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시간이 지속될수록 갖게 되는 상실의 수도 늘어난다.

 노년이란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처연히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육신은 더이상 젊은 날과 같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은 점점 더 부재하며 신념마저 전구에 먼지가 점점 더 많이 쌓이듯 빛을 잃어간다.

영화 '로건'에서 울버린이 가지는 시간이 바로 이러하다. 



영화의 시작 장면과도 같이 현재 로건은 어둠 속에 내던져져 있다. 미래의 어느 때(영화에 정확한 시간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찰스가 '셰인' 영화를 보며 거의 백 년전 영화라고 하는 것을 보아 아마도 2050년 정도가 아닐까 싶다.), 로건은 이상한 소리를 듣고 리무진에서 화들짝 깨어나는 것으로 등장한다. 그는 퀭한 두 눈에 피로에 몹시도 쩔어 있다. 술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차 안에서 잠든 게 분명한 그의 모습엔 우리가 알던 슈퍼히어로의 모습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부랑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단지 인간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장면으로 영화는 앞으로의 이야기가 무엇일지 관객들에게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는 엑스맨 '울버린'이 아니라 인간 '로건'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살면서 우리가 경험한 것과 똑같이 한 때 자신의 앞길을 환히 비추며 어디로 가야할 지 선명하게 알려주었던 빛을 잃어버린, 그래서 이제는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갈지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는 인간 '로건'을. 우리처럼 삶에서 맛본 가득한 상실감과 패배 속에서 다만 남은 것은 압도적인 피로 뿐이라 이제는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도, 뭔가를 위해 싸운다는 것도 그저 넌더리가 나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아가기로 작정한 인간 '로건'을. 그래서 우리와 다르지 않고 때문에 그의 내면에 더욱 공감하게 되는 인간 '로건'을. 영화는 별다른 기교 없이 정직하게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로건'을 인간이라 말하지 않는다. 도움을 구하는 가브리엘라를 차갑게 외면하는 그를, 그녀가 애타게 부탁한 로라를 자신과 찰스가 위험하자 그냥 버리고 떠나는 그를, 영화는 '짐승'이라 말한다. 영화에서 그와 싸우는 인격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X-24'는 외양만이 아니라 현재 그의 내면을 거울처럼 보여주기도 하는 도플갱어다.



 인간 '로건'을 그리면서 영화는 왜 지금의 로건을 짐승이라 규정하는 것일까? 

 그것은 영화가 초반에 로건을 묘사하는 것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로건은 여러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리무진 기사로 나오는데, 그것은 마치 서부 시대에 사람들을 운송했던 말(horse)과 다를 바 없다. 이 영화가 '웨스턴'의 외양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보인다. 이렇게 보면, 왜 영화에서 달아나던 도중에 말들이 달아나는 트럭을 만나게 되며 그것을 도와주는 지도 알게 된다. 다름 아니라 말이 로건의 또 다른 자아 형상이었던 것이다. 찰스는 말들을 텔레파시로 말들을 다시 불러 들이는데, 이것은 정확히 로건을 인간이 되는 믿음으로 이끌고 있는 찰스의 모습과 겹친다. 또한 이것이 그렇게 말들의 'HOME', 집에서 찰스의 고백대로 로건 일행이 수많은 밤들 중 가장 완벽한 밤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로건에게 이제 방황의 시간을 끝낼 때가 다가왔다는 암시이며 정말 그렇게 된다. 이 때 찰스가 죽는 것은 분명 거기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인 '요트'는 불안 속의 방황을 끝내고 진짜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장소는 바깥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로건 자신의 내면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때까지 로건은 짐승이었다. 그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던 신념, 희망 그리고 책임감 모두를 잃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믿었었죠. 우리가 신의 위대한 섭리 속에 있다고 당신이 말했던 것을. 하지만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요. 난 우리가 신이 범한 오류 같아요.


 이런 면에서 로라 역시 지금 로건의 또 다른 '도플갱어'라 할 만하다.



 전혀 문명화 되지 않은, 있는 것이라곤 동물적 욕구 밖에 없는 로라 역시 'X-24'와 마찬가지로 로건의 분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가르치고 하나의 인간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그대로 로건이 짐승에서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찰스는 '에덴'이 설령 로건이 말하는 대로 코믹북 속 거짓말이라 해도 로라가 믿는 이상 거기로 데려다 줘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에덴'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바로 자신을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이 나오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 '로건'은 신약 성서의 이야기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로건에게 찾아와 로라를 맡기는 여성의 이름인 '가브리엘라'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가브리엘은 신약 성서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를 잉태했다는 것을 알린 천사의 이름이다. '가브리엘라'는 바로 그 이름을 여성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그 가브리엘과 똑같이 가브리엘라도 로건에게 자식을 데리고 왔다. 예수에겐 생물학적 아버지가 없다. 로라에겐 생물학적 어머니가 없다. 예수는 엄마에게로 왔다. 로라는 아버지에게로 온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때 로건이 찰스를 보살피는 장면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거의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로건'은 이렇게 성별의 역전이 있다.

 신약 성서와 정확히 반대되는 성별에 동일한 역할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로건을 마리아로, 로라를 예수로 보고 있다는 셈이 된다. 맞다. 나는 영화가 정확히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불성설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지 않은, 현실 속 마리아에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과연 마리아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수태를 했는가? 역사적으로 성경의 사실들을 고증하는 많은 학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혼모가 되어버린 마리아가 요셉의 도움을 받아 차츰 드러나게 될 임신 상태에 대해 쏟아지는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말이라 여긴다.



 바로 이것이 영화에서는 가브리엘라가 가지고 온 '엑스맨' 코믹북으로 재현되었다

 가브리엘라가 말한 모든 것은 사실 '엑스맨' 코믹북에 나온 것이었다. 에덴의 존재도, 그것이 있다는 좌표도 코믹북에서 가져 온 것에 불과했다. 로건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허망함에 젖는다. 가브리엘라는 자식을 데리고 왔지만 동시에 거짓도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로건이 간신히 지키고 있었던 세계를 모조리 붕괴하도록 이끌었다. 그래도 에덴이 진실이었다면 로건은 이 모든 곤경을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이 모든 여정이 허무하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공허와 파멸이 예정된 삶. 그것을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현실의 마리아도 그렇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앞다투어 찾아와 기적으로 잉태된 것에 대해 신을 찬미하며 많은 말들을 해댔지만 마리아에겐 그대로 공허한 소음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또 두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통해 이적을 믿고 꿈을 꾸지만, 그것이 모두 한낱 허망한 기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들의 절망과 그 절망속에서 그들이 자신에게 쏟아낼 분노가 무서웠을 것이다. 아마 혼자라면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 낙태마저 감행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곁에 요셉이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믿음을 가져왔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수태하게 된 것이라 날마다 그녀에게 찾아와 믿게 만들었을 것이다. 마리아 내부에선 매일 진실과 믿음이 격전을 펼쳤을 것이다. 진실은 불안과 죽음을 가져왔지만 믿음은 신념과 희망을 가져왔을 것이다. 하나님이 수태한 이 존재가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만들어 낼 세상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하나의 희망이 되고 그런 존재의 어머니로서 걸맞는 존재가 되기 위해 지금보다 더욱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신념이 되었을 테니까.


 그래서 찰스는 요셉처럼 믿음을 강조하고 로건은 마리아처럼 진실과 믿음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다 결국 마리아가 그랬듯이 하나의 확고한 길을 찾아낸다.



 신약 성경의 틀을 빌려온 '로건'은 이렇게 '믿음'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영화가 누누이 말하고 있는 바는 '믿음의 대상이 현존하느냐 부재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이것은 그대로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지만 세상에서 아무런 보상을 얻지 못할 때 그렇다고 그 삶이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는가와 연결된다.). 옳은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 믿음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에 나오는 '셰인'이라는 영화로 더욱 부각된다.

 찰스는 호텔에서 로라에게 자신이 어릴 때 보았던 영화 '셰인'을 보여준다. 셰인은 마침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아이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로라가 영화 속 아이처럼 그것을 주의 깊게 듣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로라를 조금은 인간답게 행동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영화 '셰인'은 픽션이다. 셰인과 아이는 허구의 인물이고 셰인이 말하는 대사는 작가가 상상한 말을 대신 전하고 있을 뿐이다. 알고 보면 '셰인' 역시 가브리엘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 '셰인' 자체는 로라가 가지고 있었던 '엑스맨' 코믹북이나 다를 바 없다. 로라 역시 코믹북을 읽으면서 그것을 진짜로 믿었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와 살아갈 바를 설정했으니까. 실은 거짓과 환영일 뿐이었으나 그것이 진실이라 믿음으로써 찰스는 오늘의 찰스가 되었고 로라도 보다 인간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 '셰인'을 보는 장면에서 로건이 사실과 믿음 앞에서 앞으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는 이미 드러나 있었던 셈이다.



 나는 앞서 찰스의 마지막 대사는 로건이 그토록 찾았던 진정한 안식의 장소는 바로 로건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 혹은 마련하는가? 바로 그래서 나는 로건이 아버지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란 존재는 무엇보다 대표적인 누군가를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가능한 반문이 하나 있다. 로건은 계속 찰스를 맡고 있었다. 그건 책임이 아니었나? 합당한 반문이다. 로건은 찰스와 로라 모두를 책임졌다.


 하지만 찰스에 대한 것과 로라에 대한 것은 다르다.

 찰스는 죽기 직전에 자신이 일으킨 고백에 대해 참회한다. 그러면서 로건이 내내 주었던 약이 실은 그 비극을 일으킨 죄책감에서 달아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로건은 그동안 찰스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망각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는 데 일조했다. 로건은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호는 아니었다. 근대 이후 개인이 천부인권의 존재로 부상하고 그에 따라 개인의 인격은 어디까지나 책임으로 그 존부가 결정되었다. 속죄는 인격을 가진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로건은 찰스가 그런 참회와 속죄 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것은 로건이 찰스를 비인격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영화는 초반에 로건이 찰스를 짐처럼 여기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로건 보다 더 사실에만 집착하는 칼리번은 더욱 그렇게 여기고 있다. 로건과 칼리번에게 찰스는 인격적 존재이기 이전에 파멸을 가져올 지도 모를 병기다. 사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찰스의 폭주는 찰스가 진정으로 인격적인 존재가 되려면 필연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이 저지른 비극을 기억하고 그것에 대해 속죄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은 그야말로 자신의 세계가 산산히 부서지는 것과 똑같은 충격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찰스에 대한 로건의 책임은 진정한 책임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위험한 맹수를 우리에 가두고 돌보는 간수의 의무 비슷한 것이었다. 책임의 참모습은 어디까지나 맡은 대상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에서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로라에 대한 로건의 책임이야말로 그가 보여주는 진정한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책임이 그가 그토록 바랐던 안식의 거처를 마련한다. 진정한 안식은 몰려오는 삶의 위협과 공포로 부터의 도피로 얻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위협과 공포가 자신에게 더이상 아무 것도 아닐 때라야 가능하다. 맞서 싸우면서 관통해야만 누릴 수 있다. 안식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바뀌지 않고선 안식도 얻을 수 없다. 그 변화를 진정으로, 또 가장 빨리 가져다 줄 수 있는 게 바로 타인에 대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로건은 로라에 대한 책임을 떠 맡기로 작정했을 때 이미 안식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찰스의 마지막 말은 바로 이것을 가르키고 있었다. 믿음은 이 책임을 적극적으로 맡도록 하고 그 범위를 확장한다. 보상이나 결과를 먼저 헤아리면 섣불리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때로는 나와 가까운 사람 혹은 내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책임지려 하기도 한다. 바로 그 예상과 타산으로 위축되는 책임을 믿음은 과감히 능동적으로 만들며 나와 전혀 관계 없는 이에게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믿음과 책임은 이렇게 연결된다.


'로건'은 한 마디로 이렇게 트럼프 시대에 접어들어 더욱 타인에 대한 적대와 사리사욕을 추구하게 된 지금에 있어 어떻게 짐승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말하는 영화다. 나는 분명히 이 영화가 트럼프 시대에 대한 하나의 발언이라 믿는다. 웨폰 X로 만들어지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대로 현재 미국에 미래가 없다는 것의 암시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영화가 로건을 하필이면 마리아로 그리고 있는 지도 어느 정도 이해되는 것 같다. 로건은 아이들을 구해 인류에게 미래를 낳는 산모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아이들은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로건을 보며 "셰인'에게서 삶의 모범을 찾았던 아이처럼 어떻게 살 것인지 그 모델을 확인한다. 뒤이은 아이들의 저항은 분명 그런 깨달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로건이 낳은 미래가 인류의 구원이라는 것은 로라가 예수요, 아이들이 바로 그 예수의 사도들이라는 것으로 암시된다. 왜냐하면 로건이 구한 아이들의 수가 로라를 포함하여 열 셋(아마 더 많을 지도 모른다. 내가 얼른 세었을 때는 이 숫자였는데 그래서 그냥 그 숫자라고 믿고 싶다.)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대로 예수와 열 두 사도들의 숫자다.


 그러므로 영화가 이 모든 이야기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시대의 어둠에 대해 어른으로써 어떻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것인가를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낙담과 실의 속에 어두운 과거를 지속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는가 아니면 어른으로 져야할 책임을 지고 미래를 열어가고 있는가? 슈퍼히어로가 아닌 인간을 그리는 이 영화는 그만큼 더 우리에게 윤리적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이런 시대에 꼭 필요한 윤리를. 이것이 나를 영화 '로건'을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는 영화 중 하나로 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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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7-03-1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네요. 영화 ‘셰인‘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습니다...

에일로이 2017-03-1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독이 웨스턴 분위기로 찍은 것도 이 셰인과 관계 있지않나 생각되네요. ^^

Shining 2017-03-1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과 관련해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헤르메스님 글 읽으니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전 로라와 배우인 다프네라는 이름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만 생각이 났거든요 :)

제 앞줄에 앉으신 분은 이 영화 끝나고도 계속 훌쩍훌쩍 우시더라구요. 영원히 강할 것 같던, 시리즈 내내 강한 뮤턴트의 대명사였던 울버린의 약해진 모습도 충격이었거니와 평생 뮤턴트를 위해, 인간과의 화합을 위해 살았던 프로페서 X의 눈물어린 고해와 마지막 퇴장에 여러모로 마음이 아팠어요. 17년간 울버린으로 살기 위해 탄수화물 섭취를 극단적으로 줄였던 휴 잭맨이 해방되어서 기쁘면서도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그립고 아쉽고 그렇네요. 그래도 마지막 시리즈가 (드디어!) 잘 뽑혀서 무척 기분 좋습니다 :)

덧) 그나저나 <셰인>이라니. 누가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요ㅎㅎ

에일로이 2017-03-21 02:28   좋아요 0 | URL
아니, 샤이닝님! 이게 얼마만에 받아보는 댓글인지!! 일단 너무 반갑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네요^^
아, 그러고 보니 ‘로라‘란 이름, 저 왠지 비라 캐스퍼리의 ‘로라‘가 떠올랐어요. 남성 중심 사회에 포획되었지만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멋지게 탈출한 소설 속 로라가 그대로 영화 속 로라와 겹쳐 보였어요. ‘셰인‘이 인용되었듯 혹시 감독은 오토 프레밍거의 ‘로라‘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하게 되네요. 저도 오랜만에 가슴 한 켠이 찡한 영화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저 역시 찰스의 모습은 너무나 가슴 아팠구요.(진심으로 감독이 눈 앞에 있었다면 꼭 그렇게 보내야만 했냐면 멱살 잡고 싶었을 정도로 ㅠ ㅠ)
저도 ‘로건‘ 정도면 피날레로써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딱 한 작품만 더 해 줬으면 좋겠어요.
바로 데드풀과의 콜라보. 울버린의 클론인 데드풀이 한 영화에 나와 이러쿵 저러쿵 하는 모습을 정말 보고 싶네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슈퍼 히어로와 웨스턴의 절묘한 조합이라니! 감독이 웨스턴에 애정이 많다고 하던데 ‘로건‘과 딱 어울리는 영화를 제대로 가져온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