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인데, 검색을 해보니 영화 범주 자체가 사라졌군요. 아마도 영화 리뷰는 못 올리는 듯 하여 페이퍼로 올립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프랑스의 교실 하면, 르네 고시니의 '꼬마 니콜라'에서 여실히 보여주었던 아주 소란스럽고 통제불가능한 교실이 먼저 떠오릅니다. 거기, 장학사가 시찰 나오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시찰 나온 장학사마저 니꼴라가 있는 교실 아이들에 엄청 시달린 나머지 결국은 담임선생님의 손을 꼭잡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무척 존경스럽습니다. 선생이란 직업이 이렇게
성스러운 것인지 정말 몰랐어요. 오늘에야 그걸 알았습니다.
용기를 갖고 계속 열심히 가르쳐보세요. 힘내세요!"
( 꼬마니콜라 p.56 )
프랑스에서 교실이 선생님과 아이들의 전쟁터가 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같습니다. 우리나라 처럼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에겐 생경하게 보일지 몰라도 말이지요. 그렇게 우리 역시 엄한 규율 속에 교육을 받아와서 그런지 우리들은 같은 프랑스 교실을 다루고 있는 로랑 캉테의 이 영화 '클래스'에서도 어쩐지 선생님 마랭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그 선생님의 눈으로 학생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더없이 소란스럽고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선생님에게 당당하게 공격까지 감행하는 학생들이 당장 매를 들어서라도 질서와 예의를 가르쳐야 할 것 같은 말썽꾼들로만 보입니다.
영화는 마치 그런 관객의 기분을 예상하기라도 한듯, 마랭의 아주 힘든 수업시간을 보여주고 그 뒤엔 아예 동료교사 하나가 마치 마랭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학생들에 대해 너무 분노한 나머지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폭발하는 모습마저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동료교사의 모습이 정말 이해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꼬마니콜라'에서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던 그 장학사처럼...
마랭이 속한 선생님들의 세계에선 학생들에게 규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고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을 보호해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공감합니다. 뭔가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로 부터 이러한 항변을 듣게 됩니다.
"왜 자기들도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프레임으로만 가두려 하느냐"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아이들이 각자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마랭이 학생들로 부터 이해받고자 했던 것과 똑같이 아이들도 마랭으로 부터, 마랭이 속한 선생님의 세계로 부터 이해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랭은 자기의 입장만 중요합니다. 그들은 마랭으로 부터 배워야만 하는 존재들이고
그 방향은 절대로 거꾸로 될 수 없다고... 학생들이 선생님을 이해해야지,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이해해달라 요구할 수 없다고...
그건 이미 마랭에게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했던 아이들도 그렇게 동료교사가 폭발했듯이 결국 터져버리고 맙니다. '슐란'처럼 말이죠.
감독의 의도였는지, 이렇게 선생님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 각각에서 이해받지 못함에서 오는 분노에서 터져나온 '폭발'이 한 번씩 일어납니다. 영화는 마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처럼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날 것'의 현실을 아무런 형식없이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처럼 묘하게도 댓구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전적으로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려고 하지만은 않고 보다 분명하게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개입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 쪽 세계의 구성원들이 한 번씩 분노로 인한 폭발을 일으킨다는 것도 그렇지만, 더하여, 영화의 앞부분에는 선생님들이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의 끝부분에는 아이들 각자가 자신들이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일종의 수미쌍관이랄까요? 아무튼 이러한 구성은 언뜻보면 교육의 방향이 절대로 비가역적일 수 없다는 마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영화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배웠는가를 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초반의 선생님이 가르치려 했던 것과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주려했던 것과 아이들이 얻게 된 것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얻게 된 것도 선생님의 도움이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있던 개성들이 그저 발현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일례로 마랭을 가장 속썩였던 그래서 마랭으로 부터 창녀라는 모욕을 들었던 한 소녀는 교과 과정에는 전혀 없었던 '플라톤의 국가'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 묻는 마랭에게 그녀는 "왜 그러세요? 창녀라고 했던 제가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서 놀랬나요?"라며 카운터블로우를 날립니다. 이렇게 영화는 마랭이 주장하던 '교육 방향의 비가역성'을 비틉니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연속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단절에 가깝다.' 이렇게 말이죠.
결국 이러한 의도된 영화의 구성은 우리에게 그 단절, 그러니까 선생님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가 하나가 아니라 앙 쪽으로 갈라져있는 세계이며 교실은 바로 그 두 세계가 대치하고 있는 하나의 전장 처럼 느끼게 합니다. 무엇보다 캉테가 이렇게 단절과 대치로 교실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관객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관객들이 선생님과 학생간 관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 흔히 끼고 보는 '수직적 권력 관계'라는 선입관 때문이죠.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마랭의 교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러한 선입관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니까요. 바로 캉테는 그러한 우리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떼어내기 위해서 질서 보다는 혼란을, 평온 보다는 전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캉테는 그것을 교실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묘사를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에도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특히나 카메라가 어떤 높이에서 인물들을 담는가를 보면 이것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일단 영화에서 카메라가 '선생님들만의 세계' 혹은 '아이들만의 세계'(수업 시간 외에는 사실상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만)를 찍을 때는 그대로 눈높이에서 담습니다. 카메라가 찍는 높이는 바로 그 찍히는 대상을 향한 시선의 높이에서 관객이 받는 느낌 때문에 종종 어떤 권력의 역학관계를 암시하게 되는데 그 때문인지 로랑 캉테는 카메라가 위로도 아래로도 치우치지 않도록 아주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렇게 그저 서 있는 혹은 앉아 있는 눈높이에서 평등하게 선생님들만의 세계 나 아이들만의 세계를 담아내려 노력합니다. 마치 '그들만의 세계'는 지극히 평등하며 안정적이고 단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듯이 말이죠.
이 두 세계가 충돌하는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마랭과 학생들이 설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더욱 더 그렇습니다. 클로즈업된 마랭과 똑같이 수평적 위치에서 잡히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세계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깁니다. 그렇게 그들의 주고받음은 마치 고대 그리스에서 저마다 동등한 입장에서 발언했던 민주적 광장의 상징으로 일컫는 '아고라'를 연상시킵니다. 거기엔 어떤 지배도 훈육도 없고 오로지 '동등한 참여'만 있는 것이죠. 하지만 종종 카메라가 반복적으로 잡아내는 장면 때문에 이 교실은 '아고라'와 더불어 다른 또 하나의 분위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 장면은 바로 학생들의 머리 위로 홀로 서 있는 마랭의 모습입니다.
카메라는 자주 그것을 보여주는데 그저 머리와 뒷 모습만 보이는 아이들 위로 홀로 우뚝 서서 활발하게 손을 움직이거나 몸을 움직이며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는 마랭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어쩐지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군중과 대치중인 고독한 군인과 같아 보입니다. 특히나 아이들이 반론을 전개할 때 그가 보여주는 활발한 손놀림과 몸놀림은 마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듯 보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그 장면의 반복으로 교실을 하나의 '전장'으로 만듭니다. 여기에 언젠가 과거 프랑스에 있었던 '파리 꼬뮌'의 기억이 끼어들면서 '아고라'의 개인적인 대치 관계가 '파리 꼬뮌'의 집단적인 대치 관계로 이행됩니다. 주의깊게 보면 카메라가 담아내는 장면들이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캉테는 교실이라는 하나의 공간에다 개인과 개인간, 집단과 집단간 동등한 소통을 집약시켜 보여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이러한 교실의 모습은 역시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선생님들 세계'와 비교해보면 더욱 더 두드러집니다. 선생님들의 세계는 교실과 전혀 다릅니다. 거기선 대화도 차분하고 조용하며 설사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 존중하지 비아냥거리거나 막말이 오고가지는 않습니다. 분로로 폭발하는 교사가 있더라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따뜻하게 위로해 줄 뿐입니다. 하지만 마랭의 교실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기습적 공격이 있고 연속적인 발포와 응사가 있습니다. 더러 수류탄 투척과도 같은 난데없는 인신공격까지 감행되기도 합니다. 이 두 세계의 모습이란 이렇게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캉테는 왜 이렇게 보여주는 것일까요? 이 두 세계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통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는 완전한 소통과 다른 하나는 불완전한 소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두 세계가 서로 성격이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세계는 단일한 세계라는 것이고 교실은 두 세계가 서로 대치중인 세계라는 것이죠.
그런데 영화에서 선생님들만의 세계는 그려지는데 어인일인지 아이들만의 세계는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모습만 나오는 것은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의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모습뿐입니다. 이것은 영화가 아이들이라는 주체를 배제시키겠다는 의미일까요? 만일 영화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다면 굳이 교실의 풍경을 화면에 그렇게 담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엔 다른 의도가 분명 개입된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여기엔 '바라보기'의 주체가 있습니다. 운동장을 담는 카메라의 이동에서 드러나듯이 거기엔 교실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주체, 단일한 세계에서 대치중인 건너편의 집단을 바라보는 주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로 부터 고통을 당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보여도 선생님으로 부터 고통을 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가 잘 담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두 세계가 보여주는 소통의 서로 다른 모습 또한 그 중 어떤 세계의 소통이 나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세계에 서로 다른 주체들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어쩌면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치부될 수 있을 그 관계를 보다 넓혀서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로 보도로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잊고 있는 교육에 있어서 구조적인 측면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맞습니다. 여기엔 사실 구조적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점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경계선들이 있습니다. 그 경계선들은 시민권자와 이민자들을 나누고 잘 사는 계급과 못 사는 계급을 나누고 그 나라말을 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를 나눕니다. 그렇게 교실인 한 개인의 문제만으로는 치부해버릴 수 없는 수 많은 모순들이 집약되어진 그러한 공간입니다. 때문에 마랭 혼자만의 힘으론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건 구조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점들이기 때문이죠. 때문에 얘기를 이어왔던 대로 영화는 관객들이 그것을 구조적인 시각으로 보도록 하기 위해 저렇게나 많은 세심한 연출들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출들이 진정 의도하는 바가 눈에 뜨인 순간 우리는 이제 영화를 전혀 다른 쪽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거기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마랭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입니다. 영화 처음 우리 눈에 마랭은 정말 희생자처럼 보입니다. 그가 선생님 권위 운운하며 아이들에게 훈계할 때 조차 안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결국 어쩔 수 없이 폭발한 슐란을 교장에게 데려가는 장면에선 한없이 나약해진 그의 모습에 동정을 보내기도 합니다. '열심히 하려는데, 이렇게 민주적으로 대하는데 아이들은 왜 날 이해하지 않고 따라와 주지도 않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원망하면서 때로 의자를 걷어차거나 홀로 식당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노라면 연민마저 느껴지면서 격려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마랭은 희생양으로 보입니다. 그저 소통하려 들지 않고 다혈질이기만 한 아이들 앞에서 피해자인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의 시선은 옳았던 것일까요? 영화가 보여준 구조적인 측면들이 눈에 띈 순간 우리들은 알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시선이 착각이었음을 말입니다. 왜 착각이었는지를 이제부터 말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번역하자면 '벽들 사이에서' 입니다.
제목만 봐도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바로 벽들을 가로지르는 '소통' 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목 대로 영화는 그렇게 구조적으로 단절된, 그렇게 벽으로 가로막힌 두 개의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백인들 중심의 선생님들 세계와 다인종으로 혼합된 아이들의 세계. 그리고 두 세계는 여러가지 면에서 분명 서열화가 가능한 세계였습니다. 그렇게 우월한 세계와 열악한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였습니다. 교실에서 마랭은 이 두 세계가 전혀 우열로 나뉘지 않는 공간임을 강조하지만 결국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이 드러납니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영화는 차례로 떨어져나가는 학생들과 아예 존재감 자체가 지워진 학생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나가고 지워진 학생들을 통해 거꾸로 벽이 없다고 말하는 교실에 분명한 벽들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다 분명히 함으로써 거꾸로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떨어져나가거나 지워진 이유들을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그 벽들'의 정체가 보다 분명해 집니다.
첫째는 언어입니다.
이제 '꼬마 니콜라'의 교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랭의 교실은 거의 반수 가까이가 이민자의 자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프랑스어 하나로 완전히 통하던 시대는 이제 가버린 것이죠. 교실엔 아직 프랑스어에 익숙치 못하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대놓고 모국어와 혼용해서 쓰는 아이들까지 존재합니다. 마랭은 그런 그들에게 프랑스 문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영화는 중국이민자 "예예"와 결국은 퇴학을 당하는 "슐만"을 통해서 이 언어의 장벽을 드러냅니다. 중국인 "예예"는 말이 서툽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이들과 제대로 아이들과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인지 그는 거의 내내 홀로 있습니다. "슐만"은 결국 그릇된 학습태도로 퇴학을 당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이유는 그가 글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슐만의 어머니 역시 영화에서 유일하게 통역이 있어야만 얘기할 수 있는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결정적으로 교장단 앞에서 프랑스어를 못해서 아들을 제대로 변호하지 못하는 바람에 슐만은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슐만은 퇴학을 당해 아프리카로 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예 역시 그의 어머니가 불법체류자로 체포되는 바람에 강제송환 당할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슐만과 예예는 결국 똑같은 이유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언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면 그 사회에 머물지 못하고 떨어져나간다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은 교실에 있는 저 많은 다문화의 아이들은 사실 언어로 인해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의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온갖 난처한 질문과 야유로 마랭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야 말로 언제 어느 때 사회로 부터 몰림을 당해 떨어져나갈지 알 수 없는 존재들 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려는듯 영화에 나왔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영화 초반 그러니까 새학기가 시작될 때 분명 교실에 있었던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예예의 짝궁으로 같은 중국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우리는 영화에서 그녀의 존재를 볼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대로 홀연히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듯 그녀의 존재는 영화에서 내내 지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프랑스 말을 하나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언어를 못하는 것이 곧 존재의 상실로 이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실로 무서울 수 밖에 없는 묘사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교실에 있는 그 어느 아이도 이것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언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여전히 남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특히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아이들이 한 학기 동안 무엇을 배웠는가 말하는 장면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학생들이 다 자신이 배운것이 뭔지 말하고 나서 교실을 나간 뒤 앉아있는 마랭에게 한 소녀가 다가옵니다. 그 소녀는 새학기가 시작될 때 마랭이 가장 먼저 말하게 했던 그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영화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마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직업학교엔 정말 가기 싫어요."
가장 마지막으로 학생의 말을 듣는 마랭의 모습을 이제 카메라가 보여줍니다. 묻는 여학생의 눈이 분명 보고 있을 그 모습 그대로 아래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랭의 모습을 말입니다. 이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보여지는 내려다보는 각도, 즉 권력의 시선이었습니다. 그토록 주의깊게 시선이 가지는 권력 효과를 지워왔던 캉테가 유독 여기에서만은 권력의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녀의 물음에 마랭이 아무런 대답을 못할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캉테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의 미래가 교육으로 얼마나 나을 수 있는가를 말해왔지만 사실 당신이 해왔던 것은 그들의 미래를 거짓으로 꾸며 그들로 하여금 이 현재에 더욱 더 종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가. 당신이 가르쳤던 그 부르조아들만이 쓰는 프랑스 문법 처럼 그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팔아 현재의 비참함을 지속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었나?"하고 말입니다.
캉테의 이 무언의 질문에서 우리는 언어와 더불어 또 하나의 벽을 선명히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계급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읽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재생산'이란 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가난한 이민자의 자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가난한 이민자 자녀들에게 직업학교는 선택사항이 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가게 되는 곳이고 그렇게 그들은 노동자 계급을 지속적으로 충원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열려진 유일한 미래라고 말입니다. 결국 부르디외는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현재 프랑스 공립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은 결국 안전하게 사회가 지속될 수 있도록 계급을 재생산하는데만 일조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부르디외의 이 결론과 캉테가 묻고자 하는 근본적 질문은 이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이 얘기들이 시작되었던 애초의 질문, 그러니까 왜 마랭을 희생자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착각이었나에 대해 보다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꼬마 니콜라'의 그 어린이들은 이제는 자라나서 프랑스의 주류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가 묘사하는 선생님들의 세계가 바로 그 니콜라의 세계처럼 단일한 백인들의 세계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캉테가 영화 내내 묘사해왔던 대로 단일해서 안정되고 안전한 세계였습니다. 마랭은 바로 그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어쨌든 '예예'나 '슐람' 그리고 그 여학생 보다는 배제되기 어려운 위치에 서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게 피해자로만 보이던 마랭은 사실 갑각류 처럼 세계로 부터 아주 단단하게 보호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가해자들로만 보였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사회적 조건들 때문에 언제 어느때 지워지고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드러나듯이 우리들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캉테가 이렇게 우리의 오해를 지적하는 것은 보다 깊은 윤리적 목적이 있습니다. 앞서 영화가 두 세계를 그렇게 보여준다는 것은 '바라보기'의 주체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캉테가 교실이 은폐한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오해를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캉테는 그 '바라보는' 윗 세계의 주체들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사정은 이러합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포용해주어야 할까요?"
대답은 굳이 여기서 적지 않아도 명확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하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 캉테는 눈높이 선생님 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배려마저 잊지 않습니다. 바로 이 배려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카메라가 점점 내려오면서 휴식시간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운동장을 담아내는 장면입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 장면들 속에서 카메라는 차츰 내려오다 결국엔 아예 아이들과 뒤섞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카메라의 하강은 재미있게도 영화에서 마랭이 처음엔 서 있다가 갈등을 거치면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신체적 동작과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카메라의 하강과 마랭의 신체적 동작의 일치마저 보아버린다면 앞서 캉테의 질문 '우리는 누가 포용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단순하고도 명료합니다. 바로 마랭이 포용해주어야 하는 것이죠. 영화 초반 아이들 머리 위로 홀로 우뚝 서 있던 마랭이 그렇게 아이들과 마치 전쟁을 치르듯 선생과 학생이 아닌 그저 인간대 인간으로 소통을 하면서 부터는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앉게되는 것과도 같이 마랭이 먼저 내려가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넌지시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실은 마랭이 속한 저 위의 세계가 포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적어도 그들은 '안전한 자들'이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랭와 아이들은 언제 싸웠는가 싶게 서로 하나로 어울려 즐겁게 축구를 합니다. 늘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가 그렇게 아래에 있는 자들과 한데 어울리는 것입니다. 캉테가 영화를 통해 내내 말을 걸고 싶었던 그 진정한 목적을 우리는 이 장면에서 비로소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장면에 뒤이어 영화는 흐트러져있는 의자와 책상들로 가득한 텅 비어버린 교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바로 직전의 가장 마지막 장면입니다.
사진처럼 정지된 화면속에 텅 비어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오스 야스지로나 후 샤오시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맥락없이 툭 튀어나왔던 풍경들이 연상됩니다. 아마도 캉테가 보여주는 이 마지막 풍경도 그 감독들이 마치 화두처럼 툭 던져주었던 그 풍경들과 비슷한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내내 듣는 관객을 상정하며 영화를 이끌어왔던 캉테로선 정말 어울리는 마지막 같습니다. 그러니까 관객 자신의 사유를 위하여 빈 여백 하나를 남겨두는 것 말이죠.
저는 그 '여백'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한나 아렌트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사유란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악이란 것은 바로 사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사유란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캉테의 '클래스'는 비단 교육 문제에만 그치는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한나 아렌트가 했던 말과 똑같은 것을 지향하고 있을 겁니다. 마랭에게 있어 포용이란 그렇게 학생들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 다름아니니까요. 예전 신문을 통해 마트의 냉동창고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다 가스에 질식해 차디찬 시멘트 바닥 위에서 숨진 20대 대학생의 얘기를 알게 된 적이 있습니다. 생계를 위해 일찍 군대에 갔고 전역해서도 내내 가난한 집안 살림과 높은 등록금 때문에 쉴 새 없이 일만하다 결국엔 그렇게 사고로 숨져야 했던 한 젊은 영혼을 보면서 정말 아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그 젊은 영혼 처럼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런 그들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정말로 보기는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문득 캉테의 이 영화가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캉테가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겨보고 이렇게나마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의 포용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