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식스 카운티는 할런 코벤의 고향이지만 정작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은 코벤을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그가 쓰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는 유명작가라고 해도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코벤의 소설들이 에식스 카운티의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리는데

 아주 커다란 일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 확실하게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아니면 적어도 많은 이들에게 에식스 카운티는 살기에 별로 좋지 않은 곳이란 인상을 심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은 이 사실을 의심스러워하며 내게 증명을 요구할 것이다.

 그럼, 나는 그 근거를 이렇게 말하며 내세울 것이다.

 2005년에 나온 '결백' 부터 지금 나온 '용서할 수 없는'까지 에식스 카운티를 무대로 쓰여진 일련의 코벤 소설들을 한 번 떠올려 보라고...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근거 같은가? 하지만 당신도 읽어보면 이 근거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할 것이다.

 

 

 

 

 2005년에 나온 '결백' 부터 시작해 지금의 '용서할 수 없는'까지 내내 공간적 배경이 에식스 카운티로 동일하므로 내 개인적으로는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이라고 부른다. 굳이 크로니클이라 붙이는 이유는 공간적 배경도 동일하지만 등장인물들까지 다른 작품에 겹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아들의 방(2008)'에 나왔던 가족을 만들어 정착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검사가 기억나시는지? 그의 이름은 '코프'인데 사실 그는 '아들의 방' 바로 전작인 2007년에 나온 'THE WOODS'의 주인공이었다. 그 작품을 읽으면 코프 검사가 왜 결혼을 두려워하는지 단적으로 알게 되는데 (그래서 사실은 '아들의 방'보다 먼저 번역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다면 '아들의 방'은 더욱 풍부하게 독해되었을테니까) 때문에 '아들의 방'에서 코프 검사가 보여주는 모습은 사실 그가 'THE WOODS'를 거치면서 성장했으며 '아들의 방'의 주제와 관련하여 어떤 치유의 단계에까지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아들의 방'에서 범인을 추적했던 형사 로렌 뮤즈 역시 이 작품에 코프의 협력자로 그대로 등장한다.(아니, 그녀는 이미 '결백'에서 부터 계속 나오고 있다.) 사실 그 때문에 ''THE WOODS'와 '아들의 방'은 강한 연작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이번에 나온 '용서할 수 없는'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 역시 바로 전작이 되는 '아들의 방'과 등장인물 몇 명을 공유한다. 물론 코프 검사와 뮤즈는 나오지 않는다.(뮤즈가 사라지고 그녀의 역할을 웬디 타인스가 이어받게 된 것에서 이 '용서할 수 없는'이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코벤이 바라보고자 하는 작품임이 드러난다.) 이번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등장인물은 '아들의 방'에서 여형사 뮤즈를 괴롭혔던 그러다 결국 된통 당했던 프랭크 트레몬트 형사와 변호사로서의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주인공 티아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충고했던 기계처럼 냉정하지만 그래서 능력이 뛰어난 변호사 해스터 크림스타인이다.

 

  "당신은 내가 이룩한 업적을 존경했다고 했죠? 헤스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

  "난 가족을 갖지 않기로 선택한 거에요. 그 점도 존경하나요?"

  "그건 존경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건 당신의 선택도 마찬가지죠. 난 변호사로서의 경력을 선택했고 이 업계를 벗어나지 않았어요. 따라서 지금은 경력이 쌓인 만큼 윗자리에 올라선 거고요. 하지만 말년에 가서는 잘생긴 의사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들이 기다리는 안락한 집으로 돌아갈 순 없겠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아들의 방, P. 35)

 

 왜 하필 이 둘이 '용서할 수 없는'에 또 나오게 된 것일까? 그건 물로 코벤이 이 작품을 통해 다루려는 주제와 상관있다.

 

 이렇게 사실은 그의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같은 배경과 공유하는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주제에 조금씩 변화를 줘가면서 이끌어가는 시리즈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트완 드와넬 연작'을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400번의 구타'에서 시작해 '앙트완과 클라네' '도둑맞은 키스' '침대와 탁자' 그리고 '달아난 사랑'으로 이어지는 이 연작 시리즈는 '400번의 구타'에 출연하여 '앙트완 드와넬'을 연기했던 배우 장 피에르 레오의 실제 나이에 맞춰 진행된 성장 이야기다. 말하자면 앙트완 드와넬의 삶 자체를 실제 나이대로 담아낸 여정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드와넬의 위치를 에식스 카운티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코벤의 이 시리즈인 것이다. 그래서 '크로니클'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주연배우 장 피에르 레오 : 세월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그건 그렇고 아직 코벤이 왜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로 부터 환영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지 거기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건 이렇다.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에서 코벤이 보여주는 인물들의 모습 때문이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내내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라고 거듭 상기시켜주기에 그렇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했고 오래도록 알고 지내와 다 안다고 생각했던 아내나 남편들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사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나 남들에게 절대 들켜서는 안되는 오래전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존재임이 드러나고 그들의 이웃 또한 평상시에는 더 없이 친근하고 완벽하게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사는 듯 보였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마치 이제까지의 모습이 깡그리 거짓이었다는 듯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공격적 악의와 상상을 뛰어넘는 범죄로 범벅이 된 모습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에식스 카운티는 곧이 곧대로 믿고 살다간 언제 어느 때 밤길을 걷다가 뒤통수를 맞게될 지 모를 그런 예측불가능으로 넘쳐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이 에식스 카운티에 정착하려 들겠는가? 여기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연인, 혹은 한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아야 하는 이웃 모두를 '혹시나' 하는 의혹과 '어쩌면' 하는 불신의 눈으로 계속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러니 당연히 부동산 가격은 하루가 멀다하고 하락할 수 밖에!

 

  아마도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은 할런 코벤의 신작을 읽을 때마다 틀림없이 "이런, 또!" 하는 기분으로 책을 부르르 움켜쥐었을 것이다. 에식스 카운티에 베포된 '용서할 수 없는'은 또 얼마나 주민들의 악력 테스트용이 되었을까? 때로 운명은 아무리 책이라 하더라도 가혹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주민들이야 읽다가 분노로 쓰러지든 말든 코벤은 에식스 카운티를 한결같이 이렇게 그린다. 그 어떤 문마다 그 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예측불가능한 비밀들이 무한히 움트고 있는 곳. 그래서 웃으며 인사하다가도 헤어지면 바로 내 등에다 칼을 맞을 수도 있는 곳. 한 마디로 만연된 예측 불가능으로 인해 생존을 위해서는 불신과 의혹이 자기 존재의 한 부분이 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거기서는 아무리 안정되어 보이는 현재라 하더라도 끝없이 의심과 불신을 가져야만 살아남는다. 유원지에 흔히 있는 거울의 미로에 들어간 것과도 같이 보여지는 모두를 순전히 믿다간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남과 세계를 의혹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한 일이다. 행동경제학을 창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이제는 우리에게도 유명해진 '생각에 대한 생각'을 쓴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에 따르면 애초부터 우리의 정신은 여지없이 게으른 존재라고 한다. 즉 원래 우리 정신이란 자체가 따지고 드는 것을 귀찮게 여기도록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그러니 의심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아무리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하긴 직업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지만 늘 우리는 거기로 부터 해방되기를 꿈꾼다. 사유란 것도 마찬가지다. 그냥 관두고 싶어진다. 무턱대고 보이는 대로 믿고 싶어진다. 사람들에게 자주 혀를 치게 만드는 '냄비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도 결정적으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끓어올랐다가 쉽게 식는다. 정치에 대한 분노도 마찬가지다. 관심도 분노도 지속적인 사유를 먹고 살아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의 사유란 지속되기에 힘이 든다. 흔히 한국인들은 '무임승차 욕구'가 강하다는 핀잔을 듣는다. 그냥 누리려고만 할 뿐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걸 한국인들만의 특유한 현상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걸 인정해야 한다. 그걸 마치 없는 듯 부정하고 오로지 정신 승리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어쩌면 내내 자기 꼬리를 무려고 달리는 강아지처럼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마치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본성을 극복해야 할 존재인 것 처럼 말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칸트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칸트가 진정한 인간다움을 '자유'에서 찾았을 때 그가 상정했던 자유는 이런 모습이었다. 동물적인 본능에서 자유로워 지는 것. 편하니까 그러고 싶은 것. 귀찮으니까 그만두고 싶은 것. 따지고 보면 동물적 본능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칸트는 거기에 인간다움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행해야 하니까 하는' 것에서 자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편해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편함에도 불구하고 사유함을 멈추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본 것이다. 칸트는 하지만 거기에 쉽게 굴복하는 인간을 또한 인정했기에 본격적으로 윤리를 말하는 실천 이성을 얘기하기 전에 그 보다 훨씬 두터운 '순수 이성'을 썼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다. '정신 승리'만 외치는 것에는 쉬이 귀를 열지 않는다. 지금 현실적 모습을 충분히 인정한 상태에서 솟아난 대안에 더 귀를 기울인다. 코벤이 '용서할 수 없는'에서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여기에 문이 또한 존재한다.

 

 

 여기의 문은 닫혀있다. 하지만 여기에 닫혀진 문은 그냥 닫혀진 문이 아니다. 그건 바로 내가 '닫아둔 문' 이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이 가지는 독특성이기 때문이다. 다소 무모하게 말하자면 이전까지의 작품들은 '닫혀진 문'에 관한 얘기였다고 할 수 있다. 문들이 모두 닫혀져 있었기에 예측 불가능성을 가져왔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의혹과 불신에 젖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얘기였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은 다른 질문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묻는다. 과연 그 문은 닫혀져 있던 것이냐고?

 

 그건 어쩌면 당신 스스로 일부러 닫아둔 문이지 아니었느냐고?

 

 그래서 코벤은 이 소설에서 문을 중요한 모티브로 가져온다.

 그건 소설의 첫문장에서 바로 드러난다.

 

 '그 빨간색 문을 열면 내 인생이 끝장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p.6)'

 

 그동안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에서 문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져왔다. 그 대부분은 그 뒷편에 뭐가 있는 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이었다. 바로 그 예측 불가능성을 가져오는 주요한 원인이 또한 비밀이었는데 그것이 비밀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대부분 깊이 감추어야 할 비밀이란 게 남들에게 결코 보여서는 안되는 어두운 욕망이거나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경쟁이 되는 상대방의 경각심을 최대한 허물어 뜨려야 하기 때문에 숨겨야 하는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문은 바로 그것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코벤은 이 소설에서 문에게 새로운 세번째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사유하기의 귀찮음 때문에 닫아둔 문의 모습이다. 과연 그 문은 그저 닫혀져 있기만 했던가? 혹시 내가 거기에 참여함으로 귀찮게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닫혀있는 것처럼 꾸미고 닫아둔 것은 아니었던가 묻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혹과 불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다. 외부로 부터 불러일으켜진 의혹과 불신이 아니라 나 자신이 포기해버린 의혹과 불신을 얘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동안의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의 소설들은 의혹과 불신을 없앤 진정한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천착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한다. 즉 의혹과 불신이야 말로 사실은 우리가 내내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원제 또한 사로잡히다라는 뜻의 'CAUGHT' 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코벤 스스로 그렇게 의혹과 불신에 사로잡힌 상태야 말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정보들이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이 현대 사회에서 그나마 제대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이상적 형태가 아닐까 보고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생각이 할런 코벤으로 하여금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의 첫 테이프를 끊었던 2005년의 '결백'을 다시 쓰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사실 이 '용서할 수 없는'은 '결백'을 다시 쓴, 일종의 '리-라이팅(RE-WRIGHTING)' 작품이다. 거기에 대한 근거는 이렇게 저렇게 많이 말 할 수 있지만 그랬다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그냥 이 정도로만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이 '에식스 카운티'를 무대로 한 소설들은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 (또! 강조하지만 그래서 'THE WOODS'가 빨리 나와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코벤의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그저 단순한 스릴러로만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프랑스의 발자크가 '인간 희극'을 쓰며 했던 것 또는 에밀 졸라가 '루공-마카르 총서'를 쓰면서 했던 것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정한 한 사회를 중심에 두고 그 한정된 시공간에서 인물들을 넘나들며 현대라는 보편이 무엇인지 모든 각도에서 담아내는 것. 그렇게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최근에 이르러 주목받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인 '로컬리티(locality)'의 여정이다.


 그 여정 속에서 유독 그가 담아내려 하는 것은 바로 '불안'이다. 안 그래도 하이데거가 현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근본적이 정서라고도 말한 바 있지만 그렇게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스마트 폰 처럼 늘 지니고 사는 것이다. 할런 코벤은 그 불안과 의혹을 계속해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크로니클을 통해서 그것을 사유하고 극복 가능한 대안을 추적한다. 그래서 크로니클의 각 작품들은 그 때 그 때마다 코벤이 도달한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결백'은 단순히 말하자면 레비나스가 말했던 '환대'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불안을 끊는 방법은 '내게 다가 온 타자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다만 포용하는 것 밖에는 없다'라고. 맷 헌터의 과거와 아내의 현재가 서로 겹쳐지며 코벤은 그것을 정말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여정이 계속된다는 건 그 종착지 역시 늘 수정되기 마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밤에 쓴 글을 아침에 읽어도 남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사람이듯이 시간이 흐르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때로는 그 그 사유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면서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로이 보게되기도 한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코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에게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타자란 어떤 타자인가? 우리는 보여지는 그대로를 믿을 수 있는가?" 지금처럼 많은 이들이 정보의 생산과 유통에 접근이 용이하다는 건 그만큼 거짓과 왜곡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얻는 정보란 대개의 경우 많은 타인들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발달한 요즘의 현대인들은 그만큼 사이보그라고 해도 좋다. 이제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 기계들로 인해 우리의 신경망은 아주 멀리까지 뻗을 수 있게 되었고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은 많이 확장되었지만 그만큼 나의 눈이 아니라 무수한 타인들에 의해 필터까 끼워진 채 보게되었다. 원본은 파악불가능하고 그만큼 진실을 가늠하기도 어려워졌다. 이번에 나온 '용서할 수 없는'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결백'에서 말했던 '환대'가 제대로 이루어지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그 조건들을 탐색하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이 새로운 '결백'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주인공이 되는 '용서할 수 없는' 댄 머서와 '결백'의 맷 헌터가 동일한 과거(역시나 스포일러상 여기까지만 말한다.)를 가지고 있음에서 드러난다. 왜 그 과거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인가? 바로 여기에 '용서할 수 없는'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다. 또한 바로 그 이유로 '아들의 방'에서 하필이면 프랭크 트레몬트와 해스터가 '용서할 수 없는'에 다시금 캐스팅 된다. 그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무엇보다 프랭크 트레몬트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들의 방'에서 어떤 형사였는가?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할런 코벤이 '아들의 방'과 '용서할 수 없는'에 쓰고 있는 동일한 모티브이다. 그건 역시 '보이는 대로 믿는다'이다. '아들의 방'에서 범죄자는 자신이 살해한 사람의 신분을 숨기려 시체를 위장한다. 그래서 사실은 평범한 주부지만 거리의 창녀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것으로 동기를 숨기고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프랭크 트레몬트가 걸려든다. 발견된 시체를 그저 창녀로만 여기고 별다른 수사없이 우연히 일어난 살인으로 단정지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깊이 생각하기 귀찮으니까 무턱대고 믿는 것. 흔히 일어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 작용을 무엇보다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기에 또 그로 인해 엄청난 실수를 하기 때문에 코벤은 다시금 '용서할 수 없는'에 기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듯이 '용서할 수 없는' 역시 비슷한 모티브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는'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것은 위장된 시체를 위장된 모습만 보고 창녀라 믿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그렇게 여주인공 고발 전문 리포터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가 어떤 인간인지 자세히 알려하지 않은 채 자기가 본 그 모습만 믿고 소아성애자로 고발해 버리고 사람들은 그 보도된 모습만 보고 그의 삶을 가차없이 파괴해 버린다. 이것은 댄 머서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웬디 타인스 역시도 댄 머서와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되는데 그 또한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나타난 것만 무턱대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아성애자로 부터 자기 딸을 희생당했기 때문에 소아성애자에게 증오를 품고 있는 에드 그레이슨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아들의 방'에서 보여준 프랭크 트레몬트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은가? 이렇게 할런 코벤은 보여지는 현상이 주는 실체의 장악력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새김질 시킨다. 사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사고적 버릇을 돌이켜 생각하도록 만들게 함이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것의 원본이 되는 프랭크 트레몬트는 이 소설에서 조금 변화를 보인다. 마치 전작에서 어떤 교훈을 크게 얻기라도 한듯이. 그러고보면 그 깨우침을 가져다 준 형사의 이름이 '뮤즈'인 것도 참 교묘한 설정이다. 뮤즈란 그리스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가져다 주는 존재로 흔히 칭송받던 신의 이름이었으니까. 정말 그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되었는지 프랭크 트레몬트는 소설에서 한 창녀의 죽음과 실종되어 버린 아이를 비교한다. 여기서 코벤이 다시금 창녀의 시체를 언급하는 것은 '아들의 방'에서 프랭크 트레몬트가 보여주었던 모습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그랬던 그가 그 5 페이지 뒤에 이르는 성찰에 이를 정도로 변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바로 그 트레몬트의 자각이 이 소설이 정말 말하고픈 핵심이다.

 그 5 페이지 뒤에 이루어지는 성찰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그게 죽은 창녀와 헤일리 맥웨이드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피부색이나 제정상태나 어떤 집에 사느냐가 아니라 항상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는지, 슬픔에 젖은 남겨진 가족이 있는지, 예전 상태로는 도저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지의 여부가 그 차이를 결정하는 법이다.('용서할 수 없는'  P. 163)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트레몬트와 같이 동반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는 변호사 헤스터 크림스타인이다. 코벤은 작은 조연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첫 등장을 아주 주의깊게 설정했는데 이러한 용의주도함이 바로 이 인물이 사실은 코벤이 이 책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주제를 집약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성공한 변호사이자 많은 이들로 부터 이기기 위해서라면 도덕 관념 따위 집어던져 버리는 평가까지 받는 크림스타인은 텔레비젼 법정 리얼리티 쇼의 진행자로 소설에서 첫 등장한다. 이는 이 소설의 여 주인공 웬디 타인스가 TV 리포터라는 점에서 비슷하고 그래서 의미심장해 보이는 설정인데 거기서 재판장으로 연기하는 크림스타인은 의뢰된 사건을 실제 재판처럼 다룬다. 그런데 거기서 보여주는 모습은 웬디 타인스와 전혀 반대이다.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에 관련된 인터넷 제보, 그리고 그와 관련해 자신이 본 모습 그대로를 믿었지만 헤터스 크림스타인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그 맥락을 이해하려 하고 누구로 부터 보여진 사실이 아니라 그녀가 알아낸 객관적 사실에 맞추어 판단을 내린다. 마치 크로키 하듯이 쓱 지나간 이 장면은 나중에 에드 그레이슨을 변호할 때 더욱 확장되어 드러난다. 그녀는 경찰이 제시한 증거가 아무리 정황상 타당해 보여도 오히려 그 '정황상'을 의심의 근거로 여기며 끝까지 제대로 된 객관적 진실이 드러날 때 까지 파헤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코벤은 정말 감탄할만한 전개로 이 내용을 상세히 보여준다. 그러는 이유는 물론 단 하나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기 때문이다.  바로 형사 트레몬트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던 '결정적인 차이는 항상 관심을 가져주는 존재의 있고 없고에 있다' 이것 말이다. 크림스타인이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이 말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코벤은 왜 이러한 자세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것은 물론 대니얼 카너먼의 말대로 우리는 사유하기를 귀찮아하며 그래서 쉽게 보여지는 현실에 타협해 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냥 귀찮으니까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댄 머서와 웬디 타인스가 겪는 비극에서 보여지듯이 그 귀찮음이 불러오는 타협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남의 인생 또한 너무도 쉽게 파괴해 버린다. 이것은 그대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의 동영상이 유포되면 사람들이 사실 관계를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단죄하고 결국은 그것이 보여지는 것과 아주 많이 달랐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듣게 되는가. 남는 건 그저 막말을 들을대로 들은 사건의 당사자의 치유할 길 없는 마음의 상처뿐이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건 모두 우리가 보여지는 것에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객관적 거리란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에 다름아니고 그건 또한 그 맥락을 살펴 타자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기에 나 자신의 사유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의 본능은 그것을 피하려 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멀리 있는 아프리카인들은 도우면서도 막상 우리 눈 앞에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아프리카인은 피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의 현존 자체가, 보여지는 얼굴 자체가 우리에게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존재에 대한 사유의 참여를. 하지만 그건 단순한 사유의 참여만은 아니다. 사유란 어디까지나 타자의 존재를 고려하고 그에 맞춰 배려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그의 처지에 대한 책임도 어느정도 나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유란 책임을 나눠받는 일이다. 환경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현 환경에 대해 사유를 하게되면 자연히 그 보호의 당위를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서 내가 할 것을 떠올려 보게 된다. 사유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책임을 떠 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귀찮은 것이다. 그런데 사유란 바로 그 이유로 해서 타인을 구원하는 행위가 된다. 책임이란 나의 중심이 아니라 바로 그 타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관심 가지기'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테마가 되고 그러한 관심을 가지기 위해 코벤은 의혹과 불신을 내내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바로 그러한 태도 때문에 웬디 타인스와 헤터스 크림스타인은 결정적으로 사람들은 구원한다.

 

  여기서 다시금 저 앞에서 인용한 이 소설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보면 이제야 그 문장이 왜 하필이면 그렇게 쓰였어야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 첫 문장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파멸될 것을 알면서도 연다.' 물론 댄 머서는 자기 예상 그대로 그 문을 여는 바람에 파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걸려 온 전화 때문이다.  이 상황이 중요하다. 그는 문에 대해 의혹과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열었다. 열었던 이유는 누군가로 부터 걸려온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 때문이었다. 이 연결이 코벤의 핵심이다. 왜 의혹과 불신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타자에게로 연결되는 관심이기에 그렇다. 때문에 이 의혹과 불신의 문은 중요한 등장인물 모두에게 존재한다. 여주인공 웬디 타인스에게는 음주운전으로 자기 남편을 치여 죽여버린 아리아나 나스브로란 의혹과 불신의 문이 있다. 소아성애자에게 자신의 딸을 희생당한 에드에겐 댄 머서라는 의혹과 불신의 문이 있다. 웬디는 그 문 앞에서 나스브로가 계속 보내오는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읽으며 '이 여자가 정말로 내게 용서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정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는 것일까? 줄곧 의심하고, 에드는 '댄 머서가 정말 무죄일까? 혹시 교묘한 협잡으로 혐의를 벗은 것은 아닐까?' 줄곧 의심한다. '용서할 수 없는'은 이러한 의혹과 불신이 마치 씨줄날줄처럼 엮이어진 태피스트리와도 같다. 결정적으로 실종된 헤엘리 멕웨이드가 그 모든 것을 대변한다. 오래전에 이유없이 실종되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모르는 존재인 헤일리 맥웨이드는 마치 9.11을 껴안아버린 미국과도 같이 에식스 카운티를 내내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들이 무관심했기에 잃어버린 존재를 내내 환기시킨다. 즉 타자에 대한 관심이 없이는 사회조차 안정될 수 없음을 지속적으로 상기키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들의 방'에선 죽음이란 영원한 상실로 사회에 죄의식을 통해 타자의 관심을 촉발시켰던 것이 '용서할 수 없는'에 이르러서는 '실종'으로 바뀐 까닭이다. 죽음은 종국적 결말이지만 실종은 영원한 의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타자에게로 뻗어나갈 수 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웬디 타인스도 문득 느낀 댄 머서에 대한 의혹 때문에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에드 역시 똑같은 이유로 댄의 진실을 찾기위해 추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노력이다. 의혹과 불신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노력한다는 것은 참으로 수고스럽다. 때문에 코벤은 댄 머서에게 다시금 '결백'의 맷 헌터와 같은 과거를 심어준다. 의혹과 불신 속에서 타인에 대한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삶과 똑같기 때문이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헤일리 맥웨이드에 대한 부채는 그렇게 댄 머서에게 보여지듯 개인화 된다.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에 대해 그러한 부채를 지고 에드 역시 그렇다. 모두 보여지는 것을 쉽게 타협한 대가로 짊어지게 된 부채(Debt)였다. 결정적으로 코벤은 타자에 대한 이러한 부채감을 느끼는 게 옳다고 본다. 댄 머서처럼 타자에 대해 그러한 부채감을 느낄 때 우리는 보여지는 것에 쉽게 사유의 타협을 하지 않으며 그 진실을 알기 위해 의혹과 불신을 도구로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헤일리 맥웨이드에 관한 진실도 그 노력을 그냥 쉽게 포기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지 않았는가?

 

 할런 코벤은 우리가 부정적 태도라고 여겼던 의혹과 불신을 전혀 새롭게 보기를 제안한다. 그건 물론 지금의 현실이 한 개인이 그 진실 여부를 판독하는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진실과 거짓이 뒤범벅된 정보들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보들은 타자에 대한 지식들을 전하고 있지만 우리의 사유하기를 기피하는 습성은 편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믿으려 한다. 사실 그게 마음 편하게 쉽게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에게 코벤은 타인을 부채(Debt)로 여길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는 의혹과 불신은 필연적인 태도라고 설득한다. 이것은 사실 '결백'이 빠뜨린 부분이었다. 코벤은 그 공백을 다시금 새롭게 '결백'을 반복하면서 채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을 차례대로 보아야지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다시한 번 반복하는 바이지만 지금 '용서할 수 없는'을 들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고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을 것을 감히 제안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번째 ''THE WOODS'가 필수적인데 그것도 빨리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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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3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고 대단한 글이라... 일단 감탄부터 하고 찬찬히 읽을게요~ ㅎㅎ

ICE-9 2012-08-01 00:03   좋아요 0 | URL
할런 코벤이 하고 있는 이 작업이 개인적으로는 나름 중요한 것 같아서 오랜만에 마음먹고 써 봤어요^ ^
소이진님의 감상이 어떨지 정말 궁금해지는데요. 나중에 살짝 귀뜸해줘요^ ^

호빵 2012-07-30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이 헤르메스님의 글을 읽은다면 코벤에 한층더한 호감을 느낄것도 같네요.

ICE-9 2012-08-01 00:04   좋아요 0 | URL
오옷! 호빵님 감사합니다.^ ^
코벤이 팬으로서 정말 기쁘기 그지없는 말씀이세요^ ^
더욱 분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