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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브레이커 -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쳐 자신의 길을 찾는 소년의 이야기
파올로 바치갈루피 지음, 나선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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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일러...
늘 약 아니면 술에 취해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아들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일쌈는 그의 아버지는 단단히 박힌 못 처럼 질기게 살아라고 그런 이름을 그에게 붙여주었다고 했다. 네일러는 그 이름이 마치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탁이라도 된 양 그렇게 살았고 사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이기도 했다. 때는 언젠가의 미래. 세상의 대부분이 '절대수축'이라는 해수면 상승으로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자원마저 고갈되어 오로지 재활용을 통해서만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한정되어진 자원으로 인해 당연히 빈부의 격차는 극심해지고 모든 것은 그저 가진 '자본'의 양으로만 결정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더이상 소용없어지고 오로지 소수의 다국적 기업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네일러는 이러한 마치 영국이 한창 식민지 건설을 통해 제국주의로 향해 나가던 것과 같은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계층의 아이로 태어났다. 그 계층이 살아남으려면 오로지 제 몸뚱이를 이용하여 좌초된 선박에 들어가 다국적 기업에 팔만한 고철더미들을 모으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러니까 예전 우리나라 난지도에도 있었다는 재활용할만한 물건들을 찾아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넝마주의'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건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그들을 특히 '스캐빈져'라 부르는데 그렇게 배에 들어가 고철을 가져오는 것도 왜만한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지극한 부러움의 대상이니까. 세상에는 그조차 되지 못해서 자신의 장기나 피를 기업에 팔 수 밖에 없는 사람들로 넘쳐나기 때문에...
그러한 스캐빈져들에게 있어 희망은 딱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절대 몸이 자라지 않는 것. 왜냐하면 선박 도처에 뚫린 구멍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가 필요한 금속을 가져와야 하는 스캐빈져들로서는 몸이 커져 버리면 더이상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특히나 유조선 같은 경우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석유 탱크를 찾아내는 것이다. 석유가 완전히 고갈되어 그렇게 찾아낸 석유는 엄청나게 고가에 팔리기 때문이다. 즉 어딘가 잠자고 있는 탱크 속 석유는 스캐빈져들에게 한 방에 그 고단한 삶으로 부터 탈출시켜 줄 로또와도 같은 것이다.
네일러도 마찬가지였다. 그 둘의 희망만을 안고 단순히 오늘만은 살아남기 위해 내일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어두운 통로들을 기어다니며 금속들을 모았다. 하지만 그래도 네일러는 바라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던 '쾌속선'을 타고 푸른 바다를 항해하는 것. 잠깐만 마음을 놓아도 무심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공상할 만큼 간절한 바람이지만 낮에는 어둡고 자칫 잘못하면 목숨마저 위태로운 통로들과 밤에는 무자비하게 가해질 아버지의 폭력 밖에는 없는 네일러에겐 그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었다. 그러니까 절망의 우물 바닥에 빠져버린 자의 두 눈 안에 비쳐드는 밤하늘의 별들과도 같은 그런 꿈이었다.
생각해보면 바치갈루피가 그려내는 세상들은 다 그랬다. '와인드 업 걸'에서도 그랬다. 온갖 유전병들이 들끓고 다국적 기업들이 식량을 제멋대로 통제하는 바람에 굶주림만이 가득한 그렇게 희망이라고는 그 어디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바치갈루피에게 그저 디스토피아라는 의미만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이런 가혹한 세상을 주인공들에게 선사하는 것은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소설들이 흔히 그렇듯이 미래에 닥쳐올지도 모를 비극적 세계를 묘사로써 지금 현실을 계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오히려 주인공들의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달리 말해 이렇게 세상을 묘사하는 건 거기에 바치갈루피가 정말 주인공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다름아닌 주인공들이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제 스스로의 의지와 결정으로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바치갈루피는 그 무엇보다 오로지 혼자의 힘과 생각으로 그 자신만의 길을 가도록 원한다. 그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의 진심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는 '와인드 업 걸'에서도 그랬지만 이 소설 '십 브레이커'에서도 일단 세상을 한 번 '리셋' 시킨다. 노아 시대의 홍수와도 같이 '와인드 업 걸'에서는 거대한 홍수로 또한 이 소설에선 카트리나와도 같은 거대한 태풍으로 기존의 모든 것들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기성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비워진 상태에서 주인공들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십 브레이커'에서 네일러가 사는 마을은 완전히 전복되고 네일러는 그 뒤집어진 세상 속에서 자신의 꿈에 다가갈 계기를 얻게된다. 그리고 그 계기를 통해 네일러는 그 오래된 꿈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가게 된다. 더 이상 하루하루를 견뎌내기에 급급한 자맥질이 아니라 힘차디 힘찬 헤엄으로 세상이 가르쳐 준 법칙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삶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아버지라면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잣집 소녀의 목을 긋고, 반지를 빼내고, 거기서 피를 씻어내며 웃었을 것이다. 일주일 전이라면 네일러 자신도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슬로스가 나의 생명도 그녀의 생명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해주기를 너무도 간절히 바랐지' (...) 물에 빠진 소녀의 애원하는 눈을 바라보면서 네일러는 한 때 자신의 눈도 꼭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했다. (P.128)
바치갈루피는 늘 압도적인 서사를 자랑한다. 그는 그 누구보다 흠뻑 매혹시킬만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작가이다. 거기다 SF적 세계인데도 그 디테일이 뛰어나서 현실감이 넘치기 때문에 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그 블랙홀과도 같은 이야기 속에서 바치갈루피는 똑똑히 보여준다. 그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가 찾아낸 믿음 안에서 당당히 나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러니까 바치갈루피의 매력이기도 한 압도적인 서사는 사실은 독자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기 위함이다. 즉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자신을 믿고 가도 된다는, 전혀 세상이 말하는 규칙 같은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오로지 네 자신만 믿고 나아가도 충분히 괜찮다는 바로 그런 믿음을 주기 위함인 것이다.
거짓말을 비웃을 수 있는 진실을 가르쳐주는 자가 누구지?
누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고 어떻게 지킬것인가를 결정하지?
누가 우리를 바꾸지?
누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열쇠를 가지고 있지?
그건 바로 너야.
너는 이미 너에게 필요한 모든 무기를 가졌어
그러니 이제 싸워!
- 마치 영화 'SUCKER PUNCH' 이러한 마지막 독백과도 같이... -
지금보다 한 십년만 거슬러 올라가기만 해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주로 했던 말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였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의 양 만큼이나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과 동의어였고 그래서 한 편으론 어른들의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그 남겨진 가능성을 아낌없이 모조리 쓰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그 말이 아니다. 지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년들이여, 제발 살아달라!"
그렇게 어른들이 절박하게 외쳐야 할 만큼 현재의 대한민국은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시대다. 아파트에서 떨어지고 집에서 목을 메고 각종 폭력에 시달리다 죽는다. 비단 육체적인 죽음 뿐만이 아니다. 오직 좋은 성적만 강요하는 사회.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와 살고 있는 집의 평수로 모든 삶이 단정되어버리는 사회. 자신의 꿈조차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닌 기성품 처럼 남들이 찍어주는 것에 맞춰주어야 하는 사회. 그 속에서 이제 그들의 영혼마저 죽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자살 역시도 영혼의 타살을 자행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 더이상 그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는 절박한 외침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달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어른들의 무기력을 비웃고 그것으로 그들에게서 더이상 아무런 구원의 빛이 나올 수 없음을 통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로지 앞만 보고 빨리 달리기 위해 스스로 거세해 버린 경주마와 같은 어른들로 가득한 이 세계...
바치갈루피가 그려내는 '십 브레이커'의 세상은 그러니 사실은 먼 얘기가 아닌 것이다. 네일러의 하루를 몸으로 착쥐하고 영혼으로 핍박하던 그 세상이나 바로 지금 우리들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른들의 강요가 매일 아이들의 희망을 압살해 가는... 다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라는 사실은 자신 조차 믿지 않는 거짓말로 그걸 치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이들에게 더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잔인한 세상에서 바치갈루피는 처음 청소년을 위해 쓴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이다.
"세상은 너를 그저 벽돌벽 속의 벽돌 하나로 만드려고 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너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스스로 벽돌벽 속 한 개의 벽돌이기를 거부하고 뛰쳐나가라. 구원은 오직 너의 그 탈주의 몸부림 안에만 있으니..."
사실 이런 말조차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 소설에 어울리지 않는 중언부언에 지나지 않는다. 바치갈루피의 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 바는 단 한 문장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
"거세된 어른들은 신경쓰지마! 너에겐 너 만의 진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