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지젝 - 정치적, 신학적, 문화적 독법
강응섭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지젝을 읽은 지 십년이 되어 간다. 지젝의 이름만 보이면 무조건 읽고, 신간이 나오길 목 빼고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쉽지도 않은 책을 무엇에 홀려서 그리 읽었나 싶기도 하고, 그러고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여하튼 지젝은 내가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이다. 지젝을 읽다보면 무엇보다 헤겔과 라캉이 궁금하고, 헤겔을 읽으려면 칸트를 거쳐야 하고, 그러려면 데카르트가 필요하고, 뭐 그렇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렇다고 그렇게 읽었다는 것은 아니다. 또 한편으로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있다. 라캉에게도 프로이트가 있고, 소쉬르의 언어학, 구조주의 따위가 따라 붙는다. 지젝도 헤겔도 라캉도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쉬운 말을 모르는지, 쉬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상인지, 말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인지, 이해를 위해 쓰는 말인지, 오해를 하라고 꼬아버리는 말인지, 다들 난해하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읽게 된다. 그 난해함에 매혹 당한다. 그 매혹의 중심은 사실 텅 비어있을 지도 모르지만.

 

 

글항아리의 『라캉과 지젝』을 사두고 이제 읽었다. 9월말에 샀으니,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예전 같으면 득달같이 읽었을 것을 한 달이나 묵혀 두었다. 오래된 애인이 이제 시큰둥해 진 걸까? 그것보다는 원래, 여러 명이 쓴 짧은 글들을 묶은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분량 상 깊이가 있을 수도 없고, 이런 저런 주제들로 왔다갔다 산만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젝과 라캉의 난해함을 이렇게 짧은글 속에 제대로 풀어내길 기대하기는 힘들다. 아니, 그렇게 압축해 낸 글들을 내가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학자들이 풀어낸 지젝과 라캉이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어떻게 소화해내는지가 몹시 궁금하고 또 미리 부러웠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여덟 편의 글 중 세 편만 읽을 만 했다.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해도 좋은 글을 알아볼 수는 있는 것처럼, 라캉과 지젝을 잘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잘 소화해 쓴 글인지 아닌지는 알 것 같다. 김정한, 이성민, 정혁현의 글은 좋았다. 가장 나쁜 글은 김석의 것이다. 라캉과 지젝에 대한 비교가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지젝의 의미가 그런 것이 아닌데, 비교를 위해 지젝을 자신이 만든 틀 속에 억지로 끼워 넣은 것 같다. 거두절미는 논객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철학자들도 한다.

 

헤겔도 그렇지만 라캉도 해석이 분분하다. 라캉 스스로도 견해를 끊임없이 바꾸었을 뿐 아니라, 어떤 개념에 대해 똑 부러지게 의미를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일쑤이다. 이 책에서도 그런 경향이 드러나는데, ‘증상과의 동일시’ 와 ‘환상을 횡단하기’를 놓고 김석과 김정한은 전혀 반대의 해석을 하고 있다.

 

이 두 개념은 정신분석의 완료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라캉에게 정신분석은 임상에 좀 더 가깝고 지젝에게는 정치와 깊이 관련된다. 임상이든 정치든 분석은 어느 시점에서 완료되는가? 혹은 성공하는가? 김석은 증상과의 동일시에서, 김정한은 환상의 횡단에서 정신분석의 완결을 보고 있다.

 

「정신분석 윤리의 근본 지향점은 개별 주체가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를 정립하는 것이다. 존재는 상징화에 저항하며 기표적 질서에 대해 ‘탈존ex-sistence’하는 ‘무적인 것 ex-nihilo’ 이다. 존재가 자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 바로 분석적 상황은 물론이고 일상에서 경험하는 증상이다. 증상은 말하는 주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의 조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증상은 주체가 겪는 병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임상 지표가 아니라 바로 실재의 메시지로서의 증상을 의미한다. 실재의 메시지로서의 증상은 해석이나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향유의 대상이다. 이제 증상을 통해 대타자가 박탈한 향유에 다가설 수 있다.

존재 회복은 최종적으로 증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완수된다. 지젝은 환상을 가로질러 이데올로기의 중핵에 있는 실재적인 것과 조우하면서 상징적 질서 너머로 향한 것을 강조하지만, 라캉은 욕망에 대한 철저한 충실성을 통해 실재(증상)에 대해 도달할 것을 주장한다. 지젝이 사회적 환상을 가로질러 상징계를 전복하는 혁명을 주장한다면 라캉은 주체가 갖는 증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기표 S1-S2로 이어지는 기표 연쇄가 결국 존재의 진리를 보증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상징계의 무능을 넘어서고자 한다. 정신분석의 윤리는 상징계가 거세하려는 존재를 향하며, 존재로의 귀환은 결국 실재에 속하는 증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가능하다. p42~3 김석」

 

김석은 라캉과 지젝을 ‘증상과의 동일시’와 ‘환상을 횡단하기’로 각각 대비한다. 김석이 말하는 증상은 실재적인 것으로 이것과의 동일시를 통해 주체가 존재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징계란 기표의 세계로, 주체는 상징계에 들어서는 대가로 존재를 상실한다, 즉 거세당한다. 김석은 환상을 횡단하는 것을 또 다른 환상 즉 기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이에 반해 김정한은 ‘증상과의 동일시’를 상징적인 것, 다시 말해 상징계에 적당하게 적응해 사는 것으로, 기각한다. 정신병 환자에 대한 임상적 치료는 보통 다른 사람들과 그럭저럭 잘 어울려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젝에 따르면, 밀레의 정치적 입장은 그의 라캉 해석과 무관하지 않다. 정신분석 치료와 관련하여, 초기 라캉이 상상적 동일시를 떨쳐 내고 상징적 질서의 한계를 넘어 실재-물의 너머와 영웅적으로 대면하는 윤리를 제시한다면, 후기 라캉은 이런 ‘한계-경험’ 자체를 거부하고 급진주의를 포기하면서 온건한 방식으로 후퇴한다. 라캉에 따르면 “분석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가서는 안 된다. 환자가 사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후기 라캉에게 정신분석 치료는 주체성의 철저한 변형이 아니라 국소적 미봉책이다. 밀레는 이 후기 라캉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신분석의 끝을 ‘환상 가로지르기’로 개념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와 반대로 분석의 목표를 ‘증상과의 동일시’로 재정식화한다. 주체는 자신의 독특한 향유 방식을 압축하고 있는 증환이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밀레는 ‘환상 가로지르기’와 ‘증상과의 동일시’를 대립시키면서, ‘증상과의 동일시’를 통해 주체가 자신의 독특한 향유를 유지하는 길을 제시한다. 이것이 정치적 맥락에서 함의하는 바는 “냉소적인 자유주의적 보수주의” 인데 왜냐하면 주체의 안정적인 향유를 위해서는 기성 권력의 상블랑이 향유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기성 권력이 규정하는 일상의 법과 전통을 존중하고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징적 상블랑들이 가짜 내지 허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렇지 않은 듯 즐기라는 것은 냉소적인 윤리다.p54~5 김정한」

 

여기서 김정한은 별 다른 설명 없이 증상과 증환을 섞어 쓰고 있다. (엄밀히 이 두 개념은 다르며, 김정한처럼 증상을 상징계적으로 본다면 증환은 실재적인 개념이다.) 여기서 김정한은 아니 그보다는 지젝은 ‘증상과의 동일시’를 라캉이 아니라 그의 사위인 밀레의 탓으로 돌리며, ‘증상과의 동일시’를 존재의 회복으로 본 김석과는 다르게 존재의 타협으로 본다. 김정한에게 ‘환상 가로지르기’는 상징계의 궁극적 변혁인 반면 ‘증상과의 동일시’는 환자의 임시적 치유에 불과하다. 김정한은 밀레가 후기 라캉을 받아들이면서 ‘증상과의 동일시’를 주장한 반면, 지젝은 급진적 라캉을 바탕으로 ‘환상 가로지르기’를 정신분석의 완료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환상 가로지르기는 환상과의 과잉동일시를 통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환상 즉 지배 이데올로기에는 반드시 피지배자들의 본래적 갈망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피착취/피지배 다수자가 자신의 본래적 갈망들을 인지할 수 있을 일련의 특징들을 통합시켜야 한다. 요컨대 모든 헤게모니적 보편성은 적어도 두 개의 특수한 내용을 통합시켜야 한다. ‘본래적’인 대중적 내용과, 지배와 착취의 관계들에 의한 그것의 ‘왜곡’” 이라고 지적한다. 피지배자가 이데올로기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사실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다. 그 이데올로기에 피지배자가 원하는 가치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지한다고 보아야 한다. 가령 프랑스 혁명의 자유와 평등은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였지만, 그 속에는 민중의 무조건적인 평등이라는 가치가 내재해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시장의 자유와 권리의 평등을 목표로 했지만, 민중이 갈망했던 것은 분배의 평등이었다. 분명히 부르주아지의 ‘자유와 평등’은 가로질러야 할 환상이었지만, 그것은 민중의 무조건적인 평등이라는 환상과의 과잉동일시를 통해서만 전복될 수 있었다. ‘평등? 그래봤자 부르주아지만 배부른 짓이지’ 라는 냉소가 아니라, ‘그래, 우리는 누구나 골고루 나누어 가지는 평등을 원해!’ 라는 것, 평등이라는 환상에 대한 철저한 믿음, 바로 그 과잉동일시가 1830년 이후의 부르주아 체제를 끊임없이 위협에 왔던 프랑스 혁명의 전개 과정이었다.

 

 

여하튼 지젝은 지젝으로, 라캉은 라캉으로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라캉은 너무 어렵고 사실 라캉의 세미나들은 거의 번역이 되지 않아서 읽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렇지만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들 혹은 입문서들은 꽤 있는 편이니 그것부터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글들은 연구논문 형태여서 학자들 사이의 논쟁에는 생산적일지 모르나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너무 지엽적이고 설명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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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9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