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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평점 :
종종 변화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어온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폐해가 극에 달해 곳곳에서 파열의 신호가 감지되던 2011년 1월.
그 파열을 거대한 크레바스만큼이나 열어젖힐 거센 변화의 바람이 설마 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불어올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바로 23년동안 튀니지를 독재했던 밴 앨런 정권을 무너뜨렸던 재스민 혁명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건 마치 사막을 뒤덮는 거대한 모래바람처럼 철옹성 같았던 구시대의 독재 정권들을 하나하나 삼켜갔다. 이집트의 독재 정권 무라바크가 무너졌고 42년간이나 리비아를 좌지우지했던 가다피마저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그리고 환호했다. 그 변화의 바람이 비단 아프리카에게만 자유를 가져다줄 희망의 바람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 세계의 사람들은 그런 변화의 바람을 염원하고 있었다. 부자들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세상. 약하고 가난한 자들은 예외없이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이 세상. 이렇게 된 근본 이유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 때문임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곳곳에서 폐해가 드러나는 난파선 처럼 침몰해 가고 있는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 다른 배로 갈아타고 싶은 마음들이 커져갔다. 뭔가 자신들에게 보다 안정된 삶을 가져다 주고 떳떳하게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살아가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재스민 혁명은 바로 그러한 소망에 불을 지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놀랐다. 그건 이제까지 그들이 알고 있는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그들은 미개하고 너무도 가난해서 그저 굶주림에 늘 고통받는 땅일 뿐이었다. 소말리아 내전을 다룬 영화 '블랙호크다운'에서 보듯 그들은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평화의 쟁취가 불가능한 존재들이었고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다룬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 보듯 문명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으면 어린아이들마저 무참히 사람들을 살육하는 그런 무자비하고 잔혹한 대지일 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뭔가를 이루어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것이 바로 전 세계가 아프리카를 보던 눈이었다. 하지만 재스민 혁명은 거기에서 사람이 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스스로 생각과 판단을 하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용기를 가지고 떨치고 일어나 싸울 수 있는,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내부적 역량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임을 똑똑히 보여준 것이다.
그랬다. 재스민 혁명은 단적으로 아프리카가 그동안의 가면을 벗고 자신의 원래 얼굴을 우리들에게 보여준 것이나 같았다. 사람들은 마치 이제 아프리카를 처음 보듯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아프리카는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현재 주 세네갈 한국대사관 참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 윤상욱의 책 제목인 '아프리카엔 아프리카가 없다'는 바로 이러한 것을 뜻한다.
그는 부제에다 당당히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라고 달았는데 바로 이 말이 왜 저자 윤상욱이 이 책을 저술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우리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아프리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이 자연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편견에 불과한 것임을 밝히고 이제 새로이 맨 얼굴을 드러내는 아프리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편견들만 덧씌우는 외부에서의 시각이 아니라 아프리카 내부에서 그들의 가치관과 문화로 바라보아야 함을 이로써 나타내는 것이다.
이 책은 총 5장에 걸쳐 우리들에게 가장 객관적인 그래서 가장 진실된 아프리카의 모습을 보여준다. 각 장들은 현재 아프리카의 모습을 경제, 정치 문화 각 방면에서 다 조망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선 1장 '왜곡된 정체성'에서는 제목 그대로 그동안 우리가 가진 아프리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이 모두 서구중심주의에 의해서 악의적으로 왜곡되고 조작된 것임을 밝힌다. 무려 그 왜곡의 연원은 제국주의가 한창 팽창되던 18세기까기 거슬러 올라간다. 윤상욱은 당시의 대철학자 헤겔을 거론하며 서구중심주의가 그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얼마나 의도적으로 아프리카를 부정적으로 의미화 작업을 했는지 대표적으로 밝힌다. 수전 벅모스의 저서 '헤겔, 아이티, 보편사' 역시도 여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같이 참고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이미지들은 오로지 서구가 문명화를 통한 야만의 계몽이라는 미명하에 제국주의적 수탈을 스스로 정당화하려고 내놓은 기만적 술책에 의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제 아프리카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들은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안되며 그 내부로 들어가 그들 고유의 시각으로서 조망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2장 빈곤과 저개발에서는 그 내부의 시각에서 아프리카의 현재 경제 상황을 살피고 3장 독재와 폭력에서는 아프리카의 현실 정치를 그리고 4장 심성과 편견에서는 그 내부의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바라본 그들의 문화를 얘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아프리카의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를 살펴본 뒤 현재 아프리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내전의 빈발, 경제적 궁핍, 관료와 엘리트들의 부패, 장기 집권등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과 전망을 마지막 장 '아프리카의 봄'에서 탐색한다.
이렇게 이 책은 현재 아프리카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반적으로 훑어준다. 무엇보다 현재 아프리카에서 근무하면서 겪었던 체험에서 나온 내용들이라 보다 더 직접적으로 아프리카를 보듬게 하는게 커다란 장점이다. 그렇게 다시금 새롭게 보듬게 되는 아프리카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아프리카와는 물론 다르다. 물론 가진 문제점도 여전히 크고 많지만 그것을 개혁하려는 그 내부의 움직임도 그 못지 않게 적극적이고 커다랗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대로 오로지 외부의 원조에만 기대려 하는 아프리카는 아닌 것이다. 아예 그들 스스로 보다 자립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원조를 거부하자는 주장까지 내부에선 제기될 정도였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왜곡에서 비롯된 편견인줄도 모르고 진실로만 생각해서 그 대상이 지니고 있을 변화의 가능성마저 미리 배제해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원조'라는 것에 대해서 참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TV를 보면 아프리카를 도와주자는 내용의 프로그램들을 더러 보게 되는데 솔직히 이 책을 읽고나니 TV에서까지 저렇게 아프리카에 도움을 운운하는 것은 별로 좋지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원조의 정당성을 위해서라지만 그렇게 부정적인 아프리카의 모습만 강조하면 우리가 가진 왜곡된 아프리카에 대한 인상들은 앞으로도 더욱 더 굳어질 것임이 틀림없을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진정한 원조란 단시 그들에게 빵을 주고 돈을 줘서 굶주림을 덜어주고 경제적 궁핍만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건 원조라기 보다는 적선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원조와 적선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원조는 동등한 차원에서의 배려라 할 수 있지만 적선은 오직 주는 자의 우월함만 드러내는 계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원조는 그들이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다리가 부러진 자를 위해 내 어깨를 빌려주듯 그렇게 같이 동등한 자로서 어려움을 나눠 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원조를 함에 있어서는 그 원조를 받는 타자를 보는 시선 역시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그 타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하냐에 따라 원조의 성격 역시 규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원조의 방법 역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엔 비단 경제적 어려움 뿐 아니라 정치적 어려움들도 존재한다. 문제는 이것이 분리되지 않고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솔직히 지금 외국의 원조한 것들 중 대부분은 지도자와 관료 그리고 엘리트들 수중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정치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은 전혀 도움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무턱대로 도와주는 것에 앞서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며 그 지향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프리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물론 최근의 한국은 어디까지나 경제적 도움만 추구한다. 혹시 이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가져온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 때문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장 '아프리카의 봄'은 여전히 전망은 불투명하고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 장애물들을 극복해 보려는 내부의 움직임들을 보여준다. 비록 우리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미약하고 존재하는 해악들 앞에선 바람 앞의 촛불처럼 속절없을지라도 속단은 금물이다. 재스민 혁명은 바로 그 미약한 가능성들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것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진정한 원조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촛불 같은 가능성들이 꺼지지 않고 그대로 밝은 여명이 될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아프리카를 그 고유의 시각으로서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그 첫 발걸음으로 이 책 '아프리카엔 아프리카가 없다'는 참으로 유용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