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곡

 

 

 

 

 

 

 

 

 

 

지옥의 여덟 번째 고리인 말레볼제를 떠나 마지막 고리인 아홉 번째, 코키토스를 향한다.  말레볼제와 코키토스는 둘 다 배반의 지옥이다. 말레볼제는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반, 코키토스는 자기를 믿는 사람에 대한 배반을 징벌하는 곳이다.

 

우리는 양심을 찢어지게 하는 배반의 죄를

자기를 믿어 주는 사람에게나

조금도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저지를 수 있지. (11곡 52~54)

 

 

 

 

 

 

 

 

 

12세기~13세기,  어지러운 정쟁의 한가운데에서 희생 당한 단테는 무엇보다 배반과 배신을 극도로 혐오하였던 듯하다.  지옥 순례 내내 죄인을 바라보는 단테의 눈은 연민과 비애에 젖어 있지만, 당대의 황제파와 교황파의 대립과 관련한 정쟁에 대해서만은 냉담했다. 정쟁을 한층 더 역겹고 피비린내 나게 만든 것은 적과의 결탁, 동지의 배신 따위다. 

 

 

 

 

 

  <몬테레지온 성>

 

 

 

 

단테는 지옥을 묘사하면서 당시의 이탈리아 풍광에 빗대어 표현하기를 즐긴다. 읽기보다는 낭송을 염두에 둔 서사시로 듣는 사람들이 생생하게 지옥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익숙한 경치를 빌려왔던 것 같다.

 

아홉 번째 고리는 지옥의 강들인 아케론, 스틱스, 플레게톤의 강물이 마지막으로 모이는 거대한 웅덩이 코키토스이다(14곡 115~120). 코키토스는 멀리서 보면 거대한 탑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인다. 14 개의 탑으로 둥글게 에워싸인 시에나 북부의 몬테레지온(31곡40) 성처럼 말이다.

 

코키토스의 탑은 거인들이다. 희랍 신화의 기간테스들과 성서의 니므롯 같이 힘세고 거대한 존재가 상반신을 탑처럼 드러내고 우뚝 서있다. 베르길리우스는 거인 안타이오스에게 '추위가 코키토스를 얼리는 곳(31곡122)'으로 내려 보내 줄 것을 부탁한다.

 

 

 

 

 

 

 

 

 

32곡

 

 

 

 

 

 

 

 

 

 

 

 

코키토스를 처음 본 단테는 '지옥의 모든 바위들이 내리누르고 있는 저 슬픈 구멍(1~2)', '우주의 중심 바닥(7)', '칠흙같이 깜깜한 웅덩이(17)'라고 묘사한다.

 

 

이 웅덩이는 큰산이 떨어져도 깨지지 않을 것 같이 두껍게 얼어 붙어 있다. 얼음에 갇힌 영혼들은 갖가지 배신을 저지른 자들이다.

 

 

 

 

 

 

 

 

 

 

어떤 대상을 배신했는가에 따라 코키토스는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말레볼제처럼 아래로 내려가면서 별개의 구렁으로 구획된 것은 아니고. 얼어붙은 웅덩이의 가장  자리에서 중심부까지 동심원을 그리면서 나뉘어진 것처럼 보인다.

 

맨 바깥의 카이나(32곡58)는 친척을, 그 다음 안테노라(32곡89)는 국가를, 안쪽으로 프톨레매오(33곡124)는 손님(친구)을, 한가운데 주데카(34곡116)는 주군(은혜)을 배신한 영혼들이 얼어 붙은 곳이다.

 

코키토를 얼리는 바람은 중력의 중심, 타락 천사 루키페르의 날개짓에서 나온다.

 

 

 

 

 

 

 

 

 

33곡

 

 

 

 

 

 

 

 

두 번째 구역 안테노라(32곡89)에는 우골리노 백작과 루지에리 대주교가 있다. 우골리노 백작은 스스로를 반역자라고 부르는데, 기벨리니를 배반하고 궬피를 도와 피사의 궬피 정권을 장악했다. 루지에리는 이런 우골리노와 손잡았으나 우골리노를 배반하고 그를 아들 손자와 함께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 

 

 

 

 

 

 

 

 

 

당시 이탈리아 도시들의 황권과 교권이 뒤섞인 어지러운 정치 투쟁과 분열상을 보여준다.

 

 

 

 

 

 

 

 

세 번째 구역 프톨레매오(124)에는 산 사람들의 영혼이 있다.

 

내가 그랬듯, 영혼이 제 육신을 배반할 때,

그 육신은 마귀가 빼앗아 가고

그 이후로 남은 시간은 남김 없이

마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오. (129~132)

 

지상에서 분명 살아 움직이는데, 그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마귀의 것이다. 얼마전 방영된 <경이로운 소문>의 악귀와 같다. 다만 이 드라마에서는 악귀를 소환하고 나면 영혼이 돌아오지만, 프톨레매오에 떨어진 영혼은 육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지옥의 문을 지나온 자는 영원의 고통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소문>에는 지옥의 제 5고리 스틱스의 늪에 떨어진 것 같은 악귀들도 나온다. 소환된 악귀는 진흙탕 속으로 떨어지는데, 사방에서 기어나온 악귀들이 갈갈이 찢어 발길듯 덮쳐 버린다. 

 

 

 

 

 

 

 

 

 

 

 

 

 

34곡

 

 

 

 

 

 

 

 

 

 

 

아홉 번째 고리의 네 번째 구역은 주데카이다(116). 망령들이 떼를 지어 얼음에 갇혀 있는 그 한가운데에 '고통스러운 왕국의 황제(28)', 루키페르(88)가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루키페르를 디스(20)라고 불렀다. 지옥의 제5 고리와 제6 고리 사이를 갈라 놓았던 디스 성벽의 핵심부, 디스가 타락 천사 루키페르이었던 것이다.

 

 

 

 

 

 

 

 

 

하늘에서 아름다웠던 만큼이나 추해진 모습으로 박쥐의 날개를 달고 바람을 일으켜 코키토스 구석구석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

 

 

 

 

 

 

 

 

 

루키페르의 세 개의 입에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 카이사르를 살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각각 몸이 찢어 발기는 고통을 겪고 있다.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128)'로도 불리는 루키페르, 그 악의 거대함을 맞닥뜨린 순례자는 아무 말없이 떠난다. 지옥을 벗어날 시간이다.

 

 

 

 

 

 

 

 

 

 

 

중력의 중심에 있는 루키페르의 다리를 타고 내려와 남반구로 나있는 좁고 긴 틈새를 빠져 나온다.

 

루키페르는 하늘에서  머리를 처박으며 지구의 남반구로 떨어졌고, 이때 남반구의 땅이 북반구로 옮겨 가고, 남반구는 바다가 되었다. 다만 연옥의 산만이 남반구에 우뚝 솟은 채 남아 있고 지구의 중심까지 순례자가 빠져나온 긴 틈이 생겨났던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둥글게 열린 틈을  통해

하늘이 실어 나르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고,

그렇게 해서 밖으로 나와 별들을 다시 보았다. (137~139)

 

 

 

 

 

 

 

 

 

 

 

 

어두운 숲에서 시작한 34곡에 걸친 지옥의 순례는 끝이 났다. 지옥의 9개의 고리에서 단죄 받고 있는 영혼들은 처음 단테의 길을 막아 섰던 어두운 숲의 세 마리 짐승들에 굴복한 인간들의 모습일 듯하다.

 

 

 

 

 

 

 

 

 

 

갖가지 죄들로 나뉘어 있지만 결국 애욕과 탐욕과 교만에 빠져 어떤 숲속에 들어와 있는 지도 모른 채 욕망을 쫓던 사람들의 영원한 종착지가 지옥의 아홉 개의 고리이다. 베르길리우스가 없었고, 베아트리체가 없었고, 성모 마리아가 없었다면 죽은 영혼으로 떨어져야 했을 지옥을 단테는 살아서 순례했다.

 

순례자 단테가 아니라 시인 단테에게는 『신곡』 쓰기가 그의 순례였고, 우리에게는 『신곡』 읽기가 우리의 순례였다. 『신곡』은 단테 이후의 인간들에게 살아서 지옥을 순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단테의 순례가 공포와 혐오에 못지 않게 연민과 비애로 가득했던 것은 욕망에 쫒기며 사는 우리 누구나 그 지옥 속의 영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순례도 그렇다. 문득 문득 그 고통과 비명 속에 내가 있음을 알았다.

 

지옥의 문은 되돌아 나갈 수는 없지만, 단테와 함께한 우리는 이미 지구의 반대편에 도달했으니, 깊은 숨을 내어 쉬고, 정죄의 산을 오를 준비를 하자. 미노스의 심판을 받기 까지는 시간이 조금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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