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 왕자의 구조는 입체적이다. 원환 구조인데, 이중의 원환이다. 1장과 27장이 만나고, 2장에서 7장까지의 대화는 다시 24장에서 이어져 26장에서 끝난다. 그 가운데인 8장부터 23장까지는 어린 왕자가 들려준 경험담이다.

 

1장과 27장은 서술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금, 현재이다. 전체적으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의 서술자 는 비행기 조종사다. 나는 6년 전에 사하라 사막에서 만났던 어린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마음 먹는다. 그런데 1장은 어린 시절에 좌절된 서술자의 꿈과 그 후 어른이 되어서도 외롭게 살아온 서술자 자신의 이야기다. 2장 첫 머리에 가서야 비행기 고장으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했고, 그날 밤 어린 왕자를 만났다고 하며, 서술의 시점이 6년 전 그날 밤으로 되돌아간다. 시간이 역행하며 흔히 말하는 플래시백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그리고 마지막 27장에서 서술자는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6년 전 자신의 별로 돌아간 어린왕자를 추억한다.

 

2장부터 26장까지는 6년 전의 그 아흐레 동안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2장에서 불쑥 나타난 어린왕자와 티격태격 갈등을 겪으며 나는 어린 왕자에 대해 조금씩 알아 나간다. 어린 왕자는 결코 속 시원히 설명하는 법은 없지만 대화 속에서 나는 퍼즐을 맞추듯 그의 삶을 그려나간다. 2장부터 7장까지는 그렇게 6년 전의 시점에서 나와 어린왕자가 현재 시제로 대화를 나눈다.

 

7장은 장면이 전환되는 분수령이자 나와 어린 왕자의 갈등이 폭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목숨이 걸린 비행기 수리가 뜻대로 되지 않아 하루하루 초조해 가는데, 어린 왕자는 양이 장미를 먹느냐 안 먹느냐에 세계의 운명이 달린 것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어린 왕자의 중요한 일과 나의 중요한 일이 부딪혀 폭발하고 어린 왕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하얘졌다 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그 울음에 비행기를 수리하던 공구들을 던져 놓고 조그마한 어린 왕자를 품에 안고 흔들어 달랜다. 눈물의 나라, 그 신비함 속에 나는 어린 왕자에게 진정으로 공감하기 시작한다.

 

8장에서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린 왕자가 자신의 작은 별에서 꽃과 만나는 장면이 그려진다. 아마도 어린 왕자가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기 수년 전의 시점일 것이다. 1인칭 서술자인 는 사라진다. ‘의 시점이 몇 군데 보이긴 하지만, 8장부터 23장까지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니라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대개 서술된다. 9장에서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을 떠나고 10장부터 15장까지 여섯 개의 작은 행성을 거쳐 16장에서야 지구에 도착한다.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기 딱 1년 전에 지구에 왔고, 16장에서 23장까지 다양한 겪음과 깨달음을 통해 성장한다.

 

24장은 다시 7장과 이어진다. 다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돌아와 비행기 조종사는 어린 왕자와 대화를 계속해 나간다. 7장이 내가 사막에 불시착한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는데, 어린 왕자의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며칠이 지나 24장은 여드레째 되는 날이다. 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마셨고 비행기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24장에서 26장까지는 나와 어린 왕자의 이별 이야기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되돌아가기 위해 사하라 사막에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동화처럼 철새에 매달려 왔던 때와는 달리 뱀이라는 공포와 충격을 통해 현실적으로 돌아갔다. 동화 속의 어린 왕자는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고’ 성숙한 현실의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27장은 1장과 짝을 이룬다. 1장이 프롤로그라면 27장은 에필로그다. 서술자 나는 어린 왕자를 떠나보낸 지 6년이나 지나서야 슬픔을 진정시키고 그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1장은 고전이 대개 그렇듯 이 이야기의 주제를 담고 있다. 여섯 살적 나는 보아 뱀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고,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을 그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전혀 이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을 품속에 간직한 채 외롭게 살아가며 어른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 책의 주제 중 하나는 여우가 가르쳐 준 지혜이다.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1장이 여섯 살 적 나로 시작하는 것은 이 주제를 집약해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 하나의 주제는 근대인을 표상하는 외로움이다. 78억의 인구가 어깨를 부딪치며 복닥복닥 살아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은 78억 개의 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의 군집체일 뿐이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을 떠나 세계를 겪으며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역자 황현산 선생은 해설에서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요청되는 사막이며..” 라고 썼다.

 

비행기 조종사가 불시착한 사막은 물리적인 사막일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사막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물이다. 비행기 조종사는 일주일 분의 물만 가진 채 사막에 불시착했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장사꾼은 물 대신 목이 마르지 않게 하는 알약을 판다. 사람들은 사막에 살고 있으면서도 진정 필요한 것은 버리고, 무엇에 써야 할지도 모르는 시간을 아끼려고 한다. 사실 이 세계가 사막인지 바다인지도 모른 채 욕망을 쫓으면 산다. 어린 왕자와 비행기 조종사가 마지막에 함께 마신 것이 사막의 우물물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샘물을 마시고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비행 조종사는 비행기를 고쳐 자신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막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이다. 물은 사랑이다.

 

1장의 보아뱀은 어린 왕자의 노랑뱀과 대응을 이룬다. 뱀은 어린 시절 비행기 조종사를 눈뜨게 해주었다. 뱀의 무엇인가가 여섯 살의 그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들었고,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성경에서 뱀은 지혜와 결부되어 있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처음 만난 대상도 뱀이다. 노랑 뱀은 한두 마디 말에도 핵심을 이해했고, 긴 말없이 어린 왕자에게 가야할 길을 가리켰다. 어린 왕자는 뱀의 독이라는 충격을 통해 자신의 별로 되돌아간다.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 것은 그가 길들인 장미꽃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다. 책임은 말랑말랑한 사랑의 마음이나 아련한 그리움만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며 사랑이다. 보아뱀도 노랑 뱀도 충격으로 깨달음과 결단을 촉구한다.

 

1장은 여섯 살 적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다. 어린 왕자는 누구였을까? 죽음이 눈앞에 닥친 사막의 차가운 새벽녘에 홀연히 나타난 어린 왕자는 비몽사몽간에 만난 여섯 살 적의 어린비행기 조종사였을 것 같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지나온 삶을 반성하며 어린내가 어린 왕자와 같은 겪음과 지혜를 얻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내가, 지금의 세상은 다른 세상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라는 비행기 조종사의 안타까움과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1943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발표된 이 책은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세계에 대한 우화와 반성 그리고 위로일 것이다.

 

마지막 27장에서 서술자 나, 비행기 조종사는 6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6’이라는 숫자는 1장의 여섯 살 적 어린나로 돌아간 듯한 비행 조종사를 연상케 한다. 별들을 다투어 소유하려던 사업가들이 만든 사막은 2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그 별들에서 수억 개의 방울소리와 수억 개의 웃음소리를 듣는 내 안의 어린 왕자는 우물을 품은 아름다운 사막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생텍쥐페리는

어느 날 아프리카의 사막을 여행하게 되면 이곳을 확실히 알아볼 수 있도록 이 풍경을 자세히 보아 두라. 그리고 이곳을 지나가게 되거든 제발 서두르지 말고 바로 별 아래서 잠시 기다리라! 그때 한 아이가 여러분에게 다가오면, 그 애가 웃고, 그 애의 머리가 금발이면, 물어도 그 애가 대답하지 않으면, 그 애가 누구인지 여러분은 잘 알리라. 그때는 친절을 베풀어 달라. 이다지도 슬퍼하는 나를 그대로 버려두지 말고, 이내 편지를 보내 달라. 그 애가 돌아왔노라고…….”

라고 이 책을 끝낸다.

 

나에게도 그 애가 찾아올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의 어린 왕자도 집을 떠나 긴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목이 말라 죽기 전에 그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이 세상은 사랑이 요청되는 사막이니까.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0-12-10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대단한 리뷰입니다! 어렴풋했던 어린왕자의 감동이 생생해지는 느낌이네요!ㅎ 감사합니다!

말리 2020-12-10 20:50   좋아요 1 | URL
고전 읽기를 함께하는 분들과 과제를 했어요.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모임이 중단되었거든요. 말 대신 글로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요. 오늘까지 과제 제출인데 모두들 어려워 하고, 저도 급하게 과제를 쓴 것입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내용보다는 구성에 대해 썼는데, 칭찬받을 만큼 정교하진 못합니다. 그래도 격려해 주셔서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

scott 2021-01-0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리님에 어린왕자에 새로운 해석
또다른 감동이네요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말리 2021-01-10 11: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