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킥 애스 - 아웃케이스 없음
매튜 본 감독, 니콜라스 케이지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마크 밀러의 원작도 매튜 본의 영화도 본질적으로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도대체 왜 슈퍼히어로물을 보는(혹은 읽는)걸까?”
여기서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의 대답을 말하기 전에 생각나는 ‘마팔다’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만화가 뀌노의 한 만화를 인용하고 싶습니다.



뀌노는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을 담은 4컷 만화를 많이 그렸는데, 이런 만화가 하나 있습니다.

거대한 회사라는 조직에서 일하는 한 우울한 사무원이 주인공인데

그는 일하다 가끔 스스로 자괴감이 들 때마다 화장실로 향합니다.

거기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마주보며 그는 누군가의 사진을

자기 얼굴에 갖다 댑니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체 게바라’이죠.

그렇게 그는 거울을 통해 ‘체 게바라’가 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한 번

호탕하게 웃고는 다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반복하기 위하여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체 게바라’의 사진을 얼굴에 쓰는 것이

자신이 자기 삶에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로 이 뀌노의 ‘체 게바라’ 가면 쓰기 행위와

사람들이 슈퍼히어로 장르물을 보는 이유가 결국은 같다는 것이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래도(이것은 비단 이 영화만은 아니라 모든 슈퍼히어로물에서

다 그렇습니다만) 영화속에서 자주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게 변신과 코스튬플레이는 바로 그와 같이 삶의 무의미성에 짓눌려버린

현대인들의 소박한 자기 위안 행위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건 결국 그 출발점이 동일하다는 것 뿐이고 사실,
이 소박한 자기 위안적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일단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영화의 시작은 높은 빌딩의 옥상에서 슈퍼히어로로 코스튬을 한 사람이

거기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특별한 계기를 만들기 위해

용기를 내지 않는 것인가!’ 선언하면서 뛰어내리죠.

그가 추락하는 도중 날개를 펴자 사람들은 진짜 히어로가 나타난 줄 알고

박수를 칩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대로 추락사하고 말지요.

여기서 마크 밀러는 그것이 바로 신문에서 ‘킥 애스’에 대한 것을 읽고

따라하다 죽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해서, 원작의 끝부분에 그는 다시 등장하는데,

시점은 영화 처음의 뛰어내리기 바로 전 빌딩의 옥상으로 오르는 모습입니다.

역시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곧 자신에 대한 기사를 읽게될 것이라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추락해서 죽어버렸죠.



하지만 매튜 본은 그자가 정신병력으로 인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해서

죽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매튜 본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짓고 시작합니다. 이것만 봐서는 매튜 본도 마크 밀러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되어질수록 그가 추구하는 것은 슈퍼히어로를 통한 대리충족

입니다.(그것이 아마도 힛걸의 비중을 원작보다 꽤 많이 다룬 이유일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처음의 빌딩 옥상에서의 추락 상황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고

거기서 추락이 아니라 비상하는 걸 보여줍니다.(원작에는 없는 부분입니다.)

슈퍼히어로를 통한 대리만족의 최종 완성판 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은 시작은 동일하였으나 도착한 곳은 서로 달랐습니다. 마크 밀러는 ‘킥 애스’를 통해 오시이 마모루나 안노 히데야키 처럼

만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현실로 다시 내동댕이치려 하지만, 매튜 본은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꿈을 간접적이나마 실현시켜주려 합니다.



원작에서 드러나듯이, 마크 밀러에게 ‘가면쓰기’는 데이브가 왕가슴을 보며 자위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행위입니다. 자위의 끝이 결국 허무한 것처럼, 데이브 역시 그렇게 험란한 전투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상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아니, 더 처참합니다.

데이브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케이티에게 용기있게 자신이 게이가 아니라고 고백했다가 냉정하게 차이고 심지어 그녀는 친구 흑인에게 그를 구타하라고까지 합니다..

그렇게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온 밤, 데이브에게 케이티의 친구가 보낸 사진 하나가

핸드폰으로 전송되는데, 그건 케이티가 그 흑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독백을 남기며 원작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칸막이 안에 담겨 닫힌 문 뒤에서…

“나는 내 삶에서 이 이상 낙담한 적이 없었다.

나는 부끄럽지만 인정해야겠다.

그것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버려 며칠 밤을 울며 지샜다는 것을…”



마크 밀러는 데이브에게 가차없는 ‘no happy ending‘을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거기까지 데이브에게 감정이입되어 함께 온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대리만족을 느낄 여지를 전혀 주지 않습니다.

남는 건 다만 허무함과 씁쓸함.
그것은 마치 가면을 벗고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정해진 일을 해야만 하는


만화속 인물이 느꼈을 씁쓸한 감정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마크 밀러는 ‘킥 애스’를 통해 슈퍼히어로물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위 행위와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것은 바로 빅 대디의 최후의 장면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영화와 원작이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이 바로 빅 대디의 설정일 것입니다.

영화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아내의 복수를 위해 ‘빅 대디’가 되었다는 설정이지만

원작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레드 미스트의 간계로 데이브와 함께 붙잡힌 ‘빅 대디’.

마피아들은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을 합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자신들을 그렇게 괴롭혔는가 알기 위해서이죠.

결국 빅 대디는 그의 최후에 이르러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은퇴한 전직 경찰 같은게 아니야 난 회계사였어

신용회사를 위해 숫자 세는게 고작이었지

거기다 나를 정말 증오하는 아내랑 결혼했었지. 당신 같으면 그런 삶에 만족하겠어?

나는 내 친구도 싫었고 삶 자체가 싫었다. 그래서 딸애를 데리고 도망쳤어.

그녀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주려고…”

“난 만화광일 뿐이야. 데이브, 자네와 마찬가지지.

민디는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지만, 난 그저 또 다른 한 명의 후레자식에 지나지 않아.”

“제길! 그럼 너 같은 만화광이 왜 우리를 뒤쫓았던 거냐?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 왜 하필이면 내 부하들을 골랐던 거냐구? 이 자식아!”

“간단해. 우리에겐 악당이 필요했으니까?”

“뭐?”

“난 민디에게 정말 살아 숨쉬는 삶을 주고 싶었다.

민디가 아메리칸 아이돌이나 보면서 자라는 걸 원치 않았어..

나는 민디가 뭔가 다른 특별한 것이 되길 원했다.”

그리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 역시 원작에서 사라집니다.



이와 같은 데이브와 빅 대디의 마지막 모습의 유사성은

(데이브는 케이티를 잃었고, 빅 대디는 민디를 잃었습니다.)

마크 밀러가 사실은 빅 대디와 데이브를 일종의 같은 연장선상에 놓은 인물로

설정하였음을 드러내 줍니다.(어쩌면 빅 대디는 데이브의 미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둘 다 그렇게 자기 위안적 행위에 불과한 것을 자기 본질로 체화시키려 하다가

처벌을 받는 것이죠.(아마도 그것이 데이브가 고문을 당할 때 거기에 전기 고문을

받는 이유이고 같은 의미에서 ‘설계’한 빅 대디는 머리에 처형을 당하는 것일 겁니다.)

마크 밀러는 이렇게 슈퍼히어로물의 한계를 명확히 긋고 싶어합니다.

환상은 환상일 뿐이고 환상과 현실을 혼동해 그것에게 위안 이상의 것을 받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이떻게 보면 슈퍼히어로물을 쓰는 작가로서 그는 꽤 자학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WANTED나 OLD MAN LOGAN 처럼, 슈퍼히어로 보다 슈퍼빌란에게

더 끌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에 레드 미스트가 하는 대사 ‘WAIT UNTIL THEY GET A LOAD OF ME’는 바로

죠커의 유명한 대사이기도 하죠.)



하지만, 매튜 본은 다릅니다.

영화엔 더 이상 원작에서 보여지던 처절함은 없습니다. 오히려 슈퍼히어로물의

장르적 쾌감으로 충만합니다. 그것도 아주 완성도 높게…

그렇게 매튜 본은 우리들에게 슈퍼히어로물을 통한 대리충족을 듬뿍 느끼게 해줍니다.

원작에서 데이브나 ‘빅 대디’의 가면은 무참히 찢겨 나갑니다. 고문을 당하는 순간

데이브의 가면은 반쯤 찢겨져 나갔고, 빅 대디는 가면이 벗겨져 얼굴이 엉망인 상태에서

처형됩니다. 마크 밀러는 이렇게 그들의 가면을 벗겨 가면을 벗은 그들이 현실에서 얼마

나 초라하고 무력한지 보여주려 합니다.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는 존재는 처음부터 슈퍼

히어로로 자라온 민디 정도죠.

하지마 매튜 본은 그 누구의 가면도 벗기지 않습니다. 빅 대디 역시 최후의 순간에도

그 가면을 벗지 않죠. 매튜 본은 그렇게 슈퍼 히어로를 끝까지 슈퍼 히어로로 남겨두려

합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느끼고 싶은 슈퍼 히어로를 통한 대리만족을 보존시켜 주려

하려는 것이죠.



이상, 간략하게 마크 밀러의 원작과 매튜 본의 영화가 어떻게 다른가를 얘기했습니다만

섣불리 뭐가 더 옳다고 말 할 수는 없겠죠.



여기서 다시 뀌노의 1칸 짜리 만화 하나를 인용하려 합니다.

그 만화는 극장 내부를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엔 지금 찰리 채플린이

주연한 모던 타임즈에서 유명한 장면중 하나인 구두끈을 스파게티 처럼 먹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이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뀌노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층을 묘사해

보여줍니다. 맨 위층의 100달러 로얄석의 관객들은 너무 웃기다며 마구 웃습니다.

하지만 맨 아래 거의 바닥의 1달러의 관객들은 그것이 자기 얘기 같아서 씁쓸한 표정입

니다. 뀌노는 이렇게 같은 작품이더라도 자기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와 똑같이 마크 밀러의 원작을 더 선호하든, 매튜 본의 원작을 더 선호하든,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달린 일 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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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트 로커 - The Hurt Lock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영화는 일단 너무나 잘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132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내내

잔뜩 긴장한 채 보게 만드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면서도 일순 당혹감을 느끼는 건,

흔히 ‘전쟁 영화’라고 했을 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대규모 전투라든지 아니면 전쟁으로 인해 인간성이 황페화 된 것이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동료 병사들간의 진한 휴머니즘 같은…

것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거겠죠.

거기다 이 영화는 이라크전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이라크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캐슬린 비글로우의 ‘허트 로커’는 전쟁 영화가 아니라

단순히 ‘전쟁’만을 빌려온 ‘액션’영화라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 이 영화는

만일, 전쟁 영화가 전쟁의 본질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가장 전쟁 영화다운 전쟁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 만큼 전쟁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없다는 것이죠.

아니, 보여주기 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아주 뛰어나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게 <허트 로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관객이 직접 전쟁의 현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리들리 스콧의 ‘블랙호크다운’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그 영화도 그냥 관객으로 하여금 그 현장에 직접 뛰어들게 했지요.

하지만 그 영화는 그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 시간적 추이를

다 보여줍니다. 그렇게 전체적인 사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역시

전쟁을 객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허트 로커>에는 그나마도 없습니다.

<허트 로커>엔 오직 조각 조각난 단편만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 단편들마저 그리 잘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폭발물 처리반 EOD의 실제 처지와도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서 그들을 출동하게 만들지 모르는

폭발물들에게(특히 급조된 IED 같은 것들은 더더욱) ‘인과’라는게

있을리가 없을 테니까요.

이와 똑같이 전쟁에 참여하는 모두도 그저 자신이 속한

지금-여기의 상황만 알 뿐, 전쟁의 전체적인 모습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시야의 한계’는 절대적입니다.

<허트 로커>에서 병사들이 망원 렌즈를 통해서야

비로소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죠.



게다가 캐서린 비글로우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것도

관객이 EOD와 동일한 체험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주로 ‘출동-해체’의 과정으로 이루어 놓았습니다.

관객은 그들과 똑같이 아무런 사전 설명없이 느닷없이 폭발물이

있는 장소로 안내되고 그들의 시야와 똑같이 제한된 시야 속에서

사방이 한껏 열려진 장소에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과

어디서 튀어나와 폭발할지 모르는 공포를 느껴야 합니다.

(관객은 자주 등장인물의 주관적 시점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건 해체된 이후에도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마치 “대체 내가 왜 이걸 해야하지?”

라는 의문이 군인에게 허용되지 않듯이

“대체 제가 왜 저러는거야?”

라는 의문이 관객에겐 허용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유의 틈은 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마지막에

“어떻게 그렇게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덤빌 수 있느냐?”에 질문에 “나도 모르겠다.”라는 대답은

그야말로 이 영화에서는 정확한 것입니다.



전쟁이 요구하는 것은

질문과 생각이 아니라

오로지 상황이 닥쳤을 때 요구되는 반응을 위한

반사신경일 뿐이니까요.

그것이 바로 엘드리지가 군의관 앞에서 했던

“제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것 뿐입니다.

이렇게 방아쇠를 당기면 톰은 살아요.

안 당기면 그는 죽어요. 이것 뿐이에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가 살인이라는 것에 머뭇거리지 않고

전쟁이 요구하는 대로 반사신경처럼 행했다면

지금 그가 가지는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드리지가 그렇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전쟁이란 것에 그다지 중독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드리지는 영화 초반에 샌본에게 이라크에서 잔디 사업을 하면

크게 히트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에겐 이 전쟁에서 벗어났을 때

그렇게 보통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 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가 해체한 폭탄의 숫자에서 드러나듯이

전쟁에 너무도 중독된 나머지, 전장이 아니고는

그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영화의 가장 앞부분에 나오는

“전쟁은 마약이다.”라는 말은 마약에 깔려있는 중독성이야 말로

가장 전쟁의 본질을 잘 요약해 주는 말임과 동시에 캐서린 비글로우가

<허트 로커>를 통해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하지만 캐서린 비글로우는 그것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하고 느끼게 하는 것 까지 나아갑니다.



‘중독’에는 아무런 이성적 판단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중독엔 오로지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만 요구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게, 불을 켜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 처럼

자극이 있으면 단순히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즉각적인 반사신경적 행위와

같습니다. 중독은 ‘의지’와 ‘가치판단’을 뛰어넘는 영역에 있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중독이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의문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어지고 감정도 메말라

점점 자극과 반응만이 전부인 일차원적 동물로 퇴화되어 가는 것일테죠.

그리고 이건 그대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영화는 자주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무심히

지켜보고 있는 군중들도 자주 보여줍니다. 하지만 곧 코 앞에서 폭탄이

터져 사람들이 죽어나갈지 모르는데도 그들의 얼굴엔 전혀 어떤 표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무심한 표정만이 전부입니다.

후반의 ‘인간 폭탄’은 그러한 중독된 상태에서의 인간성 부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일 것입니다.



영화에서 머무르는 날짜를 카운트 하는 게 아니라

본국으로 돌아갈 날짜를 카운트 하는 것도 의미심장 합니다.

마치 이 카운트는 중독중의 사람이 그것을 끊기 위해 얼마 만큼

참았나 헤아리기 위해 날짜를 카운트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담배 같은 것을 끊을 때,

‘오늘이 끊은 지 며칠이나 되었지?”하는 것 처럼 말이죠.



거기다, 단순히 출동-해체’의 과정으로만 이루어진 이 영화는

점점 출동하는 대원들 앞에 더 더 강력한 폭탄을 준비합니다.

처음엔 대전차포 로켓 하나이던 것이 여러 개가 되고

급기야는 자살 폭탄에 인간 폭탄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처음엔 여유있게 대처하던 EOD 대원들도 이제는 말수가 없어지고

미래에 대한 계획 보다는 단지 살아남기 위한 본능만이 남아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영화는 전쟁이 일종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면

참여하는 사람들은 왜 중독되는가에 대해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건 바로 전쟁이 마약이 주는 체험과도 같이, 평범한 일상이 제공할 수

없는 극단적 체험을 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극단적인 체험은 일종의 ‘경이’를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해서

거기서 인간은 아무런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없고 그저 그것에 짓눌릴 뿐이니까요.



<허트 로커>는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 것 처럼 하면서

사실은 관객으로 하여금 절절하게 전쟁이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중독성을 정말 잘 느끼도록 해 주는 영화입니다.

전작 'K-19 위도우메이커' 의 후반부에서 리암 니슨은 재판정에 선

해리슨 포드를 위해 이런 옹호 발언을 합니다.

“당신들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지만 나는 거기서 모든 걸 지켜봤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다면 당신들은 함장님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함장님을 판단할 수 있는 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들 뿐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보기에 함장님은 우리가 보았던 가장 위대한 함장이었습니다.”

<허트 로커>는 바로 이러한 리암 니슨의 말이 잘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그렇게 전쟁 속에 던져진 자가 어떤 느낌을 가지는가?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 던져진 자에게 다가가 느끼게끔 해주는…





마침,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허트 로커>는

'K-19 위도우메이커' 와 어쩐지 좀 유사성이 느껴집니다. 리더가 교체되는 것도 그렇고

교체된 리더와 종래 있었던 구성원들과의 불화도 그렇고 거기다 엘드리지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되어라.”라고 상담해주는 군의관은

하필이면 에서 원자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어간 ‘크리스찬 카마고’였다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결론은 전혀 다릅니다.

의 결론은, 마지막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K-19’ 사건이

있은 지 25년이 지나 그제서야 그 때 동료들을 위해 희생된 동료들에 대한

추모가 허용되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행한 해리슨 포드의 추모사에서

잘 드러나듯이 일종의 ‘동료애’ 입니다 하지만 <허트 로커>는 이와 정반대에

있습니다(특히나 제임스를 해리슨 포드로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더 극명하게

벌어집니다.) 여기엔 남자들만의 끈적한 유대감도 없고, 유일하게 휴머니즘으로

보였던 행위들도 허무한 비웃음거리로 돌아올 뿐입니다. 남은 건 다만 점점

깊어지는 고독뿐이죠.

물론 고독은 중독된자의 유일한 동반자입니다만…



그리고 가장 중독된 자 제임스는 전작 <폭풍 속으로>의 패트릭 스웨이지의

또 다른 버전이기도 합니다. <폭풍 속으로>에서 패트릭 스웨이지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중독되어 그것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통령 가면을 쓰고 은행을 터는

리더였습니다. 영화 <폭풍 속으로>는 마지막에 그가 50년에 한 번 찾아온다는

거대한 파도를 타기 위해 그 파도 앞으로 서핑보드를 타고 헤엄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허트 로커>에서 제임스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 폭탄을 해체하러

가는 모습이 그와 똑같이 찍혔더군요.

어쩌면 그것을 통해 패트릭 스웨이지가 그 파도 속에서 사라졌듯이,

제임스도 결국 가장 자기가 좋아한 현장에서 사라져벼렸음을 암시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촬영감독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Barry Ackroyd 입니다.

아마도 켄 로치 감독의 영화들을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꽤 낯 익은 이름이죠.
이 촬영감독의 커리어가 바로 켄 로치의 유명한 명작
‘RIFF-RAFF’와 더불어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 ‘레이닝 스톤’
‘레이디버드 레이디 버드’ ‘칼라송’ ‘빵과 장미’ ‘내 이름은 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등
수 많은 영화들을 켄 로치와 함께 만들었으니까요.
물론 이 말은 폴 그린그래스의 ‘플라이트 93’이 나왔을 때 해야만 했을 말이었겠지만요.
아님, 가장 최근의 ‘그린 존’ 에서라든가… 아무튼 너무나 반가운 이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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