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문학 -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그러니까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을 때였다.

  책 맨 앞 부분에 나와있는 '추천의 글'에서 반가운 이름 하나를 만났다. 그 이름이 바로 '장석주'였다. 학창시절에 한 번 만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보는 이름이라 일단 반가웠지만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장석주는 시인에다가 에세이스트로가 전부였기에 실례가 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바우만에 대한 추천 글을 쓸 정도가 되시나 하는 의구심이 생겼던 것이다. 하긴 그가 운영했던 출판사 '청하'가 펴냈던 책들을 떠올려 보면 장석주가 어느정도로 인문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지는 곧 드러나지만서도(그 중엔 한국 최초의 '권력에의 의지'번역을 비롯한 니체 저작들의 번역 출간도 있다.) 그래도 의혹의 그림자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가운데 읽어나갔다. 그러다 놀랐다. 내 의혹을 그대로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릴 정도로 그는 전문가 뺨 칠 정도로 꽤나 상세하게 현재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중의 한 사람을 분석할 수 있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상세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그 맥마저 짚어내고 있어서 더욱 놀라움이었다. 이 조우가 있었기에 그가 본격적으로 인문에 대한 얘기를 펼치고 있는 '일상의 인문학'이란 책의 존재를 알았을 때 선뜻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상의 인문학'은 일단 한 권의 책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 한다.

  그렇게 여기엔 무려 50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그 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서평집이 아니라는 의미다. 여기서 책은 그저 하나의 길잡이 역할만 할 뿐이다. 그러니까 강가의 나룻배와도 같이 하나의 상념이 타고 보다 너른 사유의 바다로 나아갈 매개물에 불과하다.

 

  장석주의 인문 스타일은 이른바 풀뿌리라고 할 수 있다.

  자양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쭉쭉 뻗어나가는 풀뿌리 처럼 그렇게 보다 깊은 사유를 이끄는 무언가가 있으면 사양 않고 촉수를 뻗어나간다. 그래서 처음에 시작했던 상념이 이런 저런 관계된 메타 텍스트를 거치고 돌아오면 이전의 상념들 보다 그 맛은 깊어지고 속은 더욱 알찬 장맛이 되어 돌아온다. 문제는 결코 그 어디든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일상의 인문학일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은 흔히 일상과 인문을 별개로 생각한다. 그렇게 인문이란 일상에서 빠져나와 상아탑 같은 곳에나 머무르면서 펼쳐지는 고담준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장석주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공격한다. 그리고 말한다. 일상이야 말로 인문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그는 책의 처음부터 인문학을 뜻하는 라틴어 후머니타스를 풀이하며 인문이라 다름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에서 필요한 통찰을 찾아내는 학문이라 말한다. 일상과 별개이거나 그걸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상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인문은 일상적 삶과 결부되어 있지만 제목의 의미는 단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작 문제는 그 통찰이 어디로부터 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인문은 어떻게 일상의 굳건한 벽을 허물고 틈을 내어 우리로 하여금 감춰진 진실을 보게 하는 것일까? 그 대답을 장석주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는 스타일로써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앞서도 말했듯이 어디로든 막힘없이 자유롭게 흐르는 사유의 물길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여나 그 끝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다시금 훌쩍 떠날 수 있는 사유의 여유로움이 진정한 인문 정신임을 그는 책에다 새긴 스타일 자체로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이란 정형화된 하나의 틀이다.

  우리는 자유로이 일상의 삶을 산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이미 근대 초기 부터 생성되고 규격화된 '일상적 삶'이란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조르주 아감벤 같은 이는 바로 이런 이유로 현대인들은 진정한 의미의 경험을 하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 철학에서 경험이란 어떤 정형화된 틀도 매개하지 않는 그저 직접적이고 순수한 감각만을 의미하는데 지금 현대인이 삶에서 겪는 경험의 대부분은 무엇보다 이미 굳건히 형성된 일상 생활 양식이라는 틀로 매개되어진 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결코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단적으로 우리의 삶이란 컴퓨터가 그러하듯이 단순히 프로그래밍대로 움직이는 것 뿐이다.

 

  인문이 힘을 잃게 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장석주가 보여주는 대로 인문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아무리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도 상대화시키고 그로 인해 보다 더 현명한 대안을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미리 주입된 프로그래밍에 따라 그저 움직이는 일상은 오히려 반복된 답습으로서 그저 강하게 머무르기만 할 뿐이다. 그 머무름의 관성에 우리는 너무도 길들여진 나머지 어느새 새롭게 바라보는 것 자체마저 피로를 느끼게 되어 늘 부단한 새로움 속으로 내모는 인문에 대해 거리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울듯이 제아무리 굳건한 일상의 틀이라 하더라도 항구히 머무를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사람은 주어진 상황을 스스로 되새길 수 있는 이성적 동물이므로 과연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하고 되묻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도 말했지만 인간 자체가 원래 해답이 하나 주어지면 얼른 그것이 해답이 아닐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는 존재다. 그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되묻는 존재, 언제나 그 너머를 생각하고 움직이는 존재, 물길이 막히면 그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돌아서 흐르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 자체가 어디서든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든 뚫고 헤쳐나가는 존재이기에 일상이란 결국 창살이 부서진 우리가 되기 쉬운 것이다. 듣기에 지금 우리나라는 인문학 열풍에 휩싸여 있다고 한다. IMF가 불러일으킨 돈으로 좌지우지 되는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이제 물질적 만족 보다는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그러한 열풍이 오게 되었단다. 그런데 거기서 삶의 질이란 무엇일까? 그건 보다 가치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과연 어떤 삶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게 있다. 그건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가치란 기존의 생각과 가치관을 모조리 지운 텅 빈 마음으로 순수하게 바라볼 때라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자유로움을 인문이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문을 필요로 하고 지금처럼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들은 나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찾고 있다. 거기에 어디서든 결코 머무르지 않으며 늘 훌쩍 벗어나 새로운 것을 조망하려는 이 일상의 인문학은 그 눈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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