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
가쿠타 미츠요 지음, 박귀영 옮김 / 콤마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만약 ~ 했다면 어땠을까?'
 살면서 한 번쯤 꼭 떠올려 보는 질문이다. 알고 보면 인간의 삶이란 수많은 선택의 집적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서 언제나 좋은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선택할 당시엔 좋은 선택 같아 보여서 했는데 막상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도 많다. 삶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으로 넘쳐 나고 그것을 모조리 다 파악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재간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정확히 내다 본 것처럼 아직 사람에겐 허락되지 않은 탓이다. 그런 우리에게, 또 그런 우리를 잘 아니까 '가지 않은 길'은 늘 미련이 되어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 다닌다. 물론 과연 그 길을 걸었다면 정말 좋았을지 어땠을지는 알 수 없다. 사람 일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내가 걸어보지 못한 길이라는 이유 그 하나만으로 무작정 지금보다 더 좋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미국의 유명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이란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이런 생각 혹은 미련에 한 번쯤 푹 잠겨 본 적이 있다면, '종이달'로 자신의 이름을 아주 인상 깊게 새긴 가쿠다 미쓰요의 '평범'에 실린 이야기들이 결코 남의 이야기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 같다. 분명 소설 속 누군가의 내면에서 자기와 아주 많이 닮아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평범'은 단편집이다. 표제작을 포함하여 모두 6편의 단편이 여기에 실려 있다. 단편마다 나오는 인물이 다르고 그리는 사건도 다르지만 그러나 일관되게 흐르는 테마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만일'이다. '또 하나의 인생'에서 그리스로 남편과 함께 여행간 고즈에도, '달이 웃는다'에서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 아내가 실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야스하루도, '오늘도 무사태평'에서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버림을 받은 후,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별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한 주부 사토코도, '주방 도라'에서 은근히 프로포즈를 바라는 여자 친구에게 미적지근하게 굴었다가 이별 통보를 받고 훗날 그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가게 되는 뎃페이도, '평범'에서 이제는 방송계의 유명 인사가 되어 버린 고교 단짝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문득 너무나 평범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기미코도 그리고 마지막 '어딘가에 있을 너에게'에서 이혼 한 날, 마치 자신의 독립에 대한 상징처럼 입양한 고양이 키치를 한 순간의 실수로 잃어버려 애타게 찾고 있는 니와코도 한 번은 떠올리는 것이다. '만약 그  때 내가 A를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B를 선택했다면 지금보다 더 괜찮았을까?'하고 말이다.

 우리가 흔히 막연히 다른 선택한 삶을 꿈꾸거나 지나간 선택을 반추하게 되는 것은 현재의 삶이 그닥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다.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만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들 때, 매장에서 내려 놓은 다른 옷이 자꾸만 생각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그머니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선택은 미련의 군불로 피어 오른다. 소설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더러는 지금 삶에 까닭모를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고 또 더러는 평온한 일상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살았는데 실은 그것이 정작 삶을 붕괴시키는 요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과거의 상처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해 현재의 일상이 늘 부족과 공허로 가득차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어떤 존재나 상황을 계기로 문득 자신의 삶이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닌가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순간 그들은 돌연 자신을 둘러싼 '평범'에 의혹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가쿠다 미쓰요가 '평범'에서 사람들을 내몰기 위해 이 단편들을 마련한 것은 아니다. 실은 그것을 통해 일상이 가진 새롭고 다양한 의미들을 다시금 깨닫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일상에 충실할 수 있도록 마련한 단편들인 것이다. 

 '만약'으로 헤어진 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 하지만 그곳에 있던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와 똑같이 나이를 먹고, '만일'을 극복해 지금에 다다른, 이따금 과거를 추억하며 그 당시 헤어진 또 하나의 '나'를 그리워한 여자였다. ('오늘도 무사태평', p. 137)
 
 평범한 것만큼 요즘 사람들이 기피하는 것도 또 없다. 누구나 평범하다는 말을 들으면 얼굴 아니면 마음 한 구석을 찡그린다. 삶이 평범하기에 권태롭고 우울에 빠지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가구타 미쓰요는 말한다. 평범한 삶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단편이 잘 보여주듯이 오늘의 평범은 과거의 수많은 선택들이 낳은 결과였다. 어느 게 정말 옳고 자신에게 좋은 지 모르면서도 했던 선택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대견해 보이기도 하는 그런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삶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인생'에서 고즈에는 이미 결혼한 몸이지만 그토록 사랑해서 불륜까지 감행했던 친구 연인들이 막상 그들이 소망했던 여행을 하자 별 것도 아닌 일로 자주 티격태격하는 것을 본다. '달이 웃는다'에서 야스히루는 아주 어릴 때 한 아주머니 택시 운전사가 운전하는 택시에 치인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용서한 것 때문에 한 사람의 일생이 바람직하게 변한 것을 목격한다. 우리의 삶이 이렇다. 과거의 선택이 정말 자신에게 좋았는지 당시에 알수 없었듯이, 오늘의 이 일상 속에서 수없이 내리는 선택도 어떤 의미가 될지 알 수 없다. 

 어쩌면 평범을 못 견뎌 하는 것은 내 삶에 대해 느끼는 부족함이 만들어낸 열등의 허상인지도 모른다. 결국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 할수록 평범하다든가 특별하다든가 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없게 될 것이다. 삶이란 의외로 많은 것이 바로 자신에게 달려 있는 법이다. '평범'은 그것을 은연 중에 깊이 깨닫게 하는 좋은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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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17-03-23 0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관심가는 책이네요.
메모해놔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ICE-9 2017-03-28 01:23   좋아요 1 | URL
앗, 쭈니님 말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데
쭈니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하네요^^

고양이라디오 2017-03-23 0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ICE-9 2017-03-28 01:25   좋아요 1 | URL
고양이라디오님도 말씀 감사합니다. 쭈니님도 그렇고, 이런 기쁜 댓글은 빨리 확인해야 하는데, 감사의 댓글이 너무 늦어 죄송하네요^^;
 

  삶의 시간이 지속될수록 갖게 되는 상실의 수도 늘어난다.

 노년이란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처연히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육신은 더이상 젊은 날과 같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은 점점 더 부재하며 신념마저 전구에 먼지가 점점 더 많이 쌓이듯 빛을 잃어간다.

영화 '로건'에서 울버린이 가지는 시간이 바로 이러하다. 



영화의 시작 장면과도 같이 현재 로건은 어둠 속에 내던져져 있다. 미래의 어느 때(영화에 정확한 시간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찰스가 '셰인' 영화를 보며 거의 백 년전 영화라고 하는 것을 보아 아마도 2050년 정도가 아닐까 싶다.), 로건은 이상한 소리를 듣고 리무진에서 화들짝 깨어나는 것으로 등장한다. 그는 퀭한 두 눈에 피로에 몹시도 쩔어 있다. 술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차 안에서 잠든 게 분명한 그의 모습엔 우리가 알던 슈퍼히어로의 모습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부랑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단지 인간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장면으로 영화는 앞으로의 이야기가 무엇일지 관객들에게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는 엑스맨 '울버린'이 아니라 인간 '로건'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살면서 우리가 경험한 것과 똑같이 한 때 자신의 앞길을 환히 비추며 어디로 가야할 지 선명하게 알려주었던 빛을 잃어버린, 그래서 이제는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갈지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는 인간 '로건'을. 우리처럼 삶에서 맛본 가득한 상실감과 패배 속에서 다만 남은 것은 압도적인 피로 뿐이라 이제는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도, 뭔가를 위해 싸운다는 것도 그저 넌더리가 나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아가기로 작정한 인간 '로건'을. 그래서 우리와 다르지 않고 때문에 그의 내면에 더욱 공감하게 되는 인간 '로건'을. 영화는 별다른 기교 없이 정직하게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로건'을 인간이라 말하지 않는다. 도움을 구하는 가브리엘라를 차갑게 외면하는 그를, 그녀가 애타게 부탁한 로라를 자신과 찰스가 위험하자 그냥 버리고 떠나는 그를, 영화는 '짐승'이라 말한다. 영화에서 그와 싸우는 인격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X-24'는 외양만이 아니라 현재 그의 내면을 거울처럼 보여주기도 하는 도플갱어다.



 인간 '로건'을 그리면서 영화는 왜 지금의 로건을 짐승이라 규정하는 것일까? 

 그것은 영화가 초반에 로건을 묘사하는 것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로건은 여러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리무진 기사로 나오는데, 그것은 마치 서부 시대에 사람들을 운송했던 말(horse)과 다를 바 없다. 이 영화가 '웨스턴'의 외양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보인다. 이렇게 보면, 왜 영화에서 달아나던 도중에 말들이 달아나는 트럭을 만나게 되며 그것을 도와주는 지도 알게 된다. 다름 아니라 말이 로건의 또 다른 자아 형상이었던 것이다. 찰스는 말들을 텔레파시로 말들을 다시 불러 들이는데, 이것은 정확히 로건을 인간이 되는 믿음으로 이끌고 있는 찰스의 모습과 겹친다. 또한 이것이 그렇게 말들의 'HOME', 집에서 찰스의 고백대로 로건 일행이 수많은 밤들 중 가장 완벽한 밤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로건에게 이제 방황의 시간을 끝낼 때가 다가왔다는 암시이며 정말 그렇게 된다. 이 때 찰스가 죽는 것은 분명 거기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인 '요트'는 불안 속의 방황을 끝내고 진짜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장소는 바깥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로건 자신의 내면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때까지 로건은 짐승이었다. 그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던 신념, 희망 그리고 책임감 모두를 잃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믿었었죠. 우리가 신의 위대한 섭리 속에 있다고 당신이 말했던 것을. 하지만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요. 난 우리가 신이 범한 오류 같아요.


 이런 면에서 로라 역시 지금 로건의 또 다른 '도플갱어'라 할 만하다.



 전혀 문명화 되지 않은, 있는 것이라곤 동물적 욕구 밖에 없는 로라 역시 'X-24'와 마찬가지로 로건의 분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가르치고 하나의 인간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그대로 로건이 짐승에서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찰스는 '에덴'이 설령 로건이 말하는 대로 코믹북 속 거짓말이라 해도 로라가 믿는 이상 거기로 데려다 줘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에덴'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바로 자신을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이 나오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 '로건'은 신약 성서의 이야기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로건에게 찾아와 로라를 맡기는 여성의 이름인 '가브리엘라'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가브리엘은 신약 성서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를 잉태했다는 것을 알린 천사의 이름이다. '가브리엘라'는 바로 그 이름을 여성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그 가브리엘과 똑같이 가브리엘라도 로건에게 자식을 데리고 왔다. 예수에겐 생물학적 아버지가 없다. 로라에겐 생물학적 어머니가 없다. 예수는 엄마에게로 왔다. 로라는 아버지에게로 온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때 로건이 찰스를 보살피는 장면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거의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로건'은 이렇게 성별의 역전이 있다.

 신약 성서와 정확히 반대되는 성별에 동일한 역할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로건을 마리아로, 로라를 예수로 보고 있다는 셈이 된다. 맞다. 나는 영화가 정확히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불성설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지 않은, 현실 속 마리아에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과연 마리아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수태를 했는가? 역사적으로 성경의 사실들을 고증하는 많은 학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혼모가 되어버린 마리아가 요셉의 도움을 받아 차츰 드러나게 될 임신 상태에 대해 쏟아지는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말이라 여긴다.



 바로 이것이 영화에서는 가브리엘라가 가지고 온 '엑스맨' 코믹북으로 재현되었다

 가브리엘라가 말한 모든 것은 사실 '엑스맨' 코믹북에 나온 것이었다. 에덴의 존재도, 그것이 있다는 좌표도 코믹북에서 가져 온 것에 불과했다. 로건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허망함에 젖는다. 가브리엘라는 자식을 데리고 왔지만 동시에 거짓도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로건이 간신히 지키고 있었던 세계를 모조리 붕괴하도록 이끌었다. 그래도 에덴이 진실이었다면 로건은 이 모든 곤경을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이 모든 여정이 허무하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공허와 파멸이 예정된 삶. 그것을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현실의 마리아도 그렇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앞다투어 찾아와 기적으로 잉태된 것에 대해 신을 찬미하며 많은 말들을 해댔지만 마리아에겐 그대로 공허한 소음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또 두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통해 이적을 믿고 꿈을 꾸지만, 그것이 모두 한낱 허망한 기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들의 절망과 그 절망속에서 그들이 자신에게 쏟아낼 분노가 무서웠을 것이다. 아마 혼자라면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 낙태마저 감행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곁에 요셉이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믿음을 가져왔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수태하게 된 것이라 날마다 그녀에게 찾아와 믿게 만들었을 것이다. 마리아 내부에선 매일 진실과 믿음이 격전을 펼쳤을 것이다. 진실은 불안과 죽음을 가져왔지만 믿음은 신념과 희망을 가져왔을 것이다. 하나님이 수태한 이 존재가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만들어 낼 세상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하나의 희망이 되고 그런 존재의 어머니로서 걸맞는 존재가 되기 위해 지금보다 더욱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신념이 되었을 테니까.


 그래서 찰스는 요셉처럼 믿음을 강조하고 로건은 마리아처럼 진실과 믿음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다 결국 마리아가 그랬듯이 하나의 확고한 길을 찾아낸다.



 신약 성경의 틀을 빌려온 '로건'은 이렇게 '믿음'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영화가 누누이 말하고 있는 바는 '믿음의 대상이 현존하느냐 부재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이것은 그대로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지만 세상에서 아무런 보상을 얻지 못할 때 그렇다고 그 삶이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는가와 연결된다.). 옳은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 믿음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에 나오는 '셰인'이라는 영화로 더욱 부각된다.

 찰스는 호텔에서 로라에게 자신이 어릴 때 보았던 영화 '셰인'을 보여준다. 셰인은 마침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아이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로라가 영화 속 아이처럼 그것을 주의 깊게 듣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로라를 조금은 인간답게 행동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영화 '셰인'은 픽션이다. 셰인과 아이는 허구의 인물이고 셰인이 말하는 대사는 작가가 상상한 말을 대신 전하고 있을 뿐이다. 알고 보면 '셰인' 역시 가브리엘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 '셰인' 자체는 로라가 가지고 있었던 '엑스맨' 코믹북이나 다를 바 없다. 로라 역시 코믹북을 읽으면서 그것을 진짜로 믿었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와 살아갈 바를 설정했으니까. 실은 거짓과 환영일 뿐이었으나 그것이 진실이라 믿음으로써 찰스는 오늘의 찰스가 되었고 로라도 보다 인간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 '셰인'을 보는 장면에서 로건이 사실과 믿음 앞에서 앞으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는 이미 드러나 있었던 셈이다.



 나는 앞서 찰스의 마지막 대사는 로건이 그토록 찾았던 진정한 안식의 장소는 바로 로건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 혹은 마련하는가? 바로 그래서 나는 로건이 아버지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란 존재는 무엇보다 대표적인 누군가를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가능한 반문이 하나 있다. 로건은 계속 찰스를 맡고 있었다. 그건 책임이 아니었나? 합당한 반문이다. 로건은 찰스와 로라 모두를 책임졌다.


 하지만 찰스에 대한 것과 로라에 대한 것은 다르다.

 찰스는 죽기 직전에 자신이 일으킨 고백에 대해 참회한다. 그러면서 로건이 내내 주었던 약이 실은 그 비극을 일으킨 죄책감에서 달아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로건은 그동안 찰스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망각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는 데 일조했다. 로건은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호는 아니었다. 근대 이후 개인이 천부인권의 존재로 부상하고 그에 따라 개인의 인격은 어디까지나 책임으로 그 존부가 결정되었다. 속죄는 인격을 가진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로건은 찰스가 그런 참회와 속죄 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것은 로건이 찰스를 비인격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영화는 초반에 로건이 찰스를 짐처럼 여기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로건 보다 더 사실에만 집착하는 칼리번은 더욱 그렇게 여기고 있다. 로건과 칼리번에게 찰스는 인격적 존재이기 이전에 파멸을 가져올 지도 모를 병기다. 사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찰스의 폭주는 찰스가 진정으로 인격적인 존재가 되려면 필연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이 저지른 비극을 기억하고 그것에 대해 속죄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은 그야말로 자신의 세계가 산산히 부서지는 것과 똑같은 충격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찰스에 대한 로건의 책임은 진정한 책임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위험한 맹수를 우리에 가두고 돌보는 간수의 의무 비슷한 것이었다. 책임의 참모습은 어디까지나 맡은 대상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에서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로라에 대한 로건의 책임이야말로 그가 보여주는 진정한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책임이 그가 그토록 바랐던 안식의 거처를 마련한다. 진정한 안식은 몰려오는 삶의 위협과 공포로 부터의 도피로 얻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위협과 공포가 자신에게 더이상 아무 것도 아닐 때라야 가능하다. 맞서 싸우면서 관통해야만 누릴 수 있다. 안식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바뀌지 않고선 안식도 얻을 수 없다. 그 변화를 진정으로, 또 가장 빨리 가져다 줄 수 있는 게 바로 타인에 대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로건은 로라에 대한 책임을 떠 맡기로 작정했을 때 이미 안식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찰스의 마지막 말은 바로 이것을 가르키고 있었다. 믿음은 이 책임을 적극적으로 맡도록 하고 그 범위를 확장한다. 보상이나 결과를 먼저 헤아리면 섣불리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때로는 나와 가까운 사람 혹은 내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책임지려 하기도 한다. 바로 그 예상과 타산으로 위축되는 책임을 믿음은 과감히 능동적으로 만들며 나와 전혀 관계 없는 이에게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믿음과 책임은 이렇게 연결된다.


'로건'은 한 마디로 이렇게 트럼프 시대에 접어들어 더욱 타인에 대한 적대와 사리사욕을 추구하게 된 지금에 있어 어떻게 짐승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말하는 영화다. 나는 분명히 이 영화가 트럼프 시대에 대한 하나의 발언이라 믿는다. 웨폰 X로 만들어지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대로 현재 미국에 미래가 없다는 것의 암시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영화가 로건을 하필이면 마리아로 그리고 있는 지도 어느 정도 이해되는 것 같다. 로건은 아이들을 구해 인류에게 미래를 낳는 산모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아이들은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로건을 보며 "셰인'에게서 삶의 모범을 찾았던 아이처럼 어떻게 살 것인지 그 모델을 확인한다. 뒤이은 아이들의 저항은 분명 그런 깨달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로건이 낳은 미래가 인류의 구원이라는 것은 로라가 예수요, 아이들이 바로 그 예수의 사도들이라는 것으로 암시된다. 왜냐하면 로건이 구한 아이들의 수가 로라를 포함하여 열 셋(아마 더 많을 지도 모른다. 내가 얼른 세었을 때는 이 숫자였는데 그래서 그냥 그 숫자라고 믿고 싶다.)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대로 예수와 열 두 사도들의 숫자다.


 그러므로 영화가 이 모든 이야기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시대의 어둠에 대해 어른으로써 어떻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것인가를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낙담과 실의 속에 어두운 과거를 지속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는가 아니면 어른으로 져야할 책임을 지고 미래를 열어가고 있는가? 슈퍼히어로가 아닌 인간을 그리는 이 영화는 그만큼 더 우리에게 윤리적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이런 시대에 꼭 필요한 윤리를. 이것이 나를 영화 '로건'을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는 영화 중 하나로 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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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7-03-1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네요. 영화 ‘셰인‘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습니다...

ICE-9 2017-03-1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독이 웨스턴 분위기로 찍은 것도 이 셰인과 관계 있지않나 생각되네요. ^^

Shining 2017-03-1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과 관련해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헤르메스님 글 읽으니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전 로라와 배우인 다프네라는 이름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만 생각이 났거든요 :)

제 앞줄에 앉으신 분은 이 영화 끝나고도 계속 훌쩍훌쩍 우시더라구요. 영원히 강할 것 같던, 시리즈 내내 강한 뮤턴트의 대명사였던 울버린의 약해진 모습도 충격이었거니와 평생 뮤턴트를 위해, 인간과의 화합을 위해 살았던 프로페서 X의 눈물어린 고해와 마지막 퇴장에 여러모로 마음이 아팠어요. 17년간 울버린으로 살기 위해 탄수화물 섭취를 극단적으로 줄였던 휴 잭맨이 해방되어서 기쁘면서도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그립고 아쉽고 그렇네요. 그래도 마지막 시리즈가 (드디어!) 잘 뽑혀서 무척 기분 좋습니다 :)

덧) 그나저나 <셰인>이라니. 누가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요ㅎㅎ

ICE-9 2017-03-21 02:28   좋아요 0 | URL
아니, 샤이닝님! 이게 얼마만에 받아보는 댓글인지!! 일단 너무 반갑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네요^^
아, 그러고 보니 ‘로라‘란 이름, 저 왠지 비라 캐스퍼리의 ‘로라‘가 떠올랐어요. 남성 중심 사회에 포획되었지만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멋지게 탈출한 소설 속 로라가 그대로 영화 속 로라와 겹쳐 보였어요. ‘셰인‘이 인용되었듯 혹시 감독은 오토 프레밍거의 ‘로라‘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하게 되네요. 저도 오랜만에 가슴 한 켠이 찡한 영화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저 역시 찰스의 모습은 너무나 가슴 아팠구요.(진심으로 감독이 눈 앞에 있었다면 꼭 그렇게 보내야만 했냐면 멱살 잡고 싶었을 정도로 ㅠ ㅠ)
저도 ‘로건‘ 정도면 피날레로써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딱 한 작품만 더 해 줬으면 좋겠어요.
바로 데드풀과의 콜라보. 울버린의 클론인 데드풀이 한 영화에 나와 이러쿵 저러쿵 하는 모습을 정말 보고 싶네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슈퍼 히어로와 웨스턴의 절묘한 조합이라니! 감독이 웨스턴에 애정이 많다고 하던데 ‘로건‘과 딱 어울리는 영화를 제대로 가져온 것 같아요^^


 


 훌륭한 영화는 포도주에 비유할 수 있다. 대부분의 영화는 음식처럼 시간이 오래 흐르면 상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수없이 겹쳐진 시간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강고한 내공을 가진 작품은 많이 없다. 그러나 정말로 훌륭한 영화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포도주가 그러하듯이 더 좋은 향과 맛을 낸다. 어쩌면 시간이야말로 진짜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감별사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2004년에 개봉된 바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정녕 포도주라 할 만하다. 그것도 아주 품질이 좋은. 13년이 흐른 후 다시 관람해 보니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감히 말하건대, 내 생각엔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25편의 영화 중에 '용서받지 못한 자', '미스틱 리버'와 함께 최고작 트로이카를 형성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영화들엔 공통점이 있다. 죽음과 죄에 대한 감각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 '미스틱 리버'의 지미 그리고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프랭키는 모두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 모두 과거에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 물론 영화에서 프랭키가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딸인 케이티가 오래도록 남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답장을 바라며 쓴 프랭키의 편지를 읽지도 않고 계속 반송시키는 것을 통해 그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케이티는 분명 아버지 프랭키에게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런 케이티의 존재는 프랭키가 왜 영화 첫 장면에 하필이면 선수의 상처를 지혈시키는 모습으로 등장했는지 알려준다. 그가 지금 하고 있으며 가장 잘 하는 일인, 상처를 심판이 보기에 아무렇지 않게 봉합하고 은폐하는 일은 실은 딸과의 관계를 그렇게 회복하고 싶은 프랭키의 간절한 바람을 나타낸 것임과 동시에 다시는 과거처럼 상처를 입히며 살지 않겠다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속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속죄의 모습은 자신이 경영하는 복싱 도장에서 더욱 드러나는데, 그 곳을 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달리 어디 갈 데가 없는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인데 바지 살 돈이 없어 늘 팬츠를 입고 다니는 데인저와 한 번도 챔피언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마지막 시합에서 한 쪽 눈까지 잃어 그대로 은퇴한 스크랩(모건 프리먼 분)이 잘 보여주듯이 프랭키는 그런 그들을 거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랭키가 겉으로는 영 탐탁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말이다. 프랭키가 그랬듯이, '용서받지 못한 자'의 빌과 '미스틱 리버'의 지미 역시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은 모두 가까운 가족들이 대신 짊어졌다. 빌은 아내를 잃었고, 지미는 딸을 잃었다. 프랭키도 딸을 잃었다. 2003년에 나온 '미스틱 리버'에 나오는 지미와 바로 다음 해에 나온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프랭키 모두 딸을 잃었다는 점에서 두 영화를 어느 정도 연장선 상에 놓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지막에 그들 모두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과 그것도 모두 무고한 자를 죽였다는 점에서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둘의 살인은 엄연히 다르다. 지미는 복수였다. 격한 감정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반면, 프랭키는 희생이었다. 이것은 그가 그것을 결행하기 전에 성당에서 만난 신부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당신은 빠져요. 프랭키. 당신은 2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 성당에 나왔어요. 그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그런 짓을 한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고통에 빠질 거고 다시는 자신을 찾지 못할 겁니다.


 프랭키 역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눈물에 푹 젖은 그의 눈과 덜덜 떨리는 입술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기에게 지금의 상황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루 하루 더 살면서 더 죽어갈 뿐이에요."


 그래서 그는 결행한다.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영원토록 끔찍한 고통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매기가 누렸던 삶에서 최고의 순간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떠날 수 있도록.

 그의 둘 도 없는 친구이자, 영화의 화자(이 영화의 이야기는 스크랩이 프랭키의 딸 케이티에게 아버지의 삶을 조금은 더 이해해달라고 보낸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이기도 한 스크랩은 프랭키가 자신의 아버지가 사랑하던 개 액셀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던 것처럼 자신도 죽여달라는 매기의 부탁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한다.



 프랭키 : 내가 그녀를 죽였어.

 스크랩 : 그런 소리 마. 매기가 처음 이 문을 들어섰을 때 배짱 말고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었어. 세상에서 자신이 되고 싶은 것에 대해 아무 기회도 갖지 못한 애였어. 자네 덕분에 그녀는 세계 챔피언과 싸울 수 있었어. 자네가 해 준 거야. 사람들은 매일 죽어, 프랭키. 복도를 청소하다가 죽기도 하고 접시를 닦다가 죽기도 하지. 그 때 그들이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할 것 같나? 나는 한 번도 제대로 한 방을 날려 본 적이 없어. 그러나 매기는 한 방을 멋지게 날렸지. 자네 때문에. 만일 그녀가 오늘 죽는다면 그녀의 마지막 생각이 무엇일 것 같나? 내 생각엔 '모두 잘 해냈어'일 것 같군."


 여기서 스크랩은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것을 향해 제대로 날린 한 방의 의미로 'shot'이란 말을 쓴다. 그런데 이 말은 프랭키가 매기에게 죽음을 선사할 때 그의 입으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내가 너에게 주사를 놓을 거야.(I'll give you shot.)"


 여기서 'shot'이 반복된 이유는 분명하다. 스크랩이 말했던 바로 그 최고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떠나게 해 주겠다는 표현이다. 이렇게 프랭키의 매기에 대한 마지막 행동은 순전한 희생이었다. 자신이 영원히 고통에 빠질 것을 알지만, 오로지 매기의 행복을 위해서 그는 그 일을 했다. 그렇다고 지미처럼 격한 감정에 흔들린 행동도 아니었다. 영화는 프랭키가 매기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장면을 차분하게 잡는다.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프랭키는 조용한 말투와 침착한 행동으로 매기에게 앞으로 자기가 할 일을 자세히 알려주고 절차를 차례대로 행한다. 그 모든 것이 프랭키의 지극히 이성적인 행위라는 것을 영화는 화면으로 보여준다. 바로 매기가 그의 진정한 '모슈쿠라'이기에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매기의 또 다른 이름이 된, 그리고 그녀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기를 나타내는 '모슈쿠라'의 의미는 프랭키가 매기를 보내는 마지막 순간 비로소 밝혀진다.


 "모슈쿠라는 나의 사랑, 나의 혈육이란 뜻이야."


 '모슈쿠라'란 말이 나타내듯, 매기는 프랭키에게 잃어버린 딸이었고, 그녀의 만남은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에게 두 번째 기회이기도 했다. 매기가 가진 이러한 의미는 자신의 고향집에 갔다가 돌아오다 들른 주유소에서 매기가 우연히 주유기 건너편의 소녀를 보는 장면에서 엿보인다.



 이 소녀는 분명 매기에게 어린 시절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이것은 이 장면 뒤에 돌아가는 차에서 프랭키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에서 드러난다. 어릴 때 매기의 집에 액셀이란 개가 있었다는 게 밝혀지는 것이다. 즉 매기는 이 소녀에게서 한 아버지의 딸인 자신을 보고 있었고 동시에 이것은 프랭키에게 매기가 지금 그 때와 같이 딸인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러한 측면을 더욱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 이 장면의 소녀 역할을 자신의 친딸에게 맡겼다. 그런 의미에서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가지는  여러 생각과 감정도 많이 투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매기와 프랭키 모두 실은 단절된 관계의 회복을 몹시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매기의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매기는 바로 그 경험을 한 뒤 이 장면을 본다. 이것은 매기에게 이제 이전의 가족과 결별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는 암시일 수도 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프랭키를 통해 그 아버지를 다시 찾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매기와 프랭키 모두 관계의 회복,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좀 더 충만해지기를 몹시 바라고 있지만 그것은 오직 과거의 수구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과거에 연연해 현재의 자신만 고집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영화는 반복적으로 재현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프랭키가 딸에게 보낸 편지가 반송되어 온 것을 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진짜 의미는 가장 마지막에 가서, 그러니까 매기의 다리가 결국은 괴사하여 잘라내야 한다는 사실을 안 날 밝혀지는데, 여기서 영화는 전혀 다른 구도로 그 장면을 잡는다. 영화에서 반송된 편지를 받는 장면은 여러 번 등장 하지만 유독 이 장면만 정반대의 구도로 담는 것이다. 그 전까지 카메라는 내내 집 내부에서 밖으로 편지 봉투를 찍었다. 이것은 다시는 과거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방어적이 된 그의 내면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그는 한 마디로 실패가 두려워 껍질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 하는 거북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무엇을 얻었던가? 아무 것도 없다. 윌리를 놓쳤고 딸과의 관계 역시 무려 23년 간 그대로이다. 그가 보관하고 있는, 딸에게 보냈다가 반송된 수 많은 편지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지 않아도 프랭키가 가지고 있는 복싱에 대한 생각은 이러한 삶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프랭키는 말했다. 복싱은 이상한 스포츠라고. 원하면 거꾸로 해야 한다. 펀치를 날리고 싶다면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그는 이런 말로 앞으로 나아가 변화 속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두려워 하는 자신의 마음을 정당화 시켰다. 하지만 원하는 곳 끝까지 가 본 적 있는 스크랩은 거기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그러나 너무 멀어지면 주먹을 날릴 수 없다."


 스크랩에 따르면 프랭키는 제대로 복싱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복싱은 이런 것이다.


  복싱엔 존중이라는 게 있어. 자신의 것을 지키면서 상대의 것을 빼앗는 것이지.


 프랭키는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에만 너무 빠져 있다. 상대에게로 나아가기 위해선 자신의 것을 먼저 내어주어야 한다는 걸 그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아마도 스크랩은 프랭키에게 매기를 지도하도록 은근히 인도했을 것이다. 시골의 깡촌에서 상경하여 자신의 삶이 쓰레기라는 것을 벌써 절감해 버린 여자. 가족이라고는 자신을 조금도 인정해주지 않는 엄마에다 정부에게 양육비나 속여 먹는 여동생 그리고  감옥에 간 오빠밖에 없어 자기말고는 세상 그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는 여자.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복싱만이 삶의 유일한 희망인 여자. 그래서 30살이 되어서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남들이 뭐라고 해도 복싱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여자. 그녀가 바로 매기였다.



 "제가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죠. 중고 트레일러나 하나 사서 튀김이나 오레오나 먹으며 살아야겠죠.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이것이 제가 하면서 좋다고 느끼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이에요. 저도 알아요. 제가 이 짓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것말고 제겐 아무 것도 없어요."


 어쩌면 그런 절박함, 가진 것이 쥐뿔도 없고 누가 봐도 복싱을 하기엔 한계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밖에 없는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드는 그런 모습이 스크랩의 마음을 움직였을지 모른다. 실패와 상처가 뻔히 예상되는 데도 앞만보고 저돌적으로 달리는 매기의 모습은 분명 실패와 상처가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길 두려워 하는 프랭키와 정반대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는 매기가 프랭키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복싱에는 이런 마법의 힘이 있기 때문에...



 "만일 복싱에 마법 같은 게 있다고 한다면, 그 마법은 부러진 갈비뼈나 파열된 신장 그리고 찢어진 망막 너머에 있어. 너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 그것이 바로 복싱의 마법이지."


 자신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것. 그것이 복싱이 가진 마법의 힘이었다.

 프랭키에게 그 꿈은 잃어버린 딸을 되찾는 것이었다. 과연 스크랩의 생각대로 프랭키는 변화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게 바로 앞에서 말한 프랭키가 현관에서 편지 봉투를 보게 되는 장면이다. 거기서 영화는 처음으로 위치를 정반대로 옮겨 밖에서 안으로, 프랭키가 집 안에 놓인 편지 봉투를 보는 것을 찍는다. 밖에 있는 그의 시선 속에 안에 있는 편지 봉투가 들어온다. 이 장면은 딸에게서 반송된 편지가 영화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도는 바깥의 그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을 강조한다. 이전과 달리 그는 좀 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문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때는 프랭키가 영화에서 가장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던 순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매기 역시 처음으로 완전히 절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 프랭키는 어떠했겠는가? 프랭키의 마음이  지금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게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 바로 드러난다. 그런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고 보면 지금 나타난 문은 사실 프랭키에게 하나의 진정한 시험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이 뒤에 완전히 절망한 매기에게서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늘 '자신을 보호하라'고 말했다. 그는 되도록 상처 받지 않고 지금 있는 이대로를 지키는 게 자신이 가진 삶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매기의 부탁은 그런 원칙에 정면으로 위반한다. 예전의 그라면 결코 따를 수 없는 요청. 과연 그는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는 들어간다. 그 행위 자체로 그는 입증한다. 이제 그는 전혀 다른 자신이 되었다는 것을. 과거의 원칙을 포기하고 삶이 가져다 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걸.


 이것은 스크랩이 매기에 대해 말할 때, '매기가 문을 들어섰다'라는 문장을 썼던 것을 다시금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런 대사들을 통해 영화가 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다 분명해진다. '문'은 변화를 상징하는 존재라는 것이 말이다. 그 문이 나타남은 변화의 부름이며, 그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매기가 영화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드러났다. 그녀는 링 위에서 윌리를 열심히 치료하고 있는 프랭키를 멀리서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그런 그녀의 뒤로 'EXIT'의 문이 선명히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복싱이 현재의 비참한 삶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진정한 변화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스크랩의 '문'이란 말은 바로 이 장면과 연결되는 것이다. 매기도, 프랭키도 결국엔 자신 앞에 나타난 문을 통과했다. 과연 그 문을 그렇게 통과하자 프랭키는 예전에는 슬픔과 상처 속에 쥐었던 반송된 편지 봉투를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집으면서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성큼 사라진다.


 여기서 하는 말이지만,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단순히 복싱을 너머 진실로 우리 삶에 대해 얘기하는 영화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다. 그런 우리 앞에 놓인 삶은 예측 불가능으로 더없이 넘쳐 더욱 우리의 근심과 불안을 조장한다. 이런 상황 안에서는 누구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데인저처럼 느닷없이 패배를 당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겐 우연이 필연이 된다. 한 번의 패배가 영원한 굴레가 된다. 그래서 자기에게 남아 있는 재기의 가능성을 보기 보다는, 마주할 공격과 받을 상처만 두려워 하여 자신의 굴 속에 갇히는 쪽을 택하는 이도 많다. 정녕 프랭키가 우리와 먼 모습일까? 적어도 내겐 그렇지 않았다. 프랭키의 주저와 망설임 그리고 두려움은 분명 나도 언젠가 지녔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삶은 계속 이어지고 프랭키 앞에 나타난 매기처럼 늘 우리를 변화로 이끄는 문은 나타난다. 윌리와 매기에게 다가온 챔피언 타이틀의 기회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우리는 속으로는 무척이나 변화를 바라면서도 막상 그것에 뛰어들었을 경우 어떻게 될 지 알지 몰라 그 때문에 지레 겁먹거나 막연히 안 좋을 것이란 예감으로 내 앞에 나타난 많은 문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처음엔 단순한 선택으로 여긴다. '아직 마땅한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을 뿐이야. 그런 기회가 찾아오면 반드시 뛰어들거야.'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자신이 그런 수동적인 상황에 너무나 길들여져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눈에 들어왔을 그 문조차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되는 탓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그런 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 정말 중요한 것은 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만들어 준다. 매기처럼 자신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프랭키가 윌리의 경우 그랬듯이 아무리 좋은 문이 나타나더라도 뛰어들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 능동적이며, 그래서 너무나 주체적인 매기를 통해 프랭키는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스크랩은 프랭키가 매기의 한 방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매기는 그보다 더 한 것을 프랭키에게 선사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고통이자 절망일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어둡고 작은 가게에 유폐되어 있는 그를 그려 이런 생각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그는 지금 불빛이 따스한 가게 안에서 그 스스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던 맛있는 레몬 파이를 먹고 있는 중이다. 영화에서 혼자의 모습으로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마음 편한 식사의 자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그의 안식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오랫동안 신에게서 구하려 했던 것을 매기를 통해 비로소 얻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제목의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2차 대전에 참전한 폭격기 기수에 그려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것을 제목으로 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변화를 상정하고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폭격기는 무수한 폭탄과 더불어 모든 것에 소멸을 가져 온다. 그렇게 완전한 과거의 소멸, 동시에 진정한 변화. 바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제목으로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폭격기가 일으키는 변화는 죽음을 매개로 이뤄지므로, 여기엔 매기의 죽음을 통한 변화라는 암시도 있는 셈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통해 삶을 얼마나 원숙한 시선으로 헤아리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그도 우리처럼 삶이라는 링 위에서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하고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공략한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감독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예술이기 이전에 삶으로써 영화에 다가갔다는 게 이 영화를 그의 최고 작품으로 만든 진짜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훌륭하게 숙성된 포도주를 음미하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경험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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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나와서
촛불로 시대의 어둠과 맞서 싸웠던
여러분!!
오늘의 이 승리는
전부 여러분 덕분 입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대한민국 변화의
진정한 밑거름이 되신 여러분들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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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 - 미국의 우주 경쟁을 승리로 이끈, 천재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이야기
마고 리 셰털리 지음, 고정아 옮김 / 동아엠앤비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은 트럼프 정책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 의사 표시 같았다. 인종 차별에 대한 영화들이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작과 출연진 전원 흑인으로 이뤄진 영화가 작품상을 받았다. 이건 아카데미 영화상 역사에서 최초이기도 하다.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 때부터 시작된 위기의 징후는 점차 현실화 되고 있으며 그럴수록 사람들의 불안 역시 차츰 커지고 있다. 경제가 어렵게 되면 가장 고통 받는 것은 역시 최하층의 사람들이다. 빈곤에 시달리고 제대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해 이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온 상황을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일단 차분히 생각할만한 삶의 여유가 없고, 합리적 성찰을 위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몸과 마음으로 다가오는 불편과 불안을 자기 보다 못한 존재에 대한 책임 전가와 분노로 푸는 일이 잦다. 그게 손쉽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일이 수월한 것은 분노가 향하는 이들이 가진 것과 사람들의 숫자에 있어 모두 사회적으로 한없이 열악한 계층이라 자기가 그런 짓을 해도 비난과 해코지를 받을 염려가 덜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화풀이 대상이었겠지만 그런 것이 차츰 누적되어 가면서 이젠 정말로 그들 때문에 자기가 못살고 힘들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뇌는 확증 편향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증오는 가중되고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박근혜,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의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다 이토록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하고 혀를 자꾸만 차게 되는 일들 모두 가만히 따져 보면 근본적으로 편견과 차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게을리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차별과 적대는 자신의 안정과 생존을 위해 날려 보내는 칼날이지만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는 교훈은 곧 부머랭으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더 큰 위험과 불안으로 내몰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 미국의 모습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존중과 관용은 약자의 비겁이나 이상주의적 허세가 아니다. 오늘의 불안을 잠재우고 파멸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다.



 현재 알프레드 P 슬론 재단 연구원으로 있는 마고 리 셰털리의 '히든 피겨스' 역시 바로 이것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해 준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 작품상 후보로 올랐던 영화 '히든 피겨스'의 원작이기도 하다. '히든 피겨스'는 과학에서 쓰는 용어로 주로 아직은 파악하지 못한, 그래서 숨겨진 수치를 뜻한다. 그런데 이 '피겨'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숨겨진 사람이라는 의미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책이 담고 있는 존재들이 정말 그렇다. 이 책은 40년대부터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을 했던 69년까지 NASA와 그 전신이 되는 NACA에서 일한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삶을 담고 있는데 그들 모두 미국의 항공 산업과 우주 개발에 있어 혁혁한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은 영화처럼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도로시 본, 메리 잭슨 그리고 캐서린 존슨이 바로 그들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이들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어둠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과학자로 일했던 4,50년대는 이중의 차별이 그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으니까. 하나는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이요, 다른 하나는 흑인으로 받는 차별이었다. 당시만 해도 과학은 여성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근대 초기 여성들에게 글을 쓰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처럼, 이 때에는 여성들이 과학을 한다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과학은 어디까지나 남성만의 영역이었다, 여성들은 단 한 번도 그 사회에서 과학자로 인정되지도, 대접받지도 못했다. 여성 과학자들은 그저 남성 과학자들의 보조에 불과했다. 이런 부당한 차별은 인종의 경우 더욱 심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실 흑인에 대한 차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도로시 본이 랭글리의 웨스트 컴퓨팅팀이 되어 처음 출근했을 때, 그녀가 식당에서 마주한 것은 '유색인 컴퓨터'라는 푯말이었다.


 딱 그 대부분의 집단은 습관에 따라 앉았지만, 웨스트 컴퓨터들은 지시에 따라 앉았다. 식당 뒤쪽의 한 테이블에 흰색 종이 표시판이 있었다. 거기 깨끗하게 새겨진 검은 글자 '유색인 컴퓨터'는 식당의 위계를 분명히 알려 주었다. 그것은 웨스트 에이리어 식당의 유일한 표시판이었다. 다른 집단은 이런 좌석 지정을 받지 않았다. 청소부, 인부, 식당 일꾼은 그 식당에서 식사하지 않았다. 웨스트 컴퓨팅의 여자들은 연구소의 유일한 흑인 전문가 집단이었다. 딱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통합되지도 않았다.(p. 73)


 그녀들은 화장실도 따로 써야 했다. 메리 잭슨은 처음 랭글리에 갔을 때, 자기 같은 흑인들은 따로 유색인 화장실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경악한다. 화장실을 애타게 찾고 있는 그녀에게 백인 여성들은 경멸과 조소만 보내왔다. 인종은 같은 여성끼리도 서로 갈라 놓았다. 인종 차별은 당시 다른 차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다른 것들은 용납될 수 있어도 인종에 대한 것은 용납되기 어려웠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파 프롬 헤븐'이다. 



 5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백인 여성은 정원사로 오게 된 흑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그렇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것은 남편 때문이었는데, 남편이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흑인과 사랑을 나눴다는 게 알려지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면서 떠났던 남편이 찾아와서 그녀를 비난한다. 어떻게 흑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느냐고? 직접 말로 하진 않았지만 그의 표정엔 '그러고도 당신이 사람이야?' 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당시 동성애자도 사회에서 허용받지 못한 존재였지만, 그런 동성애자들마저 흑인을 허용하지 않았다. 백인에게 있어 흑인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동물과 사랑을 나누는 수간(獸姦)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회로부터 소외 당하고 있다고 해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포용과 배려의 마음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다. 소외를 당하면 당할수록 낮아지는 자존감과 가중되는 불안감으로 인해 어떻게든 그 불안을 억누르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을 배척함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확보하려 들기 때문이다. '히든 피겨스'에서도 그랬다. 여기서 흑인들을 가장 많이 괴롭힌 이들은 비교적 사회적 상층부에 있는 과학자, 지식인들이 아니라 블루 칼라의 하층민 백인이었다. 결국은 별로 다를 것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유독 인종을 가지고 차별하고 적대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손쉽기 때문일 것이다. 인종의 차이는 눈에 바로 보이는 대상이니까 말이다. 결국 차별은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의 부족한 인내와 그만큼 더 달아오르는 해결에 대한 조급함이 만들어내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의 미국은 그 때와 다르다. 50년대 이후 과학을 비롯하여 흑인의 사회 진출도 많이 늘었다.(도로시 본이 처음 웨스트 컴퓨팅팀으로 갈 때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흑인 여성 중 오직 2%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계산만 하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계기는 결코 미국 내부의 자성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외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바로 냉전 시대, 미국 최대의 적국이었던 소련. 그 소련이 스프투닉 위성을 하늘로 쏘아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흑인들에게 다양한 방면의 사회 진출을 허용할 것을 압박하였던 것이다. 소련의 위성 발사 성공은 미국에게 정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때는 아직 2차 대전 당시 나카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 대한 공포가 상당할 때였다. 그런데 적국 소련의 위성이 미국의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성에서 언제든 수소 폭탄이 떨어질 수 있었다. 미국의 대중은 엄청난 공포를 느꼈고 미국 행정부는 그 공포를 달래기 위해 뭔가 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의 발전이었다. 당장 소련처럼 아이 때부터 과학 교육에 전념하도록 만드는 정책이 집행되었다. 하지만 커다란 난관이 있었다. 바로 인종 차별이었다. 이 때는 백인이 갈 수 있는 학교와 흑인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나뉘어 있었다. 마을도, 교통편도, 식당도 모두 서로에게 격리되어 있었다. 때문에 쓰지 않아도 좋을 불필요한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한 개 지을 운동장을 두 개 지어야 했고, 한 대 운영할 학교 버스를 두 대 운영해야 했으며 교실,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니 정작 교육에 쓸 재정이 없었다. 그래서 설령 유명한 백인 학교라 할지라도 돈이 없어 보수 하지 못하는 바람에 학교와 교구들은 계속 낡아지고 형편없어졌다. 이런 상황인데도 당시 교육계를 지배하고 있던 백인들은 오로지 흑인들을 자신의 학교에서 몰아내는 것에만 신경쓸 뿐, 교육에 대해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에서 쏘아올린 스푸트닉이 이 모든 것을 삽시간에 바꿔버린 것이다. 쓰나미처럼 몰려온 공포로 인해 미국 사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둘로 흑인들에게 학교를 개방하고 널리 사회 진출을 허용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흑인 여성 과학자 캐서린 존슨 역시 이것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인종 국가 미국, 모두들 지금 미국이 가진 저력은 미국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종과 이민자 때문이라고 말한다. 쇄국이 아니라 개방이 오늘의 미국을 만든 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실상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가 더 많이 자행되었다. 그들은 내부에 온갖 격리 영역들을 만들고 위계와 차별을 통해 존속했다. 스푸트닉처럼 외부의 압력으로 거기에 가시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땅 속을 흐르는 물처럼 드러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랬기에 다시 한 번 트럼프 대통령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민중들은 이미 스푸트닉 때 인종 차별이 어떤 부작용을 가져오는지 여실히 경험했다. 소련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미국이었지만 인종 차별 때문에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모으지 못했고 그래서 끝내 머리에 파멸을 가져올 수소 폭탄을 이고 사는 공포를 맛보았다. 그 때, 그들은 얼마나 후회했는가? 그래서 흑인들에게 학교를 개방해도, 사회 진출이 허락되어도 별 말 없이 내버려 두었다. 그랬던 그들이, 예전 그들의 후회를 깡그리 잊고 다시 인종 차별을 획책하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외부의 압력으로 인한 변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자신에게 닥쳐온 문제와 상황들을 그 누구의 판단도 아닌 자신의 힘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며 실천하는 것에서 가능하다. 내부로 부터의 자발적 변화만이 남도 살리고 나도 살리는 진정한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흑인 제임스 톰슨이 '왜 우리를 차별하고 배척하는 미국을 위해 2차 대전에 나가 싸워야 하는가?'에 대해 '피츠버거 커리어'에 보낸 투고문에서 강조했던 '이중의 승리'도 바로 그것이었다.


 "유색 미국인들은 더블 V- 이중의 승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첫 번째 V-는 외부의 적에 대한 승리이고, 두 번째 V-는 내부의 적에 대한 승리이다. 이 나라에서 추악한 편견을 자행하는 자들은 추축국 군대만큼이나 확실하게 우리의 민주적 정부를 해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p. 64)


 그런 사유와 성찰에 있어,'히든 피겨스'는 꽤 의미 있는 여정을 선사한다. 항공과 로켓 과학이 나오고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전혀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영화만큼 흥미로우며 페이지 또한 거침없이 넘어간다. 저자 마고 리 셰털리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하는 데만 5년을 투자했다고 한다. 그 5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책 자체가 온전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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