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 연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1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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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은 지옥편과 연옥편 그리고 천국편까지 각각 33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진짜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은 모두 9곡부터 시작한다. 33과 9는 딱 보아도 3의 배수이다. 누구는 단테가 '3'이라는 숫자를 엄청 좋아한다고 말하고, 누구는 단테가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3'을 신성시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9곡 이후의 본격적인 이야기보다 그 이전의 이야기들이 더 흥미롭다.

 

 

 

 

 

 

 

 

 

 

 

『신곡』의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그린 지도들은 대부분 이런 모양이다. 북반구는 땅, 남반구는 물이고, 북반구의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고 그 아래로 지옥이 지구의 중심까지 깔대기 모양으로 뻗어 있다. 남반구도 원래 땅이었는데, 하늘에서 루키페르가 추방될 때 남반구를 향해 머리부터 처박혔고, 그 충격으로 땅들이 북반구로 이동하면서 남반구는 연옥의 산만 제외하고는 모두 바다가 되었다. 단테는 루키페르와는 반대로 지옥이 있는 북반구에서 연옥이 있는 남반구로 순례를 한다.

 

 

 

 

 

 <헤리퍼드 마파 문디. 1300년 경 지도. 영국>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단테는 세계를 어떤 모습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중세의 세계 지도는 라틴어로 'Mappa Mundi'인데, 지도의 모양을 본 따 T-O 지도라고 부른다. 

 

 

 

 

 

 <EBSi 민병권의 세계지리 퍼펙트 가이드>

 

 

 

 

세계를 일종의 원반으로 인식했고, 원반을 바다가 둘러싼 모양으로 그렸다. 위쪽이 북쪽이 아니라 동쪽이고, 원반은 가운데 T자 형태의 강들(&지중해)에 의해 삼분되어 있다. 위쪽의 동쪽은 아시아, 아래쪽인 서쪽은 유럽과 아프리카이다. 따라서 태양은 에덴 동산이 있는 위쪽에서 떠서 지중해 너머 아래쪽으로 지는 것이다.  지중해의 가장 바깥인 지브롤터 해협은 이 세계의 끝이다.

 

만일 단테가 당대의 관념대로 TO 지도를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했다면 연옥은 지브롤터 해협 너머 아래로 아래로 항해하여 도달할 수 있다. 지옥편에서 오디세우스는 이 금지된 곳을 너머 불타는 열정으로 나아가다 연옥의 산을 눈앞에 두고 파멸한다.

 

 

 

 

 

 

 

 

그렇다면 후대에 『신곡』의 세계를 이미지화한 많은 그림들이 세계를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동서남북으로 그린 것이 맞는 걸까?

 

 

지옥편 34곡에서 가장 이상했던 것은 베르길리우스가 아침과 저녁의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아직도 넌 자신이 지구의 중심 저편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구나. 거기서 나는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흉측한 벌레의 털을 붙잡고 있었지.

 

내가 밑으로 내려가는 동안에는 네가 그곳에 있었지만,

내가 몸을 돌렸을 때 넌 이미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중력이 모이는 지점을 지나친 것이었어.

 

우리는 이제 거대한 마른 땅으로 덮인 곳의 

맞은편 반구 바로 아래에 와 있다.

그 중심부에서 죄 없이 태어나서

 

죄 없이 산 분께서 희생하셨지.

너는 지금 주데카의 맞은편 얼굴을 이루는

좁은 공간에 발을 딛고 있다.

 

여기는 아침이지만 저쪽은 저녁이야.

털로 우리에게 사다리를 놓아 준 이놈은

처음처럼 그대로 처박혀 있단다.

 

그놈이 하늘에서 떨어진 곳이 바로 여기다.

이전에 이곳으로 우뚝 솟아 있던 땅은

그자가 무서워 바다의 너울을 쓰고

 

우리의 반구로 옮겨 왔지. 그리고 이쪽에

보이는 땅도 그자를 피하려고

이곳에 동굴을 남기고 솟구쳐 오른 것일 게다. "

 

<지옥편 34곡 106~126>

 

 

 

번역문이라 원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번역본에서는 '반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단테가 지구를 '구'로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력'도 알고 있었다. 지구 중심부에 루키페르가 있고, 루키페르를 사다리 삼아 반대편으로 나왔다는 것도 '구'를 전제하면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다.

 

문제는 "여기는 아침이지만 저쪽은 저녁이야" 이다. 위의 지도처럼 위쪽을 북반구(Emisperio Boreale), 아래쪽을 남반구(Emisperio Australe)로 표기하면 북(지옥)에서 남(연옥)으로의 이동은 위도의 이동이기 때문에 해가 뜨고 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베르길리우스가 말한 대로 "여기는 아침이지만 저쪽은 저녁이야"가 되려면 여기는 서쪽(연옥)이지만 저기는 동쪽(지옥)이기 때문에  자오선이 바뀐 것이고 따라서 태양이 순간적으로 이동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으로 갈 때 시차를 겪는 것처럼 말이다.

 

 

 

 

 

 

 

 

 

 

 

 

도대체 단테는 세계를 어떤 모양으로 인식했던 것일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유행했던 시기이니 희랍의 자연과학적 성과 역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일까?  얕은 상식으로 짜맞추어 보려니 머리가 깨질 것 같다. ;;

 

 

 

*추기 : 검색을 하다 보니, 중세에 이미 대지를 구형이라고 생각했다는 글들이 있다. 얼마만큼 신뢰성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TO지도가 형이상학적 지도인 반면 그 시대에도 구형에 대한 자연과학적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 지도 세계관 - 마파 문디 Mapp..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과학과 종교, 적인가 동지인가> | 연합뉴스 (yna.co.kr)

 

 

 

 

 

 

 

1곡

 

 

 

 

이제 나는 인간 영혼이 정화되고

천국에 오를 준비를 하는

이 두 번째 왕국을 노래하려 한다. (4~6)

 

 

 

 

 

 

 

 

 

성경에는 천국과 지옥만 있다고 한다. 연옥은 12세기 후반에 등장한 중세 최고의 '발명품' 이다.  왜 중세의 황금기에 연옥이 필요해 졌을까?

 

 

 

 

 

 

 

 

 

 

9~11세기에 걸친 노르만의 이동이 끝난 이후 중세 봉건제가 정착되고, 장원이 발달하고,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원거리 무역이 활발해 지면서, 중세는 어둠에서 빠져나와 눈부신 황금기를 맞게 된다. 중세를 암흑기라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시기가 바로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고중세, High Middle  Age이다.

 

 

 

 

 

 

 

 

 

12세기에 유행한 빛의 건축 고딕 성당들과,

 

 

 

 

 

 

 

 

지금까지도 그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대학들의 탄생,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여 발전시킨 스콜라 철학 등 '중세의 위대한 유산'이

쏟아지던 시기였다.

 

 

 

 

 

 

 

 

그리고 원거리 무역과 금융업 등으로 부를 쌓은 신흥 상공업자가 있었다.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서 부자는 천국에 가기가 힘들다. 특히 이자 대부업과 같은 금융업자는 단연코 지옥행이다.

 

전통 토지 귀족들과 권력을 다툴 만큼 성장했던 신흥 상공업자들은 부자지만 천국에 가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인문 고전 강의>

 

 

 

 

 

 

 

 

 

연옥은 아우구스티누스 때부터 꾸준히 그 가능성이 탐색되어 왔지만 사회·경제· 종교적 변화를 바탕으로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사이에 대중화 되며 사실상 '탄생' 했다.  

 

 

 

 

 

 

 

연옥은 가능성과 희망의 중간 지대다.  죄를 씻어낼 한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연옥은 사면이 가능한 가벼운 죄뿐만 아니라 고백하고 뉘우쳤으나 참회할 시간이 없었던 죄를 씻는 곳이다.  

 

 

 

 

 

 

 

 

 

연옥은 공간적 의미와 동시에 시간적 의미를 갖는다. 연옥의 영혼들은 가능한 빨리 죄를 씻고 천국에 오르려 한다.  천국과 지옥은 무시간의 영원이지만, 연옥은 잠깐 머무르는 시간성을 갖고 있다.

 

 

 

 

 

 

 

정죄의 시간을 단축해 주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도, 즉 대도이다. 피렌체를 비롯해 이탈리아 도시들의 르네상스 문화에는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한 성당 건립과 예배당의 제단화 등이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연옥에 있는 친지들의 죄를 빨리 씻어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인문 고전 강의>

 

 

 

 

대도의 정점은 아마도 16세기 교황청의 면벌부 판매일 것이다. 면벌부를 정조준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연옥을 그저 지어낸 제 3의 거처일 뿐이라 격렬히 비판하였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기도로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개신교는 연옥을 인정하지 않는다. (않지요?^^;;)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sootax.co.kr)>

 

 

 

 

 

막 대중화되던 연옥을 널리 퍼뜨린 것은 단연 단테의 『신곡』이다. 막연한 이미지로 유포되던 연옥을 가장 숭고하고 가장 고귀하게 표현함으로써, 구원을 갈망하는 중세인들에게 커다란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다. 단테가 의도한 대로 Comedia, 기쁜 소식이 된 것이다.

 

 

 

 

 

 

 

 

 

 

 

 

 

부와 천국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든 연옥은 서구 기독교 세계가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정신적 계기를 마련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2곡

 

 

 

하늘의 뱃사공은 고물에 서 있었는데,

몸에 축복이 새겨져 있는 듯 보였다.

수백의 영혼들이 배 안에 앉아 있었다. (43~45)

 

 

 

단테는 지옥을 관통하여 연옥에 왔지만,  죽은자들의 영혼들은 모두 천사가 인도하는 배를 타고 연옥의 해안에 당도한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지옥편 34곡에서 좁은 틈새를 통해 지상으로 나오며, 연옥편 1곡에서는 연옥의 입구를 지키는 한 노인을 만나 그의 지시대로 해안가로 내려와 겸손을 상징하는 갈대를 꺾어 단테의 허리에 띠를 맨다.

 

이렇게 해안가에서 단테는 다른 영혼들과 함께 연옥의 순례를 시작한다.

 

 

 

 

 

 

 

 

 

3곡

 

 

 

성스러운 교회를 능멸하다 죽은 사람은

삶의 끝에서 회개한다고 해도

오만하게 보내 시간의 삼십 배를

 

이 절벽 밖에서 떠돌며 머물러야 하오.  (136~139)

 

 

 

연옥은 바다 한가운데에 불쑥 솟은 산의 형상이다. 연옥으로 들어가기 위해 순례자는 산기슭으로 향한다. 가파르게 서 있는 절벽들 밖에는 연옥으로 오르지 못하는 영혼들이 떠돌고 있다.

 

 

 

 

 

 

 

4곡

 

 

 

험준한 벼랑들이 양쪽에서 우리를 죄었고

아래의 바닥은 우리의 손과 발을 모두 원했다. (32~33)

 

 

 

 <연옥의 해안가에서 가파르게 솟아 있는 절벽을 연상시키는 이탈리아 친퀘 테레>

 

 

 

 

절벽을 힘겹게 기어오르다 보니 바위 뒤 그늘 속에 숨어 게으름을 피우는 영혼들이 있다. 절벽이 얼마나 힘겨운지 4곡에서 8곡까지가 절벽을 오르며 겪는 일들이다.

 

4곡에는 태양의 위치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태양이 왼쪽에서 빛나고 있었다."  연옥에 도착한 것은 해가 뜰 무렵이었으므로 말하는 시점은 오전이다. 북반구에서 동쪽은 오른쪽인 반면, 남반구에서 동쪽은 왼쪽이다. 연옥이 남반구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을 근거로 사람들은 연옥을 남반구로 그린 것일까?  

 

 

 

 

 

 

 

 

 

5곡

 

 

 

나에 대한 당신의 너그러움이 파노에 전해져서,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여

내 죄가 곧 씻기도록 해 주시오. (70~72)

 

 

절벽을 기어오르던 영혼들이 단테에게 그림자가 생기는 것을 보고 떼를 지어 몰려온다.  단테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때, 자신들의 친지들에게 소식을 전하여 대도를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이다.  5곡에 이어 6곡 초반에 걸쳐 많은 영혼들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간곡히 부탁한다.

 

 

 

 

 

 

 

연옥이 대중에게 미친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기도보다 더 효과가 크다고 믿어졌던 면벌부가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도 알 만하다. 루터가 면벌부 판매를 강력하게 비난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면벌부를 기쁘게 샀다고 하는 강의도 들은 적이 있다. 돈이 땡그랑 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천국이 열린다면 누가 돈을 아끼겠는가.

 

 

 

 

 

 

 

6곡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빛이신 선생님!

선생님은 어디선가 분명 기도가

하늘의 율법을 꺾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쉼 없이 제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것은 저들의 쓸데없는 망상이 아닌지요? 혹시

제가 선생님 말씀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지요?"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맞다. 그러나

건전한 정신으로 잘 생각해 보면

저들의 희망도 헛된 것이 아니란다.

 

여기에 체류하는 자가 채워야 할 것을

사랑의 불이 어느 순간 완성시켜 준다고 해서

심판의 꼭대기가 구부러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목에서 내가 바로 그 점을 확실히 했는데,

죄는 기도로 씻을 수 없단다.

기도가 하느님께 닿지 않기 때문이야. (28~42)

 

 

연옥과 구원에 대한 논란을 드러낸 걸까? 연옥은 프로테스탄트들이 거부하기 이전에도 여러 이단 종파들에 의해 부인되었다.  가톨릭이 연옥을 공식화한 이유 중에는 이단에 대한 탄압도 있다고 한다. 단테 시대는 연옥이 막 대중화 되기 시작할 무렵이라 다양한 의견이 있었을 것이다. 옮긴이 주에도 '논쟁을 일으키는 대목'이란 설명이 있다.

 

 

 

 

아, 비천한 이탈리아여, 고통스러운 곳이여,

사공도 없이 폭풍우에 휩쓸린 배여,

부패와 싸움으로 젖은 곳이여, (76~78)

 

 

지옥에서도 늘 현실 정치를 비판했 듯이, 단테는 연옥에서도 피렌체와 이탈리아를 염려한다. 『신곡』이 사후 세계의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사후 세계를 빌려 현실의 이탈리아를 반성하고 있다는 평은 서사시 곳곳에서 입증된다.

 

 

 

 

 

 

7곡

 

 

 

밤의 어둠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우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이 어둠이 우리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어 버리지요. (55~57)

 

 

연옥은 빛과 함께 올라야 한다. 밤이 되면 영혼들은 한 발자국도 넘어 갈 수 없다. 어둠이 의지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휴식 속에 노래를 부르는 영혼들을 보여주며 단테는 이탈리아와 독일 등 당대 유럽의 정치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8곡

 

 

 

소르델로가 말했다. "저 두 천사는 이 계곡에 있는

뱀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려고 마리아의 품에서

왔지요. 뱀이 곧 올 테니 보게 될 겁니다." (37~39)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한 그 뱀이다. 밤에 의지가 약해지는 것은 뱀의 유혹 때문일 것이다. 허약한 인간들의 의지를 지켜주기 위해 천국에서 천사 둘이 내려와 불침번을 선다.

 

 

 

 

 

 

 

1곡에서 8곡까지는 연옥의 문에 도달하기 위해 해안가에서 산기슭으로 향하여 가파른 절벽을 오르는 긴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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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공부하기 참 힘들뿐 아니라 위험한 것이 철학이다.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마음대로 읽어 버리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재미가 있어서 이런 저런 책들을 계속 읽어 왔다.


어쩌면 내 철학의 첫 실마리는 <씨네21>이었던 듯도 하다. 그때는 멋진 영화평에 꽤 빠져 있었고,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인문학에 아무런 지식이 없었던 터라 영화평이 단순히 글솜씨인 줄 알았다. 그런데 평소에 듣도 못한 사람들과 용어들이 나오는 평론들을 읽으며, 필요한 것은 글재주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점을 만들어 주는 가치관, 이를 뒷받침 할 철학 따위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 유행하던 들뢰즈, 가타리, 지젝, 바디우 등을 알게 되었고 무턱대고 읽었다.  들뢰즈를 읽다 보면 니체를, 지젝을 읽다 보면 헤겔과 라캉을 읽어야 하고 그런 식으로 철학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철학은 합의된 학문이 아니라 서로 뚜렷이 다른 가치를 주장하는 답 없는 질문인 것도 같고, 그러면서도 어딘가에 진리가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영원한 꿈인 것도 같았다. 


철학사를 읽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철학의 에스프레소』, 『세계 철학사』 같은 책들을 읽으며 어렴풋이 철학의 계보와 사조같은 것들을 머릿속에 그리게 되었다.  


강유원의 고전 강의 시리즈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처음으로 사상의 흐름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무료로 공개한 강의 파일은 그 걸쭉한 입담 덕에 지루할 틈도 없이 어려운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거리의 철학자'라는 별명답게 거리의 독자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세상의 모든 철학』을 교재로 한 철학사 강의는 철학적 사유가 흘러온 맥락에 더하여 철학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늘 철학사를 통해서만 읽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직접 읽어 볼 용기가 생겼다. 플라톤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쉽지도 않았지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읽어 낼 수는 있었다.  후대의 책들에서 만난 플라톤과 내가 읽은 플라톤이 많이 다르고, 그때마다 내가 잘못 읽었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거스 리의 『희랍철학 입문』은 몇몇 책에서 인용되는 것을 보았다. 올해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조금 꼼꼼이 읽어 볼 계획이라 아무래도 먼저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이 책은 거스 리가 "고전 이외의 과목을 공부하는 학부 수강생을 위한 단기 과정의 강의를 토대로" 썼다.  나같은 일반인에게 적절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목표는 훌륭히 달성되었다. 200쪽 정도의 길지 않은 분량에,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부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희랍 철학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 흐름을 가지고 변화했는지 어렵지 않게 설명하고 있다. 희랍의 주요 철학자들을 맥락에 따라 요약하고 있어 입문서로 읽기에는 매우 절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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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곡

 

 

 

 

 

 

 

 

 

 

지옥의 여덟 번째 고리인 말레볼제를 떠나 마지막 고리인 아홉 번째, 코키토스를 향한다.  말레볼제와 코키토스는 둘 다 배반의 지옥이다. 말레볼제는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반, 코키토스는 자기를 믿는 사람에 대한 배반을 징벌하는 곳이다.

 

우리는 양심을 찢어지게 하는 배반의 죄를

자기를 믿어 주는 사람에게나

조금도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저지를 수 있지. (11곡 52~54)

 

 

 

 

 

 

 

 

 

12세기~13세기,  어지러운 정쟁의 한가운데에서 희생 당한 단테는 무엇보다 배반과 배신을 극도로 혐오하였던 듯하다.  지옥 순례 내내 죄인을 바라보는 단테의 눈은 연민과 비애에 젖어 있지만, 당대의 황제파와 교황파의 대립과 관련한 정쟁에 대해서만은 냉담했다. 정쟁을 한층 더 역겹고 피비린내 나게 만든 것은 적과의 결탁, 동지의 배신 따위다. 

 

 

 

 

 

  <몬테레지온 성>

 

 

 

 

단테는 지옥을 묘사하면서 당시의 이탈리아 풍광에 빗대어 표현하기를 즐긴다. 읽기보다는 낭송을 염두에 둔 서사시로 듣는 사람들이 생생하게 지옥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익숙한 경치를 빌려왔던 것 같다.

 

아홉 번째 고리는 지옥의 강들인 아케론, 스틱스, 플레게톤의 강물이 마지막으로 모이는 거대한 웅덩이 코키토스이다(14곡 115~120). 코키토스는 멀리서 보면 거대한 탑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인다. 14 개의 탑으로 둥글게 에워싸인 시에나 북부의 몬테레지온(31곡40) 성처럼 말이다.

 

코키토스의 탑은 거인들이다. 희랍 신화의 기간테스들과 성서의 니므롯 같이 힘세고 거대한 존재가 상반신을 탑처럼 드러내고 우뚝 서있다. 베르길리우스는 거인 안타이오스에게 '추위가 코키토스를 얼리는 곳(31곡122)'으로 내려 보내 줄 것을 부탁한다.

 

 

 

 

 

 

 

 

 

32곡

 

 

 

 

 

 

 

 

 

 

 

 

코키토스를 처음 본 단테는 '지옥의 모든 바위들이 내리누르고 있는 저 슬픈 구멍(1~2)', '우주의 중심 바닥(7)', '칠흙같이 깜깜한 웅덩이(17)'라고 묘사한다.

 

 

이 웅덩이는 큰산이 떨어져도 깨지지 않을 것 같이 두껍게 얼어 붙어 있다. 얼음에 갇힌 영혼들은 갖가지 배신을 저지른 자들이다.

 

 

 

 

 

 

 

 

 

 

어떤 대상을 배신했는가에 따라 코키토스는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말레볼제처럼 아래로 내려가면서 별개의 구렁으로 구획된 것은 아니고. 얼어붙은 웅덩이의 가장  자리에서 중심부까지 동심원을 그리면서 나뉘어진 것처럼 보인다.

 

맨 바깥의 카이나(32곡58)는 친척을, 그 다음 안테노라(32곡89)는 국가를, 안쪽으로 프톨레매오(33곡124)는 손님(친구)을, 한가운데 주데카(34곡116)는 주군(은혜)을 배신한 영혼들이 얼어 붙은 곳이다.

 

코키토를 얼리는 바람은 중력의 중심, 타락 천사 루키페르의 날개짓에서 나온다.

 

 

 

 

 

 

 

 

 

33곡

 

 

 

 

 

 

 

 

두 번째 구역 안테노라(32곡89)에는 우골리노 백작과 루지에리 대주교가 있다. 우골리노 백작은 스스로를 반역자라고 부르는데, 기벨리니를 배반하고 궬피를 도와 피사의 궬피 정권을 장악했다. 루지에리는 이런 우골리노와 손잡았으나 우골리노를 배반하고 그를 아들 손자와 함께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 

 

 

 

 

 

 

 

 

 

당시 이탈리아 도시들의 황권과 교권이 뒤섞인 어지러운 정치 투쟁과 분열상을 보여준다.

 

 

 

 

 

 

 

 

세 번째 구역 프톨레매오(124)에는 산 사람들의 영혼이 있다.

 

내가 그랬듯, 영혼이 제 육신을 배반할 때,

그 육신은 마귀가 빼앗아 가고

그 이후로 남은 시간은 남김 없이

마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오. (129~132)

 

지상에서 분명 살아 움직이는데, 그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마귀의 것이다. 얼마전 방영된 <경이로운 소문>의 악귀와 같다. 다만 이 드라마에서는 악귀를 소환하고 나면 영혼이 돌아오지만, 프톨레매오에 떨어진 영혼은 육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지옥의 문을 지나온 자는 영원의 고통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소문>에는 지옥의 제 5고리 스틱스의 늪에 떨어진 것 같은 악귀들도 나온다. 소환된 악귀는 진흙탕 속으로 떨어지는데, 사방에서 기어나온 악귀들이 갈갈이 찢어 발길듯 덮쳐 버린다. 

 

 

 

 

 

 

 

 

 

 

 

 

 

34곡

 

 

 

 

 

 

 

 

 

 

 

아홉 번째 고리의 네 번째 구역은 주데카이다(116). 망령들이 떼를 지어 얼음에 갇혀 있는 그 한가운데에 '고통스러운 왕국의 황제(28)', 루키페르(88)가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루키페르를 디스(20)라고 불렀다. 지옥의 제5 고리와 제6 고리 사이를 갈라 놓았던 디스 성벽의 핵심부, 디스가 타락 천사 루키페르이었던 것이다.

 

 

 

 

 

 

 

 

 

하늘에서 아름다웠던 만큼이나 추해진 모습으로 박쥐의 날개를 달고 바람을 일으켜 코키토스 구석구석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

 

 

 

 

 

 

 

 

 

루키페르의 세 개의 입에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 카이사르를 살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각각 몸이 찢어 발기는 고통을 겪고 있다.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128)'로도 불리는 루키페르, 그 악의 거대함을 맞닥뜨린 순례자는 아무 말없이 떠난다. 지옥을 벗어날 시간이다.

 

 

 

 

 

 

 

 

 

 

 

중력의 중심에 있는 루키페르의 다리를 타고 내려와 남반구로 나있는 좁고 긴 틈새를 빠져 나온다.

 

루키페르는 하늘에서  머리를 처박으며 지구의 남반구로 떨어졌고, 이때 남반구의 땅이 북반구로 옮겨 가고, 남반구는 바다가 되었다. 다만 연옥의 산만이 남반구에 우뚝 솟은 채 남아 있고 지구의 중심까지 순례자가 빠져나온 긴 틈이 생겨났던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둥글게 열린 틈을  통해

하늘이 실어 나르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고,

그렇게 해서 밖으로 나와 별들을 다시 보았다. (137~139)

 

 

 

 

 

 

 

 

 

 

 

 

어두운 숲에서 시작한 34곡에 걸친 지옥의 순례는 끝이 났다. 지옥의 9개의 고리에서 단죄 받고 있는 영혼들은 처음 단테의 길을 막아 섰던 어두운 숲의 세 마리 짐승들에 굴복한 인간들의 모습일 듯하다.

 

 

 

 

 

 

 

 

 

 

갖가지 죄들로 나뉘어 있지만 결국 애욕과 탐욕과 교만에 빠져 어떤 숲속에 들어와 있는 지도 모른 채 욕망을 쫓던 사람들의 영원한 종착지가 지옥의 아홉 개의 고리이다. 베르길리우스가 없었고, 베아트리체가 없었고, 성모 마리아가 없었다면 죽은 영혼으로 떨어져야 했을 지옥을 단테는 살아서 순례했다.

 

순례자 단테가 아니라 시인 단테에게는 『신곡』 쓰기가 그의 순례였고, 우리에게는 『신곡』 읽기가 우리의 순례였다. 『신곡』은 단테 이후의 인간들에게 살아서 지옥을 순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단테의 순례가 공포와 혐오에 못지 않게 연민과 비애로 가득했던 것은 욕망에 쫒기며 사는 우리 누구나 그 지옥 속의 영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순례도 그렇다. 문득 문득 그 고통과 비명 속에 내가 있음을 알았다.

 

지옥의 문은 되돌아 나갈 수는 없지만, 단테와 함께한 우리는 이미 지구의 반대편에 도달했으니, 깊은 숨을 내어 쉬고, 정죄의 산을 오를 준비를 하자. 미노스의 심판을 받기 까지는 시간이 조금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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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신곡 강의를 들었던 분이 매일 자기전 아이들에게 한 곡씩 읽어 주겠다며 책을 샀다. 물론 아이들은 질겁을 했고, 그 계획은 실패했다.  <지옥편>은 읽을수록 잔혹해 진다. 그렇다고 몸서리치는 형벌에 비명만 난무하는 것은 아니다. 단테의 눈에는 애잔함이 얼핏얼핏 스친다.

 

18곡부터 30곡까지가 지옥의 제 8고리, 말레볼제이다. 오늘은 말레볼제의 열 구렁을 다 돌 수 있다.

 

 

 

 

 

 

 

 

 

 

 

 

24곡

 

 

 

여섯 번째 다리가 무너졌다. 순례자는 깨진 돌조각을 골라 디디며 여섯 번째 구렁을 가로질러 일곱 번째 둔덕으로 내려갔다.

 

일곱 번째 구렁(81)은 도둑들(138)의 소굴, 뱀굴(83)이다.

 

 

 

 

 

 

 

25곡

 

 

 

수많은 변신의 이야기가 있다 해도, 도둑들의 망령과 뱀이 합체하는 변신만큼 끔찍하고 경악스러운 변신이 또 있을까?  단테는 이렇게 노래한다.

 

오비디우스여! 카드모스와 아레투사에 대해 떠들지 마라.

그 남자를 뱀으로, 그 여자를 샘으로 바꾸는

절묘한 시를 지었어도 난 부럽지 않다.

 

그들의 두 존재는 서로 형상만 바뀌었을 뿐

두 형상의 질료까지 바꿀 정도로

변신하지는 않았으니,

 

내가 본 것은 완벽한 변신이었다.  (97~103)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전설 중에서 변신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도 나온다. 별의별 변신이 다 있는데, 단테는 자신의 변신 이야기는 그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뽐내는 것 같다. 겉모습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질료 즉 일종의 재료까지 변한다는 것. 이 완벽한 변신을 읽다 보면 살갗이 닭살로 변신한 듯 소름이 돋는다.

 

 

 

 

 

 

26곡

 

 

 

 

 

여덟 번째 구렁(31)은 불구덩이다. 영혼들이 불꽃(48)으로 타오르고 있다. 단테는 떨어질 듯 몸을 기울여 간절히 어떤 불꽃을 기원한다.

 

"저 불꽃 속에서도 저들이 말할 수 있다면,

선생님! 원하고 또 원하며 

수천 번을 거듭 원합니다.

 

뿔 돚힌 불꽃이 여기에 닿을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이 소원 때문에

이렇게 몸을 기울이고 있는 저를 봐 주세요." (64~69)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오뒷세우스는 살아서 저승에 간다. 키르케가 무사히 귀향하기 위해서 먼저 저승의 테이레시아스를 찾아가 예언을 받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서양 서사시의 '저승 순례' 전통(?)은 오뒷세우스가 처음이다.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에서 아이네아스가 이어 받았고, 그다음이 단테다.  세계 문학의 역사에서는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가 그 이전에 있었다.

 

 

 

 

  <기원전 6세기. 흑상 도기>

 

 

 

단테가 그토록 만나기를 원하는 오디세우스가 말레볼제의 여덟 번째 구렁, 불구덩에 떨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목마의 기습(60)', 아킬레우스에 대한 술수(61), 팔라디움의 벌(63) 때문이다. 꾀가 많은 오뒷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다 썼다.  어머니 테티스 여신이 여장을 시켜 숨겨 놓은 아킬레우스를 찾아내 전쟁에 데려갔고, 트로이 성의 아테나 여신상을 훔쳐내어 그 수호신을 무력화 했고,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를 함락하였다. 여덟 번째 구렁은 권모술수와 기만에 능했던 자들이 스스로를 태우는 지옥이다.

 

 

 

 

  가상으로 그려본 <오뒷세이아>의 오뒷세우스 모험 지도

 

 

 

지옥에 떨어진 오디세우스를 단테가 '수천 번을 거듭 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디세우스가 '어디를 헤매다 죽었는지' 듣고 싶어서다.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가 귀향하여 자식과 아내와 아버지를 되찾는 행복한 결말을 노래했다. 

 

단테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대한 새로운 버전을 들려 준다. 키르케의 조언으로 오뒷세우스가 다녀 왔던 저승을 많은 사람들이 지중해의 서쪽 끝, 지브롤터 해협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단테는 키르케를 떠난 오디세우스가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연옥으로 항해했다고 노래한다. 중세에 지브롤터 해협은 세상의 끝이었다.

 

 

"아이네아스가 가에타라고 부르기 전,

태양신의 딸 키르케는 날 일 년도 더 넘게

숨겨 주었지요. 그녀를 떠났을 때

 

내 자식의 귀여움도, 늙은 아버지의

연민도, 또 내 아내 페넬로페를 당연히 기쁘게

해 주었어야 할 나의 신실한 사랑도,

 

세상과 인간의 악과 가치에 대해

모조리 알고 싶은 내 가슴속의

열정을 이겨 낼 수 없었소.

 

그래서 나는 오직 한 척의 배에 의지해

늘 나와 함께했던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깊고 넓은 바다로 나왔소.

 

멀리 에스파냐와 모로코까지 이쪽 해안과

저쪽 해안을 보았고, 이 바다에 몸을 적시는

샤르데냐와 다른 섬들도 보았소.

 

나와 동료들은 늙어 갔고 몸도 둔해졌다오.

그 무렵 우리는 그 누구도 넘어가지 못하도록

헤라클레스가 표지를 꽂아 둔

 

비좁은 어귀에 도착했소.

오른쪽으로는 세비야를 떠난 뒤였고

반대쪽으로는 세타를 떠난 뒤였소.

 

나는 이렇게 말했다오. '오, 형제들이여!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드디어 우린 세상의 서쪽 끝에

다다랐다. 우리에게 생명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태양의 뒤를 좇아 사람이 살지 않는

세상을 찾아가려는 마음을 버리지 마라!

 

그대들의 혈통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혜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다.'

 

그 짧은 연설에 동료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에 불타

나중에는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오.

 

선미를 아침에 두고 우리는

미친 듯 파닥거리는 날개처럼 노를 저어서

계속 왼쪽으로 왼쪽으로 항해했소.

 

밤에는 다른 극의 모든 별들이

보였소. 우리 극의 별들은 낮게 내려와

바다의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소.

 

우리가 그 무모한 모험을 시작한 뒤

달 아래의 빛이 다섯 번이나

켜졌다가 다시 꺼졌을 무렵,

 

산 하나가 멀리 희미하게 나타났는데,

어찌나 높이 솟았던지

그런 산을 본 적이 없었소.

 

우리는 기뻤소. 그러나 기쁨은 금방 통곡으로

바뀌었다오. 그 낯선 땅에서 풍랑이 일어나

뱃머리를 들이받았기 때문이오.

 

풍랑은 우리 배를 바닷물과 함께 세 바퀴를 돌게 했다오.

네 바퀴째에 선미가 높이 솟아오르더니 뱃머리에서 떨어져,

마침내 바다가 우리 위로 덮쳐 왔소.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대로였다오."  (91~142)

 

단테의 오디세우스는 귀향이 아니라 세상 너머로 나아가려는 열정을 택한다. 인간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혜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이 금지한 세상 밖을 향한 열망은 파멸로 끝이 났다. 절정의 순간에 파도에 들려진 배는 높이 솟아 올랐다가 떨어지고, 바다가 덮친다.

 

 

 

 

 

 

19세기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이 그대로 떠오른다. 에이해브 선장은 광기어린 집념으로 모비딕을 쫓았고, 마침내 모비 딕의 눈구멍에 작살을 꽂았지만, 모비딕에 들이받힌 피쿼드호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가라앉는다. 하느님이 원하신 것일까?

 

 

 

 

  <보르헤스>

 

 

 

보르헤스는 『칠일밤』에서 오디세우스가 지옥에 떨어진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절정의 순간은 금지되고 불가능한 것을 알고자 하는, 고결하면서도 대담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에게 절정의 순간은 트로이의 목마가 아니라 남반구의 탐험이 성공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신에 의해 금지된 순간이다.

 

단테는 왜 그토록 오디세우스를 원하고 또 원했을까? 보르헤스에 따르면 단테는 신의 영역에 도전한 오디세우스를 자기와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단테는 역설적이게도 『신곡』을 통하여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그것을 단테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율리시스란 인물은 그토록 힘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리시스는 단테의 거울이고, 단테는 아마도 자기 역시 그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꼈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좋든 나쁘든 시를 쓰면서 그는 밤의 법칙, 즉 하느님과 신성의 신비로운 법칙을 위반하고 있었습니다."

 

 

보르헤스는 『신곡』에서 율리시스의 일화가 단테가 만든 가장 멋진 전설이라고 한다.  단테가 오디세우스에게서 자신을 보듯, 보르헤스는 단테에게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짐승과 신 사이에 인간이 있다면, 인간이 신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하다. 신이 금지했다고 하더라도.

 

 

 

 

 

 

 

 

 

 

 

27곡

 

 

 

여덟 번째 구렁에서 다른 불타는 영혼들과도 대화를 나눈 순례자는 둔덕을 올라 또 다른 다리(134) 위에 도착한다.  보나파키우스8세에 대한 단테의 적의는 여기서도 드러난다.

 

 

 

 

 

 

 

 

28곡

 

 

아홉 번째 구렁(20)은 불화와 분열의 씨를 뿌린 자들(35)을 단죄하고 있다. 칼을 든 마귀가 몸을 찢어 가른다. 구렁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상처받은 몸이 아무는데, 이 몸은 다시 마귀가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37~42)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 4대 칼리프 알리, 카이사르에게 루비콘강을 건너게 설득한 호민관 쿠리오, 피렌체 내분의 원인 모스카, 아버지와 아들을 반목하게 한 사악한 베르트랑 등이 고통받고 있다.

 

 

 

 

 

 

 

29곡

 

 

'말레볼제의 마지막 수도원(40), 열 번째 구렁(38/119)이다. 이곳의 '수도자'들은 위조자들(57)이다.

 

상처와 그 딱지가 다닥다닥 붙은 병든 사람들(71)이 악취를 풍기며 온몸을 긁어대고 있다.  단테는 연금술사와 이야기를 나눈다.

 

 

 

 

 

 

 

30곡

 

 

 

 

 

 

 

열 번째 구렁에는 다양한 위조자들이 있다. 변장하여 아버지의 침실에 든 희랍 신화의 미라,  유서를 변조한 도나티, 위조 화폐범, 구약의 요셉을 모함하던 거짓말쟁이, 트로이 목마에 대해 거짓말을 한 시논 등이 있다.

 

위조자들은 서로 욕을 해대며 싸우고 있다. 단테는 '그들의 말에 푹 빠져 있었다.'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꾸짖는다. "계속 보다가는 내가 너랑 싸우겠구나!"  단테는 잘못을 뉘우치고 베르길리우스는 말다툼을 엿듣는 것은 천박한 일이라고 깨우쳐 준다.

 

 

 

이제 지옥의 순례도 마지막 아홉 번째 고리만 남겨두고 있다. 설 명절이 오기 전에 <지옥>편을 끝내기 위해, 우리 스타디는 이번에 조금 더 속도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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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혼돈과 재생  

 

 

 

 

 

 

 

 

제1 중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이집트를 재통일한 왕은 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이다. 중왕국은 이후 약 400년 지속된다.

 

 

 

 

 

 

 

 

 

제1 중간기의 오랜 전쟁과 통일 전쟁에 익숙했던 중왕국은 군국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다.

 

 

 

 

 

 

 

 

귀족의 무덤에서 발견된 목재 군단상은 군인들의 모습을 생생히 재현해 놓고 있다. 위쪽 붉은 색깔의 피부색은 정통 이집트인 창병이고 아래쪽 검은 피부색은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인 궁병이다. 누비아인들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유명한 용병으로 활약했고, 활쏘기에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이집트 역사에서 최초로 남쪽 제1 급류지대를 넘어 제2 급류지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에도 이집트는 계속 이 국경을 지켜 나갔다.

 

 

 

 

 

 

 

이집트 왕묘로 암굴묘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중왕국을 수립한 멘투호테프 2세는 피라미드를 포기하고 바위를 깎아 깊숙한 곳에 묘를 마련했다. 묘 뒤쪽 산의 꼭대기가 피라미드 형상을 하고 있는데, 피라미드를 건립하는 대신 피라미드 형태의 산을 배경으로 왕묘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중왕국 시대에도 피라미드가 세워지기는 하지만, 피라미드의 전성기인 고왕국 시대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암굴묘는 이후 신왕국 시대에 기본 왕묘가 되는데, 멘투호테프 2세의 왕묘 너머로 신왕국 파라오들의 암굴묘가 줄줄이 조성되면서 이른바 '왕들의 계곡'을 이루게 된다.

 

 

 

 

 

 

 

 

 

중왕국은 다양한 문화가 발전한 시기이다. 수준 높은 문학 작품들도 여러 편 전해지고, 화려한 공예품들도 많이 발견된다.

 

 

 

 

 

 

 

 

 

중왕국 시대는 초기부터 북쪽의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에서 많은 아시아인들이 이주해 들어왔다. 벽화 속 사람들이 이집트인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과 복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점차 세력을 형성하여 자신들만의 통치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을 헤카우 카세트라고 불렀는데, 그리스 식으로는 힉소스이다.

 

 

 

 

 

 

 

 

 

힉소스인들은 아비리스를 수도로 15왕조를 수립했다. 이 시기 중왕국은 급격히 쇠퇴하여 여러 왕조들이 난립하였다.  제 2 중간기가 시작된 것이다.

 

 

 

 

 

 

 

 

힉소스는 북쪽을 통일하고, 남쪽의 17왕조와 대결을 벌였다.

 

 

 

 

 

 

 

 

 

 

7강. 제국의 시대 (상)

 

 

 

 

 

 

 

 

 

제2 중간기는 남쪽의 17왕조에 의해서 재통일 되고, 신왕국이 탄생했다.

 

 

 

 

 

 

 

 

 

 

신왕국은 북쪽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집트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때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미탄니가 , 아나톨리아 고원은 히타이트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그 유명한 람세스 2세 때가 되면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의 패권을 놓고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신왕국의 파라오들은 높이 솟은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도굴을 막기 위해 계곡 깊은 곳에 무덤을 숨겼다. rock-cut tomb, 즉 바위산을 깎아 만든 암굴묘를 만들었다. '왕들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에 신왕국 파라오들의 무덤이 모여 있다.

 

 

 

 

 

 

 

 

 

이렇게 숨겨진 무덤들도 도굴을 피하지 못했다. 단 한기만 무사했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이다.  백제의 무령왕릉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신왕국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부유했던 시대다. 아멘호테프 3세 때가 전성기였다. 특별한 군사적 행동 없이도 고대 근동 세계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 아멘호테프 4세 때 이집트는 커다란 변혁을 겪었다. 세계 최초의 유일신 개혁이라 평가되는 아텐 신앙이 그것이다.  아멘호테프 4세는 이름을 아케나텐으로 바꾸고 이 개혁을 밀어붙였다.

 

 

 

 

 

 

 

 

 

태양신 아텐을 제외한 모든 신을 부정하고, 신전 폐쇄를 단행했다.  아텐신은 태양 원반과 그 광선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아텐신에 대한 제사는 오로지 파라오와 그 가족이 직접 주관했다. 

 

 

 

 

 

 

 

 

 

 

신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이집트의 경제와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강요되었고, 이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아케나텐은 수도를 옮기면서까지 유일신 개혁을 고수하고, 신왕국은 내분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8강. 제국의 시대 (하)

 

 

 

 

 

 

 

 

 

 

신왕국을 내분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던 아텐 신앙은 아케나텐이 죽자마자 급속도로 사라졌다. 아텐 신앙은 탄압되었고, 아케나텐의 흔적은 거칠게 지워졌다.

 

고대 이집트 3000여 년의 역사에서 아텐 신앙은 10~20년 정도의 짧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신교의 전통을 가진 고대 근동 사회에서 최초로 제기되었던 유일신 사상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등장했다. 실제 람세스 2세의 유물은 이집트 곳곳에, 그의 이름은  '사방 온 천지에' 널려 있다. 그만큼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고, 또 그에 못지 않게 자의식이 강했다.

 

 

 

 

 

 

 

아부 심벨에 있는 람세스 2세의 대 신전 안의 지성소인데, 최고 신들 사이에 람세스 2세가 앉아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람세스 2세이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신적인 존재 혹은 신으로 여겨지지만, 살아있는 파라오를 신으로 숭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람세스 2세를 역사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카데쉬 대전일 것이다.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의 패권을 둘러싸고 두 강대국인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전면전을 벌인, 세계 대전급 전투이다. 람세스 2세가 먼저 진격하였다.

 

 

 

 

 

 

 

 

 

이 전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쪽에 모두 기록이 남아 있다.  룩소르 신전의 탑문 부조에는 람세스 2세가 엄청난 활약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초반에 오히려 이집트가 열세에 처했다가, 결국 무승부로 끝이 나고, 이후에 평화 협정을 맺으며 완전히 종식되었다.

 

 

 

 

 

 

 

 

카데쉬 대전 이후 체결된 평화조약이 쓰여진 히타이트의 점토판이다.  최초의 평화 조약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터키 정부가 1970년에 이 점토판의 레플리카를 만들어 UN 본부에 기증하였다. 현재에도 UN 본부 로비에 걸려 있다.

 

 

 

 

 

 

 

 

 

람세스 2세의 뒤를 이은 메렌프타의 장례신전 비석은 아주 유명하다. 이스라엘이 최초로 언급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이스리아르' 즉 이스라엘이라고 표기된 부분이 반들반들 하다고 하지만, 그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별로 좋아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황폐해 졌고 그 씨가 말랐다."  메렌프타의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 원정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국가가 아니고 사람들 즉 민족 개념으로 쓰여 있다. 오른쪽 두 글자가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기원전 1200년 무렵이 되면 고대 근동 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이 혼란 이후 청동기 문명은 사라지고 암흑기를 거쳐 철기 문명이 피어나게 된다. 다양한 세력이 등장해 고대 청동기 문명 사회를 공격하는데, 그중 하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다 민족, Sea People이다. 

 

 

 

 

 

 

 

 

그런데 이집트는 이 바다 민족의 침략을 물리 쳤다.  신왕국 최후의 불꽃인 람세스 3세의 장례 신전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기원전 1177년 경의 일이다.

 

 

 

 

 

 

 

 

 

 

해양 민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이집트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부를만 한 운명을 맞게 된다.  이 시기 고대 근동 사회는 전방위적 침략을 받아 청동기 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철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동기 문명국인 이집트 신왕국은 이 침략을 굳건히 버텨내면서 철기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청동기 문명을 고수했다. 이 상황이 어떤 비극을 가져오게 될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9강. 왕조의 몰락

 

 

 

 

 

 

 

신왕국 이후 이집트는 다시 한번 분열기를 겪는다. 제 3 중간기이다.

 

 

 

 

 

 

 

 

 

분열과 혼란을 거듭하는데, 이 시기에  파라오가 구약 성서에 최초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집트와 구약 성서 양쪽에서 교차 검증이 가능한 파라오다.

 

 

 

 

 

 

 

 

열왕기 상 14장 25절~26절에 등장하는 '시삭' 왕인데, 예루살렘을 침공했다고 적혀 있다.  이집트 쪽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2천 년 이상 이집트에 탄압 받아 왔던 남쪽의 누비아인이 거꾸로 이집트를 정복하고 누비아 왕조를 세운 것이 제3 중간기의 마지막 무렵이다.  누비아인의 25왕조는 약 100년 정도 이집트를 통치했다.

 

 

 

 

 

 

 

 

 

 

 

누비아 왕조를 멸망시킨 것은 아시리아 제국이다. 아시리아는 누비아인들을 남쪽의 원래 근거지로 밀어내고, 이집트 토착 파라오를 내세워 일종의 괴뢰 정권을 수립했다.  말기 시대의 첫 왕조인 26왕조이다.

 

말기 시대는 26왕조부터 30왕조까지로, 통일되어 있다고는 하나 명목상일 뿐, 고대 근동의 강대국에 의해 이리저리 짓밟히던 시기였다. 

 

 

 

 

 

 

 

 

 

 

 

아시리아에 이어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점령했다.  페르시아의 지배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캄비세스 2세가, 나중에는 크세르 크세스 3세가 이집트를 침략했다.

 

 

 

 

 

 

 

 

 

기원전 333년 페르시아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대패하고, 고대 근동의 패권은 마케도니아 제국에 넘어갔다.

 

 

 

 

 

 

 

 

 

이집트도 마케도니아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로써 이집트 민족의 이집트 왕조는 완전히 끝이 났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드로스를 페르시아로부터의 해방자로 받아들인 측면도 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분열되고, 이집트를 장악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다. 이때부터 이집트에는 프톨레미 혹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리스인이 지배하는 헬레니즘 시대를 맞은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이집트 문화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리스 문화와 혼용되었지만, 이집트 문명의 뿌리는 여전히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 역시 이집트 파라오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혈통이 아니라 그리스 혈통이다.

 

 

 

 

 

 

 

 

 

이집트를 부강하게 지켜내고 싶었던 클레오파트라의 꿈은 악티움 해전의 패배로 끝이 났다. 로마의 카이사르에 이어 안토니우스와 손잡은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고, 기원전 30년 무렵에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로써 기원전 3100년 경에서 시작한 고대 이집트는 기원전 30년 경 긴긴 역사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집트 문화가 당장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 신이 로마 옷을 입고 있기도 하고,

 

 

 

 

 

 

 

 

 

로마 황제가 이집트 파라오의 복장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이집트 문명의 뿌리는 그만큼 단단했다.

 

 

 

 

 

 

 

 

 

 

하지만 이집트 문화도 종말을 맞게 되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 했기 때문이다.  기원후 392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금지하면서 이집트의 신들도 탄압 받기 시작했다.  

 

 

 

 

 

 

 

 

 

 

신전이 폐쇄 당했다. 신전은 이집트 문화 재생산의 원동력이었다. 신전의 폐쇄는 이집트 문화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집트 신전은 기독교의 교회로 바뀌었다.  이집트는 기독교 국가가 되어 갔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이렇게 완전히 끝이 났다. 

 

 

 

 

 

 

 

 

 

 

 

 

 

10강. 빼앗긴 역사 

 

 

 

 

약탈 문화재 이야기다. 서구에 빼앗긴 문화재가 이집트만큼 많을 수 있을까 싶다.  일본에 수없이 빼앗긴 우리 문화재가 중첩되면서 할 말이 없다.  대표적 문화재 사진만 올려 둔다.

 

야만 그 자체인 제국주의적 침략을 저지르면서도, 문명인이 야만인을 계도한다는 식의 명분을 가져다 붙인 서구 국가들은 지금까지 조금도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약탈 문화재 반환 요구에 대한 서양 열강의 한결 같은 대답은 그 문화재를 보존할 능력이 이집트에는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문명인이 야만인을 바라보듯 이집트를 능멸하고 있다.

 

 

 

 

 

1. 이집트 문명의 열쇠, 로제타 스톤 :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2. 아마르나 시대 미술의 정수, 네페르티티 :  독일  

 

 

 

 

 

 

 

 

 

3. 이집트 천문학의 미학, 덴데라 황도대 : 프랑스

 

 

 

 

 

 

 

 

 

4. 이집트 문자 해독의 단초,  이시스 신전의 오벨리스크 : 영국 귀족의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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