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연속 세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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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마등 같군요." 

 "음?"

 "지나치는 풍경 말입니다. 기차나 차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사고하는 속도 보다는 빠르죠. 죽기 직전에 인생의 온갖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고 하는데, 딱 이정도 속도가 아닐까요?"('달의 뒷면' p.37)

 

 

 2001년에 나온 '달의 뒷면'은 수로로 부터 시작된다. 교이치로의 부탁으로 야마쿠라로 오게 된 다몬은 그렇게 교이치로와 함께 배를 타고 수로를 타내려가다 문득 이런 말을 한다. 수로의 속도가 인생을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때의 속도와 닮지 않았냐고? 온다 리쿠가 왜 다몬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분위기의 '불연속세계'라는 (그녀 자신의 표현대로) 기행 미스터리 같은 것을 쓰게 되었는지가 바로 이 말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인생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에 함의되어 있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주인공이었기에 직접 바라 볼 수는 없었던 삶이란 텍스트가 그제서야 객관적으로 마치 책을 보듯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지나쳐 온 인생 자체가 한 권의 책처럼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로의 속도란 바로 텍스트를 읽는 속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수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바로 수로란 책 읽기의 상징이라는 것이 말이다. 뒤이어 나오는 다몬의 느낌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낸다.

 

 주택가로 들어서면서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노 젓는 소리만 점점 명료하게 들린다. 배는 매끄럽게 나아가는데 시간과 정경만이 저속 촬영한 것 처럼 느껴진다. 오래된 벽돌건물 공장, 창문에 비치는 물의 그림자, 군생하는 창포, 그 각각이 스톱모션처럼 기억에 새겨진다.(같은 책, p.39)

 

 

  이것은 그대로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받게 되는 인상으로 치환시켜도 통용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 같은 고백을 한 뒤에 다몬은 나중에 목격하게 되는 미스터리의 진실된 모습을 암시하는 것 같은 '우렁이 알'을 보게되는데 이렇게 그 원인적 존재의 출현에 대한 복선과 그 존재가 주로 기거하는 곳이 또 수로임을 감안한다면 수로가 책 읽기의 상징이며 '달의 뒷면'이 사실은 이 시대 소수의 쾌락으로 점점 전락해가고 있는 책 읽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더더욱 분명해진다. 더구나 온다 리쿠는 다몬의 입을 통해 수로가 가지는 특징을 단적으로 얘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야나쿠라 도시 자체를 횡단하며 어디로든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책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세계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 그러므로 '달의 뒷면'을 읽을 때 무엇보다 떠올려야 하는 것은 지금 그 책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 자신이다. 당신에게 지금 책 읽기란 무엇인가? '달의 뒷면' 자체는 온다 리쿠가 당신에게 건네는 이러한 질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불연속 세계'란 책에 대해 쓰면서 앞 머리에 달의 뒷면 이야기를 저리도 길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불연속세계' 자체가 '달의 뒷면'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다몬'으로 말하자면 모두 '다몬'시리즈라고도 할 수 있다.) '달의 뒷면'이 무슨 이야기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불연속세계' 역시도 무슨 이야기인지 보다 확실하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두 책의 이야기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써 내려간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비록 두 작품 사이엔 7년이란 시차가 있고 별개의 책으로 묶여있다고 해도 말이다. 이를테면 '달의 뒷면'은  이 '책' 자체를 상징화한 제목이라 할 수 있는 '불연속세계'의 그 1부라 할만하다. 사실 제목 자체에서 이미 어느 정도 연속성은 감지된다. '달의 뒷면'이란 언제나 같은 면만을 볼 수 밖에 없는 지구에 있어서 도저히 볼 수 없는 부분으로 그렇게 하나의 '불연속세계'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달의 뒷면'은 위에서도 말했듯 책이 주는 이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이어짐이란 어디까지나 책이 주는 '타자'를 내부에 포용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런데 뒤이어 나온 작품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불연속세계'이다. 모두 다섯 개의 단편이 모여있는 이 작품에 '불연속세계'란 제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제목은 단편과 별개로 책 자체에다 붙여진 제목이다. 이건 '달의 뒷면'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달의 뒷면이 이 책 전체가 하려는 이야기의 1부에 해당된다는 말 역시 틀린 것은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달의 뒷면'에 대한 얘기는 나만의 착각이며 '불연속세계'란 제목은 아마도 실려있는 다섯 편 모두가 하나의 줄거리를 가진 것이 아닌 개별적으로 독립적인 이야기라는 단순한 이유에서 붙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있다. 온다 리쿠는 왜 이 단편집을 일종의 기행 미스터리로 만들었던 것일까?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이 책에 대해 직접 말한 부분이다. 아예 후기에서 이 모든 다섯 편의 이야기들이 사실은 자신이 직접 다녀온 곳을 토대로 쓰여진 것임 또한 그녀는 밝히고 있다. 하긴 '달의 뒷면' 역시도 실제 야나가와를 기반으로 쓰여졌다. 그런데 기행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풍경이란 것을 텍스트로 하여 읽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기행문'이란 글이 가능한 것도 다녀온 곳이 하나의 텍스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달의 뒷면을 포함하여 이 모든 이야기들은 온다 리쿠가 그 곳에서의 체험을 미스터리로 우려낸 이를테면 대면했던 풍경들의 독후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서도 '책 읽기'란 여전히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단편집의 첫 시작을 여는 '나무지킴이 사내'에서 다몬은 아예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한다.

 

 아파트를 나와 주택가를 빠져나와서 철길 건널목을 지나면 강가가 나온다. 도회지의 강이라 그런지 존재감은 별로 없다. 좀더 큰 강 같으면 가까이 갈수록 존재가 느껴지게 마련인데, 커다란 콘크리트 도랑 밑바닥에 괸 물은 완전히 길들여져 체념한 것 처럼 보인다.

 강은 연속된다.

 다몬은 강가를 산책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강이라는 것은 중단된다는 게 불가능하다.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더라도 강은 건물 사이며 도로 밑으로 이어진다. 찌그러지고 누덕누덕 짜집기된 도쿄, 맥락없는 지상에서 강만은 언제나 연속되며 어김없이 출구를 찾아낸다.(p.9)

 

 여기서 강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다. 그것이 원래 '달의 뒷면'에 나온 수로에서 이어지는 이미지라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달의 뒷면에서는 그토록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던 수로는 도쿄에선 미미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미미함의 이유에 대해서 온다 리쿠는 '길들여져'란 어떻게 보면 좀 생뚱맞아보이는 표현을 쓴다. 그녀는 왜 굳이 이런말을 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난 그게 이상했다. 그런데 이 첫 부분의 묘사가 아파트, 주택가로 부터 시작되는게 의미심장했다. 위에서 인용한 '달의 뒷면'에선 수로에 의해 포위되어 아예 젖어버린 듯 보였던 그 주택가가 이제는 강마저 체념하게 만들 정도로 그 존재감을 뚜려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차이가 바로 강의 왜소해진 이유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때문에 강을 체념시켜버린 진범으로 또한 '커다란 콘트리트'란 묘사가 나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것은 그대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정확히 반영하는 듯도 보였다. 콘크리트는 그 육중함으로 인해 단절을 가져오는 존재가 아닌가. 바로 그것이 강의 이어짐을 막고 있었다. 강의 이어짐은 철길과 맞물려 더욱 강화되는데 그 전에 온다 리쿠는 콘크리트 세상과 강의 세계를 '빠져나와서'란 단어로 잇고 있었다. 즉 여기서 이 모든 문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분명해진다. 즉 강이란 것을  '달의 뒷면'의 수로가 가졌던 의미 그대로 책 읽기에 대한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여기서 아파트, 주택가는 모두 '콘크리트'로 집약되는 바쁜 우리의 도시적 일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실 그 바쁘디 바쁜 도시의 일상을 영위하느라 독서 시간을 줄이거나 거의 가지지 못한다. 그렇게 도시적 일상에 길들여지고 나중에 가서는 체념하게 되는 것이다. 온다 리쿠의 '길들여져 체념한 것'이란 표현은 정확히 그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연속세계'는 불연속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달의 뒷면'의 주제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확장이었다. 이를테면 '달의 뒷면'이 책 읽기가 가져다주는 힘을 총론식으로 다룬 것이라면 '불연속세계'는 그것을 각론식으로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다 구체적으로 책 읽기가 주는 힘을 여행을 하면 다녔던 곳마다 다른 느낌을 받게 되듯이 다르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이 모든 다섯편의 구성이 참으로 흥미롭다.

 

 '불연속세계'는 '나무지킴이사내' '악마를 동정하는 음악' '환영 시네마' '사구 피크닉' 그리고 '새벽의 가스파르' 이렇게 총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성상의 원칙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공통점이 보인다. 모두 텍스트에서 실체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악마를 동정하는 음악'은 테이프에 녹음된 음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죽음의 실체적 진리로 나아가고 '환영 시네마'는 영화라는 텍스트에서 출발하며 '사구 피크닉'에서는 소설(나중엔 아예 마츠모토 세이초의 박물관이 등장한다.) 이라는 텍스트가 시작점이 된다. 새벽의 가스파르는 '사진'이 출발점이다.('나무지킴이 사내'의 경우 이 단편집의 우주를 미리 정리해주는 원론 같은 작품이라서 텍스트가 무엇인지 말하기가 사실은 조금 어려운데 아마도 가장 유사한 텍스트가 있다면 그림이 될 것 같다. 그것은 책에 대한 또 하나의 비유이기도 한 '벗꽃' 자체가 주는 시각적 이미지로 인해 더욱 그렇게 추정된다.) 이렇게 각 단편들은 모두 문득 발현되어진 하나의 텍스트를 둘러싼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한 해석의 놀음들이다. 온다 리쿠가 왜 하필이면 이런 구성을 취했는지는 이것이 책 읽기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이유가 명확해진다. 즉 그것들이 그대로 우리가 책 읽기를 통해 접하는 과정과 그대로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단편들이 가진 구성 방식은 우리가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실체'라는 진실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삼월을 붉은 구렁'에서 책을 두고 벌어졌던 잡담들은 정확히 여기에서도 여전히 환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의 가스파르'는 '삼월의 붉은 구렁'에서의 '기다리는 자들'의 완벽한 반복이다. 마치 니체가 말했던 동일한 것의 영겁 회귀와 같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하긴 이 단편집의 원제 자체가 'THE DISCONTINUOUS CIRCLES'이기도 하다. 사람은 그 누가 되었든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똑같은 원을 두번 그릴 수 없다. 원제는 이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삼월은'에서의 '기다리는 자들'과 '불연속세계'의 '새벽의 가스파르'의 관계 그 자체에게도 해당된다. 아마도 온다 리쿠는 같지만 완전 다른 이런 반복을 통하여 애초에 제기했던 '불연속'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불연속이란 '콘크리트'가 가지고 있는 단절로서의 불연속이 아니라 '같지만 계속 다르게 나아가는' 그런 의미의 불연속이라는 것을... 사실 이것은 본인이 말했던 '기행' 자체에도 해당된다. 여행이란 그렇게 모두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것이지만 결국 그 주체는 나 하나이니까. 그렇게 기행이라는 것도 사실은 같은 원을 그리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책 읽기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여러 다양한 책을 읽지만 그것들은 모두 같지 않다. 왜냐하면 여행에서 우리는 멈춰있지 않듯이 독서에 있어서도 우리는 멈춰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여행이 풍경과 나의 나아감이 서로 교감하는 상태에서 받아들임과 되새김의 연속된 과정이듯 책을 읽는다는 것도 그러한 교감을 통한 되먹임의 연쇄를 통해 우리의 자아와 그것이 포함하는 세계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새벽의 가스파르'의 결말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한 하나의 대상에 불과했던 책이 결국에 가서는 나를 위로하고 바꾸는 동반자적인 주체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 책의 첫 단편에 실린 '나무지킴이사내'에서 한 등장인물이 말하는 이 대사는 정확히 '불연속세계'가 책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타인이 아니야.자기의 일부, 예전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 뿐.'(P.19)

 

 물론 바로 이 책의 대상에서 주체로의 전환은 '달의 뒷면'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들은 책이 나의 동반자로서 궁극적인 주체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느냐에 대한 얘기들이며 각각의 단편은 그걸 가능하게 하는 책의 다른 힘들을 암시하고 있다.(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이것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표지에 그려진 '계단'이야 말로 이 책에 딱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책은 그렇게 문득 당신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인도해주는 계단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책 읽기란 엘리베이터 처럼 그냥 순식간에 이동시켜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에스컬레이터 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데려가주는 존재도 아니다. 책 읽기가 계단 오르기인 이유는 정확히 바로 당신 자신의 노력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책 읽기란 무엇보다도 한 걸음 한 걸음에 해당하는 한 권 한 권의 책이 당신에게 주는 느낌과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알고자 하는 노력이 톱니처럼 맞물려가는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진적일 수 밖에 없고 책이 주는 것 만큼이나 거기에 들이는 당신의 노력 역시 필요하다. 즉 책 읽기란 그저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하나 얹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책은 미인과 같아서 적극적인 자 만이 그것을 쟁취할 수 있다. 즉 책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그가 가진 것을 더 많이 열어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책 읽기는 온다 리쿠가 했던 그대로 그토록 자주 여행에 비유되어왔을 것이다. 자기 스스로 나아가는 것 만큼 보다 더 넓은 세계의 풍경을 가슴에 안을 수 있게 되는 법이니까!  그렇게 당신은 '블연속세계'라는 또 하나의 계단을 이제 앞에 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어쩌면 이미 올랐는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올라가는 거기서 바라보게 되는 세상의 풍경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분명 나와는 무척이나 다를 것인데 이 시간 그것이 정말 궁금해진다. 

 

 언제나 내게 있어 글은 마무리가 어렵다. 끝이 왔다고 생각되면 그동안 내내 벼려왔던 에너지가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고 그 허한 마음 속 공동 속에서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사실은 이 글 역시 그렇다. 나는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불연속세계'를 통해 여기까지에 이른 내 여정은 어떤 식으로 맺어야 할까? 근데 한 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온다 리쿠가 말한 대로 책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여정이란 같은 원을 계속해서 조금씩 다르게 그리는 행위일 뿐이다. 그렇게 지금의 마지막 역시 다음을 위한 출발이다. 그렇다면 굳이 내 글에 '콘크리트'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저 곧 다음의 말이 있으리라 연상시키는 말줄임표로 끝맺는 것이야말로 이 '불연속세계'의 리뷰에 가장 어울리는 마침표가 아닐까? 그래서 내 글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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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MB
변상욱 지음 / 한언출판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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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굿바이 MB' 왠지 참으로 입에 착착 감기는 제목이다.

  어느새 이제 이 말을 하게 될 시점이 곧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MB 4년. 참 힘들고 길었다. 곳곳에서 보이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권력의 전횡과 철저한 사익추구에서 비롯된 각종 비리들을 보며 화를 삭히느라 힘들었고 말도 안되는 거짓말들로 뻔한 진실들을 가리려는 그들의 천박한 작태들도 개그 콘서트도 한 철이지 그대로 보고있기가 힘들었다. 아마도 그 모든 힘겨움의 원인들은 MB정부가 끝이나야 없어질 것 같아서 오매불망 그 끝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다 보니 군대 이병이 느끼는 국방부 시계처럼 참으로 길었다. 하지만 진창에 처박아도 국방부 시계는 멈추는 법이 없다더니 결국 염원하는 그 시간이 가까이오고 말았다. 이제 정말 굿바이 MB를 외칠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얼마남지 않음이 제대로 가능해지려면 한 가지 선행 조건이 필요하다. 그건 곧 다가올 대선에서 올바르게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때 또 우리가 2007년에 했던 대로 그릇된 선택을 재탕한다면 얼마남지 않음은 얼마남지 않음이 아니라 또 한 번의 5년만 다시 거듭될 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  제대로 선택하기 위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선택은 언제나 그릇된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행착오를 오직 단 한번으로 그치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망각은 반복을 부르지만 기억은 반복의 연쇄를 끊는다. 그래서 우리는 똑똑히 MB의 4년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이것은 의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MB 4년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굿바이 MB'는 만사를 제쳐두고 우리가 꼭 보아야 할 책이다.

 

   물론 이 책을 읽는 건 힘들다. 만일 당신이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일제 식민지 치하의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게 힘이 들었다면 이 책 역시 그럴 것이다. 당연하다. 여기엔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이 어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멍청하고도 부끄러운 결과를 초래했는지 여실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선택이 바로 우리 자신의 선택이었기에 그 결과는 그대로 우리들의 부끄러움이며 특히나 기륭전자 사태, 한진중공업 고공크레인 농성 그리고 용산 참사등에 있어서는 궁극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이 가져온 비극이므로 거기엔 우리의 죄의식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MB4년을 기록한 이 책은 우리의 저급한 욕망이 우리들 스스로에게 할퀴고 간 생채기이며 스스로 욕망의 노예로 자처하는 바람에 삶의 주인자리에서 쫓겨난 비굴함의 수치스러운 기억이다. 그래서 나 역시 지은이 변상욱이 이 책에 대하여 했던 말 '자신의 참회록이기도 하다'에 동감한다. 사실 이 책은 변상욱 기자만의 참회록은 아니다. 정말은 우리 모두의 참회록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 편으론 기억하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스스로 반성하기 위해 읽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수치스러운 기억들을 읽으면서 똑똑히 머리에 새겨두어야 한다. 오로지 집 값을 올려준다는 이유만으로 투표하면 어떻게 되는지? 실현가능한 대안도 없이 그저 막연히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을 뽑아주면 어떻게 되는지? 악의적 왜곡을 일삼는 언론에 놀아나 그들의 프레임에 갇혀 스스로 생각하고 따져보지도 않고 묻지마 투표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시효가 지나고 한참 전에 지난 해묵은 이념이나 색깔론에 빠져 자신이 지금 사회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생각지도 않고 투표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쟁취하지 않고 오로지 남이 가져다주는 미래에 만족하며 투표에 무관심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부끄러움 속에서 똑똑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당신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일은 이것 뿐이다. 그 때를 기억하는 것. 그 때  그 일들을 바라보던 당신의 마음은 어떠했나를 기억하는 것. '굿바이 MB'는 그런 당신을 위한, 언제나 뒤적여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하는 사진앨범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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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1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오오오오오오오, 추천 백개, 천개, 만개!!!!

이렇게 착 붙는 이름이라니, 그리고 이렇게 착 붙는 리뷰라니!!!!
다시는, 돈 벌게 해주겠다는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는 우리이기를!

사실 그런 면에서 이번 김용민 씨 문제는 많은 생각을 남깁니다,
정답도 해법도 없는 문제를요.... 참 어렵더군요. ^^

ICE-9 2012-04-11 03:33   좋아요 0 | URL
와! 이렇게 격하게 공감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
저도 이번 선거기간에 일어나는 일들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지만
아무튼 이제는 드디어 투표일인데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제발 승리의 웃음으로 크게 웃게 되는 날이었으면 합니다.

얼음무지개 2012-04-1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온지 어언 9년여.. 처음으로 추천이란 걸 해보네요..ㅎㅎㅎ

ICE-9 2012-04-11 03:34   좋아요 0 | URL
9년만의 첫 추천을 저에게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
이 기쁨이 오늘 투표의 커다란 승리로 이어졌으면 정말 좋겠네요.

이진 2012-04-1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집니다.
정치를 모르는 저도 이번에는 "무슨 정치가 이따구야?"하면서 살았습니다.
나도 추천 백개, 천개, 만개!!

ICE-9 2012-04-13 22:58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 투표 할 수 있었을 때는 제발 세상이 지금보다는 많이 나아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 때문에 더욱 소이진님과 같은 세대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어른들이 너무 자기들 이해타산만 생각하지 말고 미래세대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줄지 생각 좀 하고 투표했으면 좋겠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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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종 변화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어온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폐해가 극에 달해 곳곳에서 파열의 신호가 감지되던 2011년 1월.

 그 파열을 거대한 크레바스만큼이나 열어젖힐 거센 변화의 바람이 설마 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불어올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바로 23년동안 튀니지를 독재했던 밴 앨런 정권을 무너뜨렸던 재스민 혁명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건 마치 사막을 뒤덮는 거대한 모래바람처럼 철옹성 같았던 구시대의 독재 정권들을 하나하나 삼켜갔다. 이집트의 독재 정권 무라바크가 무너졌고 42년간이나 리비아를 좌지우지했던 가다피마저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그리고 환호했다. 그 변화의 바람이 비단 아프리카에게만 자유를 가져다줄 희망의 바람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 세계의 사람들은 그런 변화의 바람을 염원하고 있었다. 부자들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세상. 약하고 가난한 자들은 예외없이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이 세상. 이렇게 된 근본 이유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 때문임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곳곳에서 폐해가 드러나는 난파선 처럼 침몰해 가고 있는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 다른 배로 갈아타고 싶은 마음들이 커져갔다. 뭔가 자신들에게 보다 안정된 삶을 가져다 주고 떳떳하게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살아가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재스민 혁명은 바로 그러한 소망에 불을 지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놀랐다. 그건 이제까지 그들이 알고 있는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그들은 미개하고 너무도 가난해서 그저 굶주림에 늘 고통받는 땅일 뿐이었다. 소말리아 내전을 다룬 영화 '블랙호크다운'에서 보듯 그들은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평화의 쟁취가 불가능한 존재들이었고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다룬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 보듯 문명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으면 어린아이들마저 무참히 사람들을 살육하는 그런 무자비하고 잔혹한 대지일 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뭔가를 이루어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것이 바로 전 세계가 아프리카를 보던 눈이었다. 하지만 재스민 혁명은 거기에서 사람이 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스스로 생각과 판단을 하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용기를 가지고 떨치고 일어나 싸울 수 있는,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내부적 역량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임을 똑똑히 보여준 것이다.

 

 그랬다. 재스민 혁명은 단적으로 아프리카가 그동안의 가면을 벗고 자신의 원래 얼굴을 우리들에게 보여준 것이나 같았다. 사람들은 마치 이제 아프리카를 처음 보듯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아프리카는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현재 주 세네갈 한국대사관 참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 윤상욱의 책 제목인 '아프리카엔 아프리카가 없다'는 바로 이러한 것을 뜻한다.

 

 

 그는 부제에다 당당히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라고 달았는데 바로 이 말이 왜 저자 윤상욱이 이 책을 저술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우리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아프리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이 자연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편견에 불과한 것임을 밝히고 이제 새로이 맨 얼굴을 드러내는 아프리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편견들만 덧씌우는 외부에서의 시각이 아니라 아프리카 내부에서 그들의 가치관과 문화로 바라보아야 함을 이로써 나타내는 것이다.

 

 이 책은 총 5장에 걸쳐 우리들에게 가장 객관적인 그래서 가장 진실된 아프리카의 모습을 보여준다. 각 장들은 현재 아프리카의 모습을 경제, 정치 문화 각 방면에서 다 조망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선 1장 '왜곡된 정체성'에서는 제목 그대로 그동안 우리가 가진 아프리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이 모두 서구중심주의에 의해서 악의적으로 왜곡되고 조작된 것임을 밝힌다. 무려 그 왜곡의 연원은 제국주의가 한창 팽창되던 18세기까기 거슬러 올라간다. 윤상욱은 당시의 대철학자 헤겔을 거론하며 서구중심주의가 그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얼마나 의도적으로 아프리카를 부정적으로 의미화 작업을 했는지 대표적으로 밝힌다. 수전 벅모스의 저서 '헤겔, 아이티, 보편사' 역시도 여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같이 참고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이미지들은 오로지 서구가 문명화를 통한 야만의 계몽이라는 미명하에 제국주의적 수탈을 스스로 정당화하려고 내놓은 기만적 술책에 의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제 아프리카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들은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안되며 그 내부로 들어가 그들 고유의 시각으로서 조망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2장 빈곤과 저개발에서는 그 내부의 시각에서 아프리카의 현재 경제 상황을 살피고 3장 독재와 폭력에서는 아프리카의 현실 정치를 그리고 4장 심성과 편견에서는 그 내부의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바라본 그들의 문화를 얘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아프리카의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를 살펴본 뒤 현재 아프리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내전의 빈발, 경제적 궁핍, 관료와 엘리트들의 부패, 장기 집권등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과 전망을 마지막 장 '아프리카의 봄'에서 탐색한다.

 

 이렇게 이 책은 현재 아프리카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반적으로 훑어준다. 무엇보다 현재 아프리카에서 근무하면서 겪었던 체험에서 나온 내용들이라 보다 더 직접적으로 아프리카를 보듬게 하는게 커다란 장점이다. 그렇게 다시금 새롭게 보듬게 되는 아프리카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아프리카와는 물론 다르다. 물론 가진 문제점도 여전히 크고 많지만 그것을 개혁하려는 그 내부의 움직임도 그 못지 않게 적극적이고 커다랗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대로 오로지 외부의 원조에만 기대려 하는 아프리카는 아닌 것이다. 아예 그들 스스로 보다 자립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원조를 거부하자는 주장까지 내부에선 제기될 정도였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왜곡에서 비롯된 편견인줄도 모르고 진실로만 생각해서 그 대상이 지니고 있을 변화의 가능성마저 미리 배제해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원조'라는 것에 대해서 참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TV를 보면 아프리카를 도와주자는 내용의 프로그램들을 더러 보게 되는데 솔직히 이 책을 읽고나니 TV에서까지 저렇게 아프리카에 도움을 운운하는 것은 별로 좋지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원조의 정당성을 위해서라지만 그렇게 부정적인 아프리카의 모습만 강조하면 우리가 가진 왜곡된 아프리카에 대한 인상들은 앞으로도 더욱 더 굳어질 것임이 틀림없을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진정한 원조란 단시 그들에게 빵을 주고 돈을 줘서 굶주림을 덜어주고 경제적 궁핍만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건 원조라기 보다는 적선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원조와 적선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원조는 동등한 차원에서의 배려라 할 수 있지만 적선은 오직 주는 자의 우월함만 드러내는 계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원조는 그들이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다리가 부러진 자를 위해 내 어깨를 빌려주듯 그렇게 같이 동등한 자로서 어려움을 나눠 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원조를 함에 있어서는 그 원조를 받는 타자를 보는 시선 역시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그 타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하냐에 따라 원조의 성격 역시 규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원조의 방법 역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엔 비단 경제적 어려움 뿐 아니라 정치적 어려움들도 존재한다. 문제는 이것이 분리되지 않고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솔직히 지금 외국의 원조한 것들 중 대부분은 지도자와 관료 그리고 엘리트들 수중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정치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은 전혀 도움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무턱대로 도와주는 것에 앞서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며 그 지향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프리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물론 최근의 한국은 어디까지나 경제적 도움만 추구한다. 혹시 이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가져온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 때문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장 '아프리카의 봄'은 여전히 전망은 불투명하고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 장애물들을 극복해 보려는 내부의 움직임들을 보여준다. 비록 우리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미약하고 존재하는 해악들 앞에선 바람 앞의 촛불처럼 속절없을지라도 속단은 금물이다. 재스민 혁명은 바로 그 미약한 가능성들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것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진정한 원조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촛불 같은 가능성들이 꺼지지 않고 그대로 밝은 여명이 될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아프리카를 그 고유의 시각으로서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그 첫 발걸음으로 이 책 '아프리카엔 아프리카가 없다'는 참으로 유용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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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10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제가 원하던 주제군요.....
헤르메스님은 저의 지름신이 맞다니까요. 항상 궁금했거든요. 아프리카는 미개하다는데, 왜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문명인인가? 에 대해서요. 거기다 아프리카는 인류의 근원지이기도 하구요. 결국 서양의 수탈과 관련이 있는거군요.

ICE-9 2012-04-11 03:40   좋아요 0 | URL
아아, 이 책 정말 강추합니다. 아프리카에 대해서 많은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어요. 최근에 수전 벅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도 읽었는데 근대때 서양인들이 어떻게 아프리카를 왜곡시켜왔는가의 그 이론적 뒷받침을 살피는데 있어 정말 유용한 책입니다. 아프리카에 대해 알고싶으시다면 이 두 책을 꼭 추천드리고 싶네요^ ^
 
오 헨리 단편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0. 헨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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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892년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작은 무려 자신의 고향으로 부터 5천마일이나 떨어진 뉴욕을 방문했다. 새벽 안개 속에 새벽 닭 울음소리만이 적막한 산천을 요람을 흔들듯 진동시키는 조용한 자신의 고향과는 달리 뉴욕은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사람들의 무리와 자동차들로 쉴새없이 북적이고 있었고 그 마치 도시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활기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뉴욕의 모습은 그야말로 드로르작에게 충격이었고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발산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적 분위기를 뉴욕에서 그는 경험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에게 거의 신세계를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했고 그것이 바로 그의 최고 걸작이라 평가받는 교향곡 9번, 신세계 교향곡이었다. 즉 그 작품은 드보르작이 뉴욕에서 느꼈던 경이로웠던 새로운 활기에 대한 음악적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뉴욕은 바로 오 헨리의 뉴욕이기도 했다.

 

 

 

  오 헨리는 바로 그러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 시대는 구시대의 유럽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일단 태어나면서 결정되었던, 그렇게 순전히 혈통으로만 계승되던 신분제가 사라졌다. 이제 뉴욕은 전혀 새로운 것에 의해 결정되는 신분제도가 자리잡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돈, 즉 자본이었다. 오로지 돈 만이 사람들로 부터 존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으며 그 돈이 가지고 있는 추상성 때문에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이 보다 중시되었고 또한 돈은 오로지 실용성만이 가져올 수 있었기에 예술 같이 추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서서히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 예술이란 것은 오로지 신흥 부르조아지들의 재산을 빛내줄 경우에만 의미있는 존재가 될 뿐이었다. 이러한 구체적 혈통에서 추상적 자본으로의 전환은 사람들에게 많은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다 줄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미국인지라 유럽을 단일한 끈으로 묶어두던 기독교적 가치로 부터도 자유로웠었기에(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나 미국 헌법을 초안한 제퍼슨은 공공연히 성경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니 완전히 믿지는 말라고 자주 말했었다.) 그 전환의 속도는 더욱 빨라질 수 밖에 없었고 사람들의 자본, 즉 돈에 대한 욕망은 그렇게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가속도를 더해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돈이야 말로 스스로의 존재를 귀족처럼 고양시켜 주고 타인들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근거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이제는 생존을 뛰어넘어 자신의 정체성마저 규정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돈이었다. 드로브작이 경이롭게 생각했던 신세계의 실상은 그러한 돈에 대한 욕망으로 휘몰아치는 토네이도였다. 그 광풍처럼 범람하는 욕망이 바로 활력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그 한 가운데 있었던 오 헨리는 중심부로 뛰어들지 않고 오히려 소소한 일상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한결같이 뉴욕인들의 사소한 일상들을 작품에다 담는다.  마치 부엌이야말로 신이 현상하는 장소라며 내내 일상의 공간만을 화폭에 담았던 18세기의 프랑스 화가 샤르댕 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는 역사적 현장 못지 않게 우리의 사소한 일상 또한 얼마든지 극적인 드라마가 일어나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꿈틀거리는 욕망, 그 좌절로 인한 애환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희노애락을 빛의 스펙트럼처럼 펼쳐보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그는 일상을 담아내면서 돈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가 성급하게 밀쳐내 버린 인간적인 가치들 또한 복원해낸다. 바쁜 일상에 시달리느라 잊어버렸던 웃음, 슬픔, 사랑 같은 사소한 감정들. 그리고 보다 높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보석이나 사치품을 추구하느라 무시해버렸던 사소한 물건들까지. 그는 작품 속에 하나하나 다 살려낸다. 마치 그는 복원전문가 같다. 그렇게 그는 자본주의의 정착과 그로인한 사람들이 가진 더욱 가속화되어버린 욕망 때문에 왜소해졌거나 생명을 잃어버렸던 모든 사소한 것들에게 다시금 생기를 불어 넣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이나 돈이 가져다 줄 수 없는 예술로 인한 구원 같은 이제는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 소박한 꿈들까지... 그렇게 오 헨리의 작품은 사소한 것들로 넘쳐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오 헨리의 중심엔 바로 이 '사소성'이 있다.

 별 것 아닌 일상, 별 것 아닌 감정, 별 것 아닌 사물 모두 이러한 '사소성'을 특징짓는 것이다. 오 헨리의 단편들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이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각 단편들 사건의 중요한 국면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소한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지막 잎새'에서의 한 잎의 잎새라든지 '20년 후'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바로 지명수배자임을 알아보게 한 것이 성냥불이었다든지 '다시 찾은 삶'에서의 장미꽃의 핀이라든지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교환되는 선물은 또 어떤가?

 

  이런 식으로 오 헨리의 작품엔 아주 사소한 물건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정작 이 물건들이 가져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을 구원하거나 인생을 바꾸거나 고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등의 아주 커다란 것들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가 왜 이러한 '사소성'에 천착하는 것인지 알게된다. 그러니까 오 헨리는 당시 미국을 주무르고 있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바로 이 사소성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자본주의란 재화가 가진 가치를 오로지 효용성으로만 따진다. 하지만 오 헨리의 사물들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판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효용성으로 따지자면 별 것 없지만 그것들이 가져오는 것은 어마어마한 돈으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오 헨리는 사물에 대해 자본주의적 가치가 절대적일 수 없음을, 사물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들을 오로지 자본주의라는 획일적 잣대로만 볼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불러오는 문제가 여기까지라면 오 헨리의 이러한 사소성의 집착은 그저 한 작가의 독특성 정도로 그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그 시각 자체가 더 큰 문제를 급기야는 불러오기 때문에 오 헨리의 이 '사소성'의 추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 헨리의 말에 귀를 기울일 당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시각이 가져오는 더 큰 문제란 바로 자본주의가 팽배해짐으로써 사물에 대한 그러한 시각이 이제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까지 옮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재화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도 효용성, 즉 오로지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만 기준으로 판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분명 오 헨리는 당시에 만연된 극심한 빈부격차나 비인간적인 노동력 착취의 현장에서 바로 이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가 작품 속에 그러한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따라서 오 헨리의 '사소성'이란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인간에 대한 왜곡된 시각 자체와 싸우기 위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 헨리의 사소성은 무엇보다 어느 하나의 잣대로만 규정할 수 없는 사물이 가진 다양성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의 존재가 가진 다양한 면모를 가감없이 펼침은 사람에게 적용되면 어느 신분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결정될 수 없는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삶 자체에다 갖다대면 자본주의의 획일적 가치관으로 도저히 포획할 수 없는 파노라마 처럼 펼쳐지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오 헨리는 궁극적으로 오로지 하나의 효용성, 하나의 시각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시각이 낳는 것은 오로지 고고귀한 존재를 그저 도구로 전락시키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물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별 것 아닌 소소한 일상이지만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는 자본주의로 인해 점점 그 빛을 잃어가는 신세계에 그 자신이 직접 정말 제대로 된 신세계를 가져오려 하는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온갖 사소한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속 사소한 물건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로 넘쳐나는 그러한 신세계를. 오 헨리는 바로 그 신세계의 세헤라쟈드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상과 자신의 삶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아마도 드보르작은 정말은 이것을 보아야 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오 헨리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새삼 여기에 그 까닭을 중언하듯 붙일 필요가 있을까? 아마도 자본주의적 시각이 가져올 위험을 말할 때 당신 역시도 다 느꼈을 것 같은데, 그 때의 뉴욕과 오늘의 현실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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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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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학자 노스롭 프라이는 소설의 본질은 알레고리라고 말한바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이번 소설은 그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저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그야말로 알레고리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프롤로그처럼 붙인 '밧줄 마술'의 이야기는 이 소설 전체가 가진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알레고리적으로 본다면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각 장들은 정확히 그 '밧줄 마술'에 대응한다고 하겠다.

 

 '샤머니즘'으로 유명한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이란 책에서 바로 이 '밧줄 마술'에 대해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하여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우선 이러한 밧줄 마술의 이야기가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인도나 티벳, 말레이시아등 각 나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남을 보여주고는 그렇게 이 밧줄 마술은 각 문명에서 신 아래에서 시간과 타자에 엮이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자기 삶에 대해서 가지는 실존적 불안과 염원을 표상하는 하나의 원형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고 말해준다. 그 뒤 그는 모든 '밧줄 마술'에서 드러나는 네 개의 공통된 요소들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것이 그대로 이 소설 각 장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네 요소들이란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오는 것, 밧줄을 올라가는 것, 같이 올랐으나 동료인 소년의 몸이 토막 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인데 이것이 그대로 이 소설 각 장의 내용에 있어 주가 되는 것이다. 즉 1장이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오는, 그렇게 하나로 이어졌던 세계가 그러다 서서히 분리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2장의 이야기는 밧줄을 올라가는, 그렇게 하늘과 사람을 이으려는 노력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여기서는 사람을 넘어 사물까지 자신과 이으려는 제이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3장은 토막 나는 소년의 이야기에 해당하므로 이와 똑같이 이어져 있었으나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동규가 전면으로 나오며 마지막 장은 지켜보는 자들에 해당되기에 제이가 하늘로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거나 들었던 자들인 박승태, 작가, Y등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밧줄 마술'은 그야말로 이 소설의 주된 모티브라 아니 말할 수 없는데 엘리아데에 따르면 밧줄이라는 상징은 '모든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 속에 포함되어 있고 어떤 조직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자신의 과거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같은 책, P. 236) 가운데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미지라 한다. 나는 이러한 밧줄에 대한 이야기가  김영하의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그대로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왜 김영하가 이 소설에서 밧줄이라는 상징을 가져왔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그건 문학이 지금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문학이야 말로 밧줄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도처에 명백하게 존재하는 고통. 더구나 제이의 이야기에서 드러난 그 밑바닥 십대들의 삶처럼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아서 더 한 고통을 받게 되는 자들의 존재 앞에서 문학은 과연 그 스스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러한 물음 앞에서 김영하는 문학가로서의 자신의 소임을 재확인하듯 '밧줄'을 가져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제이의 '대폭주'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제이는 김영하가 글을 쓰는 것과 똑같이 폭주로 도시에다 '거대한 붓질'을 한다. 그러한 제이의 대폭주는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하늘로 이어진 밧줄을 타고 오르는 마술사처럼 세상에 분명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존재들을 보게 만들어 이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제이의 폭주는 문학이며 그의 승천은 차라리 그 폭주 문학의 완성이라 할만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확실히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 역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세계와 서로가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더 이상 평면의 활자들로는 이 시대에 제대로 문학적 발언을 할 수 없다는 일종의 자조(自嘲)적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제이가 보여준 폭주의 문학은 분명 김영하가 바라는 문학의 이상적 형태가 아닐까 싶다.

 

 프랑스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란 무엇보다 단절과 배제라고 했었다. 끊임없이 끊어내고 밀쳐내는 게 바로 근대라는 것인데 솔직히 따지고 보면 이 근대야말로 마술이나 마찬가지다. 마술이 본디 실체를 알 수 없는 눈속임이듯 근대에 의해서 자행된 그 모든 논리엔 사실 아무런 진리가 없으며 오로지 사람들을 충동질하기 위한 시각적 현혹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어주기가 본질인 문학이 그런 근대의 소생이라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문명이란 게 또 알고 보면 오디이푸스적이다. 사실 진보란 바로 그러한 '살부(殺父)'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프로이트도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김영하는 오늘날의 고통을 야기한 마술에 문학이란 마술로서 응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마술엔 눈속임이 있지 않다. 보이지 않도록 감추는 것이 아닌 거꾸로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는 마술이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바로 그런 마술사가 되려하며 그리하여 그의 문학이 무엇보다 문득 '자신의 발밑에 있는 무한의 벌판을 보게'되었다는 그의 말처럼 보이지 않았던 세계와 사람을 지금 우리들과 이어주는 밧줄이 되기를 바란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바로 그의 그러한 신념의 확인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정말 밧줄 마술을 하는 마술사를 보는 것 처럼 괜시리 흥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를 통해 다시금 음미하게 된 문학의 의미로 나 역시도 그 밧줄로 사람과 세계와 이어지길 바라는 소망까지 더해져서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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