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쇼크 -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테드 피시먼 지음, 안세민 옮김 / 반비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비단 진시황제만의 욕망은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은 900년 넘게 살았다고 한다. 아서왕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은 사람의 수명은 600년이 적당하다고 말한다. 그래야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다 배울 수 있다고. 그래서 그는 그만큼 생을 누렸다. 신화라는 것을 인간이 가장 욕망하는 걸 은유와 상징으로 버무린 이야기라고 정의한다면 이렇게 오래 산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수명의 연장이야 말로 우리의 가장 근원적 욕망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같은 이야기를 스페인의 철학자 우나무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삶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비극적 의미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며 종교를 비롯한 모든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명적인 것들은 바로 그 비극을 조금이라도 지연해보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왔다고.

  다행히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욕망은 서서히 충족되고 있는 중이다. 테드 C 피시먼의 ‘회색쇼크’에 따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1시간 마다 평균 수명은 11~15분 정도 늘어나고 평균 수명은 날마다 5시간씩 늘어난다(P.447)’고 하니까.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 조금이라도 오래 살기를 원하는 만큼 그렇게 이러한 바람들이 집단적으로 실현이 될 때 개인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각종 사회 문제와 그로 인한 변화들이 마구 생겨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테드 C 피시먼의 책 제목 ‘회색 쇼크’의 의미이며 이 책이 독자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의 전부이다. 

   ‘회색 쇼크’는 말 그대로 점점 수명이 늘어나는 그렇게 노인이 많아지는 ‘고령화 사회’를 다룬다. 하지만 이론적인 틀로 독자를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미시적인 측면과 거시적인 측면 모두를 아우르는 실제적인 사례들로써 독자를 그것의 목격자로 참여시킨다는데 독특성이 있다. 한 마디로 '고령화' 사회에서 야기되는 모든 문제와 변화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한 번 체험해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초점이 실제적 사례들에 맞춰진 만큼 피시먼은 현재 고령화 현상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보여 지는 일종의 ‘사례군’으로서의 몇 개의 지역(혹은 국가)들을 골라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에 의해 선별된 지역(혹은 국가)들은 이렇다. 

  먼저 ‘고령화’에 특화된 지역사업들을 개발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고령화’에 발맞춰 나가고 있는 미국의 ‘플로리다’로 부터 갑작스러운 '고령화'의 진전으로 부족해진 노동력으로 인한 이민족의 유입과 극심한 재정 압박으로 인해 이제 노인 문제를 가정 내부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있는 ‘스페인’을 비롯, 세계에서 가장 노인 인구가 많아서 ‘고령화의 최전선’으로 불리지만 오히려 그 ‘고령화’ 때문에 젊은 세대가 기성 가치관으로부터 탈피하고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는 등 가치관 자체가 혼란의 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일본을 경유하여 제조업의 발달로 부유한 도시로 손꼽히다가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 제조업이 몰락하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이민자들의 대량 유입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늘어난 노인 인구들이 저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도하는 가운데 오히려 전통적 가족의 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미국의 록퍼드와 오랜 역사 때문에라도 동양의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가 가장 높았던 국가가 ‘고령화’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해체되고 새롭게 받아들여진 자본주의 때문에 어떤 식으로 다시 조합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중국까지, 피시먼은 마치 현미경을 들이대듯 한 개인의 삶이라는 미시적인 부분에서부터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부분까지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건져내어 마치 탁본을 떠 보이듯 독자 스스로의 눈으로 그 세세한 부분까지 관찰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야말로 전 세계에 미치고 있는 ‘고령화’의 현재와 그것이 야기할 미래의 모습을 충실히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별로 친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앞 서 말한 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고령화’의 현상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내가 판단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도움이 될 만한 해석의 틀 같은 것은 이 책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실제 상황을 이야기하기 전에 거기에 대해 일종의 원론 같은 것으로 ‘장수에 관한 짧은 역사’라든가 ‘과학이 노화를 막을 수 있을까?’ 등등의 약간 이론적 틀이라 볼 만한 것들을 부가하고 있긴 하나 정작 논의하고자 하는 것과는 또 맥락이 맞지 않아 오히려 혼란을 부추긴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 마디로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아우르기엔 곳곳에 다소 산만한 구석들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너무 개별적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한 나머지 독자로 하여금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게 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나 싶다. ‘회색 쇼크’ 즉 ‘고령화’는 가까운 미래에 전 세계에 걸쳐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분명 떠오를 문제다. 그것도 부정적 의미에서 말이다. 아마도 피어슨은 거기에 대해 독자 개인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현상을 잘 이해하고 거기에 나름대로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그렇지만 인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시각을 만들어줄 수 있는 틀이 있어야 비로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고령화’가 가져올 변화 그리고 문제들은 절절히 체감하는 바이지만 거기에 대해 평범한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은 그리 제대로 짚어주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다시 말 해 책에 기술된 실제 상황에서 각 나라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령화'에 대처하고 있는데 독자는 그 중 어느 것이 자기에게 적합한지 그 적절한 선택의 기준을 얻기 위한 갈피를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물론 바람직한 대처 방안이란게 현실과 깊이 맞물릴수록 존재하기가 어렵지만 스스로 그 잠정적인 대안이나마 도출할 수 있도록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최소한의 이론적 틀마저 주지 않는 것은 다소 불친절한 게 아닌가 싶다. '고령화'가 지금 나에게도 닥쳐올 문제이기에 더욱 그렇다. 피어슨이 혹시라도 또 ‘고령화’에 대해 쓴다면 실제적 현실과 그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적절히 안배하여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게끔 해서 독자들이 ‘고령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나름대로 준비 할 수 있도록 좀 친절히 써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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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살인 사건 매그레 시리즈 7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네덜란드, 그 곳은.... 

 

  나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8년 전에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장소에서 멀리 벗어나 이곳(네덜란드)에 오기로 결심했다. (...) 여기서 나는 남의 일에 호기심을 가지기 보다는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아주 활동적인 위대한 국민들과 더불어 대도시의 편리함을 만끽하면서도 가장 먼 황야(사막)에 있는 것 처럼 유유자적하는 은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p. 182 ~ 83) 

 

  데카르트는 암스테레담에서 오히려 '가장 먼 황야'를 느낀다. 왜냐하면 더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지만 거기에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완벽한 은둔자요 프랑스인도 네덜란드인도 아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다. 거기서 그는 '코기토 에르고 섬'을 외치는데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그렇게 그 모든 것으로 부터 이탈한 스스로의 존재가 되어버린 그가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존재의 '무화(無化,Nullify)를 경험하는 가운데 존재의 확실성을 추구하려 했던 것이다. 

  네덜란드를 그러한 존재를 무화시키는 광막한 황야로 바라보았던 이가 비단 데카르트 뿐만은 아니다. 알베르 까뮈 역시도 비슷한 감흥을 느꼈다. 그는 운하들이 담쟁이 덩쿨 처럼 뒤얽힌 암스테레담을 바라보며 '지옥도'를 연상했고 거기서 '전락'이라는 소설을 통해 상상적 자살을 감행했었다. 하지만 그 리스트는 까뮈에서 그치지 않는다. 까뮈 자신 심농을 읽지 않았다면 이방인을 전혀 다르게 썼을 거라며 그 영향력을 인정한 바 있었던 심농 역시 그 리스트에 들어가야 한다. 바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했던 고백과 비슷한 것을 매그레 자신의 입을 통해서 듣게되는 것이다. 

  한데 지금 그는 네덜란드의 그림엽서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북유럽 특징이 농후한 광경과 맞딱드리고 있는 것이다. (p. 9) 

  그 북유럽적 특징이란 끝간데 없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히스 들판을 말한다. 게다가 공간적 배경이 되는 델프제일은 파리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데카르트의 가장 먼 황야와 비슷한 가장 멀리있는 광막한 초원인 것이다. 그는 이곳으로 '생폴리앵에 지다' 처럼 수동적으로 이끌려 온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전혀 낯선 곳에 유일한 프랑스인으로(매그레가 온 것은 뒤클로라는 프랑스 교수 때문이었지만 그는 사실은 스위스 태생으로 프랑스에 귀화한 자였다. 그러니 정말 프랑스인은 매그레가 유일한 것이다.). 거기다 매그레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른다. 그러니 당연히 고립될 수 밖에 없다. 거기서 그는 외딴 섬과도 같은 존재다. 아니 '얼룩'이다. 언제든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고 전복시켜 버릴 수 있는 '수상한 이방인'이다. 사람들은 경계하고 기피한다. 때로는 자존심 강한 유럽인들 답게 아예 무시한다. 그렇게 매그레는 자기 존재의 '무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오스팅을 따라 들어간 카페에서 그 '무화'가 나타난다. 

  이어서 전개된 활발한 대화는 네덜란드어 특유의 거칠고 요란한 발음들 때문에 흡사 말다툼을 방불케 했고, 그러다보니 매그레가 호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내 계산을 한 뒤 판 하설트 호텔로 자러 가는 것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p.87)

  그렇게 그는 유령이 된다. 심농이 이렇게 매그레에게 '존재의 무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데카르트가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매그레에게 주고자 함이다. 즉 존재를 유령처럼 희미하게 만들어 오히려 매그레로 하여금 더욱 더 자기 존재에 숙고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왜 심농은 하필 시즌2의 세번째 작품인 '네덜란드 살인사건'에 와서 그런 것을 매그레에게 주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교차로의 밤'에서 매그레가 느낀 유혹 때문인 것이다. 매그레는 전면적으로 다가오는 '엘세(Else)'에게 유혹을 느낀다. 그것은 이름에 감추어진 상징 그대로 여성성 전체가 전해오는 유혹이기도 했다. 바로 거기서 느낀 '유혹' 때문에 심농은 매그레에게 '존재의 무화'를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과연 그 유혹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숙고하도록 만들기 위해. 

  때문에 매그레가 네덜란드에 와서 처음 만나는 이가 바로 포핑아를 유혹했던 존재인 '리번스'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유혹이 어쨌길래 심농은 매그레에게 '무화'까지 경험하게 하면서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 '생폴리앵에 지다'를 생각하면 심농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된다. '생폴리앵에 지다'와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시즌의 세번째라는 것과 공간적 배경이 모두 프랑스가 아니라는 공통점 말고도 매그레가 지극히 수동적으로 거기로 인도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적으로 매그레는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지금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에 휘말린 상태요! 프랑스인이 한 명 의심을 받고 있다기에 사건을 해결하라고 나를 보낸 거지....(p.216)

  매그레 시리즈에서 '수동성'은 주로 죄에 대한 인식과 관계가 있다. 즉 매그레가 수동적으로 한 공간으로 인도된다는 것은 일종의 고해성사와도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카톨릭 세계관에 그 영혼이 깊이 침윤되어버린 자로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인지도 모른다. '죄'에 대한 생각들이 뼛 속 깊이 새겨졌기에 스스로 그 '죄'를 인식만해도 마치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처럼 참회에의 욕구로 이끌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자신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지극히 수동적인 것인 것이다. 그러니 '네델란드 살인사건'에서 또 다시 매그레가 수동적으로 인도된다는 건 심농이 그 유혹을 '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때문에 심농이 매그레 자신을 온전히 숙고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 '죄'에 대해 숙고할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고 이미 '죄'라고 인지된 이상 그 숙고는 바로 스스로를 '정화'하려는 노력이 된다. 모든 고해성사가 그렇듯이... 

  하지만 여기서 '죄'는 단순히 기독교적 의미의 그런 '죄'는 아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존재의 위협이 되는 것. 그러니까 꾸준히 유지해 온 존재에 하나의 얼룩을 만들어 교란시키는 것. 그렇게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정확히 오디세우스를 홀려서 배에게서 뛰쳐나오게 만드려는 세이렌의 노래소리인 것이다. 즉, 심농은 '생폴리앵에 지다'에서도 그랬듯이 '죄'의 카톨릭적 의미를 교묘하게 비틀어 자신의 일상성에 위협이 되는 것을 '죄'라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보인 이 '수동성'은 일종의 자기 기만적 정당화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일상을 견고히 지키고 싶은 그가 위협이 되는 것에 그렇게 '죄'라는 레떼르를 붙임으로써 그 배척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생폴리엥에 지다'에서 심농이 했던 참회의 목적이 사실은 일상의 복권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도 역시 그 유혹에 관한 숙고는 본디 일상의 재탈환이 목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이미 정답을 가지고 있다. 문제되는 건 오로지 그 정답을 뒷받침 해 줄 근거와 증거 뿐인 것이다. 그래서 '포핑아' 살인 사건에 있어서 매그레가 진정 원하는 것은 누가 그를 죽였는가가 아니다. 그가 정말 알고자 하는 것은 그가 '왜' 죽었는가이다. 즉 여기서 '포핑아'는 매그레에게 일종의 반면교사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모델이다. 매그레가 유혹에 굴복당했을 경우 어떤 운명을 걷게 될 것인지 알려주는 이정표인 것이다. 따라서 매그레의 수사의 진정한 목적은 세이렌의 유혹으로 부터 자신을 일상에다 단단히 결박시켜줄 그 '밧줄'을 찾아내는 것이다. 

 

  과연 매그레는 그 밧줄을 찾아낼 수 있을까? 

  - 오디세우스를 빌어 보여주는 '서로 상반된 모순으로 중첩된 삶'이라는 모습 

    

  매그레의 목적은 유혹을 제거하고 다시 안전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바람은 정작 시도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한다. 물론 그것은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가 스스로 그 유혹에 노출되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심농은 왜 매그레에게 리번스를 가장 먼저 만나게 했던 것인가? 매그레의 진정한 목적에 따르자면 그는 곧바로 포핑아의 집으로 인도되었어야 한다. 그곳은 말하자면 페넬로페(포핑아의 부인은 뒤클로의 묘사에 따르면 페넬로페와 똑같다.)가 있는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케'이다. 머무르는 곳. 굳건한 일상이다. 하지만 매그레는 거기로 인도되지 않는다. 리번스를 만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뒤이어 뒤클로를 만나는 것이다. 왜 심농은 매그레를 곧장 거기로 인도하지 않는가? 왜 리번스와 뒤클로를 만나고 난 뒤에 인도시키는 것인가? 이것은 마치 오디세우스가 이타케로 돌아와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오디세우스 역시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깥에서 저간의 사정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매그레는 오디세우스의 역할을 이어받는데, 문제는 그가 거치는 인물들이 모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리번스는 끊임없이 그 곳을 벗어나려 애쓰는 여자이고 뒤클로는 자신의 범죄 이론을 강연하기 위하여 세계 곳곳을 떠도는 자이다(그는 하물며 스위스 태생이지만 프랑스로 귀화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들은 일상을 떠나려하거나 머물 수 없는 자들이다. 그렇게 매그레에게 들려오는 세이렌의 유혹을 상징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매그레는 그들을 만나고나서야 포핑아의 집으로 인도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유념해서 볼 것은 심농이 그들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바로 여기에 왜 매그레가 오디세우스 처럼 스스로 귀를 열고 세이렌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가 드러난다. 당신이 유념해서 읽었다면 매그레가 리번스를 처음 만났을 당시 암소가 송아지를 출산하고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리번스는 늘 떠나려 하는 여자다. 그런데 출산은 여성을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지 않는가? 즉 여기에는 상반된 모순이 하나로 접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어 만나는 뒤클로 역시도 마찬가지다. 뒤클로는 세계 곳곳을 떠돌아 다니지만 사실은 포핑아 부인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듯 내부적으로는 강하게 머무르고 싶어하는 자이다. 그 역시 모순된 삶을 살고 있으며 심농은 그것을 강조하듯 호텔(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에서 경찰(일상을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대표적인 직업)의 감시를 받는 뒤클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왜 매그레가 스스로 유혹에 노출시키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심농이 리번스와 뒤클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우리네 삶이 그러한 상반된 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옳은지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고 따라서 유혹에 늘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심농은 이러한 상반된 모순이 중첩된 삶의 모습을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건 '포핑아'가 살고 있는 집의 위치에서도 드러난다. '포핑아'의 집 위치를 한 번 그려보자면 이렇다. 

   

 

 

  여기서 포핑아의 집은 바로 운하에 접해 있다. 그런데 그 운하는 거대한 바다로 이어져 있다. 포핑아는 한 때 항해사였고 가장이 되어 일상에 머무른 지금도 늘 바다로 나가기를 꿈꾸고 있는 자였다. 즉 여기서 운하는 바로 그에게 '유혹'인 것이다. 출근하거나 퇴근하거나 그는 늘 운하와 나란히 놓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그는 매일 그 유혹과 대면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게다가 바로 곁에 자신에게 늘 같이 도망가자고 조르는 리번스의 집 마저 있다. 그렇게 그 역시 늘 세이렌의 노래소리를 듣는 자였던 것이다. 심농은 그러니까 잘 알고 있다. 삶 이란게 세이렌들의 섬을 지나는 오디세우스의 배와 같다는 것을. 서로 상반된 모순으로 중첩된 이런 삶에서 우리는 늘 진정한 진실을 확인하게 되기를 염원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니 그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우리의 눈과 귀는 그것에로 끌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디세우스도 부하들의 귀는 모두 밀납으로 막았지만 자신만은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그 노래를 들으려 했던 것이 아니겠냐고 심농은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그레는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뚜렷이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포핑아의 집으로 가는 것은 주저하는 것이다. 

 

  하지만 심농은 또 우려한다. 늘 그 유혹에 빠져있을 수 없다. 어차피 단단히 하나로 결부된 모순들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늘 그 사이에서 방황만 할 뿐 인생은 조금도 진전하지 않는다. 심농은 그것을 알고 있다. 유혹에 굴복하든 극복하든 언젠가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농은 삶의 지속을 위하여 '결단'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를 위해서 심농은 매그레 시리즈 중 그 어느 작품 보다 '네덜란드 살인사건'을 고전 미스터리 공식에 충실하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심농은 두 가지 전략을 쓰는 것이다. 늘 상반된 모순을 안고 사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게 위해 그는 세이렌과 이타케에 있어서의 오디세우스를 차용하고 모순의 서투른 봉합이라고 해도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차용하는 것이다.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통해 강조되는 결단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그 어떤 시리즈의 다른 작품 보다 고전 미스터리 공식에 충실하다. 도면의 등장, 알리바이 공작, 용의자 감추기 그리고 마지막 범인 찾기 연출(관련 용의자 모두를 모아놓고 탐정이 범인을 밝히는 공식)까지 당신이 셜록 홈스에게 기대했던 것을 여기서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도면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 집의 배치는 사건 정황과 용의자가 왜 범죄가 불가능했는지 이해하는데 있어 정말 필수적인데 정작 책에는 실리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래서 그려본 것. 이러한 도면이 가능할 정도로 '네덜란드 살인사건'는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심농이 강조하고자 하는 결단과 그것을 위해 차용하는 고전적 미스터리 공식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이미 글이 너무 길어졌으므로 세세하게 말하기 보다 가장 결정적인, 그러니까 관련 용의자 모두를 모아 놓고 범인을 밝히는 마지막 장면만을 들어 설명하려 한다. 이건 고전 미스터리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적인 공식이라 할 만한데 애초에 왜 이러한 공식이 자리잡았는지를 설명하면 심농이 왜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차용했는가가 설명될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왜 고전 미스터리는 하필이면 그러한 마지막 장면 연출을 하나의 공식으로 정립했는가?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지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애초에 미스터리 장르가 왜 자리잡았는가? 그것은 근대에 이르러 더욱 더 격변하는 정세와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한 개인이 인식하고 이해하기에는 그 범위를 넘어서버린 세상에 대해 불안해진 부르조아들이 상상적으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고전 미스터리는 애초에 부르조아들에게 진정제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 해결도 경찰이 아니라 사립탐정이라는 독특한 존재가 맡게 된 것이다. 부르조아들에게 국가란 애증의 대상이어서 자신의 권리와 재산에 지나친 간섭을 싫어한다. 이른바 야경국가란 부르조아들의 꿈인데 때문에 그들의 불안을 상상적으로 해소시켜줄 존재로 경찰은 아무래도 미덥지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뭣보다 프랑스의 '비독' 처럼 미천한 범죄자 출신들이 경찰의 전신이었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열악한 그들에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낼 사건의 해결을 맡긴다는 것은 자존심상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반 다인의 파일로 반스 처럼 귀족이거나 최소한 신사 계급 출신이 탐정을 맡게 된 것이다. 즉 고전 미스터리의 공식들은 그러니까 철저하게 부르조아의 욕망을 실현하는 쪽으로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건 마지막 장면의 연출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기에 은밀히 끼어드는 부르조아의 욕망이 바로 심농이 강조하고자 하는 '결단'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왜 그렇게 연출되는 것인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범죄가 일어난 그 시간을 복원한다는 것이다. 탐정은 마지막에 모든 관련자들을 모아놓고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하나하나 밝힌다. 그렇게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는가? 이것은 단순하게 사건의 경위와 해결을 드러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목적은 바로 그 시간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왜 그 시간을 다시 가져오는 것인가?  그것은 과거의 시간이 범죄가 발생한, 그래서 완벽해야할 부르조아의 질서에 흠집을 가져온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정이 마지막에 가서 그 사건을 하나하나 세밀히 복원하고 이윽고 범죄자릋 찾아내어 해결하는 것은 사건으로 인해 파탄나버린 부르조아적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아예 그 사건이 없었던 것 처럼 만들어 부르조아의 질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 연출은 부르조아들의 욕망(자신들이 속한 질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앞으로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상상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런 실체적 근거가 없다. 탐정의 해결이란 존 딕슨 카가 '화형법정'에서 잘 보여준 것 처럼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진리란 수사에 불과하다.'란 말이 미스터리 장르만큼 더 잘 어울리는 장르도 없다. 그 무엇보다도 피에르 바야르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대한 그의 해석은 아가사 크리스티보다 더 설득적이다. '해결이 하나의 수사에 불과하다'의 궁극적인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탐정이 행한 해결이 그 순간에 내린 결단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 순간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심농이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네델란드 살인사건'에 차용한 궁극적 원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매그레가 해결해 가는 마지막 장면의 연출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매그레는 결정적인 해결이 순간까지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갈등하는 것이다. 이런 진실을 밝혀도 좋을까? 때로는 등장인물에게 묻기도 한다. 사람들은 반대한다. 아무도 매그레의 해결을 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밝힌 것을 조용한 사회에 큰 돌덩이를 던졌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그는 왜 해결을 했던 것일까?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해결을 왜 감행해야 했던 것일까? 이것은 그동안 매그레가 보여준 모습과 너무 다르지 않는가?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때로 필요하다면 법적인 정의를 가볍게 무시할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매그레이기에 이번 처럼 모두가 기피한다면 그들의 삶을 위해 사실은 눈감아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과거의 그 자신을 깡그리 부정하듯 감행한 것이다. 그럼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건 바로 매그레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외에 다른 대답이 여기서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 매그레는 바로 자신을 위해 그 무모한 해결을 감행한 것이다. 포핑아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포핑아 처럼 매그레 역시도 유혹에 휘둘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포핑아는 결국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유혹에 흔들리기만 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고 말았다. 그러니까 매그레는 포핑아를 일종의 스스로에게 반면교사로 삼고자 해결을 감행한 것이다. 그렇게 유혹에 흔들렸던 포핑아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스스로에게 경고하고자 모두가 반대하는 해결을 해버린 것이었다. 즉, 그는 결단한 것이다. 유혹을 끊어내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물론 이것은 잠정적이고 순간적이다. 심농은 현명하게도 여기에 아무런 이성적 근거를 달지 않는다. 당연하다. 인생은 수많은 모순이 중첩된 것이라 정말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만 그 때 그 때의 결단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심농은 결정적으로 포핑아의 배신이 밝혀지는 과정을 우연히 찾아든 등대 불빛에 의해 노출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 결정적인 장면들은 우연히 보게 된 시각에 의해 잡혀진다. 등대 불빛, 이층집에서 바라보는 것 등등 이렇게 '우연성으로 포착되는 결정성'이야말로 바로 심농이 말하고 싶은 결단의 본질임을 그것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간단하게 그려본 것.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보기 보다 단순하지 않다. 거기에는 심농이 생각하는 삶의 진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은밀히 깃들어 있다. 시즌 2의 후반에서 이렇게 유혹이 강조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거꾸로 우리 인생이 갇혀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한다. 유혹은 늘 바깥으로 인도하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그 '갇혀짐'이 바로 우리 자신의 결단임을 은밀히 말한다. 그런에 왜 우리는 스스로 갇혀지는 것을 선택한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다음 작품 '선원의 약속'에서 고찰될 것이다. 

 

                                                 -  이타케게 갇힌 오디세우스를 떠올리며 연출해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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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슬러 2011-08-24 0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심농이, 아니 매그레가 살아있다면(살아있군요..), 악수라도 청하지 않았을까 싶은 서평입니다.

오드득 2011-08-24 23: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마녀고양이 2011-08-3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애지간히 추리나 스릴러에 속하는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런 리뷰도 가능하군요....... 감탄하고 돌아갑니다.

헤르메스님 즐거운 날 되셔요.

오드득 2011-08-31 21:55   좋아요 0 | URL
앗! 저의 서재에 들려주셨군요.
아픈 것은 잘 나으셨나 모르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
아서 코난 도일 외 지음, 정태원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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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새의 경우 처음 보는 존재가 그의 어미가 된다고 한다. 모친 결정의 매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우리네 취향이라는 것도 행여 그렇게 결정되는 것은 아닐런지. 그러니까 어릴 때 어떤 경로로든지 좋아하게 된 것이 하나의 취향이 되어 자라나서까지도 남아있게 된 것인 아닐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냥 객적인 소리인지도 몰라도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고전미스터리에 대한 내 취향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어쩌다가 이토록 고전 미스터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딱히 그 계기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다만 생각나는 건 그 어느 것 보다 미스터리를 많이 읽었다는 기억 뿐. 왜 그렇게 많이 읽었을까 따져보아도 마치 갓 태어난 아기새가 처음 두 눈에 들어온 대상을 무작정 엄마라 믿듯 그렇게 나 역시 고전 미스터리를 좋아하게된 듯한 막연한 느낌만이 인다. 

 

   한 평생 미스터리만을 위해서 사시다가 얼마전 안타깝게 작고하신 고 정태원님에게 선생님은 어쩌다가 미스터리를 사랑하게 되셨나요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실까? 정태원님은 나와는 달리 그 연유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 백조는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운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마지막 울음 소리가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세상에 내어놓는 작품을 우리는 더러 '스완송', 백조의 노래라고 부른다. 그렇게 나도 이 작품, 정태원님이 직접 선정하시고 번역하신, 셜록 홈스를 쓴 코넌 도일을 비롯하여 모두 10명의 고전 미스터리 작가들의 서른 편의 단편이 들어있는 이 책,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고 정태원님의 스완송이라고 부르고 싶다. 

 

 

 

  정태원님은 자타공인 유명한 셜로키언이다. 스스로 주석까지 단 홈스 전집을 번역 출간했을 만큼. 그 홈스 전집은 무엇보다 정확하고 꼼꼼한 주석으로 이름이 놓은데 그런 정도의 주석을 달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태원님의 고전 미스터리에 대한 지식이 아주 방대하고 해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그 정도의 방대하고 해박한 미스터리 지식을 가지려면 왠만한 열정과 애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홈스 전집 자체가 그만큼 고전 미스터리를 향한 정태원님의 열정과 애정을 나타내는 하나의 구체적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 나온 이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 역시도 그 열정과 애정을 드러냄에 있어서 그 홈스 전집과 맞먹는다 하겠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셜록 홈스가 연재되었던 죠지 뉸즈라는 남자에 의해 창간된 '스트랜드 매거진'에서 연재되었던 미스터리 단편들 가운데서 정태원님에 의해서 직접 선정된 것들이다. 많이 알려진 유명한 작품들 보다는 다소 덜 알려졌지만 19세기 당시 고전 미스터리의 다양하면서도 그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로 선정되었다. 이 중 베로니스 에뮤스카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 단편들이나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아내를 구하고 대신 배와 함께 죽은 잭 푸트렐의 작품들은 이미 동서 미스터리로 국내에 선을 보인 적이 있으나 내가 직접 찾아보니 각각 단 한 편 만이 겹칠 뿐이고 모두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작품들이었다. 그만큼 정태원님이 가급적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들로만 세심히 선정했다는 의미가 되리라. 

 

 

 

   그래서 나같이 고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 세계를 보다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값진 선물이 될 것 같다. 혹시 어릴 때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의 명탐정 45인' 같은 책을 보면서 언젠가는 거기 나온 모든 명탐정들의 작품들을 읽겠다고 꿈꾸었던 이들이라면 더더욱 '종합선물세트'가 되어 줄 것이다. 만듦새도 좋고 번역도 유려하며 거기다 어릴 때 미스터리를 읽으면 꼭 보였던 삽화(여기 실린 삽화들은 '스트랜드 매거진' 연재 당시 같이 실렸던 삽화들이다.)까지 있어서 향수마저 듬뿍 느끼게 해 줘서 금상첨화다. 고전 미스터리의 팬으로써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모든 면에서 흡족할 만한 이런 책을 받고 보니 마치 정태원님이 마지막을 예감하시고 당신 자신이 산타클로스가 되어 자신과 똑같이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멋진 선물을 주시고 가시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고맙고 아이가 하나 남은 사탕을 그렇게 먹듯 아껴가며 조금씩 천천히 먹었다. 진한 추억의 내음마저 물씬 머금은 그 단편들을... 

 

   아기새에게 한 번 엄마로 인정된 존재는 영원히 엄마로 남는다. 그렇게 아기새 처럼 내게 낙인처럼 찍힌 고전 미스터리의 취향도 영원히 그렇게 나와 함께 할 것 같다. 이유도 없고 까닭도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마냥 좋은 걸. 아마 정태원님도 그렇게 대답하시지 않을까? 좋아하는 이유를 따질 만큼 즐길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냥 마음껏 즐기고 볼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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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의 노래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8-1 프로파일러 토니 힐 시리즈 1
발 맥더미드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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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러면 우리 갑시다, 당신과 나,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에 펼쳐져 있을 때,

우리 갑시다, 어떤 반쯤 버려진 거리를 통해,

싸구려 일박 여인숙에서의 불안한 밤과

굴껍질이 있는 톱밥 깔린 레스토랑의

중얼거리는 뒷골목을 지나서.
 

                                        - T.S 엘리어트,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중에서 - 

 

  1987년 데뷔한 발 맥더미드는 이미 그동안 범죄소설 장르에 있어서 그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작년, 그러니까 2010년 CWA에서 평생공로상마저 수상한 바가 있다. 아마도 그 공로의 대부분은 바로 이 소설 '인어의 노래'로 시작된 '토니 힐' 시리즈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양들의 침묵'의 인기로 인해 프로파일링이 약간씩 알려지고는 있었으나 그 유명세에 비해서는 프로파일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던 작품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던 90년대 중반 그 때, 발 맥더미드는 바로 이 '토니 힐' 시리즈를 통해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독자들에게 남아있었던 '프로파일링'을 꽤 사실적인 묘사로서 제대로 그것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시도와 결과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등장하자마자 그 해 영어권 최고 범죄소설에게 주는 '골든대거'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서야 지금 소개되었지만(아마도 작년에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평소 영국드라마를 챙겨보았던 분들이라면 아마도 이미 오래전에 이 '토니 힐' 시리즈를 만나보았을 것이다. 2002년에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영국 ITV에서 'WIRE IN THE BLOOD'란 제목으로  드라마로 만든 적이 있기 때문이다. 

 

  

 

    원작의 높은 인기 탓이었는지 이 드라마는 무려 여섯 시즌까지 방영되었는데 특히나 롭슨 그린이 연기한 주인공 토니 힐이 보여준 독특한 매력이 톡톡히 한 몫을 했다. 본인 역시 이 드라마를 먼저 보고 나중에 원작을 접한 케이스인데 드라마에서의 본 토니 힐 캐릭터가 너무 익숙했던 지라 원작을 읽을 때는 거기 묘사되는 토니 힐이 아무래도 드라마의 토니 힐과는 차이가 있어 사실 몰입하기 조금 어려운 것도 있었다. 원작의 토니 힐은 '발기 불능'이란 것만 빼면 조금의 흠도 없는 매력적인 신사이지만 드라마속의 토니 힐은 처음 부터 와이셔츠를 반은 넣고 반은 밖으로 뺀 그렇게 제대로 정돈조차 하지 못하고 나오는 등 어딘가 어설프고 서투르기 짝이 없는 약간 찌질남스럽기도 한 그런 캐릭터였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토니 힐의 첫 등장 장면. 반쯤 삐져나온 와이셔츠가 보인다. '인어의 노래'를 각색한 것으로 시즌 6 까지 이어진 'WIRE IN THE BLOOD'의 첫 시작을 열었다. 

 

  사실 드라마에서 이렇게 토니 힐을 원작과는 다르게 인간 관계에 있어서 좀 모자라는 캐릭터로 설정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 발 맥더미드가 '인어의 노래'를 비롯, 토니 힐 시리즈 전체를 통해서 추구하려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토니 힐은 프로파일러다. 프로파일러의 핵심은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 그렇게 타자를 자신 만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토니 힐은 게이만을 잔인한 고문 끝에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을 프로파일링 하면서 끊임없이 그 범인 자체가 되려고 애를 쓴다. 그는 자주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마치 그와 대화를 하는 것 처럼 독백을 한다. 드라마의 토니 힐은 한 술 더 떠서 아예 시체 있는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누워보기까지 한다.(나중에 이것은 일본드라마 '언페어'에서 다시 모방된다.) 

 

   

      역시나 '인어의 노래'에서의 한 장면. 그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사건의 시체 발견 장소에서 시체의 현장 사진 그대로 토니 힐이 누워보고 있다

 

  프로파일링은 토니 힐이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는 실제의 그가 아닌 그가 남긴 흔적, 잔여를 통해 그와 관계를 맺는다. 흔적과 잔여는 존재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분일 뿐, 그 자체가 존재가 될 수는 없기에 토니 힐에게 그 모든 것은 해석을 위한 단서들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토니 힐이 프로파일링을 통해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오로지 그 자신만의 해석이 바탕이 되는 그렇게 순전히 자기 만족적 환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인 것이다. 해석이 그대로 실체적 진실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그 또한 하나의 '환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토니 힐이 프로파일링을 통해 궁극적으로 대상과 일치되고자 하는 욕망은 자기 작위적 환상을 더욱 더 굳건히 하려는 노력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토니 힐의 프로파일링은 '자폐적'이고 '도착적'이다. 때문에 토니 힐은 현실 세계에서 진짜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드라마에서 처럼 서투르고 원작에서 처럼 '발기 불능'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토니 힐의 '발기 불능'은 그의 프로파일링이 그야말로 자폐적임을 드러내는 징후이다. 진짜 연인, 그렇게 실체적 존재를 껴안을 수 없는 그의 '한계'는 그야말로 그가 오로지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위적 환상 가운데서만 충족을 느낄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토니 힐이 오로지 '폰-섹스'를 통해서만 절정에 오를 수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폰-섹스' 역시 실체와 행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은 다만 스스로 기꺼이 만들어가는 작위적 환상만이 있을 뿐이다. 실제가 아니라 스스로 꾸미는 가상의 섹스. 토니 힐이 그것으로만 절정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오로지 자기만의 작위적 환상안에서만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폐적' 인간임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드라마는 더 나아가 시간날 때 마다 '툼 레이더' 게임을 즐기는 게임광으로 까지 만든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게임광'의 모습은 사실 '인어의 노래'에서 연쇄살인범이 가지고 있는 취미였다. 

   토니 힐의 이러한 형상화는 발 맥더미드가 토니 힐 시리즈를 단순한 스릴러로만 만들지 않았다는 걸 암시한다. 무엇보다 앞서 드라마가 일부러 범죄자의 취미를 토니 힐에게 주었듯이 그렇게 토니 힐과 그가 추적하고 체포해야 할 범죄자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사실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인어의 노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챕터가 시작될 때 마다 연쇄살인마의 자전적 기록이 먼저 나오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먼저 범죄자가 어떻게 범죄를 행했는지를 그 육성으로 듣게되는 셈인데 거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 범죄자의 행위 역시 작위적이고 일방적인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한 범죄자가 맺는 관계의 성격은 무엇보다 '고문'이라는 것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이 '고문'은 바로 토니 힐의 '프로파일링'과 근저에서 많이 닮았다. 토니 힐이 프로파일링을 통해 자신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환상을 점점 실체로 만들어가듯이 고문 역시도 범죄자가 꿈꾸는 진실을 그 대상으로 하여금 토해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프로파일링도 고문도 자기가 만들어내거나 바라는 진실을 '실체화'로서 보상 받는다는 점에서 똑같은 행위인 것이다. 결국 그런 의미에서 토니 힐과 범죄자는 똑같은 존재들이다. 드라마는 그것을 '게임광'의 면모를 통해서 더욱 더 강조하지만 발 맥더미드 역시 이들의 유사성을 작품 곳곳에 공들여 세공해 놓는다. 스포일러상 자세히 말을 못하지만 토니 힐과 범죄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이나 결말의 대치 장면은 바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까 발 맥더미드의 토니 힐 시리즈는 결국 '관계'에 대한 얘기인 것이다. 토니 힐이 그렇게 묘사된 것, 범죄자와의 유사성 이 모두가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설정인 것이다. 아마도 발 맥더미드의 주된 관심은 단순히 프로파일링을 통해 범죄자를 체포하는 것 거기에만은 있지 않을 것이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토니 힐이 가지고 있는 '자폐적' 인간 관계를 어떻게 하면 허물고 보다 진정한 인간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지 그것을 풀어보는 것에 더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토니 힐 시리즈는 사실 토니 힐을 치료하는 시리즈이며 바로 그 때문에 발 맥더미드에겐 토니 힐을 진정한 인간 관계 형성을 통해 치료해 나갈 또 하나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녀가 바로 '캐롤 조던'인 것이다 

 

 

   '인어의 노래'에서의 캐롤 조던. 소설 보다는 좀 연상으로 묘사되었다. 수사국에서 지위도 높아서 돈 메릭을 부하처럼 부리고 있다. 같이 나온 고양이는 그녀가 기르는 '넬슨(영국 제독의 이름인가?)' 

 

  캐롤 조던은 경찰국 내에서 유일한 여성 형사다. 그렇게 그녀는 고립적이다. 그녀는 당당한 형사로서 인정받고 싶지만 경찰에서는 '형사'로 보기 보다는 먼저 '여성'으로만 본다. 토니 힐을 만나고 나서 그녀는 호감을 가지는데 그 주된 이유가 이러했다. 

적어도 토니 힐은 그녀가 만나 본 몇몇 전문가들과는 달리 전문가로서의 오만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대부분의 남자들과는 달리 그녀의 어려움에 잘난 체 하지 않고 공감을 표해주면서 문제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쪽으로 기꺼이 함께 움직여 주었다.(p.76)

 

  그러니까 토니 힐은 그녀를 동료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준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동료로서 인정해 주었다는 것에서 호감마저 느낄 정도로 캐롤 조던은 조직 내에서 유일한 여성으로서 일종의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우리는 특히 그녀가 토니 힐과 한 팀이 되어 수사해 갈수록 그러한 그녀의 고립적 위치를 더욱 더 잘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캐롤 조던 말고 또 하나, 조직내 유일한 여성으로서 고립되어 있는 존재를 소설에서 보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기자 '페니'이다. 발 맥더미드가 이렇게 각기 다른 조직에서 고립된 여성들을 나란히 보여주는 것은 역시나 그가 추구하고 있는 '관계-맺기' 테마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둘의 고립된 여성이 각기 맺어나가는 관계의 방식을 통해 그가 토니 힐에게 주려는 그 진정한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탐색한다는 것이다. 캐롤 조던과 달리 페니의 관계 맺기는 토니 힐, 범죄자와 똑같이 일방적임을 우리는 보게된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현재 위치를 보장해주거나 승진시켜 줄 수 있는 특종 거리 때문에 형사들과 관계를 맺는다. 거기엔 타자와의 어떤 인간적 교감도 없으며 있는 건 다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다루는 것 뿐이다.  그렇게 페니는 원하는 정보들을 얻어내지만 궁극적으로 그녀에겐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빈 손일 뿐이다. 결국 발 맥더미드는 이러한 타자를 일방적인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관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인데 문제는 페니가 보여주는 이러한 관계는 작품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것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크로스 경감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가 결국 수사를 실패로 몰아가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게이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소설은 그렇게 등장인물들을 달리해가며 반복을 계속한다. 토니 힐이 가지고 있는 자기 작위적 환상과 범죄자가 가지고 있는 일방적 강요, 페니가 보여주는 타인의 수단화 그리고 크로스 경감의 편견.  마치 발 맥더미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파괴할 수 있는 것들을 유형화시키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이것들은 그 근저에 있어서는 다 동일한 것이다. 타자의 것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관념 욕망으로만 타자를 채운다는 점에서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게 토니 힐, 범죄자, 페니 그리고 크로스 경감에게 있어 타자란 오로지 '인어의 노래'가 된다. 

 

나는 인어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서로서로에게.

나는 그들이 나에게 노래해 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나는 그들이 파도를 타고 바다쪽으로 나가는 걸 보았다

바람이 바닷물을 흰색 검은색으로 불어댈 때

파도의 흰 머리칼을 뒤로 불어 넘겨 빗질하면서. 

붉은 색 갈색 해초로 화환을 두른 바다 소녀들 옆에서

우리는 바다의 방들에서 머물렀었다

인간의 목소리들이 우리를 깨울 때까지, 그리고 우리는 익사한다. 

                                          - T.S 엘리어트,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중에서 -  

 

  엘리어트의 이 시에서 '인어들의 노래'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그 무엇을 상징한다. 그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고 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인어들이란 바로 '타자'들인 것이다. 엘리어트의 시에서 우리가 그저 바다로 멀리 떠나가는 인어들을 보기만 할 뿐 바다의 방에서 마냥 익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타자를 오로지 내 자신의 관념, 욕망으로만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발 맥더미드의 '인어의 노래'는 그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바로 오로지 내 자신의 잣대로만 타자를 가늠하는 그 자페적 태도 자체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캐롤 조던은 그 모든 자폐적 관계로 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타자의 받아들임은 토니 힐과의 관계서도 드러나지만 그녀가 유일하게 가족과 같이 사는 존재이며 또한 유일하게 애완동물(소설에서 애완동물은 단 두 마리 나온다. 하나는 캐롤이 키우는 넬슨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자에게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한다. 때문에 이 애완동물의 의미는 소설에서 중요하다.)을 키우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그렇게 매일을 존재와 같이 교감을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캐롤 조던과 토니 힐의 만남이다. 그러니까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만은 아닌 것이다. 과연 발 맥더미드의 바람 대로 캐롤 조던은 토니 힐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아,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이다. 보다 본격적인 그들의 얘기는 아마도 후속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아직은 해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인어의 노래소리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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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픽GUFIC 2011-08-22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올해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게 된 작품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 생각하게 해주시는 리뷰네요. 2편은 올 12월경 나올 예정입니다.

오드득 2011-08-22 18:08   좋아요 0 | URL
제가 토니 힐 시리즈의 매력을 제대로 설명했는지 자신 없었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12월경에 후속편이 나온다니 정말 기쁘네요.^^

starover 2011-08-2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체 따라 누우는 장면은 '언페어'의 유키히라 형사가 한 행동을 떠올리게 하네요.

오드득 2011-08-22 18:10   좋아요 0 | URL
이프리트 님도 '언페어' 보셨군요. 아마도 언페어가 토니 힐을 모방한 것 같아서 저도 본문에 그렇게 언급해 놓았답니다.^ ^
 
속 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2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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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오랜 전국시대는 무수한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으로 많은 요괴들을 낳았고 또한 애니미즘적 성향이 강한 일본 특성상 한 번 생성된 요괴들은 쉬이 소멸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일본 산천이나 계곡 혹은 논밭이나 마을 어귀 그 어디에서나 그 오랜 지난했던 전쟁의 역사 동안 비극의 씨앗들은 뿌려졌을 것이며 희생자의 피와 눈물 그리고 원념으로 요괴들은 태어나고 자라났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 요괴란 한 개인의 비극적 삶이 죽은자의 목소리가 되어 산자들에게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점차 사회가 안정되어가자 이제 그 호소의 배경이 되었던 비극의 이야기는 잊혀지고 남은 건 다만 눈에 보이는 그 괴이하고 흉물스런 몰골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오히려 사회가 안정될 수록 요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점점 공포의 대상이 된다. 어느새 사람의 탈을 벗고 괴물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불안했던 그 시대 그러니까 항상적인 죽음과 기근 그리고 병마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그 시대에서 요괴가 태어난 이야기는 곧 듣는 자, 그렇게 산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산자들의 운명과 요괴가 되어버린 자들이 운명이 그리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괴는 측은과 동정의 대상이었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공동운명체였기에. 하지만 사회가 안정되고 풍요로워지자 이제 죽은자들의 이야기는 점점 산자들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 '저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무래도 현재의 안정과 풍요는 과거의 불안정과 빈곤을 두려워하게 되는 법. 가까이 하게 되면 다시금 옛날로 그렇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과거를 기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염의 공포인 것이다. 현대가 왜 위생과 청소의 신화에 빠져들게 되었는가? 바로 더러움과 쓰레기들이 그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들을 자꾸만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용의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이 불러일으키는 기억 자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래된 것, 낡은 것은 재빨리 제거되는 것이다. 그것이 과거의 약하고 초라한 자신들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그들은 더이상 약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 그렇게 자부하는 그들에게 과거의 모습은 약점이 된다. 불리한 증거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흔적을 지운다. 매일 몸을 씻고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을 청소하는 것이다. 전염의 공포는 건강 때문이 아니다. 비로소 획득한 이 새로운 정체성을 과거의 유령들로 부터 온전히 보호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이건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마저도 그렇다. 개인이 스스로 약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라고 최면을 걸듯 사회도 그렇게 성원들에게 최면을 건다. 폭력적으로 통일을 이루거나 권력을 잡아 태어난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권력의 기반이 그리 강고하지 못한 탓에 그 사회는 안정을 보다 희구하면 할 수록 과거의 잔재를 더욱 더 일소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기반이 약할 수록 권력은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이제 막 태어났다는 그 '새로움'을 더욱 더 강조할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새로움의 정당성은 과거의 비난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 사회에 있어 과거는 오로지 제거의 대상이다.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를 그 몸에 간직하고 있는 요괴들 역시 기피와 혐오 그리고 공포의 대상으로 낙인 찍힌다. 오로지 배척하기 위하여 배척할만한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 그 태평성대 에도 시대에 요괴들은 그렇게 눈과 입을 빼앗기고 설 자리를 잃었다. 해서 요괴의 이야기를 채록한다는 것은 바로 그 몸에 각인된 과거의 잔여를 모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 안정과 통합이라는 미명 아래 무시되고 버려진 수많은 '다른 자'로 낙인 찍힌 그들의 신음과 눈물 그리고 호소를 모으는 것이다.  

  '항설백물어'의 요괴 이야기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요괴의 배제는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렇게 개인들에 의해서 배제되어 버려진 요괴이야기들이 주로 모여있는 게 저번에 나온 '항설백물어'라고 한다면 이번에 나온 속편 항설백물어는 사회적 차원에서 배제되고 활용되는 요괴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요괴들은 이제 모든 이야기를 잃고 단순히 흉물스런 그 껍데기만 남았다. 물론 그건 요괴 탓이 아니다. 요괴 스스로 그 가면을 쓴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을 다른 것으로 낙인 찍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막아버린 산자들이, 풍요와 편리에 취해 타인의 고통은 나 몰라라 하기로 결심하고 눈감아버린 산자들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위해 억지로 그들에게 씌워준 가면인 것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처럼. 

  '너희들이 그렇게 무서운 가면을 써야 내 마음놓고 너희들을 싫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무 죄책감 없이 말이야." 

  그러니까 이들의 '가면 씌우기'는 사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나 똑 같은 것이다. 온갖 색깔론, 지역주의,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한 각종 신분 지위 성별에 따른 모든 차별들에 다는 이유들. 그것들 역시도 우리가 눈앞에 현존하는 타인의 고통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무시하기 위하여 씌워주는 요괴의 가면인 것이다. 그러니까 기피, 혐오 그리고 공포 같은 것들은 사실 외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괴물은, 요괴는 그 자체로는 공포스럽지 않다. 우리가 상처입지 않고 무시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혐오나 공포의 가면을 씌워주기 전 까지는. 

  그렇게 요괴는 껍데기만 남는다. 어렵게 얘기해서 '두려움'의 기표만 남는다. 실체는 없다. 길가에 떨어진 이름표와 같은 것이다. 남은 건 이름뿐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사회는 이런 걸 좋아한다. 주워다가 내치고 싶은 사람, 몰아내고 싶은 무리가 생기면 달아만 주면 되니까. 그리고는 손가락질을 하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요괴다!" 사람들이 돌아본다. 사회가 그 중 하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 너 요즘 아프지?"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거 얘네들 때문이야." 하면서 이름표를 붙인 무리를 가리킨다. 사람들 눈이 번쩍 뜨인다. 그리고 또 하나를 불러서 "얘. 너  요즘 일이 잘 안되지?" "응. 힘들어 죽겠어." "그것도 얘네들 때문이다~" "뭐!" 사람들 코가 벌렁인다. 이번엔 모두에게 말한다. "여러분, 우리 요즘 너무 가난해졌죠?" "그래, 그래!" "그것도 애네들 때문이에요!" "정말? 네 이녀석들을!!"  사람들의 입이 일그러지며 이제 이름표를 단 무리에게로 몰려간다. 그 때 사회는 뒤로 냉큼 물러나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요걸로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사회는 그 안정을 위해 반드시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요괴는 바로 이것을 위한 가장 1차적 희생양의 기표인 것이다.

  '항설백물어' 속편은 바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노뎃포'로 부터 에필로그와도 같은 '로진노리'까지 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사회에서의 요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그 요괴가 어떻게 사회에서 생산되고 이용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긴밀하게 엮이어져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어쩐지 독자를 계몽하려는 듯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서 마냥 지루할 것 같지만 하하! 그렇다면 여기서 작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 작가가 누군가?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를 썼던 바로 그 교고쿠 나쓰히코다. 요괴이야기에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 사회학 미학 이론을 마구 버무려 끊임없이 풀어내는 수다로 독자의 오감과 정신을 휘몰아쳐대던 필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한 마디로 괜한 걱정이라는 말씀이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광골의 꿈'에서 실망한 나머지 조금은 반쯤 접어두고 보는 작가였는데 이번의 작품으로 완전히 다시금 신뢰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와 더불어 이 작품을 나만의 개인적인 나쓰히코 베스트 3로 꼽아본다. '노뎃포'의 작은 이야기로 부터 시작해서 뼈대를 세우고 살을 채워 점점 그 스케일을 불려가는 솜씨가 만만찮다. 스케일이 방대해지는데도 아귀마저 딱딱 떨어지니 절묘하다. 한 마디로 당신이 나쓰히코의 팬이라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상투적이라 쓰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다. 속편도 이리 대단하거늘 이 다음 '후편'은 일본 최고의 대중소설에게 준다는 나오키 상마저 수상했다고 한다.(세상에 어느 정도로 괴물스런 작품인거야?) 정말 기대가 된다. 빨리 출간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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