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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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일단은 사회 전체가 원하지 않는  자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프레드 진네만의 걸작 서부영화 '하이눈'을 닮았다. '하이눈'에서 그 초대 받지못한 손님은 악명 드높은 무법자로 총솜씨는 귀신 같은데다 사람 죽이기를 우습게 알기 때문에 모든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존재다. 그런 자가 감옥에서 풀려나 마을로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감옥에 가두었던 보안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 소식을 미리 들은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 자신의 안전 보다는 마을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아니 아예 마을 전체를 위해서 그 한 몸 희생하는게 어떻겠느냐고 말하는 이들까지 있다. 그렇게 무법자에게 찍혀버린 보안관은 그 역시 무법자와 마찬가지로 사회로 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된다. 이러한 '하이눈'은 50년대의 미국에 광풍처럼 불었던 찍히기만 하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을 당해야 했던 '메카시즘'을 은유하면서 사회가 '낙인에 의한 고립 효과'로서 얼마나 손쉽게 희생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낙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게 처음이 아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하나님으로 부터 낙인을 받은 바 있고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 또한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낙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사회가 존립을 이어가기 위해 기꺼이 희생양을 재생산하는 것은 인류의 그 시작에서 부터 지금까지 반복되어 오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희생양'이라는 책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가 낙인을 통한 희생양을 줄기차게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이 내부 갈등을 봉합하는 데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은 사회 내부에 갈등들이 점증하여 더 이상 기존 사회의 역량으로는 그것을 무마하기 어려울 때 생겨난다. 즉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불만의 물꼬를 다른 쪽으로 비틀어 일시적으로나마 그 끓는 열기를 식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생양이란 일종의 진통제와도 같다. 궁극적인 치유는 가져오지 못하지만 한 순간의 분풀이로 일시적인 무마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이렇게 낙인의 원인은 낙인을 받는 대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낙인은 오로지 사회의 일방적인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다. 역사적으로 사회는 그 존속을 위해서라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낙인을 찍어 희생양을 양산해왔다. 나치의 유태인이 그랬고 십자군 원정에서의 이슬람 교도가 그랬다. 그건 종교가 같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1572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유명한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에서 보여지듯 카톨릭 교도에게 있어 개신교 교도 역시 희생양인 건 마찬가지였다.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 역시도 이러한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이다. 여기에선 남자 주인공 토비아스가 그 초대받지 못한 손님의 역할을 맡는다. 그는 갓 스물 살이 되었던 10년 전 같은 동급생 소녀 둘을 죽였다는 혐의로 10년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배척한다. 고향에 돌아와보니 토비아스의 집안은 예로부터 고향에서 알아주던 유지였지만 그 일로 인해 파괴된 지 오래였다. 토비아스는 아버지를 도와 그런 집안을 다시금 일으키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마을 사람들이 일치단결하여 그를 10년 전의 죄로 배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비아스는 억울하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절대 자신이 저지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정말 거기에 대해 무죄라는 것을 살아가는 모습 자체로서 마을 사람들에게 입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쉽지가 않다. 한 번 찍혀버린 낙인은 결코 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 배척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질 뿐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익히 많이 보아온 이야기일 수 있다. 전과자를 주인공으로 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사실 이와 비슷하지 않았던가? 집단적인 배척을 받는 무죄한 희생양의 이야기는 영국의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도 참 많이 다루었던 소재였다. 하지만 크리스티는 그걸 개인의 문제로 풀지않고 집단의 문제로 풀었다. 그건 당시 사회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다. 그녀가 그런 작품을 한창 쓰던 무렵의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이 모조리 파괴되어 살길이 막막해진 러시아와 동유럽의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영국으로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그렇게 섞여든 동유럽과 러시아 사람들로 인한 마을의 변화를 담아내려 했었고 거기에 그 존재들은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로 자주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우리는 크리스티의 대표적 탐정 미스 마플 시리즈에서 전쟁 이후 몰려 든 러시아와 동유럽의 어중이 떠중이들 때문에 전과 같이 마을이 순수하지만은 않고 비밀과 안 좋은 소문들이 가득한 음험한 곳이 되어버렸다는 푸념을 곧잘 듣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넬리 노이하우스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를 그저 하나 더 더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넬리 노이하우스도 이걸 토비아스 개인의 비극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가사 크리스티와 비슷하다. 이것은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집단적 배척의 모습을 묘사하는데서 드러나는데 그들의 똘똘뭉침엔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고 그저 달리 분노할데가 없으니까 마침 잘 걸렸다는 식의 배척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토비아스는 그들에게 있어 두더쥐 잡기 게임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넬리 노이하우스가 더욱 드러내려 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를 잃어버린 사회적 증오이다. 이런 면이 아가사 크리스티와 비슷한 것이며 그렇기에 그 아가사 크리스티가 그랬듯이 이것도 어쩌면 현실 사회의 상황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토비아스는 무엇을 은유하는 것이고 또 넬리 노이하우스는 이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 것일까? 넬리 노이하우스가 독일인임을 생각하면 여기에 대한 답은 한결 쉬워진다.

 

  그러니까 토비아스는 바로 독일 통일 이후에 동독에서 서독으로 내려온 사람들을 은유하는 존재라는 것이 말이다. 다시 말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통해 통일 독일 이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때 같이 있었으나 저편에서 건너온 자들이 되어버린 동독인들과 같이 토비아스 역시 누명을 쓰고 고향에서 쫓겨나 10년간 수감되어 있다 풀려난 존재이고 토비아스가 오래도록 감옥에 있었듯이 동독 역시도 소련 연방에 의해 강제적으로 편입되어 오래도록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넬리 노이하우스가 토비아스에게 그러한 이력을 선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동독과 비슷한 과거를 가지게 하여 토비아스가 바로 서독에 내려온 동독인들의 은유적 존재임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토비아스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 배척 역시 은유이다. 그러니까 독일이 통일 된지도 벌서 십 수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는 서독인들의 동독인들에 대한 배척, 즉 그들의 무분별한 희생양 만들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흥미로운 텍스트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볼 수 있었던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은 사실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같은 독일 출신 감독 볼프강 베커를 통해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바로 영화 '굿바이 레닌'을 통해서 말이다. 거기서 주인공 아들은 동독 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동독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연극을 벌여 어머니를 안심시킨다. 이렇게 '굿바이 레닌'은 체제가 무너진 뒤의 동독 사람들이 겪게되는 정체성의 혼란을 다루고 있었다. 동독인들이 그만큼 혼란을 겪었다면 몰려 내려온 동독인들로 인해 서독인들 역시 혼란을 겪게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바로 그 '굿바이 레닌'에 대한 서독인들의 대답인 셈이다. 

 

  하지만 노이하우스는 그러한 정체성의 혼란만은 아닌 왜 그러한 혼란이 생겼느냐까지 물으려 한다. 그것은 토비아스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일어난 범죄 때문에 마을에 온 보텐하우스와 피아 형사 콤비로써 드러낸다. 이 원인의 추구에 있어 노이하우스는 수사 과정 뿐만 아니라 보텐하우스와 피아 콤비의 사생활까지 가져와 보여주는데 결과적으로 거기에 대한 해답은 둘의 결혼생활로 제시된다.

 

  소설에서 보텐하우스는 이미 결혼이 파탄나 있고 피아는 새로이 결혼 생활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둘은 모두 삶의 변화를 앞두고 있는데 바로 이를 통해, 정확히는 이들의 변화에 대한 태도를 통해 노이하우스는 궁극적으로 그 혼란이 생기게 된 까닭을 탐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둘의 사생활은 작품의 중심이 되는 토비아스의 귀환으로 비롯되는 범죄 이야기와는 맥락상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이 작품엔 두 개의 이야기가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의문은 노이하우스가 왜 굳이 이런 설정을 했느냐로 향한다. 결국 깨닫게 되는 건 그녀가 사실상은 두 개의 이야기를 병행시킨 것은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른 걸 천착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토비아스의 이야기로는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으로 수렴되는 야기된 정체성 혼란의 상태를 천착하고 보텐하우스- 피아 콤비의 이야기로는 그렇게 혼란을 야기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지 천착하려 했다는 말이다. 굳이 둘로 나눠야 했던 것은 이게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넬리 노이하우스는 현상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그 원인과 대안까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둘의 이야기로 나누어 전자엔 현재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유추하고 후자엔 자신이 생각하는 그 원인과 극복가능한 대안을 담기위해 두 개의 물길을 작품에다 열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토비아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단 사회가 작위적으로 행하는 낙인을 통한 희생양 생산을 충실히 보여준 다음 거기 가세하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은연중에 동독인들에 대한 서독인들의 모습으로 가져오면서 넬리 노이하우스는 묻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바로 동독인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느냐고. 이들의 불합리가 우리들이 가진 증오의 불합리가 아니냐고. 그리고 그러한 증오에 대한 다른 이들의 방관과 무시는 또 우리들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증오를 보았을 때 방관하고 무시했던 것과 같지 않냐고. 넬리 노이하우스는 바로 이 질문을 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고 거기에 대한 대답 또한 작품에서 하려한다. 그래서 보텐하우스와 피아가 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특히 피아가 중요하다. 유일하게 토비아스에게 관심을 갖고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피아라는 존재는 최소한 방관과 무시만은 하지 말자고 하는 넬리 노이하우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다시 말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그 피아처럼 자신의 과거를 고집하지 말며 새로운 변화에 마음을 열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 제안을 위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더 가져온다. 그가 바로 토비아스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존재인 '아멜리'이다. 아멜리는 토비아스의 귀향과 비슷한 시기에 마을에 온다. 원래 오기 싫었지만 할 수 없이 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멜리는 적극적으로 적응하려 애쓴다. 새롭게 다가온 변화를 할 수 있는 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건 상황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을 모두가 배척하는 토비아스를 비롯 사람들이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존재까지 아멜리는 다 받아들인다. 한 마디로 그녀는 변화를 긍정하는 태도의 상징이다. 이는 피아와 아멜리 모두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보텐하우스를 고려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그는 결혼의 파국이 가져온 변화를 결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더구나 같은 수사관을 이렇게 설정했다는 것은 통일 이후 변해버린 체제에 대한 서독인들의 태도를 대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였기도 하다. 결국 사건의 해결을 누가 하는가가 넬리 노이하우스가 가지고 있는 대안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일본식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파 미스터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일 통일 이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동독인들에 대한 서독인들의 증오를 '낙인으로 희생양 만들기'라는 소재로 풀어가 본 작품인 것이다. 결국 그녀가 제시하는 대안은 단순하게 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피아와 아멜리가 보여주는 대로 변화에 대한 긍정이다. 내가 처한 변화된 현실에의 긍정이 결국은 타인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아멜리와 피아의 이야기를 통해 충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분단 국가로서 독일의 현실은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정말 중요한 것은 통일이 아니라 그 이후가 아닐까 한다. 수십년간이나 서로 다르게 살아온만큼 아무래도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조선족이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 시선을 생각해 보면 통일 이후 북한 주민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도 서독인들의 시선과 별로 다를 것 같지 않다. 갈등을 현명하게 푸는 방법은 일단 상대를 긍정한 상태에서 그들의 처지를 먼저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를 긍정하고 들으려는 귀를 준비시키는 넬리 노이하우스의 이 작품은 충분히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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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2-17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면서 보텐하우스와 피아에 대한 일은 왜 나올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했는데...
무엇인가 달라지는 것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개인의 일은 그럴지라도 나라에 일어난 일은 좋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언젠가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에 대해 안 좋게 여기지 않아야 할 텐데
그 반대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누가 진짜 범인이야 하는 것만 생각하며 봤는데...
사회파 미스터리였군요


희선

bggg 2013-05-2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이책재밌게봤어요.추리물을워낙좋아라하는지라…^^
요즘보는책은<너무예쁜소녀>라는독일스릴러소설인데요,마치한편의스릴러영화를보는듯한느낌이에요.
너무재밌어서책읽자마자절반가까이읽어버렸어요.이제아까둔결말부분을읽을차례인데요…아직풀리지않는의문하나!도대체왜죽였을까??


자운영 2019-12-13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책 내용은 읽는자의 몫이지만 한권의 추리소설을 읽고 사회현상, 사회 와 국가, 사회집단의 심리까지 들어야 볼 수 있는 독후감을 써 낸다는게 쉽지 않음을 , 그래서 독자는 혼자 읽고 느끼는 것 보다 더 폭넓은 독서를 할 수 있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되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에 한 줄 남깁니다. 독후감 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