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영화는 포도주에 비유할 수 있다. 대부분의 영화는 음식처럼 시간이 오래 흐르면 상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수없이 겹쳐진 시간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강고한 내공을 가진 작품은 많이 없다. 그러나 정말로 훌륭한 영화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포도주가 그러하듯이 더 좋은 향과 맛을 낸다. 어쩌면 시간이야말로 진짜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감별사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2004년에 개봉된 바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정녕 포도주라 할 만하다. 그것도 아주 품질이 좋은. 13년이 흐른 후 다시 관람해 보니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감히 말하건대, 내 생각엔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25편의 영화 중에 '용서받지 못한 자', '미스틱 리버'와 함께 최고작 트로이카를 형성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영화들엔 공통점이 있다. 죽음과 죄에 대한 감각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 '미스틱 리버'의 지미 그리고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프랭키는 모두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 모두 과거에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 물론 영화에서 프랭키가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딸인 케이티가 오래도록 남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답장을 바라며 쓴 프랭키의 편지를 읽지도 않고 계속 반송시키는 것을 통해 그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케이티는 분명 아버지 프랭키에게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런 케이티의 존재는 프랭키가 왜 영화 첫 장면에 하필이면 선수의 상처를 지혈시키는 모습으로 등장했는지 알려준다. 그가 지금 하고 있으며 가장 잘 하는 일인, 상처를 심판이 보기에 아무렇지 않게 봉합하고 은폐하는 일은 실은 딸과의 관계를 그렇게 회복하고 싶은 프랭키의 간절한 바람을 나타낸 것임과 동시에 다시는 과거처럼 상처를 입히며 살지 않겠다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속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속죄의 모습은 자신이 경영하는 복싱 도장에서 더욱 드러나는데, 그 곳을 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달리 어디 갈 데가 없는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인데 바지 살 돈이 없어 늘 팬츠를 입고 다니는 데인저와 한 번도 챔피언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마지막 시합에서 한 쪽 눈까지 잃어 그대로 은퇴한 스크랩(모건 프리먼 분)이 잘 보여주듯이 프랭키는 그런 그들을 거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랭키가 겉으로는 영 탐탁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말이다. 프랭키가 그랬듯이, '용서받지 못한 자'의 빌과 '미스틱 리버'의 지미 역시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은 모두 가까운 가족들이 대신 짊어졌다. 빌은 아내를 잃었고, 지미는 딸을 잃었다. 프랭키도 딸을 잃었다. 2003년에 나온 '미스틱 리버'에 나오는 지미와 바로 다음 해에 나온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프랭키 모두 딸을 잃었다는 점에서 두 영화를 어느 정도 연장선 상에 놓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지막에 그들 모두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과 그것도 모두 무고한 자를 죽였다는 점에서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둘의 살인은 엄연히 다르다. 지미는 복수였다. 격한 감정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반면, 프랭키는 희생이었다. 이것은 그가 그것을 결행하기 전에 성당에서 만난 신부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당신은 빠져요. 프랭키. 당신은 2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 성당에 나왔어요. 그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그런 짓을 한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고통에 빠질 거고 다시는 자신을 찾지 못할 겁니다.


 프랭키 역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눈물에 푹 젖은 그의 눈과 덜덜 떨리는 입술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기에게 지금의 상황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루 하루 더 살면서 더 죽어갈 뿐이에요."


 그래서 그는 결행한다.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영원토록 끔찍한 고통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매기가 누렸던 삶에서 최고의 순간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떠날 수 있도록.

 그의 둘 도 없는 친구이자, 영화의 화자(이 영화의 이야기는 스크랩이 프랭키의 딸 케이티에게 아버지의 삶을 조금은 더 이해해달라고 보낸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이기도 한 스크랩은 프랭키가 자신의 아버지가 사랑하던 개 액셀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던 것처럼 자신도 죽여달라는 매기의 부탁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한다.



 프랭키 : 내가 그녀를 죽였어.

 스크랩 : 그런 소리 마. 매기가 처음 이 문을 들어섰을 때 배짱 말고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었어. 세상에서 자신이 되고 싶은 것에 대해 아무 기회도 갖지 못한 애였어. 자네 덕분에 그녀는 세계 챔피언과 싸울 수 있었어. 자네가 해 준 거야. 사람들은 매일 죽어, 프랭키. 복도를 청소하다가 죽기도 하고 접시를 닦다가 죽기도 하지. 그 때 그들이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할 것 같나? 나는 한 번도 제대로 한 방을 날려 본 적이 없어. 그러나 매기는 한 방을 멋지게 날렸지. 자네 때문에. 만일 그녀가 오늘 죽는다면 그녀의 마지막 생각이 무엇일 것 같나? 내 생각엔 '모두 잘 해냈어'일 것 같군."


 여기서 스크랩은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것을 향해 제대로 날린 한 방의 의미로 'shot'이란 말을 쓴다. 그런데 이 말은 프랭키가 매기에게 죽음을 선사할 때 그의 입으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내가 너에게 주사를 놓을 거야.(I'll give you shot.)"


 여기서 'shot'이 반복된 이유는 분명하다. 스크랩이 말했던 바로 그 최고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떠나게 해 주겠다는 표현이다. 이렇게 프랭키의 매기에 대한 마지막 행동은 순전한 희생이었다. 자신이 영원히 고통에 빠질 것을 알지만, 오로지 매기의 행복을 위해서 그는 그 일을 했다. 그렇다고 지미처럼 격한 감정에 흔들린 행동도 아니었다. 영화는 프랭키가 매기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장면을 차분하게 잡는다.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프랭키는 조용한 말투와 침착한 행동으로 매기에게 앞으로 자기가 할 일을 자세히 알려주고 절차를 차례대로 행한다. 그 모든 것이 프랭키의 지극히 이성적인 행위라는 것을 영화는 화면으로 보여준다. 바로 매기가 그의 진정한 '모슈쿠라'이기에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매기의 또 다른 이름이 된, 그리고 그녀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기를 나타내는 '모슈쿠라'의 의미는 프랭키가 매기를 보내는 마지막 순간 비로소 밝혀진다.


 "모슈쿠라는 나의 사랑, 나의 혈육이란 뜻이야."


 '모슈쿠라'란 말이 나타내듯, 매기는 프랭키에게 잃어버린 딸이었고, 그녀의 만남은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에게 두 번째 기회이기도 했다. 매기가 가진 이러한 의미는 자신의 고향집에 갔다가 돌아오다 들른 주유소에서 매기가 우연히 주유기 건너편의 소녀를 보는 장면에서 엿보인다.



 이 소녀는 분명 매기에게 어린 시절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이것은 이 장면 뒤에 돌아가는 차에서 프랭키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에서 드러난다. 어릴 때 매기의 집에 액셀이란 개가 있었다는 게 밝혀지는 것이다. 즉 매기는 이 소녀에게서 한 아버지의 딸인 자신을 보고 있었고 동시에 이것은 프랭키에게 매기가 지금 그 때와 같이 딸인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러한 측면을 더욱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 이 장면의 소녀 역할을 자신의 친딸에게 맡겼다. 그런 의미에서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가지는  여러 생각과 감정도 많이 투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매기와 프랭키 모두 실은 단절된 관계의 회복을 몹시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매기의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매기는 바로 그 경험을 한 뒤 이 장면을 본다. 이것은 매기에게 이제 이전의 가족과 결별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는 암시일 수도 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프랭키를 통해 그 아버지를 다시 찾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매기와 프랭키 모두 관계의 회복,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좀 더 충만해지기를 몹시 바라고 있지만 그것은 오직 과거의 수구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과거에 연연해 현재의 자신만 고집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영화는 반복적으로 재현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프랭키가 딸에게 보낸 편지가 반송되어 온 것을 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진짜 의미는 가장 마지막에 가서, 그러니까 매기의 다리가 결국은 괴사하여 잘라내야 한다는 사실을 안 날 밝혀지는데, 여기서 영화는 전혀 다른 구도로 그 장면을 잡는다. 영화에서 반송된 편지를 받는 장면은 여러 번 등장 하지만 유독 이 장면만 정반대의 구도로 담는 것이다. 그 전까지 카메라는 내내 집 내부에서 밖으로 편지 봉투를 찍었다. 이것은 다시는 과거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방어적이 된 그의 내면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그는 한 마디로 실패가 두려워 껍질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 하는 거북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무엇을 얻었던가? 아무 것도 없다. 윌리를 놓쳤고 딸과의 관계 역시 무려 23년 간 그대로이다. 그가 보관하고 있는, 딸에게 보냈다가 반송된 수 많은 편지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지 않아도 프랭키가 가지고 있는 복싱에 대한 생각은 이러한 삶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프랭키는 말했다. 복싱은 이상한 스포츠라고. 원하면 거꾸로 해야 한다. 펀치를 날리고 싶다면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그는 이런 말로 앞으로 나아가 변화 속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두려워 하는 자신의 마음을 정당화 시켰다. 하지만 원하는 곳 끝까지 가 본 적 있는 스크랩은 거기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그러나 너무 멀어지면 주먹을 날릴 수 없다."


 스크랩에 따르면 프랭키는 제대로 복싱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복싱은 이런 것이다.


  복싱엔 존중이라는 게 있어. 자신의 것을 지키면서 상대의 것을 빼앗는 것이지.


 프랭키는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에만 너무 빠져 있다. 상대에게로 나아가기 위해선 자신의 것을 먼저 내어주어야 한다는 걸 그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아마도 스크랩은 프랭키에게 매기를 지도하도록 은근히 인도했을 것이다. 시골의 깡촌에서 상경하여 자신의 삶이 쓰레기라는 것을 벌써 절감해 버린 여자. 가족이라고는 자신을 조금도 인정해주지 않는 엄마에다 정부에게 양육비나 속여 먹는 여동생 그리고  감옥에 간 오빠밖에 없어 자기말고는 세상 그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는 여자.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복싱만이 삶의 유일한 희망인 여자. 그래서 30살이 되어서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남들이 뭐라고 해도 복싱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여자. 그녀가 바로 매기였다.



 "제가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죠. 중고 트레일러나 하나 사서 튀김이나 오레오나 먹으며 살아야겠죠.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이것이 제가 하면서 좋다고 느끼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이에요. 저도 알아요. 제가 이 짓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것말고 제겐 아무 것도 없어요."


 어쩌면 그런 절박함, 가진 것이 쥐뿔도 없고 누가 봐도 복싱을 하기엔 한계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밖에 없는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드는 그런 모습이 스크랩의 마음을 움직였을지 모른다. 실패와 상처가 뻔히 예상되는 데도 앞만보고 저돌적으로 달리는 매기의 모습은 분명 실패와 상처가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길 두려워 하는 프랭키와 정반대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는 매기가 프랭키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복싱에는 이런 마법의 힘이 있기 때문에...



 "만일 복싱에 마법 같은 게 있다고 한다면, 그 마법은 부러진 갈비뼈나 파열된 신장 그리고 찢어진 망막 너머에 있어. 너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 그것이 바로 복싱의 마법이지."


 자신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것. 그것이 복싱이 가진 마법의 힘이었다.

 프랭키에게 그 꿈은 잃어버린 딸을 되찾는 것이었다. 과연 스크랩의 생각대로 프랭키는 변화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게 바로 앞에서 말한 프랭키가 현관에서 편지 봉투를 보게 되는 장면이다. 거기서 영화는 처음으로 위치를 정반대로 옮겨 밖에서 안으로, 프랭키가 집 안에 놓인 편지 봉투를 보는 것을 찍는다. 밖에 있는 그의 시선 속에 안에 있는 편지 봉투가 들어온다. 이 장면은 딸에게서 반송된 편지가 영화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도는 바깥의 그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을 강조한다. 이전과 달리 그는 좀 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문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때는 프랭키가 영화에서 가장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던 순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매기 역시 처음으로 완전히 절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 프랭키는 어떠했겠는가? 프랭키의 마음이  지금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게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 바로 드러난다. 그런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고 보면 지금 나타난 문은 사실 프랭키에게 하나의 진정한 시험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이 뒤에 완전히 절망한 매기에게서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늘 '자신을 보호하라'고 말했다. 그는 되도록 상처 받지 않고 지금 있는 이대로를 지키는 게 자신이 가진 삶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매기의 부탁은 그런 원칙에 정면으로 위반한다. 예전의 그라면 결코 따를 수 없는 요청. 과연 그는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는 들어간다. 그 행위 자체로 그는 입증한다. 이제 그는 전혀 다른 자신이 되었다는 것을. 과거의 원칙을 포기하고 삶이 가져다 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걸.


 이것은 스크랩이 매기에 대해 말할 때, '매기가 문을 들어섰다'라는 문장을 썼던 것을 다시금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런 대사들을 통해 영화가 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다 분명해진다. '문'은 변화를 상징하는 존재라는 것이 말이다. 그 문이 나타남은 변화의 부름이며, 그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매기가 영화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드러났다. 그녀는 링 위에서 윌리를 열심히 치료하고 있는 프랭키를 멀리서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그런 그녀의 뒤로 'EXIT'의 문이 선명히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복싱이 현재의 비참한 삶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진정한 변화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스크랩의 '문'이란 말은 바로 이 장면과 연결되는 것이다. 매기도, 프랭키도 결국엔 자신 앞에 나타난 문을 통과했다. 과연 그 문을 그렇게 통과하자 프랭키는 예전에는 슬픔과 상처 속에 쥐었던 반송된 편지 봉투를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집으면서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성큼 사라진다.


 여기서 하는 말이지만,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단순히 복싱을 너머 진실로 우리 삶에 대해 얘기하는 영화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다. 그런 우리 앞에 놓인 삶은 예측 불가능으로 더없이 넘쳐 더욱 우리의 근심과 불안을 조장한다. 이런 상황 안에서는 누구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데인저처럼 느닷없이 패배를 당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겐 우연이 필연이 된다. 한 번의 패배가 영원한 굴레가 된다. 그래서 자기에게 남아 있는 재기의 가능성을 보기 보다는, 마주할 공격과 받을 상처만 두려워 하여 자신의 굴 속에 갇히는 쪽을 택하는 이도 많다. 정녕 프랭키가 우리와 먼 모습일까? 적어도 내겐 그렇지 않았다. 프랭키의 주저와 망설임 그리고 두려움은 분명 나도 언젠가 지녔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삶은 계속 이어지고 프랭키 앞에 나타난 매기처럼 늘 우리를 변화로 이끄는 문은 나타난다. 윌리와 매기에게 다가온 챔피언 타이틀의 기회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우리는 속으로는 무척이나 변화를 바라면서도 막상 그것에 뛰어들었을 경우 어떻게 될 지 알지 몰라 그 때문에 지레 겁먹거나 막연히 안 좋을 것이란 예감으로 내 앞에 나타난 많은 문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처음엔 단순한 선택으로 여긴다. '아직 마땅한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을 뿐이야. 그런 기회가 찾아오면 반드시 뛰어들거야.'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자신이 그런 수동적인 상황에 너무나 길들여져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눈에 들어왔을 그 문조차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되는 탓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그런 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 정말 중요한 것은 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만들어 준다. 매기처럼 자신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프랭키가 윌리의 경우 그랬듯이 아무리 좋은 문이 나타나더라도 뛰어들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 능동적이며, 그래서 너무나 주체적인 매기를 통해 프랭키는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스크랩은 프랭키가 매기의 한 방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매기는 그보다 더 한 것을 프랭키에게 선사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고통이자 절망일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어둡고 작은 가게에 유폐되어 있는 그를 그려 이런 생각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그는 지금 불빛이 따스한 가게 안에서 그 스스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던 맛있는 레몬 파이를 먹고 있는 중이다. 영화에서 혼자의 모습으로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마음 편한 식사의 자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그의 안식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오랫동안 신에게서 구하려 했던 것을 매기를 통해 비로소 얻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제목의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2차 대전에 참전한 폭격기 기수에 그려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것을 제목으로 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변화를 상정하고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폭격기는 무수한 폭탄과 더불어 모든 것에 소멸을 가져 온다. 그렇게 완전한 과거의 소멸, 동시에 진정한 변화. 바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제목으로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폭격기가 일으키는 변화는 죽음을 매개로 이뤄지므로, 여기엔 매기의 죽음을 통한 변화라는 암시도 있는 셈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통해 삶을 얼마나 원숙한 시선으로 헤아리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그도 우리처럼 삶이라는 링 위에서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하고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공략한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감독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예술이기 이전에 삶으로써 영화에 다가갔다는 게 이 영화를 그의 최고 작품으로 만든 진짜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훌륭하게 숙성된 포도주를 음미하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경험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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