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6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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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초, 우리들에게도 '큐어'나 '회로' 혹은 '강령' 같은 영화들로 잘 알려진 구로사와 기요시는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속죄'를 5부작 드라마로 만들었습니다. 그 드라마는 작년, 그러니까 2011년 일본에게 닥쳐온 미증유의 비극인 3. 11 사태가 현재 일본에게 무엇을 남겼으며 이제 일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응답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구로사와 기요시는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에서 지금 일본의 시대 정신 같은 것을 본 것이죠. 쉽게 말해 그와 같은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인 일본인들은 이제 속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은 죄를 다른 것으로 대신 갚는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는 속죄의 강조는 기요시에게 있어 이제 관념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행동의 시대가 와야한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속죄를 강조하고 있음은 드라마 자체에서 드러납니다. 이 드라마의 다섯 편은 일어난 하나의 비극(이 비극이 바로 3. 11을 상징한다는 건 두 말할 필요가 없겠죠.)에 그 날 같이 있었으나 그 비극을 막지 못했던 초등학교 친구 네 명과 그 네명에게 속죄를 강요하지만 정작 가장 큰 원인의 제공자이기도 한 어머니가 돌아가면서 하는 속죄의 행동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니까요. 기요시는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된다.(드라마에서 비극은 친구 네 명이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던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행동이 필요하다. 참여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살아남은 자들인 우리의 책임이다.(결국 이 드라마의 인물들의 행위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죠.)'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구로사와 기요시와 미나코 가나에의 만남은 필연적이라 생각합니다. 미나코 가나에야 말로 기요시가 말하는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나코 가나에가 기요시와 닮은 입장에 선다는 것은 최근에 방영된 그녀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든 드라마 '고교입시'에서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고교 입시가 치뤄지는 이틀 동안의 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드라마의 진짜 이야기는 과거에 일어난, 그것이 제대로 시정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잘못에 대하여 속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잘못을 아는 자들은 그대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알면 아는만큼 모르면 모르는만큼, 그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사회가 양산하고 있는 비극을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해서 눈 감지 않고 그것을 끊기 위해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까지 감수하고서 말이죠. 이 드라마를 보면 가나에의 노선이 또 많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가나에에게 있어서 비극은 과거형이 아닙니다. '왕복서간'까지 미나토 가나에에게 있어서 치유되어야 할 비극은 늘 과거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속죄의 행위 역시 한계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아무리 해도 되돌릴 수 없는 비극에 대한 속죄란 결국 관련된 당사자에게 남겨진 상처의 치유 외에는 남는 게 없는 게 아닐까요? '왕복서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야행관람차'를 기점으로 비로소 타자의 처지에 서서 그의 입장을 배려해 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관념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왕복서간'이 결국은 서간체로 쓰여졌다는 것이 잘 보여줍니다. 어쨌거나 거기엔 마음 속의 헤아림만 있을 뿐 행위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으니까요.  '왕복서간'까지는 그러한 관념 상의 자리바꿈 만으로도 괜찮았는지 모릅니다. 아시나요? '왕복서간'은 2010년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2011년을 기점으로 이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거대한 쓰나미가 덮쳐오고 원전이 녹아내리는, 그야말로 한 치 앞의 미래도 낙관할 수 없는 광막한 어둠이 닥쳐왔으니까요.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더구나 그 어둠이 여전히 현재진행형 중이라면 더더욱 남게 되는 것은 초조함 뿐입니다. 지금도 바로 곁에서 벌어지고 있기에 마음으로 차분히 음미할 시간적 여유 따위가 없는 겁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가 바로 그걸 보여줍니다. 네 명의 친구들이 하는 속죄의 방식을 통해서 말이죠. 그녀들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으로 속죄를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바로 곁에서, 지금도 진행중인 잘못을 바로 잡는 것으로 속죄를 합니다. 숙고의 시간도 없고, 주저의 시간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것은 행동을 부르는 결단 뿐입니다.

 

  그래서 초조함이 느껴집니다. 기요시가 암묵적으로 '우리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뭔가 변화를 위해 지금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 초조함이 속죄의 형식을 요청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속죄는 당위이니까요. 자신이 지은 죄를 갚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엔 어떠한 변명이나 회피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행위로 갚을 뿐입니다. 칸트가 말한 절대적 명령, 그것이 바로 속죄의 근본입니다. 드라마에서도 그랬습니다. 살해당한 소녀의 어머니가 네 명의 친구들에게 속죄하라고 말했을 때 그 네 명 중 누구도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작 시청자들의 눈엔 그러한 어머니의 주장이 한 없이 부당하게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그 정도로 기요시는 속죄의 당위성, 숙명성을 강조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행동과 참여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죠.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경우'도 그렇습니다. 본질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앞에서 말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와 모든 것에서 일치합니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두 인물, 하루미와 요코는 서로 같은 고아라서 더없이 가까워지게 된 사이입니다. 어느 날 하루미가 간직한 파란 리본에 얽힌 사연을 듣게 된 요코는 지방 의원 선거로 인해 집에 혼자 있어야만 하는 아들이 불쌍해 '지금 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엄마는 늘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 하는 마음으로 엄마의 사랑이 간직된 파란 리본을 통해 들려주었던 하루미의 얘기를 한 권의 동화책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게 우연찮게 출판되게 되고 큰 상까지 받아 요코는 유명해집니다. 요코는 하루미의 얘기를 허락받지도 않고 썼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하루미는 상관할 것 없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다 요코에게 그만 커다란 불행이 닥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유괴되어버린 것이죠. 그런데 유괴범이 요구해 오는 것이 돈이 아닙니다. 그건 속죄입니다. 유괴범은 요코도 몰랐던 출생의 비밀을 찾게 하고 그것을 만인 앞에 고백하라고 명령합니다. '경우'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그 것처럼 역시나 속죄가 나오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유괴된 고로 사건은 바로 속죄의 주체 요코의 곁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며 그렇게 급박하게 사건이 돌아가는지라 제대로 음미할 여유도 주저할 여유도 없게 됩니다. 유괴라는 것 역시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서 속죄와 같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드라마에서 속죄하라는 명령에 말없이 따랐던 네 명의 친구들처럼 요코 역시도 팩스로 보내오는 유괴범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합니다. 아마도 가나에가 '경우'에 '유괴'를 가져온 것도 바로 그러한 명령의 당위성, 숙명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경우'는 구로사와 기요시가 바라보는 '속죄'와 똑같습니다. 스테판 에셀의 베스트셀러 제목을 살짝 표절하자면 '행위하라!'라는 칸트식 정언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설 '경우'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변화입니다. 관념의 영역 내에 머물러 있던 '왕복서간'에서 한 발 더 나갔으니까요. 물론 '고백'에서의 복수도 행위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윤리적 의미에서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는 점에서 '경우'의 행위와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윤리란 어디까지나 타자와의 관계를 놓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고백'의 행위는 타자의 입장에 서 있지도 않았고 그들의 처지를 배려하지도 않은, 오로지 자신만의 이기적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경우'의 행위는 무엇보다 타자의 입장에 서 보았던 '야행관람차'와 '왕복서간'을 경유한 끝에 나온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고백'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위인 것이죠. 이제 미나토 가나에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바꾸려고 실제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 곳에 다다른 것입니다. '경우'는 그것을 보여줍니다. '행위와 참여의 중요성'을 말이죠. 그리고 속죄가 원래 목표로 하는 진정한 치유 역시도 오로지 그것이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뒤이어 나온 드라마 '고교 입시'에서 여전히 그녀가 그 항로를 따라 비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하자면 이번에 나온 미나코 가나에의 '경우'는 자신이 가까이서 직접 보고 겪었던 3. 11 에 대한 작가로서의 응답입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가 거기에 대한 응답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그런 그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관망이 아닌 실천적 참여를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도 따를 수 밖에 없는 당위가 되도록 '속죄'라는 형식까지 요청해가면서 말이죠. 비록 하나의 작품이 설득은 될 수 있어도 해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렇게 결국 작품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하나의 제안이며 우리 사유의 끝이 아니라 촉발의 계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렇게 한 목소리를 내는 그들 모두가 바로 가까이서 그 비극을 체험한 자들이라는 사실은 어쩐지 이들의 제안을 보다 설득력있게 받아들이도록 만듭니다. 불에 데어 본 자만이 그 아픔을 알며 그 아픔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치유를 가져올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더 귀 기울여 볼 생각입니다. 새롭게 이륙한 미나토 가나에의 비행기가 어떤 항로를 그리며 나아가는지 계속 지켜볼 작정입니다. 이들의 아픔이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우리가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고 우리의 아픔이 될 수 있을 것임을 또한 알기에 그 때를 위해서라도 제 자신만의 대답을 찾기 위해 대화의 참여를 유도하는 그녀의 손짓에 기꺼이 화답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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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왕복서간'에 이르기까지 미나토 가나에가 걸어온 여정은...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2-08 14:12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왕복서간'에서 받게 될 느낌은 아마도 낯설음일 것이다. 그렇게 분명 이 작품엔 어떤 이질감, 뭔가 이전에 나온 가나에의 작품과 다른 것이 느껴진다. 물론 그 이질감의 직접적인 원인은 일단 이 소설이 모두 편지글의 형태로 되어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나에의 소설은 1인칭 시점이었다. 한 마디로 독백의 소설이었다. 물론 편지도 독백이긴 하다. 하지만 편지엔 확실한 수신자가 있다. 편지의 모든 말은 그 듣는 사
 
 
ICE-9 2013-02-0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나토 가나에의 '왕복서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궁금하시다면 위의 글을 참조해 주세요.

희선 2013-02-12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헤르메스 님이기에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사람이 지금까지 써 온 소설이 어떻게 바뀌어 온 것인지 잡아내는 눈(마음)
작가는 자신이 쓴 것을 바로 봐주는 사람이 있는 것을 기뻐할 겁니다

속죄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군요


희선

ICE-9 2013-02-12 16:24   좋아요 0 | URL
와! 희선님 감사합니다.
제가 좀 미나토 가나에 빠라서 하나의 작품보다는 이렇게 흐름 속에서 읽고싶어지네요.(그리고 그래야만 가나에의 매력이 더욱 드러난다는 근거없는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 쉽지 않기에 기요시든 가나에든 조건없이 해야하는 정언명령 식의 당위로 만든 게 아닐까 싶어요. 아무튼 그 정도의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요구된다는 것이 중요한 그들의 진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