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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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일단은 사회 전체가 원하지 않는  자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프레드 진네만의 걸작 서부영화 '하이눈'을 닮았다. '하이눈'에서 그 초대 받지못한 손님은 악명 드높은 무법자로 총솜씨는 귀신 같은데다 사람 죽이기를 우습게 알기 때문에 모든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존재다. 그런 자가 감옥에서 풀려나 마을로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감옥에 가두었던 보안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 소식을 미리 들은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 자신의 안전 보다는 마을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아니 아예 마을 전체를 위해서 그 한 몸 희생하는게 어떻겠느냐고 말하는 이들까지 있다. 그렇게 무법자에게 찍혀버린 보안관은 그 역시 무법자와 마찬가지로 사회로 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된다. 이러한 '하이눈'은 50년대의 미국에 광풍처럼 불었던 찍히기만 하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을 당해야 했던 '메카시즘'을 은유하면서 사회가 '낙인에 의한 고립 효과'로서 얼마나 손쉽게 희생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낙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게 처음이 아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하나님으로 부터 낙인을 받은 바 있고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 또한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낙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사회가 존립을 이어가기 위해 기꺼이 희생양을 재생산하는 것은 인류의 그 시작에서 부터 지금까지 반복되어 오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희생양'이라는 책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가 낙인을 통한 희생양을 줄기차게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이 내부 갈등을 봉합하는 데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은 사회 내부에 갈등들이 점증하여 더 이상 기존 사회의 역량으로는 그것을 무마하기 어려울 때 생겨난다. 즉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불만의 물꼬를 다른 쪽으로 비틀어 일시적으로나마 그 끓는 열기를 식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생양이란 일종의 진통제와도 같다. 궁극적인 치유는 가져오지 못하지만 한 순간의 분풀이로 일시적인 무마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이렇게 낙인의 원인은 낙인을 받는 대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낙인은 오로지 사회의 일방적인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다. 역사적으로 사회는 그 존속을 위해서라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낙인을 찍어 희생양을 양산해왔다. 나치의 유태인이 그랬고 십자군 원정에서의 이슬람 교도가 그랬다. 그건 종교가 같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1572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유명한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에서 보여지듯 카톨릭 교도에게 있어 개신교 교도 역시 희생양인 건 마찬가지였다.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 역시도 이러한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이다. 여기에선 남자 주인공 토비아스가 그 초대받지 못한 손님의 역할을 맡는다. 그는 갓 스물 살이 되었던 10년 전 같은 동급생 소녀 둘을 죽였다는 혐의로 10년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배척한다. 고향에 돌아와보니 토비아스의 집안은 예로부터 고향에서 알아주던 유지였지만 그 일로 인해 파괴된 지 오래였다. 토비아스는 아버지를 도와 그런 집안을 다시금 일으키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마을 사람들이 일치단결하여 그를 10년 전의 죄로 배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비아스는 억울하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절대 자신이 저지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정말 거기에 대해 무죄라는 것을 살아가는 모습 자체로서 마을 사람들에게 입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쉽지가 않다. 한 번 찍혀버린 낙인은 결코 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 배척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질 뿐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익히 많이 보아온 이야기일 수 있다. 전과자를 주인공으로 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사실 이와 비슷하지 않았던가? 집단적인 배척을 받는 무죄한 희생양의 이야기는 영국의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도 참 많이 다루었던 소재였다. 하지만 크리스티는 그걸 개인의 문제로 풀지않고 집단의 문제로 풀었다. 그건 당시 사회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다. 그녀가 그런 작품을 한창 쓰던 무렵의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이 모조리 파괴되어 살길이 막막해진 러시아와 동유럽의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영국으로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그렇게 섞여든 동유럽과 러시아 사람들로 인한 마을의 변화를 담아내려 했었고 거기에 그 존재들은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로 자주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우리는 크리스티의 대표적 탐정 미스 마플 시리즈에서 전쟁 이후 몰려 든 러시아와 동유럽의 어중이 떠중이들 때문에 전과 같이 마을이 순수하지만은 않고 비밀과 안 좋은 소문들이 가득한 음험한 곳이 되어버렸다는 푸념을 곧잘 듣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넬리 노이하우스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를 그저 하나 더 더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넬리 노이하우스도 이걸 토비아스 개인의 비극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가사 크리스티와 비슷하다. 이것은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집단적 배척의 모습을 묘사하는데서 드러나는데 그들의 똘똘뭉침엔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고 그저 달리 분노할데가 없으니까 마침 잘 걸렸다는 식의 배척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토비아스는 그들에게 있어 두더쥐 잡기 게임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넬리 노이하우스가 더욱 드러내려 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를 잃어버린 사회적 증오이다. 이런 면이 아가사 크리스티와 비슷한 것이며 그렇기에 그 아가사 크리스티가 그랬듯이 이것도 어쩌면 현실 사회의 상황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토비아스는 무엇을 은유하는 것이고 또 넬리 노이하우스는 이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 것일까? 넬리 노이하우스가 독일인임을 생각하면 여기에 대한 답은 한결 쉬워진다.

 

  그러니까 토비아스는 바로 독일 통일 이후에 동독에서 서독으로 내려온 사람들을 은유하는 존재라는 것이 말이다. 다시 말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통해 통일 독일 이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때 같이 있었으나 저편에서 건너온 자들이 되어버린 동독인들과 같이 토비아스 역시 누명을 쓰고 고향에서 쫓겨나 10년간 수감되어 있다 풀려난 존재이고 토비아스가 오래도록 감옥에 있었듯이 동독 역시도 소련 연방에 의해 강제적으로 편입되어 오래도록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넬리 노이하우스가 토비아스에게 그러한 이력을 선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동독과 비슷한 과거를 가지게 하여 토비아스가 바로 서독에 내려온 동독인들의 은유적 존재임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토비아스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 배척 역시 은유이다. 그러니까 독일이 통일 된지도 벌서 십 수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는 서독인들의 동독인들에 대한 배척, 즉 그들의 무분별한 희생양 만들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흥미로운 텍스트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볼 수 있었던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은 사실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같은 독일 출신 감독 볼프강 베커를 통해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바로 영화 '굿바이 레닌'을 통해서 말이다. 거기서 주인공 아들은 동독 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동독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연극을 벌여 어머니를 안심시킨다. 이렇게 '굿바이 레닌'은 체제가 무너진 뒤의 동독 사람들이 겪게되는 정체성의 혼란을 다루고 있었다. 동독인들이 그만큼 혼란을 겪었다면 몰려 내려온 동독인들로 인해 서독인들 역시 혼란을 겪게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바로 그 '굿바이 레닌'에 대한 서독인들의 대답인 셈이다. 

 

  하지만 노이하우스는 그러한 정체성의 혼란만은 아닌 왜 그러한 혼란이 생겼느냐까지 물으려 한다. 그것은 토비아스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일어난 범죄 때문에 마을에 온 보텐하우스와 피아 형사 콤비로써 드러낸다. 이 원인의 추구에 있어 노이하우스는 수사 과정 뿐만 아니라 보텐하우스와 피아 콤비의 사생활까지 가져와 보여주는데 결과적으로 거기에 대한 해답은 둘의 결혼생활로 제시된다.

 

  소설에서 보텐하우스는 이미 결혼이 파탄나 있고 피아는 새로이 결혼 생활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둘은 모두 삶의 변화를 앞두고 있는데 바로 이를 통해, 정확히는 이들의 변화에 대한 태도를 통해 노이하우스는 궁극적으로 그 혼란이 생기게 된 까닭을 탐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둘의 사생활은 작품의 중심이 되는 토비아스의 귀환으로 비롯되는 범죄 이야기와는 맥락상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이 작품엔 두 개의 이야기가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의문은 노이하우스가 왜 굳이 이런 설정을 했느냐로 향한다. 결국 깨닫게 되는 건 그녀가 사실상은 두 개의 이야기를 병행시킨 것은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른 걸 천착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토비아스의 이야기로는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으로 수렴되는 야기된 정체성 혼란의 상태를 천착하고 보텐하우스- 피아 콤비의 이야기로는 그렇게 혼란을 야기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지 천착하려 했다는 말이다. 굳이 둘로 나눠야 했던 것은 이게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넬리 노이하우스는 현상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그 원인과 대안까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둘의 이야기로 나누어 전자엔 현재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유추하고 후자엔 자신이 생각하는 그 원인과 극복가능한 대안을 담기위해 두 개의 물길을 작품에다 열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토비아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단 사회가 작위적으로 행하는 낙인을 통한 희생양 생산을 충실히 보여준 다음 거기 가세하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은연중에 동독인들에 대한 서독인들의 모습으로 가져오면서 넬리 노이하우스는 묻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바로 동독인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느냐고. 이들의 불합리가 우리들이 가진 증오의 불합리가 아니냐고. 그리고 그러한 증오에 대한 다른 이들의 방관과 무시는 또 우리들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증오를 보았을 때 방관하고 무시했던 것과 같지 않냐고. 넬리 노이하우스는 바로 이 질문을 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고 거기에 대한 대답 또한 작품에서 하려한다. 그래서 보텐하우스와 피아가 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특히 피아가 중요하다. 유일하게 토비아스에게 관심을 갖고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피아라는 존재는 최소한 방관과 무시만은 하지 말자고 하는 넬리 노이하우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다시 말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그 피아처럼 자신의 과거를 고집하지 말며 새로운 변화에 마음을 열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 제안을 위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더 가져온다. 그가 바로 토비아스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존재인 '아멜리'이다. 아멜리는 토비아스의 귀향과 비슷한 시기에 마을에 온다. 원래 오기 싫었지만 할 수 없이 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멜리는 적극적으로 적응하려 애쓴다. 새롭게 다가온 변화를 할 수 있는 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건 상황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을 모두가 배척하는 토비아스를 비롯 사람들이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존재까지 아멜리는 다 받아들인다. 한 마디로 그녀는 변화를 긍정하는 태도의 상징이다. 이는 피아와 아멜리 모두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보텐하우스를 고려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그는 결혼의 파국이 가져온 변화를 결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더구나 같은 수사관을 이렇게 설정했다는 것은 통일 이후 변해버린 체제에 대한 서독인들의 태도를 대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였기도 하다. 결국 사건의 해결을 누가 하는가가 넬리 노이하우스가 가지고 있는 대안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일본식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파 미스터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일 통일 이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동독인들에 대한 서독인들의 증오를 '낙인으로 희생양 만들기'라는 소재로 풀어가 본 작품인 것이다. 결국 그녀가 제시하는 대안은 단순하게 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피아와 아멜리가 보여주는 대로 변화에 대한 긍정이다. 내가 처한 변화된 현실에의 긍정이 결국은 타인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아멜리와 피아의 이야기를 통해 충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분단 국가로서 독일의 현실은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정말 중요한 것은 통일이 아니라 그 이후가 아닐까 한다. 수십년간이나 서로 다르게 살아온만큼 아무래도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조선족이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 시선을 생각해 보면 통일 이후 북한 주민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도 서독인들의 시선과 별로 다를 것 같지 않다. 갈등을 현명하게 푸는 방법은 일단 상대를 긍정한 상태에서 그들의 처지를 먼저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를 긍정하고 들으려는 귀를 준비시키는 넬리 노이하우스의 이 작품은 충분히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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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2-17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면서 보텐하우스와 피아에 대한 일은 왜 나올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했는데...
무엇인가 달라지는 것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개인의 일은 그럴지라도 나라에 일어난 일은 좋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언젠가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에 대해 안 좋게 여기지 않아야 할 텐데
그 반대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누가 진짜 범인이야 하는 것만 생각하며 봤는데...
사회파 미스터리였군요


희선

bggg 2013-05-2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이책재밌게봤어요.추리물을워낙좋아라하는지라…^^
요즘보는책은<너무예쁜소녀>라는독일스릴러소설인데요,마치한편의스릴러영화를보는듯한느낌이에요.
너무재밌어서책읽자마자절반가까이읽어버렸어요.이제아까둔결말부분을읽을차례인데요…아직풀리지않는의문하나!도대체왜죽였을까??


자운영 2019-12-13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책 내용은 읽는자의 몫이지만 한권의 추리소설을 읽고 사회현상, 사회 와 국가, 사회집단의 심리까지 들어야 볼 수 있는 독후감을 써 낸다는게 쉽지 않음을 , 그래서 독자는 혼자 읽고 느끼는 것 보다 더 폭넓은 독서를 할 수 있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되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에 한 줄 남깁니다. 독후감 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필립 코틀러의 굿워크 전략 - 세상과 소비자의 마음을 얻고, 함께 성장하라!
필립 코틀러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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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필립 코틀러 라는 이름은 이제 거의 마케팅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마케팅을 그의 책을 통해 배웠던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의 주저중 하나인 '마케팅 원리'는 마케팅의 바이블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으니까. 퍼블릭 마케팅, 퍼스널 마케팅, 브랜드 마케팅, 수평 마케팅 또는 미래형 마케팅등 이렇게 40년에 걸쳐 각종 방향으로 마케팅 기법들을 연구하고 개발해오던 그가 2006년 현재 소셜 마케팅 서비스 사의 사장이자 워싱턴 대학교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낸시 R 리와 함께 조금은 다른 관점의 책을 하나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CSR, 즉 'CORPORATIVE SOCIAL RESPONSIBILITY(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책이다.

 

 

 

 

 2006년, 이 책의 출현은 이제 기업은 그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1970년 밀턴 프리드먼이 뉴욕타임즈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이다'라고 발표했던 그 패러다임을 말이다. 지금까지 기업은 오로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므로 주주의 이익만 극대화할 수 있다면 아무리 실업률이 높아도 정리해고를 단행해도 괜찮고 이대로라면 파산이 불보듯 뻔한데도 금융 상품을 마구잡이로 남발하여 이익을 거둬들여도 괜찮은 것으로 여겨져왔다. 단순하게 말해 돈은 개같이 벌어야 한다는 그런 패러다임이 지금까지 기업들에겐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2006년의 그 책에서 필립 코틀러는 이제는 그런 패러다임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상품의 가치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가치까지 고려하는 시대로 말이다. 이제 소비자들은 내가 지금 쓰는 돈이 어떤 기업을 이롭게 하는가 까지 묻고 있으며 만일 그 기업이 악덕 기업이라면 아무리 상품이 좋다고 해도 돈을 지불하지 않으려 한다. 바야흐로 기업은 이제 자신의 가치를 신경써야 하게 되었고 그 가치는 주로 기업이 얼마나 공익에 헌신하고 있는가 즉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의 여부로 결정된다. 윤리적 기업이 되지 않으면 운신하기가 힘든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부터 6년 뒤, 이제 또 하나의 저자로 공익 연계 마케팅을 주로 연구하고 있는 데이비드 헤스키엘까지 참여하여 세상에 나오게 된 '필립 코틀러의 굿워크 전략'은 그렇게 'CSR'의 연속선상에 있는 책이다. 그가 다시금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책을 내놓게 된데는 이유가 있다. 2006년에 예견했던 대로 기업에 있어 CSR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추세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적으로 <포춘>이 선정한 250개의 글로벌 기업들의 CEO가 입을 모아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음에서 드러난다. 그렇게 모두가 강조해야 할 정도로 이제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가장 우선적인 변수중의 하나로 고려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의 기부 현황을 발표하는 기빙 USA의 2011년 발표에 따르면 경제적 불황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사회적 기부가 작년에 비해 무려 10.6%나 증가했다. 더구나 기업이 공익의 스폰서로 활동하는 것에 있어서는 각종 스폰서십 부문에서 가장 빠른 성장률마저 보이고 있다. 패러다임이 변했다는 징후가 이렇게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2006년의 CSR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처녀지를 개간하는 것과 같았다. 즉 기업들로 하여금 아직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회적 책임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고 이제 그것을 하나의 규범으로까지 만드는 게 그 책의 목적이었다. 지금 그것은 250개의 글로벌 기업의 CEO들의 목소리에서도 보여지듯이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그렇다면 마케팅 기법 역시도 이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기업의 CSR을 더욱 고취시키고 또한 그러한 노력들을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마케팅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필립 코틀러는 이제 상황이 의무에서 전략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필립 코틀러는 다시 한 번 거기에 관계된 책을 펴내야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2006년에 나온 책이 CSR의 총론에 해당한다면 지금 나온 '굿 워크 전략'은 그 각론으로, CSR에 의거하여 어떻게 마케팅 전략을 펼친 것인가에 대한 그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지침들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이 나와야 했던 이유는 당연하다. 막상 CSR 마케팅을 하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잡기가 그리 쉽지 않은 까닭이다. 잘못 캠페인을 펼쳤다간 CSR과 기업의 가치 상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게 된다. 그만큼 공익 활동은 쉽지가 않다. 그러므로 거기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러한 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거기에 주안점을 두고 쓰여졌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마케팅을 하려는 사람이 보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쓰여진 것이다. 필립 코틀러는 기업의 CSR 활동을 모두 6개의 범주로 나눈다. 이것은 기업이 CSR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여섯 가지 전략적 마케팅 방법이기도 하다. 그 6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공익 캠페인

 2) 공익 연계 캠페인

 3) 기업의 사회 마케팅

 4) 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

 5) 지역사회 자원봉사

 6) 사회책임 경영 프랙티스

 

 공익 캠페인은 공익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관심을 드높이기 위하여 벌이는 캠페인이나 기금을 모집 등 그렇게 기업이 직접 참여하고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공익 연계 캠페인은 기업이 주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 등이 그러한 활동을 할 때 일종의 스폰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의 사회 마케팅은 기업이 직접 주도한다는 점에서는 공익 캠페인과 같으나 공익 캠페인이 주로 대중의 인식과 관심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기업의 사회 책임은 대중의 구체적 행동 변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이 다르다. 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은 공익 연계 캠페인과 비슷한데 여기서는 직접적인 현물 투자나 자금 투자가 이루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지역사회 자원봉사는 지금 한창 유행중인 '재능기부'와 같은 활동을 기업이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회책임 경영 프랙티스는 경영 단계에서 이미 그러한 공익적 목적을 두고 조직이나 투자등을 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책은 이것을 각각 하나의 장으로 분할하여 구체적 설명과 함께 다양한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 낼 수 있을 것인지 설명한다. 마케팅의 대가 필립 코틀러답게 설명은 체계적이고 이해를 도와주는 사례는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개념 잡기도 어려울 것 같았던 CSR 마케팅에 쉽게 다가가도록 하고 있다.

 

 

 

 

 - 각 부문별마다 이렇게 도표로 정리해 놓아 더욱 쉽게 이해하게끔 돕고 있다. -

 

 

 요즘도 TV를 보면 기업이 주도하는 재능 기부 프로그램이나 공익 광고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미 우리나라도 CSR 마케팅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만큼 이제 기업의 패러다임은 변했고 이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필립 코틀러의 '굿 워크 전략'은 이렇게 달라진 시대에 어떻게 하면 잘 대응할 수 있을지 쉽고도 편하게 도움을 주는 책이다. 공익 마케팅에 다가가기 어려웠던 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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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6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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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초, 우리들에게도 '큐어'나 '회로' 혹은 '강령' 같은 영화들로 잘 알려진 구로사와 기요시는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속죄'를 5부작 드라마로 만들었습니다. 그 드라마는 작년, 그러니까 2011년 일본에게 닥쳐온 미증유의 비극인 3. 11 사태가 현재 일본에게 무엇을 남겼으며 이제 일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응답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구로사와 기요시는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에서 지금 일본의 시대 정신 같은 것을 본 것이죠. 쉽게 말해 그와 같은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인 일본인들은 이제 속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은 죄를 다른 것으로 대신 갚는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는 속죄의 강조는 기요시에게 있어 이제 관념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행동의 시대가 와야한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속죄를 강조하고 있음은 드라마 자체에서 드러납니다. 이 드라마의 다섯 편은 일어난 하나의 비극(이 비극이 바로 3. 11을 상징한다는 건 두 말할 필요가 없겠죠.)에 그 날 같이 있었으나 그 비극을 막지 못했던 초등학교 친구 네 명과 그 네명에게 속죄를 강요하지만 정작 가장 큰 원인의 제공자이기도 한 어머니가 돌아가면서 하는 속죄의 행동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니까요. 기요시는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된다.(드라마에서 비극은 친구 네 명이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던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행동이 필요하다. 참여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살아남은 자들인 우리의 책임이다.(결국 이 드라마의 인물들의 행위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죠.)'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구로사와 기요시와 미나코 가나에의 만남은 필연적이라 생각합니다. 미나코 가나에야 말로 기요시가 말하는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나코 가나에가 기요시와 닮은 입장에 선다는 것은 최근에 방영된 그녀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든 드라마 '고교입시'에서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고교 입시가 치뤄지는 이틀 동안의 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드라마의 진짜 이야기는 과거에 일어난, 그것이 제대로 시정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잘못에 대하여 속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잘못을 아는 자들은 그대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알면 아는만큼 모르면 모르는만큼, 그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사회가 양산하고 있는 비극을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해서 눈 감지 않고 그것을 끊기 위해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까지 감수하고서 말이죠. 이 드라마를 보면 가나에의 노선이 또 많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가나에에게 있어서 비극은 과거형이 아닙니다. '왕복서간'까지 미나토 가나에에게 있어서 치유되어야 할 비극은 늘 과거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속죄의 행위 역시 한계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아무리 해도 되돌릴 수 없는 비극에 대한 속죄란 결국 관련된 당사자에게 남겨진 상처의 치유 외에는 남는 게 없는 게 아닐까요? '왕복서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야행관람차'를 기점으로 비로소 타자의 처지에 서서 그의 입장을 배려해 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관념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왕복서간'이 결국은 서간체로 쓰여졌다는 것이 잘 보여줍니다. 어쨌거나 거기엔 마음 속의 헤아림만 있을 뿐 행위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으니까요.  '왕복서간'까지는 그러한 관념 상의 자리바꿈 만으로도 괜찮았는지 모릅니다. 아시나요? '왕복서간'은 2010년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2011년을 기점으로 이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거대한 쓰나미가 덮쳐오고 원전이 녹아내리는, 그야말로 한 치 앞의 미래도 낙관할 수 없는 광막한 어둠이 닥쳐왔으니까요.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더구나 그 어둠이 여전히 현재진행형 중이라면 더더욱 남게 되는 것은 초조함 뿐입니다. 지금도 바로 곁에서 벌어지고 있기에 마음으로 차분히 음미할 시간적 여유 따위가 없는 겁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가 바로 그걸 보여줍니다. 네 명의 친구들이 하는 속죄의 방식을 통해서 말이죠. 그녀들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으로 속죄를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바로 곁에서, 지금도 진행중인 잘못을 바로 잡는 것으로 속죄를 합니다. 숙고의 시간도 없고, 주저의 시간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것은 행동을 부르는 결단 뿐입니다.

 

  그래서 초조함이 느껴집니다. 기요시가 암묵적으로 '우리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뭔가 변화를 위해 지금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 초조함이 속죄의 형식을 요청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속죄는 당위이니까요. 자신이 지은 죄를 갚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엔 어떠한 변명이나 회피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행위로 갚을 뿐입니다. 칸트가 말한 절대적 명령, 그것이 바로 속죄의 근본입니다. 드라마에서도 그랬습니다. 살해당한 소녀의 어머니가 네 명의 친구들에게 속죄하라고 말했을 때 그 네 명 중 누구도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작 시청자들의 눈엔 그러한 어머니의 주장이 한 없이 부당하게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그 정도로 기요시는 속죄의 당위성, 숙명성을 강조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행동과 참여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죠.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경우'도 그렇습니다. 본질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앞에서 말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와 모든 것에서 일치합니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두 인물, 하루미와 요코는 서로 같은 고아라서 더없이 가까워지게 된 사이입니다. 어느 날 하루미가 간직한 파란 리본에 얽힌 사연을 듣게 된 요코는 지방 의원 선거로 인해 집에 혼자 있어야만 하는 아들이 불쌍해 '지금 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엄마는 늘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 하는 마음으로 엄마의 사랑이 간직된 파란 리본을 통해 들려주었던 하루미의 얘기를 한 권의 동화책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게 우연찮게 출판되게 되고 큰 상까지 받아 요코는 유명해집니다. 요코는 하루미의 얘기를 허락받지도 않고 썼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하루미는 상관할 것 없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다 요코에게 그만 커다란 불행이 닥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유괴되어버린 것이죠. 그런데 유괴범이 요구해 오는 것이 돈이 아닙니다. 그건 속죄입니다. 유괴범은 요코도 몰랐던 출생의 비밀을 찾게 하고 그것을 만인 앞에 고백하라고 명령합니다. '경우'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그 것처럼 역시나 속죄가 나오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유괴된 고로 사건은 바로 속죄의 주체 요코의 곁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며 그렇게 급박하게 사건이 돌아가는지라 제대로 음미할 여유도 주저할 여유도 없게 됩니다. 유괴라는 것 역시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서 속죄와 같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드라마에서 속죄하라는 명령에 말없이 따랐던 네 명의 친구들처럼 요코 역시도 팩스로 보내오는 유괴범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합니다. 아마도 가나에가 '경우'에 '유괴'를 가져온 것도 바로 그러한 명령의 당위성, 숙명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경우'는 구로사와 기요시가 바라보는 '속죄'와 똑같습니다. 스테판 에셀의 베스트셀러 제목을 살짝 표절하자면 '행위하라!'라는 칸트식 정언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설 '경우'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변화입니다. 관념의 영역 내에 머물러 있던 '왕복서간'에서 한 발 더 나갔으니까요. 물론 '고백'에서의 복수도 행위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윤리적 의미에서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는 점에서 '경우'의 행위와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윤리란 어디까지나 타자와의 관계를 놓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고백'의 행위는 타자의 입장에 서 있지도 않았고 그들의 처지를 배려하지도 않은, 오로지 자신만의 이기적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경우'의 행위는 무엇보다 타자의 입장에 서 보았던 '야행관람차'와 '왕복서간'을 경유한 끝에 나온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고백'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위인 것이죠. 이제 미나토 가나에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바꾸려고 실제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 곳에 다다른 것입니다. '경우'는 그것을 보여줍니다. '행위와 참여의 중요성'을 말이죠. 그리고 속죄가 원래 목표로 하는 진정한 치유 역시도 오로지 그것이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뒤이어 나온 드라마 '고교 입시'에서 여전히 그녀가 그 항로를 따라 비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하자면 이번에 나온 미나코 가나에의 '경우'는 자신이 가까이서 직접 보고 겪었던 3. 11 에 대한 작가로서의 응답입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가 거기에 대한 응답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그런 그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관망이 아닌 실천적 참여를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도 따를 수 밖에 없는 당위가 되도록 '속죄'라는 형식까지 요청해가면서 말이죠. 비록 하나의 작품이 설득은 될 수 있어도 해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렇게 결국 작품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하나의 제안이며 우리 사유의 끝이 아니라 촉발의 계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렇게 한 목소리를 내는 그들 모두가 바로 가까이서 그 비극을 체험한 자들이라는 사실은 어쩐지 이들의 제안을 보다 설득력있게 받아들이도록 만듭니다. 불에 데어 본 자만이 그 아픔을 알며 그 아픔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치유를 가져올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더 귀 기울여 볼 생각입니다. 새롭게 이륙한 미나토 가나에의 비행기가 어떤 항로를 그리며 나아가는지 계속 지켜볼 작정입니다. 이들의 아픔이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우리가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고 우리의 아픔이 될 수 있을 것임을 또한 알기에 그 때를 위해서라도 제 자신만의 대답을 찾기 위해 대화의 참여를 유도하는 그녀의 손짓에 기꺼이 화답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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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왕복서간'에 이르기까지 미나토 가나에가 걸어온 여정은...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2-08 14:12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왕복서간'에서 받게 될 느낌은 아마도 낯설음일 것이다. 그렇게 분명 이 작품엔 어떤 이질감, 뭔가 이전에 나온 가나에의 작품과 다른 것이 느껴진다. 물론 그 이질감의 직접적인 원인은 일단 이 소설이 모두 편지글의 형태로 되어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나에의 소설은 1인칭 시점이었다. 한 마디로 독백의 소설이었다. 물론 편지도 독백이긴 하다. 하지만 편지엔 확실한 수신자가 있다. 편지의 모든 말은 그 듣는 사
 
 
오드득 2013-02-0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나토 가나에의 '왕복서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궁금하시다면 위의 글을 참조해 주세요.

희선 2013-02-12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헤르메스 님이기에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사람이 지금까지 써 온 소설이 어떻게 바뀌어 온 것인지 잡아내는 눈(마음)
작가는 자신이 쓴 것을 바로 봐주는 사람이 있는 것을 기뻐할 겁니다

속죄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군요


희선

오드득 2013-02-12 16:24   좋아요 0 | URL
와! 희선님 감사합니다.
제가 좀 미나토 가나에 빠라서 하나의 작품보다는 이렇게 흐름 속에서 읽고싶어지네요.(그리고 그래야만 가나에의 매력이 더욱 드러난다는 근거없는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 쉽지 않기에 기요시든 가나에든 조건없이 해야하는 정언명령 식의 당위로 만든 게 아닐까 싶어요. 아무튼 그 정도의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요구된다는 것이 중요한 그들의 진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로트르 1 : 하이에나의 숨결 로트르 1
피에르 보테로 지음, 이세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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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판타지 문학만을 전문적으로 발간하고 있는 소담출판사에서 이번에 내놓은 '로트르'라는 작품은 몇 년 전 '에윌란의 모험'으로 국내에 소개된 피에르 보테로의 신작이다. 작가는 2009년 11월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 아깝게 사망했는데 그러니까 '로트르'는 그의 유작인 셈이다. 유작이라서 그런지 왠지 페이지가 더욱 허투르 넘어가지 않는다. '로트르'의 기본 얼개는 전작 '에윌란의 모험'과 유사하다. '에윌란의 모험'의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진짜 비밀을 깨닫고 모험의 여정을 나서는 것처럼 '로트르' 역시도 그러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나탕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이질(異質)의 감각 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다. 그 이질의 감각이 너무도 심해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조차 못했는데,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집의 화재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요행히 목숨을 건진 나탕은 정말로 자신이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보통 사람 이상의 특별한 능력으로 세계를 암묵적으로 이끌어왔던 '파미유'라는 존재라는 걸. 부모님 역시 자신과 같은 '파미유' 였으며 그들의 능력이 고루 자신에게 전해졌다는 것 또한. 그 능력으로 알고보니 부모님은 수상한 존재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도피한다. 그러다 같은 파미유인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인도로 샤에라는 소녀를 만난다. 샤에는 나탕보다 더 이질적인 존재였다. 왜냐하면 나탕은 그저 감각만이 이질이었는데 샤에는 아예 육체 자체가 이질이기 때문이다. 샤에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해버렸다. 그것도 거대한 하이에나로.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은 '파미유'가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각자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일곱개의 파미유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탕의 할아버지 앙통은 그러한 파미유에 대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바르트가 너에게 파미유마다 고유한 능력을 타고난다는 얘기는 했을 게다. 바티쇠르(짓는 자), 메타모르프(변신하는 자), 게리쇠르(치유하는 자), 네 어미의 파미유인 음네지크(기억하는 자), 스콜리아스트(주해하는 자), 그리고 우리 코지스트(생각하는 자)가 있단다."

  "그러면 모두 여섯뿐인데요."

  나탕이 지적했다.

  "일곱번째 파미유는 사실 파미유 반열에 오를 자격이 없어. 약하고 비겁하지. 가장 먼저 망조가 든 것도 그 파미유였고. 자기들은 가소롭게 기드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만."(p. 199) 

 

 앙통의 말투가 가진 뉘앙스에도 드러나듯이 이 일곱 개의 파미유들은 같은 존재지만 함께 협력하지는 않는다. 각자가 가진 능력이 저마다 최고라며 오히려 반목한다. 나탕의 아버지가 파미유임을 포기하고 보통 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파미유들은 절대 능력이 다른 파미유와 결혼해서는 안되는데 코지스트인 아버지가 그 반대를 무릎쓰고 음네지크인 어머니와 결혼하는 바람에 코지스트의 최고 수장이기도 한 나탕의 할아버지 앙통에 의해 파문을 당해 그리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질적인 육체의 샤에도 파미유라는 것이 밝혀진다. 바로 변신하는 자, 메타모르프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파미유들을 자기들에게 위협이 되는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는 코지스트는 이 샤에를 메타모르프가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보낸 스파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심문하기 위해 감금한다. 자신과 다른 존재지만 이미 사랑을 느껴버린 나탕은 샤에를 구해내고 자신을 샤에와 만나게 해 준, 결국 '기드'라는 파미유로 정체가 밝혀진 인물의 도움을 받아 코지스트의 추적을 피해 숨는다. 그리고 그 기드에게서 봉인되었던 악의 존재 로트르가 풀려났으며 자신과 샤에만이 로토를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이 1권까지의 이야기 인데('로트르'는 모두 3권으로 이루어져있다. 발간은 첫 권만 되었다.) 얼른 보아서도 이 이야기가 사실은 지금  유럽에서 거세게 불붙고 있는 인종적 편견에 대한 이야기('로트르'는 2009년에 프랑스에서 발간되었고, 차별을 받아오던 이민자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창 폭동을 일으켰던 무렵에 쓰여졌다.)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전작 '에윌란의 모험'과 비록 그 얼개는 비슷하나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두 작품 모두에서 나타나고 있는 특별한 능력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서 이것은 입증된다. 즉 '로트르'에서 나오는 특별한 능력들은 '에윌란의 모험'과 달리 프랑스에 존재하는 사회 계층이나 인종의 은유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최하층의 파미유로 경멸을 받는 기드가 사실은 프랑스에 존재하는 이민자 집단을 은유하는 것임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그의 이름에서 이것은 바로 드러난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전 아저씨를 동네에서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요."

  "내 이름은 라피 하디 맘눈 압둘 살람이다. 하지만 날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라피라고 부르지.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p.75)

 

 

  완전히 이슬람의 뉘앙스를 풍기는 이름이 아닌가? 이러한 라피는 사실 샤에보다 더욱 이질적이다. 이질적인 육체를 가진 샤에 조차도 본 적이 없는 존재로 그렇게 아예 사회 전체에 대해서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이 라피를 이민자 집단의 상징과 달리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이 작품 '로트르'는 그렇지 않아도 전직 교사인 피에르 보테로는 이 작품의 주 독자층인 청소년들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프랑스의 가장 커다란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의 프랑스는 어떤가?  그동안의 차별을 더 이상 못견뎌서 이민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만큼 프랑스는 계층에 따른 차별, 인종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해왔던 사회였다. 그건 소설에서 능력에 따른 차별을 절대시 했었던 파미유와 판박이였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이대로 괜찮을 것인가? 물론 아니다. 현실에서도 거센 폭동을 불러 일으켰듯이 봉인에서 풀려난 거대 악 '로트르'에 직면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 파미유에서 최상층으로서 이 체제가 더없이 굳건하다고 자부했던 코지스트들 조차도 로트르의 위협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즉 차별에 바탕을 둔 사회는 파미유만큼이나 취약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라져야했다. 서로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고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보듬어안고 존중해야 할 계기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피에르 보테로는 바로 이것을 들려주기 위하여 '로트르'를 쓴 것이다. 정말 소설 속의 '로트르'처럼 파국을 몰고 올지도 모를 미증유의 사태를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때문에 '이질성(異質性)'으로 뭉쳐지나 적대가 아닌 사랑과 도움의 동반자적 관계를 이루는 나탕과 샤에 (그리고 라피)가 구원자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로트르는 너희 둘의 핏줄에 여섯 파미유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란다."(p. 276)

 

 다시 말 해, 이들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실은 피에르 보테로가 전하고 싶은 대안인 것이다.

 

 소설은 전작 '에윌란의 모험'이 그랬듯 역시나 흡인력이 굉장하다. 조금 훑어만 보려 했다가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을 정도로. 보테로 전하고자 하는 것을 소설적 재미도 놓치지 않고 잘 우려내었다는 것이 이 작품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다. 좀 더 많은 그의 작품을 보고 싶기에 유작이라는 것이 너무도 아쉽다.

 

 '하늘에서 평안히 거하시기를...'  이렇게 뒤늦은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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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왕창 내렸던 날,

 저는 이 음반을 들었습니다.

 

 

 (제 사진은 아니고 역시 밥 딜런은 LP로 들어야 제 맛인 것 같아서 다른 분의 사진을 일부러 찾아서 가져온 것입니다.)

 

 가사가 좋아서인지 밥 딜런은 언제 들어봐도 좋습니다.

 이 음반에서 특히나 인상적인 곡은 역시 'HIGHWAY 61 REVISITED'이죠. 총 5명의 화자가 나와서 각자에게 닥친 문제를 61번 간선도로에서 해결한다는 내용인데, 이 노래의(이 61번 간선도로는 바로 밥 딜런의 고향이기도 한 미네소타의 둘루스로 이어지는 도로이며 이 도로는 또한 흔히들 락의 창시자로 일컫는 로버트 존슨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락을  얻었다는 교차로가 있는 49번 도로와 이어져 있기도 합니다. 미드 '슈퍼내추럴' 에서 주인공 형제가 악마와 접선하던 곳으로도 나왔던 그 교차로 말이죠.) 5절, 그러니까 마지막 부분엔 지루해진 끝에 다시금 세계 대전을 일으키려는 도박사가 나오죠. 그는 자기를 도와줄 프로모터를 만나는데 그는 이런 일은 해 본적이 없지만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며 61번 도로에서 표백제를 햇볕에 말려보자고 제안합니다. 물론 이것은 은유죠. 다음의 대전이 인종 차별로 일어날 것이라는 은유 말이죠. 갑자기 서두를 이 노래로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신작 때문입니다. 그 작품을 보자 그 노래가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무려 6년만이네요.

   움베르토 에코의 신작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소설은 비록 19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은 오늘날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에코의 직접적인 발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증오로 똘똘 뭉친 주인공이 거짓으로 만들어낸 문서 하나가 민족 대학살로 이어지는 소설의 이야기는 그야 말로 점점 보수화 되어가는 유럽에서 지금 횡행하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차디 찬 비판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차별의 근거가 사실은 오로지 증오에서 비롯된 거짓 산물일지도 모름을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그러면서 에코는 궁극적으로 과연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우리는 과연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들,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과연 거짓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합니다. 그가 사람들이 흔히들 가지고 있는 진리의 확신을 이처럼 공격하는 것은 바로 그 확신 위에서 모든 인종차별의 정당성이 마련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확신이 사실은 우리의 아집적 환영에 불과함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에코는 이 소설에서 오로지 주인공만 허구의 인물로 만들고 그 외 모든 인물과 상황은 역사적 사실 그대로 재현해 버립니다. 허구와 사실을 얼룩말 무늬와도 같이 어느 것이 본바탕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하여 독자들이 지금 읽고 있는 것이 허구인지 또는 사실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혼미한 진실과 허구의 감각 속에서 독자들 스스로 과연 내가 진실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자문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프라하의 묘지'가 가진 궁극적인 목적이 아닐까 합니다. 그 자문을 통하여 당연시하게 여겼던 인종차별주의적 믿음 역시 까놓고 보면 그 내부엔 오로지 근거 없는 증오 밖에는 없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까 자문은 자기 사유의 촉발이며 '프라하의 묘지'는 무엇보다 스스로 사유하도록 유도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금 증오의 시대가 시작된 요즘, 무분별한 증오에 빠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자기만의 사유로 판단을 내리는 것 밖에는 없으니까요. 유럽만큼이나 우리나라도 서서히 증오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증오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증오가 없이는 변화의 노력 또한 없으니까요. 하지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현명한 증오 뿐입니다. 소문이나 선동에 휘말리지 않고 스스로의 치밀한 사유로 찾은 분명한 증오의 이유로 증오할 때 우리는 그것을 현명한 증오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다 현명한 증오로의 길을 여는 이 '프라하의 묘지'는 우리에게도 제 때에 나와준 것 같네요. 그래서 추천합니다.

 

 

 

 

 

 

 

 

 

 

 

 

 

 

 

 '심문'과 '밤의 기억들'로 이미 우리에게 소개되었던 작가 토머스 H 쿡. '붉은 낙엽'은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토마스 H 쿡의 장기는 무엇보다 치밀하고도 섬세한 심리의 묘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두고 심리 스릴러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가 이렇게 심리에 치중하는 까닭은 범죄소설이 흔히 그러듯이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구원 혹은 치유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토마스 H 쿡의 소설들은 단적으로 말하면 구원을 향한 여정입니다. 그건 우리에게 소개된 '심문'과 '밤의 기억들'을 보면 바로 드러납니다. '심문'은 진실을 추구하려는 자와 은폐하려는 자 사이에 벌어지는 심리 게임이라 할 수 있는데 거기서는 진리의 확보가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뒤이은 '밤의 기억들'은 '만일 그 진리가 오히려 구원이 아니라 고통만을 안겨준다면 그래도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렇게 쿡의 작품들은 진정한 구원을 찾기 위한 탐색의 여정입니다. 소설 속에서 진행되는 미스터리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죠. 즉 주인공이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주인공의 자기 치유인 것입니다. 시놉을 보니 '붉은 낙엽' 역시도 이러한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니 그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가 이번엔 어느정도로 정교하게 깊이있게 만들어졌을지 기대가 되네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87분서 시리즈의 또 다른 작품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는 닥치고 추천합니다. 뭐, 이미 많은 분들이 좋은 추천의 말을 써 주셨으니 저는 요 정도만 쓸게요^ ^

 

 

 

 

 

 

 

 

 

 

 

 

 

 

 

 

 소개글에서는 오시이 마모루의 '이노센스'가 언급되고 있지만 사실 영화를 많이 본 분들이시라면 릴라당의 '미래의 이브'에서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도 한 번 만들었을만큼 SF 고전인 그 영화가 바로 '미래의 이브'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죠.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봤을 때 부터 한 번 꼭 보고싶었던 작품이었는데 드디어 나와주었네요. 최근에 기계가 되려는 인간의 이야기 '머신맨'도 나온 것 같은데 같이 읽어보면 더욱 좋을 듯 합니다.

 

 

 

 

 

 

 

 

 

 

 

 

 

 

 

 마지막은 일러스트 이방인 입니다. 제가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은 알베르 카뮈 때문이 아닙니다. 정말은 일러스트를 담당한 호세 무뇨스 때문입니다.

 강렬한 흑백 명암의 대비로 프랭크 밀러의 '신시티'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 대가급 작가라고 할 수 있는 호세 무뇨스. 하지만 그러한 위치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나라엔 전혀 소개되지 않았던 작가였습니다. 이 '일러스트 이방인'은 국내에 소개되는 호세 무뇨스의 유일한 작품이라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많이 팔려서 '신시티'의 원조가 되는 ALARK SINNER'도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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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2-07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딘가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가 잘 보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붉은 낙엽> 보신 분 글을 보니 괜찮다고 하더군요
구원과 치유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니, 그런 스릴러도 있군요
<일러스트 이방인>은 책이 크네요 그림 아주 잘 볼 수 있겠습니다


희선


오드득 2013-02-08 01:40   좋아요 0 | URL
와, 역시 '붉은 낙엽' 평이 좋은가 보군요. 저도 빨리 읽어봐야겠어요^ ^ 토마스 H 쿡이 원래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미스터리라도 그런 방향으로 쓰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일러스트 이방인의 크기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이번에 별로 추천을 못 받아서 선정될 확률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구입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