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 아멘 아멘 - 지구가 혼자 돌던 날들의 기억
애비 셰어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나이 때 정말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시작은 아마도 추석 때 성묘를 다녀와서 일 것이다. 무덤을 보면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 같다. 아무튼 다녀와서 죽음에 대해 나름 진지하게 상상했었다. 죽음이 영원한 결별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서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영원히. 그런데 어떻게 영원히 나로 있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니까 지금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생각을 하고 있는 이 나라는 것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 과연 내가 나를 생각하지 않은 채 영원히 있는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나는 그러한 것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는 확실히 좀 이상한 아이였던 것 같다. 결별로 인한 슬픔 보다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상태로 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그런 것들이나 상상해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죽음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이성으로 헤아리기 힘든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다. 존재 자체가 삶의 절대적 외부에 자리잡고 있기에 우리 사유에 있어 언제나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영원히 불가해한 것이기에 그 반응에 있어서도 천차만별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자끄 드와이용 감독의 영화, '뽀네트'가 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4살짜리 여자 아이다. 감독은 주인공을 연기하는 여자 아이의 실제 나이 또한 꼭 네 살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연구 결과 5세 이상이 되면 죽음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시각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문명에 포획된 의미의 죽음이 아닌, 언어 이전의, 사회적 의미 이전의, 죽음에 대한 원초적 시선을 담으려 한 것이다. 바로 거기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떠난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 아이는 당연히 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그 상실의 '영원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는 엄마가 돌아올 것을 굳게 믿으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결국 엄마의 무덤으로 몰래 가서 파헤치기까지 한다. 아이에게 죽음은 인식할 수 없는 무한이 입을 벌린 것과 같았다. 그것은 아이가 절대 이해란 이름으로 포획할 수 없는 존재였으며 그래서 레비나스가 말한 대로 '타자란 바로 무한성'을 입증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죽음이란 '뽀네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이 있음을 알게하는 것이었다. 내가 절대도 넘어설 수 없는 경계 저 편에서 내 한계를 깨닫게 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죽음은 대부분 우리에게 부정의 존재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한계를 깨닫게 하고 내 자아의 영역을 위축시키는 존재이기에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지키고 싶듯이 죽음을 밀어내고 설사 죽음과 맞딱드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강한 반작용으로 오히려 더욱 자신의 자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영원한 상실을 열어보인 무한의 틈을 의식적으로 없는 것 처럼 메우려든다는 것이다. 마치 죽음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네델란드의 세계적 석학, C. A. 반 퍼슨은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에서 죽음에 대한 서양의 태도를 기준으로 역사적으로 세 단계로 나눈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현대를 죽음을 망각하는 태도로 정의했다.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1세기 전만 하더라도 다반사로 있었던 일이지만 이제 죽음은 교묘하게 은폐되고 있다. 겉으로는 죽음과 애도를 감추려는 사회 규칙에 의해, 안으로는 진정제나 흥분제의 사용으로 인해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되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이웃이 함께 슬퍼하는 일도 이제 없어졌거니와 상복을 입는 일도 이제 드물게 되었다. 진정제나 흥분제의 사용으로 주의 사람은 물론이고 죽어가는 당사자 조차도 죽음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며 따라서 죽음도 '소비 가능한 것(소모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C.A 반 퍼슨,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 P. 213)

 

 현대에 이르러 유독 이렇게 의도적으로 죽음을 은폐시키고 망각하려 드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무래도 근대에 이르러 태어난 '나'라는 자아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확장되어 가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 점점 강해져만 가는 자아에게 있어 유일하게 '한계'라는 상처를 입히는 절대적 타자인 죽음이기에 은폐와 망각을 통해 상상적으로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는 고전 추리 소설이라면 흔히 나오는  탐정의 마지막 추리 쇼와도 일맥상통한다는 게 흥미롭다. 거기서 탐정은 꼭 예전에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세부에 있어서까지 정확하게 복원한다. 그것은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같다. 아니,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추리 소설은 에드가 알란 포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과 더불어 태어난 근대의 산물이고 그런 추리 소설에 있어 범죄란 늘 진보를 향해 나아간다고 설파하는 근대성에게 상처를 입히는 얼룩 같은 존재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즉 추리 소설의 시간 되돌리기 추리쇼는 말하자면 지나간 시간을 그대로 복원해 그 상처가 마치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드는 행위에 다름아닌 것이다. 한 마디로 은폐와 망각인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범죄에 대해 근대가 보여주는 태도가 동일하다는 것은 근대에 의해 태어난 자아라는 주체성이 타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척도가 된다. 즉 은폐와 망각이라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이 바로 기본적인 태도라는 사실이다.

 

 즉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대면함에 있어 중요해지는 것은 '나라는 '자아'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이다. 그 절대적 타자가 열어보이는 무한 앞에서,  나의 한계를 끊임없이 일깨우고 그래서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끔 강요하는 무한 앞에서 어떻게 내게 존재하는 절대적 한계를 무시하고 나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것인가가 더없이 중요한 물음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대로 집착이요 그래서 하나의 강박이다. 그것도 내 쾌락의 원인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벌이는 것이기에 프로이트의 분류에 따르면 도착증적 강박이다.

 

 정확히 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애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 이라는 소설이다.

   

 

 

 

 이는 정확한 의미에서 소설은 아니다.

 물론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여기에 실려있는 내용들은 작가 애비 셰어의 실제 경험과 내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의 고백록이라고 불러야 한다. 애비 셰어는 자신이 사랑했던 고모와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 이 소설에서 정직하게 밝힌다. 그것은 일종의 강박증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불행이 바로 자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강박증이다. 제목의 '아멘 아멘 아멘'은 현실속에서 그녀가 불행한 사건을 만날 때마다 올리는 기도이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늘 빌며 그것을 위해 노력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가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되므로 행동을 조심하는 것. 또는 길가의 날카로운 쇠붙이나 유리 따위를 줍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행여나 행인들을 다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 강박적으로 노력한다. 오로지 세상이 불행없이 이대로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데 이러한 그녀의 강박증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죽음이 가져온 영원한 상실, 그 변화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죽음에 대한 반응은 무엇보다 자아의 보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녀의 강박적인 노력들 역시도 그와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녀가 세상에 불행이 없기를 바라며 하는 모든 노력들은 사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싶다는 그런 의미에 다름아니다. 그러한 현재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겠다는 열망은 그대로 변화에 대한 거부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있어 일어났던 진정한 변화는 모두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애비 셰어의 그러한 강박적인 노력은 사실 그녀에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 아버지의 죽음을 지우고 그것이 없었을 때의 세계를 되돌리려는 노력에 다름아닌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죽음이 각인시키는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애비 셰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리스트의 의미다. 그녀는 여러가지 리스트를 만드는데 그러한 계보의 작성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증명했듯이 근대에 이르러 탄생한 것이었다. 즉 이는 자기 세계의 확고한 보존을 드러내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죽음이 열어보인 자기를 삼키려 드는 무한 앞에서 강박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분이라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소설 속에서 애비 셰어는 정말 많은 죄책감을 보여준다. 그녀는 세상에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에 다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죄책감은 자신과 타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대로 애비 셰어 역시 타자에게로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애비 셰어의 죄책감이 일종의 도착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녀는 왜 세상 모든 불행한 일에 끊임없이 강박적일 정도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가. 이 질문은 죄책감의 진짜 목적을 묻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애비 셰어에게서 혹시 지젝이 '까다로운 주체'에서 말했던 중세의 수사가 신자들에게 금욕적일 것을 요구하여 유혹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유혹에 대한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집요하게 떠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나? 과도한 선이 오히려 과도한 악을 창조하는 모순을... 푸코는 권력 자체가 저항을 생산한다고 말하고 라캉은 금기 자체가 욕망을 낳는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런 말을 한다.

 

  법 자체야 말로 죄의 영역이다. 법을 위반하려는 사악한 충동들의 영역을 열어놓고 지탱하는 곳이며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도착적이며 병적인 만족감을 얻게 만든다. 그리하여 법의 지배의 궁극적 결과는 잘 알려져 있는 대로 그 모든 초자아의 비틀림과 역설들로 이루어진다.: 나는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한에서만 즐길 수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자기-반성적 전회를 통해 죄책감 속에서 쾌감을 취한다는 의미이며 사악한 생각을 하는 나를 응징하는 속에서만 향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P. 244)

 

 

 

 

 애비 셰어가 느끼는 죄책감의 본질은 이 말대로다. 사실 그것은 그녀의 은밀한 쾌락 추구 행위인 것이다. 그녀는 그 죄책감으로 자신을 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쾌락을 공급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은 쾌락을 위한 하나의 제스쳐였고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강박은 도착증과 다를바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도착증이 애비 셰어만의 독특한 반응이 아니라 사실은 근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주체성이 가지는 근본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도착증과 히스테리를 구분한 적이 있다. 거기서 도착증은 히스테리와 달리 전혀 자신과 세계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게 특징이었다. 당연하다. 도착증은 자신의 쾌락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세계마저도 그 쾌락을 위해 능동적으로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새디스트를 생각하면 된다. 그는 자신의 쾌락이 피학에서 오는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 앞에서 그 피학으로 유도하는 연기를 한다. 바로 이것이 도착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타자에게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자와 세계마저 마음대로 조작해 가는 것. 이런 의미에서 애비 셰어의 모습은 그야말로 죽음에 대한 현대의 반응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으로 죽음이 열어보인, 삶을 궁극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그 변화를 받아들임이야 말로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의 모습인 것이다. 소설은 다행히 사랑을 매개로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녀가 진정으로 변화를 받아들일 때 진정한 사랑 또한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사랑이란 전적으로 나를 내어주는 것, 그렇게 타자에게 나를 맡김이다. 후반에 그녀는 서서히 강박적인 것이 줄어듦과 동시에 타인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을 병행시킨다. 그렇게 강박으로 집요하게 보존하려 했던 자아에 대한 포기가 바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통로임을 암시라도 하듯이 말이다.

 

 소설 초반에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삶과 죽음에는 질서가 있다.

 나쁜 짓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진짜 나쁜 짓을 하면 죽는다.(P. 27)

 

 하지만 마지막에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내 나머지 이야기는 불확실성으로 시작한다.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시작한다. (P. 461)

 

 말하자면, 이런 변화가 바로 애비 셰어의 고백이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은 노래로 끝난다. 고정적일 수 없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인. 기계적으로 복제되는 것 말고 세상에 같은 노래는 있을 수 없다. 노래는 혼자가 같은 노래를 부르나 모두가 같은 노래를 부르나 다 다르다. 왜냐하면 악보에 표시된 음은 다만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음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나와 세계가 하나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우연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음이 상징하는 것, 이 노래 자체가 상징하는 주체가 근대이후로 수많은 비극을 잉태시킨  도착증적인 주체를 극복할 하나의 대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주체가 늦지 않고 '제 때에 도착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애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은 그 기도의 공감을 위한 진솔하면서도 설득력있는 여정이라 말 할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2-08-1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비 셰어는 변화를 했고 그럼으로써 타인을 받아들이게 되었나보네요.
타인에 대한 신뢰는, 즉 자신을 내맡긴다는 진정한 행위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세계와 분리된 자아 형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은 항상, 실존적 한계로써 나는 혼자라는 사실과 함께 사람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런 한계가 있기에, 삶이 소중한게 아닐까 싶어져요. 제가 얼마 전에 유사한 문제로 고민할 때, 교수님이 켄 윌버의 책을 추천해주셔서 구입하고 아직 못 읽었어요....

만일 말이죠, 우리 사회가, 처음부터 세상은 불확실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이 거의 항상 발생한다는 분위기를 가지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발전했다면, 아마 발전 속도는 늦지만 실존적 고독은 훨씬 적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제맘대로 생각을 해본답니다.

참 좋은 글이세요, 언제나 그렇듯이...
헤르메스님, 오랜만이신데, 건강하게 잘 계시죠? ^^

추신.
저는 뽀네트를 고등학교 때 문고판으로 읽었는데 읽다가 미치는줄 알았습니다.

오드득 2012-08-24 01:00   좋아요 0 | URL
아, 닉네임이 바뀌셨군요.
와!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공부는 원하시는 만큼 잘 되고 계신지 정말 궁금합니다. '불확실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이 거의 항상 발생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발전했다면 실존적 고독은 훨씬 적어졌지 않았을까 하는 말씀에는 저 역시 크게 공감되네요. 한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질라 같은 것들이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었죠. 그런데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뭔가를 해 놓으면 갑자기 고질라가 나타나 짓밟고 지나가고 악착같이 쌓아놓으면 고질라의 불길 한번에 다 타버리고... 그렇게 시지프스와 똑같이 주기적으로 허무를 안을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정말 불행해지는 것일까 하고 말이죠. 어쩌면 제 리뷰들은 바로 거기의 연장선상인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 고질라가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고질라만큼 압도적으로 모두에게 체험되지 않기 때문이겠죠. 죽음이라는 절대적 타자의 체험이 오로지 개인적인 문제로만 인식되지 않고 중세처럼 좀 더 사회적인 체험으로 자리잡으면 우리의 생각 역시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그렇다고 중국과 우리 나라의 장례문화를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죽은 자를 기리기 보다는 산자들의 눈을 더 많이 고려하는 의식이니까요. 아마도 중국과 우리나라가 씨족 마을 중심으로 발전해서 자리잡게된 의식이겠죠. 좀 더 죽음을 헤아리고 그것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냥 단순히 이런 생각이 드네요.^ ^; 그런데 저는 뽀내뜨 영화로만 봤는데 문고판으로 나왔던 모양이네요. 처음 알았아요^ ^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와!

  올 여름은 정말 무덥군요.

  오늘 한낮에 거리를 걸었는데 마치 유령도시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바다에서도 그렇더군요. 정오의 태양이 작렬할 때는 해변마저 텅 비어버린 듯해

  보이더군요.

 

  '피서(避暑)'는 이제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방법이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피서 방법은 무엇인가요? 밤마저 무더운지라 책읽기도 힘겹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피서(避暑)'엔 책만큼 또 좋은 벗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올 8월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제가 고른 7월의 신간들은 이렇습니다.

 

  

  먼저, 미스터리 팬이라면 거의 '성경'과도 같은

  줄리언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

  올 여름 가장 벗하고 싶은 신간입니다.

  사실 오랫동안 번역되길 기다려왔던 책이기도 합니다.

 

  1972년에 출간되어 오래도록 미스터리 비평에 있어서

  하나의 준거점이 되었던 책인지라 미스터리 해설을 읽

  다보면 꼭 한번은 언급되곤 했던 책이기도 해서 그 진

  가를 두 눈으로 꼭 한 번 확인해두고 싶었습니다.

 

  저도 미스터리 비평을 어설프게 흉내내고 있는 형편

  입니다만 줄리언 시먼스의 이 책을 통해서 제대로

  한 수 배우고 싶군요. 한 며칠 두문불출한 채, 몰입해

  서 읽을 수 있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 럴. 수. 가 !!!!!!

 '알렉스'로 저를 열광시켰던

 피에르 르메트르의 작품이 벌써 나왔습니다.

 그것도 '알렉스'의 후속작이라고 하는군요.

 

 안그래도 '알렉스'를 읽으면서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의

 자취를 느꼈는데

 이번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이 한 번의 결혼으로 내 인생은 무너졌다'라는

 말을 보니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더욱

 그 세계로 들어간 듯 합니다. 

 

 '알렉스'에서 보여주었던 능수능란하게 플롯을

 짜는 기교와 '마담 보바리'에로의 귀환을 통해

 이 현대가 가진 문제점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았던 깊이가 이번 작품에선 또 얼마나

 진화했을지 궁금하군요.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서 또 다른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을 듬뿍 보여주었던 노리즈키 린타로의 새로운 작품이 이번에 나왔습니다.

 

  '요리코를 위해'는 작가와 똑같은 이름의 명탐정 노리즈키 린타로가 나오는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입니다.

  더구나 이 작품은 '1의 비극', '또다시 붉은 악몽'으로 이어지는 린타로의 또 다른 시도라고 일컬어지는 '비극 삼부작'의 첫 작품이기도 해서 더욱 읽고 싶은 작품입니다.

 

  교묘한 술수도 없고 반칙도 없는 정정당당한 정면승부의 본격을 지향하는 린타로가 이 작품에선 또 어떤 본격의 새로운 풍미를 보여줄 지 기대가 되는군요. 

 

 

 

 

 

 

 

  

 

 

 

 

 

 

 

 

 

 

 

 

 

 

 

  사실 아직 텐도 아라타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명성은 물론 많이 들었지만 그의 대표작 '영원의 아이'까지 포함해서

  이상하게도 저와 인연이 잘 닿지 않더군요.

  그래서 이번에 개정판이 새롭게 나온김에 그와 첫만남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과연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드디어 '토탈 리콜'의 원작이

 번역이 되어 나왔군요.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꼭 한 번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거기다 콜린 파렐이 주연한

 '토탈 리콜' 영화 또한 새롭게 만들어져

 이번에 개봉된다고 하니 같이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영화 원작 소설이

 나왔습니다.

 바로 지금 개봉중인 린 램지 감독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원작입니다.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임신을 할 무렵 컬럼바인 총격 사건을

 뉴스로 들으면서 자신의 아이가 만일

 그런 일을 저지르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서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저도 영화를 봤는데

 린 램지 특유의 영상미학으로

 자신의 아이가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추적하는 어머니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그 내면에 일어나는 과정을 그대로 가감없이 드러내듯

형상화했더군요.

정말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더구나 틸다 스윈튼 특유의 무표정한 연기가

도무지 저 여자의 내면에 지금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들기 때문에

원작에선 저 때 어떤 말들이 쓰여있을지 호기심이 일더군요.

그래서 꼭 한 번 읽고 싶은 소설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8-06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덥다보니 언제나 유지되던 헤르메스님의 진지함을 약간 벗어버리고 편하게 글을 쓰셨군요.
요새는 살인적으로 덥잖아요. 밖에 나가 있다보면 뜨거운 햇볕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들어요. 살이 절로 익는 느낌에 도저히 나갈 수도 없고. 선풍기를 틀어 놓으면 더운 바람이 훅.
....... 소설을 써야하는데 ㅠㅠ

오드득 2012-08-13 23:29   좋아요 0 | URL
이런 이제야 댓글을 다네요 ㅠ ㅠ
죄송해요 소이진님^ ^;

저는 안 그래도 몸에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인지라 요즘처럼 무더우면 정말로 축 늘어진 강아지꼴이 된답니다. 그래서 책 읽기도 글쓰기도 너무 힘이 드는 것 같아요. 빨리 선선한 가을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 굴뚝 같네요
시체놀이도 지겨워요~ ㅠ ㅠ
 

 

 

 

 

 

 

 

 

 

 에식스 카운티는 할런 코벤의 고향이지만 정작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은 코벤을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그가 쓰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는 유명작가라고 해도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코벤의 소설들이 에식스 카운티의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리는데

 아주 커다란 일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 확실하게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아니면 적어도 많은 이들에게 에식스 카운티는 살기에 별로 좋지 않은 곳이란 인상을 심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은 이 사실을 의심스러워하며 내게 증명을 요구할 것이다.

 그럼, 나는 그 근거를 이렇게 말하며 내세울 것이다.

 2005년에 나온 '결백' 부터 지금 나온 '용서할 수 없는'까지 에식스 카운티를 무대로 쓰여진 일련의 코벤 소설들을 한 번 떠올려 보라고...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근거 같은가? 하지만 당신도 읽어보면 이 근거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할 것이다.

 

 

 

 

 2005년에 나온 '결백' 부터 시작해 지금의 '용서할 수 없는'까지 내내 공간적 배경이 에식스 카운티로 동일하므로 내 개인적으로는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이라고 부른다. 굳이 크로니클이라 붙이는 이유는 공간적 배경도 동일하지만 등장인물들까지 다른 작품에 겹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아들의 방(2008)'에 나왔던 가족을 만들어 정착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검사가 기억나시는지? 그의 이름은 '코프'인데 사실 그는 '아들의 방' 바로 전작인 2007년에 나온 'THE WOODS'의 주인공이었다. 그 작품을 읽으면 코프 검사가 왜 결혼을 두려워하는지 단적으로 알게 되는데 (그래서 사실은 '아들의 방'보다 먼저 번역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다면 '아들의 방'은 더욱 풍부하게 독해되었을테니까) 때문에 '아들의 방'에서 코프 검사가 보여주는 모습은 사실 그가 'THE WOODS'를 거치면서 성장했으며 '아들의 방'의 주제와 관련하여 어떤 치유의 단계에까지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아들의 방'에서 범인을 추적했던 형사 로렌 뮤즈 역시 이 작품에 코프의 협력자로 그대로 등장한다.(아니, 그녀는 이미 '결백'에서 부터 계속 나오고 있다.) 사실 그 때문에 ''THE WOODS'와 '아들의 방'은 강한 연작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이번에 나온 '용서할 수 없는'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 역시 바로 전작이 되는 '아들의 방'과 등장인물 몇 명을 공유한다. 물론 코프 검사와 뮤즈는 나오지 않는다.(뮤즈가 사라지고 그녀의 역할을 웬디 타인스가 이어받게 된 것에서 이 '용서할 수 없는'이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코벤이 바라보고자 하는 작품임이 드러난다.) 이번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등장인물은 '아들의 방'에서 여형사 뮤즈를 괴롭혔던 그러다 결국 된통 당했던 프랭크 트레몬트 형사와 변호사로서의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주인공 티아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충고했던 기계처럼 냉정하지만 그래서 능력이 뛰어난 변호사 해스터 크림스타인이다.

 

  "당신은 내가 이룩한 업적을 존경했다고 했죠? 헤스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

  "난 가족을 갖지 않기로 선택한 거에요. 그 점도 존경하나요?"

  "그건 존경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건 당신의 선택도 마찬가지죠. 난 변호사로서의 경력을 선택했고 이 업계를 벗어나지 않았어요. 따라서 지금은 경력이 쌓인 만큼 윗자리에 올라선 거고요. 하지만 말년에 가서는 잘생긴 의사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들이 기다리는 안락한 집으로 돌아갈 순 없겠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아들의 방, P. 35)

 

 왜 하필 이 둘이 '용서할 수 없는'에 또 나오게 된 것일까? 그건 물로 코벤이 이 작품을 통해 다루려는 주제와 상관있다.

 

 이렇게 사실은 그의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같은 배경과 공유하는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주제에 조금씩 변화를 줘가면서 이끌어가는 시리즈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트완 드와넬 연작'을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400번의 구타'에서 시작해 '앙트완과 클라네' '도둑맞은 키스' '침대와 탁자' 그리고 '달아난 사랑'으로 이어지는 이 연작 시리즈는 '400번의 구타'에 출연하여 '앙트완 드와넬'을 연기했던 배우 장 피에르 레오의 실제 나이에 맞춰 진행된 성장 이야기다. 말하자면 앙트완 드와넬의 삶 자체를 실제 나이대로 담아낸 여정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드와넬의 위치를 에식스 카운티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코벤의 이 시리즈인 것이다. 그래서 '크로니클'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주연배우 장 피에르 레오 : 세월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그건 그렇고 아직 코벤이 왜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로 부터 환영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지 거기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건 이렇다.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에서 코벤이 보여주는 인물들의 모습 때문이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내내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라고 거듭 상기시켜주기에 그렇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했고 오래도록 알고 지내와 다 안다고 생각했던 아내나 남편들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사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나 남들에게 절대 들켜서는 안되는 오래전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존재임이 드러나고 그들의 이웃 또한 평상시에는 더 없이 친근하고 완벽하게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사는 듯 보였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마치 이제까지의 모습이 깡그리 거짓이었다는 듯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공격적 악의와 상상을 뛰어넘는 범죄로 범벅이 된 모습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에식스 카운티는 곧이 곧대로 믿고 살다간 언제 어느 때 밤길을 걷다가 뒤통수를 맞게될 지 모를 그런 예측불가능으로 넘쳐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이 에식스 카운티에 정착하려 들겠는가? 여기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연인, 혹은 한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아야 하는 이웃 모두를 '혹시나' 하는 의혹과 '어쩌면' 하는 불신의 눈으로 계속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러니 당연히 부동산 가격은 하루가 멀다하고 하락할 수 밖에!

 

  아마도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은 할런 코벤의 신작을 읽을 때마다 틀림없이 "이런, 또!" 하는 기분으로 책을 부르르 움켜쥐었을 것이다. 에식스 카운티에 베포된 '용서할 수 없는'은 또 얼마나 주민들의 악력 테스트용이 되었을까? 때로 운명은 아무리 책이라 하더라도 가혹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주민들이야 읽다가 분노로 쓰러지든 말든 코벤은 에식스 카운티를 한결같이 이렇게 그린다. 그 어떤 문마다 그 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예측불가능한 비밀들이 무한히 움트고 있는 곳. 그래서 웃으며 인사하다가도 헤어지면 바로 내 등에다 칼을 맞을 수도 있는 곳. 한 마디로 만연된 예측 불가능으로 인해 생존을 위해서는 불신과 의혹이 자기 존재의 한 부분이 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거기서는 아무리 안정되어 보이는 현재라 하더라도 끝없이 의심과 불신을 가져야만 살아남는다. 유원지에 흔히 있는 거울의 미로에 들어간 것과도 같이 보여지는 모두를 순전히 믿다간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남과 세계를 의혹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한 일이다. 행동경제학을 창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이제는 우리에게도 유명해진 '생각에 대한 생각'을 쓴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에 따르면 애초부터 우리의 정신은 여지없이 게으른 존재라고 한다. 즉 원래 우리 정신이란 자체가 따지고 드는 것을 귀찮게 여기도록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그러니 의심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아무리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하긴 직업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지만 늘 우리는 거기로 부터 해방되기를 꿈꾼다. 사유란 것도 마찬가지다. 그냥 관두고 싶어진다. 무턱대고 보이는 대로 믿고 싶어진다. 사람들에게 자주 혀를 치게 만드는 '냄비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도 결정적으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끓어올랐다가 쉽게 식는다. 정치에 대한 분노도 마찬가지다. 관심도 분노도 지속적인 사유를 먹고 살아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의 사유란 지속되기에 힘이 든다. 흔히 한국인들은 '무임승차 욕구'가 강하다는 핀잔을 듣는다. 그냥 누리려고만 할 뿐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걸 한국인들만의 특유한 현상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걸 인정해야 한다. 그걸 마치 없는 듯 부정하고 오로지 정신 승리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어쩌면 내내 자기 꼬리를 무려고 달리는 강아지처럼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마치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본성을 극복해야 할 존재인 것 처럼 말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칸트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칸트가 진정한 인간다움을 '자유'에서 찾았을 때 그가 상정했던 자유는 이런 모습이었다. 동물적인 본능에서 자유로워 지는 것. 편하니까 그러고 싶은 것. 귀찮으니까 그만두고 싶은 것. 따지고 보면 동물적 본능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칸트는 거기에 인간다움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행해야 하니까 하는' 것에서 자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편해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편함에도 불구하고 사유함을 멈추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본 것이다. 칸트는 하지만 거기에 쉽게 굴복하는 인간을 또한 인정했기에 본격적으로 윤리를 말하는 실천 이성을 얘기하기 전에 그 보다 훨씬 두터운 '순수 이성'을 썼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다. '정신 승리'만 외치는 것에는 쉬이 귀를 열지 않는다. 지금 현실적 모습을 충분히 인정한 상태에서 솟아난 대안에 더 귀를 기울인다. 코벤이 '용서할 수 없는'에서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여기에 문이 또한 존재한다.

 

 

 여기의 문은 닫혀있다. 하지만 여기에 닫혀진 문은 그냥 닫혀진 문이 아니다. 그건 바로 내가 '닫아둔 문' 이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이 가지는 독특성이기 때문이다. 다소 무모하게 말하자면 이전까지의 작품들은 '닫혀진 문'에 관한 얘기였다고 할 수 있다. 문들이 모두 닫혀져 있었기에 예측 불가능성을 가져왔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의혹과 불신에 젖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얘기였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은 다른 질문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묻는다. 과연 그 문은 닫혀져 있던 것이냐고?

 

 그건 어쩌면 당신 스스로 일부러 닫아둔 문이지 아니었느냐고?

 

 그래서 코벤은 이 소설에서 문을 중요한 모티브로 가져온다.

 그건 소설의 첫문장에서 바로 드러난다.

 

 '그 빨간색 문을 열면 내 인생이 끝장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p.6)'

 

 그동안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에서 문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져왔다. 그 대부분은 그 뒷편에 뭐가 있는 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이었다. 바로 그 예측 불가능성을 가져오는 주요한 원인이 또한 비밀이었는데 그것이 비밀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대부분 깊이 감추어야 할 비밀이란 게 남들에게 결코 보여서는 안되는 어두운 욕망이거나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경쟁이 되는 상대방의 경각심을 최대한 허물어 뜨려야 하기 때문에 숨겨야 하는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문은 바로 그것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코벤은 이 소설에서 문에게 새로운 세번째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사유하기의 귀찮음 때문에 닫아둔 문의 모습이다. 과연 그 문은 그저 닫혀져 있기만 했던가? 혹시 내가 거기에 참여함으로 귀찮게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닫혀있는 것처럼 꾸미고 닫아둔 것은 아니었던가 묻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혹과 불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다. 외부로 부터 불러일으켜진 의혹과 불신이 아니라 나 자신이 포기해버린 의혹과 불신을 얘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동안의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의 소설들은 의혹과 불신을 없앤 진정한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천착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한다. 즉 의혹과 불신이야 말로 사실은 우리가 내내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원제 또한 사로잡히다라는 뜻의 'CAUGHT' 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코벤 스스로 그렇게 의혹과 불신에 사로잡힌 상태야 말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정보들이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이 현대 사회에서 그나마 제대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이상적 형태가 아닐까 보고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생각이 할런 코벤으로 하여금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의 첫 테이프를 끊었던 2005년의 '결백'을 다시 쓰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사실 이 '용서할 수 없는'은 '결백'을 다시 쓴, 일종의 '리-라이팅(RE-WRIGHTING)' 작품이다. 거기에 대한 근거는 이렇게 저렇게 많이 말 할 수 있지만 그랬다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그냥 이 정도로만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이 '에식스 카운티'를 무대로 한 소설들은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 (또! 강조하지만 그래서 'THE WOODS'가 빨리 나와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코벤의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그저 단순한 스릴러로만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프랑스의 발자크가 '인간 희극'을 쓰며 했던 것 또는 에밀 졸라가 '루공-마카르 총서'를 쓰면서 했던 것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정한 한 사회를 중심에 두고 그 한정된 시공간에서 인물들을 넘나들며 현대라는 보편이 무엇인지 모든 각도에서 담아내는 것. 그렇게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최근에 이르러 주목받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인 '로컬리티(locality)'의 여정이다.


 그 여정 속에서 유독 그가 담아내려 하는 것은 바로 '불안'이다. 안 그래도 하이데거가 현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근본적이 정서라고도 말한 바 있지만 그렇게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스마트 폰 처럼 늘 지니고 사는 것이다. 할런 코벤은 그 불안과 의혹을 계속해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크로니클을 통해서 그것을 사유하고 극복 가능한 대안을 추적한다. 그래서 크로니클의 각 작품들은 그 때 그 때마다 코벤이 도달한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결백'은 단순히 말하자면 레비나스가 말했던 '환대'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불안을 끊는 방법은 '내게 다가 온 타자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다만 포용하는 것 밖에는 없다'라고. 맷 헌터의 과거와 아내의 현재가 서로 겹쳐지며 코벤은 그것을 정말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여정이 계속된다는 건 그 종착지 역시 늘 수정되기 마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밤에 쓴 글을 아침에 읽어도 남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사람이듯이 시간이 흐르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때로는 그 그 사유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면서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로이 보게되기도 한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코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에게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타자란 어떤 타자인가? 우리는 보여지는 그대로를 믿을 수 있는가?" 지금처럼 많은 이들이 정보의 생산과 유통에 접근이 용이하다는 건 그만큼 거짓과 왜곡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얻는 정보란 대개의 경우 많은 타인들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발달한 요즘의 현대인들은 그만큼 사이보그라고 해도 좋다. 이제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 기계들로 인해 우리의 신경망은 아주 멀리까지 뻗을 수 있게 되었고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은 많이 확장되었지만 그만큼 나의 눈이 아니라 무수한 타인들에 의해 필터까 끼워진 채 보게되었다. 원본은 파악불가능하고 그만큼 진실을 가늠하기도 어려워졌다. 이번에 나온 '용서할 수 없는'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결백'에서 말했던 '환대'가 제대로 이루어지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그 조건들을 탐색하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이 새로운 '결백'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주인공이 되는 '용서할 수 없는' 댄 머서와 '결백'의 맷 헌터가 동일한 과거(역시나 스포일러상 여기까지만 말한다.)를 가지고 있음에서 드러난다. 왜 그 과거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인가? 바로 여기에 '용서할 수 없는'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다. 또한 바로 그 이유로 '아들의 방'에서 하필이면 프랭크 트레몬트와 해스터가 '용서할 수 없는'에 다시금 캐스팅 된다. 그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무엇보다 프랭크 트레몬트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들의 방'에서 어떤 형사였는가?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할런 코벤이 '아들의 방'과 '용서할 수 없는'에 쓰고 있는 동일한 모티브이다. 그건 역시 '보이는 대로 믿는다'이다. '아들의 방'에서 범죄자는 자신이 살해한 사람의 신분을 숨기려 시체를 위장한다. 그래서 사실은 평범한 주부지만 거리의 창녀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것으로 동기를 숨기고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프랭크 트레몬트가 걸려든다. 발견된 시체를 그저 창녀로만 여기고 별다른 수사없이 우연히 일어난 살인으로 단정지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깊이 생각하기 귀찮으니까 무턱대고 믿는 것. 흔히 일어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 작용을 무엇보다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기에 또 그로 인해 엄청난 실수를 하기 때문에 코벤은 다시금 '용서할 수 없는'에 기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듯이 '용서할 수 없는' 역시 비슷한 모티브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는'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것은 위장된 시체를 위장된 모습만 보고 창녀라 믿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그렇게 여주인공 고발 전문 리포터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가 어떤 인간인지 자세히 알려하지 않은 채 자기가 본 그 모습만 믿고 소아성애자로 고발해 버리고 사람들은 그 보도된 모습만 보고 그의 삶을 가차없이 파괴해 버린다. 이것은 댄 머서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웬디 타인스 역시도 댄 머서와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되는데 그 또한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나타난 것만 무턱대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아성애자로 부터 자기 딸을 희생당했기 때문에 소아성애자에게 증오를 품고 있는 에드 그레이슨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아들의 방'에서 보여준 프랭크 트레몬트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은가? 이렇게 할런 코벤은 보여지는 현상이 주는 실체의 장악력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새김질 시킨다. 사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사고적 버릇을 돌이켜 생각하도록 만들게 함이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것의 원본이 되는 프랭크 트레몬트는 이 소설에서 조금 변화를 보인다. 마치 전작에서 어떤 교훈을 크게 얻기라도 한듯이. 그러고보면 그 깨우침을 가져다 준 형사의 이름이 '뮤즈'인 것도 참 교묘한 설정이다. 뮤즈란 그리스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가져다 주는 존재로 흔히 칭송받던 신의 이름이었으니까. 정말 그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되었는지 프랭크 트레몬트는 소설에서 한 창녀의 죽음과 실종되어 버린 아이를 비교한다. 여기서 코벤이 다시금 창녀의 시체를 언급하는 것은 '아들의 방'에서 프랭크 트레몬트가 보여주었던 모습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그랬던 그가 그 5 페이지 뒤에 이르는 성찰에 이를 정도로 변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바로 그 트레몬트의 자각이 이 소설이 정말 말하고픈 핵심이다.

 그 5 페이지 뒤에 이루어지는 성찰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그게 죽은 창녀와 헤일리 맥웨이드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피부색이나 제정상태나 어떤 집에 사느냐가 아니라 항상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는지, 슬픔에 젖은 남겨진 가족이 있는지, 예전 상태로는 도저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지의 여부가 그 차이를 결정하는 법이다.('용서할 수 없는'  P. 163)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트레몬트와 같이 동반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는 변호사 헤스터 크림스타인이다. 코벤은 작은 조연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첫 등장을 아주 주의깊게 설정했는데 이러한 용의주도함이 바로 이 인물이 사실은 코벤이 이 책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주제를 집약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성공한 변호사이자 많은 이들로 부터 이기기 위해서라면 도덕 관념 따위 집어던져 버리는 평가까지 받는 크림스타인은 텔레비젼 법정 리얼리티 쇼의 진행자로 소설에서 첫 등장한다. 이는 이 소설의 여 주인공 웬디 타인스가 TV 리포터라는 점에서 비슷하고 그래서 의미심장해 보이는 설정인데 거기서 재판장으로 연기하는 크림스타인은 의뢰된 사건을 실제 재판처럼 다룬다. 그런데 거기서 보여주는 모습은 웬디 타인스와 전혀 반대이다.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에 관련된 인터넷 제보, 그리고 그와 관련해 자신이 본 모습 그대로를 믿었지만 헤터스 크림스타인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그 맥락을 이해하려 하고 누구로 부터 보여진 사실이 아니라 그녀가 알아낸 객관적 사실에 맞추어 판단을 내린다. 마치 크로키 하듯이 쓱 지나간 이 장면은 나중에 에드 그레이슨을 변호할 때 더욱 확장되어 드러난다. 그녀는 경찰이 제시한 증거가 아무리 정황상 타당해 보여도 오히려 그 '정황상'을 의심의 근거로 여기며 끝까지 제대로 된 객관적 진실이 드러날 때 까지 파헤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코벤은 정말 감탄할만한 전개로 이 내용을 상세히 보여준다. 그러는 이유는 물론 단 하나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기 때문이다.  바로 형사 트레몬트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던 '결정적인 차이는 항상 관심을 가져주는 존재의 있고 없고에 있다' 이것 말이다. 크림스타인이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이 말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코벤은 왜 이러한 자세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것은 물론 대니얼 카너먼의 말대로 우리는 사유하기를 귀찮아하며 그래서 쉽게 보여지는 현실에 타협해 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냥 귀찮으니까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댄 머서와 웬디 타인스가 겪는 비극에서 보여지듯이 그 귀찮음이 불러오는 타협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남의 인생 또한 너무도 쉽게 파괴해 버린다. 이것은 그대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의 동영상이 유포되면 사람들이 사실 관계를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단죄하고 결국은 그것이 보여지는 것과 아주 많이 달랐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듣게 되는가. 남는 건 그저 막말을 들을대로 들은 사건의 당사자의 치유할 길 없는 마음의 상처뿐이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건 모두 우리가 보여지는 것에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객관적 거리란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에 다름아니고 그건 또한 그 맥락을 살펴 타자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기에 나 자신의 사유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의 본능은 그것을 피하려 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멀리 있는 아프리카인들은 도우면서도 막상 우리 눈 앞에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아프리카인은 피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의 현존 자체가, 보여지는 얼굴 자체가 우리에게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존재에 대한 사유의 참여를. 하지만 그건 단순한 사유의 참여만은 아니다. 사유란 어디까지나 타자의 존재를 고려하고 그에 맞춰 배려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그의 처지에 대한 책임도 어느정도 나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유란 책임을 나눠받는 일이다. 환경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현 환경에 대해 사유를 하게되면 자연히 그 보호의 당위를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서 내가 할 것을 떠올려 보게 된다. 사유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책임을 떠 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귀찮은 것이다. 그런데 사유란 바로 그 이유로 해서 타인을 구원하는 행위가 된다. 책임이란 나의 중심이 아니라 바로 그 타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관심 가지기'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테마가 되고 그러한 관심을 가지기 위해 코벤은 의혹과 불신을 내내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바로 그러한 태도 때문에 웬디 타인스와 헤터스 크림스타인은 결정적으로 사람들은 구원한다.

 

  여기서 다시금 저 앞에서 인용한 이 소설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보면 이제야 그 문장이 왜 하필이면 그렇게 쓰였어야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 첫 문장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파멸될 것을 알면서도 연다.' 물론 댄 머서는 자기 예상 그대로 그 문을 여는 바람에 파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걸려 온 전화 때문이다.  이 상황이 중요하다. 그는 문에 대해 의혹과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열었다. 열었던 이유는 누군가로 부터 걸려온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 때문이었다. 이 연결이 코벤의 핵심이다. 왜 의혹과 불신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타자에게로 연결되는 관심이기에 그렇다. 때문에 이 의혹과 불신의 문은 중요한 등장인물 모두에게 존재한다. 여주인공 웬디 타인스에게는 음주운전으로 자기 남편을 치여 죽여버린 아리아나 나스브로란 의혹과 불신의 문이 있다. 소아성애자에게 자신의 딸을 희생당한 에드에겐 댄 머서라는 의혹과 불신의 문이 있다. 웬디는 그 문 앞에서 나스브로가 계속 보내오는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읽으며 '이 여자가 정말로 내게 용서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정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는 것일까? 줄곧 의심하고, 에드는 '댄 머서가 정말 무죄일까? 혹시 교묘한 협잡으로 혐의를 벗은 것은 아닐까?' 줄곧 의심한다. '용서할 수 없는'은 이러한 의혹과 불신이 마치 씨줄날줄처럼 엮이어진 태피스트리와도 같다. 결정적으로 실종된 헤엘리 멕웨이드가 그 모든 것을 대변한다. 오래전에 이유없이 실종되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모르는 존재인 헤일리 맥웨이드는 마치 9.11을 껴안아버린 미국과도 같이 에식스 카운티를 내내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들이 무관심했기에 잃어버린 존재를 내내 환기시킨다. 즉 타자에 대한 관심이 없이는 사회조차 안정될 수 없음을 지속적으로 상기키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들의 방'에선 죽음이란 영원한 상실로 사회에 죄의식을 통해 타자의 관심을 촉발시켰던 것이 '용서할 수 없는'에 이르러서는 '실종'으로 바뀐 까닭이다. 죽음은 종국적 결말이지만 실종은 영원한 의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타자에게로 뻗어나갈 수 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웬디 타인스도 문득 느낀 댄 머서에 대한 의혹 때문에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에드 역시 똑같은 이유로 댄의 진실을 찾기위해 추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노력이다. 의혹과 불신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노력한다는 것은 참으로 수고스럽다. 때문에 코벤은 댄 머서에게 다시금 '결백'의 맷 헌터와 같은 과거를 심어준다. 의혹과 불신 속에서 타인에 대한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삶과 똑같기 때문이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헤일리 맥웨이드에 대한 부채는 그렇게 댄 머서에게 보여지듯 개인화 된다.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에 대해 그러한 부채를 지고 에드 역시 그렇다. 모두 보여지는 것을 쉽게 타협한 대가로 짊어지게 된 부채(Debt)였다. 결정적으로 코벤은 타자에 대한 이러한 부채감을 느끼는 게 옳다고 본다. 댄 머서처럼 타자에 대해 그러한 부채감을 느낄 때 우리는 보여지는 것에 쉽게 사유의 타협을 하지 않으며 그 진실을 알기 위해 의혹과 불신을 도구로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헤일리 맥웨이드에 관한 진실도 그 노력을 그냥 쉽게 포기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지 않았는가?

 

 할런 코벤은 우리가 부정적 태도라고 여겼던 의혹과 불신을 전혀 새롭게 보기를 제안한다. 그건 물론 지금의 현실이 한 개인이 그 진실 여부를 판독하는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진실과 거짓이 뒤범벅된 정보들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보들은 타자에 대한 지식들을 전하고 있지만 우리의 사유하기를 기피하는 습성은 편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믿으려 한다. 사실 그게 마음 편하게 쉽게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에게 코벤은 타인을 부채(Debt)로 여길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는 의혹과 불신은 필연적인 태도라고 설득한다. 이것은 사실 '결백'이 빠뜨린 부분이었다. 코벤은 그 공백을 다시금 새롭게 '결백'을 반복하면서 채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을 차례대로 보아야지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다시한 번 반복하는 바이지만 지금 '용서할 수 없는'을 들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고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을 것을 감히 제안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번째 ''THE WOODS'가 필수적인데 그것도 빨리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7-3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고 대단한 글이라... 일단 감탄부터 하고 찬찬히 읽을게요~ ㅎㅎ

오드득 2012-08-01 00:03   좋아요 0 | URL
할런 코벤이 하고 있는 이 작업이 개인적으로는 나름 중요한 것 같아서 오랜만에 마음먹고 써 봤어요^ ^
소이진님의 감상이 어떨지 정말 궁금해지는데요. 나중에 살짝 귀뜸해줘요^ ^

호빵 2012-07-30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이 헤르메스님의 글을 읽은다면 코벤에 한층더한 호감을 느낄것도 같네요.

오드득 2012-08-01 00:04   좋아요 0 | URL
오옷! 호빵님 감사합니다.^ ^
코벤이 팬으로서 정말 기쁘기 그지없는 말씀이세요^ ^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과학편집광의 비밀서재
릭 바이어 지음, 오공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읽는 것도 먹는 것과 같다.

 어떤 책들은 지루해서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듯 읽게 되지만 또 어떤 책들은 너무도 재밌어서 숟가락으로 떠 먹는 것도 성에 안차서 숫제 주걱으로 퍼먹듯 읽게 된다.

 

 역사 속 발견과 발명의 순간에 일어났던 자잘한 일들을 소상히 알려주는 책,

 릭 베이어의 '과학편집광의 비밀서재'는 내게 있어 후자 쪽에 속했다.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연금술과 성경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서 그 자리에서 보너스 페이지의 마지막 유명인들의 특허까지 다 읽어버렸다. 그만큼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도록 재밌게 쓰여진 책이기도 하지만 마치 알사탕을 한 개씩 까먹듯 한 알 한 알 새롭게 드러나는 과학적 발견 발명에 얽힌 사연들이 달콤한 흥미로움으로 자꾸만 뒷 얘기들을 읽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새삼 릭 베이어가 다큐멘터리쪽 뿐만아니라 글에도 무척 재능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릭 베이어는 역사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법한 작가다.

 

 

 

릭 베이어의 모습

 

 

 무엇보다도 '라이트 형제의 도전'이 있고 각 종 상을 수상하여 더욱 그를 유명하게 만든 미국 혁명이 일어난 그 첫 순간을 다룬 '혁명이 시작된 날'이라는 다큐멘터리도 있으니까. 그 중 특이한 것으로 'Timelab 200'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건 역사 속에 일어난 200가지 사건들을 모아 만든 다큐멘터리로 지금 말하고 있는 책인 '과학편집광의 비밀 서재'는 바로 이것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릭 베이어는 그 'Timelab 200'을 기초로 하여 죽 분야별로 계속 써오고 있는데 그렇게 2003년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알아두면 좋을만한 놀라운 이야기를 묶어 'The Greatest Stories Never Told'를 2003년에 썼었고 그 뒤 2005년엔 잘 알려지지 않은 대통령들의 놀라운 일화를 다룬 'The Greatest Presidential Stories Never Told'를 썼었으며 바로 그 뒤이어 나온 것이 2007년 'The Greatest Science Stories Never Told', 즉 '과학 편집광의 비밀 서재' 이 책인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과학 이야기가 '과학 편집광의 비밀 서재'라는 제목으로 바뀐 내막을 잘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제목 그대로 이 책엔 모두 100개의 잘 들어보지 못했던 놀라운 과학 이야기가 실려 있다.

 

 

 

 

워낙에 역사 지식에 있어 해박하기로 유명한 작가인데다가 독자의 관심을 잡아 두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 또한 탁월하기에 100여 가지의 이야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또한 각 이야기마다 새로이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 지적 만족 또한 채워준다. 아마도 이 책이 아니었다면 여성들이 세상을 지배해야 이 사회가 멸망당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러한 젊은 여성들을 대변할 강력한 영웅 캐릭터로 원더우먼을 창조한 사람이 바로 최초로 거짓말 테스트 방법을 만들어 그 때문에 거짓말 탐지기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마스턴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윌리엄 마스턴이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창조한 최초의 여성 슈퍼 히어로 원더우먼.

사진은 영원한 원더우먼의 히로인인 린다 카터가 TV시리즈에서 원더우먼으로 변신한 모습.

 

 

 또한 최초의 기계식 컴퓨터가 사실은 에디슨의 백열전구 보다 50년 앞서 발명되었다든지 최초의 인터넷은 무려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일어났던 해인 1969년에 이미 비밀리에 탄생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또한 청진기는 사실 신사 체면으로 여자 가슴에 바로 귀를 대로 들을 수가 없어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도 지금은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대 관람차가 사실은 1893년 컬럼비아 박람회 때 파리 박람회 때 만들어진 에펠탑을 능가하기 위해서 의욕적으로 만들어진 전시물이었다는 사실 또한 몰랐을 것이다. '과학편집광의 비밀 서재'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정확한 제목이 된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과학에 편집광적이지 않았다면 찾아낼 수 없었을 사실들로 가득하니까 말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그런 즐거움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뷔페에 갔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만 가득 나와있는 기쁨을 느낄만한 그런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또래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 - 소속감에 대한 열망이 만들어낸 사회 치유의 역사
티나 로젠버그 지음, 이종호 옮김, 이택광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에게 2PM 이전에 우람한 근육으로 무장한 짐승남들의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해 준 영화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 '300'이었다. 그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수만명의 페르시아 대군을 막아내었던 역사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을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을 보면서 사실 궁금했던 것 하나가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용맹하다고 하나 그래도 겨우 300에 불과한 그들이기에 엄청난 숫자로 몰려오는 대군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면 두려움에 젖어 싸움을 피한다거나 몸을 사리게 될만한데 그 누구도 제 한 몸 살자고 뒷 걸음질 치지 앟고 오히려 혹시나 자기가 동료들보다 뒤질세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과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군령이 엄한 것도 아니었다. 전투에 임하는 것을 전사들의 자의에 대부분 맡겨두고 있는데도 그들은 한결같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싸웠다. 때문에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보였다. 바로 전사들이 바라보는 동료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자기 주위의 동료들 모두가 하나같이 두려워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 앞다투어 전장으로 달려나가 싸우고 있으니 설마 정말 겁먹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주위의 분위기상 그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오히려 더욱 그러한 두려움을 자기 혼자만 느꼈다는게 수치스러워서 그것을 끊어내듯이 일부러 더 세차게 창을 휘둘러 대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사람은 알게 모르게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참 많이 받는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표나지 않게 두루두루 섞이는 걸 더 선호하는 한국인은 더욱 그렇다. 그만큼 우리들은 속한 분위기를 무시하기가 어려운데 바로 그러한 주위 분위기로 부터 받는 압력, 즉 같은 동료들로 부터 받는 압력을 바로 '또래 압력(PEER PRESSURE)'이라 부른다. 일종의 '사회적 압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사람이 이것을 무시하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이 속한 또래 집단에서 인정받고 동화되는 과정에서 이탈할 경우 생기는 소외감과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러한 '또래 압력'은 왕따나 이지메와 같은 현상과 맞물려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지되어 왔다. 사실 이 '또래 압력'에 대한 불편한 시선은 사실 사트르트에서 부터 있어왔다. 솔직히 사르트르는 타자를 자신이 진정한 주체로 있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 같은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검은 얼굴 하얀 가면'을 썼던 프란츠 파농이 알제리 해방을 의논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새벽에 찾아왔다는 이유로 거절한 적도 있었다. 또래 압력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와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답게 되는 것을 막고, 내가 뭔가를 향해 뻗어나가고 싶을 때마다 가로막는 벽 같은 것으로...

 

 하지만 그 시각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 나왔다. 그것이 바로 '뉴욕타임스'의 저널리스트로 유명하 티나 로젠버그의 '또래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JOIN THE CLUB)'라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붙은 제목 그대로 '또래 압력'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효과에 주목하는 책이다. 바로 그 긍정적인 효과를 그냥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책이 아니라 오로지 실제적인 사례들로써 독자로 하여금 충분히 공감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티나 로젠버그는 단적으로 그 '또래 압력'이 정말 커다란 '사회적 치유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동료 압력이 사람들을 나쁜 상황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면 반대로 나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미국의 저소득층 주택단지에 찾아가 어머니와 할머니들에게 자식을 키우면서 무엇이 가장 두려우냐고 물어보라. 아마도 친구라고, '우리 애는 착한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서 문제(어쩌면 우리나라 부모들의 대답과 이렇게도 한결같은지...)'라고 답할 것이다. (...) 우리 모두는 나쁜 치구들의 꾐에 빠진 착한 어린아이다. 너무나 강력하고 나쁜 힘을 발휘하는 또래압력은, 더 강한 또래압력만이 제압할 수 있다. 함께 몸무게를 재고, 함께 수학 문제를 풀고, 함께 축구를 하고, 함께 장난 전화를 하고, 함께 체포를 당하고, 각자 준비를 한 음식을 함께 먹게 하는 또래압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명줄의 형태는 너무도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구명줄의 반대편에 누가 서 있느냐이다. (P. 491)

 

 사실 이 말은 티나 로젠버그가 책을 끝내면서 한 말이다. 그런데 이 책과 여정을 함께 한 우리들에게 이 말은 정말로 설득력있게 들린다. 이 구명줄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누군가를 정말 온기를 지닌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그러한 온기를 가질 수 있도록 티나 로젠버그는 남아공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에이즈를 성공적으로 퇴치했으며 사루바이라는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가 어떻게 사람들을 모아 설득시키고 굳건한 카스트 제도를 서서히 허물어뜨려 가는지 또한 텍사스 주의 주립대학들에서 소수 인종들이 그동안 불리했던 수학과 과학 교과에서의 성적을 어떻게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가는지 더우기 그토록 잔혹한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의 독재체제 아래서도 굴하지 않고 결국은 그 정권을 무너뜨린 오트포르가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냈는지 바로 그 모든 것의 바탕에 '또래 압력'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곁의 타인들이 나를 방해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나와 함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동료들로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바로 그러한 시각의 중요성, 그렇게 타인들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바로 오트포르가 보여준다. 오트포르는 티나 로젠버그가 또래 압력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결국 이 책까지 쓰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밀로셰비치 정권 아래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간 리더였는데 티나 로젠버그가 그를 주목한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운동이 기존의 정치 운동과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기존의 민주주의 운동가들은 정당을 형성하지만, 오트포르는 파티를 벌였다. 사람들이 즐기려고 물 좋은 바에 가듯이 신나게 즐기려고 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마로비치는 말했다. "우리는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내요. 우리의 운동은 쟁점이 아니라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거에요. 멋진 삶에 관한 거죠. 우리는 정치를 신나는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P. 15)

 

 이들은 기존의 민주화 운동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벼웠다. 이념에 대한 학습도 없고 굳건한 조직력도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오트포르의 운동은 기존의 정치 운동이 할 수 없던 걸 해냈다. 밀로셰비치는 결국 이 운동에 굴복했다. 가벼웠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오래 지속할 수 있었다.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많이 뻗어갈 수 있었다. 조직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대등하게 참여하여 오히려 더 굳건해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트포르가 전파한 것은 정치란 것이 삶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자각이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정치란 게 별게 아니고 다름이 아니고 그렇게 자신의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 자체가  바로 정치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정치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사실 이러한 오트포르의 운동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나는 꼼수다'이다. 오트포르의 운동을 정의하는 특성들은 사실 '나는 꼼수다'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사안이다. 오트포르가 즐기면서 참여하기를 바랐듯 나는 꼼수다도 호쾌하게 웃으며 또는 낄낄거리며 참여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오트포르가 여기 함께한 많은 이들이 모두 당신의 동료들이며 그러니 밀로세비치 앞에서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 말했듯이 '나는 꼼수다'도 쫄지 말것을 선포한다. 아마도 최근 두 번의 선거동안 젊은이들의 투표율이 그나마 증가한 것은 바로 '나는 꼼수다'가 일으킨 '또래 압력'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오트포르가 밀로셰비치를 무너뜨렸듯이 '나는 꼼수다'는 결정적으로 서울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또래 압력'은 비단 딴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곁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최근에 가장 인구에 회자되던 신조어 중의 하나에 '국개론'이 있다. 이 단어는 사회의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만한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데도 그저 모르쇠하고 무비판적으로 그 가해자들에게 변함없이 지지를 보내는 이들을 경멸을 담아 부르던 말이었다. 이건 단적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타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박노해는 어느 에세이에선가 말했지만 때로 사람이란 그 어느 것보다 절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존재임을 그동안 우리는 내내 경험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번의 통진당 붕괴를 초래하고 있는 이석기나 김재연이 그렇고 그들은 제명시키는 듯 하다가 막판에 변절해 국민들에게 또 한 번 커다란 고통을 안겼던 녹색연합 출신의 김제남이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서 나날이 사람에 대해 절망감만 키워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나 로젠버그는 바로 그러한 우리의 시각이 어쩌면 자생할지도 모를 희망을 짓밟는 성급한 처사임을 일깨운다. 문제는 조급하게 보편화시키지 않는 것. 그들의 사례를 일반의 사례로 보지 않는 것. 그것이다.

 

 산드라 블록과 휴 그렌트가 나왔던 영화 '투 윅스 노티스'라는 영화가 있다.

 거기서 산드라 블록은 진보적 변호인으로 휴 그랜트는 돈 만 아는 자본가로 나온다. 한 장면에서 둘은 다툰다. 그러다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산드라 블록은 이렇게 말한다.

 

 

 

 "이 봐요,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엉망인 사람이에요!"

  그러자, 휴 그랜트가 이렇게 반박한다.

 "말도 안 돼요!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 봤어요?"

 

  맞다. 휴 그랜트의 말대로 우리는 사실 모두를 만나보지 않았으면서도 너무도 쉽게 단정을 짓는다. 사람들이 다 이러이러하다고. 행동경제학에서 사람들을 정의하기를 대단한 이야기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먼저 정답을 정해놓고 모든 사실들을 그에 맞춰 꾸민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가 사고 싶은 가방이 두 개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하나 같이 마음에 들어 선뜻 선택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주 동전 던지기 같은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그럴 때 대부분은 사실 더 선호하는 게 있지만 그것이 선뜻 선택할만큼 아주 뛰어나지가 못해서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동전 던지기로 마음 먹는 걸 도우려는 것이다. 그런데 뜻밗에 동전이 자신의 더 선호하는 것을 정해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그 동전이 나오는 대로 조금 덜 마음에 드는 걸 사는가? 천만에. 아닐 것이다. 당신도 나도. 우리는 그럴 때 똑같은 반응을 한다.

 

 동전을 다시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속삭인다. 원래 처음엔 다 연습이잖아... 하면서...

 그런데 또 동전이 배신하면?  다시 던진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가방이 나올 때까지 동전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사람의 머리속엔 이런 편리한 핑계와 변명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면서 스스로 합리적이라는 위안을 얻는다. '국개론'에 작용되는 매커니즘도 똑같다. '국개론'이란 진창으로 들어가서 그 아래에 정말 무엇이 있는지 헤집어보기 보다는 그냥 바깥에서 보이는 대로 믿고 싶어한다. 그게 사실 더 편하기 때문이다. 먼저 '국개론'이란 정답을 내려놓고 거기에 맞춰 모든 근거들을 모은다. 그러면서 스스로 합리적이라 위안을 얻는다. 말하자면 티나 로젠버그는 우리들에게 이런 것을 일깨운다.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저 나의 감정적 반응의 소산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휴 그랜트의 대사대로 우리는 모두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이렇다 저렇다 쉽게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른다. 왜 그렇게 할까?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받은 감정적인 상처를 그를 통해 보상받기 위해서이다.

 

  '또래 압력'의 긍정적인 힘을 말하는 이 책은 그러한 시선의 교정을 가져오는 소중한 경험이다. 내가 남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의 궁극에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게 만든다. '일체유심조'라고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에서 깨닫고 말씀하셨지만 그건 타인을 바라보는 눈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할 희망의 존재가 되는가 아님 차마 내 손을 내밀지 못할 절망의 존재가 되는가 그 해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그런 말이다. '또래 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는 궁극적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 긍정의 온기를 더 담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