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혼돈과 재생  

 

 

 

 

 

 

 

 

제1 중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이집트를 재통일한 왕은 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이다. 중왕국은 이후 약 400년 지속된다.

 

 

 

 

 

 

 

 

 

제1 중간기의 오랜 전쟁과 통일 전쟁에 익숙했던 중왕국은 군국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다.

 

 

 

 

 

 

 

 

귀족의 무덤에서 발견된 목재 군단상은 군인들의 모습을 생생히 재현해 놓고 있다. 위쪽 붉은 색깔의 피부색은 정통 이집트인 창병이고 아래쪽 검은 피부색은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인 궁병이다. 누비아인들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유명한 용병으로 활약했고, 활쏘기에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이집트 역사에서 최초로 남쪽 제1 급류지대를 넘어 제2 급류지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에도 이집트는 계속 이 국경을 지켜 나갔다.

 

 

 

 

 

 

 

이집트 왕묘로 암굴묘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중왕국을 수립한 멘투호테프 2세는 피라미드를 포기하고 바위를 깎아 깊숙한 곳에 묘를 마련했다. 묘 뒤쪽 산의 꼭대기가 피라미드 형상을 하고 있는데, 피라미드를 건립하는 대신 피라미드 형태의 산을 배경으로 왕묘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중왕국 시대에도 피라미드가 세워지기는 하지만, 피라미드의 전성기인 고왕국 시대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암굴묘는 이후 신왕국 시대에 기본 왕묘가 되는데, 멘투호테프 2세의 왕묘 너머로 신왕국 파라오들의 암굴묘가 줄줄이 조성되면서 이른바 '왕들의 계곡'을 이루게 된다.

 

 

 

 

 

 

 

 

 

중왕국은 다양한 문화가 발전한 시기이다. 수준 높은 문학 작품들도 여러 편 전해지고, 화려한 공예품들도 많이 발견된다.

 

 

 

 

 

 

 

 

 

중왕국 시대는 초기부터 북쪽의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에서 많은 아시아인들이 이주해 들어왔다. 벽화 속 사람들이 이집트인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과 복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점차 세력을 형성하여 자신들만의 통치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을 헤카우 카세트라고 불렀는데, 그리스 식으로는 힉소스이다.

 

 

 

 

 

 

 

 

 

힉소스인들은 아비리스를 수도로 15왕조를 수립했다. 이 시기 중왕국은 급격히 쇠퇴하여 여러 왕조들이 난립하였다.  제 2 중간기가 시작된 것이다.

 

 

 

 

 

 

 

 

힉소스는 북쪽을 통일하고, 남쪽의 17왕조와 대결을 벌였다.

 

 

 

 

 

 

 

 

 

 

7강. 제국의 시대 (상)

 

 

 

 

 

 

 

 

 

제2 중간기는 남쪽의 17왕조에 의해서 재통일 되고, 신왕국이 탄생했다.

 

 

 

 

 

 

 

 

 

 

신왕국은 북쪽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집트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때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미탄니가 , 아나톨리아 고원은 히타이트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그 유명한 람세스 2세 때가 되면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의 패권을 놓고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신왕국의 파라오들은 높이 솟은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도굴을 막기 위해 계곡 깊은 곳에 무덤을 숨겼다. rock-cut tomb, 즉 바위산을 깎아 만든 암굴묘를 만들었다. '왕들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에 신왕국 파라오들의 무덤이 모여 있다.

 

 

 

 

 

 

 

 

 

이렇게 숨겨진 무덤들도 도굴을 피하지 못했다. 단 한기만 무사했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이다.  백제의 무령왕릉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신왕국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부유했던 시대다. 아멘호테프 3세 때가 전성기였다. 특별한 군사적 행동 없이도 고대 근동 세계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 아멘호테프 4세 때 이집트는 커다란 변혁을 겪었다. 세계 최초의 유일신 개혁이라 평가되는 아텐 신앙이 그것이다.  아멘호테프 4세는 이름을 아케나텐으로 바꾸고 이 개혁을 밀어붙였다.

 

 

 

 

 

 

 

 

 

태양신 아텐을 제외한 모든 신을 부정하고, 신전 폐쇄를 단행했다.  아텐신은 태양 원반과 그 광선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아텐신에 대한 제사는 오로지 파라오와 그 가족이 직접 주관했다. 

 

 

 

 

 

 

 

 

 

 

신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이집트의 경제와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강요되었고, 이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아케나텐은 수도를 옮기면서까지 유일신 개혁을 고수하고, 신왕국은 내분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8강. 제국의 시대 (하)

 

 

 

 

 

 

 

 

 

 

신왕국을 내분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던 아텐 신앙은 아케나텐이 죽자마자 급속도로 사라졌다. 아텐 신앙은 탄압되었고, 아케나텐의 흔적은 거칠게 지워졌다.

 

고대 이집트 3000여 년의 역사에서 아텐 신앙은 10~20년 정도의 짧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신교의 전통을 가진 고대 근동 사회에서 최초로 제기되었던 유일신 사상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등장했다. 실제 람세스 2세의 유물은 이집트 곳곳에, 그의 이름은  '사방 온 천지에' 널려 있다. 그만큼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고, 또 그에 못지 않게 자의식이 강했다.

 

 

 

 

 

 

 

아부 심벨에 있는 람세스 2세의 대 신전 안의 지성소인데, 최고 신들 사이에 람세스 2세가 앉아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람세스 2세이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신적인 존재 혹은 신으로 여겨지지만, 살아있는 파라오를 신으로 숭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람세스 2세를 역사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카데쉬 대전일 것이다.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의 패권을 둘러싸고 두 강대국인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전면전을 벌인, 세계 대전급 전투이다. 람세스 2세가 먼저 진격하였다.

 

 

 

 

 

 

 

 

 

이 전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쪽에 모두 기록이 남아 있다.  룩소르 신전의 탑문 부조에는 람세스 2세가 엄청난 활약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초반에 오히려 이집트가 열세에 처했다가, 결국 무승부로 끝이 나고, 이후에 평화 협정을 맺으며 완전히 종식되었다.

 

 

 

 

 

 

 

 

카데쉬 대전 이후 체결된 평화조약이 쓰여진 히타이트의 점토판이다.  최초의 평화 조약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터키 정부가 1970년에 이 점토판의 레플리카를 만들어 UN 본부에 기증하였다. 현재에도 UN 본부 로비에 걸려 있다.

 

 

 

 

 

 

 

 

 

람세스 2세의 뒤를 이은 메렌프타의 장례신전 비석은 아주 유명하다. 이스라엘이 최초로 언급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이스리아르' 즉 이스라엘이라고 표기된 부분이 반들반들 하다고 하지만, 그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별로 좋아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황폐해 졌고 그 씨가 말랐다."  메렌프타의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 원정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국가가 아니고 사람들 즉 민족 개념으로 쓰여 있다. 오른쪽 두 글자가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기원전 1200년 무렵이 되면 고대 근동 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이 혼란 이후 청동기 문명은 사라지고 암흑기를 거쳐 철기 문명이 피어나게 된다. 다양한 세력이 등장해 고대 청동기 문명 사회를 공격하는데, 그중 하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다 민족, Sea People이다. 

 

 

 

 

 

 

 

 

그런데 이집트는 이 바다 민족의 침략을 물리 쳤다.  신왕국 최후의 불꽃인 람세스 3세의 장례 신전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기원전 1177년 경의 일이다.

 

 

 

 

 

 

 

 

 

 

해양 민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이집트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부를만 한 운명을 맞게 된다.  이 시기 고대 근동 사회는 전방위적 침략을 받아 청동기 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철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동기 문명국인 이집트 신왕국은 이 침략을 굳건히 버텨내면서 철기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청동기 문명을 고수했다. 이 상황이 어떤 비극을 가져오게 될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9강. 왕조의 몰락

 

 

 

 

 

 

 

신왕국 이후 이집트는 다시 한번 분열기를 겪는다. 제 3 중간기이다.

 

 

 

 

 

 

 

 

 

분열과 혼란을 거듭하는데, 이 시기에  파라오가 구약 성서에 최초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집트와 구약 성서 양쪽에서 교차 검증이 가능한 파라오다.

 

 

 

 

 

 

 

 

열왕기 상 14장 25절~26절에 등장하는 '시삭' 왕인데, 예루살렘을 침공했다고 적혀 있다.  이집트 쪽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2천 년 이상 이집트에 탄압 받아 왔던 남쪽의 누비아인이 거꾸로 이집트를 정복하고 누비아 왕조를 세운 것이 제3 중간기의 마지막 무렵이다.  누비아인의 25왕조는 약 100년 정도 이집트를 통치했다.

 

 

 

 

 

 

 

 

 

 

 

누비아 왕조를 멸망시킨 것은 아시리아 제국이다. 아시리아는 누비아인들을 남쪽의 원래 근거지로 밀어내고, 이집트 토착 파라오를 내세워 일종의 괴뢰 정권을 수립했다.  말기 시대의 첫 왕조인 26왕조이다.

 

말기 시대는 26왕조부터 30왕조까지로, 통일되어 있다고는 하나 명목상일 뿐, 고대 근동의 강대국에 의해 이리저리 짓밟히던 시기였다. 

 

 

 

 

 

 

 

 

 

 

 

아시리아에 이어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점령했다.  페르시아의 지배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캄비세스 2세가, 나중에는 크세르 크세스 3세가 이집트를 침략했다.

 

 

 

 

 

 

 

 

 

기원전 333년 페르시아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대패하고, 고대 근동의 패권은 마케도니아 제국에 넘어갔다.

 

 

 

 

 

 

 

 

 

이집트도 마케도니아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로써 이집트 민족의 이집트 왕조는 완전히 끝이 났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드로스를 페르시아로부터의 해방자로 받아들인 측면도 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분열되고, 이집트를 장악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다. 이때부터 이집트에는 프톨레미 혹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리스인이 지배하는 헬레니즘 시대를 맞은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이집트 문화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리스 문화와 혼용되었지만, 이집트 문명의 뿌리는 여전히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 역시 이집트 파라오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혈통이 아니라 그리스 혈통이다.

 

 

 

 

 

 

 

 

 

이집트를 부강하게 지켜내고 싶었던 클레오파트라의 꿈은 악티움 해전의 패배로 끝이 났다. 로마의 카이사르에 이어 안토니우스와 손잡은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고, 기원전 30년 무렵에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로써 기원전 3100년 경에서 시작한 고대 이집트는 기원전 30년 경 긴긴 역사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집트 문화가 당장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 신이 로마 옷을 입고 있기도 하고,

 

 

 

 

 

 

 

 

 

로마 황제가 이집트 파라오의 복장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이집트 문명의 뿌리는 그만큼 단단했다.

 

 

 

 

 

 

 

 

 

 

하지만 이집트 문화도 종말을 맞게 되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 했기 때문이다.  기원후 392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금지하면서 이집트의 신들도 탄압 받기 시작했다.  

 

 

 

 

 

 

 

 

 

 

신전이 폐쇄 당했다. 신전은 이집트 문화 재생산의 원동력이었다. 신전의 폐쇄는 이집트 문화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집트 신전은 기독교의 교회로 바뀌었다.  이집트는 기독교 국가가 되어 갔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이렇게 완전히 끝이 났다. 

 

 

 

 

 

 

 

 

 

 

 

 

 

10강. 빼앗긴 역사 

 

 

 

 

약탈 문화재 이야기다. 서구에 빼앗긴 문화재가 이집트만큼 많을 수 있을까 싶다.  일본에 수없이 빼앗긴 우리 문화재가 중첩되면서 할 말이 없다.  대표적 문화재 사진만 올려 둔다.

 

야만 그 자체인 제국주의적 침략을 저지르면서도, 문명인이 야만인을 계도한다는 식의 명분을 가져다 붙인 서구 국가들은 지금까지 조금도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약탈 문화재 반환 요구에 대한 서양 열강의 한결 같은 대답은 그 문화재를 보존할 능력이 이집트에는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문명인이 야만인을 바라보듯 이집트를 능멸하고 있다.

 

 

 

 

 

1. 이집트 문명의 열쇠, 로제타 스톤 :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2. 아마르나 시대 미술의 정수, 네페르티티 :  독일  

 

 

 

 

 

 

 

 

 

3. 이집트 천문학의 미학, 덴데라 황도대 : 프랑스

 

 

 

 

 

 

 

 

 

4. 이집트 문자 해독의 단초,  이시스 신전의 오벨리스크 : 영국 귀족의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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