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수치심]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디어 다 읽었다. 아마 다 읽지 못하고 리뷰를 썼다면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신간평가단의 리뷰는 내가 자원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곧 염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사 너스바움이 쓴 『혐오와 수치심』의 부제는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이다. 혐오뿐만 아니라 수치심까지도 부정적인 감정으로 분류하고 있다. 부끄러워해야 할 때 마땅히 부끄러워하는 것이 인간다움이다. 그런데 왜 혐오와 수치심을 인간성의 적이라고 할까?

 

제목이 주는 인문학적 인상과는 달리 이 책은 철저히 법률학적이다. 수치심이 때때로 인간성을 지켜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법적용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혐오는 말할 것도 없다. 본문만 600쪽이 넘는 책이, 그것도 법률 용어와 법적 엄격함이 가득한 이 책이, 술술 읽혔다는 것이 읽고 나서도 뜻밖이다. 지난달 신간평가단의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보다도 심지어는 이번 달의 『음식의 언어』 보다도 더 잘 읽혔다. 단지 개인적 취향 때문일까?

 

혐오와 수치심이 법적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감정이 법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너스바움은 분노와 두려움 같은 감정은 법집행의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있으며, 피고인에 대한 동정심 또한 배심원의 정당한 권리라고 말한다. 이런 감정들은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이미 사고와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감정은 개인적 삶과 개인이 구성하는 사회적 삶 모두에서 쉽사리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두 감정은 지배적인 집단이 다른 집단을 예속시키고 낙인찍는 사회적 행위 양식과 연결된다. 혐오의 경우, 동물성과 유한성에 대한 행위자의 두려움과 연관된 속성은 힘이 약한 집단을 대상화해서 투영하며, 이들 집단은 지배적인 집단이 자신에 대한 불안감을 표출하는 수단이 된다. 예속된 집단과 그 구성원들의 몸은 혐오스럽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예속된 집단의 구성원들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한다. 수치심의 경우, 무력감과 통제의 결여가 불러일으키는 보다 일반적인 불안은 완전무결함에 대한 추구로 이어진다. 지배집단은 자신들이 지닌 안정적인 통제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위협한다고 여기는 하부 집단에 낙인을 안겨 줌으로써 통제하고 있다는 겉모습을 얻게 된다. 하부 집단은 무질서와 혼란을 일으키는 사회적 불안의 초점이 되어서 낙인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단순히 ‘정상’ 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낙인을 받을 수도 있다. 지배 집단은 ‘정상’ 이라는 편안함을 안겨 주는 허구를 통해 더욱더 효과적으로 〔자신이 지닌 불안을〕 숨길 수 있다. p603」

 

혐오와 수치의 역사적 상징은 물론 유대인이다. 너스바움뿐만 아니라 많은 철학자들이 (나는 지젝을 통해 처음 접했지만), 유대인은 특히 나치 아래의 유대인은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한 독일인들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이 투여된 대상이었다고 말한다. 그들 자신의 욕망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형상이다. 그 결과 가치판단이 전도된다. 유대인이 이러저러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유죄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의 행위는 모두 이러저러한 범죄가 된다. 우리 시대에 유대인의 역할은 제3세계 이주민, 이슬람교도들이 맡고 있다. 물론 뉴스를 보면 미국은 여전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그리고 우리나라는 SNS의 여론상 호남인들이 그 저주받을 올가미에 걸려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그 책임을 전가하고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는 희생양이 만들어지기 쉽다. 저들을 싹 도려내기만 하면 윤택한 삶이 가능할 것 같은 환상이 사회를 지배하고, 일본의 재특회나 우리나라의 일베가 활개를 친다.

 

너스바움은 이런 거시적 통찰을 지극히 현실적인 법적용에서 짚어낸다. 미국의 법적 논쟁에 등장하는 것은 물론 유대인이 아니라 동성애자, 장애인, 유색인종, 매춘부 등이다. 애팔레치아 숲에 숨어사는 유랑자가 레즈비언 커플을 목격하고 총을 쏘아서 한명은 사망, 한명은 중상을 입은 일급 살인 사건에서 피고는, 주체할 수 없는 혐오와 불쾌감에 휩싸여 저지른 범죄이므로 과실치사로 죄를 경감해 줄 것을 요청했다. 판사는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미국의 어떤 법정에서는 혐오를 근거로 죄를 경감해주는 판결이 내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동성애자, 인종적 소수자, 여성,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원초적인 혐오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이다. 사회적 혐오를 법적으로 인정한다면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재발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사실은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난민 공습이나 종교 갈등으로 인한 대량 학살은 국가적•사회적•법적으로 인정된 혐오가 불러일으키는 참극이다. 물론 미국의 백인 경찰관들이 유색인종 범죄 혐의자를 무차별 사살하는 일도 되풀이 된다.

 

수치심은 나르시시즘에 기반 한다는 흥미로운 분석도 있다. 플라톤의 《향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수치심을 자신이 전혀 전지전능하지 않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 p335” 이라고 했다. 완전했던 인간이 우주를 지배하기 위해 신들을 공격하자 제우스가 인간의 몸을 변형시켜 “약해지게” 만들었다. 인간 몸의 형태가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표식이다. 그 중에서 배꼽은 “오래 전에 겪은 일에 대한 기억”을 표상한다.

 

“배꼽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영양공급과 편안함의 원천에서 떨어져 나와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삶을 시작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p335”

 

아이는 탯줄을 잘리고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부터, 완전체에서 불완전체로, 전지전능함에서 무력함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주는 원초적 수치심은 완전한 인간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애착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수치심과 나르시시즘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자기가 외롭고 분리된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경험하면, 그만큼 더 과장되게 자신의 이상과 하나 된 완벽한 존재가 되길 추구하는 것이다. p355”

 

수치의 대상은 인간에게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상기하게 만든다. 우리의 나르시시즘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와 같은 ‘정상인’ 이 아니라 ‘비정상인’이나 ‘하위집단’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수치심에 대한 형벌은 특정 행위가 아니라 인간 자체를 겨냥하게 된다. 수치심 형벌은 “당신은 결함을 지닌 사람입니다.” 고 낙인찍는다. 역사적으로도 수치심 형벌은 그 사람이 지닌 정체성을 대상으로 했다. 주홍 글씨, 자자와 같은 형벌은 일생동안 지울 수 없는 낙인이었다.

 

일탈자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면서 스스로를 이들보다 우위에 있는 ‘정상인’으로 내세우는 것은 사회구성원을 서열화하는 작용을 한다. ‘수치심 주기’는 법의 영역이 아니라 언론이나 여론의 영역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전리디언, 개상도뿐 아니라 삼포세대, 칠포세대 같은 자학적 낙인까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서열화를 촉진한다. 따라서 너스바움은 법이 수치심에 관여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는 자유주의 사회가 ‘법이라는 공적인 체제를 통해’ 그러한 특정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분명 적절하지 못한 면이 있다. 국가가 수치심을 주는 행위에 관여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낙인찍을 것이고, 범죄자들은 그러한 낙인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국가가 이처럼 모욕을 주는 행위에 참여하는 것은 자유주의 사회가 기초하고 있는 평등과 존엄이라는 관념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p422」

 

물론 세부적인 사항에서 너스바움의 원칙에 반발하고 싶은 충동도 인다. 가령 아동성범죄자 명단 공개 같은 것들은 분명 수치심을 주는 처벌이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수치심을 줄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놈들까지 보호해야 되나 싶기도 하다. 성추행으로 징계를 받은 교수가 버젓이 학교를 옮겨 선생질을 하는 이 나라에서는 인간 자체를 매장해 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법은 법이다. 법이 원칙을 거스르면 먼저 무너지는 것은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핵심 가치이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지는 말라고 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