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연속 세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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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마등 같군요." 

 "음?"

 "지나치는 풍경 말입니다. 기차나 차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사고하는 속도 보다는 빠르죠. 죽기 직전에 인생의 온갖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고 하는데, 딱 이정도 속도가 아닐까요?"('달의 뒷면' p.37)

 

 

 2001년에 나온 '달의 뒷면'은 수로로 부터 시작된다. 교이치로의 부탁으로 야마쿠라로 오게 된 다몬은 그렇게 교이치로와 함께 배를 타고 수로를 타내려가다 문득 이런 말을 한다. 수로의 속도가 인생을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때의 속도와 닮지 않았냐고? 온다 리쿠가 왜 다몬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분위기의 '불연속세계'라는 (그녀 자신의 표현대로) 기행 미스터리 같은 것을 쓰게 되었는지가 바로 이 말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인생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에 함의되어 있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주인공이었기에 직접 바라 볼 수는 없었던 삶이란 텍스트가 그제서야 객관적으로 마치 책을 보듯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지나쳐 온 인생 자체가 한 권의 책처럼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로의 속도란 바로 텍스트를 읽는 속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수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바로 수로란 책 읽기의 상징이라는 것이 말이다. 뒤이어 나오는 다몬의 느낌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낸다.

 

 주택가로 들어서면서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노 젓는 소리만 점점 명료하게 들린다. 배는 매끄럽게 나아가는데 시간과 정경만이 저속 촬영한 것 처럼 느껴진다. 오래된 벽돌건물 공장, 창문에 비치는 물의 그림자, 군생하는 창포, 그 각각이 스톱모션처럼 기억에 새겨진다.(같은 책, p.39)

 

 

  이것은 그대로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받게 되는 인상으로 치환시켜도 통용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 같은 고백을 한 뒤에 다몬은 나중에 목격하게 되는 미스터리의 진실된 모습을 암시하는 것 같은 '우렁이 알'을 보게되는데 이렇게 그 원인적 존재의 출현에 대한 복선과 그 존재가 주로 기거하는 곳이 또 수로임을 감안한다면 수로가 책 읽기의 상징이며 '달의 뒷면'이 사실은 이 시대 소수의 쾌락으로 점점 전락해가고 있는 책 읽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더더욱 분명해진다. 더구나 온다 리쿠는 다몬의 입을 통해 수로가 가지는 특징을 단적으로 얘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야나쿠라 도시 자체를 횡단하며 어디로든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책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세계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 그러므로 '달의 뒷면'을 읽을 때 무엇보다 떠올려야 하는 것은 지금 그 책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 자신이다. 당신에게 지금 책 읽기란 무엇인가? '달의 뒷면' 자체는 온다 리쿠가 당신에게 건네는 이러한 질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불연속 세계'란 책에 대해 쓰면서 앞 머리에 달의 뒷면 이야기를 저리도 길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불연속세계' 자체가 '달의 뒷면'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다몬'으로 말하자면 모두 '다몬'시리즈라고도 할 수 있다.) '달의 뒷면'이 무슨 이야기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불연속세계' 역시도 무슨 이야기인지 보다 확실하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두 책의 이야기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써 내려간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비록 두 작품 사이엔 7년이란 시차가 있고 별개의 책으로 묶여있다고 해도 말이다. 이를테면 '달의 뒷면'은  이 '책' 자체를 상징화한 제목이라 할 수 있는 '불연속세계'의 그 1부라 할만하다. 사실 제목 자체에서 이미 어느 정도 연속성은 감지된다. '달의 뒷면'이란 언제나 같은 면만을 볼 수 밖에 없는 지구에 있어서 도저히 볼 수 없는 부분으로 그렇게 하나의 '불연속세계'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달의 뒷면'은 위에서도 말했듯 책이 주는 이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이어짐이란 어디까지나 책이 주는 '타자'를 내부에 포용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런데 뒤이어 나온 작품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불연속세계'이다. 모두 다섯 개의 단편이 모여있는 이 작품에 '불연속세계'란 제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제목은 단편과 별개로 책 자체에다 붙여진 제목이다. 이건 '달의 뒷면'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달의 뒷면이 이 책 전체가 하려는 이야기의 1부에 해당된다는 말 역시 틀린 것은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달의 뒷면'에 대한 얘기는 나만의 착각이며 '불연속세계'란 제목은 아마도 실려있는 다섯 편 모두가 하나의 줄거리를 가진 것이 아닌 개별적으로 독립적인 이야기라는 단순한 이유에서 붙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있다. 온다 리쿠는 왜 이 단편집을 일종의 기행 미스터리로 만들었던 것일까?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이 책에 대해 직접 말한 부분이다. 아예 후기에서 이 모든 다섯 편의 이야기들이 사실은 자신이 직접 다녀온 곳을 토대로 쓰여진 것임 또한 그녀는 밝히고 있다. 하긴 '달의 뒷면' 역시도 실제 야나가와를 기반으로 쓰여졌다. 그런데 기행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풍경이란 것을 텍스트로 하여 읽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기행문'이란 글이 가능한 것도 다녀온 곳이 하나의 텍스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달의 뒷면을 포함하여 이 모든 이야기들은 온다 리쿠가 그 곳에서의 체험을 미스터리로 우려낸 이를테면 대면했던 풍경들의 독후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서도 '책 읽기'란 여전히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단편집의 첫 시작을 여는 '나무지킴이 사내'에서 다몬은 아예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한다.

 

 아파트를 나와 주택가를 빠져나와서 철길 건널목을 지나면 강가가 나온다. 도회지의 강이라 그런지 존재감은 별로 없다. 좀더 큰 강 같으면 가까이 갈수록 존재가 느껴지게 마련인데, 커다란 콘크리트 도랑 밑바닥에 괸 물은 완전히 길들여져 체념한 것 처럼 보인다.

 강은 연속된다.

 다몬은 강가를 산책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강이라는 것은 중단된다는 게 불가능하다.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더라도 강은 건물 사이며 도로 밑으로 이어진다. 찌그러지고 누덕누덕 짜집기된 도쿄, 맥락없는 지상에서 강만은 언제나 연속되며 어김없이 출구를 찾아낸다.(p.9)

 

 여기서 강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다. 그것이 원래 '달의 뒷면'에 나온 수로에서 이어지는 이미지라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달의 뒷면에서는 그토록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던 수로는 도쿄에선 미미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미미함의 이유에 대해서 온다 리쿠는 '길들여져'란 어떻게 보면 좀 생뚱맞아보이는 표현을 쓴다. 그녀는 왜 굳이 이런말을 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난 그게 이상했다. 그런데 이 첫 부분의 묘사가 아파트, 주택가로 부터 시작되는게 의미심장했다. 위에서 인용한 '달의 뒷면'에선 수로에 의해 포위되어 아예 젖어버린 듯 보였던 그 주택가가 이제는 강마저 체념하게 만들 정도로 그 존재감을 뚜려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차이가 바로 강의 왜소해진 이유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때문에 강을 체념시켜버린 진범으로 또한 '커다란 콘트리트'란 묘사가 나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것은 그대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정확히 반영하는 듯도 보였다. 콘크리트는 그 육중함으로 인해 단절을 가져오는 존재가 아닌가. 바로 그것이 강의 이어짐을 막고 있었다. 강의 이어짐은 철길과 맞물려 더욱 강화되는데 그 전에 온다 리쿠는 콘크리트 세상과 강의 세계를 '빠져나와서'란 단어로 잇고 있었다. 즉 여기서 이 모든 문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분명해진다. 즉 강이란 것을  '달의 뒷면'의 수로가 가졌던 의미 그대로 책 읽기에 대한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여기서 아파트, 주택가는 모두 '콘크리트'로 집약되는 바쁜 우리의 도시적 일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실 그 바쁘디 바쁜 도시의 일상을 영위하느라 독서 시간을 줄이거나 거의 가지지 못한다. 그렇게 도시적 일상에 길들여지고 나중에 가서는 체념하게 되는 것이다. 온다 리쿠의 '길들여져 체념한 것'이란 표현은 정확히 그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연속세계'는 불연속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달의 뒷면'의 주제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확장이었다. 이를테면 '달의 뒷면'이 책 읽기가 가져다주는 힘을 총론식으로 다룬 것이라면 '불연속세계'는 그것을 각론식으로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다 구체적으로 책 읽기가 주는 힘을 여행을 하면 다녔던 곳마다 다른 느낌을 받게 되듯이 다르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이 모든 다섯편의 구성이 참으로 흥미롭다.

 

 '불연속세계'는 '나무지킴이사내' '악마를 동정하는 음악' '환영 시네마' '사구 피크닉' 그리고 '새벽의 가스파르' 이렇게 총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성상의 원칙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공통점이 보인다. 모두 텍스트에서 실체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악마를 동정하는 음악'은 테이프에 녹음된 음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죽음의 실체적 진리로 나아가고 '환영 시네마'는 영화라는 텍스트에서 출발하며 '사구 피크닉'에서는 소설(나중엔 아예 마츠모토 세이초의 박물관이 등장한다.) 이라는 텍스트가 시작점이 된다. 새벽의 가스파르는 '사진'이 출발점이다.('나무지킴이 사내'의 경우 이 단편집의 우주를 미리 정리해주는 원론 같은 작품이라서 텍스트가 무엇인지 말하기가 사실은 조금 어려운데 아마도 가장 유사한 텍스트가 있다면 그림이 될 것 같다. 그것은 책에 대한 또 하나의 비유이기도 한 '벗꽃' 자체가 주는 시각적 이미지로 인해 더욱 그렇게 추정된다.) 이렇게 각 단편들은 모두 문득 발현되어진 하나의 텍스트를 둘러싼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한 해석의 놀음들이다. 온다 리쿠가 왜 하필이면 이런 구성을 취했는지는 이것이 책 읽기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이유가 명확해진다. 즉 그것들이 그대로 우리가 책 읽기를 통해 접하는 과정과 그대로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단편들이 가진 구성 방식은 우리가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실체'라는 진실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삼월을 붉은 구렁'에서 책을 두고 벌어졌던 잡담들은 정확히 여기에서도 여전히 환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의 가스파르'는 '삼월의 붉은 구렁'에서의 '기다리는 자들'의 완벽한 반복이다. 마치 니체가 말했던 동일한 것의 영겁 회귀와 같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하긴 이 단편집의 원제 자체가 'THE DISCONTINUOUS CIRCLES'이기도 하다. 사람은 그 누가 되었든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똑같은 원을 두번 그릴 수 없다. 원제는 이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삼월은'에서의 '기다리는 자들'과 '불연속세계'의 '새벽의 가스파르'의 관계 그 자체에게도 해당된다. 아마도 온다 리쿠는 같지만 완전 다른 이런 반복을 통하여 애초에 제기했던 '불연속'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불연속이란 '콘크리트'가 가지고 있는 단절로서의 불연속이 아니라 '같지만 계속 다르게 나아가는' 그런 의미의 불연속이라는 것을... 사실 이것은 본인이 말했던 '기행' 자체에도 해당된다. 여행이란 그렇게 모두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것이지만 결국 그 주체는 나 하나이니까. 그렇게 기행이라는 것도 사실은 같은 원을 그리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책 읽기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여러 다양한 책을 읽지만 그것들은 모두 같지 않다. 왜냐하면 여행에서 우리는 멈춰있지 않듯이 독서에 있어서도 우리는 멈춰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여행이 풍경과 나의 나아감이 서로 교감하는 상태에서 받아들임과 되새김의 연속된 과정이듯 책을 읽는다는 것도 그러한 교감을 통한 되먹임의 연쇄를 통해 우리의 자아와 그것이 포함하는 세계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새벽의 가스파르'의 결말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한 하나의 대상에 불과했던 책이 결국에 가서는 나를 위로하고 바꾸는 동반자적인 주체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 책의 첫 단편에 실린 '나무지킴이사내'에서 한 등장인물이 말하는 이 대사는 정확히 '불연속세계'가 책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타인이 아니야.자기의 일부, 예전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 뿐.'(P.19)

 

 물론 바로 이 책의 대상에서 주체로의 전환은 '달의 뒷면'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들은 책이 나의 동반자로서 궁극적인 주체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느냐에 대한 얘기들이며 각각의 단편은 그걸 가능하게 하는 책의 다른 힘들을 암시하고 있다.(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이것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표지에 그려진 '계단'이야 말로 이 책에 딱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책은 그렇게 문득 당신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인도해주는 계단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책 읽기란 엘리베이터 처럼 그냥 순식간에 이동시켜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에스컬레이터 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데려가주는 존재도 아니다. 책 읽기가 계단 오르기인 이유는 정확히 바로 당신 자신의 노력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책 읽기란 무엇보다도 한 걸음 한 걸음에 해당하는 한 권 한 권의 책이 당신에게 주는 느낌과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알고자 하는 노력이 톱니처럼 맞물려가는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진적일 수 밖에 없고 책이 주는 것 만큼이나 거기에 들이는 당신의 노력 역시 필요하다. 즉 책 읽기란 그저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하나 얹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책은 미인과 같아서 적극적인 자 만이 그것을 쟁취할 수 있다. 즉 책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그가 가진 것을 더 많이 열어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책 읽기는 온다 리쿠가 했던 그대로 그토록 자주 여행에 비유되어왔을 것이다. 자기 스스로 나아가는 것 만큼 보다 더 넓은 세계의 풍경을 가슴에 안을 수 있게 되는 법이니까!  그렇게 당신은 '블연속세계'라는 또 하나의 계단을 이제 앞에 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어쩌면 이미 올랐는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올라가는 거기서 바라보게 되는 세상의 풍경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분명 나와는 무척이나 다를 것인데 이 시간 그것이 정말 궁금해진다. 

 

 언제나 내게 있어 글은 마무리가 어렵다. 끝이 왔다고 생각되면 그동안 내내 벼려왔던 에너지가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고 그 허한 마음 속 공동 속에서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사실은 이 글 역시 그렇다. 나는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불연속세계'를 통해 여기까지에 이른 내 여정은 어떤 식으로 맺어야 할까? 근데 한 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온다 리쿠가 말한 대로 책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여정이란 같은 원을 계속해서 조금씩 다르게 그리는 행위일 뿐이다. 그렇게 지금의 마지막 역시 다음을 위한 출발이다. 그렇다면 굳이 내 글에 '콘크리트'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저 곧 다음의 말이 있으리라 연상시키는 말줄임표로 끝맺는 것이야말로 이 '불연속세계'의 리뷰에 가장 어울리는 마침표가 아닐까? 그래서 내 글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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