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 - 소속감에 대한 열망이 만들어낸 사회 치유의 역사
티나 로젠버그 지음, 이종호 옮김, 이택광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에게 2PM 이전에 우람한 근육으로 무장한 짐승남들의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해 준 영화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 '300'이었다. 그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수만명의 페르시아 대군을 막아내었던 역사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을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을 보면서 사실 궁금했던 것 하나가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용맹하다고 하나 그래도 겨우 300에 불과한 그들이기에 엄청난 숫자로 몰려오는 대군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면 두려움에 젖어 싸움을 피한다거나 몸을 사리게 될만한데 그 누구도 제 한 몸 살자고 뒷 걸음질 치지 앟고 오히려 혹시나 자기가 동료들보다 뒤질세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과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군령이 엄한 것도 아니었다. 전투에 임하는 것을 전사들의 자의에 대부분 맡겨두고 있는데도 그들은 한결같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싸웠다. 때문에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보였다. 바로 전사들이 바라보는 동료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자기 주위의 동료들 모두가 하나같이 두려워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 앞다투어 전장으로 달려나가 싸우고 있으니 설마 정말 겁먹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주위의 분위기상 그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오히려 더욱 그러한 두려움을 자기 혼자만 느꼈다는게 수치스러워서 그것을 끊어내듯이 일부러 더 세차게 창을 휘둘러 대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사람은 알게 모르게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참 많이 받는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표나지 않게 두루두루 섞이는 걸 더 선호하는 한국인은 더욱 그렇다. 그만큼 우리들은 속한 분위기를 무시하기가 어려운데 바로 그러한 주위 분위기로 부터 받는 압력, 즉 같은 동료들로 부터 받는 압력을 바로 '또래 압력(PEER PRESSURE)'이라 부른다. 일종의 '사회적 압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사람이 이것을 무시하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이 속한 또래 집단에서 인정받고 동화되는 과정에서 이탈할 경우 생기는 소외감과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러한 '또래 압력'은 왕따나 이지메와 같은 현상과 맞물려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지되어 왔다. 사실 이 '또래 압력'에 대한 불편한 시선은 사실 사트르트에서 부터 있어왔다. 솔직히 사르트르는 타자를 자신이 진정한 주체로 있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 같은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검은 얼굴 하얀 가면'을 썼던 프란츠 파농이 알제리 해방을 의논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새벽에 찾아왔다는 이유로 거절한 적도 있었다. 또래 압력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와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답게 되는 것을 막고, 내가 뭔가를 향해 뻗어나가고 싶을 때마다 가로막는 벽 같은 것으로...

 

 하지만 그 시각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 나왔다. 그것이 바로 '뉴욕타임스'의 저널리스트로 유명하 티나 로젠버그의 '또래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JOIN THE CLUB)'라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붙은 제목 그대로 '또래 압력'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효과에 주목하는 책이다. 바로 그 긍정적인 효과를 그냥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책이 아니라 오로지 실제적인 사례들로써 독자로 하여금 충분히 공감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티나 로젠버그는 단적으로 그 '또래 압력'이 정말 커다란 '사회적 치유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동료 압력이 사람들을 나쁜 상황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면 반대로 나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미국의 저소득층 주택단지에 찾아가 어머니와 할머니들에게 자식을 키우면서 무엇이 가장 두려우냐고 물어보라. 아마도 친구라고, '우리 애는 착한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서 문제(어쩌면 우리나라 부모들의 대답과 이렇게도 한결같은지...)'라고 답할 것이다. (...) 우리 모두는 나쁜 치구들의 꾐에 빠진 착한 어린아이다. 너무나 강력하고 나쁜 힘을 발휘하는 또래압력은, 더 강한 또래압력만이 제압할 수 있다. 함께 몸무게를 재고, 함께 수학 문제를 풀고, 함께 축구를 하고, 함께 장난 전화를 하고, 함께 체포를 당하고, 각자 준비를 한 음식을 함께 먹게 하는 또래압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명줄의 형태는 너무도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구명줄의 반대편에 누가 서 있느냐이다. (P. 491)

 

 사실 이 말은 티나 로젠버그가 책을 끝내면서 한 말이다. 그런데 이 책과 여정을 함께 한 우리들에게 이 말은 정말로 설득력있게 들린다. 이 구명줄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누군가를 정말 온기를 지닌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그러한 온기를 가질 수 있도록 티나 로젠버그는 남아공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에이즈를 성공적으로 퇴치했으며 사루바이라는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가 어떻게 사람들을 모아 설득시키고 굳건한 카스트 제도를 서서히 허물어뜨려 가는지 또한 텍사스 주의 주립대학들에서 소수 인종들이 그동안 불리했던 수학과 과학 교과에서의 성적을 어떻게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가는지 더우기 그토록 잔혹한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의 독재체제 아래서도 굴하지 않고 결국은 그 정권을 무너뜨린 오트포르가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냈는지 바로 그 모든 것의 바탕에 '또래 압력'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곁의 타인들이 나를 방해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나와 함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동료들로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바로 그러한 시각의 중요성, 그렇게 타인들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바로 오트포르가 보여준다. 오트포르는 티나 로젠버그가 또래 압력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결국 이 책까지 쓰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밀로셰비치 정권 아래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간 리더였는데 티나 로젠버그가 그를 주목한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운동이 기존의 정치 운동과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기존의 민주주의 운동가들은 정당을 형성하지만, 오트포르는 파티를 벌였다. 사람들이 즐기려고 물 좋은 바에 가듯이 신나게 즐기려고 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마로비치는 말했다. "우리는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내요. 우리의 운동은 쟁점이 아니라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거에요. 멋진 삶에 관한 거죠. 우리는 정치를 신나는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P. 15)

 

 이들은 기존의 민주화 운동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벼웠다. 이념에 대한 학습도 없고 굳건한 조직력도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오트포르의 운동은 기존의 정치 운동이 할 수 없던 걸 해냈다. 밀로셰비치는 결국 이 운동에 굴복했다. 가벼웠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오래 지속할 수 있었다.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많이 뻗어갈 수 있었다. 조직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대등하게 참여하여 오히려 더 굳건해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트포르가 전파한 것은 정치란 것이 삶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자각이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정치란 게 별게 아니고 다름이 아니고 그렇게 자신의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 자체가  바로 정치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정치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사실 이러한 오트포르의 운동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나는 꼼수다'이다. 오트포르의 운동을 정의하는 특성들은 사실 '나는 꼼수다'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사안이다. 오트포르가 즐기면서 참여하기를 바랐듯 나는 꼼수다도 호쾌하게 웃으며 또는 낄낄거리며 참여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오트포르가 여기 함께한 많은 이들이 모두 당신의 동료들이며 그러니 밀로세비치 앞에서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 말했듯이 '나는 꼼수다'도 쫄지 말것을 선포한다. 아마도 최근 두 번의 선거동안 젊은이들의 투표율이 그나마 증가한 것은 바로 '나는 꼼수다'가 일으킨 '또래 압력'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오트포르가 밀로셰비치를 무너뜨렸듯이 '나는 꼼수다'는 결정적으로 서울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또래 압력'은 비단 딴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곁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최근에 가장 인구에 회자되던 신조어 중의 하나에 '국개론'이 있다. 이 단어는 사회의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만한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데도 그저 모르쇠하고 무비판적으로 그 가해자들에게 변함없이 지지를 보내는 이들을 경멸을 담아 부르던 말이었다. 이건 단적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타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박노해는 어느 에세이에선가 말했지만 때로 사람이란 그 어느 것보다 절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존재임을 그동안 우리는 내내 경험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번의 통진당 붕괴를 초래하고 있는 이석기나 김재연이 그렇고 그들은 제명시키는 듯 하다가 막판에 변절해 국민들에게 또 한 번 커다란 고통을 안겼던 녹색연합 출신의 김제남이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서 나날이 사람에 대해 절망감만 키워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나 로젠버그는 바로 그러한 우리의 시각이 어쩌면 자생할지도 모를 희망을 짓밟는 성급한 처사임을 일깨운다. 문제는 조급하게 보편화시키지 않는 것. 그들의 사례를 일반의 사례로 보지 않는 것. 그것이다.

 

 산드라 블록과 휴 그렌트가 나왔던 영화 '투 윅스 노티스'라는 영화가 있다.

 거기서 산드라 블록은 진보적 변호인으로 휴 그랜트는 돈 만 아는 자본가로 나온다. 한 장면에서 둘은 다툰다. 그러다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산드라 블록은 이렇게 말한다.

 

 

 

 "이 봐요,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엉망인 사람이에요!"

  그러자, 휴 그랜트가 이렇게 반박한다.

 "말도 안 돼요!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 봤어요?"

 

  맞다. 휴 그랜트의 말대로 우리는 사실 모두를 만나보지 않았으면서도 너무도 쉽게 단정을 짓는다. 사람들이 다 이러이러하다고. 행동경제학에서 사람들을 정의하기를 대단한 이야기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먼저 정답을 정해놓고 모든 사실들을 그에 맞춰 꾸민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가 사고 싶은 가방이 두 개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하나 같이 마음에 들어 선뜻 선택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주 동전 던지기 같은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그럴 때 대부분은 사실 더 선호하는 게 있지만 그것이 선뜻 선택할만큼 아주 뛰어나지가 못해서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동전 던지기로 마음 먹는 걸 도우려는 것이다. 그런데 뜻밗에 동전이 자신의 더 선호하는 것을 정해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그 동전이 나오는 대로 조금 덜 마음에 드는 걸 사는가? 천만에. 아닐 것이다. 당신도 나도. 우리는 그럴 때 똑같은 반응을 한다.

 

 동전을 다시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속삭인다. 원래 처음엔 다 연습이잖아... 하면서...

 그런데 또 동전이 배신하면?  다시 던진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가방이 나올 때까지 동전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사람의 머리속엔 이런 편리한 핑계와 변명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면서 스스로 합리적이라는 위안을 얻는다. '국개론'에 작용되는 매커니즘도 똑같다. '국개론'이란 진창으로 들어가서 그 아래에 정말 무엇이 있는지 헤집어보기 보다는 그냥 바깥에서 보이는 대로 믿고 싶어한다. 그게 사실 더 편하기 때문이다. 먼저 '국개론'이란 정답을 내려놓고 거기에 맞춰 모든 근거들을 모은다. 그러면서 스스로 합리적이라 위안을 얻는다. 말하자면 티나 로젠버그는 우리들에게 이런 것을 일깨운다.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저 나의 감정적 반응의 소산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휴 그랜트의 대사대로 우리는 모두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이렇다 저렇다 쉽게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른다. 왜 그렇게 할까?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받은 감정적인 상처를 그를 통해 보상받기 위해서이다.

 

  '또래 압력'의 긍정적인 힘을 말하는 이 책은 그러한 시선의 교정을 가져오는 소중한 경험이다. 내가 남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의 궁극에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게 만든다. '일체유심조'라고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에서 깨닫고 말씀하셨지만 그건 타인을 바라보는 눈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할 희망의 존재가 되는가 아님 차마 내 손을 내밀지 못할 절망의 존재가 되는가 그 해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그런 말이다. '또래 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는 궁극적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 긍정의 온기를 더 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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