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코츠키의 경우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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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회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들에게 알려진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이지만 실은 1983년 부터 작품을 발표해 온 꽤나 연륜이 있는 작가입니다. 이제야 알려졌기에 그동안 꽤나 무명으로 있었나보다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미 93년에 그녀의 대표작이기도 한 '소네치카'로 세계문학계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기 때문이죠. 그녀는 그 때부터 문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미국의 타임지는 그녀를 유럽의 주요 상을 모두 휩쓴 러시아의 보석이라 불렀고 이웃 일본마저도 우아하게 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매우 러시아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소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인지도에 비해 사실은 뒤늦게 소개되었다고 해야겠죠.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려지게 되어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근데 이 수상 소식을 들으면서 조금 의아하지는 않으셨던가요? 도대체 러시아 작가와 박경리님의 작품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수상했을까 하구요. 저는 궁금하더군요. 물론 사실 그 때까지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과연 이 두 분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을까 궁금했던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읽게 되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한국 문학의 대모이신 박경리님과 러시아의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교차점을 알기 위해서 말이죠.

 

 

 

 읽고나니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야 말로 박경리 문학상에 걸맞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설들은 그야말로  러시아의 '토지'라 할 수 있는 소설들이었거든요. 박경리님의 토지 하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떠올리시나요? 암울해지는 역사적 상황과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굳세게 역경을 헤쳐나가는 강인한 여성상이 아닌가요? 그야말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초래한 파국으로 부터 역사와 사회를 구원하는 그런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던가요? 저는 그랬습니다. 저는 토지에게서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박경리님이 새삼 '토지'를 제목으로 가져온 게 아닐까도 생각했습니다. 토지란 바로 생명을 산출해내는 것, 그렇게 모성의 상징이기도 하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여신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말이죠. 이러한 여성성의 긍정과 구원으로서의 그 힘을 강조하는 것이 '토지'라고 한다면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설들 역시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알린 '소네치카'도 그렇고 그 뒤에 나왔던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이 책, 2001년에 러시아 부커상을 받아 그녀의 대표작이 된 '쿠코츠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자면 저는 일단 '소네치카'를 먼저 읽으시고 그 다음에 이 '쿠코츠키의 경우'를 읽을 것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왜냐하면 사실 이 두 작품은 꽤나 닮은 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야기가 한 가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여기에 있어서만큼은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하죠. 울리츠카야의 소설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전개되니까요. 그러므로 좀 더 세부로 들어가 그 닮은 점들을 살펴봅니다. 일단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유사합니다. 지적이지만 성격은 유약하며, 유럽 문명 세례를 받았고 그 때문인지 현실주의적이고 모든 가치에 회의적인 남자 주인공이 보다 러시아 전통적이며 성격은 강건하며 현실 보다는 이상을 그리고 고귀한 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주인공에 먼저 반하여 청혼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쿠코츠키의 경우'의 주인공 커플인 파벨과 엘레나는 그야말로 '소네치카'의 로베르토 빅토르비치와 소네치카의 판박이 입니다. 또한 그렇게 물과 기름 같은 성향이기 때문에 잘 섞이지 못하고 결국엔 불화하게 된다는 것도 유사합니다. 또한 새로이 변화하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그들의 딸 이름이 '타냐'인 것도 똑같습니다.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가진 성격도,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상대마저 음악가라는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열거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잔뜩 있지만 시간 절약을 위해 바로 결론으로 뛰어넘어가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사실 '소네치카'를 전혀 다른 쪽에서 접근해 본 소설이라고...

 

 '소네치카'를 읽고 이 작품을 보시면 바로 이 같은 변화를 여실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제안드려 보았습니다만 아무튼 이것은 제목에서 부터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소네치카'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었지만 '쿠코츠키의 경우'에서 쿠코츠키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소네치카가 여성 주체의 입장을 더욱 중심에 두고 쓰여졌다면 '쿠코츠키의 경우'는 남성 주체의 입장을 더욱 중심에 놓고 쓰여 진 작품인 것이죠. 즉 여성을 매개로 밟아갔던 궤적을 이번엔 남성을 매개로 밟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럼 작가 울리츠카야가 왜 하필이면 이렇게 하는 것인가가 궁금할 수 밖에 없죠.

 

 아시다시피 93년의 소네치카와 2001년의 쿠코츠키의 경우엔 시차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작가도 사회 속의 존재인 이상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문학이란 사회와 시대를 비쳐주는 거울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가리워진 시대의 진실을 찾고 그 진실을 통해 대안을 주려 한다면 더욱 동시대와 더불어 부대껴야 합니다. 다른 작가라면 모르겠지만 충실하게 러시아 리얼리즘을 고수해 온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니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의 대표작을 새로이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보려 했다는 것은 당시 러시아에서 발생한 상황의 여파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근거가 될만한 상황이 러시아에서 발생했었습니다.

 

 바로 9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러시아와 체첸 사이의 분쟁입니다.

 

 

      체첸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러시아의 공격에 초토화되어버린 체첸의 그로즈니 시

 

 

 

 아시다시피 러시아는 미국 이상으로 다민족 국가입니다. 거의 수천여개에 이르는 소수 민족이 있다고도 하죠. 레닌이 마르크시즘을 기반으로 한 소비에트라는 것을 형성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봉합되었던 민족 감정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소련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개방의 흐름을 타고 곳곳에서 분출되었습니다. 다수이자 늘 지배자적 위치를 점유해왔던 러시아 민족은 그러나 이를 두고 볼 수만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적 지위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치를 요구하는 타민족의 요구와 그들을 어떻게든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러시아 민족 사이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첨예화되어갔고 그러다 결국 화산처럼 터져나왔던 것이 바로 체첸분쟁이었던 것입니다. 작가 울리츠카야는 바로 이것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하나였던 러시아가 분열되고 그럴 뿐만아니라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살해하고 파괴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아야했던 것입니다. 흔히 진정한 작가는 시대적 양심을 지녀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작가는 시대의 아픔에 둔감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올리츠카야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녀는 체첸분쟁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서로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죽음과 파괴를 초래하는 이와 같은 비극이 러시아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생각이 실현된 것이 '쿠코츠키의 경우'였고 결국 러시아를 순진하게 긍정했던 '소네치카'는 다시 쓰여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네치카'와 '쿠코츠키의 경우'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점이 생겼습니다. 그건 바로 혈연으로 이루어진 유대관계가 '쿠코츠키의 경우'에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소설엔 같은 피를 나누었다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가 달라도 토마처럼 얼마든지 받아들여지며 또한 마지막에 가서 줴냐와 같은 혈연이 아니라서 거부했던 엘레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서 보듯이 혈연이 바탕이 된 관계만큼이나 공고합니다. 울리츠카야는 끊임없이 같은 부모라는 것, 같은 피라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곁에 있는 것, 함께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관계는 공고해지는 것이라는 걸 설득력있게 보여줍니다. 또한 그래서 울리츠카야는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바꼈습니다. '소네치카'의 빅토르비치와 '쿠코츠키의 경우'의 파벨은 앞서도 말했듯이 존재론적으로 유사하지만 둘이 자아내는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소네치카의 빅토르비치는 결국 소네치카와 결별하고 맙니다만 '쿠코츠키 경우'의 파벨은 병이 들어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엘레나를 끝까지 함께하면서 보살펴 주지요. 더구나 자기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파벨입니다. 반면 엘레나는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입니다. 문제는 소네치카와 엘레나가 똑같이 러시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울리츠카야는 엘레나를 톨스토이를 신봉하는 공동체 출신으로 설정함으로써 그녀를 사회주의 성립 이전의 전통적 러시아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사회주의가 성립되기 이전의 러시아일까요? 그것은 레닌이 다른 소수민족들을 소비에트 안으로 받아들이기전의, 그러니까 순수하게 러시아 민족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왜 엘레나가 그토록 같은 피가 아니라는 것에 반감을 나타내는지 우리는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엘레나가 바로 체첸분쟁을 일으킨 러시아 민족 우월주의를 나타내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 엘레나는 순진한 종교적 믿음으로 모든 것은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있어요. 가장 기본적인 진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십 분의 일, 아니면 천 분의 일의 진실이 있단 말이죠. 그리고 난 믿어요. 모든 사물이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p.74)"

 

 이렇게 말이죠. 이는 그대로 단순히 피일 뿐인데 그냥 피가 아니고 그 이상의 뭔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의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자체를 보지 않죠.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니까요. 그렇게 그들은 어떤 민족의 한 사람, 어떤 계급의 한 사람, 어떤 이념의 한 사람으로만 볼 뿐입니다. 그 민족, 계급, 이념 아래서 고유의 색깔로 빛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은 지워져 버립니다. 그저 어떤 민족, 어떤 계급, 어떤 이념의 지극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보통 명사로만 존재할 뿐...

 

 울리츠카야는 바로 이러한 엘레나를 통해 체첸분쟁의 원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로 보지 않고 자꾸만 그 위에다 이런 저런 의미를 갖다 붙이는 행태가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커다란 비극을 부르지 않았냐고 말이죠. 더이상 엘레나가 상징하는 순수한 러시아라는 것은 없다. 그저 모든 이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러시아가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외침을 들려주기 위하여 울리츠카야는 순수한 러시아를 여성성으로 형상화했었던 '소네치카'를 완전히 새롭게 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안 역시 바로 여기서 나타납니다. 단순히 말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죠. 뭔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전부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죠. 그래서 울리츠카야는 파벨을 중심에 세웠던 것입니다. 파벨은 의사입니다. 그런데 그에겐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스스로 '내면 투시'라 부르는 것으로 사람의 몸 속의 종양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 능력은 올리츠카야가 파벨이 어떤 사람인가 보여주기 위해 단적인 상징으로 쓴 것입니다. 그가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붙이지 않고 보이는 대로 그것만 믿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는 엘레나와는 달리 지금 보이는 존재 이상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피붙이가 아니어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데 상관없었고 엘레나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었습니다. 이 긍정의 모습으로 볼 때 울리츠카야가 그 대안으로써 파벨을 가져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안을 상징하는 인물인 '타냐'를 보면 이 책이 '타인을 있는 그 자체로만 보는 것이 비극의 반복을 막는 길이다'라는 주제를 가졌다는 것은 더욱 명확해 집니다. 타냐는 결국 세르게이라는 음악가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소설에서 가장 행복하고도 충실한 삶을 누리다 생을 마감합니다. 타냐가 그런 생애를 사는 동안 그녀는 내내 음악과 같이 있습니다. 마치 울리츠카야가 이런 식으로 음악이 바로 구원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 같이 말이죠. 그런데 음악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실 음악이야 말로 그 자체로 밖에는 만날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요? 다른 그 어떤 것도 그 이상의 의미로 부가될 수 없는 그렇게 그 순간에 귀로 들려오는 음과의 직접적이고도 순수한 만남만이 전부인 게 음악이 아닐까요? 이렇게 울리츠카야는 타냐를 통해 음악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그녀가 파벨을 통해 전하려는 주제를 더욱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를 하려 합니다. 이렇게 보아온 대로 '쿠코츠키의 경우'는 체첸 분쟁으로 터져 나온 시대적 아픔에 울리츠카야의 작가적 양심이 반응한 결과요 성찰한 산물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천 개에 이르는 러시아 곳곳에 분포된 다양한 민족들은 지배와 배쳑의 대상이 아니라 모두가 '러시아'라는 하나의 집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심합니다. 같은 존재라는 아무런 기반이 없는데 과연 그게 성공적으로 지속될 수 있게냐고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 울리츠카야는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파벨과 타냐 그리고 줴냐와 엘레나의 관계를 통해 응수합니다. 관계라는 것은 어떤 공통의 근거를 가져야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지속될 수 있다고. 우리가 같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그러지 못하는 것은 타인을 의심부터 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의심부터 하고 보니까 그 의심을 지워줄 근거를 찾게 되고 그래서 민족이니 지연이니 하는 것들이 그 존재 자체보다 눈에 더욱 크게 들어오는 것이라고. 그러니 있는 그대로 그냥 믿으라고. 어차피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으니 그냥 믿고 받아들이라고. 그러면 파벨과 타냐처럼, 줴냐와 엘레나처럼 오래도록 그 관계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파벨과 타냐 그리고 줴냐가 가졌던 그 존재 자체로의 긍정이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쿠코츠키의 경우'에는 바로 이러한 울리츠카야의 진심이 들어있습니다. 시대적 현실의 아픔을 내면의 성찰로 길러낸 끝에 나온 것이기에 그 진심은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심은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도 들어야 할 목소리 입니다. 우리들 역시도 비정규직이나 직업 또는 학연이나 지연등 보이는 존재 이상의 것으로 원래의 존재는 지워버리고 그 이상의 의미로만 규정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요.  그로 인해 가해지는 차별과 받게 되는 아픔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만연해 있음을 생각한다면 더욱 귀기울여 할 목소리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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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묵에게 소설이라는 것은... 시작은 '소설과 소설가'로 부터...

 

 

 

 

 

 

  오르한 파묵이 자신이 바라보는 소설의 의미와 자신은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에 대해 말하는 책, '소설과 소설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소설은 두번째 인생이다"


 미국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소설의 완성도는 그 첫 문장에서 결정된다고 말한 바 있지요. 그만큼 작가에게 있어 첫 문장이란 첫 소설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있을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한 파묵이 자신의 문학관에 대해 말하는 자리에서 저렇게 시작했다는 것은 스스로 소설이라는 것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독자들에게 역시도 한 권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 순수한 내면적 진실의 발로로써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니까 오르한 파묵에게 있어 소설이란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사실을 말이죠. 


 오르한 파묵이 그동안 쓴 작품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물은 역시 '책'입니다. 스물 여덟 살 때 발표한 데뷔작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서 부터 책에 대한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나옵니다. 더구나 그 책은 그저 단순한 하나의 사물로 그친 적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책'들은 막혔던 인생의 활로를 열어주거나 아니면 아예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야말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책'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는 세번째 작품 '하얀 성'에서 보듯이 아예 '새로운 인생'이란 말 자체까지 넣어가며 이를 강조해 왔습니다. 오르한 파묵에게 있어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소설가이니 소설을 좀 더 팔아보려고 독자들에게 소설의 위대성을 심어주기 위해 불어넣는 거짓 환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건 진실입니다. 그것도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입니다. 오르한 파묵의 개인적인 삶을 살펴보면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습니다. 그것도 감성과 지성에 있어 한창 예민하던 시절에 말이죠. 그는 사랑이 필요했으나 그 어디서도 그것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기의 그림자만 벗하고 살아가는 고독한 나날이 펼쳐졌습니다. 그 때 파묵을 위로하고 보듬어 안아 주었던 것은 오로지 '책'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는 보르헤스가 말했던 책으로 가득한 '바벨의 도서관'에 틀어박힘으로 불우한 시기를 건너온 것입니다. 그리고 책은 그렇게 파묵이 익사하지 않고 건너올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파묵이 책의 힘을 긍정하지 못할 이유란 없습니다. 이혼이 초래한 고독의 나날들 속에서 어둠과 절망만이 가득했던 자신의 삶에다 책이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파묵은 존재하지 않았을테니까요.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깨달음이기에 저렇게 첫문장으로 소설이 두번째 인생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지만  소설 '새로운 인생'에서는 반전되는 믿음...

 

                                                     

 

 

 

  다섯번째 작품, '새로운 인생'은 그러한 파묵의 깨달음이 전면적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오스만이라는 한 젊은이가 '새로운 인생'이란 책을 통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져 버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책을 통해 새로운 삶과 사랑에 눈 뜨지만 결국에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가질 수 없었던 좌절과 안타까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네? 이런 말이 이상한가요? 오르한 파묵의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책이 가져다 준 인생을 새롭게 여는 힘에 대하여 말하는 책이라면서 어떻게 기쁨과 희망이 아니고 좌절과 안타까움으로 끝나냐구요? 그런 결말이라면 차라리 그 힘을 불신하는 것이라고 해야되지 않느냐구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앞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자면 분명 이 작품 자체는 그에 대한 반론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먼저 그걸 단적으로 보여드리죠. 처음 오스만이 '새로운 인생'이란 책을 읽었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P. 9)


 놀랍게도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오르한 파묵은 첫 문장에서 부터 단적으로 이렇게 선언해 버립니다. 그리고 주욱 나중에 그 책을 지은 것으로 밝혀지는 철도원 르프크 아저씨의 죽음을 말할 때까지 책이 가져다 준 새로운 힘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감격은 꾸준히 계속됩니다. 한 장에 걸쳐서 그러한 감격을 말하고 있는 1장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 그리하여 책이 가진 힘의 최종적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나는 빛의 나라에서 떠돌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P. 27)


 빛이 상징하는 모든 것이 책이 오스만에게 가져다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상징하는 진실, 빛이 상징하는 긍정 그리고 빛이 상징하는 구원. 책은 오스만에게 이 모든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집약된 결정체라고도 할 만한 책과 함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또 하나의 경험이라 할 수 있을 사랑 또한 가져다 줍니다.


 이렇게 소설 초반은 책에 대한 긍정, 보다 자세히는 소설에 대한 긍정으로 시작됩니다. 오스만은 그 힘을 충실히 믿으며 오르한 파묵이 '소설과 소설가'에서 되도록 가까이 하지 않으면 좋을 두 유형의 독자중 하나의 유형이기도 한, 소설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다 믿는 '소박한 신자'가 되어 소설에 나오는 세계를 진짜 세계라 믿고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단적인 상징과도 같은 여인, 자난의 사랑을 획득하려 애를 씁니다. 오르한 파묵이 피해야 할 유형의 독자로 분류했던 것을 오스만의 외양으로 선택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러한 오스만의 소망은 우려대로 역시 쉬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조차 모르는 '크레타의 미궁' 속을 거니는 것과도 같은 상황만 이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후반에 이르러 오스만은 이렇게 고백하지요.


 그러니 독자여, 그다지 섬세하지도 못한 나 같은 인물을 믿지도 말고, 나의 고뇌나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의 폭력성도 믿지 말라. 오직 이 세계가 잔인한 곳이라는 사실만을 믿어라. 그리고 서양 문명이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 소설이라는 이 새로운 장난감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이 페이지들에서 독자들이 듣는 나의 목소리가 이토록 격한 이유는 내가 책으로 오염되고 거대한 사고들로 인해 저속해진 수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외국에서 들여온 장난감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배회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P. 322)


 그야말로 책의 힘을 순전히 믿었던 자신을 부정하는 말이지 않나요? 300여 페이지가 넘는, 시간적으로 는 수년에 걸친 여정을 끝낸 뒤에 그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게 된 것은 지독한 혼란 밖에는 없다고.


 그는 이제 소설을 포함한 텍스트를 불신합니다. 순진한 신도에서 회의와 의심으로 가득찬  불신자가 된 것이죠. 또한 오르한 파묵이 경계하라고 했던 두 유형 중의 하나이기도 한 '전적으로 성찰적인 독자'가 된 것이기도 합니다. 책에 나온 내용을 전혀 곧이 곧대로 믿지 않으며 언제나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만을 파악하려 애쓰는 독자 말이죠. 결국 오스만 신뢰 가득한 빛의 제국에서 불신의 창살로 가로막혀져 있는 자기만의 어두운 골방으로 추락해버린 것입니다. 오스만은 오로지 '책'을 쫓다가('책'이 가진 진실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애쓰다가) 이렇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정말로 텍스트 자체를 아주 회의적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스스로 자신의 신념이여 밥줄이기도 한 '문학'을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고 걷어차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러한 반전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일까요? 도대체 오르한 파묵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오르한 파묵은 어떻게 역사를 끌어들이게 되었는가?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그리고 '고요한 집'에서 파묵이 느낀 한계

 

 

                                  

 



  자, 잠깐 진정하세요. 우리는 그 이유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르한 파묵이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불현듯 벼락이라도 맞았던 것 처럼 획기적인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전환이 아니라 그의 작품 여정이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나가는 가운데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당연한 '변화'였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첫 작품,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서 부터 다섯번째 작품 '새로운 인생'까지는 단적으로 책을 포함한 텍스트(푸코 식으로 하자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담론'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어가는 여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두번째 작품인 '고요한 집'까지 이어지던 텍스트가 진실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세번째, '하얀 성'에 이르러서는 터키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외부의 타자라 할 수 있는 서양에 의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네번째, '검은 책'에 이르러서는 붕괴되고 급기야 다섯번 째, '새로운 인생'에서는 저렇게 격노에 차서 지금까지의 모든 신뢰를 철회하기에 이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이 아무 이유없이 이루어졌을 리는 없습니다. 그럼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역사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번째 작품인 '고요한 집'에서 부터 역사가 서서히 들어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소설에서 중요한 화자 중 한 명은 역사가였죠. 거기다 그 역사가는 세번째 작품, '하얀 성'을 폐허와 같은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현대 터키어로 번역 해 출간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기점이 되는 '하얀 성'이 중세의 터키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이라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것 자체가 초기의 책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붕괴시킨 장본인이 바로 역사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역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왜 오르한 파묵은 역사를 끌여들어야 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터키의 현대사가 가지고 있는 혼란했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보게 됩니다. 터키의 현대사도 우리나라만큼이나 굴곡이 많았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오래도록 군부 독재도 겪었죠. 그 당시의 우리나라 작가들이 문학을 했던 것은 그 어둔 시대를 걷히게 해 줄 빛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건 오로지 그 시대가 어떤지 그 진실된 모습을 확인해야만 가능하므로 작가들은 리얼리즘적 기법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채록하려 했었죠.


 우리의 80년 '서울의 봄'과 같이 터키에서도 그러한 유화적 시기였던 82년에 나온 오르한 파묵의 첫 작품, '제브데트와 아들들'도 그러했었습니다. 군부의 독재가 가장 치열했던 5년 동안 파묵이 오로지 그 작품의 집필에만 매달리면서 하고자 했던 것은 오직 그 시대의 진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우리 작가들처럼 그 역시도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담기 위하여 리얼리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제브데트씨 가족을 중심으로 65년에 걸친 세월을 리얼리즘적으로 담았지만 터키가 가진 진실의 빛을 드러내기엔 뭔가 미진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다음 작품, '고요한 집'에서는 서술 스타일을 달리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다중화자를 도입하는 등 프랑스의 작가 로브 그리예를 비롯하며 현대소설적 기법을 적극 끌어들여 '고요한 집'으로 터키가 가지고 있는 진실을 담아내려 했었지만 역시나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건 고운 모래와도 같이 움켜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생각해야했고 거기서 얻은 한 가지 답이 바로 역사였습니다. 흔히들 터키를 유럽과 동양의 접점이라고 부르듯,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어느새 뒤섞어버린 터키의 혼합된 정체성 자체가 진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음을 역사를 도입함으로써 알게 된 것입니다.


 대상의 진실을 담기 위해서는 훗설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 역시도 순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대상의 순수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주체 역시도 순수하고도 단일한 정체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터키의 경우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미 바라보는 주체가 여러가지 다른 것들로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카펫으로 유명한 터키, 그렇게 정체성 역시도 이런 저런 것들이 교차된 직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성찰이 '고요한 집'의 다중화자로 나타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오르한 파묵 스스로 어떤 모순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터키만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진실을 드러내려 했으면서도 그 기법은 터키의 것이 아닌 서양에서 유래한 리얼리즘이나 현대 소설 기법들을 차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부터 말이죠. 아마 그러면서 분명히 느꼈을 것입니다. '도대체 터키만의 정체성이 있기는 한가? 이 서양이란 외부로 부터 유래된 기법들로 부터 벗어나 온전한 터키만의 것으로 담을 수 있는가?' 하고 말이죠.



 4. 드러나게 된 메워질 수 없는 간극... '하얀 성'...


 

                           

   

아마도 그것이 세번째 작품, '하얀 성'에서 터키인 호자와 이탈리아인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명확한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건 '하얀 성'에서 단적으로 드러나지요. 주인공과 호자가 서로의 문명적 지식과 서로의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가 대체가능할만큼 분리불가능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얀 성'으로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말이죠. 네, 제목에서 말하는 '하얀 성'은 파묵이 다가가고자 하는 터키가 가진 고유의 진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볼 수는 있어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보는 눈 자체가 그 순수한 진실을 획득할만큼 순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건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두고 저만치에 있습니다. '하얀 성'은 바로 그 간격의 긍정입니다.



 5. 그 메울 수 없는 간격의 끝에서... '새로운 인생'

 


 문제는 그 긍정 후의 삶입니다.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터키의 역사는 파묵의 소설이 간행되는 동안 변해왔습니다. 보다 안 좋은 쪽으로요. 터키와 쿠르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기 때문입니다. 84년 쿠르드족 만의 노동당이 출범하면서 터키와 쿠르드간의 갈등은 심해져 갔습니다. '하얀 성'은 그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습니다. 그 대립이 파묵에게 '하얀 성'과의 간격을 각인시킨 것이죠. 결국 터키는 92년 본격적으로 무력으로 쿠르드족 지역을 점령해 나갑니다. 이제 서양에서 침략 받는 대상이 아닌 침략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그렇게 터키는 고유의 것을 잃고 차츰 밀쳐내려 했었던 서양을 닮아나갔습니다. 그건 그대로 적극적으로 타인이 되려는 것과 같았죠.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되어 태어난 것이 바로 네번째 작품, '검은 책'입니다. 이건 당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절망의 기록입니다. '하얀 성'에서의 간격은 이제 더욱 넓혀지게 되는데 그건 그들 고유의 것을 이제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죠. 진실인 것도, 신뢰할만한 것도 없습니다. 파묵은 이제 그 부재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적어도 문학이 진실을 주고자 한다면 그건 어떤 진실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입니다. 글이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걸 철회하는 일. 글이 진실을 가지고 있음을 반박하는 작품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정말로 '새로운 인생'은 없습니다. 그가 이토록 책이 가진 힘에 대하여 공박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믿음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보든, 무언가를 읽든 그 이면에 진실이 있다고 상정하는 믿음 말입니다. 파묵이 깨달은 바 대로 우리의 눈 자체가 근대 이래로 형성된 서양의 인식론에 길들여진 탓인지 우리는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날 것 그대로로 보지 못합니다. 무언가 그 뒤에 어떤 것, 배후의 진실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보여지는 사물을 넘어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무언가를 상상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념' 같은 것을 말이죠. 민족도 포함됩니다. 터키와 쿠르드족의 갈등의 주요 요인은 민족 때문이니까요. '새로운 인생'에서 파묵이 공격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날 것 그대로의 우리를 보면 터키인이나 쿠르드족이나 다 같은 것을 왜 그 배후의 것을 가지고 이리도 반목하는 것인가? 사실 그 배후란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보다 나중의 작품 '눈'에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지요. 바로 이 때문에 파목은 '새로운 인생'에서 초기의 믿음을 완전히 폐기했습니다.



 6. 고유의 사물에게로...

     '내 이름은 빨강' 그리고 '순수 박물관'

 

 

                                    


 

 

 그러자 새로운 차원이 열렸습니다. 그 배후의 것을 보려고 하지 않자 사물 그 자체가 중요해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존재하는 나와 사물간의 직접적 관계 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사물들과의 직접적이고도 순수한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 박물관'을 파묵 스스로 만들었을만큼 사물 자체를 중요시 하는 것이 다음 작품 '내 이름은 빨강'을 기점으로 보다 전면적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섯번째 작품 '내 이름은 빨강'은 사물 자체가 육성을 가질 정도로 그것이 전면화된 작품이었죠. 물론 이러한 사물 중시의 모습은 '새로운 인생'에서도 드러납니다. 글로는 잡아낼 수 없는 인물의 핵심을 포착하기 위하여 그 주위를 둘러싼, 그 존재의 흔적이면서 그 기억이 새겨진 잔여물이기도 한 사물들이 나열되는 장면이 곳곳에서 개진되는 것이죠. 그렇게 그는 사물로 나아갔습니다. 사물들을 뒤에서 규정하고 그로 인해 더욱 사물들의 진실을 가려버리는 배후로 부터 사물들을 건져내고 그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사물만이 가진 고유의 연대기를 헤아리는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각자의 진실들이 그 자체만으로 무엇보다 중요하며 우선시 되는 파묵의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의 파묵이 다다른 곳은 그렇게 '순수 박물관'입니다. 파묵의 작품 여정 처음에서 회고해 보자면 그가 필연적으로 다다르게 될 곳이기도 했습니다.

 


 7. 타자와의 순수한 응시와 교감을 위하여...

 


 여기까지 숨가쁘게 오르한 파묵이 거쳐왔던 여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책을 읽고 난 뒤 제 나름의 생각이니 별로 구애받으실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통해서나마 부디 오르한 파묵을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리는 것은 지금 쿠르드족 문제는 다행히도 유화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만 아직도 우리에겐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가벼이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갈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세계적인 경기 불황으로 인해 가장 선진적인 문명 국가라는 유럽조차 외국인 혐오가 거세게 확장되고 있음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세계는 점점 타자에 대한 배척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어제도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습하여 무려 천 명이나 사상자를 내었었죠. 이는 존재하지도 않는 배후가 있다는 상상으로 오히려 실재하는 개체를 죽여나가고 있다는 파묵의 우려가 공연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더구나 사실 그들이 배후를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자기들 스스로 온전히 순수한 정체성의 소유자여야 합니다만 파묵이 '하얀 성'이나 '검은 책'에서 잘 보여준 것 처럼 사실 그러지도 못합니다. 이미 우리 모두는 그 고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을만큼 이리저리 혼합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집단으로서의 '나'가 아닌 순수한 개체로서의 '나'인 것입니다. 타인을 바라볼 때도 그 '집단' 속의 '너'가 아닌 보여지는 그대로의 순수한 개체로서의 '너'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르한 파묵이 '순수 박물관'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 고유의 연대기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통해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통해 시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대가 있고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있고 시대가 있는 것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현존하는 것과의 순수한 응시와 교감. 그것이야말로 타자를 대할 때 우리가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 개인적으로는 오르한 파묵의 여덟 권의 책이 놓여진 '순수 박물관'을 거닐면서 가지게 된 최종 결론 입니다. 차후에 오르한 파묵이 또 어떤 사유의 지점을 보여줄 지 궁금하고 당신이 그 책들의 박물관을 거닐면서 가지게 될 느낌도 궁금하군요. 그 순수한 응시와 교감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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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3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헤르메스님 정말 멋진 페이퍼예요.
저도 한강의 소설들로 이런 구성의 페이퍼를 써보려고 일단 계획은 중인데 잘 될 지는 모르겠어요. 헤르메스님보다 잘 쓰지 못할 것으로 생각은 드네요. 헤헤.

오드득 2012-12-01 00:41   좋아요 0 | URL
옷! 한강은 저도 참 궁금한 작가인데 소이진님이 쓰실 페이퍼가 그래서 저에게 참 유용할 것 같은데요. 얼른 써 주시길. 그리고 필력은 저보다 월등한 소이진님께서 엄살은 요~ 얼른 보게되기만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

프레이야 2012-11-3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이 페이퍼 별찜 해두고 읽어야겠어요.
일단, 소설과 소설가,부터 사야겠어요. 담아만 두고 여태.^^
좋은하루 보내세요^^

오드득 2012-12-01 00:43   좋아요 0 | URL
와! 프레이야님 감사합니다.^ ^
너무 개인적인 생각으로 파묵을 본 것은 아닌가 사실은 올리면서도 잔뜩 걱정했었는데 찜해서까지 읽으신다니 쓴 보람이 절로 나네요^ ^ 이렇게 기쁨을 주신 프레이야님도 좋은 주말 되세요^ ^

마녀고양이 2012-11-30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키는 정말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라고, 아주 예전부터 손꼽았지만
너무나 혼란스러운 점이 많은 나라인지라 과연 제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를 읽으면서 문득
현실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소설보다 더한 이야기 라는 생각을 합니다.
소설이란 우리가 너무나 엉켜붙고 혼란스러우며 모순적인 현실에 대한 답답함과 이해를 하고자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이 현실의 어떤 면과 닮아 있을수록 더욱 가슴을 치게 하는게 아닐까 싶어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물 자체가 중요해졌다는 말을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헤르메스님께서 쓰신 페이퍼를 보면 이 책들이 도전할만 하구나 싶은데
제가 실제로 해보니, 별로 쉽지 않더란 말이죠.. 아하하.

오드득 2012-12-01 00:47   좋아요 0 | URL
앗! 달여우님 들려주셨군요. 와락 환영합니다.^ ^
저도 꼭 가고 싶은 곳이 터키입니다. 가서 오르한 파묵을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겠구요. 하지만 현실은 느긋한 해외 여행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니 손가락만 쪽쪽 빨 수 밖에 없네요^ ^; 우와! 현실과 소설을 대비한 말씀 정말 공감합니다. 저도 오르판 파묵 덕분에 소설의 한계 같은 것을 더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아직 정리가 안 되서 어떻게 말씀은 드릴 수 없고 아무튼 좀 더 많이 배우게 되면 그 때 달여우님과 여기에 대해 꼭 나눠보고 싶네요. 그 때 가서 행여 징징거리더라도 내치지 말아주세요.^ ^


oren 2012-11-30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전혀 읽어보지 못했는데, 헤르메스님의 긴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그의 작품세계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 저같은 문외한에게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 헤르메스님의 긴 글을 읽고나서 제게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은 (꽤나 주제넘은 예단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순수한 개체로서의 너'가 결국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순수한 응시와 교감'으로부터 결국 나중에는 '타자와의 구분이 흐릿해지는 공감의 단계'로 나아가면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가 궁극적으로는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까지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드득 2012-12-01 00:53   좋아요 0 | URL
oren님 정말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나 모자라는 글을 과분하게 좋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역시 oren님의 말씀에 공감하며 파묵이 사물 자체로 순수하게 접근하려 함은 무엇보다 공감의 터전을 닦기 위한 것임을 첨언하고 싶네요. 결국 파묵에게서 중요해지는 것은 말씀대로 윤리가 아닐까 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새로운 인생'때 부터 결국은 윤리에 대해 말해오고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좀 더 생각해 볼 여지를 주셨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
 
일상의 인문학 -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그러니까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을 때였다.

  책 맨 앞 부분에 나와있는 '추천의 글'에서 반가운 이름 하나를 만났다. 그 이름이 바로 '장석주'였다. 학창시절에 한 번 만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보는 이름이라 일단 반가웠지만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장석주는 시인에다가 에세이스트로가 전부였기에 실례가 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바우만에 대한 추천 글을 쓸 정도가 되시나 하는 의구심이 생겼던 것이다. 하긴 그가 운영했던 출판사 '청하'가 펴냈던 책들을 떠올려 보면 장석주가 어느정도로 인문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지는 곧 드러나지만서도(그 중엔 한국 최초의 '권력에의 의지'번역을 비롯한 니체 저작들의 번역 출간도 있다.) 그래도 의혹의 그림자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가운데 읽어나갔다. 그러다 놀랐다. 내 의혹을 그대로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릴 정도로 그는 전문가 뺨 칠 정도로 꽤나 상세하게 현재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중의 한 사람을 분석할 수 있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상세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그 맥마저 짚어내고 있어서 더욱 놀라움이었다. 이 조우가 있었기에 그가 본격적으로 인문에 대한 얘기를 펼치고 있는 '일상의 인문학'이란 책의 존재를 알았을 때 선뜻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상의 인문학'은 일단 한 권의 책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 한다.

  그렇게 여기엔 무려 50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그 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서평집이 아니라는 의미다. 여기서 책은 그저 하나의 길잡이 역할만 할 뿐이다. 그러니까 강가의 나룻배와도 같이 하나의 상념이 타고 보다 너른 사유의 바다로 나아갈 매개물에 불과하다.

 

  장석주의 인문 스타일은 이른바 풀뿌리라고 할 수 있다.

  자양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쭉쭉 뻗어나가는 풀뿌리 처럼 그렇게 보다 깊은 사유를 이끄는 무언가가 있으면 사양 않고 촉수를 뻗어나간다. 그래서 처음에 시작했던 상념이 이런 저런 관계된 메타 텍스트를 거치고 돌아오면 이전의 상념들 보다 그 맛은 깊어지고 속은 더욱 알찬 장맛이 되어 돌아온다. 문제는 결코 그 어디든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일상의 인문학일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은 흔히 일상과 인문을 별개로 생각한다. 그렇게 인문이란 일상에서 빠져나와 상아탑 같은 곳에나 머무르면서 펼쳐지는 고담준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장석주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공격한다. 그리고 말한다. 일상이야 말로 인문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그는 책의 처음부터 인문학을 뜻하는 라틴어 후머니타스를 풀이하며 인문이라 다름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에서 필요한 통찰을 찾아내는 학문이라 말한다. 일상과 별개이거나 그걸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상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인문은 일상적 삶과 결부되어 있지만 제목의 의미는 단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작 문제는 그 통찰이 어디로부터 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인문은 어떻게 일상의 굳건한 벽을 허물고 틈을 내어 우리로 하여금 감춰진 진실을 보게 하는 것일까? 그 대답을 장석주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는 스타일로써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앞서도 말했듯이 어디로든 막힘없이 자유롭게 흐르는 사유의 물길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여나 그 끝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다시금 훌쩍 떠날 수 있는 사유의 여유로움이 진정한 인문 정신임을 그는 책에다 새긴 스타일 자체로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이란 정형화된 하나의 틀이다.

  우리는 자유로이 일상의 삶을 산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이미 근대 초기 부터 생성되고 규격화된 '일상적 삶'이란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조르주 아감벤 같은 이는 바로 이런 이유로 현대인들은 진정한 의미의 경험을 하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 철학에서 경험이란 어떤 정형화된 틀도 매개하지 않는 그저 직접적이고 순수한 감각만을 의미하는데 지금 현대인이 삶에서 겪는 경험의 대부분은 무엇보다 이미 굳건히 형성된 일상 생활 양식이라는 틀로 매개되어진 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결코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단적으로 우리의 삶이란 컴퓨터가 그러하듯이 단순히 프로그래밍대로 움직이는 것 뿐이다.

 

  인문이 힘을 잃게 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장석주가 보여주는 대로 인문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아무리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도 상대화시키고 그로 인해 보다 더 현명한 대안을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미리 주입된 프로그래밍에 따라 그저 움직이는 일상은 오히려 반복된 답습으로서 그저 강하게 머무르기만 할 뿐이다. 그 머무름의 관성에 우리는 너무도 길들여진 나머지 어느새 새롭게 바라보는 것 자체마저 피로를 느끼게 되어 늘 부단한 새로움 속으로 내모는 인문에 대해 거리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울듯이 제아무리 굳건한 일상의 틀이라 하더라도 항구히 머무를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사람은 주어진 상황을 스스로 되새길 수 있는 이성적 동물이므로 과연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하고 되묻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도 말했지만 인간 자체가 원래 해답이 하나 주어지면 얼른 그것이 해답이 아닐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는 존재다. 그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되묻는 존재, 언제나 그 너머를 생각하고 움직이는 존재, 물길이 막히면 그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돌아서 흐르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 자체가 어디서든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든 뚫고 헤쳐나가는 존재이기에 일상이란 결국 창살이 부서진 우리가 되기 쉬운 것이다. 듣기에 지금 우리나라는 인문학 열풍에 휩싸여 있다고 한다. IMF가 불러일으킨 돈으로 좌지우지 되는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이제 물질적 만족 보다는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그러한 열풍이 오게 되었단다. 그런데 거기서 삶의 질이란 무엇일까? 그건 보다 가치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과연 어떤 삶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게 있다. 그건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가치란 기존의 생각과 가치관을 모조리 지운 텅 빈 마음으로 순수하게 바라볼 때라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자유로움을 인문이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문을 필요로 하고 지금처럼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들은 나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찾고 있다. 거기에 어디서든 결코 머무르지 않으며 늘 훌쩍 벗어나 새로운 것을 조망하려는 이 일상의 인문학은 그 눈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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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물리학 - 과학은 인간의 일상과 운명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미치오 가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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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개봉한 영화 '토탈리콜'은 우리의 근 미래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거기에 신기한 것들이 참으로 많이 나온다. 이를테면 바퀴없이 날아다니는 자동차라든가 상하좌우 어디로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라든가 또는 아무런 지지대 없이 그냥 공중에 붕 떠 있는 건물들 같은 것들 말이다.

 

 

 

 

 

 

 뉴튼의 물리학 법칙 쯤은 가볍게 무시하는 이러한 것들은 그래서 우리의 눈길을 끌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리 미래라고는 하지만 과연 저런 것이 가능할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궁금증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어보일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냥 영화적 상상력 아니냐?' 하면서 치부해버리면 될 일을 현실적 가능성 따위나 운운하고 있으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솔직히 나 역시도 그런 치부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퀴없이 날아다니는 자동차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미래가 주 배경이 되었던 영화 '백 투 더 퓨쳐'의 속편에서도  본 바 있다. 그런데 그 '백 투 더 퓨쳐'가 속편에서 날아갔던 미래는 2015년으로, 지금으로부터 불과 3년 후다. 하지만 아직도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나올 가능성은 티끌만큼도 되지 않는다. 그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탈 수 있겠지 꿈꾸었던 아이들은 그 꿈이 깨어지는 아픔을 2015년으로 다가갈 수록 날마다 맛보아야 한다. '꿈을 꾸는 것과 실현하는 것은 다른 말이다.'라는 것을 미래를 다룬 영화들을 보면서 꿈을 꾸었던 꼬마들 만큼이나 뼈져리게 깨닫는 이들이 또 있을까?

 

 그러니 당연히 시니컬해질 수 밖에. 미래란 지금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며 영화에서 묘사되어지는, 모든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래의 모습이란 거짓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아직도 그런 걸 믿는 사람들이 행여나 주위에 있다면 기꺼이 어리석다고 얘기해 준다. 아마도 이러한 현실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니컬함이 'SF 소설이나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마저 결정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본래 SF가 추구하는 목적인 실현 가능한 미래 세계의 대안적 모델을 탐색하거나 검증하는 장르라기 보다는 그저 재미를 위해 실현성 없는 허황된 이야기만 일삼는 장르라는 것으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타트렉의 '트렉터 빔'이나 '텔레포테이션', 또는 스타워즈에 나왔던 '데스 스타'의 '행성파괴광선' 같은 것을 물리학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자가 있다면 '거 참, 할 일은 어지간히 없고 시간은 어지간히 많은 학자군.'하고 마냥 비아냥 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들 앞에서 오히려 당당하게 물리학의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 어떤 것이든 인류에게 있어  '불가능은 없다'라고 선언하는 과학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미치오 카쿠'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이런 말을 들어도 함부로 무시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 최고 물리학자 중의 한 사람이고 거기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평행 우주'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람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이 갈테니 하는 말이지만 그 내공의 경지로 볼 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근거없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것임을 쉬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로 'SF'에 나오는 그 어떤 기술이든지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될 것임을 믿으며 그 실현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한다. 그리고 그는 이미 그 태도를 '불가능은 없다'라는 책과 동명의 다큐멘터리로 증명한 바 있다. 때문에 우리는 미치오 카쿠의 그 진지하면서도 객관적인 고찰과 검증을 통해 또한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결코 꿈을 꾼다는 것과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 다른 말이 아닌 것임을!  2002년 한국 월드컵을 4강에 가게 했던 '꿈은 이루어진다' 캐치프레이즈 대로  'SF'란 허황한 환영이 아닌 실현 가능한 일들의 '예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토탈 리콜'의 원작자이기도 한 필립 K 딕은 한 단편에서 SF 작가들을 서슴없이 '예언자'로 부른 적이 있었는데 미치오 카쿠도 그렇지만 나 역시 이에 동감한다. 그러니까 이 '예언'이란 말에 포함된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는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실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루어지리라 믿고 끝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미치오 카쿠는 바로 그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언'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은 없다'나 이번 '미래의 물리학'에서 미치오 카쿠가 하는 말을 듣고 쉽게 그를 '너무 낙관적이다'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치오 카쿠는 '낙관'을 새로이 정의한다. 그러니까 그는 바라보는 대상을 가지고 낙관 혹은 비관인지를 가늠하지 않는다. 미치오 카쿠가 낙관 혹은 비관을 가늠하는 기준은 언제나 그 바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다. 다시 말해 미치오 카쿠가 낙관하는 것은 다가올 미래가 가진 낙관할만한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낙관인 것이다. 이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낙관이나 비관은 단순한 전망일 뿐이다. 문제는 전망은 언제나 실행이 뒤따라야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이다. 현실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은 머리 속 계산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이 행하는 실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낙관과 비관의 기준 역시 정작 있어야 할 곳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신뢰하느냐,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할 수 있느냐 바로 거기에 낙관과 비관을 결정하는 기준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미치오 카쿠는 '불가능은 없다'라고 낙관할 수 있다. 그는 믿고 있고 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없이 계속해서 연구하고 노력할 것임을 말이다. 그 신뢰의 근거 역시 전혀 허황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와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에 헌신하고 있는 전세계의 수많은 동료들로 부터 그 근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실용화 가능성이 없더라도(즉 아무런 실익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해야 할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말이다. 더우기 눈으로 보고 직접 나누는 대화를 통해 얻게 된 것이었기에 더욱 단단한 낙관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미치오 카쿠의 낙관이 사실은 인류 전체에 대한 신뢰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마 내가 미치오 카쿠의 책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바탕에 사람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미래의 물리학'을 단적으로 말하라면 일종의 '예언서'라고 하겠다.

 앞서 SF를 예언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예언'의 의미로 말이다. 그렇게 미치오 카쿠는 향후 100년에 우리들에게 찾아올 과학적 혁신을 모두 여덟가지 분야에 걸쳐 얘기해주고 있다. '평행우주', '불가능은 없다'에서 이미 보았듯이 여기에서도 논의되는 과학적 지식들은 매우 상세하지만 결코 어렵지 않다. 일반인들에게도 과학을 무엇보다 편안하고 쉽게 다가가도록 만드는 데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미치오 카쿠의 저력이 '미래의 물리학'에서도 다시금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래서 난 영화 '토탈 리콜'이 그리는 세계가 그리 허황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정작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러한 것들이 가능한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왜 자동차가 바퀴없이도 비행할 수 있고 건물들이 아무런 지지대 없이도 공중 부양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 세계가 더 허황되게 여겨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화 속 세계가 그렇게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 과학적 이론에 기반해 세워져 있음을 이 '미래의 물리학'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 세계가 바로 자기력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것을 말이다. 미치오 카쿠는 이 책의 5장 '에너지의 미래'에서 인류가 자기력을 지배하면 어떤 세상이 우리에게 닥쳐오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거기서 미치오 카쿠가 보여줬던 세계가 바로 그대로 '토탈 리콜'의 세계였다. 물론 빈부와 계급의 격차가 심한 정치적 상황은 빼고 순수한 테크놀로지 측면에서의 세계만 말이다. 그 꿈같은 일이 자기력만 제대로 통제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미치오 카쿠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지금 어떤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렇게 이론과 실현 가능성을 위한 노력 양자를 균형있게 다 다뤄줌으로써 꽤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카쿠 만큼이나 언젠가는 그것이 정말 가능해 질 것이라 믿게 된다. 그리고 그리게 된다. 핵융합 기술이 이루어져서 무한의 동력을 쓰게 될 인류를, 그렇게 한정된 에너지와 자원에서 해방되어 이제 전통적 개념의 '부'로 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소유의 관념과 재산의 관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인류의 모습을...

 

 그렇게 미치오 카쿠의 '미래의 물리학'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발전만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그 기술의 실현으로 우리의 삶 자체가 어떻게 바뀌는지도 말해주는 책이다. 인쇄술의 발명이 궁극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져 중세와는 전혀 다른 보다 혁신된 지금의 삶을 만들어내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더욱 '예언서'다. 예언이란 언제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그러한 기술들의 실현으로 우리가 장차 맞이하게 될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라 말한다. 현재 뇌신경학, 사회생물학, 진화학자등이 누차 증명하는 바 대로 우리의 존재에게 있어 본디부터 타고나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의 의식, 인격마저 사실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혁신할 기술이 인류의 삶을 그 근본부터 바꿔버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기술의 발전이란 언제나 자유의 확장과 비례 관계였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이뉴는 기술의 혁신이 언제나 인류의 사유를 '리부팅(REBUTING)' 시켰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 때 형성될 미래의 가치관은 지금의 가치관과 분명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사물을 보는 방식, 사유 방식, 세계와 타인에 대한 판단 등은 거기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당장 핵융합 기술이 실현되어 무한의 에너지를 사람들이 쓸 수 있게만 되어도 지금 우리가 가진 가치관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혹시나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족이나 다름 없을지도 모를 이 말을 계속 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에 대한 비관론을 염려해서이다. 즉 '미래의 물리학'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미치오 카쿠만큼이나 지나친 낙관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 비관론이란 이미 형성되어진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기에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옛날 얘기가 있지 않은가? 한 선사가 고양이를 너무 무서워하는 생쥐가 불쌍해 호랑이로 만들어 주었으나 여전히 생쥐 때의 두려움이 남아있어 고양이를 계속 두려워하는 바람에 도로 생쥐로 만들어버렸다는 얘기 말이다. 바로 그 이야기 속의 생쥐처럼 다가올 미래를 우리가 그저 과거의 잣대만 가지고 너무 염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했던 대로 미래에 도래할 기술로 인류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건 지금까지 했던 우리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늘 유한한 재화에 시달린 우리들이 무한의 재화를 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한정된 수명을 가진 자가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어떻게 삶을 바라볼 것인지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닥터 후'의 타디스에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안이 바깥보다 더 넓지?'하고 놀라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라는 시쳇말도 있듯이 진정한 사유란 결국 경험의 엄습 뒤에야 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영화 '토탈 리콜'처럼 미더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사실 단 하나의 이유 밖에는 없다고 생각된다. 바로 인류에 대한 신뢰가 있느냐 아니면 없느냐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에 대한 비관하고 있으면 미래 역시도 비관일 것이며 인류에 대해 낙관하고 있으면 미래 역시도 낙관일 것이다.

 

 사실은 바로 여기에서 미치오 카쿠의 '미래의 물리학'은 이제 읽기의 전혀 다른 차원을 열어 놓는다. 앞서도 말했듯이 미치오 카쿠가 가진 낙관의 바탕은 인류에 대한 신뢰에 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신뢰가 도래할 미래의 모습이 어떤지를 결정할 궁극적인 힘임을 안다. 그러면 정말로 우리가 힘써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미래 기술의 청사진 보다는 인류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쩌면 정말 미치오 카쿠가 이 책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도 우리가 언젠가 맞이하게 될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보다 좋은 세상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는 인류의 모습을 통해 그 신뢰를 가지게 함이 아닐까? 이렇게 보자면 '미래의 물리학'이 보여주는, 그 '꿈'을 향한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다양한 노력들은 그야말로 우리가 왜 인류에 대해 신뢰를 지녀야 하는지 그 증거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H.G 웰즈의 소설, '타임머신'의 마지막에 나오는 꽃과 같은 차원의 증거다.

 

 '타임머신'에서 주인공은 머나먼 미래(802701년)로 날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인류가 '엘로이'가 되어 모든 문명적인 것이 제거되어 이제 스스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을 본다. 한낱 '몰록'의 가축이 되어 그저 도살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인류를 주인공은 도와주는데 거기서 그의 도움을 받은 한 여자는 그에게 야생화 하나를 꺽어준다. 마지막에 다시 미래로 가버린 주인공이 남기곤 간 그 꽃을 바라보며 주인공의 친구인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인류의 진보를 어둡게 보았다. 쌓아올린 문명이 필연적으로 무너져서 결국에는 그것을 쌓아올린 자들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헛고생이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듯 살아낼 도리밖에는 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 미래란 여전히 암흑이고 공백이다. 기억에 의존한 그의 이야기가 밝힌 몇몇 군데만 빼면 광할한 미지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위안 삼아 이상한 흰 꽃 두 송이를 곁에 두고 있다. 이젠 갈색으로 쭈그러들고 납작해지고 버석버석해진 그 꽃은 지력과 체력이 사라진 미래에도 여전히 감사하는 마음과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인간의 가슴 속에 살아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렇게 웰즈에게 그 꽃은 인류에 대한 신뢰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꽃이 증거하는 신뢰로 인해 그는 세계 대전이 한창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류에 대해 낙관할 수 있었다. '우주전쟁'은 그것에 대한 단적인 증거이지 않는가. 웰즈가 보여주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란 이렇게 인류에 대한 신뢰의 여부로 좌우된다. 문제는 불신이 낳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의 회의 끝에 나오는 '자기 보신' 밖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타임머신에서 그랬듯이 자기만을 위해 기꺼이 엘로이들을 학살하는 몰록들의 창궐이다. 그러므로 그 미래가 몰록으로 넘쳐나느냐 아니냐는 바로 오늘의 인류를, 적어도 내 곁의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달려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인해 미치오 카쿠는 그 시선을 보다 긍정적으로 만들고자 이 '미래의 물리학'을 쓴 것이다. 이는 그가 책 첫 머리에 인용한 윈스턴 처칠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미래를 다스릴 것이다."

 

   

 과학책을 가지고 '뭐 이런 말을 할 것 까지야!' 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야 했다. 이 책이 그야말로 웰즈의 '꽃'과 같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치오 카쿠의 책을 읽으면 과학도 궁극엔 인간학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쉽게 말해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가 과학적 태도 역시 결정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기술이 과연 가치중립적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은 마르크스였다. 그는 기술의 발달이 인간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지만 기술이 순수하게 가치중립적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래서 산업혁명을 가져온 기술도 마르크스는 부정적으로 여겼다. 그것이 자본가의 이윤만 추구하고 숙련을 통해서만 높아질 수 있는 노동자들의 가치를 소거해나갔기 때문이었다. 기술이 그렇게 변질된 것은 오로지 자본가 자신들의 이윤만 추구하려는 노력에 기인했다. 즉 그들의 시선이 노동자들이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로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르크스와 미치오 카쿠는 같은 자리에 선다. 그리고 힘을 모아 같이 외치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고 그 포용과 배려 속에서 신뢰가 무르익을 때 우리의 미래 역시도 그와 똑같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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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 소년 보름달문고 51
전성희 지음, 소윤경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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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에겐 어째서 고통 따위가 있는 것일까?

 누구나 밥을 먹어야 하듯이 살다보면 누구나 이런 의문을 떠올릴 때가 찾아오는 법이다.

 생로병사란 그 누구도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구나 정의의 여신마저 장님이 아니라 운명의 여신 역시도 장님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저 우연히 확률적 불운이 작용한 결과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야 했을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전성희의 소설, '요괴소년'의 주인공 경호가 그렇다.

 현재 그의 나이 열 두살. 사람들은 그를 당연히 어린이라 부르고 그렇게 어린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관심과 보호 그리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경호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비유하자면 경호는 운명의 여신으로 부터 사납게 내쳐진 아이라 할 수 있다.

 이유없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폭력으로 모든 삶의 의미를 잃고 아들에 대한 사랑마저 놓아버린 어머니. 그리고 친구하나 없이 외톨이로 보내야 하는 학교. 그러한 일상적인 폭력과 한없는 무관심 그리고 헤어날 길 없는 외로움 속에서 경호는 매일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맞은 곳곳 마다 시큰하게 느껴져 오는 통증. 집에 돌아가도 반갑게 맞아줄 이 하나없는 휑뎅그레한 공간에서의 고독 그리고 친구들의 냉혹한 등들이 보여주는 무시와 배척 가운데 경호 역시도 수백번 아니 수천번 그와 같은 질문을 똑같이 묻지 않았을까?

 

 도대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것도 나만!

 그리고 이런 고통을 겪으며 이제 나는 어떡해 해야 하는지?

 

 마치 그 의문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어느날 밤 불현듯이 요괴가 나타난다.

 몽상이 빚어낸 산물이나 거짓 환영이 아닌, 진짜 생생하게 존재하는 요괴가.

 더구나 경호와 비슷하게 생긴 소년의 모습을 한 그 요괴는 이렇게 말한다.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봐."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단지 난 네가 그걸 네 입으로 똑똑히 말하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이야."(P. 12 ~ 13)

 

 경호가 겪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지금 경호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건 지금의 고통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리라.

 

 이렇게 사실 전성희의 소설, '요괴소년'은 살면서 우리에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고통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통을 주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고통을 오히려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 이렇게 말이다.

 

 그렇게 하나는 단순히 없애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쉽고 다른 하나는 나 하나가 아니라 타인마저 포용해야 함으로 어렵다. 어려워도 정말 무지 어렵다. 누구나 다 감기에 걸려 본 경험이 있을테니 하는 말이지만 감기에 몸살까지 겹쳐 꼼짝없이 앓아누워야만 할 때 그 몸으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간호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그것도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거기다 아무런 의무도 아닌 일을. 그럴 때 과연 기꺼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고통을 참고 견디며 오로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걸 감내하는 사람이 정말 얼마나 될까? 정말 그 누구도 자신있게 '저요!'하고 손을 들 수 없을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그래서 두번째의 길은 예수나 석가모니등 종교의 성인들만이 걸어 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예수의 십자가 승천이나 석가모니의 고행을 통한 열반은 모두 자신에게 가한 고통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단적인 상징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내 고통은 그대로 껴안으면서 타인의 고통만 줄여주는 두번째의 길 보다는 내가 지금 겪는 고통의 즉각적인 해소라는 첫번째 길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리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인지 모른다. 어차피 암환자 말기의 타인이 겪는 고통보다 지금 당장 내 발가락에서 난 상처가 주는 고통이 훨씬 더 아픈 법이다. 아픔은 그렇게 냉정한 객관화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모두 자기가 겪는 고통이 가장 큰 법이다. 그러니 내 고통의 해결은 최우선이 된다.

 

 경호에게 찾아온 요괴.

 그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손쉬운 해결책을 상징하는 존재다.

 단순히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다.

 요괴가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 전성희 작가가 바로 이런 의미로 요괴의 존재를 빚었음이 대번에 드러난다. 그 요괴가 경호의 삶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두 존재,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와 학교에서 자기를 경멸하고 왕따가 되도록 부추긴 4학년 때의 담임, 두 사람을 모조리 없애버리니까 말이다.

 

 그렇게 요괴는 마치 외과의사가 악성 종양을 매스로 잘라내듯 단순히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손쉽게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의 바람을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손쉬운 해결책은 늘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법이다. 제거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건 단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치워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그 존재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통은 특히 그렇다. 왜? 고통이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그것의 대체불가능성 때문이다. 고통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다. 이 말은 거꾸로 이 고통에서 헤어나도록 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우리 자신 밖에는 없다는 말이 된다. 고통의 원인은 외부에서 비롯되지만 그 외부의 원인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건 단순히 촉발에 불과하고 현존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 뿐이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 '촉발'을 도려냄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 '촉발'이란 이미 총알이 발사된 권총과도 같다. 권총을 부셔버린다고 해서 총맞은 내가 느끼는 고통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고통의 손쉬운 해결책이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원인이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여전히 고통을 느끼는 내가 남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수한다고 해도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문제는 그것을 야기한 타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궁극적 해결은 내가 그 고통을, 혹은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달려있다.

 

  최근의 진화론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이성이라는 것도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즉 주어진 환경에 보다 잘 살아남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발달시켜온 것이라는 의미다. 원시 시대 그 주어진 환경에서 우리를 가장 두려움에 젖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고통이지 않았을까? 근대 초기 홉스나 로크 그리고 루소들이 최초의 사회 상태를 얘기할 때 항상적으로 ' 고통에서 야기된 만인에 대한 만인의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의 방증이지 않을까? 이렇게 보자면 우리의 이성이란 고통과 마주하며 발달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좀 추상화하자면 현존하는 고통을 어떻게 헤아릴까 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이성이 지금처럼 발달해왔다는 말이다. 다소 무리가 있는 억측이긴 해도 이러한 진화론적 사실은 고통의 궁극적인 해결이 그 원인의 제거가 아니라 스스로의 헤아림에 있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과도 같다.

 

  해서 요괴를 퇴치한다는 퇴마사의 존재 조차 결국 경호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이다. 더우기 요괴는 퇴마사를 가리켜 이렇게까지 말한다.

 

 "퇴마사의 주인은 요괴란 말이지"(P. 134)

 

 이렇게 말할 때 요괴의 말이 전혀 과장도 거짓도 아닐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뿐이다. 즉 고통의 원인만 제거한다는 것이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라는 사실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퇴마사의 평가 때문에 전성희 작가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그 원인만 제거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걸 우리는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결국 퇴마사도 요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건 단적으로 퇴마사가 요괴를 헤아리기 보다는 단순히 그 존재만 없애려고 드는데서 바로 드러난다. 퇴마사의 해결 방법이나 요괴의 해결 방법이나 같은 것이다. 모두 그 '원인만! 원인만!' 하고 외칠 뿐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요괴가 해 준 모든 것은 사실 경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던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죽어버린 아버지와 담임은 유령이 되어 경호 앞에 여전히 출몰한다. 경호는 그들의 존재 때문에 여전히 고통스럽고 이미 그들이 죽어버린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이렇게 손쉬운 해결책은 우리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들 뿐이다. 그러므로 경호가 정말 천착해야 하는 것은 두 번째의 길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 해도 고통에서 정말 헤어나오고 싶다면 걸어야 하는 것이다. 전성희 작가는 후반으로 갈수록 그러한 길을 걸어가는 경호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건 '받아들임'의 과정이다.

 

 부정하려 들지 않고 순순히 긍정하며 그 의미를 헤아려 봄이다. 나 혼자만 존재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더불어 같이 걸어가겠다라는 포용이다. 칼로 가차없이 도려내듯이 쉽고 빠르게 해결하겠다는 조급증이 아니라 진정한 해결을위해 보다 더 오래 지켜보고 더 깊이 헤아려보겠다는 숙고이다. 이러한 여정을 전성희 작가는 소설에서 단적으로 '달래기'라 부른다.

 

 그런데 퇴마사의 말 중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달래기'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잊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달랜다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벗어나거나 도망치거나 하는 것들과는 분명 다른 무엇이 그 안에 있는 것 같다.(P. 130 ~ 131)

 

 달래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엄마가 아기를 달래는 모습일 것이다. 바로 그렇게 전성희 작가는 우리가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 역시도 그것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달래기'는 무엇보다 대상의 긍정이요 엄마가 아기를 달래면서 아기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새심하게 관찰하듯이 그렇게 진정한 해결을 위해 상대를 계속 헤아려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후반 경호가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다. 경호는 무조건 없애고 보자는 퇴마사의 종용을 물리치고 요괴를 먼저 인간적으로 헤아리려 노력한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요괴가 되었는지 그의 삶을 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자 경호는 볼 수 있었다. 사실은 그 요괴가 자기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요괴와 경호는 그 닮은 용모만큼이나 삶의 모습 또한 판박이였음을. 그 헤아림을 통해 경호는 요괴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고 결국 그 공감이 바탕이 된 포용으로 퇴마사도 하지 못했던 요괴의 존재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나보낸다. 표면적으로는 요괴의 사라짐이지만 그 요괴의 삶이 바로 경호의 삶이었기에 본질적으로는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성희 작가는 우리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단순히 내게 고통을 가하고 있는 원인을 무조건 없애는데 천착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고통을 긍정하고 함께 하면서 그것이 왜 생겨났는지 그리고 또 어떤 식으로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달래기'다. 그리고 그 '달래기'는 일종의 대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얼른 떠올리는 것은 그 대화의 과정이 어쩐지 프로이트가 말했던 정신분석가와 그 앞에 누워 자신의 고통에 대해 담담히 고백하는 환자 사이의 대화와 닮았다는 것이다.(영화에서 흔히 보듯이 지금 정신분석에서 많이 행해지는 '대화법'은 바로 프로이트가 주창한 것이다.) 그러한 대화법에서 나의 고백은 치유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는 '달래기'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싶다. 결국 우리는 내 고통의 대상을 긍정하고 함께 하면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고통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러한 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헤아려 보고 그걸 고백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대상으로서의 고통을 헤아림은 결국 나 자신을 좀 더 열고 바깥에다 내어주는 일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달래기'의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고통에서 진정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고통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야를 수정하는 것 밖에는 달리 없는 것이다.

 

 전성희의 '요괴소년'은 청소년 소설로는 흔치 않게도 고통이란 문제를 다루면서도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가 모든 걸 사유로 보듬으려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이다. 그 보듬어 안음을 통해 결국 그녀가 도달한 종착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말해온 대로 나 역시도 동의하는 바이다. 고통은 일단 생겨나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눈 위로 안대를 씌우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고통은 압도해오는 통증 때문에 자기 밖에는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보다 제대로 된 구원은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때 찾아온다. 아무리 고통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을 보지 않고 자기 세계에만 유폐되어 있으면 경호가 요괴를 통해 손쉬운 해결을 바라는 것처럼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안게 될 방법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통에 빠질수록 더 넓게 더 많이 다른 것을 보게 하는 시야가  필요하다. 전성희의 '요괴소년'은 우리가 그러한 안대에 가리워져 있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스스로 그것을 찢도록 만들어주는 좋은 채찍질이 되어 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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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20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세상에 청소년 소설이라니 놀랍습니다. 글을 읽으며 헤르메스님의 진중한 문장들과 주제 때문에 그러리라곤 상상조차 못했거든요.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고통을 다룬 청소년 소설은 많은 것 같아요. 아동 성추행, 다문화 가정, 이혼 등으로 고통을 은유하고 있긴 해도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겪는 갈등이, 그러니까 소설에 나오는 갈등이 일종의 고통이 아닐까 생각해요. 즉, 고통이 없는 소설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글이 좋다보니 헤르메스님 서재만 오면 저답지 않게 괜히 진지해지네요. 반가워요!! 요새 뜸했죠ㅠ

오드득 2012-11-22 23:47   좋아요 0 | URL
서로가 정말 뜸했죠^ ^;
하하하! 제가 좀 순문학, 장르물, 청소년 문학 안 가리고 쓸데없이 진지하게(과연 진지하게 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 접근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소이진님 말씀대로 정말 청소년 소설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원초적인 갈등의 모습을 순문학(성인 문학의 의미로 받아들여줘요) 보다 더 잘 형상화하고 있다고 생각되요. 그래서 즐겨 읽는데 그러다보니 리뷰도 이렇게 되네요.^ ^; 릴케도 말했듯이 사람을 문학으로 이끄는 것은 영혼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상처죠. 그리고 문학을 읽는 사람 또한 그 상처가 있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그렇게 서로 위안을 주고 받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러니 소이진님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얼른 쓰게 되길 빌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