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고 말해 스토리콜렉터 52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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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갇힌 소녀'한 소녀가 갇혀 있다. 지금 그녀의 나이 열 여덟. 열 다섯 살에 친구와 함께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현재 3년째 감금 중이다. 그 일로 그들의 고향 빙엄은 완전히 뒤집혀졌다. 부모와 경찰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그들을 찾았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자식의 생사를 몰라 애타는 부모의 마음을 뒤로 하고 그들은 '빙엄의 소녀들'로 불리며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었다. 범인이 빛이 없는 곳에 물도 먹을 것도 거의 없이 방치하여 갖은 학대를 다 했으나 그들은 조금도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분투했다. 사회는 죽었다며 포기하고 서둘러 잊었으나 그들은 자신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사회의 무시와 망각이 천벌을 받는 것일까? 우리의 주인공, 파킨슨 병을 앓는 임상 심리학자 조지프 올로클린은 영하 26도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있다. 지금 런던은 남극 대륙을 횡단하는 스콧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만큼 극지의 공간이다. 그리고 공항마저 폐쇠된 고립의 장소다. 거기서 조지프는 자신의 딸, 찰리와 함께 한다. 갇힌 소녀들 역시 누군가의 딸이듯 찰리는 그들과 비슷한 입장을 공유한다. 비록 육체는 아빠와 함께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빠에게서 이탈하려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조지프는 그 상황이 혼란스럽다. 그는 기드온 때문에 한 번 딸을 잃어본 적이 있다. 그 격심한 공포 속에서 괴물로 넘쳐 나는 이 사회에 딸을 내보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치 그 마음을 대변한 것처럼, 조지프는 찰리를 마중나온 플랫폼에서 우연히 낯선 청년이 찰리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뒤, 다시 말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찰리의 모습을 목격한 후, 찰리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다 호수에서 얼어죽은 찰리와 비슷한 연령의 여성 시체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어쩌면 찰리와 그 청년이 했을 지도 모를 한 커플이 열차 안에서 낯뜨거운 애정 행각을 벌이는 것을 본 직후에 말이다. 그 광경은 분명 조지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잘 봐! 찰리가 네 경계를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이렇게 되길 원해?' 그렇지 않아도 찰리가 지금 사귀는 남자 친구 제이콥 때문에 조지프의 심기는 영 좋지 않다. 나이도 훨씬 많은 데다 사는 꼴도 영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헤어진 아내 줄리아는 조지프에게 찰리가 제이콥과 헤어지도록 하라고 종용 중이다. 그와 별도로 조지프는 찰리가 이대로 세상에 정착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더 많은 삶에 깃든 기회를 누리길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품에 두고 보호하고 싶은 욕망과 충돌한다. 조지프는 한 마디로 혼란스럽다. 우리에게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으로는 네 번째로 소개되는 '미안하다고 말해'는 바로 이런 조지프의 혼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즉 소설의 주된 미스터리가 되는 '빙엄의 소녀들'이 바로 조지프의 찰리에 대한 복잡한 감정의 투영인 것이다.




 때문에 나는 무엇보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형식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갇힌 소녀중 하나인 파이퍼 해들리의 고백 혹은 기록과 조지프의 이야기가 병행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파이퍼의 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배턴을 주고 받듯 조지프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성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비롯하여 이미 익숙한 미스터리 플롯이다. 거기서 피해자의 고백 혹은 기록은 어디까지나 미스터리에 충실한 플롯의 한 부분으로써 기능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르다. 물론 여기서도 미스터리 플롯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보다 더 큰 역할이 있다. 바로 특히 찰리에 대한 조지프의 태도에 대한 반향의 기능도 한다는 것이다. 주의해서 읽어 보면 파이퍼의 이야기와 다음에 이어지는 조지프의 이야기는 어떤 연속성이 있다. 다시 말해 파이퍼의 이야기는 조지프가 찰리에게 취했던 태도에 대한 반응으로 읽힐 수 있다는 얘기다. 마치 조지프와 찰리가 속내를 모조리 털어놓는 무언의 대화라도 하듯이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소설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우리는 조지프가 임상 심리학자라는 것을 안다. 그는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분석하는 게 일이다. 하지만 조지프의 심리를, 그것의 진짜 의미를 밝혀내는 눈은 소설에 없다. 조지프는 모두를 보지만 조지프의 내면의 진실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게 파이퍼의 이야기다. 즉 파이퍼에 의해 조지프의 찰리에 대한 모든 태도의 밑바닥에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이런 말도 가능하다. 파이퍼의 고백을 통해 비난 받고 단죄되는 것은 비단 범인만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에서 범인과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조지프도 그 대상이라고. 놀랍지 않은가? 다른 텍스트를 통해 지금 진행 중인 주인공의 행위나 태도에 대한 비난과 단죄가 즉시 이뤄지다니. 범인과 조지프가 실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은 결말에서 더욱 드러난다. 즉 결말이 그렇게 된 것은 오직 하나 범인과 조지프가 실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빙엄의 소녀들'을 납치한 범인이 소녀들에게 '조지'라 불리워지는 이유도 그가 조지 클루니를 닮아서가 아니라 주인공 '조지프'와 비슷한 이름으로 만들어 범인이 주인공의 분신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미안하다고 말해'는 두 가지 층위의 이야기가 한 소설에 통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 층위에선 여느 스릴러 소설과 다를 바 없이 기승전결로 촘촘히 꽉 짜인 플롯이 독자를 이끌고 간다. 그러나 심층적 층위에선 플롯 보다 아빠와 딸의 대화처럼 구성된 과정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거기서는 모든 게 독자에게 레퍼런스가 된다. 어쩌면 실제 삶에서 조우하게 될 지도 모를 문제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이런 저런 사유의 도우미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이야기이니만큼 아무래도 주로 부모와 자식 관계의 일이 되겠지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다. 그래서 소설에서 실제 예를 하나 들어보려 한다. 조지프가 경찰의 부탁 때문에 부부 강간 살해 사건의 주요 용의자인 오기 쇼를 심문하기 위해 먼저 범죄 현장부터 들르는 장면이다. 거기서 조지프는 이런 말을 한다.


 심리학자는 형사와 다른 관점에서 범죄현장을 바라본다. 경찰은 물리적 단서와 목격자를 찾아 수색한다. 나는 전체 그림을 보려 노력한다. 주요 지형지물의 특징들을. 예를 들어, 어떤 도로들은 심리적 장벽 역할을 수행한다. 그 한쪽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 반대쪽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철도선과 강들도 마찬가지다. 경계는 행동을 바꾼다.(p. 49)


 이 말을 할 때 그는 범죄로 불타버린 집을 보고 있다. 그가 경계 운운 한 것은 경계를 확실히 해 놓지 않아서 집에 있었으면서도 희생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구나 이 현장은 유괴된 소녀가 원래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그 역시 경계가 허물어졌기에 생긴 일이었다. 경계를 지키는 개가 없어졌다는 게 이것의 단서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조지프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더욱 확고히 해야겠다는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지프가 스스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경찰이 원하는 대로 오기 쇼를 분석해 주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는 그저 귀찮고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파이퍼는 이런 말을 한다. 자기가 사는 빙엄 마을 역사상 최악의 사건은 2차 대전 때 독일 폭격기가 마을 회관을 폭격한 일인데, 그 때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던 마을 회관으로 피신해 있었던 21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말이다. 그들은 조지프와 똑같이 자신이 가장 안전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죽었다. 그러니 파이퍼는 과연 조지프가 생각하는대로 확고한 경계가 쓸모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것이다. 심층적 차원의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지금 조지프가 취하는 태도는 바른 것인가?', '그것에 문제는 없는가?' 하는 것이 파이퍼의 진술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점이 눈에 들어오면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하나의 이야기 속에 이런 다층적 국면을 조형한 마이클 로보텀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니, 생각은 할 수 있어도 어떻게 이리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을까? 더구나 표면의 이야기는 심층의 이야기로 인해 전복되기도 한다. 표면의 이야기는 조지프가 빙엄의 소녀를 구하지만, 심층에선 오히려 빙엄의 소녀가 조지프를 구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미안하다고 말해'는 경계가 테마다. 경계를 벗어나거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렇게 보자면 작품 전체가 합심하여 그 어떤 경계도 내부에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조지프가 파이퍼를 구하는 것과 동시에 파이퍼가 조지프를 구하듯, 표면의 이야기와 별개로 진행되는 심층의 이야기가 있듯, 딱히 어느 하나로 정해지는 게 없는 작품이니까 말이다. 마이클 로보텀은 소설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렇게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완수했다. 정녕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마이클 로보텀의 대표작이라 평가받는지 알겠다. 다음 작품엔 그가 과연 어떤 성취를 할지 자못 궁금하다. 얼른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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