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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또는 스피노자 프리즘 총서 2
피에르 마슈레 지음, 진태원 옮김 / 그린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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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잘못 골랐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라는 제목만 보고, 헤겔과 스피노자를 일타쌍피할 야무진 꿈을 꾸었으나,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좌절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는커녕 헤겔도 스피노자도 알 수 없었다. 말하자면 공리도 정리도 모른 채 고차 함수에 달라 든 셈이다. 마슈레의 이 책은 헤겔도 잘 알고 스피노자도 잘 알아야 비로소 균형을 갖고 읽을 수 있다. 초보자는 읽기도 힘들지만 읽어봤자 헤겔은 참 나쁜 놈이구나, 하는 선입견만 갖게 될 위험이 크다.

 

 

「스피노자의 학설이 불충분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헤겔은 스피노자에게 스피노자 자신의 것이 아닐뿐더러 내재적 합리성의 관점과는 양립할 수 없는 추상적 인식관에 속하기 때문에 그가 명시적으로 거리를 두었던 몇 가지 철학적 입장들을 전가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이상한 것은, 헤겔이 스피노자가 이미 데카르트주의자들에게 맞서 전개했던 것과 아주 유사한 논변을 스피노자에게 맞서 제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헤겔이 제기했던 논박에 미리 답변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의 태도는 명백히 설명하기 어려운 놀라운 오해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 그 자신이 그 중요성과 의미를 더 잘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을 스피노자에게서 읽어내지 못하고 망각하고 말았다. p121」

 

마슈레는 이렇게 헤겔의 전제 자체를 비판(난?)한다. 스피노자의 것이 아닌 것을 스피노자의 것으로 전제해놓고, 스피노자의 오류로 비판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왜 그랬을까? 스피노자의 어려운 철학을 잘 이해 못해서? 마슈레는 헤겔이 일부러 그랬다고 본다.

 

「만약 헤겔이 스피노자를 항상 잘 이해한 것 같지 않다면, 또는 잘 이해하려고 들지 않은 것 같다면, 그것은 스피노자가 헤겔을 아주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헤겔식의 목적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참 을 수 없는 것이다. p339」

 

헤겔은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위해서 스피노자를 의도적으로 왜곡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헤겔 체계 자체 안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이 체계는 그 고유한 운동에 따라 헤겔이 스피노자주의의 실상을 왜곡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사실 스피노자주의와 좀 더 분명히 거리를 두기 위한 목적으로 헤겔은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기 위해 가공된 허구적 학설로 실제의 스피노자주의를 대체해야 했으며, 이는 스피노자 체계가 거둔 모든 역사적 성과를 제거해 버린다. p121」

 

역사적으로 보자면, 데카르트 - 스피노자 - 칸트 - 헤겔의 순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비판했고, 헤겔은 데카르트를 비판한 스피노자를 수용하면서도, 데카르트와 동시에 스피노자의 한계를 신랄히 비판했다. 물론 철학자들의 비판은 대개 비판 대상을 기본적으로 수용한다. 스피노자도 데카르트의 근대철학을 수용했다. 여하튼 철학자들의 전략은 대략 대표적 철학자 하나를 물고 뜯으면서 자신의 체계를 세우거나, 고대의 철학자를 전적으로 찬양하고 되살리면서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가거나, 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개인적으로 가시지 않는다. 어떨 때 보면 참 치졸해 보이는데,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그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이라고 우기면서 막 비판하는 것을 현대 철학자들에게서도 보게 된다. 그가 잘못하지 않았으면, 내가 잘못한 것이 된다! 마슈레가 지적하는 헤겔이 딱 이런 모양새다. 그런데 그렇다면 마슈레는 전적으로 옳은가?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초보자에게 위험한 이유가 이것이다. 헤겔을 알고 스피노자를 알아야, 마슈레를 판단할 수 있다. 마슈레 역시 그가 비판하는 헤겔처럼 헤겔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일상적인 일이라면, 자초지종과 전하는 사람의 말만 들어 보고도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헤겔과 스피노자다. 글자를 안다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다. 게다가 마슈레에게도 스피노자를 편들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옮긴이 해제>에 따르면,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두 가지다. 구조주의 운동과 스피노자 연구의 르네상스다. 대부분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좌파적 성향을 띄고 있고, 구조주의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돌파할 개념적 수단을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찾고자 했다. 들뢰즈, 발리바르, 알튀세르, 네그리 그리고 마슈레 등이 이에 속한다.

 

물론 마슈레는 1991년판 서문에서 이 책이 단지 스피노자를 위한 헤겔 비판이 아님을 명시한다. 책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그렇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는 두 가지 의미다. 헤겔이냐 스피노자냐 라는 선택의 의미가 그 하나다. 그러나 ‘또는’ 은 ‘헤겔 즉 스피노자’, 헤겔과 스피노자의 동일성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읽는다면, 이 책은 일차적으로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오해, 오독에 맞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헤겔 철학을 재비판하려는 시도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 책은 헤겔과 스피노자가 공유하고 있는 것, 이 양자의 철학 안에서 공통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을 읽어 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p372」

 

그런데 읽어보면, 비판 혹은 비난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종일관 헤겔이 잘 알면서도 일부러 스피노자를 왜곡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는데, 헤겔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태도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마슈레가 무엇을 근거로 헤겔을 비판하고 있느냐다. 이것이 핵심이지만, 이것을 딱 부러지게 정리할 능력이 있으면 내가 전문가지 일반 독자이겠나! 그렇다고는 해도 마슈레가 주구장창 읊어대는 주제가 한두 가지 있어, 몇 대목을 찾아 옮길 수는 있다. 헤겔 철학은 목적론적이고 진화론적인데 반해 스피노자는 목적론을 배척하며 자기원인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마슈레의 주장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헤겔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으며 실은 나도 늘 걸리던 것이 목적론이기는 하다.

 

「따라서 폭력적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스피노자가 헤겔을 논박한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논박이 겨냥하는 것은 변증법에 대한 관념론적 설명이다. 관념론은 사유는 그 내적 반성 능력 때문에 실재, 모든 실재의 탁월한 형식이라는 전제 위에 자신의 주장의 보편성을 확립한다. 따라서 사유는 자신의 총체화의 운동 안으로 다른 모든 질서를 결집하고 흡수하는 절대적인 합리적 질서로 제시된다. 자기 자신을 원들의 원으로 서술하는 헤겔의 변증법은, 자신이 궁극적으로 재통합하는 모든 요소들 사이의 위계적 종속 관계를 전제하며, 이러한 종속은 변증법적 진보의 전체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왜냐하면 이 진보는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종국적 관점으로부터 반성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전제를 처음부터 멀리한다. 그는 실재, 실체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서 요소들 사이의 위계적 종속 관계에 관한 일체의 생각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실체의 속성으로서 사유는 전체와 동일하며, 따라서 속성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사유가 실현되는 연쇄는, 실체가 표현되는 다른 모든 형식들 -이는 수적으로 무한하다- 과 사유의 절대적 동등성을 정립한다. 반대로 헤겔은 실재로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정신에 종속시키도록 강제하는 탁월성의 관점에 따라 정신을 주체로, 전체로 사유한다. 합리적 운동 안에 형식들의 위계를 설립하는 이러한 종속이 헤겔 목적론의 열쇠다. 그리고 이 목적론이야말로 바로 스피노자가 배격하는 것이다. p123~4」

 

관념론, 총체화, 위계적 종속관계, 진보, 목적론.. 등이 헤겔에게 돌아가는 용어들이다. 반대로 스피노자는 “비진화론적 방식에 따라 인식 과정을 목적 없는 과정으로 사유한다. p125” 헤겔은 결코 ‘목적 없는 과정’을 사유할 수 없다. 마슈레는 헤겔의 목적론이 결국 고전적 이성 주체의 합리성과 일치한다고 비판한다.

 

「고전적 합리성의 경우, 진리 서술의 전제조건인 형식적 조건들과 규칙들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모순은 처음부터 회피된다. 헤겔의 경우는 복합적이고 힘겨운 여정 끝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모순이 극복되며 이 여정 중에 모순은 자기 자신에 맞서 진리 주체를 긍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모든 가능한 제한들을 뽑아냈기 때문에 현실적이며, 이 제한들을 극복했기 때문에 무한하다. 이리하여 이 주체는 절대적인 자기 정립이 된다. 두 경우 모두에 어떤 주체와 관련된 합리성이 존재하는데, 이 주체는 자신 안에서 일체의 부정성을 제거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며 이를 통해 진리의 우월성을 보증한다. 양자 사이의 차이는, 헤겔이 맞서 싸우고 있는 이전의 표상에서는 이 주체가 이미 시초부터 완전하게 구성되어 있고 완전하게 실정적인 원칙에 따라 실현되어 있는 유한한 주체이며, 바로 이 주체의 영속성이 증명의 일관성 또는 순서를 보장한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 반면 헤겔식의 전개 과정에서 이 주체는 무한 주체로서, 이는 이 주체를 달성하는 과정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p329」

 

엎어치나 메치나 똑 같다는 소리다. 헤겔의 목적론이 데카르트의 신과 같은 전통적인 척도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거역할 수 없는 운동으로서 개념의 무한성은 어떤 목적으로 향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이 목적은 모든 진리의 질서를 떠받치고 있는 데카르트의 진실한 신이 그렇게 하듯이, 개념의 노동은 무익하게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전진적인 발전 안에, 곧 불확실한 시초에 놓여 있던 정신을 필연적인 완성으로 이끌어 가는, 연속적인 동시에 단절적인 진화 과정 안에 기입되어 있다는 것을 보증한다. 그리하여 헤겔은 명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목적성 개념을 빌려 오면서 “이성은 합목적적 행위다” 라고 쓸 수 있는 것이다. p330」

 

마슈레는 헤겔 목적론의 다른 이름이 바로 부정의 부정이라고 한다. 부정에는 유한 부정과 무한 부정이 있는데, 유한 부정은 방향 없는 정류장이고, 무한 부정은 “자신이 해소하는 모순들의 매개를 통해, 자신이 실현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는 이 목적을 향해 필연적으로 방향 설정되어 있다.p331” 이에 반해 스피노자는 결단코 목적론을 배격한다.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영원성은 본질적으로 인과적이다. 이 영원성은 자신 안에 자신의 원인을 지니고 있으며, 일체의 목적론적인 전개 과정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무한자에 속한다. 따라서 실체는 헤겔의 정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실체가 자기 곁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실체란, 일체의 시간적 규정을 배제한 가운데 자신의 모든 변용들 속에서 동시에 스스로를 긍정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행위는 영원한데, 왜냐하면 이 행위는, 이를 어떤 잠재적 무한자의 조건들로 귀결시키는 모종의 현재화의 운동에 전혀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성은 목적들의 부재다. p335」

 

이 책을 읽다보면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개념은 실체, 자기원인, 영원성, 긍정성 따위인 것으로 보인다. 이 개념들이 정리되면 좋겠지만 불가능하고, 여기서는 마슈레가 해석하는 헤겔의 목적론을 중심으로 헤겔과 스피노자를 비교한 몇 부분만 인용해 보았다.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껏 읽어 온 지젝의 책들은 헤겔에 대해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아, 점점 머리가 아프다. 여기서 지젝의 헤겔을 쌈빡하게 정리하여 딱 대조해 보면 참 좋겠지만, 물론 그것도 불가능하다. 지젝은 ‘부정성’을 헤겔의 핵심개념으로 높이 평가하는데, 마슈레는 헤겔의 부정성을 기껏해야 목적론으로 폄하하며 스피노자의 긍정성과 대비한다.

 

 

지젝도 많은 책에서 스피노자를 언급한다. 그렇게 나쁘게 평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몇 권의 책에서 목차를 읽어보니 이런 것이 있다. 『헤겔 레스토랑』의 2부 6장 중 <헤겔, 스피노자 .... 그리고 히치콕>이라는 절이다. 마슈레의 논점과는 빗나있지만 기껏 찾았으니, 두 부분만 옮겨 놓는다.

 

「헤겔을 스피노자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극을 정식화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클리나멘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다. 스피노자적 실체는 다수의 클리나멘을 낳는 생산적 역능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서 자신의 산물들에 완전히 내재적이며, 오직 그러한 산물들, 클리나멘들 속에서만 현실적인 잠재적 독립체로 파악될 수 있다. 하지만 헤겔에게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다수의 클리나멘들은 실체 자체 속의 보다 철저한 클리나멘 -전도 또는 부정성-을 전제한다. (실체가 또한 주체로서도 파악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675~6」

 

「따라서 스피노자에 대한 철저한 독해를 통해 실체는 다름 아니라 그것의 클리나멘의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 여기서 실체는 일자로 남아 있으며, 원인은 결과들에 내재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 즉 실체는 없으며, 오직 절대적 간극, 비동일성으로서의 실재만 있을 뿐이며, 특수한 현상들(양식들)은 이 일자들, 이 간극을 안정시키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이다.

하지만 두 진공이라는 이러한 개념은 우리를 다시 헤겔에게로, 절대자는 ‘실체일 뿐만 아니라 주체이기도 하다’는 유명한 공식에서 암시되고 있는 실체와 주체 사이의 간극으로 데려간다. 헤겔적 총체성은 유기적 전체라는 이상이 아니라 비판적 개념이다. - 현상을 총체성 속에 위치시킨다는 것은 전체의 숨겨진 조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증상’, 적대성, 비정합성들을 체계 안의 필수불가결한 부분들로 포함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독법에 따르면 ‘가짜 진공’은 기만적인 안정성과 조화를 갖고 현존하는 유기적 전체를 가리키는 반면 진짜 진공은 자신의 생산에 필요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붕괴를 초래하는) 모든 탈안정적인 초과들을 이 전체로 통합시킨다. 따라서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은 ‘진짜 진공’에 의한 ‘가짜 진공’의 반복적인 잠식으로, 실체로부터 주체로의 반복적 전환으로 기능한다. 이 간극은 가장 근본적으로는 불교와 헤겔 변증법 사이의, 평화의 달성과 끈질긴 ‘그래도 지구는 돈다.’ 사이의 최소한의 윤리적 차이로 나타난다. p677~8」

 

 

대충 보아도 마슈레가 말하는 헤겔과는 달라 보일 것이다. 마슈레가 말하는 헤겔의 체계는 (목적을 향한) 진화의 결과 완결된 유기적 총체로 보이지만, 지젝은 헤겔의 총체성이 내부에 절대적 간극을 가진 채 그 부정성으로 지탱되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은 철학자도 예외가 아닌 걸까? 객관적 진실이란 없다면 오히려 당연한 것은 아닐까? 해석은 관점 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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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5-02-01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에서 스피노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경우 특유의 반헤겔적 분위기 때문에 헤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고 거꾸로 지젝의 경우 스피노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있다고 비판하기도 하더군요.

http://blog.aladin.co.kr/balmas/2259526 진태원씨가 대표적..

그리고 헤겔이 스피노자를 비판하지만 결국은 스피노자와 헤겔은 많은 부분에서 유사성이 있지 않은가 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http://ddpa98.org/tn/board.php?board=book3&command=body&no=7

요기서 양우석씨 논문...

이렇게 전공자분들끼리도 논의가 분분한게 스피노자, 헤겔과의 관계인것 같습니다. 마슈레의 책은 사실좀 지젝같은 헤겔주의자의 입장에선 편향적인건 맞는것 같아요. 헤겔을 특히 지젝처럼 부정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말이죠.

http://philinst.snu.ac.kr/thought/46/09.%20%EC%84%B1%EC%B0%BD%EA%B8%B0.pdf

이 논문 참조해보면 말이죠.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저렇게 의견이 갈리는것을 보니 정답이 있다라기보다는 강조하는 관점의 차이정도가 아닐까라고 이해하는 수밖에요. ㅎㅎ


말리 2015-02-02 10:2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렇게 도움 자료까지 찾아주시고요. 잘 읽어보겠습니다. 일반 독자 입장이라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렇게, 저사람 말을 들으면 또 저렇게, 어쩔수 없이 갈대가 됩니다. 공부 좀 제대로 해 볼걸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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