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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학교 놀이터를 관리하며 아이들에게 체육을 가르치는 켄터 선생은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책임감이 강해서 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고 학부모들에게는 믿음을 주는 존재이다. 폴리오(소아마비)의 공포가 지배하는 한여름에도 놀이터에서 운동을 하고 뛰어놀 수 있게 아이들을 지도하던 켄터 선생은 놀이터에서 운동을 하던 아이들이
하나 둘 폴리오에 감염돼 입원을 하고, 자신이 가장 아끼던 아이 앨런마저 폴리오에 걸려 목숨을 잃자 두려움과
혼란스러운 마음에 폴리오의 유행이 끝날 때까지 놀이터를 폐쇄해야하는 건 아닌지 고민한다. 급기야 폴리오에
걸린 한 아이의 부모에게서 자신의 아이가 폴리오에 걸린 건 놀이터를 폐쇄하지 않은 켄터 선생 때문이라는 비난을 듣자 켄터 선생의 죄책감은 더 커지고,
폴리오의 위험에서 벗어나 여름 캠프에서 함께 일하자는 약혼녀 마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만다. 놀이터를 등지고 폴리오의 공포에서 벗어난 켄터 선생은 캠프에서 새로운 아이들 그리고 사랑하는 약혼녀와 함께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럴 수록 자신이 놀이터의 아이들을 배신하고 폴리오로부터 도망쳤다는 죄책감과 수치심도 커져간다.
역시 필립 로스는 끝까지 읽어야 진가를 알 수 있다. 폴리오에 대한 공포와
책임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켄터 선생의 윤리적 고뇌와 갈등이 전반부라면, 컴플렉스 덩어리(엄마는 출산 중에 죽었고 아빠는 좀도둑에다 자신을 버렸다. 2차 대전 중이지만 작은 키와 시력문제로
염원하던 군대에 가지 못했고, 대학은 나왔지만 변변찮은 학교 놀이터 감독으로 아이들을 봐주는 일을 한다 등…) 켄터 선생이 아이들의 폴리오 감염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벌하며 고립되어가는 후반부는,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어디서 들었더라…?)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전반부는 솔직히 심심했으나, 후반부 몰아치는 감정적 파도와 쓸쓸함,
여운은 역시 거장의 작품이구나 싶다. 필립 로스의 작품을 아직 몇 권 읽지 못했지만,
[네메시스]는 현재까지 읽은 작품들 ([에브리맨].
[울분], [포트노이의 변명], 그리고 [네메시스].) 중에서 가장 재밌었고 주제도 선명했던 작품이다. [네메시스]가 필립 로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지, 세간의
평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지고 분량도 짧으니 입문용으로 적절하다 생각한다.
자네는 양심이 있는 사람이고 양심은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네가 자네의 책임 영역을 넘어선 것에까지 책이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시작한다면 그건 귀한 게 이니게 되네. – P109
두려움이 덜할수록 좋아. 두려움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어. 두려움은 우리를 타락시켜. 두려움을 줄이는 것, 그게
자네의 일이고 내 일이야. – P110
그러니까 그가 뉴어크에 며칠 더 있었더라면 그만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두지
않아도 의무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어디든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대로만 있었으면 오개라한테 전화를 해서 그때 들었던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대로만
있었으면 아이들을 두고 떠나와 그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을 평생 되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 P196
“뭘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거기 있는 게 중요한 거야!
지금도 거기 있어야 돼, 마샤! 그런데 나는
산꼭대기에 올라와 호수 가운데 있어!” – P199
사람의 운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누구의 인생이든 우연이며,
수태부터 시작하여 우연–예기치 않은 것의 압제–이 전부다. 나는 켄터 선생님이 자신이 하느님이라 부르던 존재를 비난했을 때 그가 정말로 비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 P243
너는 기형이 된 게 네 몸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기형이 된 건 네 마음이야! – P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