토리를 전복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안전하게 신데렐라 스토리 안에 머물며 행복하게 끝난다. 세상은 바뀌지 않고, 왕자님은 건재하고, 신데렐라를 만들어 주는 것은 여전히 계략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다.

 

 

  <주군의 태양>은 캔디가 아니라는 태양의 반복된 부정에도 불구하고, 너무 착실한 신데렐라 드라마다. 신데렐라 스토리에 로맨틱 코미디를 버무려 놓았으니 어차피 갈 곳이 없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보여준 사랑에 대한 고찰도 없고, <시크릿 가든>의 역설도 없다. <청담동 앨리스>의 전복적 시도는 애당초 싹수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달달하고 사랑스러워 흠뻑 빠졌다 깨어나면 그것으로 좋은 그런 신데렐라 스토리다. 이대로도 ‘좋지 아니한가?’ 이지만, 자기 변주만 되풀이하기에는 홍자매의 능력이 참으로 출중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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