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새로이 한 발을 내딛는 미나토 가나에!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왕복서간'에서 받게 될 느낌은 아마도 낯설음일 것이다.

 

 그렇게 분명 이 작품엔 어떤 이질감, 뭔가 이전에 나온 가나에의 작품과 다른 것이 느껴진다. 물론 그 이질감의 직접적인 원인은 일단 이 소설이 모두 편지글의 형태로 되어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나에의 소설은 1인칭 시점이었다. 한 마디로 독백의 소설이었다. 물론 편지도 독백이긴 하다. 하지만 편지엔 확실한 수신자가 있다. 편지의 모든 말은 그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아는 상태에서 쓰여진다. 그러므로 다소 시간적 지연은 있지만 응답을 기다리는 대화를 위한 발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가나에의 독백들은 사실 그런 응답을 기다리는 소설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독백을 말하는 자가 이미 해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든 소설의 과정은 사실 독백을 하는 주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답이 과연 맞는지 아닌지 맞추어보는 검증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왕복서간'은 그게 아닌 것이다. '왕복서간'에서 편지를 보내는, 그래서 상대의 응답을 기다리는 모든 독백의 주체들은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정한 해답은 모두 듣는 상대에게 있다. 그러므로 독백의 주체들은 이제 그 타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게 '왕복서간'과 그 이전의 작품들이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차이점이다. 즉 '고백'과 '속죄'가 오로지 말하는 '입'만 존재하는 소설들이라면 '왕복서간'은 들으려는 두 '귀'가 주가되는 소설이다.  나는 여기서 '왕복서간' 바로 전에 나온 '야행관람차'를 빠뜨리고 있는데 그것은 '야행관람차'가 정확히 그 중간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야행관람차'는 '왕복서간'이 결정적으로 달라지기 위해 지나야만 했었던 일종의 징검다리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가나에의 모든 작품들을 마치 실에 진주를 꿰듯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놓을 수 있다는 의미고 그렇게 보았을 때 '왕복서간'은 그 최종 종착점이라 할 만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 붙게 되는 라벨(lable)은 무엇인가? 그것은 '고백'과 '왕복서간'이 가지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부각시키면 절로 드러날 것인데 일단 '고백'의 성격을 단적으로 정의하자면 그건 '트라우마'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가나에는 초기작에서 부터 내내 과거의 해묵은 상처를 바탕에 놓고 작품을 구축해왔다. 소설의 모든 독백들은 바로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다름아닌데 그러므로 그 상처는 내내 현실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간직한 자에게 치유를 강요하는 그렇게 트라우마인 것이다. 그런데 이 트라우마에 대해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외상성 신경증에서 일어나는 꿈은 환자를 사건의 현장, 즉 또 다른 경악 속에서 그를 잠에서 깨우는 그 현장 속으로 반복적으로 데리고 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p. 277)

 

 말하자면 트라우마는 늘 상처의 현재를 반복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가진 독백의 주체들은 조금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프로이드는 인용한 문장 아래에 이런 말도 덧붙인다. '그들은 트라우마에 고착되어 있다.'라고...

 

그들에겐 미래가 없다. 그래서 사실은 '말'하는 입 밖에 없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미래라는 시간이야 말로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타자란 나와 동등하거나 유사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타자가 진정한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든 근본적으로 '나'라는 동일자로 동화되어서는 안되기에 동일자의 완전한 바깥, 그 절대적 바깥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란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죽음'과도 같다고 할 수 있고 바로 그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 전혀 불가해한 것이면서 또한 우리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무한의 시간이 도래하는 존재이기에 레비나스는 타자의 동화불가능성이 타자의 무한성과 연결되는 것이며 정확히 바로 그 의미에서 타자는 바로 미래 자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미래가 가진 예측 불가능성이 그대로 타자의 동화불가능성과 연결되고 그것이 간직하고 있는 시간 또한 무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자와 시간의 연결성은 들뢰즈 역시도 같다. 들뢰즈는 그것을 오스 야스지로나 후 샤오시엔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뜬금없이 삽입되는 명상적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즉 영화의 맥락과 아무 상관없이 제시되는 그 장면들은 더구나 아무런 움직임 역시 없기에 마치 격리된 정물화와 같다. 모든 의미와 운동성이 상실된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화면에 지속되고 있는 '시간' 뿐이다. 들뢰즈는 그 순수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매개물을 '영화'로 생각했고 바로 그 때문에 두터운 두 권의 시네마론까지 쓴 것이다. 한 편 그 순수 지속의 시간 앞에서 관객들은 헤메이게 된다. 왜 느닷없이 이 장면이 주어졌는지 그 해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이른바 '간극'의 창출이며 거기서의 '망설임'이 순수 시간이 관객에게 주는 주된 효과다. 망설임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내부에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눈 앞에 제시된 화면, 자신의 이해가능성 너머의 영역에 위치한 '타자'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귀를 기울이는 것. 무엇인가 해답이 주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속에서의 애타는 귀기울임. 내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는 전적인 '나의 맡김'. 그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즉 이렇게 들뢰즈는 '순수 시간(pure time)'이야말로 타자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은 타자와 더불어 할 때 움직이는 것이란 걸...

 

 

 

 

 

 

 

 

 

 

 

 

 

 

 

 

  이런 의미에서 트라우마에 고착된 독백의 존재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그대로 그들의 눈에 타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소설에 나오는 모든 독백의 주체들은 타인들이 자신의 말에 어떤 영향을 받을지(보통 그 영향은 상처, 고통등이 될 것이다. 쏟아내는 고백들이 다 원한에서 비롯된 어두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타자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도구의 의미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독백의 주체들은 거침없이 타자를 문자그대로 파괴한다. 자신이 가진 해답이 너무도 확실하기에 타인이 가지는 해답은 고려하지도 않고 신화속에 나오는 프로크라스테스의 침대 처럼 자신의 해답에 철저하게 타인을 맞추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백'은 그런 소설이었다. 트라우마에 고착되어 귀는 없이 입만 존재하는 고백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트라우마를 안겼던 존재 자체를 스스로 스위치를 눌러 폭발시켜 버리는 와타나베는 그야말로 '고백'이 가진 진짜 의미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나토 가나에는 그것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치유해봤자 행복해지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소설은 그냥 고백으로 끝난다. 문득 독자에게 무한의 허공을 열어보이며... 소설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 여교사는 복수로 인해 치유되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더 괴로운지 알려주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여교사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를 가진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영화 '메멘토'가 그 좋은 예이다. '메멘토'의 주인공은 단기 기억 상실증에 시달린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그는 바로 전에 보았던 사람도 일어난 일도 곧잘 잊어버리는데 그래서 그의 몸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새긴 문신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그는 아내를 죽인 살인범을 추적한다. 단기 기억 상실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살인범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를 제거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밝혀지는 사실은 진짜 범인이 놀랍게도 바로 그 자신이었으며 그는 자기가 아내를 죽였다는 진실을 잊기 위해(말하자면 그에게는 그가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가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다른 이들을 범죄자라 이름 붙이고 희생함으로써 그렇게 상상적이면서 일시적인 치유를 반복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트라우마에 고착된 이들의 치유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식으론 영원히 치유할 수 없으며 그저 제2. 제3의 희생양을 만들어서 때때로 맞는 모르핀 처럼 잠시 잊게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고백'의 여교사도 분명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아마도 와타나베를 보내버린 그녀의 두 눈은 이미 다른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가나에에게 머무를 수 없는 장소였다. 그 고착이 가져올 영겁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장소를 찾아야했다.

 

 바로 그래서 그녀는 '야행관람차'를 타게 된 것이다.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행관람차는 가나에에게 있어 세상의 비유였고 타자에게로 눈을 돌리기 위한 매개물이었다. 소설은 정말 '야행관람차'처럼 전개된다. 야행관람차 각 칸에 올라탄 사람들이 바깥을 구경하듯 소설이 여러 등장인물들을 옮겨다니며 그들 각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던 중 아주 이상적인 모습의 가정으로써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겼던 가족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 진실을 알려고 한다. 하지만 모두 관람차에 갇힌 존재들. 그래서 그들이 가진 창으로 밖에는 볼 수 없기에 때로는 상처를 입히거나 입고 불안에 떨게 하거나 떨기도 한다. 그렇게 모두들 분명한 진실을 알 수 없기에 고통에 빠진다. 답은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 대답을 위해 미나토 가나에는 야행관람차를 가져 온 것이다. 빙글빙들 도는 야행관람차를. 그래서 위에도 있을 수 있고 왼쪽 오른쪽에서 있을 수 있으며 아래쪽에도 있을 수 있는 야행관람차를. 그렇게 고정된 위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때문에 고착이란 게 불가능한 야행관람차를 가져온 것이다. 즉 그 야행관람차는 타인이 바라보았던 시선을 나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소통의 매개물인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주체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 그리고 가나에는 바로 그러한 야행관람차식 시점의 이동으로 인해 결국 살인으로 엄습한 고통들마저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가나에는 '고백'의 '나 홀로 독백의 주체'가 껴 안을 수 밖에 없는 영겁의 저주를 야행관람차식 시점의 옮김(지젝이 말한 '시차'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을 통하여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가나에는 타자를 슬며시 가져온다. 이것이 중간 단계인 이유는 그 타자의 대답을 요청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현재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트라우마가 아니고 트라우마로 진행되던 과정에 있었다.(그래서 형식 마저 느슨한 형태의 1인칭 시점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치유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고착되지 않은 트라우마였기 때문에. '고백'은 이미 과거에 완성된, 그렇게 고착된 트라우마였다. 과연 그것도 이러한 타자들에게 맡김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     

 

 '왕복서간'은 바로 그 의문을 풀기 위한 작품이다. 여기에는 모두 세 편의 독립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모두는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즉 '고백'과 같은 완성된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다. 편지들은 모두 그 트라우마를 언급하며 그것의 실체를 알기 위해 묻고 대답한다. 추궁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고백'과 유사할지 모른다. 하지만 목적은 아예 정반대다. '고백'의 추궁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답을 남으로 하여금 실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여기에서의 추궁은 근본적으로 '치유'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스포일러상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도록 하겠다.) '왕복서간'에서 이렇게 치유가 가능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야행관람차'에서 적극적으로 타인을 포용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타자를 끌어들임이 상처를 일으킨 현재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정지의 사슬을 끊고 시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야행관람차가 돌아가듯이 말이다.(가나에는 어쩌면 시계의 비유로도 이것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드디어 미래가 도래했다. 아마도 그래서 가나에는 '왕복서간'에서 편지라는 형식을 취했는지도 모른다. 편지란 다름아닌 미래로 향한 발화이기 때문이다. 즉 편지를 쓴 사람이 기다리는 대답은 언제나 미래에서 불현듯 찾아온다. 그렇게 타자가 도래한다. 타자를 미래로 보았던 레비나스의 말 그대로 말이다.

 

 '왕복서간'이 시퍼런 날 선 언어들로 가득했던 '고백'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밀어들로 가득하다고 느꼈다면 바로 이런 변화 때문이었다. 가나에가 트라우마의 치유를 더 이상 '말하는 입'이 아니라 '들으려는 귀'를 통해 함으로써 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붙들려있었던 시간마저 미래로 진행시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나에의 작품들이 보여준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자기만의 상처에 골몰하기를 멈추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궁극의 치유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여정이었다.

 

 '왕복서간'은 이러한 가나에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에가 다다른 종착역이 어디인가를 확인하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다음에 이어질 여정의 보다 분명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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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7-0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백>을 읽고나서 하도 충격과 뒤끝이 심해서
<야행관람차>를 구매하고도 차마 펼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 <메멘토>를 한번은 열심히 봤으나 두번 다시 볼 생각이 들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거죠. 그런데,

<야행관람차>와 <왕복서간>을 통해서 포용이라는 개념으로 들어섰다고 하니
어쩐지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합니다. 근시일내에, 야행관람차를 먼저 읽어야겠어요. ^^

ICE-9 2012-07-21 00:02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야행관람차'를 읽지 못하다가 '왕복서간'과 '고백'의 차이가 너무 두드려져서 도대체 이 변화가 어떻게 된 것인가 알고 싶어서 집어들게 되어는데요. 그래서 왕복서간으로 가는 어떤 흐름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마녀고양이님께서는 어떻게 읽으실 지 궁금하네요.^ ^ 그런데 너무 뒤늦은 답글이라서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은 정말 시간이 안 나네요 ㅠ ㅠ

이진 2012-07-19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어디로 사라지신거예요 ㅠㅠㅠ
무려 열흘이라니, 이러다가 2주 채우시는 거 아닙니까?ㅎㅎ
내일이 신간평가단 리뷰 마감일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헤르메스님은 평가단장인데...(막 이래서라도 보고싶은 마음.ㅋㅋㅋ)

ICE-9 2012-07-21 00:03   좋아요 0 | URL
흑흑... 소이진님 ㅠ ㅠ
정말 너무 바빴어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오늘 리뷰 기한이라 어떻게든 다 읽고 쓰긴 했는데
때문에 몸은 이미 초주검 상태입니다. ㅠ ㅠ
소이진님은 이제 곧 방학이겠네요...
우왕~ 너무 배아파서 한달간 잠수타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