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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
가쿠타 미츠요 지음, 박귀영 옮김 / 콤마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만약 ~ 했다면 어땠을까?'
살면서 한 번쯤 꼭 떠올려 보는 질문이다. 알고 보면 인간의 삶이란 수많은 선택의 집적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서 언제나 좋은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선택할 당시엔 좋은 선택 같아 보여서 했는데 막상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도 많다. 삶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으로 넘쳐 나고 그것을 모조리 다 파악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재간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정확히 내다 본 것처럼 아직 사람에겐 허락되지 않은 탓이다. 그런 우리에게, 또 그런 우리를 잘 아니까 '가지 않은 길'은 늘 미련이 되어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 다닌다. 물론 과연 그 길을 걸었다면 정말 좋았을지 어땠을지는 알 수 없다. 사람 일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내가 걸어보지 못한 길이라는 이유 그 하나만으로 무작정 지금보다 더 좋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미국의 유명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이란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이런 생각 혹은 미련에 한 번쯤 푹 잠겨 본 적이 있다면, '종이달'로 자신의 이름을 아주 인상 깊게 새긴 가쿠다 미쓰요의 '평범'에 실린 이야기들이 결코 남의 이야기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 같다. 분명 소설 속 누군가의 내면에서 자기와 아주 많이 닮아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평범'은 단편집이다. 표제작을 포함하여 모두 6편의 단편이 여기에 실려 있다. 단편마다 나오는 인물이 다르고 그리는 사건도 다르지만 그러나 일관되게 흐르는 테마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만일'이다. '또 하나의 인생'에서 그리스로 남편과 함께 여행간 고즈에도, '달이 웃는다'에서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 아내가 실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야스하루도, '오늘도 무사태평'에서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버림을 받은 후,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별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한 주부 사토코도, '주방 도라'에서 은근히 프로포즈를 바라는 여자 친구에게 미적지근하게 굴었다가 이별 통보를 받고 훗날 그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가게 되는 뎃페이도, '평범'에서 이제는 방송계의 유명 인사가 되어 버린 고교 단짝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문득 너무나 평범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기미코도 그리고 마지막 '어딘가에 있을 너에게'에서 이혼 한 날, 마치 자신의 독립에 대한 상징처럼 입양한 고양이 키치를 한 순간의 실수로 잃어버려 애타게 찾고 있는 니와코도 한 번은 떠올리는 것이다. '만약 그 때 내가 A를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B를 선택했다면 지금보다 더 괜찮았을까?'하고 말이다.
우리가 흔히 막연히 다른 선택한 삶을 꿈꾸거나 지나간 선택을 반추하게 되는 것은 현재의 삶이 그닥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다.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만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들 때, 매장에서 내려 놓은 다른 옷이 자꾸만 생각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그머니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선택은 미련의 군불로 피어 오른다. 소설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더러는 지금 삶에 까닭모를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고 또 더러는 평온한 일상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살았는데 실은 그것이 정작 삶을 붕괴시키는 요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과거의 상처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해 현재의 일상이 늘 부족과 공허로 가득차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어떤 존재나 상황을 계기로 문득 자신의 삶이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닌가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순간 그들은 돌연 자신을 둘러싼 '평범'에 의혹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가쿠다 미쓰요가 '평범'에서 사람들을 내몰기 위해 이 단편들을 마련한 것은 아니다. 실은 그것을 통해 일상이 가진 새롭고 다양한 의미들을 다시금 깨닫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일상에 충실할 수 있도록 마련한 단편들인 것이다.
'만약'으로 헤어진 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 하지만 그곳에 있던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와 똑같이 나이를 먹고, '만일'을 극복해 지금에 다다른, 이따금 과거를 추억하며 그 당시 헤어진 또 하나의 '나'를 그리워한 여자였다. ('오늘도 무사태평', p. 137)
평범한 것만큼 요즘 사람들이 기피하는 것도 또 없다. 누구나 평범하다는 말을 들으면 얼굴 아니면 마음 한 구석을 찡그린다. 삶이 평범하기에 권태롭고 우울에 빠지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가구타 미쓰요는 말한다. 평범한 삶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단편이 잘 보여주듯이 오늘의 평범은 과거의 수많은 선택들이 낳은 결과였다. 어느 게 정말 옳고 자신에게 좋은 지 모르면서도 했던 선택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대견해 보이기도 하는 그런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삶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인생'에서 고즈에는 이미 결혼한 몸이지만 그토록 사랑해서 불륜까지 감행했던 친구 연인들이 막상 그들이 소망했던 여행을 하자 별 것도 아닌 일로 자주 티격태격하는 것을 본다. '달이 웃는다'에서 야스히루는 아주 어릴 때 한 아주머니 택시 운전사가 운전하는 택시에 치인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용서한 것 때문에 한 사람의 일생이 바람직하게 변한 것을 목격한다. 우리의 삶이 이렇다. 과거의 선택이 정말 자신에게 좋았는지 당시에 알수 없었듯이, 오늘의 이 일상 속에서 수없이 내리는 선택도 어떤 의미가 될지 알 수 없다.
어쩌면 평범을 못 견뎌 하는 것은 내 삶에 대해 느끼는 부족함이 만들어낸 열등의 허상인지도 모른다. 결국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 할수록 평범하다든가 특별하다든가 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없게 될 것이다. 삶이란 의외로 많은 것이 바로 자신에게 달려 있는 법이다. '평범'은 그것을 은연 중에 깊이 깨닫게 하는 좋은 단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