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인데, 검색을 해보니 영화 범주 자체가 사라졌군요. 아마도 영화 리뷰는 못 올리는 듯 하여 페이퍼로 올립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프랑스의 교실 하면, 르네 고시니의 '꼬마 니콜라'에서 여실히 보여주었던 아주 소란스럽고 통제불가능한 교실이 먼저 떠오릅니다. 거기, 장학사가 시찰 나오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시찰 나온 장학사마저 니꼴라가 있는 교실 아이들에 엄청 시달린 나머지 결국은 담임선생님의 손을 꼭잡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무척 존경스럽습니다. 선생이란 직업이 이렇게
                         성스러운 것인지 정말 몰랐어요. 오늘에야 그걸 알았습니다.
                         용기를 갖고 계속 열심히 가르쳐보세요. 힘내세요!"

                                                                                   ( 꼬마니콜라 p.56 )

  프랑스에서 교실이 선생님과 아이들의 전쟁터가 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같습니다. 우리나라 처럼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에겐 생경하게 보일지 몰라도 말이지요. 그렇게 우리 역시 엄한 규율 속에 교육을 받아와서 그런지 우리들은 같은 프랑스 교실을 다루고 있는 로랑 캉테의 이 영화 '클래스'에서도 어쩐지 선생님 마랭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그 선생님의 눈으로 학생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더없이 소란스럽고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선생님에게 당당하게 공격까지 감행하는 학생들이 당장 매를 들어서라도 질서와 예의를 가르쳐야 할 것 같은 말썽꾼들로만 보입니다.


 
 영화는 마치 그런 관객의 기분을 예상하기라도 한듯,
마랭의 아주 힘든 수업시간을 보여주고 그 뒤엔 아예 동료교사 하나가 마치 마랭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학생들에 대해 너무 분노한 나머지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폭발하는 모습마저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동료교사의 모습이 정말 이해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꼬마니콜라'에서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던 그 장학사처럼...
 

  마랭이 속한 선생님들의 세계에선 학생들에게 규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고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을 보호해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공감합니다. 뭔가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로 부터 이러한 항변을 듣게 됩니다.

  "왜 자기들도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프레임으로만 가두려 하느냐"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아이들이 각자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마랭이 학생들로 부터 이해받고자 했던 것과 똑같이 아이들도 마랭으로 부터, 마랭이 속한 선생님의 세계로 부터 이해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랭은 자기의 입장만 중요합니다.  그들은 마랭으로 부터 배워야만 하는 존재들이고
그 방향은 절대로 거꾸로 될 수 없다고... 학생들이 선생님을 이해해야지,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이해해달라 요구할 수 없다고...
  그건 이미 마랭에게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했던 아이들도 그렇게 동료교사가 폭발했듯이 결국 터져버리고 맙니다. '슐란'처럼 말이죠. 

  감독의 의도였는지, 이렇게 선생님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 각각에서 이해받지 못함에서 오는 분노에서 터져나온 '폭발'이 한 번씩 일어납니다. 영화는 마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처럼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날 것'의 현실을 아무런 형식없이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처럼 묘하게도 댓구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전적으로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려고 하지만은 않고 보다 분명하게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개입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 쪽 세계의 구성원들이 한 번씩 분노로 인한 폭발을 일으킨다는 것도 그렇지만, 더하여, 영화의 앞부분에는 선생님들이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의 끝부분에는 아이들 각자가 자신들이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일종의 수미쌍관이랄까요? 아무튼 이러한 구성은 언뜻보면 교육의 방향이 절대로 비가역적일 수 없다는 마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영화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배웠는가를 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초반의 선생님이 가르치려 했던 것과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주려했던 것과 아이들이 얻게 된 것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얻게 된 것도 선생님의 도움이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있던 개성들이 그저 발현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일례로 마랭을 가장 속썩였던 그래서 마랭으로 부터  창녀라는 모욕을 들었던 한 소녀는 교과 과정에는 전혀 없었던 '플라톤의 국가'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 묻는 마랭에게 그녀는 "왜 그러세요? 창녀라고 했던 제가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서 놀랬나요?"라며 카운터블로우를 날립니다. 이렇게 영화는 마랭이 주장하던 '교육 방향의 비가역성'을 비틉니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연속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단절에 가깝다.' 이렇게 말이죠.


 

  결국 이러한 의도된 영화의 구성은 우리에게 그 단절, 그러니까 선생님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가 하나가 아니라 앙 쪽으로 갈라져있는 세계이며 교실은 바로 그 두 세계가 대치하고 있는 하나의 전장 처럼 느끼게 합니다. 무엇보다 캉테가 이렇게 단절과 대치로 교실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관객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관객들이 선생님과 학생간 관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 흔히 끼고 보는 '수직적 권력 관계'라는 선입관 때문이죠.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마랭의 교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러한 선입관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니까요. 바로 캉테는 그러한 우리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떼어내기 위해서 질서 보다는 혼란을, 평온 보다는 전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캉테는 그것을 교실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묘사를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에도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특히나 카메라가 어떤 높이에서 인물들을 담는가를 보면 이것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일단 영화에서 카메라가 '선생님들만의 세계' 혹은 '아이들만의 세계'(수업 시간 외에는 사실상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만)를 찍을 때는 그대로 눈높이에서 담습니다. 카메라가 찍는 높이는 바로 그 찍히는 대상을 향한 시선의 높이에서 관객이 받는 느낌 때문에 종종 어떤 권력의 역학관계를 암시하게 되는데 그 때문인지 로랑 캉테는 카메라가 위로도 아래로도 치우치지 않도록 아주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렇게 그저 서 있는 혹은 앉아 있는 눈높이에서 평등하게 선생님들만의 세계 나 아이들만의 세계를 담아내려 노력합니다. 마치 '그들만의 세계'는 지극히 평등하며 안정적이고 단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듯이 말이죠.
  

   이 두 세계가 충돌하는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마랭과 학생들이 설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더욱 더 그렇습니다. 클로즈업된 마랭과 똑같이 수평적 위치에서 잡히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세계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깁니다. 그렇게 그들의 주고받음은 마치 고대 그리스에서 저마다 동등한 입장에서 발언했던 민주적 광장의 상징으로 일컫는 '아고라'를 연상시킵니다. 거기엔 어떤 지배도 훈육도 없고 오로지 '동등한 참여'만 있는 것이죠. 하지만 종종 카메라가 반복적으로 잡아내는 장면 때문에 이 교실은 '아고라'와 더불어 다른 또 하나의 분위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 장면은 바로 학생들의 머리 위로 홀로 서 있는 마랭의 모습입니다.
 


  카메라는 자주 그것을 보여주는데 그저 머리와 뒷 모습만 보이는 아이들 위로 홀로 우뚝 서서 활발하게 손을 움직이거나 몸을 움직이며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는 마랭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어쩐지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군중과 대치중인 고독한 군인과 같아 보입니다. 특히나 아이들이 반론을 전개할 때 그가 보여주는 활발한 손놀림과 몸놀림은 마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듯 보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그 장면의 반복으로 교실을 하나의 '전장'으로 만듭니다. 여기에 언젠가 과거 프랑스에 있었던 '파리 꼬뮌'의 기억이 끼어들면서 '아고라'의 개인적인 대치 관계가 '파리 꼬뮌'의 집단적인 대치 관계로 이행됩니다. 주의깊게 보면 카메라가 담아내는 장면들이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캉테는 교실이라는 하나의 공간에다 개인과 개인간, 집단과 집단간 동등한 소통을 집약시켜 보여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이러한 교실의 모습은 역시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선생님들 세계'와 비교해보면 더욱 더 두드러집니다. 선생님들의 세계는 교실과 전혀 다릅니다. 거기선 대화도 차분하고 조용하며 설사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 존중하지 비아냥거리거나 막말이 오고가지는 않습니다. 분로로 폭발하는 교사가 있더라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따뜻하게 위로해 줄 뿐입니다. 하지만 마랭의 교실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기습적 공격이 있고 연속적인 발포와 응사가 있습니다. 더러 수류탄 투척과도 같은 난데없는 인신공격까지 감행되기도 합니다. 이 두 세계의 모습이란 이렇게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캉테는 왜 이렇게 보여주는 것일까요? 이 두 세계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통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는 완전한 소통과 다른 하나는 불완전한 소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두 세계가 서로 성격이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세계는 단일한 세계라는 것이고 교실은 두 세계가 서로 대치중인 세계라는 것이죠.
 

  그런데 영화에서 선생님들만의 세계는 그려지는데 어인일인지 아이들만의 세계는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모습만 나오는 것은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의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모습뿐입니다.  이것은 영화가 아이들이라는 주체를 배제시키겠다는 의미일까요? 만일 영화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다면 굳이 교실의 풍경을 화면에 그렇게 담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엔 다른 의도가 분명 개입된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여기엔 '바라보기'의 주체가 있습니다. 운동장을 담는 카메라의 이동에서 드러나듯이 거기엔 교실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주체, 단일한 세계에서 대치중인 건너편의 집단을 바라보는 주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로 부터 고통을 당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보여도 선생님으로 부터 고통을 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가 잘 담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두 세계가 보여주는 소통의 서로 다른 모습 또한 그 중 어떤 세계의 소통이 나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세계에 서로 다른 주체들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어쩌면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치부될 수 있을 그 관계를 보다 넓혀서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로 보도로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잊고 있는 교육에 있어서 구조적인 측면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맞습니다. 여기엔 사실 구조적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점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경계선들이 있습니다. 그 경계선들은 시민권자와 이민자들을 나누고 잘 사는 계급과 못 사는 계급을 나누고 그 나라말을 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를 나눕니다. 그렇게 교실인 한 개인의 문제만으로는 치부해버릴 수 없는 수 많은 모순들이 집약되어진 그러한 공간입니다. 때문에 마랭 혼자만의 힘으론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건 구조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점들이기 때문이죠. 때문에 얘기를 이어왔던 대로 영화는 관객들이 그것을 구조적인 시각으로 보도록 하기 위해 저렇게나 많은 세심한 연출들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출들이 진정 의도하는 바가 눈에 뜨인 순간 우리는 이제 영화를 전혀 다른 쪽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거기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마랭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입니다. 영화 처음 우리 눈에 마랭은 정말 희생자처럼 보입니다. 그가 선생님 권위 운운하며 아이들에게 훈계할 때 조차 안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결국 어쩔 수 없이 폭발한 슐란을 교장에게 데려가는 장면에선 한없이 나약해진 그의 모습에 동정을 보내기도 합니다. '열심히 하려는데, 이렇게 민주적으로 대하는데 아이들은 왜 날 이해하지 않고 따라와 주지도 않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원망하면서 때로 의자를 걷어차거나 홀로 식당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노라면 연민마저 느껴지면서 격려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마랭은 희생양으로 보입니다. 그저 소통하려 들지 않고 다혈질이기만 한 아이들 앞에서 피해자인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의 시선은 옳았던 것일까요? 영화가 보여준 구조적인 측면들이 눈에 띈 순간 우리들은 알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시선이 착각이었음을 말입니다. 왜 착각이었는지를 이제부터 말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번역하자면 '벽들 사이에서' 입니다.
제목만 봐도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바로 벽들을 가로지르는 '소통' 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목 대로 영화는 그렇게 구조적으로 단절된, 그렇게 벽으로 가로막힌 두 개의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백인들 중심의 선생님들 세계와 다인종으로 혼합된 아이들의 세계. 그리고 두 세계는 여러가지 면에서 분명 서열화가 가능한 세계였습니다. 그렇게 우월한 세계와 열악한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였습니다. 교실에서 마랭은 이 두 세계가 전혀 우열로 나뉘지 않는 공간임을 강조하지만 결국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이 드러납니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영화는 차례로 떨어져나가는 학생들과 아예 존재감 자체가 지워진 학생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나가고 지워진 학생들을 통해 거꾸로 벽이 없다고 말하는 교실에 분명한 벽들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다 분명히 함으로써 거꾸로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떨어져나가거나 지워진 이유들을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그 벽들'의 정체가 보다 분명해 집니다.

  첫째는 언어입니다.

  이제 '꼬마 니콜라'의 교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랭의 교실은 거의 반수 가까이가 이민자의 자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프랑스어 하나로 완전히 통하던 시대는 이제 가버린 것이죠. 교실엔 아직 프랑스어에 익숙치 못하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대놓고 모국어와 혼용해서 쓰는 아이들까지 존재합니다. 마랭은 그런 그들에게 프랑스 문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영화는 중국이민자 "예예"와 결국은 퇴학을 당하는 "슐만"을 통해서 이 언어의 장벽을 드러냅니다. 중국인 "예예"는 말이 서툽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이들과 제대로 아이들과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인지 그는 거의 내내 홀로 있습니다. "슐만"은 결국 그릇된 학습태도로 퇴학을 당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이유는 그가 글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슐만의 어머니 역시 영화에서 유일하게 통역이 있어야만 얘기할 수 있는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결정적으로 교장단 앞에서 프랑스어를 못해서 아들을 제대로 변호하지 못하는 바람에 슐만은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슐만은 퇴학을 당해 아프리카로 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예 역시 그의 어머니가 불법체류자로 체포되는 바람에 강제송환 당할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슐만과 예예는 결국 똑같은 이유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언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면 그 사회에 머물지 못하고 떨어져나간다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은 교실에 있는 저 많은 다문화의 아이들은 사실 언어로 인해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의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온갖 난처한 질문과 야유로 마랭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야 말로 언제 어느 때 사회로 부터 몰림을 당해 떨어져나갈지 알 수 없는 존재들 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려는듯 영화에 나왔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영화 초반 그러니까 새학기가 시작될 때 분명 교실에 있었던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예예의 짝궁으로 같은 중국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우리는 영화에서 그녀의 존재를 볼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대로 홀연히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듯 그녀의 존재는 영화에서 내내 지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프랑스 말을 하나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언어를 못하는 것이 곧 존재의 상실로 이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실로 무서울 수 밖에 없는 묘사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교실에 있는 그 어느 아이도 이것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언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여전히 남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특히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아이들이 한 학기 동안 무엇을 배웠는가 말하는 장면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학생들이 다 자신이 배운것이 뭔지 말하고 나서 교실을 나간 뒤 앉아있는 마랭에게 한 소녀가 다가옵니다. 그 소녀는 새학기가 시작될 때 마랭이 가장 먼저 말하게 했던 그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영화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마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직업학교엔 정말 가기 싫어요."
 

  가장 마지막으로 학생의 말을 듣는 마랭의 모습을 이제 카메라가 보여줍니다. 묻는 여학생의 눈이 분명 보고 있을 그 모습 그대로 아래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랭의 모습을 말입니다. 이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보여지는 내려다보는 각도, 즉 권력의 시선이었습니다. 그토록 주의깊게 시선이 가지는 권력 효과를 지워왔던 캉테가 유독 여기에서만은 권력의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녀의 물음에 마랭이 아무런 대답을 못할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캉테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의 미래가 교육으로 얼마나 나을 수 있는가를 말해왔지만 사실 당신이 해왔던 것은 그들의 미래를 거짓으로 꾸며 그들로 하여금 이 현재에 더욱 더 종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가. 당신이 가르쳤던 그 부르조아들만이 쓰는 프랑스 문법 처럼 그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팔아 현재의 비참함을 지속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었나?"하고 말입니다.
 

  캉테의 이 무언의 질문에서 우리는 언어와 더불어 또 하나의 벽을 선명히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계급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읽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재생산'이란 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가난한 이민자의 자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가난한 이민자 자녀들에게 직업학교는 선택사항이 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가게 되는 곳이고 그렇게 그들은 노동자 계급을 지속적으로 충원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열려진 유일한 미래라고 말입니다. 결국 부르디외는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현재 프랑스 공립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은 결국 안전하게 사회가 지속될 수 있도록 계급을 재생산하는데만 일조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부르디외의 이 결론과 캉테가 묻고자 하는 근본적 질문은 이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이 얘기들이 시작되었던 애초의 질문, 그러니까 왜 마랭을 희생자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착각이었나에 대해 보다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꼬마 니콜라'의 그 어린이들은 이제는 자라나서 프랑스의 주류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가 묘사하는 선생님들의 세계가 바로 그 니콜라의 세계처럼 단일한 백인들의 세계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캉테가 영화 내내 묘사해왔던 대로 단일해서 안정되고 안전한 세계였습니다. 마랭은 바로 그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어쨌든 '예예'나 '슐람' 그리고 그 여학생 보다는 배제되기 어려운 위치에  서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게 피해자로만 보이던 마랭은 사실 갑각류 처럼 세계로 부터 아주 단단하게 보호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가해자들로만 보였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사회적 조건들 때문에 언제 어느때 지워지고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드러나듯이 우리들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캉테가 이렇게 우리의 오해를 지적하는 것은 보다 깊은 윤리적 목적이 있습니다. 앞서 영화가 두 세계를 그렇게 보여준다는 것은 '바라보기'의 주체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캉테가 교실이 은폐한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오해를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캉테는 그 '바라보는' 윗 세계의 주체들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사정은 이러합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포용해주어야 할까요?"
 

   대답은 굳이 여기서 적지 않아도 명확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하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 캉테는 눈높이 선생님 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배려마저 잊지 않습니다. 바로 이 배려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카메라가 점점 내려오면서 휴식시간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운동장을 담아내는 장면입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 장면들 속에서 카메라는 차츰 내려오다 결국엔 아예 아이들과 뒤섞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카메라의 하강은 재미있게도 영화에서 마랭이 처음엔 서 있다가 갈등을 거치면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신체적 동작과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카메라의 하강과 마랭의 신체적 동작의 일치마저 보아버린다면 앞서 캉테의 질문 '우리는 누가 포용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단순하고도 명료합니다. 바로 마랭이 포용해주어야 하는 것이죠. 영화 초반 아이들 머리 위로 홀로 우뚝 서 있던 마랭이 그렇게 아이들과 마치 전쟁을 치르듯 선생과 학생이 아닌 그저 인간대 인간으로 소통을 하면서 부터는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앉게되는 것과도 같이 마랭이 먼저 내려가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넌지시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실은 마랭이 속한 저 위의 세계가 포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적어도 그들은 '안전한 자들'이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랭와 아이들은 언제 싸웠는가 싶게 서로 하나로 어울려 즐겁게 축구를 합니다. 늘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가 그렇게 아래에 있는 자들과 한데 어울리는 것입니다. 캉테가 영화를 통해 내내 말을 걸고 싶었던 그 진정한 목적을  우리는 이 장면에서 비로소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장면에 뒤이어 영화는 흐트러져있는 의자와 책상들로 가득한 텅 비어버린 교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바로 직전의 가장 마지막 장면입니다. 



  사진처럼 정지된 화면속에 텅 비어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오스 야스지로나 후 샤오시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맥락없이 툭 튀어나왔던 풍경들이 연상됩니다. 아마도 캉테가 보여주는 이 마지막 풍경도 그 감독들이 마치 화두처럼 툭 던져주었던 그 풍경들과 비슷한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내내 듣는 관객을 상정하며 영화를 이끌어왔던 캉테로선 정말 어울리는 마지막 같습니다. 그러니까 관객 자신의 사유를 위하여 빈 여백 하나를 남겨두는 것 말이죠.
 

  저는 그 '여백'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한나 아렌트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사유란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악이란 것은 바로 사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사유란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캉테의 '클래스'는 비단 교육 문제에만 그치는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한나 아렌트가 했던 말과 똑같은 것을 지향하고 있을 겁니다. 마랭에게 있어 포용이란 그렇게 학생들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 다름아니니까요. 예전 신문을 통해 마트의 냉동창고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다 가스에 질식해 차디찬 시멘트 바닥 위에서 숨진 20대 대학생의 얘기를 알게 된 적이 있습니다. 생계를 위해 일찍 군대에 갔고 전역해서도 내내 가난한 집안 살림과 높은 등록금 때문에 쉴 새 없이 일만하다 결국엔 그렇게 사고로 숨져야 했던 한 젊은 영혼을 보면서 정말 아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그 젊은 영혼 처럼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런 그들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정말로 보기는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문득 캉테의 이 영화가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캉테가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겨보고 이렇게나마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의 포용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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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21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헤르메스님 글 올라왔네 하고서는 피곤하다, 자야지~ 하고서는 또 이렇게 들어와서 댓글남깁니다 ㅋㅋ
영화 서비스가 종료된게 참 아쉬워요. <부러진 화살>도 쓰고싶었고, 또 다른 영화들도 한 번쯤은 남겨보고 싶었는데 한 번도 저는 영화를 써본적이 없이 종료되었기에 더 아쉽죠. 그런데 이달의 당선작에 영화리뷰가 올라와있더라니까요 ㅋㅋ 아! 그럼 이제 다음달부터는 영화당선작이 사라지니ㅣ 이달의 당선작 뽑는 양을 좀 더 늘릴까...하고서는 생각해봅니다.
피곤한 밤이에요. 굳밤~:)

오드득 2012-02-24 02:09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소이진님의 '부러진 화살' 리뷰를 못보게 되다니 안타까운데요. 뭔가 알라딘도 사정이 있겠지만 영화 리뷰란이 없어진 건 정말 아쉽기 그지 없네요. 그동안 영화에 대해 좀 많이 써 둘걸 하는 후회도 들고... 아무튼 이렇게 페이퍼라도 소이진님의 영화 리뷰 좀 보여주세요^ ^
 
십 브레이커 -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쳐 자신의 길을 찾는 소년의 이야기
파올로 바치갈루피 지음, 나선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네일러...

 

  늘 약 아니면 술에 취해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아들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일쌈는 그의 아버지는 단단히 박힌 못 처럼 질기게 살아라고 그런 이름을 그에게 붙여주었다고 했다. 네일러는 그 이름이 마치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탁이라도 된 양 그렇게 살았고 사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이기도 했다. 때는 언젠가의 미래. 세상의 대부분이 '절대수축'이라는 해수면 상승으로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자원마저 고갈되어 오로지 재활용을 통해서만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한정되어진 자원으로 인해 당연히 빈부의 격차는 극심해지고 모든 것은 그저 가진 '자본'의 양으로만 결정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더이상 소용없어지고 오로지 소수의 다국적 기업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네일러는 이러한 마치 영국이 한창 식민지 건설을 통해 제국주의로 향해 나가던 것과 같은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계층의 아이로 태어났다. 그 계층이 살아남으려면 오로지 제 몸뚱이를 이용하여 좌초된 선박에 들어가 다국적 기업에 팔만한 고철더미들을 모으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러니까 예전 우리나라 난지도에도 있었다는 재활용할만한 물건들을 찾아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넝마주의'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건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그들을 특히 '스캐빈져'라 부르는데 그렇게 배에 들어가 고철을 가져오는 것도 왜만한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지극한 부러움의 대상이니까. 세상에는 그조차 되지 못해서 자신의 장기나 피를 기업에 팔 수 밖에 없는 사람들로 넘쳐나기 때문에...

 

 

 그러한 스캐빈져들에게 있어 희망은 딱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절대 몸이 자라지 않는 것. 왜냐하면 선박 도처에 뚫린 구멍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가 필요한 금속을 가져와야 하는 스캐빈져들로서는 몸이 커져 버리면 더이상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특히나 유조선 같은 경우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석유 탱크를 찾아내는 것이다. 석유가 완전히 고갈되어 그렇게 찾아낸 석유는 엄청나게 고가에 팔리기 때문이다. 즉 어딘가 잠자고 있는 탱크 속 석유는 스캐빈져들에게 한 방에 그 고단한 삶으로 부터 탈출시켜 줄 로또와도 같은 것이다.

 

 

  네일러도 마찬가지였다. 그 둘의 희망만을 안고 단순히 오늘만은 살아남기 위해 내일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어두운 통로들을 기어다니며 금속들을 모았다. 하지만 그래도 네일러는 바라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던 '쾌속선'을 타고 푸른 바다를 항해하는 것. 잠깐만 마음을 놓아도 무심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공상할 만큼 간절한 바람이지만 낮에는 어둡고 자칫 잘못하면 목숨마저 위태로운 통로들과 밤에는 무자비하게 가해질 아버지의 폭력 밖에는 없는 네일러에겐 그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었다. 그러니까 절망의 우물 바닥에 빠져버린 자의 두 눈 안에 비쳐드는 밤하늘의 별들과도 같은 그런 꿈이었다.

 

 

  생각해보면 바치갈루피가 그려내는 세상들은 다 그랬다. '와인드 업 걸'에서도 그랬다. 온갖 유전병들이 들끓고 다국적 기업들이 식량을 제멋대로 통제하는 바람에 굶주림만이 가득한 그렇게 희망이라고는 그 어디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바치갈루피에게 그저 디스토피아라는 의미만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이런 가혹한 세상을 주인공들에게 선사하는 것은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소설들이 흔히 그렇듯이 미래에 닥쳐올지도 모를 비극적 세계를 묘사로써 지금 현실을 계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오히려 주인공들의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달리 말해 이렇게 세상을 묘사하는 건 거기에 바치갈루피가 정말 주인공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다름아닌 주인공들이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제 스스로의 의지와 결정으로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바치갈루피는 그 무엇보다 오로지 혼자의 힘과 생각으로 그 자신만의 길을 가도록 원한다. 그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의 진심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는 '와인드 업 걸'에서도 그랬지만 이 소설 '십 브레이커'에서도 일단 세상을 한 번 '리셋' 시킨다. 노아 시대의 홍수와도 같이 '와인드 업 걸'에서는 거대한 홍수로 또한 이 소설에선 카트리나와도 같은 거대한 태풍으로 기존의 모든 것들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기성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비워진 상태에서 주인공들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십 브레이커'에서 네일러가 사는 마을은 완전히 전복되고 네일러는 그 뒤집어진 세상 속에서 자신의 꿈에 다가갈 계기를 얻게된다. 그리고 그 계기를 통해 네일러는 그 오래된 꿈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가게 된다. 더 이상 하루하루를 견뎌내기에 급급한 자맥질이 아니라 힘차디 힘찬 헤엄으로 세상이 가르쳐 준 법칙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삶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아버지라면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잣집 소녀의 목을 긋고, 반지를 빼내고, 거기서 피를 씻어내며 웃었을 것이다.  일주일 전이라면 네일러 자신도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슬로스가 나의 생명도 그녀의 생명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해주기를 너무도 간절히 바랐지' (...)   물에 빠진 소녀의 애원하는 눈을 바라보면서 네일러는 한 때 자신의 눈도 꼭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했다. (P.128)

 

 

  바치갈루피는 늘 압도적인 서사를 자랑한다. 그는 그 누구보다 흠뻑 매혹시킬만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작가이다. 거기다 SF적 세계인데도 그 디테일이 뛰어나서 현실감이 넘치기 때문에 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그 블랙홀과도 같은 이야기 속에서 바치갈루피는 똑똑히 보여준다. 그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가 찾아낸 믿음 안에서 당당히 나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러니까 바치갈루피의 매력이기도 한 압도적인 서사는 사실은 독자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기 위함이다. 즉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자신을 믿고 가도 된다는, 전혀 세상이 말하는 규칙 같은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오로지 네 자신만 믿고 나아가도 충분히 괜찮다는 바로 그런 믿음을 주기 위함인 것이다.

 

 

 

 

거짓말을 비웃을 수 있는 진실을 가르쳐주는 자가 누구지? 

  누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고 어떻게 지킬것인가를 결정하지?

  누가 우리를 바꾸지? 

  누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열쇠를 가지고 있지? 

  그건 바로 너야. 

 너는 이미 너에게 필요한 모든 무기를 가졌어 

 그러니 이제 싸워! 

 

- 마치 영화 'SUCKER PUNCH' 이러한 마지막 독백과도 같이... -

 

  지금보다 한 십년만 거슬러 올라가기만 해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주로 했던 말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였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의 양 만큼이나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과 동의어였고 그래서 한 편으론 어른들의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그 남겨진 가능성을 아낌없이 모조리 쓰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그 말이 아니다. 지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년들이여, 제발 살아달라!"

 

  그렇게 어른들이 절박하게 외쳐야 할 만큼 현재의 대한민국은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시대다. 아파트에서 떨어지고 집에서 목을 메고 각종 폭력에 시달리다 죽는다. 비단 육체적인 죽음 뿐만이 아니다. 오직 좋은 성적만 강요하는 사회.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와 살고 있는 집의 평수로 모든 삶이 단정되어버리는 사회. 자신의 꿈조차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닌 기성품 처럼 남들이 찍어주는 것에 맞춰주어야 하는 사회. 그 속에서 이제 그들의 영혼마저 죽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자살 역시도 영혼의 타살을 자행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 더이상 그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는 절박한 외침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달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어른들의 무기력을 비웃고 그것으로 그들에게서 더이상 아무런 구원의 빛이 나올 수 없음을 통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로지 앞만 보고 빨리 달리기 위해 스스로 거세해 버린 경주마와 같은 어른들로 가득한 이 세계...

 

  바치갈루피가 그려내는 '십 브레이커'의 세상은 그러니 사실은 먼 얘기가 아닌 것이다. 네일러의 하루를 몸으로 착쥐하고 영혼으로 핍박하던 그 세상이나 바로 지금 우리들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른들의 강요가 매일 아이들의 희망을 압살해 가는... 다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라는 사실은 자신 조차 믿지 않는 거짓말로 그걸 치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이들에게 더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잔인한 세상에서 바치갈루피는 처음 청소년을 위해 쓴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이다.

  "세상은 너를 그저 벽돌벽 속의 벽돌 하나로 만드려고 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너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스스로 벽돌벽 속 한 개의 벽돌이기를 거부하고 뛰쳐나가라. 구원은 오직 너의 그 탈주의 몸부림 안에만 있으니..."

 

  사실 이런 말조차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 소설에 어울리지 않는 중언부언에 지나지 않는다. 바치갈루피의 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 바는 단 한 문장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

 

  "거세된 어른들은 신경쓰지마! 너에겐 너 만의 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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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19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를 읽다가 바치갈루피라는 단어가 나오길래(설명조차도 없길래)
대체 뭐지? 하면서 리뷰를 수십번이나 들여다 보았는데도 없길래 올려다 보았는데 작가의 이름이었군요. 스스로 멍청하다고 꿀밤을 먹이는 중입니다.
생각해보면 요새는 성장소설을 피하는것 같아요. 아마 의도적인것같아요. 그걸 읽어서 뭐하겠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아마 이 아름답지만 중언부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리뷰를 읽고서도 이 책을 피할 것 같아요. 스캐빈져의 순수한 모습을 보고서도 말이죠..

오드득 2012-02-19 23:36   좋아요 0 | URL
성장소설이 일종의 자기개발서 같은 것으로 읽힐 수 있다는 소이진님의 말씀에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 '십 브레이커'는 제가 스포일러가 될까봐 내용의 많은 부분을 빠뜨려서 그렇지 소이진님이 생각하는 그런 성장소설은 분명 아닐거에요. 저는 성장소설을 점진적이냐 혹은 급진적이냐에 따라 착한 그리고 나쁜 이렇게 구분하는데 '십 브레이커'는 '나쁜' 성장소설입니다. 급진적이고 결말을 고려하면 굉장히 전복적이죠. 사실 주체 정립은 전복적 실천이기도 합니다. 온전한 자기 스스로가 된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의 내부에 횡단된 사회의 온갖 프레임들을 걷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니까요. '만인은 만인에게 있어 늑대'라는 홉스적 진실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가차없는 소설이에요. 그런면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소설인데 이 소설의 매력을 제대로 못 살려냈다니 제가 아마 시간에 쫒기는 가운데 써서 그런가봐요. 언젠가 다시 한 번 제대로 리뷰해야겠네요^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1 밀레니엄 (뿔)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노르딕 느와르의 대표 주자 '밀레니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세븐', '조디악' 등 연쇄살인마의 연대기로 미국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는 영화감독 데이빗 핀처가 다시금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을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초점은 오로지 여성 캐릭터중 가장 개성있고 강력하다고 할만한 리스베트 살란데르에게만 맞춰져있는 듯 합니다. 스티그 라르손이 '밀레니엄'을 통해 정말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그에 대한 얘기는 정작 빠져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노르딕 느와르 뿐만아니라 스릴러의 '대명사'라는 자리에까지 올라버린 '밀레니엄'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찬찬히 한 번 훑어보는...

 

 

   아무튼, 다음은 그런 것에 관한 글입니다...

 

 

  이 밀레니엄의 작가 스티그 라르손 처럼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가로서 스웨덴을 넘어 국제적 명성을 획득한 작가가 또 한 명 있는데 그가 바로 형사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로 유명한 '헤닝 만켈' 입니다. 전형적인 수사물이지만 단순히 '누가 했느냐?'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은 다만 발단일 뿐, 오히려 그 사건을 계기로 한 사회의 내부에 깊숙이 침윤된 갈등과 고통의 지층들을 파헤쳐 미스터리로도 얼마든지 순문학적 깊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중적 인기도 인기이지만 비평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물론 그들의 작품 세계에 있어서 말이죠. 일단 주인공의 상황이 비슷합니다. 헤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더 처럼 밀레니엄의 미카엘 불름크비스트도 아내와 이혼한데다 딸 하나를 두고 있지요. 둘 다 딸은 엄마가 양육하고 있구요. 거기다 미카엘은 잡지사에 발란더는 경찰에 소속되어 있지만 조직으로 움직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둘 다 고독한 사립탐정의 전형들이라 할 수 있죠. 이 둘의 유사성은 비단 주인공의 모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작품에서 흔히 ‘퍼즐러’라고 명명되듯이 미스터리를 푸는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그 사건을 통해 그 사건이 발생한 사회가 간직한 갈등과 상처를 드러내는 데 더 천착하는 것도 같습니다. 여러모로 이 작품은 헤닝 만켈의 ‘얼굴없는 살인자’를 많이 닮았습니다. 만켈의 작품 무대도 밀레니엄의 ‘헤데뷔’처럼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 역시도 ‘헤데뷔’처럼 지극히 조용하고 전원적인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인이 일어납니다. 쿠르트 발란더가 이것을 수사하기 위해 이 마을로 옵니다. 그리고 수사를 하는 도중 이 마을이 겉모습처럼 그리 조용한 마을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다만 가면에 지나지 않았고 그 아래엔 나치즘을 방불케하는 인종적 편견과 혐오 등 온갖 추악한 감정들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밀레니엄에서 미카엘이 처음 ‘헤데뷔’에 왔을 때와는 다른 그 마을이 숨기고 있는 이면의 모습들을 점차 발견해 나갑니다. 사실 헤닝 만켈의 그 작은 시골 마을은 그 소설이 나온 1990년대 스웨덴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투영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을이 드러내는 모든 추악한 모습들은 당시 스웨덴에서 발로하고 있었던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파시즘의 반영이기도 했습니다. 2005년에 나온 밀레니엄도 마찬가지입니다. 15년의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소설 속 사회의 숨겨진 이면에선 파시즘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켈이 이를 좀 더 은유적으로 드러낸 반면, 스티그 라르손은 보다 직설적으로 드러냅니다. 둘 다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들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마도 스티그 라르손이 스웨덴에 만연되어가는 파시즘을 낱낱이 밝히는데 기자로서의 생명을 걸었던 이유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 그 자신이 직접 작은 잡지사를 차리기까지 했으니까요. 바로 소설 속 ‘밀레니엄’도 이 잡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죠. 아무튼 이렇게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은 정말 비슷합니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간격 때문에 저는 스티그 라르손을 그야말로 헤닝 만켈의 적자라고도 부르고 싶어지는군요. 그러나 모든 면에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스티그 라르손이 이렇게 대중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높은 인정을 받기가 어려웠겠죠. 헤닝 만켈의 아류 정도로 취급받았을테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알 수 있는 건, 스티그 라르손을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헤닝 만켈과 차이나는 지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제대로 스티그 라르손을 소화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소화제가 되어줄 것 같네요.

 

  이를 위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바로 ‘스웨덴’이란 나라입니다. 스웨덴은 지금도 가장 성공적인 복지국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행복한 국민들을 선정할 때 늘 상위권을 차지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모두 1932년부터 76년까지 집권한 사민당 때문이죠.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이른바 ‘스웨덴 모델’ 즉 경제성장과 광범위한 사회복지 확충을 동시에 양립시켜 발전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종합적인 경제-사회 모델 정책을 진행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스웨덴은 경제성장은 성장대로 또 복지는 세계최고의 복지국가를 이룩하게 되었죠. 스웨덴의 복지 수준은 열악한 우리 한국인의 눈으로 본다면 놀랄만한 수준입니다. 사실 그런 나라에 살면 별로 불행할 것 같지도 않죠. 통계 결과도 말해주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 순위 중 상위권이라고. 그래서 노르웨이의 작가 조 네스보는 이런 나라들을 ‘평온한 사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갈등도 고통도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쩌다 90년대의 헤닝 만켈이 또 2005년의 스티그 라르손이 ‘그렇지 않다!’라며 이렇게 스웨덴의 추악한 이면을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러고 보니, 정말 궁금해지지 않나요?

 

  우리는 여기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스티그 라르손으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이야말로 사실 헤닝 만켈과 차이나는, 더 극단으로 밀고 갔다는 점에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스티그 라르손은 현명하게도 소설의 프롤로그 부분에서 ‘압화’를 도입합니다. ‘압화’란 말 그대로 꽃을 오랫동안 납작 눌러서 말린 것이죠. 그렇게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집적된 사물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납작하게 눌려진 꽃 뿐, 그 과정에 분명 개입되었을 오랜 시간들은 그 이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만켈도 그렇고, 라르손도 궁극적으로 드러내려 하는 ‘복지국가’라는 미명 속에 오래도록 감춰져왔던 어둠과도 유사합니다. 그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예쁜 꽃처럼 매력적인 사회의 모습이지만 그 이면엔 오랜 역사에 걸쳐 켜켜이 쌓여온 고통과 비극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 ‘압화’는 문자 그대로 현재 스웨덴의 상징인 것입니다.


 


  ‘압화’는 헨리크 방예르에게 끝내는 알 수 없었던 진실을 내내 환기시킵니다. 그것은 하나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이죠. ‘압화’의 상징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스웨덴이 ‘복지국가’라는 미명 속에 내버려 두었던 죽음이라 할 수 있겠군요.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헤닝 만켈에서도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에서도 죽음은 그저 단순한 죽음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사회가 은폐시켜 온 사회적 고통 혹은 비극들이 비로소 표출되는 하나의 '징후'입니다. 그것은 드러남으로서 그 사회가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으면서 다만 보이지 않게 칸막이 쳐서 감추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웅변합니다. 그래서 그건 고발이기도 합니다. 고발은 당연히 수사를 촉발시킵니다. 해서 만켈의 소설도 라르손의 그것도 수사물이라는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수사를 통해 이면의 진실은 드러납니다. 그 이면의 진실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말했던 것과도 같이 ‘세계최고의 복지국가’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모든 것이 정당하고 평등한 줄로 알았는데, 사실은 여전한 권력관계의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일방적 권력관계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인입니다. 그 수식어는 그야말로 보기 좋은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고통스런 깨달음입니다.

 


  만켈은 이를 음미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라르손은 다릅니다. 그는 선언적입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그는 용감하게도 이 모든 이면이 숨기고 있는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는 대안까지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켈의 뒷맛은 씁쓸함이었지만 라르손의 뒷맛은 선명한 쾌감까지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구요? 이제 그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일단 저는 미카엘에게 주목합니다. 많은 면에서 만켈과 유사하지만 라르손은 미카엘을 경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라르손 자신이 기자 출신이어서 그랬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켈도 기자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발란더를 경찰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차이가 라르손이 말하고 싶었던 현재 스웨덴이 그 그늘에 가지고 있는 어둠을 벗겨낼 대안 같은 것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왜 미카엘을 굳이 기자로 만들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라르손이 그를 언제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 그렇게 늘 경계에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시작부터 미카엘은 베네르스트룀에게 형사재판에서 패소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는 이제 막대한 벌금과 감옥까지 가야합니다. 결국 그는 편집장으로 일하는 ‘밀레니엄’을 그만둡니다. 이 ‘밀레니엄’은 스웨덴 사회의 경제적 권력 중심에 대해서 서슴없이 비판하는 정치적으로 저항적인 독립 잡지였습니다. 그렇게 주변부적인 언론사였습니다만 거기에서조차 미카엘은 밀려 납니다. 라르손은 미카엘을 그렇게 끊임없이 밀려나게 만들어 결국은 작은 섬마을 ‘헤데뷔’에 고립시킵니다. 그렇게 라르손은 의도적으로 미카엘을 사회로부터 고립된 존재로 만듭니다. 라르손은 이러한 미카엘의 존재성을 밀레니엄의 여사장 에리카와의 관계를 통해 더욱 더 강조해서 보여주기까지합니다. 그들은 불륜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아무 죄책감도 여기지 않습니다. 아예 대놓고 저지르는데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적인 성도덕을 뛰어넘는 것이고 그만큼 미카엘이 이 사회로부터 미끌어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르손은 만켈의 발란더 처럼 정부에 소속된 공무원으로 만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카엘은 정부로부터 벗어난 존재가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회로부터 바깥에 있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라르손이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낼 대안과 관련하여 의도적으로 미카엘에게 부여한 성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카엘이 사회에 편입되지 않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임을 독자들에게 깊이 각인시키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라르손은 이 경계 위의 존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지 보다 더 자신의 주제를 심화시키기 위하여 다른 하나의 존재를 더 끌고 들어옵니다. 그 존재는 미카엘 보다 더 멀리 나아간 자로, 라르손이 보여줄 대안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정한 대안의 형상화라 할 만한 자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입니다.

 


   물론 리스베트가 미카엘 보다 더 사회를 벗어난 개인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라서 그렇지만(여기에 대해서 나중에 따로이 말하겠습니다.) 라르손이 보여주고자 하는 대안의 궁극적 모델로서의 ‘리스베트’의 존재는, 만켈의 소설에서 여성은 조력자이자 객체에 불과했었는데 그것과는 다르게 여성이 소설 속에서(1부에 국한해서 말하는 것입니다만.) 미카엘과 동등한, 당당한 하나의 주체로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에서 볼 때 더욱 더 드러납니다. 소설 초반 라르손은 리스베트와 미카엘이 자신의 주제를 표현할 동등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아주 주의 깊게 이 둘의 이야기를 배치시킵니다. 주의해서 읽어본다면, 라르손이 이 둘의 이야기가 전개상 피치 못하게 하나로 모일 수 밖에 없게 될 때까지는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하나의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면서 세심하게 끌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각 자 다른 공간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가 되어, 파헤치는 범죄가 상징하는 ‘스웨덴’이라는 거대한 사회에 맞서게 될 때까지 유사한 경험을 합니다. 혹시 눈치채셨습니까?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이뤄가는 인간관계가 놀랍도록 유사하단걸? 한 번 따져볼까요? 초반의 미카엘과 에리카의 관계는 리스베트와 아르만스키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둘 다 업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면서도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미카엘과 방예르의 관계는 리스베트와 변호사 팔름그렌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방예르와 팔름그렌, 둘 다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정반대쪽이라고 할만한 사회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인간적 매력으로 신뢰를 얻는 인물들이니까요. 거기다 사회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권력이라 할 만한 ‘법’이란 면에서 변호사들은 또 어떻습니까? 미카엘과 프로데 변호사와 리스베트와 비우르만 변호사는 또 그렇게 똑같지 않나요? 프로데가 자본가를 대표하는 방예르의 대리인이듯 비우르만은 정부권력을 대리합니다. 그러면서 프로데는 미카엘의 언론인으로서의 양심을, 그렇게 영혼을 착취하고 비우르만은 리스베트의 육체를 착취하죠. 이렇게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그 중요한 인간관계에 있어서 놀랄만한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결국 여기엔 라르손의 의도가 개입 되어있다고 볼 수 밖에는 없겠죠. 과연 무엇 때문에 라르손은 이토록 치밀하게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제 그 대답을 추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 대답을 추구하는 데 있어 고려해야 할 것은 리스베트가 여성이라는 점과 그녀가 그 어떤 사회적 관계에도 포섭되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성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주제를 보여줄 것이고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점은 라르손에게 가장 독보적이라고 할 만한 것. 즉 그가 보여주는 대안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것입니다.

 

   먼저, 여성입니다.

소설에서 여성은 주된 피해자입니다. 리스베트 역시도 비우르만과의 관계에서 피해잡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리스베트가 비우르만에게 당하는 상황은 또 그렇게 ‘밀레니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축이 되는 실종된 여자 ‘하리에트’와 겹칩니다. 리스베트가 그와 같은 성폭력을 무자비하게 당하면서도 정작 아무데도 도움을 호소할 수 없었던 상황을 우리는 나중에 하리에트에게서도 똑같이 목격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미카엘과 관계를 가지게 된 세실리아에게서도 확인됩니다. 그녀 역시도 결혼 생활동안 남편에게 매를 맞았지만 아무데도 도움을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소설에 나오는 모든 여성들은 이렇게 사회의 어떤 보호로 부터도 벗어난 그렇게 내버려진 존재라는 점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여기서 그 어느 곳에도 도움을 호소할 수 없었다는 것은 또 그렇게 쉽게 은폐되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소설 속 이러한 여성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압화’의 그 이면인 것입니다. ‘복지국가’라는 화려한 수식어 속에서 언뜻 제거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무수한 상처들로부터 쏟아진 고름의 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라르손은 여성을 다만 여성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대표로서의 여성입니다. 라르손은 소설에서 모든 사회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약자를 대변하는 상징으로서 그 여성을 피해자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설에서 장이 바뀔 때마다 라르손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받는 폭력의 수치를 보여주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가 꾸준하게 스웨덴이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수치를 보여주는 것은 정부가 아무리 복지제도를 잘 꾸려서 갈등을 봉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은폐하는 것에 불과할 뿐 사실은 여전히 그리고 현저히 사회적 고통은 도처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면에 은폐된 폭력이 오로지 여성에 대한 폭력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이 수치는 모든 고통을 낳게 하는 폭력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항상적인 폭력의 형태는 극중 인물의 하나로도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그 인물이 바로 90세가 넘은 노인 하랄드 방예르입니다. 우리는 그가 ‘헤데뷔’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란 존재가 예전엔 나치 당원이었고 여전히 인종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힌 파시스트란 점도 말이죠. 이렇게 라르손은 ‘하랄드’를 통해 파시즘과 가부장제를 한 인물로 결합시킵니다. 라캉에 따르면 아버지란 사회의 근원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현재 스웨덴의 또 다른 상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가 자기 딸인 세실리아에게 계속 창녀라 욕을 합니다. 이 욕설. 늘 쏟아지는 이 호명이야 말로 스웨덴이 사회적 약자에게 계속적으로 가하고 있는 폭력의 상징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이 ‘거짓된 위장 뒤에 은폐된 사회적 고통’을 보여주는 것에 우리는 또 하나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이번엔 인물이 아니라 사건으로 극화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1966년 하리에트가 사라진 바로 그 사건입니다. 라르손이 정말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이 모든 것을 설계했는가를 여기서 우리는 또 놀랄 정도로 실감합니다. 그는 왜 하리에트가 사라지는 때를 하필이면 1966년의 어린이 날로 잡았던 것일까요? 그 어린이날, 미카엘은 사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날 퍼레이드에 행복한 표정으로 참여했음을 봅니다. 거기에 있었던 것은 충만한 웃음과 행복 밖에는 없었죠. 그런데 거기 마치 하나의 얼룩처럼 혼자 다른 것을 보고 있는 하리에트가 있습니다. 모두가 웃고 있는 가운데 두려움에 떨고 있던 하리에트가 있습니다. 모두 같은 것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데 하리에트, 그녀만은 다른 것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사진이 결정적인 열쇠가 되어 30년 동안 풀리지 않고 남아있던 사건이 해결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찍힌 때는 1966년 이었습니다. 1966년은 스웨덴에서 세계 최초로 아동학대금지법이 만들어졌던 해입니다. 그 66년의 어린이날. 그 날 열렸던 축하 퍼레이드, 몰려든 행복한 관중들. 이 모든 이미지들이 그야말로 찬란한 복지국가 ‘스웨덴’을 형성해가고 있을 때 거기, 그 내부에, 그 모든 이미지들이 거짓된 것임을 알려주는, 하리에트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설에서 모든 것의 발단이자 모든 해결의 열쇠가 되는 이 사건마저 이렇게 ‘거짓된 위장과 은폐된 고통’을 그야말로 집약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면, 사실 라르손이 소설 ‘밀레니엄’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닌 게 아닐까요?

 

 

   이제 어느 정도 라르손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밝혀졌으니 앞서 얘기했던 과연 그가 어떤 대안을 보여주려 하는지 천착할 차례로군요. 긴 글 읽으시느라 많이 힘드셨을텐데,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오신 거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결말까지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모두 사회로부터 벗어난 존재들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카엘은 독립 언론인이지만 그가 정보를 얻는 것은 그래도 합법적 틀 내에서 움직입니다. 하지만 리스베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해커입니다. 그녀가 얻는 대부분의 정보는 불법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라르손은 둘을 명확히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둘 다 벗어난 존재이지만 미카엘은 여전히 합법적 영역 내에 머무르고 리스베트는 불법적 영역까지 넘나드는 존재로 말이죠. 이것은 라르손이 리스베트로 하여금 미카엘 보다 더 멀리 사회로부터 벗어난 존재로 만드려고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나아감이 무슨 의미가 있길래 라르손은 이렇게 특별히 차이를 두는 것일까요? 그것은 라르손에게 있어 더 멀리 나아감은 더 강하게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리스베트가 더 멀리 나아간다는 것은 미카엘 보다 그녀가 더 강하다는 의미이죠. 때문에 비우르만 변호사와의 에피소드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궁극적 해결은 늘 그녀가 도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강해지는 것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스웨덴’이란 사회 자체와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저 앞에서 얘기했던 것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라는 스웨덴에서 왜 라르손이 이러한 어두운 모습을 부각하는지에 대해 얘기할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소설 ‘밀레니엄’을 통하여 라르손이 겨누고 있는 표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복지국가’란 말 속에 함의되어 있는 것. ‘스웨덴 모델’이란 말 속에 숨겨져 있는 것. 즉, 뭐든지 관리하고 통제하는 ‘정부’ 자체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정부도 여성이 그저 여성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정부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정부를 언급한 것은 라르손이 소설에서 특별히 설명하고 있는 ‘후견제도’와 관련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후견제도’야 말로 라르손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개인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정부’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라르손은 이 ‘후견제도’를 통하여 이미 성인이 된 리스베트 조차 정부에 의해 경제적 능력을 박탈당하고 일일이 관리와 허가를 받아야 할 뿐만이 아니라 아울러 후견인인 변호사 비우르만으로부터 성폭행까지 당하는 등, 이렇게 개인에게 가해지는 정부의 부조리한 폭력성을 더욱 더 강조합니다. 결국 라르손이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력성과 맞서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멀리 벗어나게 하는 것은 더 강하게 그것과 싸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기이하게 여겨졌던 구성, 그러니까 왜 2권으로 가서야 주인공들인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비로소 만나게 되고 2권에서야 사건 해결을 위한 본격적인 추적이 행해지는 것인가가 더욱 더 명확하게 이해됩니다. 결정적으로 2권과 1권을 가르는 지점은 바로 ‘사진의 발견’입니다. 이 사진은 사건의 근원이자 해결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미카엘이나 리스베트 모두에게 예사롭지 않음이 눈에 띕니다. 우리는 이 둘의 여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에리카가 미카엘, 헨리크 방예르와 처음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부터 시작해보죠. 미카엘은 그 방문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미카엘이 더욱 더 방예르 가문에 종속됨을 의미했습니다. 이와 똑같이 리스베트도 새로운 후견인 비우르만에게 예속됩니다. 미카엘이 자본 때문에 그랬듯 리스베트도 새로운 컴퓨터 때문이었습니다. 둘 다 각 자에게 절실했다는 점에서도 똑같습니다. 그렇게 그것은 일종의 욕망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그 둘이 동일한 과정임을 더욱 더 강조하듯이 이것들은 병행됩니다. 미카엘은 이것을 시작으로 더욱 더 예속되어 갑니다. 그는 세실리아와 관계를 가집니다. 이전이 자본에의 욕망이라면 이번엔 몸에의 욕망입니다. 묘하게도 리스베트 역시 그렇게 육체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물론 일방적인 관계이지만. 이렇게 미카엘, 리스베트는 동일하게 자본의 욕망에서 육체적 욕망으로 스스로를 더욱 더 얽어매게 됩니다. 미카엘이 세실리아와 함께 있을 때 리스베트는 비우르만에게 당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병행되어 전개됩니다. 이러한 일치와 병행은 물론 라르손이 의도적으로 한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예속되어 갈 때 그들이 확인하게 되는 건 오로지 단 하나, 그들의 무기력함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미카엘은 실마리를 전혀 잡지 못한 채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리스베트는 아무리 성폭행을 당해도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라르손은 그들이 사회 내로 점점 편입되면 될수록 더 나약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감춰진 진실을 밝혀내어 싸우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더 강하게 만들 수 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점점 더 사회로부터 벗어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카엘에겐 감옥에로의 수감과 세실리아와의 결별을, 리스베트에겐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 후견제도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사회의 가장 바깥쪽 벼랑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이르러서야, 그렇게 최대한 사회로부터 벗어나서야 비로소 미카엘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리스베트와 미카엘은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제 ‘밀레니엄’에서 라르손이 말하고자 했던 것의 최종적인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복지국가화에 따른 정부의 개인에 대한 통제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우려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개인들이 기꺼이 사회가 내뻗는 촉수로부터 리스베트처럼 달아날 것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왜입니까? 그건 복지 자체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렇게 점증되는 정부의 개인에 대한 통제에서 파시즘의 잔영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현실에서 기자였던 라르손은 언론인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스웨덴에 만연한 일상적 파시즘과 투쟁하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 소설 ‘밀레니엄’은 바로 그러한 저널리스트로서 라르손이 가지는 투철한 사명감이 그대로 반영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소설에서 리스베트가 보여주는 철저한 처벌과 복수의 의사 표현은 그대로 라르손이 가진 파시즘에 대한 결연한 의지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네요. 라르손의 ‘밀레니엄’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높은 인기와 평가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거침없는 ‘페이지터너’로서의 압도적인 재미를 꼽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재미에 가려 우리가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할 작품을 통해 관철하고 싶은 주제의식이 아울러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라르손이 얼마나 아주 세부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작품을 구성했는지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은 소설가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투쟁을 하듯 기사를 썼던 치열한 저널리스트로서의 의식 역시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새삼 문득 깨닫는 건 라르손의 그 편안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뒤에 깃들어있는 거센 불길과도 같은, 작가와 저널리스트 모두로서의 정열이로군요. 그만한 정열이 내어뿜는 글이었기에 그만 우리는 압도적으로 타버린 나머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작품을 먹어치운 것은 아니었을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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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1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헤르메스님의 글을 읽으면 항상 변화를 주셔서 눈과 마음이 즐겁습니다.
와, 이번 리뷰는 정말 알차고 빈곳이 한군데도 없는걸요.
물론 그만크...큼 제겐 어렵지만 말이어요.
이 책은 한동안 알라딘 메인에 떠서 관심이 갔는데 영화가 19금이 붙은것을 보고서는 아예 흥미가 떨어져버렸어요. 어차피 영화화된것은 보지않는데 잘되었지요.

오드득 2012-02-19 20:24   좋아요 0 | URL
제가 좀 정형화된 걸 싫어하고 이것저것 마구 저질러보는 스타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보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소이진님^ ^ 이런 밀레니엄이 19금이었나요? 안타깝네요. 그래도 데이빗 핀쳐 감독의 영화는 한번쯤 보아둘 가치는 있으니 나중에라도 꼭 한 번 보시면 좋겠어요^ ^

맥거핀 2012-02-12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소설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보고 싶었었는데, 헤르메스님이 잘 정리하여 쉽게 전달해주셔서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늘 좋은 글을 읽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군요. 저는 영화만 본 상태이지만(그것도 리메이크인 미국판만), 확실히 소설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보다 더 풍성한 함의를 읽어낼 수 있겠군요.^^

오드득 2012-02-19 20:28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정말 감사합니다.^ ^
밀레니엄에 대한 글에 개인적으로 아쉬운 게 있어서 적어본 글이었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더 기쁘네요. 개인적으로 데이빗 핀쳐와 라르손이 지향하는 바는 같은 지점일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원작과 영화를 다 보는 것이 더욱 풍성한 이해를 가져다 줄 것 같아요. 어차피 작품이 가진 의미란게 전적으로 작가들만의 몫도 아니니 말이죠^ ^

마녀고양이 2012-02-13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제가 소설을 독파한 직후에 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읽은지 1년이 넘어가니, 정말 가물가물하네요...

제가 남아있는 것은, 3부에 리스베트가 점점 자신을 찾아가는데 대해 안도감을 느꼈다는 것과, 남자보다 더 멋진 여자 주인공을 창조했구나 라고 이끌린거, 그리고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5부작 기획이었던 책이, 3부작으로 끝나서 안타깝다는 점이었답니다.

정말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재미와 스릴을 추구하더라도
그 이면, 작가가 나타내고자하는 주제를 보아야한다는 점에 열렬한 공감을 보냅니다.

오드득 2012-02-19 20:31   좋아요 0 | URL
하하, 저도 시간이 지나면 내용들이 가물거리고 때로는 막 썪이고 그러더라구요. 라르손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미완으로 그치고 만건 저역시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소설로 간접 경험하게 되는 그의 열정을 생각하면 더 그렇더군요. 좋은 작가를 하나 잃은 것 같아 아쉽고 하야오의 '붉은 돼지'에 나오는 대사 처럼 "좋은 사람들은 빨리 죽"는가 봅니다. 아무튼 열렬한 공감에 정말 감사드려요^ ^
 
불야성 불야성 시리즈 1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하드보일드는 무엇보다 아웃사이더의 감각으로 충만하다.

 

'주류'라는 것에 피로를 느끼고 '세상의 상식'이라는 것에 멀미를 느끼는

한 번 그저 한없이 가벼운 깃털 처럼 속된 세상을 훌쩍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영혼이 위안을

구하듯 내미는 손을 덥석 마주 잡아주는 것이 바로 하드보일드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세상의 바깥으로 불러내 위안을 준다는 의미에서 하드보일드는 판타지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하드보일드는 판타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판타지는 먼저 세계를 변화시켜 그걸 보는 자아를 변화시키려 한다.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과 거기의 논리를 통해 당신의 눈을 바꾸고 생각을 바꿔 당신을 짓누르는 현실의 중력을 제거하는 것. 그것이 판타지고 그렇게 먼저 당신의 환경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둔다. 그러니까 판타지엔 인간이 변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를 둘러싼 환경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의식을 환경의 종속물로 여기기 때문에 판타지가 깨우는 것은 당신의 이드 속에 감춰진 또 다른 '하이드씨'가 아니라 달리 볼 수 있는 당신의 '시선'이다. 그렇게 당신이 서있는 그 자리를 슬쩍 다른 자리로 이동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판타지인 것이다.

 

 

   물론 하드보일드 역시 당신을 어디론가 데려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판타지가 그러듯이 달리 볼 수 있는 자리 같은 건 아니다. 이를테면 '무대의 뒷편'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드보일드는 무대의 더 깊숙한 곳으로 데려간다. 무대의 핵심, 현실보다 더 현실다운 곳. 우리의 일상이 서로의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온갖 기만과 위선으로 덧칠되어 있음은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다 느끼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짐짓 모른 체 살아간다. 더러 구차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세 끼 밥벌이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옵션이라 생각하고 지구에 매달리기 위한 보편적 숙명이라 스스로 정당화한다. 더러 자기가 바라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고 애써 자위하기도 한다. 세상이 전부다 이렇다면 도저히 살지못할 것 같아서 차라리 나만의 경우가 아주 특수한 경우이고 그래도 세상 어딘가엔 아름다움이,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믿으려 자기 최면을 건다. 어쨌든 희망이란 게 가장 좋은 의미의 거짓말에 불과함을 알더라도 말이다.

 

 

   세상에 만연된 기만과 위선, 그리고 거기에 길들어짐에 따라 이제는 자기 스스로 껴입어버린 기만과 위선... 그렇게 체념 속에 자위하고 그렇게 오욕 속에 굴복하는 자아에게 하드보일드는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그의 목을 부여잡는 억센 손이 된다. 그리고 그 목을 비틀어 다른 손이 유원지의 요술 거울 처럼 현실을 왜곡하고 치장하는 모든 껍질을 산산히 부셔 드러낸 진실을 보도록 만든다. 벌것벗은 맨 얼굴의 진실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을... 그렇게 무대 깊숙한 곳에 놓인 진실들을...

 

 

   따라서 하드보일드의 성공 조건은 총잡이의 액션도 포커페이스들의 비정도 아닌 '가면 벗기기'에 있다. 세상이 쓴 가면을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쓴 가면을 얼마나 잘 벗길 수 있느냐,거기에 하드보일드의 성공 여부가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드보일드는 '디스토피아적'이다. 왜냐하면 하드보일드는 세계에 대한 '홉스'적 시각이야말로 진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은 모든 이에 대하여 늑대'라는 그 시각 말이다. 그렇게 늑대들로 가득찬 세계. 여기엔 더이상 그 어떤 배려도 공존도 없다. 오로지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식의 양자택일만 가능할 뿐. 때문에 우리는 하드보일드를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보아야 한다. 넘쳐나는 액션은 송곳니로 서로의 목을 물어뜯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이기적 행태들을 은유하는 것이며 하드보일드만이 가진 특유의 비정성 또한 '늑대들의 제국' 신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자칫 동정과 배려를 베풀었다간 언제 자신이 오히려 목을 물릴지 모른다는 생존에 따른 두려움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된 경계 본능에 대한 은유라고.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은 하드보일드가 의도적으로 가져버린 장르적 특징들이 아니라 모든 허위와 치장을 벗겨 세상의 가장 속된 진실 위에서만 움직일 수 밖에 없는 하드보일드로가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생래적 특징들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드보일드는 단순히 비유하자면 '빨간약'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넸던, '진짜 현실'로 돌아가게 만들 바로 그 '빨간약'이다.

 

   그러니, 하드보일드는 아직도 세상 어딘가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 당신의 기만적 몽상을 거부한다. 물론 여기엔 조건이 있다. 그 희망이란 게 다만 입만 벌리고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감을 기다리는 것과도 같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막연히 도래하기만을 기다리는 희망일 경우이다. 하드보일드는 그런 무임승차적 꿈꾸기를 거부한다. 하드보일드가 궁극적으로 세상의 가면과 당신의 가면을 벗기는 이유는 당신을 그저 구경꾼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다. 하드보일드가 그 가면을 벗겨내어 세상의 적나라한 현실을 목도하도록 하는 것은 당신을 하나의 투사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당신 외엔 아무도 당신이 꿈꾸는 그 희망을 쟁취시켜줄 자가 없으니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골방에 처박혀 자위하지 말고 직접 나서서 싸우라고 창과 방패를 쥐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드보일드다. 그렇게 전혀 다른 '나'를 깨우는 것. 일상 속에선 찾을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이면의 '하이드씨'를 깨우기 위한 자명종이 되는 것. 그것이 정녕 하드보일드가 원하는 바이다.

 

 

   때문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드보일드가 독자들을 경계 밖으로 데려간다고는 할 수 없다. 차라리 독자들 스스로 내부에 이전부터 간직된 아웃사이더가 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하드보일드를 잡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살면서 굳이 직접적으로 듣지 않아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에게 맞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일 뿐'이라고 당당히 외쳤던 트라시마코스의 말마따나 이 세상에 정말은 어떤 법칙들이 통용되고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승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국 그 트라시마코스를 무너뜨렸던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 우리 영혼에 간직된 그 양심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은 단 하나다. 인간은 자신이 전혀 모르는 이를 위해서도 희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도 타자를 배려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만이 인간다움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다이모니온이란 바로 그 배려에의 호소이다. 나만 아는 괴물이 아니라 스스로 타자를 배려하는 진정한 사람으로 있고자 하는 저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자발적 의지의 메아리가 바로 양심이다. 바로 이 내부에 공명되는 의지의 울림에 예민한 자들은 눈 앞에 드러난 모든 송곳니들과 어금니들의 광란에 피로와 혐오를 느낄 수 밖에 없고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부단히 인간으로 남고자 기댈만한 뭔가를 잡고자 손을 뻗게 되는 데 거기에 부여잡힌 것이 결국 하드보일드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드보일드는 '맞잡은 손'이다. 앞서 진실을 목도키 하기 위해 거머쥐는 손이라 했지만 그것은 모퉁이를 돌다 불현듯 채권자를 마주한 운없는 채무자 마냥 그렇게 느닷없이 하드보일드와 만나게 되는 자에게나 타당한 비유이다. 하드보일드의 진정한 본질은 '맞잡은 손'이다. 또한 바로 여기에서 하드보일드는 결정적으로 판타지와 갈라진다. 판타지 역시 세상의 진실을 목도하도록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판타지는 인식의 변화를 주는 것에 만족할 뿐 그것을 위해 행위할 지 말지에 대해서는 독자 자신이 결단해야 할 부분으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타지의 마지막엔 늘 '현실로 되돌아옴'이 있는 것이며 그래서 판타지가 현재는 손을 맞잡고 있더라도 종국에 가선 이별의 손짓이 예정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하드보일드에겐 그런 예정된 이별이 없다. 오히려 하드보일드는 당신에게 되돌아갈 현실 따윈 없다고 말하며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잡은 손을 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의 맞잡은 손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내내 마음 속에 품고 있었을지도 모를, 행위에로의 참여를 복돋우고 응원하는 손이다.

'쫄지말고 행하라! 우리가 하나가 되어 응원하겠다!' 이런 무언의 울림이 맞잡은 뜨거운 온기 가운데 전해져 오는 그런 손인 것이다.

 

   당신이 하드보일드를 만난다는 것을 그런 것이다.

   그는 당신의 목을 거머쥘 수도 있고 당신이 내민 손을 맞잡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속내는 같다. 이 야수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당신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인간의 영혼이 몇 푼의 돈으로 도매금으로 쉽게 팔리던 대공황 때 태어난 이후로 그것은 내내 변하지 않았다. 샘 스페이드, 필립 말로우, 마이크 해머, 루 아처 현대의 매듀 스커더, 엘비스 콜, 켄지와 제나로 그리고 일본의 사와자키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변하고 국적이 달라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이 달라지려고만 마음 먹는다면 이렇게 많은 이들이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했던 영화 '꿈의 구장'에 나오는 전설적인 메이저리거들이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 오로지 순수한 야구의 기쁨만을 위해 경기했던 그 '구장' 같은 곳에 모여 오직 당신만을 격려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당신은 오로지 '하드보일드'라는 티켓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여기 당신에게 또 하나의 티켓을 선물한다.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이라는 진정한 하드보일드 티켓을...

 

 

 

 

   

  주성치의 이름을 거꾸로 차용한 이름이기도 한 작가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은 그동안 좋다는 소문은 무성한데 정작 본 사람은 별로 없었던 전설속의 걸작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소량만 출간되고 내내 절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보시다시피 전혀 새로운 장정에 번역까지 새로이 해서 발간되었다. 가히 명불허전이라 할 정도로 앞에서 내가 말한 하드보일드의 모든 것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하세 세이슈가 불야성에서 묘사한 그 날것으로의 세계의 진실이 너무도 선명해 아마도 한동안 그 세계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라는 제목 그대로 뇌리에서 쉬이 잊힐 수 없는 멋진 작품으로 기꺼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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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10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암, 졸리다.
지금은 새벽 세시이므로 일단 멋드러진 책의 표지와 제목만 눈길주고는 자러떠납니다~
헤르메스님 안녕히 주무셔요.
감상은 내일해야지 ㅋㅋ
 
구체의 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조용히 밀려드는 파도... 

그 아래서 조금씩 심연 속으로 쓸려가는 모래알...

 

소리없이 내리는 눈...

그 아래서 서서히 존재를 잃어가는 버려진 산사의 외로운 석등...

 

미치오 슈스케의 '구체의 뱀'은 마치 이러한 모습을 영원히 결빙시킨 '스노돔' 같다.

 

 

 

 그 결빙된 풍경 안에 슈스케가 담아두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 구체 안의 '뱀'은 원죄를 낳게한 죄악을 상징하는 뱀일 수도 있고...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의 첫 머리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뱀이라는 그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아니 스스로 그만두지 않을거라면, 어차피 계속할 걸음이라면, 삼키고 가야할 무정한 '삶'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아니, 자신의 꼬리를 삼켜가는 뱀 처럼 지속될 삶을 위해 스스로 죄의식을 먹을 수 밖에 없는 비정한 '삶'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하나...

 

 

 고통속으로 내던져진 존재...

 

 최근 미치오 슈스케 소설 속 인물들은 '하이데거적 창조물들(creatures)'이다.

그렇게 자신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무언가에 의해 고통속으로 내던져진 존재...

전작 '달과 게'에 나왔던 이들도도 그랬고 '구체의 뱀'에 나오는 이들도 그렇다.

메울 수 없는 상실,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을 트라우마로 가진 자들이 만든 '갇힌 우주'.

그것이 미치오 슈스케가 최근에 그리고 있는 세상이다.

투명막 같은 것에 가로막힌 세상. 어디로든 달아날 길 없는 그들...

그래서 신화속 시지프스의 후예들인 그들...

그러한 자들은 어떻게 하나?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벗어나는 용기를 낼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

할 수 없다. 같은 상처를 보듬어 안은 자들끼리 스스로에게 손을 내밀고 안길 가슴과 기댈 등을 내밀어 줄 수 밖에...

뱀이 서로의 몸을 섞어 또아리를 틀듯, 서로의 몸에 밀착하여 겨울의 한파를 늑대무리가 견디듯...

그렇게 서로 연대할 밖에...

 

  연대...

 

  이것이 전작 '달과 게'와 지금 '구체의 뱀'을 관통하는 슈스케의 현재 주제이다.

그렇게 그는 근원적으로 치유가 불가능한 고통을 안아버린 이들이 삶을 견뎌가는 방식을 탐색한다.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알베르 까뮈는 허무와 권태 밖에는 가져오지 않는 삶을 왜 지속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는 정말 알고 싶었다. 자살이란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어째서 인간들은 시지프스가 그랬듯이 결국 무위로 돌아갈 이 힘겨운 여정을 계속하는 것일까?

 

 슈스케의 질문 방식도 비슷하다.

어째서 그런 고통과 죄의식을 안고 있으면서도 계속 걷는 것인가?

당신들이 만든 연대가 그리도 많은 힘을 주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연대가 어디 얼마나 유용할지 어디 한번 볼까? 말한다.

 

 

 그가 이렇게 '어떻게'를 물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가 보기에 연대가 그리 강고하지 못한 까닭이다.

전작 '달과 게'는 '그 연대의 연약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묻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는 말한다. 연대가 연약한 이유는 서로가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자신의 현실적 고통을 없애기 위해 제의처럼 소라게를 희생시키던 아이들의 연대는 결국 발가벗듯 드러내지 못한 자신만의 비밀스런 아픔들 때문에 산산히 깨어진다. 그들의 연대는 똑같은 고통 위에서 태어났지만 결국 그저 순간의 외로움을 잠시 잊기 위한 피상적 '같이 있음'이었기에 그들의 아픔이 아무런 위안을 받지못할 가능성이 있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덜어서 넘겨주려 연대했을 뿐 받아서 더 가지려는 연대는 아니었기에 아픔의 호소가 무표정에 의해 그대로 반사되어 나온 순간 의미가 없어진 것이었다.

 

  결국 소용 없었어... 사람은 어차피 혼자야...

 

  이것이 '달과 게'에서의 슈스케의 결론이었다.

그것이 성장소설이라 한다면 그렇게 모든 짐을 자기 혼자 져야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 뼈져린 진실의 확인. 그것이 성장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의 확인 위에서 '구체의 뱀'은 출발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자신과 살기를 거부하는 아버지의 내심을 알아버린 주인공 토모는 이웃의 오츠타로 씨네 집에 얹혀산다. 오츠타로씨는 친아버지 이상으로 토모에게 신경을 써 주고 있지만 토모는 어쩐지 끝내는 다가가지 못할 여백을 느낀다. 왜냐하면 7년전 야영을 갔다가 뜻하지 않은 화재로 오츠타로씨가 결국 아내와 큰딸 사요를 잃었기 때문이다. 토모는 그 때 자신도 함께 갔기에 그리고 사요에 대한 개인적 감정도 있어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오츠타로 씨네 집에 사는 세 사람... 오츠타로, 토모, 나오는 모두 겉으로는 안정된 가족 같은 삶을 사는 듯 보이나 서로가 자기 둘레에 처 놓은 보이지 않는 경계 안에서 홀로 그 고통을 삭이며 사는 존재들이다.

'달과 게'에 나왔던 '소라게 제의 모임'의 그 세 아이 그대로...

 

 토모는 오츠타로씨를 도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의 근거가 되는 집을 서서히 먹어가는 흰개미를 퇴치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 마음 깊숙히 존재하는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흰개미인 고통과 그에 대한 죄의식은 퇴치하지 못한다.

그래서 서서히 그들은 흰개미에게 먹혀간다. 끝없이...

 

 그렇다면 슈스케는 그냥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뿐인가?

사막 위의 십자가에 매달려 형벌을 받는 죄수가 오로지 홀로 정오의 땡볕을 견딜 수 밖에 없듯이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중언부언하고 있을 뿐인가?

 

 물론 그건 아니다. 삶이 그냥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영원히 움직이는 콘베이어 벨트라면

문학 역시도 그렇다. 어쨌든 과거의 작품 보다는 한 발 먼저 내딛여야 한다.

그것이 더 깊은 절망 속이든, 더 허무의 심연일지라도,

어쨌든 조금이라도 더 내뻗는 그 움직임에 문학의 존재는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확장되는 우리의 사유로 인해 존재하니까...

 

 해서 그는, 그 동기의 연유는 모르겠으나,

그 모든 홀로 상처를 곱씹기만 하는 고독한 은둔을 끊고

비로소 치유를 위한 온전한 연대의 가능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이 소설에서 보이려 한다.

바로 토모에게 있어 죄의식의 근원이 되는 자살한 사유를 닮은 토모코의 존재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츠마루와 토모 모두를 기꺼이 껴안으려 하고 있었던

어두운 바다를 홀로 외로이 비추는 등대와도 같은 존재였던 나오를 통해...

 

 슈스케는 보여준다.

 

 어떻게 해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고통을 안아버린,

그렇게 달아날 길 없는 트라우마의 구체 안에 갇혀버린

존재들이 연대를 통해 이제 긍정으로써 삶을 껴안게 되는가?

그러한 '함께 함'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을.

그것이 바로 배려라는 것을...

나의 아픔을 덜어내는 숟가락으로 타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비록 나의 아픔은 그대로 쌓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를 바라며

차라리 내가 숟가락이 되어 덜어오는, 타인에 대한 배려.

그것이 바로 상처받은 자 모두를 삶의 자리에 제대로 설 수 있게 하는

온전한 연대를 가능케 하는 모든 것임을 보인다.   

 

 그렇게...

한 없이 파도로 인해 심연 속으로 쓸려가면서도 어떻게 해변은 해변으로 남을 수 있고

한 없이 무정한 눈으로 덮이면서도 어떻게 석등은 석등으로 남을 수 있느냐 라는

삶을 항구적 '스노돔'으로 결빙시킬 힘은 모두...

해변이 모래알을 파도에 내어놓듯이

석등이 자신의 몸을 눈 아래 내어놓듯이...

나를 먼저 내어놓는 가운데 온다는 것을...

슈스케는 그렇게 내딛은 한 걸음.

한 권이 책이라는 그 결빙된 여정. 그것을 통해 보여준다.

 

 삶은 무섭다.

어린왕자의 보아뱀이 정말 무서운 것은 아무리 커다란 것이라 하더라도

홀로 삼켜야 한다는 그 '나누어 질 수 없음'이란 고독함 가운데 있었다.

그 예감된 고독함의 두려움이 너무도 커서 기껏 맺은 연대 또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슈스케는 이제 다른 쪽을 보라한다. 나만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나와 같은 또 한 사람을...

그리고 두려워말고 그를 위해 자기 먼저 내려놓으라 한다.

당신이 그렇게 덜어오는 하나의 작은 숟가락이 된다면

그 역시 덜어가는 숟가락이 기꺼이 되어 줄 것이라고...

우리가 가지는 아픔과 두려움은 먼저 덜어오려 할 때

눈녹듯 사라질 것이라고...

 

 혹시 이 책을 읽고 마지막을 덮고 나서도

흩날리는 눈으로 가득한 예쁜 스노돔에 시선을 하염없이 빼앗기듯 여운이 오래도록 이어진다면

당신 역시 알게모르게 슈스케의 말에 공명한 탓이리라...

 

 그렇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자신을 한동안 처마 밑 풍경으로 만들어 놓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그렇게 풍경이 되어 새로이 열린 가능성 처럼 밝아오는 햇살 아래

잠을 깬 더불어 함께 할 이들로 가득한 숲이 내어놓는 첫 숨을

가만히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그 투명하게 밭은 숨 가운데 가득한 타인의 온기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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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0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문시같은 느낌의 리뷰로군요!
지금 오전 1시 26분.
이 시간에 딱 맞는 글입니다.
오우, 그런데 이런식으로 리뷰를 작성하니 꽤 좋은걸요.
글도 눈에 쏙쏙 들어오구.

아참,
피곤하지 않게 얼른 주무셔요 ㅎㅎ
저는 이만 자러가야겠습니다.

굳밤 :-)

오드득 2012-02-09 01:41   좋아요 0 | URL
와! 소이진님^ ^
깜짝 놀랐어요
잠깐 다녀왔더니 바로 댓글이 달려서...
좀 뭔가 변화를 줘 보려 했는데
괜찮은가요?
아무튼 잘 주무세요.
내일은 눈이 온다고도 하던데
강추위에도 끄덕없는 뜨거운 하루 되시길 빌게요^ ^

이진 2013-02-12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려던 찰나 이 리뷰가 떠올라 다시 들러요.
헤르메스님의 관찰력과 글솜씨는 도저히 못 따라가겠네요.
제가 쓰는 리뷰는 아마 졸작이 될 것 같아서 쉽게 손이 움직이질 않아요.
제목부터... 결빙된 숲... 크....
헤르메스님 제 리뷰 읽고 비웃으시면 안됩니다. 약속!

오드득 2013-02-12 16:22   좋아요 0 | URL
와! 구체의 뱀 읽으셨구나!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한데요.
비웃지 않을테니 빨리 올려주세요^ ^
최근에 까마귀의 엄지를 읽었는데 초반의 슈스케는 왠지 다르더군요.
후기의 강한 모라토리엄 증후군이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더욱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아무튼 궁금 궁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