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물리학 - 과학은 인간의 일상과 운명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미치오 가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개봉한 영화 '토탈리콜'은 우리의 근 미래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거기에 신기한 것들이 참으로 많이 나온다. 이를테면 바퀴없이 날아다니는 자동차라든가 상하좌우 어디로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라든가 또는 아무런 지지대 없이 그냥 공중에 붕 떠 있는 건물들 같은 것들 말이다.

 

 

 

 

 

 

 뉴튼의 물리학 법칙 쯤은 가볍게 무시하는 이러한 것들은 그래서 우리의 눈길을 끌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리 미래라고는 하지만 과연 저런 것이 가능할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궁금증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어보일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냥 영화적 상상력 아니냐?' 하면서 치부해버리면 될 일을 현실적 가능성 따위나 운운하고 있으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솔직히 나 역시도 그런 치부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퀴없이 날아다니는 자동차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미래가 주 배경이 되었던 영화 '백 투 더 퓨쳐'의 속편에서도  본 바 있다. 그런데 그 '백 투 더 퓨쳐'가 속편에서 날아갔던 미래는 2015년으로, 지금으로부터 불과 3년 후다. 하지만 아직도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나올 가능성은 티끌만큼도 되지 않는다. 그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탈 수 있겠지 꿈꾸었던 아이들은 그 꿈이 깨어지는 아픔을 2015년으로 다가갈 수록 날마다 맛보아야 한다. '꿈을 꾸는 것과 실현하는 것은 다른 말이다.'라는 것을 미래를 다룬 영화들을 보면서 꿈을 꾸었던 꼬마들 만큼이나 뼈져리게 깨닫는 이들이 또 있을까?

 

 그러니 당연히 시니컬해질 수 밖에. 미래란 지금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며 영화에서 묘사되어지는, 모든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래의 모습이란 거짓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아직도 그런 걸 믿는 사람들이 행여나 주위에 있다면 기꺼이 어리석다고 얘기해 준다. 아마도 이러한 현실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니컬함이 'SF 소설이나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마저 결정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본래 SF가 추구하는 목적인 실현 가능한 미래 세계의 대안적 모델을 탐색하거나 검증하는 장르라기 보다는 그저 재미를 위해 실현성 없는 허황된 이야기만 일삼는 장르라는 것으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타트렉의 '트렉터 빔'이나 '텔레포테이션', 또는 스타워즈에 나왔던 '데스 스타'의 '행성파괴광선' 같은 것을 물리학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자가 있다면 '거 참, 할 일은 어지간히 없고 시간은 어지간히 많은 학자군.'하고 마냥 비아냥 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들 앞에서 오히려 당당하게 물리학의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 어떤 것이든 인류에게 있어  '불가능은 없다'라고 선언하는 과학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미치오 카쿠'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이런 말을 들어도 함부로 무시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 최고 물리학자 중의 한 사람이고 거기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평행 우주'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람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이 갈테니 하는 말이지만 그 내공의 경지로 볼 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근거없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것임을 쉬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로 'SF'에 나오는 그 어떤 기술이든지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될 것임을 믿으며 그 실현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한다. 그리고 그는 이미 그 태도를 '불가능은 없다'라는 책과 동명의 다큐멘터리로 증명한 바 있다. 때문에 우리는 미치오 카쿠의 그 진지하면서도 객관적인 고찰과 검증을 통해 또한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결코 꿈을 꾼다는 것과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 다른 말이 아닌 것임을!  2002년 한국 월드컵을 4강에 가게 했던 '꿈은 이루어진다' 캐치프레이즈 대로  'SF'란 허황한 환영이 아닌 실현 가능한 일들의 '예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토탈 리콜'의 원작자이기도 한 필립 K 딕은 한 단편에서 SF 작가들을 서슴없이 '예언자'로 부른 적이 있었는데 미치오 카쿠도 그렇지만 나 역시 이에 동감한다. 그러니까 이 '예언'이란 말에 포함된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는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실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루어지리라 믿고 끝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미치오 카쿠는 바로 그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언'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은 없다'나 이번 '미래의 물리학'에서 미치오 카쿠가 하는 말을 듣고 쉽게 그를 '너무 낙관적이다'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치오 카쿠는 '낙관'을 새로이 정의한다. 그러니까 그는 바라보는 대상을 가지고 낙관 혹은 비관인지를 가늠하지 않는다. 미치오 카쿠가 낙관 혹은 비관을 가늠하는 기준은 언제나 그 바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다. 다시 말해 미치오 카쿠가 낙관하는 것은 다가올 미래가 가진 낙관할만한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낙관인 것이다. 이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낙관이나 비관은 단순한 전망일 뿐이다. 문제는 전망은 언제나 실행이 뒤따라야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이다. 현실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은 머리 속 계산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이 행하는 실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낙관과 비관의 기준 역시 정작 있어야 할 곳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신뢰하느냐,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할 수 있느냐 바로 거기에 낙관과 비관을 결정하는 기준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미치오 카쿠는 '불가능은 없다'라고 낙관할 수 있다. 그는 믿고 있고 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없이 계속해서 연구하고 노력할 것임을 말이다. 그 신뢰의 근거 역시 전혀 허황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와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에 헌신하고 있는 전세계의 수많은 동료들로 부터 그 근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실용화 가능성이 없더라도(즉 아무런 실익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해야 할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말이다. 더우기 눈으로 보고 직접 나누는 대화를 통해 얻게 된 것이었기에 더욱 단단한 낙관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미치오 카쿠의 낙관이 사실은 인류 전체에 대한 신뢰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마 내가 미치오 카쿠의 책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바탕에 사람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미래의 물리학'을 단적으로 말하라면 일종의 '예언서'라고 하겠다.

 앞서 SF를 예언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예언'의 의미로 말이다. 그렇게 미치오 카쿠는 향후 100년에 우리들에게 찾아올 과학적 혁신을 모두 여덟가지 분야에 걸쳐 얘기해주고 있다. '평행우주', '불가능은 없다'에서 이미 보았듯이 여기에서도 논의되는 과학적 지식들은 매우 상세하지만 결코 어렵지 않다. 일반인들에게도 과학을 무엇보다 편안하고 쉽게 다가가도록 만드는 데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미치오 카쿠의 저력이 '미래의 물리학'에서도 다시금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래서 난 영화 '토탈 리콜'이 그리는 세계가 그리 허황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정작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러한 것들이 가능한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왜 자동차가 바퀴없이도 비행할 수 있고 건물들이 아무런 지지대 없이도 공중 부양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 세계가 더 허황되게 여겨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화 속 세계가 그렇게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 과학적 이론에 기반해 세워져 있음을 이 '미래의 물리학'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 세계가 바로 자기력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것을 말이다. 미치오 카쿠는 이 책의 5장 '에너지의 미래'에서 인류가 자기력을 지배하면 어떤 세상이 우리에게 닥쳐오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거기서 미치오 카쿠가 보여줬던 세계가 바로 그대로 '토탈 리콜'의 세계였다. 물론 빈부와 계급의 격차가 심한 정치적 상황은 빼고 순수한 테크놀로지 측면에서의 세계만 말이다. 그 꿈같은 일이 자기력만 제대로 통제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미치오 카쿠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지금 어떤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렇게 이론과 실현 가능성을 위한 노력 양자를 균형있게 다 다뤄줌으로써 꽤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카쿠 만큼이나 언젠가는 그것이 정말 가능해 질 것이라 믿게 된다. 그리고 그리게 된다. 핵융합 기술이 이루어져서 무한의 동력을 쓰게 될 인류를, 그렇게 한정된 에너지와 자원에서 해방되어 이제 전통적 개념의 '부'로 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소유의 관념과 재산의 관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인류의 모습을...

 

 그렇게 미치오 카쿠의 '미래의 물리학'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발전만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그 기술의 실현으로 우리의 삶 자체가 어떻게 바뀌는지도 말해주는 책이다. 인쇄술의 발명이 궁극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져 중세와는 전혀 다른 보다 혁신된 지금의 삶을 만들어내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더욱 '예언서'다. 예언이란 언제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그러한 기술들의 실현으로 우리가 장차 맞이하게 될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라 말한다. 현재 뇌신경학, 사회생물학, 진화학자등이 누차 증명하는 바 대로 우리의 존재에게 있어 본디부터 타고나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의 의식, 인격마저 사실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혁신할 기술이 인류의 삶을 그 근본부터 바꿔버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기술의 발전이란 언제나 자유의 확장과 비례 관계였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이뉴는 기술의 혁신이 언제나 인류의 사유를 '리부팅(REBUTING)' 시켰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 때 형성될 미래의 가치관은 지금의 가치관과 분명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사물을 보는 방식, 사유 방식, 세계와 타인에 대한 판단 등은 거기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당장 핵융합 기술이 실현되어 무한의 에너지를 사람들이 쓸 수 있게만 되어도 지금 우리가 가진 가치관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혹시나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족이나 다름 없을지도 모를 이 말을 계속 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에 대한 비관론을 염려해서이다. 즉 '미래의 물리학'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미치오 카쿠만큼이나 지나친 낙관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 비관론이란 이미 형성되어진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기에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옛날 얘기가 있지 않은가? 한 선사가 고양이를 너무 무서워하는 생쥐가 불쌍해 호랑이로 만들어 주었으나 여전히 생쥐 때의 두려움이 남아있어 고양이를 계속 두려워하는 바람에 도로 생쥐로 만들어버렸다는 얘기 말이다. 바로 그 이야기 속의 생쥐처럼 다가올 미래를 우리가 그저 과거의 잣대만 가지고 너무 염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했던 대로 미래에 도래할 기술로 인류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건 지금까지 했던 우리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늘 유한한 재화에 시달린 우리들이 무한의 재화를 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한정된 수명을 가진 자가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어떻게 삶을 바라볼 것인지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닥터 후'의 타디스에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안이 바깥보다 더 넓지?'하고 놀라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라는 시쳇말도 있듯이 진정한 사유란 결국 경험의 엄습 뒤에야 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영화 '토탈 리콜'처럼 미더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사실 단 하나의 이유 밖에는 없다고 생각된다. 바로 인류에 대한 신뢰가 있느냐 아니면 없느냐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에 대한 비관하고 있으면 미래 역시도 비관일 것이며 인류에 대해 낙관하고 있으면 미래 역시도 낙관일 것이다.

 

 사실은 바로 여기에서 미치오 카쿠의 '미래의 물리학'은 이제 읽기의 전혀 다른 차원을 열어 놓는다. 앞서도 말했듯이 미치오 카쿠가 가진 낙관의 바탕은 인류에 대한 신뢰에 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신뢰가 도래할 미래의 모습이 어떤지를 결정할 궁극적인 힘임을 안다. 그러면 정말로 우리가 힘써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미래 기술의 청사진 보다는 인류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쩌면 정말 미치오 카쿠가 이 책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도 우리가 언젠가 맞이하게 될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보다 좋은 세상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는 인류의 모습을 통해 그 신뢰를 가지게 함이 아닐까? 이렇게 보자면 '미래의 물리학'이 보여주는, 그 '꿈'을 향한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다양한 노력들은 그야말로 우리가 왜 인류에 대해 신뢰를 지녀야 하는지 그 증거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H.G 웰즈의 소설, '타임머신'의 마지막에 나오는 꽃과 같은 차원의 증거다.

 

 '타임머신'에서 주인공은 머나먼 미래(802701년)로 날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인류가 '엘로이'가 되어 모든 문명적인 것이 제거되어 이제 스스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을 본다. 한낱 '몰록'의 가축이 되어 그저 도살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인류를 주인공은 도와주는데 거기서 그의 도움을 받은 한 여자는 그에게 야생화 하나를 꺽어준다. 마지막에 다시 미래로 가버린 주인공이 남기곤 간 그 꽃을 바라보며 주인공의 친구인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인류의 진보를 어둡게 보았다. 쌓아올린 문명이 필연적으로 무너져서 결국에는 그것을 쌓아올린 자들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헛고생이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듯 살아낼 도리밖에는 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 미래란 여전히 암흑이고 공백이다. 기억에 의존한 그의 이야기가 밝힌 몇몇 군데만 빼면 광할한 미지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위안 삼아 이상한 흰 꽃 두 송이를 곁에 두고 있다. 이젠 갈색으로 쭈그러들고 납작해지고 버석버석해진 그 꽃은 지력과 체력이 사라진 미래에도 여전히 감사하는 마음과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인간의 가슴 속에 살아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렇게 웰즈에게 그 꽃은 인류에 대한 신뢰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꽃이 증거하는 신뢰로 인해 그는 세계 대전이 한창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류에 대해 낙관할 수 있었다. '우주전쟁'은 그것에 대한 단적인 증거이지 않는가. 웰즈가 보여주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란 이렇게 인류에 대한 신뢰의 여부로 좌우된다. 문제는 불신이 낳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의 회의 끝에 나오는 '자기 보신' 밖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타임머신에서 그랬듯이 자기만을 위해 기꺼이 엘로이들을 학살하는 몰록들의 창궐이다. 그러므로 그 미래가 몰록으로 넘쳐나느냐 아니냐는 바로 오늘의 인류를, 적어도 내 곁의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달려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인해 미치오 카쿠는 그 시선을 보다 긍정적으로 만들고자 이 '미래의 물리학'을 쓴 것이다. 이는 그가 책 첫 머리에 인용한 윈스턴 처칠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미래를 다스릴 것이다."

 

   

 과학책을 가지고 '뭐 이런 말을 할 것 까지야!' 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야 했다. 이 책이 그야말로 웰즈의 '꽃'과 같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치오 카쿠의 책을 읽으면 과학도 궁극엔 인간학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쉽게 말해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가 과학적 태도 역시 결정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기술이 과연 가치중립적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은 마르크스였다. 그는 기술의 발달이 인간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지만 기술이 순수하게 가치중립적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래서 산업혁명을 가져온 기술도 마르크스는 부정적으로 여겼다. 그것이 자본가의 이윤만 추구하고 숙련을 통해서만 높아질 수 있는 노동자들의 가치를 소거해나갔기 때문이었다. 기술이 그렇게 변질된 것은 오로지 자본가 자신들의 이윤만 추구하려는 노력에 기인했다. 즉 그들의 시선이 노동자들이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로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르크스와 미치오 카쿠는 같은 자리에 선다. 그리고 힘을 모아 같이 외치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고 그 포용과 배려 속에서 신뢰가 무르익을 때 우리의 미래 역시도 그와 똑같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