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동씨는 이제야 그 영화 <설국열차>를 보았다. 영화관에서 진즉에 사라진 그 영화가 TV VOD 상자에 덜커덩 나타난 것이다. TV를 끄고 컴퓨터 앞에 앉은 곰동씨의 얼굴은 괜스레 발개졌다. 굿 뒤에 날장구 치는 놈이 겸연쩍은 것은 당연지사, 그래도 곰동씨는 자판을 톡, 치기 시작했다. “영화는 ....”

 

곰동씨는 생각했다. 너무 노골적이야... 이거 좀 심한걸... 봉준호 감독의 메시지는 딱 하나였다. 너무 분명해, 말 깨나 한다는 어떤 평자도 이견을 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사실 곰동씨는 작년 개봉전후에 쏟아져 나오던 평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 볼 것이니까. 그런데 해를 훌쩍 넘긴 것이다. 여하튼 그러므로 지금부터 곰동씨가 중언부언하는 것은 곰동씨 딴에는 새로운 것이다. 남들은 이미 예전에 열을 올리다 이제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들이겠지만.

 

곰동씨의 머리에 맨 처음 떠오른 것은 지젝이었다. 이 영화는 지젝이 귀 딱지가 앉도록 외쳐대는 ‘환상을 횡단하기’ 다. 나쁜 것이냐? 더 나쁜 것이냐? 의 선택. 월포드의 ‘order' 는 나쁜 것이다. 그러나 열차 밖의 얼어붙은 땅은 더 나쁜 것이다. 행복한 삶은 고사하고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땅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얼어붙은 눈 위의 첫발자국을 선택해야 하는가? 봉준호의 답은 그렇다, 이다.

 

시스템 안에서는 어떤 미친 지랄도 궁극에는 시스템의 봉사자로 기여한다. 종교적 구원도 유혈 봉기도 시스템의 손바닥 안에 있을 뿐이다.

 

길리엄도 월포드 만큼이나 체제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존재한다. 종교란 늘 그래왔다. 굶주리고 헐벗은 자의 옆에 서지만, 그 자리는 늘 같은 곳이다. 가난한자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꼬리칸에. 곰동씨는 아! 나쁜 감독이라, 속삭인다. 종교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까대다니. 구원의 한 가닥 줄마저 잘라버리는 잔인한 인간 같으니!

 

커티스는 어떤가? 목숨을 건 봉기가 체제 전복이 아니라 체제 안정의 도구였음을 알게 된 커티스에게 월포드는 자신의 자리를 제안한다. 체제를 지키는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라! 다 때려 부수어도 좋다. 단, 열차 안에서라면. 커티스 네 녀석도 알게 될 것이니. 인류의 생존은 열차에 달려있고, 열차는 질서와 균형에 의해 달린다는 진리를! 커티스가 엔진을 장악한 것이 아니다. 엔진이 인간을 장악한 것이다. 곰동씨는 속삭인다, 자본주의처럼. 자본에 대한 어떤 비판도 상품으로 만들어 자본주의 화하는 괴물. <괴물>이 괴물에 잡아먹혔던 봉준호의 그 영화처럼. 그 때 <괴물>이 싹쓸이한 스크린이 몇 개였더라?

 

그래서, 엔진은 완전한가? 시스템은 영구적인가? 톱니처럼 돌아가는 엔진 틈새로 쪼그려 앉아 뭔가를 닦던(?)) 그 꼬마 아이. 곰동씨는 악! 놀라는 동시에, 오! 감탄했다. 부품을 대신하고 있던 그 아이, 엔진의 치명적 결함을 은폐하는, 동시에 드러내는, 그 유색인 아이. 그 조그만 이물질. 라캉의 대상a ! 시스템의 불완전성을 체현하고 있는 아이. 하.하.하... 괴물 같은 시스템이, 그 영구적인 엔진이, 그 무한궤도의 설국열차가 한낱 이물질에, 조그맣고 깡마른 고사리 손에 달려 있다.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는 아이, 그 아이가 가리고 있는 것은 시스템의 구멍이다. 아이가 부품을 대신하여 구멍을 가리고 있는 한 엔진은 영구적이다. 아이가 빠져나와 그 구멍이 그대로 드러나면 엔진은 멈추고 시스템은 마비된다. 시스템은 처음부터 불완전한 전체이다. (W)hole ! whole인 동시에 hole인. 대상a는 hole을 whole로 만드는 스크린이자, whole이 hole일 뿐임을 가리키는 지시자이다. 곰동씨는 또다시 속삭인다. 이건 대상a에 대한 최고의 사례가 되겠어, 정말.

 

엔진이 멈추고 콰쾅~ 폭발! 열차는 궤도를 이탈하고, 아니 궤도 자체가 날아가고, 세계는 파멸한다. 누군가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무엇도 미래를 보증하지 못한다. 대타자는 없다. 폭발과 함께 인류는 멸종할 수 있고, 운 좋게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 위험을 무릅쓸 미친놈이 아니고는 시스템을 파괴할 수 없다. 시스템 내에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자의 최대치는 커티스다. 커티스인가, 남궁민인가? 남궁민의 한국말은 방언이다. 약에 쩐 놈의 중얼, 중얼, 중얼. 설국열차 안의 사람들에게 남궁민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미친놈, 그래서 선지자이다. 죽음의 땅 너머 가나안을 예언하는 선지자, 그러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곰동씨는 감탄한다. 봉준호는 영리하다. 한국말은 선지자의 방언이며, 주변부 감독의 자부심이다. 곰동씨의 동족들은 열광한다. 오~ ‘어린쥐’ 위로 툭툭 던지는 ‘시발’의 쾌감이란!

 

지배자도, 지도자도, 선지자도 아니다. 살아남은 자는. 너머를 보는 눈을 가진 요나와 시스템의 이물질,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꼬마. 여자 하나, 남자 하나. 인류는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눈밭위에 이들은 생존할 수 있을까? 아무도 답하지 못하지만, 저 멀리서 이들을 일별하는 흰 곰 한 마리. 그래, 곰동씨의 조상은 곰이었지, 웅녀가 보우하사 새로운 나라 만세? 귀여워라 봉준호.

 

궤도를 달리던 열차는 날아갔다. 궤도는, 좌표는 없다. 맨 땅, 언 땅에서 길을 만들어야 한다. 루쉰이 말했다. “원래 땅 위에 길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아니 장자가 먼저 말했던가? 곰동씨는 그사이 까먹었다. 라디오 고전읽기에서 분명히 들었는데, 뤼쉰의 길 운운은 장자에서 따온 것이구나 생각했는데, 고 문장이 생각이 안나네 웅웅;. 머리 한번 따콩 쥐어박고. 다시 돌아가자, 길로. 그런데 새로운 길은 더 좋은 세계로 맞닿아있을까? 곰동씨는 그것이 늘 걱정이다. 그러나 영화는 언제나 그 전에 끝난다. 시원하게 부쉈으면 됐지, 더 뭘 바래? 영화는 그렇게 곰동씨에게 눈을 흘기는 것 같다. 눈 밖에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세상은 설국열차의 질서와 균형 잡힌 세계 보다 더 나을까? 누구도 답하지 않는다. 답할 수 없다. 누구도 모르니까. 가지 않은 길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니, 나지도 않은 길에 무엇이 있겠는가? 곰동씨의 말장난에 의하면, less than nothing 이 있을 뿐이다. nothing 보다 못하지만 nothing은 아닌 것. 곰동씨도 무슨 방언을 하는 걸까? 곰동씨도 선지자? ㅋ ㅋ ㅋ 온 세계에 무능함과 부패함을 널리 알리느라 정신없이 바쁜 곰동씨의 앙칼진 정부가 독이 잔뜩 오른 채 유언비어를 엄단하겠다는 이 시절에 무슨 그런 혹세무민의 농담을! 곰동씨는 그저 주워 읽은 것을 툭 한번 던져 보았을 뿐이다, 말이 되거나 말거나. 여하튼 <설국열차>는 곰동씨를 허연 눈벌판에 내려놓았다.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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