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1 줄리애나 배곳 디스토피아 3부작
줄리애나 배곳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유토피아가 결핍이 만들어낸 이상이라면 디스토피아는 삶의 어느 순간 문득 엄습하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하는 불안이 결국은 보게 만드는 진실이다. 이렇게 유토피아가 인간의 힘과 이성으로 얼마든지 결핍을 메울 수 있다는 낙관론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디스토피아 역시 비관론의 소산이긴 하지만 그 밑바닥에 존재하는 것은 '부재하는 것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고 결핍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것이니 우리의 힘과 이성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가운데 출발하자'라는 일종의 겸허한 자기 긍정이다. 그렇게 유토피아가 다소 자기 능력의 과신에 자리잡는다고 한다면 디스토피아는 냉정한 현실 인식 위에 자리잡는다. 즉 유토피아가 이카루스의 날개라면 디스토피아는 메두사에게로 다가가는 페르세우스의 거울인 것이다.

 

 

 

 새삼 이런 구별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모습이 지금 말하는 이 소설 줄리애나 배곳의 '퓨어'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소설은 대폭발로 인해 멸망해버린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데 거기엔 그 대폭발로 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사는 '돔'이라는 곳이 있다. 그 '돔'은 폐허와 굶주림 그리고 죽음만이 가득한 거기에다 사람들 또한 화상으로 인한 흉터와 기형 그리고 온갖 사물들과의 융합으로 기괴한 모습을 이룰 수 밖에 없는 그 곳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고 안전한 세계가 된다. 제목인 '퓨어'는 바로 그 '돔'에 살고 있는 몸에 아무런 화상 자국도 흉터도 없으며 융합도 되지 않은 멀쩡한 신체를 가진 이들을 그 바깥의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마치 소설 속 재활원 처럼 순백으로 결빙된 구원이라 할만한 '돔' 자체에 대한 의미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돔'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것이 바로 주인공 패트리지의 아버지인 월럭스의 유토피아적 욕망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지독한 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었어. 요양원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감옥은 감염된 병자들을 위한 곳으로 변해갔어. (...) 게다가 도시는 탄약으로 넘쳐나고 민란이 들끓었어. 슬픔은 커지고 삶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버거워졌어. (..) 굳이 대폭발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갈 데까지 가다가 결국은 서로를 죽이며 피바다를 만들었을 거야. 그러니까 어찌 보면 그들이 빨리 끝장을 내 준 셈이기도 해. 안 그래?"(2권 P. 18)   

 

 

 대폭발은 바로 월럭스가 일으킨 것이었고 그건 바로 위에서 잉거십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세상을 뜯어고쳐보겠다는 유토피아적 욕망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그렇게 이 소설엔 그 누군가의 유토피아적 욕망과 그 결과로서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일종의 댓구를 이룬다. 이러한 댓구의 모습은 무엇보다 두 가지 중요하지만 서로 대립되는 상징에서도 나타난다. 그 두 상징이 바로 불사조와 백조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불사조는 대폭발을 가져온 계획에 붙여진 이름이고 백조는 패트리지와 프레시아 일행을 어머니에게로 인도하는 조각이다. 아니 백조 자체가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게 불사조는 유토피아를 백조는 디스토피아를 의미한다. 이제와 말하지만 여기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어떤 묘사된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세상에 대한 어떤 시선자체를 의미한다. 아시다시피 유토피아란 어디까지나 세계의 발전가능성과 인간의 완전가능성이란 개념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여기에는 단순히 현상의 서술이 아니라 그 서술 자체를 가져오는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 혹은 태도가 근원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불사조와 백조의 상징은 바로 그 각각에 자리잡은 그 근원적 시선에 대한 것이다.

 

  불사조란 언제 죽더라도 자기 의지로 온전히 부활할 수 있는 새다.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현재가 어떠한 모습이든 인간의 의지와 이성으로 언젠가 분명 완벽한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욕망의 근원에 자리잡은 낙관적인 자기 확신과 닮아있다. 자신의 의지만으로 부활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불사조는 분명 그것의 제대로 된 상징이리라. 반면에 백조는 유아하지만 연약하다. 그는 부드러운 순응의 존재이다. 더구나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스완송(swansong -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건 바로 귀에 큰 이상이 생겼을 때 들려오는 이명(耳鳴)이다. 그런데 그 이명이 끝나면 더 이상 듣게 되지 못한다고 한다.)'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배곳은 아마도 이 때문에 백조를 디스토피아적 자기 긍정의 상징으로 가져온 것일지 모른다. 그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비록 생애의 마지막 노래이지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백조의 모습에서 주어진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의지와 태도를 보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백조는 디스토피아 문학의 일종의 창세기라 할만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가 궁극적으로 주려했던 것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한계를 인정하게 하여 무모와 무지가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을 경고하고 그것이 닥쳐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할 것을 종용하려했던 것임에 비추어 본다면 그야말로 적합한 상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말해 불사조가 유토피아적 욕망에 내재된 발전가능성과 완전가능성(사실 이것은 월럭스가 가지고 있는 생각 그대로이기도 하다.)에 대한 상징이라면 백조는 완전히 그 반대인 퇴보가능성과 불완전가능성(단적으로 어머니에게 있으리라 여겼던 치유약의 불완성성은 이러한 디스토피아가 가지는 시선상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줄리애나 배곳의 '퓨어'는 단순히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소설이 아니라 그 시선에 있어서(그리고 태도에 있어서도) 디스토피아를 추구하는 소설인 것이다.(백조는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일종의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이 소설의 디스토피아는 하나의 방법론임과 동시에 하나의 지향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배곳은 왜 하필이면 디스토피아 - 궁극적으로는 그 근원에 자리잡은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 를 지향하는 것일까?

 

  이것엔 아마도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첫째는 동시대성의 추구 때문이다. 그러니까 배곳 스스로가 이 작품에다 최대한 동시대적 현실을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는 최근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유토피아의 반대인 디스토피아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용어다. 많은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대면한 우리에게 이제 유토피아는 사라졌다."라고. 이것은 비단 루비니 교수만의 입장은 아니다. 지금 세계의 경제분야의 석학들은 2012년을 한 마디로 디스토피아의 시대라 부른다. 왜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유로의 위기 거기다 여전히 높은 실업난 그리고 날로 악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리라 믿었던 유토피아적 전망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음을 절절히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설 '퓨어' 그대로 유토피아적 욕망으로 충동되었던 자본주의가 결국은 디스토피아로 귀결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엔 그 전까지 꾸준히 생산되던 십대들의 풋풋한 사랑을 다루는 하이틴 로멘틱 코미디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사라졌음을 보게된다. 이제 헐리우드 영화속 십대들은 더 이상 사랑의 달콤함을 얘기하지 않는다. 대신 데브릭 그레닉의 영화 '윈터스 본' 처럼 아버지가 떠넘긴 빚을 청산해야 하거나 잭 스나이더의 영화 '써커펀치' 처럼 자신의 존재를 압살하려 드는 아버지로 부터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거나 게리 로스의 영화 '헝거게임' 처럼 어른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제대로 고쳐야 하는 짐을 떠 맡는다. 이렇게 보니 십대들에게 얹혀진 짐이 과부하가 걸릴 만큼 어마어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토록 세상을 치유할 책임을 십대들에게 지우는 까닭이 뭘까? 그건 아마도 십대들이 이제는 차츰 폐기물로 전락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에 그래도 어른들 보다는 조금이나마 덜 오염되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덜 오염된 생각 바로 거기에 구원의 가능성 역시 자리잡고 있다고 여기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 '퓨어'의 주인공들도 모두 십대들이다. 그들 역시 앞서 인용한 영화들의 십대들처럼 어른들이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세상의 구원을 대신 이룩해야 하는 책임을 떠 맡는다. 어쩌면 이 것은 지금 예술가들이 바라보고 있는 십대들의 의미에 대하여 배곳 역시 공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소설이 디스토피아를 다루게 된 것은 단순한 소설적 설정이라기 보다는 무엇보다 배곳이 동시대성에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대성에 충실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배곳 그녀 자신이 소설 '퓨어'를 그저 그런 암담한 미래를 그린 판타지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바로 지금의 세상에 대해 말하는 소설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이 소설이 다만 재미를 위한 읽을거리로 그치지 않고 지금 처한 현실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렇게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하면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지 사유하게 만드는 그런 계기가 말이다. 그래서 배곳은 디스토피아적 시선을 담는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그러니까 하나가 동시대성의 추구를 통해 지금 처한 현실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작품에다 담고자 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담겨진 현실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할 대안을 독자들 스스로 생각할 때 참조할만한 것으로써 배곳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디스토피아적 시선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한계의 긍정과 그 안에서의 최선이다. 배곳은 이것을 무엇보다 아이들의 신체 묘사를 통해 드러낸다. 앞서도 '돔'을 제외한 바깥의 사람들은 흉터와 융합의 존재라고 말을 했는데 주요 인물 중 '퓨어'인 패트리지와 라이다를 제외하고는 프레시아, 브래드웰 그리고 엘 캐피턴 모두는 융합된 존재다. 프레시아는 한 쪽 손이 예전의 행복한 가정이었을 때의 프레시아를 암시하는 인형의 머리와 융합되어 있으며 브래드웰은 새들과 융합되어 있고 엘 캐피턴은 가장 아끼던 동생과 융합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융합된 존재들은 그저 단순한 사물이나 존재만은 아니다. 배곳은 주의깊게도 각 인물들이 가장 바라마지 않는 것을 융합시켰다. 이를테면 프레시아는 옛날의 그 행복하고도 안전했던 자신으로 되돌아가기를 늘 꿈꾼다. 바로 인형의 머리는 바로 그 때의 상징이자 프레시아 욕망의 상징인 것이다.  브래드웰도 마찬가지다. 그는 늘 자유롭기를 꿈꾼다. 새는 언제나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브래들웰도 자신이 욕망하는 것의 상징과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엘 캐피턴은 어떠한가? 그는 융합되기전 동생을 무엇보다 아껴왔다. 또한 그들이 만나게 되는 선한 어머니들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그녀들 역시 그녀들이 무엇보다 아끼는 자녀들과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배곳은 융합된 존재들이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들 욕망의 상징임을 밝힌다. 왜 배곳은 하필이면 그것들과 융합시켰던 것일까? 거기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융합된 존재들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반응에서 짐작된다. 프레시아, 브래드웰은 자기 욕망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숨긴다. 프레시아는 어떻게든 소매로 인형 머리의 손을 가리려 하고 브래드웰 또한 셔츠로 끝끝내 가리려 한다. 그것은 비단 그 모습의 흉물스러움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그것들을 가리는 진정한 이유는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상 그들의 욕망이 그대로 충족되어질 수 없음을 스스로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아는 인형이 상징하는 안전과 안락함을 가져다 줄 '돔'에 대한 염원을 스스로도 뻔한 욕망이라고 생각하며 부끄러워한다. 브래드웰은 홀로 자유롭게 되고 싶지만 아직도 그의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럴 수 없다. 그는 그렇게 될 수 있을 때 조차 남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그 자유를 포기한다. 즉 그들의 숨김은 그들의 냉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라는 마음의 간접적 표현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에 대한 현실의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억제한다.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좌초를 가져온 (특히나 현 금융권에서 보여지는) 무분별한 욕망 추구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이것이 덜 오염된들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구원의 가능성이라면 어떻게 해서 이것들이 가능한지가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소설 속에서 그러한 자기 제어, 절제가 바로 세계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에서 나오는 것임을 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존재라고 해서 세상이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 신체의 한계와 세계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야말로 디스토피아적 태도 그대로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 그리고 최선이 왜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그 긍정이 바로 공존을 위한 토대이며 포용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패트리지와 프레시아 그리고 브래드웰이 소설속에서 보여주는 한결같은 모습이 있다. 그것은 늘 타인의 반응을 신경쓰고 되도록 그 반응에 공감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건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었다. 월럭스 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과신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능력의 한계를 순순히 인정한 가운데 타인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과 세계의 긍정은 곧 타인과의 연대로 나아가게 한다.

 

 배곳은 무엇보다도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오늘의 현실을 제대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 연대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배곳은 '퓨어'의 주인공들을 일종의 '파티(party - RPG게임에서 흔히 보는 집단적 주체)' 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공존 그리고 연대의 추구는 무엇보다도 엘 케피턴의 신체가 보여준다. 엘 케피턴은 자신의 등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생 헬머드가 융합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헬머드는 늘 한시라도 빨리 자유롭고 싶어지는 굴레이기도 하다. 특히나 케피턴에게 있어 헬머드의 꾸물럭거리는 두 손의 움직임은 그러한 분리 욕망을 더욱 부채질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배곳은 그 꾸물럭거림의 정체를 밝힌다.(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감탄한 부분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스포일러상 그 정체는 말하지 않겠다.) 결국 그들은 공존을 선택한다. 서로의 한계 지점에 존재하는 이들이지만 긍정하고 포용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독특한 모습이라고 할만한 융합 역시도 바로 이 공존과 연대를 전면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가져온 것이다. 융합이란 섞임이요 그렇게 나 아닌 것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순간이 아니라 영원히! 문제는 소설에서 그렇게 융합된 존재들이 모두 그것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융합된 존재들 중 그 누구도 자신에게 융합된 것에 대해 증오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수용하고 그것과 공존하는 가운데 최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융합은 연대의 기반이 타자의 긍정이요 자신과 똑같은 것으로 여기는 포용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이다. 이러한 융합의 상징성은 모든 악의 근원인 월럭스와 그의 중개자이자 또 하나의 가부장적 존재인 잉거십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과 대비해서 보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월럭스와 잉거십, 그들은 절대 포용하는 자들이 아니다. '돔'은 철저하게 바깥의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으며 더구나 그 안에서 시행되는 '코딩'의 비밀 역시 개인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월럭스는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패트리지의 어머니를 버리고 잉거십은 순종하지 않는 아내를 구타한다. 모두 일방적이고 거기다 강요적이다. 배곳이 유토피아적 욕망을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어쩌면 거기에 바로 이러한 타자를 고려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시선 혹은 태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무절제한 욕망 추구를 보여주었던 자본주의 또한 바로 이러한 시선 혹은 태도를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디스토피아를 가져왔을지 모른다는 의심 역시 가능하다. 바로 그래서 배곳은 공존과 연대의 상징으로써 전면적으로 융합을 가져온 것이다.

 

  더러 좋은 작품을 표현할 때 '의외의 보물'이라는 말이 있는데 '퓨어'는 그야말로 거기에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융합된 존재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설정. 현실의 디스토피아적 의미와 그 극복을 위한 대안을 깊이있게 담아내면서도 절대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이야기적 재미. 한 마디로 나같이 설정의 참신성에 많은 점수를 주는 사람으로서는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물론 더욱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은 자신의 주제를 온전히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꽤나 세부적으로 공을 들여 설정해 놓았고 또한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제대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은유와 상징의 정교한 건축물'이라는 표현은 이 작품의 또다른 닉네임이다. 이 책은 이것저것 건드려 볼 부분이 참으로 많은 작품이다. 총 3부작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두 작품이 나온다면 음미해 볼 부분은 더욱 쌓이게 될 것이다. 그 때 또 얼마나 이런 저런 말들을 내가 쏟아내게 될 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그 때의 보다 풍성한 수다를 기약하며 1부, '퓨어'에 대한 얘기는 이쯤에서 그치는게 좋겠다.

 

 리뷰의 제목으로 삼은 GRAVE NEW WORLD는 우리에게는 AUTUMN으로 유명한 그룹 STRAWB의 노래 제목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무덤을 뜻하는 GRAVE로 살짝 바꾼 제목의 이 노래는 아일랜드 출신인 그룹 STRAWBS가 종교적 갈등으로 일어난 아일랜드 유혈 사태를 보면서 만들었는데 모두들 빛나는 유토피아를 가져온다면서 시작했지만 결국 가져오는 것은 무덤과 같은 신세계일 뿐이지 않냐며 꼬집는 노래이다. '퓨어'를 읽으면서 많이 생각났고 많이 들었던 노래였다. 월럭스의 '돔'처럼 타자에 대한 배려와 연대가 없는 유토피아란 결국 GRAVE NEW WORLD가 아닐까...

 

 

Grave New World - Strawbs

 

 

There's blood in the dust
Where the city's heart beats
The children play games
That they take from the streets
How can you teach when you've so much to learn
May you turn
In your grave
New world.

There is hate in your eyes
I have seen it before
Planning destruction
Behind the locked door
Were you the coward who fired the last shot
May you rot
In your grave
New world.

There is death in the air
With the lights growing dim
As those who survive
Sing a desperate hymn
Pray that God grants you one final request
May you rest
In your grave
New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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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12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ㅠㅠㅠ 왜이렇게 뜸하셔요, 요즘.
매일 알라딘에 들어오면 서재브리핑보면서 헤르메스님 글 먼저 찾는데 요 며칠동안 전혀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더워서 글쓰는게 귀찮아지신거에요?ㅎㅎㅎㅎㅎ

오드득 2012-05-13 20:31   좋아요 0 | URL
더워서 그런 것은 아니고^ ^;...
흑흑 요즘 너무나 바쁘답니다.ㅠ ㅠ
거기다 또 며칠간은 몸이 안 좋기도 했고...

글도 자주 올리고 해야 하는데...
소이진님은 중간고사 이제 끝났죠?
얼마나 후련하실까요?
저도 좀 그런 빈 시간들이 주어졌으면 좋겠어요^ ^;

이진 2012-05-14 22:47   좋아요 0 | URL
아이코야 ㅠㅠㅠㅠㅠ
바쁘시구나, 헤르메스님.
맞아요. 요즘 한창 일이 바쁠때죠.
저만 학생이다보니 하릴없이 떠돌아다니기만 하고.
다들 잘 안보이시던데 얼른 일이 처리되서(?) 헤르메스님 좀 더 쉴 시간이 많아지기를. 그래야 나도 좋은데 ㅠㅠㅠ 파이팅!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오늘따라 밤이 왜 이리 무덥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불면의 눈으로 바라봐서 그런가, 베란다 창문 밖 덩그맣게 뜬 달이

 참으로 고독해 보입니다.

 

 불면은 불면이고 허기는 또 허기인지라

 라면을 끓여먹다가 손가락을 데었습니다.

 따끔한 통증이 오늘은 그냥 넘기리라 생각했던

 신간 추천 페이퍼를 다시금 잡게 하는군요.

 때로는 이상한 인과관계로 일상은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튼 11기의 첫 신간추천페이퍼를 쓰게 되었습니다.

 얼른 신간을 검색해보니 4월달은 발간수가 그리 많지 않은 가운데

 그래도 반가운 작품들이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이 그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입니다.

2005년에 나온 이 작품은 돈 윈슬로가 완성하는데 취재와 집필까지 해서 모두 6년이나 걸렸습니다. 그 긴 시간이 투자된 만큼 재미도 재미이지만 지금도 잔혹함으로 종종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곤 하는 맥시코의 마약시장을 이 소설만큼 제대로 형상화낸 작품은 없다고 평가받을 만큼 압도적인 현실감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제르미날'의 에밀졸라나 '레미제라블'의 빅토르 위고 처럼 때로는 소설이 그 어떤 역사서 보다도 당대의 사회를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곤 하는데 바로 이 '개의 힘'이 바로 그와 같은 소설이 아닌가 합니다. 사회 고발 스릴러의 대표작으로 기꺼이 일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음에 들어온 것은 발라드의 '물에 잠긴 세계'입니다.

개인적으로 출간이 무척 반가운 책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화 '크래시'의 원작자로 그리고 어린 시절 일본 포로수용소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져 결국 스필버그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던 '태양의 제국' 원작자로 유명한 J. G 발라드의 소설이었으니까요. 원래 그는 SF 작가였습니다. '물에 잠긴 세계'는 1962년에 나온 그의 두번째 작품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지구 온난화에 대한 개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라드는 특유의 상상력으로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 빙하가 녹게됨으로써 지상의 도시들이 서서히 잠겨 버리는 세계의 종말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후 이 월드 연작으로 64년에 BURNING WORLD를  66년에 CRYSTAL WORLD를 2년 간격으로 꾸준히 발표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후에 이 세 작품을 묶어 지구 종말 3부작이라 부르고 많은 이들이 발라드의 대표작으로 꼽았습니다. 때문에 발라드를 좋아하는 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었는데  이 중 우리나라에는 유명한 그리폰북스로 '크리스탈 월드'가 한 차례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3부만 출간되어 그 시작을 볼 수 없어 더욱 애태우게 만들뿐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출간되었네요. 앞으로 3부작의 남은 작품들도 모두 출간되길 기원해 봅니다.

 J.G 발라드는 2009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죠.

 뒤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초기의 대표작 '그들' 때 부터 실제 인물을 모델로 소설을 써왔습니다. 그렇게 오츠는 현실이 어떻게 문학으로 걸려지는가 혹은 과연 문학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가를 작품을 통해 탐구해왔었죠. 얼마전에 나온 마를린 몬로를 모델로 한 '블론드'도 이러한 오츠의 작가의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츠는 그것을 통해 오히려 문학의 한계를 발견하고('그들'은 단적으로 현실 앞에서 문학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그대로 문학이 할 수 있는 영역을 타진하며 나아가는 작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좀비' 역시도 그러한 오츠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역시나 실제 연쇄살인마 제프리 다머를 모델로 쓰여졌으며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 전부를 문학적으로 다양한 방면으로 살펴보는 작품입니다. 어둠을 그려내는데 더 탁월한 빛을 발하는 오츠의 매력이 유감없이 드러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가장 출간이 반가운 작품이로군요.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을 이루지만 유일하게 출간되지 않았던 '끌림'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정말 얼마만에 '벨벳 애무하기', '핑거스미스'와 더불어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이 완성을 보게 되는 지 모르겠네요. 하필이면 딱 중간이 빠져있던지라 더욱 애태웠었는데 이제야 그 목마름을 해갈하게 되나 봅니다.

 

 

 

 

  

  마지막은 존 어빙의 2009년도 작품인 '트위스티드리버에서의 마지막 밤' 입니다.

어빙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는 것이겠죠.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작가로서의 자신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작가로서의 자의식은 데뷔작 '가프가 본 세상'에서 이미 투영되고 있는데 그 때문에 그의 작품에선 성장이 종종 주된 테마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사이더하우스'가 그 대표적인 경우겠죠. 이 '트위스트리버에서의 마지막 밤' 역시도 '사이더 하우스'와 비슷합니다. 자신의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반영된 '성장'을 다루고 있으며  '사이드 하우스' 처럼 그 성장을 '부자관계'를 통해 다루고 있으니까요. 사실 알고보면 어빙이야 말로 작가는 무엇보다도 얼레에 매인 연 같은 존재임을 말해주는 작가가 아닌가 싶어요. 방식은 매번 다르지만 한결같이 천착하는 그 주제가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질 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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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tat 2012-05-0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포스팅에는 어떤 책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쟁쟁한 책들이 많네요. 개인적으로는 발라드의 책을 가장 기대하고 있습니다. 시공사 그리폰북스의 크리스탈 월드는 정신나간 중고가로 읽을 엄두도 못 냈었는데, 문학수첩에서 나머지 지구종말 시리즈 두 편도 출판할 계획이라니 더욱 반갑습니다. 끌림도 엇그제 교보문고에서 봤는데 이쁘장하게 잘 나왔더군요. 끌림이 시리즈 두 번째라고 하시니 첫 번째 시리즈부터 읽어 봐야겠네요. 벨벳이 첫번째고 핑거스미스가 세 번째 인가요? 아님 반대인가요? ^^: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은 이번 좀비를 통해서 처음 접했는데, 제 취향은 아닌가 봐요. 책소개에 박찬욱 감독 얘기가 나와서 솔직히 더 관심을 갖고 나오자 마자 읽었습니다. 박 감독님이 추천한 책을 읽고 실망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좀비는 좀 아니더군요. 이 분이 실제 모델을 주인공으로 글을 쓰신다고 하셨는데, 그럼 다른 작품들도 이런 스타일인가요? 그렇담 이 분 작품은 제 취향하고는 차이가 좀 있을 거 같네요.

오드득 2012-05-05 22:2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Sean님 이렇게 들러주시고 또한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반갑고 또 감사합니다. 와! Sean님도 발라드의 책을 가장 많이 기대하시는군요. 저 역시
발라드의 작품들을 좋아하는지라 이번에 '물에 잠긴 세계' 발간은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3부작이 다시금 평가받게 되었으면 하네요. 세라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은 벨벳 애무하기가 첫번째이고 핑거스미스가 가장 마지막 작품입니다. 핑거스미스는 BBC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었는데 작품의 분위기와 주제를 정말 잘 살려놓았기 때문에 소설을 읽기전에 한 번 감상하시면 이 삼부작이 대강 어떤 작품인가 잘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네, 대부분 조이스 캐롤 오츠의 스타일은 실제 삶을 모델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들이 들어가기 어려워하는 어둠이나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걸 일종의 원칙으로 하지요. 그래서 사실 오츠가 그리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구요.^ ^; 개인적으로는 창비에서 나온 '멜베이니 가족'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오즈의 진가를 알기에는 더없이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JayJay 2012-05-14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분들이 좀비를 꼽으셨네요. 아마도 선정 확률이 높을 것 같아 저는 추천리스트에서 뺐지만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라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개의 힘도 추천이 많더라구요. 스토리텔링이 완전 굳이라고...

starover 2012-05-15 20:00   좋아요 0 | URL
개의 힘
남자의 자리
좀비 중 하나는 무조건 될 것 같네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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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거는 포착할 수 없다."

 

 

 줄리언 반스의 출세작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주인공 브레이브웨이트는 아내의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는 그 죽음이 바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플로베르를 통해 아내 죽음의 진실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걸 찾지 못하고 결국엔 저렇게 고백하고야 마는데,  특별히 이 문장을 언급하는 것은 사실 줄리언 반스의 모든 작품은 바로 이 문장과 겨루려 드는 것과도 같은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흔히들 역사와 진실 그리고 사랑을 보편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말해진다. 그가 그렇게 역사 혹은 과거를 작품의 중심 테마로 가져오는 이유는 바로 데뷔작이면서 반스 자신의 60년대 학창시절을 많이 반영하기도 했던 작품인 '메트로랜드'에서 드러나는데 그것은 68혁명으로 상징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발하여 모든 속물적 욕망으로 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이상을 꿈꾸었던 삶이 어쩌다가 이렇게 도리어 속물적인 욕망에 지배당하는 삶으로 변해버리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찾고자 함인 것이다. 즉 반스는 과거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면 현재적 삶마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깃들어있는 명확한 진실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때로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처럼 문학을 통해서 때로는 '10과 2분의1장으로 쓴 세계사'처럼 역사를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확고한 기록이라면 진실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의 기대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의 브레이브웨이트처럼 여지없이 무너지고 결국 그가 가지게 된 것은 오직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에이드리언 핀의 다음의 말과 같은 깨달음 뿐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결국 문학과 역사 그 어느 것이든 과거를 진실 그대로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그는 이제 먼 과거의 기록이 아닌 현재적 삶 그 자체로 눈을 돌린다. 보다 지금에 가까우면 그만큼 과거를 파악할 수단도 더 많아지고 정확해질테니 가능하지 않을까 여겼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작품이 바로 91년작 '내 말 좀 들어봐(Talking It Over)'였다.

 

 '내 이름은 스튜어트이고 난 모든 걸 기억한다.'

 

 

 이 같은 주인공 스튜어트의 말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특히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너무 비슷한 설정이라서 흥미를 끈다. 이렇게 늘 자신만만했던 스튜어트는 자신의 아내 질리언이 친구 올리버와 바람이 나는 바람에 버림을 받게 되는데 그래서 그는 평생 아내와 친구를 저주한다. 이 같은 관계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주인공 앤서니 웹스터와 그의 연인이었지만 그와 헤어지고 친구인 에이드리언 핀과 사귀게 되는 베로니카가 이루는 관계와 완전히 똑같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내 말 좀 들어봐'를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주제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말 좀 들어봐'는 아무런 지문 없이 세 사람이 서로 돌아가며 하는 독백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소설 보다는 희곡에 가까운 구성인데 반스가 이렇게 다소 독특한 구성을 취한 것은 오로지 그들의 말에만 독자를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보다 현재적 삶에 가까운 사람들이라면 과연 과거의 진실에 이를 수 있는가를 독자 스스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우리는 그래도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같은 사건을 겪어도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보고 느끼고 그래서 가지게 되는 진실 역시 완전 달라져 버림을 보기 때문이다.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라는 말도 있지만 과거의 진실 역시도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소설의 원제 'Talking It Over'는 의논 또는 상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다수를 상징하고 있다. 해서 반스는 생각한다. 혹 과거의 진실을 찾기 힘든 이유가 여러 많은 사람들이 각자 보고 싶은 대로 진실을 보기 때문이라면 그럼 한 사람만이라면 어떨까? 오로지 그가 가진 기억뿐이라면 과거의 진실에 대해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이 작품으로 형상화 된 것이

바로 이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그동안 해왔던 것의 집대성이라 할만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나오는 세 가지의 죽음은 이 작품이 가진 이러한 성격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일단 주인공의 60년대 학창시절에 나오는 동급생 '롭슨'의 죽음은 '메트로랜드'에서 단절되어 죽어버린 60년대의 과거를 의미한다. 또한 베로니카의 어머니의 죽음은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의 아내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두 죽음이 과거의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을 낳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에이드리언 핀의 죽음은 '내 말 좀 들어 봐'에서의 결국엔 질리언과 결별하게 되는 올리버 그대로이다. 에이드리언은 일기를 통해 앤서니를 분석하는데 그것은 올리버가 내내 스튜어트를 분석했던 것과 또한 이어진다. 이렇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이 작품이 천착하고 있는 주제를 가지고 작가가 밟아왔던 단계를 하나 하나 모두 다시 담고 있다. 해서 마치 이 작품은 그 모든 여정을 거쳐 다다르게 된 어떤 결론처럼도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반스가 다다르게 된 종착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모호성의 포용이다. 즉 그렇게 앤서니 혼자만의 기억에 의지해 보아도 과거의 진실을 알기란 불가능하니 결국 우리 인간은 이 모호성을 삶이 간직한 하나의 본질로써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반스가 앤서니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거꾸로 증명된다. 반스는 앤서니를 무엇보다도 명확성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린다. 그가 에이드리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그가 명확성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을 했을 때, 그에겐 사고를 정연히 정리하는 것이 마치 태어난 이유인 것처럼, (...) 자연스럽게 여겨졌다.(P. 152)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삶을 책임졌고 그것을 지휘했으며 온전히 포착했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우리-살아남은 우리-중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P.153)

 

 또한 그는 전부인 마거릿의 아래와 같은 여자에 대한 구분에서도

 

 마거릿은 여자는 두 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매사에 분명한 여자와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 그리고 이는 남자가 여자를 볼 때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이자 가장 먼저 그를 매료시키거나 그렇지 않게 하는 요소였다.(P.116)

 

 

 매사에 분명한 여자가 좋다고 말을 한다. 이외에 그가 그토록 에이드리언의 일기를 가지고자 하는 것 또한 나이가 들어감을 안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모호함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라는 것에서도 앤서니가 얼마나 '명확성'을 추구하는 인물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묘사했던 앤서니는 결국 그 어떤 진실도 명확하게 얻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만다.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종잡을 수 없었던 베로니카와는 영원히 결별했으며 에이드리안 핀의 일기가 쓰다 만 문장도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소설은 아예 그 자체에 가장 중요한 내용을 텅 빈 공백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앤서니의 모든 노력이 텅 빈 수포로 돌아가 버렸음을 더욱 강조하는데 결국 이를 통해서 더 분명히 알게되는 건 그 모든 진실 추구의 노력이 좌절될 만큼 삶은 모호성으로 가득차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독자인 우리는 그가 놓쳐버린 진실이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실인지에 대한 보증은 사실상 소설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가능한 것은 그저 막연한 추정 뿐인데 이것은 또한 '내 말 좀 들어 봐'에서 세 인물이 보여줬던 모습과 그대로 판박이가 아닌가! 그러므로 반스는 우리가 알았다는 것 또한 단순한 오해일 수 있으며 우리의 시도 역시 앤서니처럼 실패할 것임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소설에 자리잡은 공백은 바로 독자에게 그와 같은 체험을 가져다 주려는 의도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결국 삶이 본질로서 가지고 있는 모호성을 독자인 우리도 받아들이게끔 하기 위한 일종의 준비작업인지도 모른다.

 

 이는 무엇보다 소설에 나오는 세 가지의 죽음이 다들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게되면 명확해진다. 소설에서의 죽음은 한결같은 작용을 한다. 즉 일단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 속에 묻혀진 진실을 찾도록 끌어들이지만 결국엔 오로지 그 죽어버린 자들만이 진실을 소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종국적이고도 명확한 진실은 오로지 죽음만이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마도 소설의 원제인 'THE SENSE OF ENDING' 역시도 바로 이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변화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P. 254)

 

 죽음만이 종국적 진실을 가진다면 살면서 보내는 우리의 여정은 그저 근사치의 진실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모호성으로 넘쳐나는 공간이 된다. 즉 이 소설에 이르러 반스는 드디어 확고한 진실을 얻으려던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모호성과 기꺼이 포용하려 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모호성을 포용하려 하는가? 그 이유는 소설에서 보여준 앤서니의 모습을 보면 추정이 가능하다. 앤서니는 그야말로 과거의 진실에 집착하는 자가 어떤 모습의 삶을 보여주는지 거기에 대한 제대로 된 초상이니까 말이다. 현재적 삶의 구원을 위하여 과거에 집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어차피 삶이란 소설의 마지막 문장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는 반스가 지금까지 걸어온 그 모든 문학적 여정의 결론이기도 하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p.255) 

 

 

 이 거대한 혼란 속에서 그 누가 쉬이 진실을 찾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것의 집착은 현재에 구원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집착으로 부터 오는 고통까지 덤으로 전가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반스는 모호성 자체를 기꺼이 껴안으려 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현재를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첫 걸음이라는 것이 반스가 여기 종착지에서 느끼게 된 예감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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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차려 대한민국 - 위기의 한국에 고한다
김광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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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특히나 주인공의 남편인 방귀남은 '며느리'라는 직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 그야말로 초인기를 누리고 있다. 극중에서 그 남편이 아내를 위해 시누이를 야단치거나 시어머니 앞에서도 이왕이면 아내와 자기가 같이 있을 때 야단을 쳐달라고 하는 둥 그야말로 아내의 편에 써서 아주 든든한 '쉴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은 '한국에 저런 남편이 어딨어?' 하고 비현실적임을 지적하려다가도 어느 순간 그가 30년간 미국에서 키워졌다는 설정을 떠올린 나머지, 그만 '아, 그래 미국에서 자랐으니까 저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납득하고 만다. 어쩌면 정말 그 때문에 그 같은 조금은 무리하게도 보이는 그런 설정을 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남편 '방귀남'이 보여주는 한국 사회에서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부분은 그것뿐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드라마 '하얀거탑'이나 '브레인'에서도 드러났듯이 거의 군대와도 맞먹는 철저한 위계 사회인 '의사들' 세계에서조차 그는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권력을 가진 과장에게 '부하 의사들 업적에 숟가락 올려 놓지 마라'고 직언하거나 기업이나 마찬가지인 병원의 아주 중요한 세미나조차 아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단칼에 포기해버리는 그의 모습은 직장에서 여지없이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겐 참으로 먼나라의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그럴수도 있겠구나'하고 받아들이는데 그것도 알고보면 모두 그가 미국에서 오래도록 살았기 때문이다.

 

 

 결국 방귀남이 저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의 바탕엔 가만히 보면 그가 있었던 미국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놓여져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인들과 달리 남녀사이에 별다른 차별이 없을테니까, 미국의 조직 사회는 한국의 조직 사회와 달리 그렇게 위계적이지 않을테니까 방귀남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미국을 우리나라보다 좀 더 나은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방귀남을 보다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미국이란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더 좋은 사회일까? 여기에 대해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책이 바로 현재 경북대학교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중인 김광기의 '정신차려 대한민국'이다.

 

 

 

 

 '정신차려 대한민국'은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세계전체라는 거시적 측면에서 진행중인 위기들을 다루고 2부에서는 보다 미시적 차원에서 이 위기의 시대에 이제 우리나라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1부와 2부 모두에 있어서 중점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식 체제,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우월하다는 관념의 파괴이다. 즉 여기서 제목의 '정신차려'는 바로 거의 사대주의적으로 '미국 것'에 추종하는 우리들 보고 정신차리라고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그리 좋거나 정치적으로 발전된 사회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온갖 문제들로 가득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종은 어림도 없고 때로는 배타도 필요한 그렇게 어디까지나 한 발 물러난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여느 나라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게 이 책의 지론이다.

 

 1부에서는 왜 미국에게 서브프라임이라는 사태가 일어났으며 그것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인지에서 부터 그리스로 인해 초래된 유럽의 위기가 정말은 누구에 의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벌어진 사태인지를 정확히 꼬집어주고 있으며 그 다음에선 미국과 유럽의 사태를 일으킨 존재들이 여전히 개혁되지 않는 한 장차 또 어떠한 문제들이 연이어 '위기'라는 이름으로 닥쳐올 것인가를 말해준다. 그리고 이렇게 언제 화약고가 폭발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조금이나마 제대로 헤쳐나갈 수 있으려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얘기한다. 그렇게 세계 경제와 정치를 모두 아우르며 진행되는 책인지라 언뜻 보면 난해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책은 나 같이 지하철 같은 곳에서 책을 읽어야 하는 자를 배려라도 하는 듯 거기서도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 있게끔 쉽게 서술되어 있다. 책날개에 보면 김광기 교수는 '무엇보다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맛깔스런 글쓰기에 주력하는' 교수라고 나와 있는데 책을 읽어보면 이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함량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쉽지만 2008년 부터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세세하게 짚어주고 있다.

 

 그렇게 1부가 정보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2부는 충고적인 성격이 강하다. 아무래도 1부는 현실 분석적이고 2부는 앞으로 제대로 나아가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에 얘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김광기 교수가 2부에서 특히 강조하는 건 물론 '미국식 혹은 미국것'에 대한 우리의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식의 무조건적 추종이다. 이를테면 한미FTA를 왜 무턱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것 만큼 세계화가 그리 좋은 것만을 주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노동계급이나 그 이하 빈민계급들에 있어서만큼은 가속화된 재정위기로 사회안전망을 축소할대로 축소시켜 이중고를 겪게 만들고 또한 론스타 케이스에서 보듯이 외자를 유치하는 것이 그저 플러스적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손쉽게 금융투기세력에게 고스란히 이익을 빼앗기는 일이 될 뿐이며 동시에 세계적 지위 상승을 위해 벌이는 OECD가입이나 G20 같은 각종 국제행사를 유치하는 것이 사실은 막대한 재정적 부담만 안겨줄 뿐인 '빛깔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것과 현재 조지 소로스를 위시한 헤지펀드 세력들이 제3세계의 곡창지대를 점점 선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들이 향후 그 투기적 이익을 위해 식량 위기를 가져올 것이 예측되는데 이러한 때 한미 FTA를 하는 것은 진정 지켜야 할 식량주권을 마치 그대로 내어주는 것과도 같기에 위험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이 모든 것들에 사회학자답게 세세한 근거를 들어 설득력이 있다. 이런식으로 그는 미국식처럼 되어가는 월세화를 왜 막아야 하는지 그리고 미국 대학들처럼 등록금이 하염없이 치솟는 것을 왜 저지해야 하는지 조목조목 보여준다. 그렇게 그는 미국식 제도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아주 문제점이 많은 것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에 대해 전혀 열등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우리들 스스로 미국에 대해 당당함을 가지고 문제 해결에 있어 미국식을 추종하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결정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특히나 그런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 것들을 '이제는 당당히 주인의식을 되찾아야 할 때'에서 보여주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이 특히 빛나는 점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깨우치는 바가 많았다. 이를테면 미국 시민권자를 포기하는 자들을 특별하게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부분의 경우, 그들이 시민권을 포기하고 우리나라 현역으로 입대하는 것은 이미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일자리 찾기가 쉬운 한국에서 일자리를 얻으려면 병역을 마쳐야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뭔가 대단한 희생을 한다거나 특별히 애국적인 행위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랬다. 우리가 가진 미국에 대한 프리미엄식 평가 때문에 이를테면 가나의 시민권을 포기하고 현역으로 입대하는 것과 사실 별 다를 바 없는 일인데도 우리는 유독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는 것을 언론은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그것을 보는 우리들은 대단하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이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미국식에 대한 프리미엄 부여는 공교육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왜 우리나라 공교육을 미국의 공교육보다 열악하다고 생각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선 우리의 공교육 현장을 살펴보면 미국에 비해, 교사의 질, 공부하는 절대적 시간, 배우는 내용, 학교 시설 등에서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아니 미국의 공교육 현장에 비해 월등하다.(김광기 교수는 미국의 보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먼저 교사의 질은 미국 공립학교 교사들의 고등학교 성적이 하위 3분의 1에 해당한다면, 우리나라 교사들의 성적은 거의 상위 등급이다. 정말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교사의 길로 접어든다.(P.248)

 

 이렇게 그는 공교육, 의료제도, 정치제도 등등에 있어서 사실은 우리나라가 미국 보다 좀 더 발전된 사회임을 조목조목 밝혀준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우월함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외국인이 영어로 물으면 영어로 꼭 대답해야 하는 것과 같은 주눅이 드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미국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프리미엄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말을 그저 '우리 것이 최고야!'식의 국수주의적 주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렇게 해석하는 건 그야말로 심각한 오해가 아닐까 한다. 개인적인 느낌은 여기에 담긴 진심은 1부에서 세세하게 보여준 현재 진행중인 위기와 앞으로 도래할 위기에 있어서 제대로 우리가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국의 것이라면 무조건적 프리미엄을 붙이는 습관적 사고와도 같이 그렇게 외국의 것에 기대어 판단하고 결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긍정하고 그 내부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정말 현명한 길임을 강조하는데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많은 중요한 사안들마다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말들을 참으로 많이 들어왔다. 100분 토론 같은 것을 보면 꼭 들어가는 것이 선진국은 이렇고 저렇고 하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나라들은 저마다 다른 역사와 풍토를 가지고 있다. 삼권분립을 처음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그것들을 '사물의 본성'이러 불렀다. 즉 여기서 사물의 본성이란 그 나라 혹은 지역이 가지는 고유의 역사, 언어 그리고 문화들을 총 망라한 고유한 풍토성을 이르는 말이었다. 즉 그 고유의 풍토성이 일종의 본성 혹은 본질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그가 이렇게 사물의 본성이란 명칭을 부여하면서까지 고유의 풍토성을 강조했던 것은 무엇보다 법이란 것이 그 사물의 본성 그러니까 고유의 풍토성에 합치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몽테스키외는 법이란 어디까지나 각 나라와 고유의 특색에 적합해야 하는 존재임을 역설했던 것이다. 어디 거기에 적합해야 할 것이 법 뿐일까? 제도나 정책 역시도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남의 것을 들여오기 전에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우리의 정직한 모습을 먼저 바라보고 그것이 과연 우리들이 입기에 적당한 옷인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김광기 교수의 '정신차려 대한민국'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그 어떤 사대주의나 열등의식 없이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정말로 나쁘기만한 것인지 어떤 살릴만한 좋은 점은 없는지 한 번 제대로 바라보자는 하나의 외침(2부에서 두드러지는 어조로 볼 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방귀남의 얘기로 돌아가서, 과연 방귀남이 미국에서 오래도록 생활했기에 그렇게 아내의 편을 적극적으로 들어주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김윤진이 출연해서 유명해진 미국드라마 '로스트'라는 게 있다. 거기서 김윤진은 한국인 아내로 등장한다.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아마도 공항 로비에서 그녀의 한국인 남편과 같이 있는 것에서 부터 였는데 거기서 김윤진은 남편의 말이라면 뭐든 고분고분 따르는 순종적인 아내로 나온다. 그 옆에서 그러한 김윤진을 보고 있던 미국인 아내가 이런 말을 한다. "어떻게 저렇게 살지? 나는 절대 저렇게 못 살아!" 그렇게 그녀가 말하자 그 옆에 있던 남편이 이렇게 말한다. "그게 왜 나뻐? 너 한국의 이혼률이 미국의 이혼률에 턱없이 못 미친다는 것 알기나 하는거야?" 하도 오래전에 봐서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비슷한 뉘앙스의 대사를 미국인 남편이 한다. 즉 사실을 말하자면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여자를 마음껏 휘두르고 싶다는 것에선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가? 그렇다면 이건 또 어떤가? 오 헨리의 '할렘의 비극'이란 단편에 보면 남편에게 매맞는 친구를 부러워하는 아내의 얘기가 나온다. 그녀는 그 때리는 행위에서 남자다움을 본 것이다. 그래서 '완벽한 남편'이란 이데아가 있다면 딱 거기에 해당되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을 때리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물론 단편의 제목이 '비극'이므로 이 얘기는 오 헨리가 일종의 풍자 처럼 쓴 것이다. 하지만 일상을 그대로 담아냈던 헨리이니 만큼 아마도 당시에 아내를 폭행하는 일이 그 정도로 보편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정은 가능하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자리잡은 하나의 문화적 관습이 달라지기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처럼 미국적 가치관이든 그 사고방식이든 오히려 더 못하면 못했지 별다른 차이는 없다. 그러니까 방귀남은 미국적 삶의 세례를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그가 착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오해하면 '아니~ 아니~ 아니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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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2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TV 프로에서 유명 연예인이 나와서
우리나라도 외국처럼 동거도 자유롭고 성생활도 자유로우면, 급증하는 이혼율도 줄어들 것이다 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동거 자유로운 나라가 이혼율 역시 훨 높더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처럼... 이라는 말은 참 위험하고, 주체적이지 못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 애증이 섞이죠. 그건 중국이나 일본, 북한과 마찬가지의 느낌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이라고 무조건 따라가고 복종하고 비굴하게 구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문제이니... 적절한 균형이 가장 중요한거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힘이 역부족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니까요.

일반화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여자를 휘두르고 싶은게 아니라, 남녀 상관없이 타인을 휘두르고 싶어하는게 아닐까
싶어지기도 하는걸요... 아하하..... 오해하면 아니~아니~ 아니되오! ^^

오드득 2012-04-30 19:22   좋아요 0 | URL
저도 항상 우리나라 얘기를 하는데 있어 무분별하게 외국 사례를 가져다 오는게 마음에 안들었었는데요. 그렇게 특히나 미국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건 MB정부의 주된 레퍼토리이기도 해서 더욱 이 책의 주제의식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 일반화에 대해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저 역시 크게 공감하게 되네요^ ^
 
임기종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
빈스 플린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변상욱 기자의 '굿바이 MB'와 빈스 플린의 '임기종료'가 가지는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는 모두 대통령이 임기종료를 1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은  어떻게든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온갖 정치적 공작과 약점을 잡아 협박과 회유를 하는 등의 정치적 뒷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셋은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도덕적인 정권인양, 민주적인 정권인양 한껏 포장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넷은 그러한 정치적 부패와 협잡 그리고 거짓말과 위선에 국민들의 환멸과 분노가 극에 달할대로 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직도 많은 분들이 가장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는 미국의 정치적 현실 역시도 우리나라와 다를바 없다. 한낱 스릴러가 하는 얘기를 곧이 곧대로 믿느냐고 반문하실 분도 있으시겠지만 '뉴스의 헤드라인을 뽑아내듯 오늘날 백악관의 모습에서 착안한 현실적인 캐릭터들'이라고 평한 플로리다 타임스 유니온이나 '워싱턴 정치 기밀의 내부 고발자가 된 것 같은 현실감을 느끼게 해 주는 작품'이라는  미네아폴리스 스타 트리뷴의 평가가 있는 것을 보면 이 소설의 내용이 단지 허튼 공상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저 그 속사정이 제대로 투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미국의 정치나 한국의 정치나 이렇게 빈스 풀린의 '임기종료'가 나와야 했을 만큼 썩을 대로 썩었다는 건 마찬가지인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5년간 60번이나 출판사로 부터 출판 거절을 받는 바람에 작가가 사비를 털어 출간했다. 그렇게 사비로 털어 만든 책이니 별다른 홍보가 있을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입소문만으로 이 책은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물론 작품의 완성도가 그토록 매력적이라는 증거도 되겠지만 그만큼 미국 시민들 역시도 우리 나라만큼 기성 정치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근데 염증을 느끼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그건 빈스 플린이 '임기종료'에 담은 내용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으로 오늘의 한국과 빈스 플린이 꿈꾸는 미국의 차이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한국은 그동안의 거짓과 위선 그리고 무능에 대한 환멸과 분노에도 아랑곳 않고 다시금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주는 것을 택했지만(어쩌면 한국인은 독일의 학자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대로 매저키스트적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치와 같은 파시즘을 양산시켰던 그러한 증후군을...) 빈스 플린의 '임기종료'는 그러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대로 방관할 수 있다면 진정한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스스로 심판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것도 그냥 외치거나 시위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옛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를 단두대로 처형했던 프랑스 혁명처럼 무력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말이다.

 

 소설은 그렇게 대통령 임기 종료를 1년 앞둔 시점에서 현재 미국 대통령 스티븐스가 재선을 위해 장차 재정적 부담으로 나라의 파산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선심성 정책을 법안화하느라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지지표를 모으고 있는 사이 당시 미국 정치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으나 또한 그만큼 가장 부패로 악명 높았던 정치인 세 명이 정체불명의 자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처단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더하여 이것이 시작이며 앞으로 미국의 정치가 올바로 되지 않으면 계속 정치인들을 살해해 나갈 것이라 선언한다.

 

 1776년 미합중국의 건국자들은 영국 국왕에게 독립선언서를 보냈다. 이 선언서에서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썼다. '어떤 형태의 정부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때, 그 정부를 바꾸거나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은 국민의 권리다.' 우리는 정부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꾸기 위해 봉기할 이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 당신들은 미국이 나아가는 방향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 당신들은 지출을 줄일 시간과 기회가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당신들은 개인적인 욕심과 자신이 속한 정당의 목표를 미국의 경제적 안정과 미래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신들의 이기적이고 무능한 지도력 때문에 현재 우리는 5조 달러가 넘는 국가채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  이제 행동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하원에 제출한 예산안을 철회할 것을 명령한다. (...) 만일 헌법 초안자들이 의도했던 제한된 권력만을 행사하는 정부형태를 회복할 능력이 없다면 당장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당신의 행동을 면밀히 주시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경고다. 만약 당신들이 우리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당신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대통령도 마찬가지다.(P.79~80)

 

 

 하지만 물론 그들은 듣지 않는다. 해서 정체불명의 심판자들이 대통령이 헬기를 탔을 때 얼마든지 타격가능함을 보여 더욱 위협하지만 애시당초 국민에 대한 봉사 따위는 잊어버린지 오래인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한 마디로 지지리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빈스 풀린이 그려내는 민중의 무력 심판은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에릭 건전한 토론은 환영이네만, 다시는 나한테 그런 쓰레기 같은 말을 내뱉지 말게. 난 자네가 가르치던 순진한 학생이 아냐. 아첨을 일삼는 정치운동가도 아니고. 난 사람들이 죽는 걸 직접 봤네. 이 나라를 위해 복무하면서 직접 사람을 죽인 적도 있어. 자네의 그 이상적이고 철학적인 이론들이 의사당의 신성한 복도에서는 효과가 있는지 몰라도, 현실속에서는 안 그래. 폭력은 삶의 일부일세. 자기가 원하는 걸 얻으려고 기꺼이 폭력을 쓸 사람들이 쎄고 쌨어. 그런 사람들을 막으려면 역시 폭력을 동원하는 수 밖에.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없다면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사람이 이 세상을 다스릴 걸세. 그리고 자네는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멍청한 말을 하며 돌아다닌 죄로 총살당하겠지" (P.317)

 

 

 주인공 오루크의 할아버지 시머스의 말이다. 비폭력을 주장하던 올슨이 이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봐서 이것이 바로 '임기종료'를 쓸 때의 빈스 풀린의 솔직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렇다고 빈스 풀린이 무력 응징을 진심으로 믿는다고 생각하지는 말길 바란다. 그는 국민이 침묵하면 과연 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좀 과장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전쟁이 없으면 히틀러와 스탈린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에 그 진의가 드러난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그렇게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광기와도 같은 전쟁의 선동과 혹독한 독재 앞에 국민들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품 속에서 언젠가 오루크가 중얼거렸던

 

 "이 사람들이(정치가들을 말한다.) 제대로 일을 하게 만들려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라는 질문에 빈스 플린은 소설 전체를 통하여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정치를 바꾸고 싶은가? 그러면 행동을 하라! 행동을 통한 현실적인 참여만이 그것의 근절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개인적으로 정치에 대한 환멸을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분들에게 제스 월터의 '시티즌 빈스(이 책을 읽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투표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감동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와 더불어 권해드리고 싶다. 이번 총선의 낮은 투표율은 정말 실망스러웠다. 이번 야권연대의 충격적인 패배도 낮은 투표율 때문임이 출구조사 분석 결과 드러났다. 특히나 18대에 비해 30대의 참여율이 거의 12%나 낮다고 한다. 패배의 충격만큼이나  정책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받을 수 밖에 없는  30대가 이렇게나 참여율이 저조하다니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투표하지 않을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고 말들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상황을 봐 가면서 보장되어야 할 권리라고 생각된다. 만일 당신이 불타고 있는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 보라. 물론 구해주지 않았다고 형법이 당신을 처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당신의 행동하지 않음을 무언으로나마 비난할 것이다. 거기에 대해 당신은 구해주지 않을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외치며 스스로를 당당하게 변호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분명 당신 역시도 가책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물론 이 비유가 투표권의 비유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 불난 집과 다르다고 보기란 힘들다고 생각된다. 조금만 눈을 바깥으로 돌리고 살펴보면 마른 들판에 불길이 번지듯 활활 타들어가는 타인들의 고통이 보인다. 그것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이권만 챙기는데 혈안이 된 정치적 부패와 그로 인한 정책적 무능 때문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꿀 수 있는 길이 투표 밖에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인데도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안에 있는 활활 타오르는 집을 눈 앞에 두고도 가만히 있는 것과 같지 않을까? 물론 그 불은 그냥 거기서 타오르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언제 어느때 자신의 집마저 옮겨 붙을 지 모른다. 삶이 가진 예측불가능성은 계층의 위 아래를 구분하지 않으니까.  그 때가서 창 밖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돌아오는 것인 차디찬 무관심 뿐이라면 어떡할 것인가? 미국의 시인인 프루스트는 무관심은 무관심만을 낳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세계는 아마도 얼음으로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이이상 말을 하면 구구절절이 될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두려 한다. 그냥 한번쯤 이 책을 통해서나마 나의 정치적 무관심과 무행동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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