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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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란 이제 기록이 아니라 발굴이 되었다.

 더 이상 왕조 같은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하거나 전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사건 중심이 아니라 그들에게 관심의 스포트라이트를 갖다대느라 상대적으로 가리워졌던 그래서 더 왜곡되기도 했었던 역사적으로 무시되어졌던 존재들에게 다시금 빛을 찾아주고 목소리를 가져다 주어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대낮의 환한 광장으로 인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역사의 소명이 된 것이다. 지배계급이 존재했었던 곳엔 어디에서나 그렇게 역사의 관심에서 소외된 자들이 존재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서양의 역사 못지않게 공식적 기록에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고 지금 역시도 온전히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한 존재들이 상당한 것이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궁녀가 아닐까 한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임중인 신명호의 '궁녀'는 오래도록 빛을 받지 못하여 무지의 베일에 가리워져 있었던 궁녀들의 삶을 제대로 복원해보려 한 저작이다. 그가 새삼 잊혀진 궁녀들의 삶에 주목했었던 것은 여성들의 급속한 사회적 지위 향상과 더불어 조선시대 내내 억압받았던 여성상을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 재조명의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대비, 왕비, 후궁, 궁녀등 궁중 여성들이 될 것이라 한다. 왜냐햐면 조선은 그 무엇보다 왕조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중 여성들의 경우 지금도 그것을 재현한 사극들에서 잘 드러나듯 자칫 그 권력의 추구와 흥미본위의 선정성에만 집착해 그 삶의 진정한 모습이 왜곡될 위험을 많이 안고 있다. 신명호는 그래서 역사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드라마에 의해 왜곡될 위험을 우려해 학문적 탐구가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번에 나온 '궁녀'는 바로 그러한 신명호의 문제의식에서 태어난 산물인 것이다.

 

 책은 총 6장에 걸쳐  진행되는데 첫째 장은 오래도록 역사의 관심을 받지 못해 공식적인 사료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궁녀들의 삶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 그 방법론을 논하고 둘째 장은 궁궐에서 그저 그림자들로만 존재하는 궁녀이기에 혹 우리의 선입견은 그녀들의 삶이 그대로 단일한 무채색의 삶이지 않을까 생각하기 쉬운데 이 장은 궁녀들의 삶이 전혀 그렇지 않음을 그러니까 파란만장한 다채로운 빛으로 가득한 것이었음을 특기할만한 궁녀들 개인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 장이다. 신명호가 하필이면 두번째 장에서 이러한 개개 궁녀들의 삶을 통해 다채로운 궁녀의 삶을 보여주는 이유는 이러한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독자의 흥미를 일으킨다는 점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아무리 궁녀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오로지 왕조에 대한 충성이라는 보편적 이념으로만 움직였던 존재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보다 근본적으로는 개인의 욕망을 성실히 추구했던 존재들임을  밝히기 위해서다. 조선 왕조가 건국 당시 부터 개인들의 욕망을 억누르고 보편적인 이념만을 추구하려 했던 나라임은 조선의 기틀이 되는 근본 사상을 다졌던 정도전이 경복궁의 침전을 '강녕전'이라 이름붙인 연유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강녕전의 의미는 바로

 

  왕이 밤에 조용히 황극을 닦으며 식욕, 색욕, 권력욕 등 인간의 원초적 욕망들을 잠재워야 한다는 의미였다.(p. 9)

  (여기서 '황극'이란 인간의 원초적 욕망들이 생겨나기 전의 중용 상태를 말하는데 즉 황극을 닦음이란 어디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공평무사한 중립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렇게 조선은 처음부터 개인의 원초적 욕망을 무화(無化)시키는 것을 이념으로 출발한 나라였다. 그렇게 모든 존재들을 보편이라는 광막한 장막으로 덮으려 한 나라였다. 하지만 신명호는 그 왕조의 중심에 있어서 누구보다 그 보편적 이념에 봉사했어야 할 궁중 여성들조차 무엇보다 개인의 원초적 욕망을 추구했던 존재들임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궁중 여성들의 존재 자체가 보편적 이념과 개인적 욕망 사이의 투쟁을 의미하는 상징이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동안 궁녀의 실제 삶이 그동안 역사적으로 전혀 조명받지 못했다는 것의 환유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그 궁녀들의 삶이 그토록 조명받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개인의 욕망 보다는 어디까지나 보편적 이념을 중시했던 조선 때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가리워졌던 궁녀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은 그렇게 보편적인 이념의 그늘아래 웅크리고 있어야 했을 개인의 욕망들을 복원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그래서 신명호는 자신의 저서 '궁녀'를 욕망을 비롯하며 개인적인 삶의 실현을 밑그림 삼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3장과 4장 그리고 5장은 그 개인으로서의 '궁녀'의 삶에 있어서 바탕을 이루는 조건들을 그려낸다. 즉 3장에서는 궁녀의 선발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4장에서는 궁녀들의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고 움직이는지 그리고 5장에서는 그들의 업무와 라이프 스타일을 밝히는 것이다. 이 모든 궁녀들의 삶의 조건들을 다 그려내고 난 뒤 드디어 마지막 6장에서 가장 개인의 원초적 본능이라 할만한 궁녀들의 성과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의 순서는 그냥 무심히 배열된 것이 아니라 지금 궁녀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와 관련하여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보편적 이념의 정수라 할만한 정도전의 강녕전에서 그 중심에서 오히려 개인의 원초적 욕망 충족에 충실하는 궁녀들의 삶까지 이르는 여정은 그야말로 보편적 이념이 결국은 개인의 원초적 욕망에 의해 패배하는 여정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궁녀들의 삶을 통하여 궁녀들 삶 자체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이념이 아무리 강고하게 억누른다고 해도 개인의 원초적 욕망은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로써 역사가 다시금 보편이란 이름아래 지워진 개인들의 삶을 발굴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개인은 그 자체 삶으로서 완전한 것이며 그 개인을 자꾸만 부족한 존재로 만들어서 길들이려 드는 보편적 이념은 그야말로 억압적 가설이거나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궁녀'의 역사란 그저 지나간 역사의 흔적이 아니라 오늘의 생생한 역사로 다시금 음미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즉 궁녀들의 삶이란 사회라면 언제나 존재할 수 밖에 없는 보편적 이념과 개인의 원초적 욕망 사이의 대립을 제대로 되새겨 볼 수 있는 현장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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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1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번 책은 제목과 표지부터 강렬하네요.
리뷰도 짧고 강렬하고. 마침 책 사려는데, 음 읽어볼까.
<채홍>을 읽었더니 이제 궁녀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요 ㅋㅋ

ICE-9 2012-06-10 22:58   좋아요 0 | URL
후후, 사실 마지막 장에 '채홍' 얘기가 나와요. 읽으면서 소이진님이 읽으면 좋아하겠다 생각도 했더랬죠^ ^ 그런데 정말 오랜만이에요. 제가 너무 들르지도 못하고 그랬죠? 곧 찾아갈게요^ ^

프레이야 2012-06-11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관심가길래 마음에 찜해뒀는데 님의 리뷰 읽고는 바로 담아갑니다.^^

ICE-9 2012-06-13 02:47   좋아요 0 | URL
앗. 프레이야님 감사합니다.^ ^
저는 꽤 만족스럽게 읽었는데 프레이야님도 만족하실 수 있으시면 좋겠네요^ ^
 
슬로우 - 무한경쟁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
플로리안 오피츠 지음, 박병화 옮김 / 로도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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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4년 영국의 화가 조셉 말러드 윌리엄 터너는 '비 증기 그리고 속도'라는 그림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70세에 그린 이 그림은 기차 여행중 기차의 빠른 속도로 인해 유리창에 그려지는 빗방울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 속도감으로 인해 달라지는 세계의 인상을 이렇게 화폭에 옮겨 놓은 것이었다.

 

 터너의 그림에서 보듯 근대에 들어와 놀랄만큼 빨라진 속도는 사람들에게 경이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체험이었고 단시간에 보다 멀리까지 가게 함으로써, 그렇게 그들의 세계를 보다 확장시켰으므로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그 때부터 사람들은 빠른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삼 시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루 걸릴 거리를 한 시간만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시간 단위들이 중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생활은 이제 하루, 반나절 이런 단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빨라진 속도에 맞춰 시간 혹은 분 더 나아가서는 초 단위까지 나뉘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 우리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시간 테이블은 근대에 들어와 나타나게 된 일종의 발명품이었고 그것을 정형화시킨 이는 바로 미국의 프레데릭 테일러였다. 테일러는 1910년대 당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던 생산 공정에 표준화를 가져온 이로 유명하다. 그것이 가장 최초의 정형화된 일련의 공정이었으므로 '테일러주의'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테일러는 생산 공정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공정을 세부적으로 단계를 나누어 그 순서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단순 반복 작업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숙련성'을 노동자에게서 박탈하였고 그래서 보다 쉽게 노동자들을 교체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무튼 테일러는 그 단순 반복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시간을 분단위까지 잘게 나누어 시간표를 짰는데 바로 그러한 시간의 분할이 오늘날 자본주의 시간적 생활양식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원인과 결과란 종종 되먹임의 과정이다. 원인이 촉발시킨 결과가 다시 그 원인을 가속화시키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분과 초 단위까지 관리되기에 이르자 생활의 속도 역시 더욱 빨라지게 되었다. 시간 여행에 대한 영화를 보게 되면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도 과거의 사람이 현재의 도시로 왔을 때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장면이다. 그것은 과거에서 온 여행자가 자신의 시대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의 행렬을 놀란 표정으로 보게 되는 장면이다. 왜 영화들은 자주 이것을 묘사하는가? 바로 이 속도의 체험, 가속화된 시간의 체험이 과거의 사람에게 무엇보다 시간적 단절의 느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의 시간 리듬이란 근대와는 달라서 보다 더 긴 시간 단위 그러니까 하루나 한달 어쩌면 계절을 주기로 흘러갔으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가속화'란 어디까지나 근대에 의해 창출된 이른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각을 우리는 독일의 다큐멘터리 작가 플로리안 오피츠의 '슬로우'란 책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시간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이유는 요즘 부쩍 늘어난 시간 관리 상담가라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시간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잡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아끼려는 개인의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 문제를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많지 않습니다.(P.89)

 

 

 

 

 오피츠의 '슬로우'도 이와 같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속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아니 이 책 자체가 오피츠가 살면서 가지게 된 하나의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그 의문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든 한 번은 떠올려 보았을 그런 의문이다. 즉 '왜 이렇게 시간에 쫓기듯이 살아야 하는걸까?' '시간을 벌려 바쁘게 살아가는데도 휴식은 커녕 왜 더 바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바쁘게 지내야 하는 걸까? 대체 여기에 해결책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다.

 

 기술적 발달로 절약한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는 간단하게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손편지 하나 쓰는 것보다 이메일을 작성하는 것이 두 배는 빠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루에 편지 10통 쓰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면 이제는 30분이면 이메일을 10개 쓸 수 있죠. 그런 30분의 여유가 생깁니다. (...) 하지만 실제로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이메일을 10개가 아니라 50개 60개씩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린 셈이지요. (...) 우리는 이메일 기술의 발달로 시간을 벌었지만 그만큼 읽고 처리해야 할 뉴스도 많아졌기 때문에 이를 도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신기술의 발달로 얻는시간 보다 뉴스의 양이 훨씬 더 빨리 늘어나기 때문입니다.(P. 73~74) 

 

 

 그렇게 단순히 오피츠 개인의 의문이란 것을 넘어서 어쩌면 사회 보편적 의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의문들을 말 그대로 오피츠 스스로 풀어나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 '슬로우'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다큐멘터리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기 때문에 인터뷰가 중심이다.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파문처럼 보다 확장되는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즉 1장 '우리는 왜 불안하게 쫓기며 살까?'가 개인 차원의 시간 관리 문제를 다뤄 개인적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밝혀낸다면 2장 '속도와 경쟁에 집착하는 세상'은 거기서 보다 확장되어서 사회적 차원을 다루는데 즉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사회가 이미 구조적으로 가속화 사회이기 때문임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논리가 시간을 부족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시간은 곧 돈이고 돈은 늘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 불가능한 겁니다. 우리를 몰아세우는 것은 비단 자본주의나 경제만은 아닙니다. 경쟁 논리도 한 몫 거들죠. (...) 바로 이 경쟁 논리가 이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며 이 경쟁 논리 때문에 인간은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언제가는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 세상이 조금씩 빨리 돌아가고 있으며 우리도 그에 맞춰 빨라져야 한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빨라진 속도는 이제 활동의 자유를 가져다주지도 못하고 자기 발전에 대한 희망도 심어주지 못합니다. 압박은 점점 심해지는데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없지요. (..) 우리는 속도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 이런 구조에서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빨라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P.112 ~ 113) 

 

그리고 3장 '행복과 속도, 그 대안을 찾아서'는 이미 구조로 자리잡은 가속화 사회에서 과연 그 속도에서 해방되어 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진정한 여유를 가질 수 있는지, 그 대안을 탐색한다. 이 모든 과정은 오피츠 개인의 체험으로 접속되어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경험과 함께 보다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누구나 한번쯤 해 보았을 의문에다가 그 과정이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의 해답 찾기 과정이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 않게 그리고 마치 내 문제 처럼 그 여정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 그래서 오피츠의 고민과 더불어 첫 페이지를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앞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거기다 대답의 추구 대부분이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는지라 각 사람들의 체험을 통하여 보다 더 생생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다.

 

  이 책은 특정한 대안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사람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주된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그들의 육성으로 생생한 체험들을 들으면서 독자 자신이 자기에게 맞는 대안들을 찾아 가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이 꼭 건네는 충고는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한계를 알아라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얼마든지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다는 과욕을 부리지 말 것을 경고한다. 바로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식의 내겐 한계가 없다는 과신이 속도의 강박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래서 엄연히 존재하는 육체의 한계를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은 신체와 정신의 피로만 가중시킨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진정한 '슬로우 라이프'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기 절제'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겸허히 내 한계를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삶을 꾸려나가는 것. 그렇게 스스로 제동 장치를 두는 것. 이것이 가장 필요한 자세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단 이것은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사회 역시도 이러한 제동 장치가 필요한데, 오늘의 거대한 위기를 초래한 신 자유주의가 바로 그러한 제동장치가 없는 체제였기 때문에 이 '자기 한계의 긍정에서 나오는 절제'라는 제동 장치는 정말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가속화는 장기적인 안정이 보장될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안정은 다시 제동 장치의 기능이 원활할 때 보장되지요. 최근 수 십년간 지속되는 신자유주의는 이 제동장치를 체계적으로 제거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안전도 사라졌죠. 신자유주의 정치는 처음부터 자본의 흐름뿐 아니라 교육제도와 노동시장에서도 제동장치를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제동 효과가 있거나 유연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 그리고 자본이나 상품, 투자의 흐름을 방해하는 모두 제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P. 132)

 

 '슬로우'는 한번쯤 삶이 가진 바쁜 속도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느림'을 추구하는 책이 아니라 '속도'라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책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지는 속도의 강박은 삶의 충실에 대한 강박과 맞닿아 있었다. 즉 우리가 그렇게 분초를 다투며 바쁘게 시간을 메우는 것은 그것이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어'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속도의 집착이 삶을 보다 충실하게 만들어준다고 여겼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거기서 주로 성공한 엘리트들의 삶은 자주 회사의 복도를 부단히 이동하는 가운데 정신없이 말을 주고 받는 장면으로 묘사되곤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충실은 삶이 가진 시간의 아주 작은 단위조차 허투르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슬로우'는 그것이 일종의 강박이며 오해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느 만큼의 속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느 만큼의 속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는어느 만큼의 속도가 필요한가? 무엇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가?" 입니다.(p. 137)

 

 말하자면 '슬로우'는 바람직한 삶을 위해 당신으로 하여금 제대로 질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제대로 된 해답은 늘 제대로 된 질문이 있는 가운데 있어왔다는 건 불변의 진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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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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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책은 마치 내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내가 평소 궁금해왔던 그 문제에 대해 풀어놓을 때가 있다. 바로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란 책이 그렇다. 이 책은 기독교든 불교든 신앙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번쯤은 해 보았을 바로 그 의문으로 다시금 인도한다. 즉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그것을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 보여 주는 괴리를 보았을 때 가지게 되는 의문 말이다. 그러니까 종교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윤리적이고 자비로로워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오히려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볼 때면 스스로 도대체 종교라는 게 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 주커먼의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의문에 천착하는 책이다. 단적으로 그는 가장 종교적인 국가 미국과 가장 비종교적인 국가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보여주는 모순된 모습을 통해 이것을 풀어나간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가장 종교적인 국가인 미국이 가장 윤리적이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가장 비종교적인 국가 덴마크와 스웨덴이 가장 윤리적이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람에 대해서 보았던 그러한 괴리가 이제는 국가로 확장된 것 같은 모습인데 이에 대한  필 주커먼의 말을 다소 길지만 직접 인용해 본다.

 

 미국은 확실히 서구 민주주의국가 가운데 가장 종교적인 나라다. 그리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확실히 서구민주주의국가 가운데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다. 그렇다면 신앙심을 자랑스레 내보이는 미국에 총이 범람하고 형벌이 가혹하고 매주 사형선고가 이루어지고 약물 중독자들은 범죄자 취급을 받고 수많은 어린이와 임산부가 기본적인 건강보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수많은 노인들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사회복지사들은 저임금과 과로에 시달리고 정신병 환자들은 길거리에 방치돼 있고 선진국 중 빈곤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반면 비종교적이 덴마크와 스웨덴, 대부분의 미국인이 보면 거의 '하느님이 없다'고 까지 할 수 있는 이 두 나라에서는 어디서도 총이 보이지 않고 형벌 체계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인정과 자비가 넘쳐서 재활에 중점을 두고 있고 사형은 이미 오래전에 폐지되었고 약물 중독자는 의학적 치료나 심리적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져 보살핌을 받고 모든 사람이 훌륭한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노인들도 세계 최고의 보살핌을 받고 사회복지사들은 괜찮은 임금을 받으며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일을 맡고 정신병 환자들은 최상급 치료를 받고 빈곤율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나는 어떻게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건지 궁금했다.(p.64)

 

 

 

 '신 없는 사회'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속화가 진전된 국가가 더 윤리적이고 행복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이 의문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소 느끼는 의문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의문엔 또 한가지가 더 결부되어 있다. 이렇게  보여지는 현실 그대로 딱히 종교가 제대로 살게 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한다면 과연 우리에게 있어 종교가 가지는 의미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시대가 필 주커먼이 이 책의 서문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종교 과잉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종교로 넘쳐나는 시대이기 때문에 꼭 한번은 음미해 보아야 할 동시대적 물음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그 주요한 방법으로 필 주커먼은 면접법을 가져 온다. 대표적인 사회과학연구 방법중 하나이기도 한 면접법은 일종의 인터뷰 같은 것으로 연구 대상자와 직접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개인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라 할 수있는 '종교에 대한 가치관(이것은 또한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도 직접 연결되는 문제기 때문에)'을 다루는 것이기에 그와 같은 방법은 적절해 보인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종교사회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진면목을 보여준 바 있었던 막스 베버 역시도 종교사회학에 있어 이러한 개인적인 접근 방법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한 바 있다.

 

내가 사회학자가 된 주된 이유는... 아직까지도 우리 학문을 둘러싸고 있는 집합적 개념이란 유령을 추방하기 위해서였다. 사회학이란 학문 자체는 단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따로 따로 분리된 개인들의 행위에서부터만 연구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엄격히 '개인주의적' 연구방법을 채용해야만 한다.

 

- 막스 베버가 그의 친구 리이프만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이렇게 필 주커먼은 많은 수의 인터뷰를 통하여 세속화가 진전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종교가 없으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왜 그들이 지금처럼 신과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멀어진 상태에서의 삶은 또 어떠한지 바로 그 심층적인 모습을 인터뷰 대상자들의 생생한 경험까지 더해서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책은 개개인의 특수 사실에서 일반적인 대답을 끌어내는 일종의 귀납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셈이다. 그렇게하여 결국 필 주커먼은 덴마크와 스웨덴이 '세속주의 국가'가 된 이유를 찾아낸다. 이유가 모두 일곱개다.

 

 각각을 살펴보면, 그 하나는 게으른 독점이다. 즉 이미 오래전부터 루터교가 국교가 되어 있어 그 스스로 확장할 필요를 못 느껴 구태어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종교는 특히 사회에 대해 안전의 확신이 없는 가운데 번성하게 되는데 아시다시피 덴마크와 스웨덴을 세계 최고의 안정된 사회이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여성들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가 캘럼 브라운에 의하면 남성과 아이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게 만든 것은 순전히 여성들 덕분이라고 한다. 즉 전업 주부인 여성들이 주일마다 남편들과 아이들을 거의 반 강제적으로 종교 행위에 참여시키기 때문에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도왔는데 지금의 덴마크와 스웨덴은 여성들이 대부분 직업 여성들이라 그럴 여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성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문화적 방어욕구의 결여라 말한다. 그러니까 문화적, 종교적 독점이 위협을 받으면 바로 그 종교적 독점이 사람들의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여 저항의 중심 기관이 되어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한 필요를 불러일으켜 왔는데 덴마크와 스웨덴은 단일민족국가라서 굳이 종교를 통해 정체성을 강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의 발달이다. 덴마크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가장 먼저 시행한 나라이기도 하다. 시작이 무려 1814년이다. 그만큼 교육 수준이 높다. 통계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종교성이 약해진다고 한다. 또 하나는 그들의 대표적인 정책이기도 한 사회민주주의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는 동안 공립교육에서 특정 종교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 접할 기회를 많이 상실하는 바람에 종교성이 약화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원래 종교가 유포되었던 역사적 경험 또한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모두 부족장과 왕들이 자신들의 정략적인 이유로 종교를 유포시켰다. 즉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위로 부터 강제적으로 종교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애초 부터 존재한 이런 경험 때문에 종교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가질 수 없어 지금의 종교성 약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상의 일곱가지 이유는 그러나 단순히 덴마크와 스웨덴의 종교성 약화를 나타내는 이유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 이유들은 더 나아가 가장 종교적인 국가라는 미국이 왜 그렇게 강한 종교성을 나타낼 수 밖에 없었는지 바로 그 이유를 드러내기도 한다. 즉 미국이 그렇게 가장 종교적인 국가가 된 데에는 우선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 종교가 어떻게 유포되었는지에 대한 차이를 말한다. 즉 덴마크와 스웨덴이 위로 부터 '상명하달' 식으로 유포되었던 것과 달리 미국은 처음부터 청교도 신자들이 이주해와서 건국하게 된 것이므로 민중들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확립했다. 바로 그 위로 부터냐 아니면 아래에서 부터냐 때문에 종교성마저 차이를 가져왔다고 한다. 거기다 지금 미국이 처한 사회적 원인들 역시도 한 몫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이자 그렇게 인종적으로 계급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성원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단일 성원, 단일 국가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종교에 대한 욕구가 커질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종교가 무엇보다 정체성 확보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성원들이 뒤섞여 살 수 밖에 없는 미국의 환경이 정체성 확보의 욕구를 낳았고 그 욕구를 종교를 통해서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구조적 요인도 있다. 일단 미국은 정교 분리의 국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덴마크와 스웨덴 처럼 '게으른 독점'이 성립할 수 없다. 할 수 없이 교회는 자유경쟁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대중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발할 수 있는 온갖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후반의 모르텐의 고백에 따르면 이것이야 말로 사람들이 미국 교회를 다니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는 또한 한국 교회가 번성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다 미국 사회가 아주 불안하기 때문이다. 안전의 욕구가 바로 종교의 욕구로 나타난다는 건 앞서도 언급했다.

 

 그런데 이렇게 미국과 덴마크와 스웨덴에 상이한 종교성의 차이를 가져와 버린 그 이유들을 살피다 보면 종교가 지금 사회에서 무슨 의미마저 알 수 있게 된다. 아마도 필 주커먼은 그래서 이러한 공통된 원인들을 중심으로 비교 접근법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종교성의 차이가 바로 역사나 사회 환경 같은 것들에서 유래된 것임을 밝혀 종교가 자발적 생성이 아니요 외부적 요건들로 인해 형성되는 것이며 그래서 종교가 바로 문화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 말이다. 즉 필 주커먼은 미국과 덴마크, 스웨덴의 비교를 통해 바로 이러한 종교가 가지는 문화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교가 반드시 신자들을 위한 깊은 신학적 확신으로 가득한 것이 될 필요는 없다. 신자들이 반드시 독실하고 경건하게 종교를 믿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최후에 문화적 정체성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있는 종교가 전통적인 종교다.

 - 한스 라운 이베르센 - (p.252)

 

 

 종교가 일종의 문화적 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종교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내내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체성 확인의 통로로 문화로서의 종교가 기능하는 것이다. 즉 종교는 굳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더구나 자신의 정체성만 내내 확보해 줄 수 있으면 오로지 종교 활동만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필 주커먼은 '문화적 종교'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적 종교'란,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적 전통에 일체감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 안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확연히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현상이다. (p. 261)

 

 

  그런데 이는 어떤 의미로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그렇게 종교에 있어 가장 알맹이는 빠지고 오로지 껍데기인 행위만이 남아 그것이 전부가 된 현상을 말할 수도 있다. 즉 신앙이 아니라 형식이 전부가 되어버린 종교이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단지 종교 행사만 있어도 자신의 뿌리를 그렇게 정체성을 내내 확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하고 같은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섞이어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종교 행위만으로도 충분해서 그런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 확인을 통한 소속감과 안정감이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꼭 종교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이것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는 그 두가지가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것 하나가 무색해지는 바람에 결국 남게 된 한가지를 의미하는 것일까? 필 주커면은 이성의 발달과 합리화의 진전이 결국은 초월자의 믿음을 희석시키고 그렇게 남게되어 버린 기능으로 여기는데 그래서 합리화가 가장 진전되었고 또한 미국처럼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아도 되는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는 종교가 그 힘을 잃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면 미국이나 한국이 보여주는, 모르텐의 말처럼 '광신'에 가까운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가 남는다. 그러니까 미국이나 우리나라가 합리화가 많이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문화적 종교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사실은 종교 자체가 문화적 종교이고 그래서 미국과 우리 나라 역시 이 경향에 깊숙히 함몰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필 주커먼은 물론 전자 쪽이다. 왜냐하면 결론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문화적 종교가 가장 강렬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아마도 유대인과 덴마크인, 스웨덴인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p.276)

 

 내가 문화적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필 주커먼의 이와 같은 말은 좀 수정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쪽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종교란 그같은 정체성 확보를 위한 문화적 수단 밖에는 없었으며 덴마크와 스웨덴은 문화적 종교가 가장 강렬하게 나타난 곳이 아니라 사실은 종교 자체의 의미가 희석화되어 버린 곳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종교의 사르갓소 같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필 주커먼이 말하는 문화적 종교의 핵심은 신앙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신앙(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 종교'는 오로지 행위만이 내재된 신앙을 가늠하는 것에 대한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미국 같은 경우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공직자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요식행위의 집착이 바로 문화적 종교를 더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경우 이러한 문화적 종교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를테면 내가 아는 어떤 장로는 조의금 때문에 교회 장례식으로 하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를 억지로 자기가 있는 교회로 옮겨오게 한 분도 계시다. 물론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선진국 선교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은 어떨까?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직접 겪은 바로 얼마전의 일이다. 다니는 교회에서 프랑스로 선교 활동을 가야할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기독교를 믿어왔고 사회적 성숙도도 우리보다 앞서는 나라에 왜 굳이 선교를 가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반대를 천명했다. 하지만 곧 찬성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반박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선교를 가야하는 주된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기도 했다. 즉 프랑스 교회에 출석하는 신도수가 급감하고 있으며 교회의 수 또한 날로 감소 추세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프랑스의 신앙이 죽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그렇기에 우리의 선교로 식어버린 이들의 믿음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도 드러나듯이 한국 교회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교회 출석, 주일 성수, 헌금, 기도와 같은 요식 행위에 집착한다. 아마도 기복 신앙의 '치성'의 개념과 관련되어 더 강조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바로 그렇게 보이는 행위를 통해 신앙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주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프랑스든 독일이든 무모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선교를 감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보이는 행위에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책에서 모르텐은 미국은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회라고도 꼬집었는데 과연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베버는 아주 좋은 대답을 해주고 있다. 베버는 바로 여기에서 종교에 대한 갈망이 비롯된다고 했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만으로 좀처럼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 이상으로 그는 그가 자신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는 그가 자신의 행운을 마땅히 누릴 만한 자격이 있음을 - 특히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보다 운이 덜 좋은 사람들도 단지 그들이 응당 치뤄야 될 대가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라는 믿음이 인정되기를 원한다.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종교의 역할이 정체성을 확보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바로 이러한 정체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즉 자기는 남보다 낫다는 확인을 신앙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교회가 자꾸만 대형화되고 화려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정작 실생활에서 종교적 명령을 실천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기독교적 요식 행위는 오로지 기독교 공동체내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필 주커만이 말한 '문화적 종교'의 진짜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요식 행위의 집착은 분명 문화적 종교의 현상 중 하나이며 그 가장 부작용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걸 마르틴 부버의 말로 표현해 보자면, 철학자이자 신학자로도 유명한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를 만나고 '너'를 '너'로 받아들이는 길 이외에 '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리고 유한한 '너' 속의 무한한 '너'의 만남과 수용 없이는 '너'를 만나며 받아들일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관계는 계속적으로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변형되는 존재의 비극적 운명 아래 놓이게 된다.

 

  문화적 종교란 종교가 바로 부버가 말했던 이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부버가 말하길 '나와 그것'와 관계가 되면 더 이상 '그것'은 존재론적 관심을 잃고 단순히 인식적 관심 그리고 행위적 관심 밖에는 얻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렇게 '그것'은 다만 대상일 뿐이며 그것도 하느님으로 인해 확장되는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그냥 획일적인 '나'로 항구적으로 있게 하는 도구적 의미 밖에는 남지 않는다. 현재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나와 그것'의 관계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아간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화적 종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 종교는 어떻게 보면 종교의 가장 진실한 모습일지 모르며 덴마크나 스웨덴 처럼 긍정적인 결과도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과 같이 사회 안전망이 부실하거나 계층간 격차가 자꾸 심해지는 나라들에서 문화적 종교는 훨씬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문제다. 문화적 종교는 정체성 확보를 위해 주로 이루어지는데 이런 나라들에서 정체성 확보는 나의 뿌리가 아니라 나의 우월함(미국 보다는 단일성의 정도가 강한 우리나라에 국한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드러내는데 더 맞춰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 필 주커먼의 책은 우리(특히 신앙인)에게 또 한 가지의 의미를 더 가지게 된다. 즉 과연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종교를 믿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책이 신앙과 관계된 주제에 대해 내밀한 자기 고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고민들은 언젠가의 내가 했던 고민이거나 누군가로 부터 상담 받던 고민들이기도 하다. 즉 누구나 한번쯤을 떠올려 보았던 그런 고민이나 생각들인 것이다. 그 친숙함 때문에 그들의 고백을 듣는 한 편 그 말에다 바로 나의 모습을 비쳐보게 된다. 즉 나는 어떻게 생각해 왔던가 혹은 나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려 하는가를 비춰보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리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 표트르와는 달리 신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윤리적이 될 수 있고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여겨도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으며 삶의 궁극적 의미따위 신경쓰지도 걱정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타인에 대해 관대할 수 있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그런 고백들을 보면서 더우기 신을 믿는다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들이 이정도로 허무와 무상함을 인정하는 가운데에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외부에 전혀 기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외부의 어떤 인정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신을 요청하는 궁극적 이유도 사실은 신 앞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신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때문인 것 같다. 즉 그 인정을 통해서 나를 더욱 더 높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해서 정말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또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종교마저도 내 우월을 위한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기에 특히나 더욱 행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오히려 그 때문에 정작 삶을 희생하는 결과를 낳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 생각에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에서 그 '신'은 그저 '신'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더 나아가서는 내 우월을 인정받으려는 모든 수단화된 타자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마르틴 부버의 말대로 '너'가 아닌 '그것'이 되어버린 타자들 말이다. 그러므로 '신 없는 사회'란 제목에 포함된 뜻은 그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을 끊는 것 부터가 먼저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스칸디나비아의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즉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주어진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언어와 틀에 박힌 행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를 통해 믿음을 드러내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문득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이런 얘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말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어냐고 예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예수가 하나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자 그래도 굳이 하나만 지킨다면 무엇을 지켜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이웃사랑이라고 말했다. 그 이웃사랑이 바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예수마저도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포용하고 사랑하는 행위가 곧 신을 믿는 신앙 자체라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신'이란 단일한 가면 아래에는 내가 포용하고 사랑해야 할 무한의 타자들이 있는 것이다. '신 없는 사회'란 아마도 '신'이라는 그 단일한 가면을 벗어버린 사회를 말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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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김영명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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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전체적인 감상부터 말하자면 속이 시원했다. 나는 기독교를 믿고 이 책의 지은이 김영명은 불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평신도로서 그동안 내가 기독교(정확히는 한국 기독교 교회라고 해야겠다)에서 가지고 있었던 불만이나 교리와 설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호기심을 모조리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가 다른데도 이러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을 보면 초심자 혹은 평신도가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느끼는 불만이나 부족한 부분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제목 부터가 도전적인 이 책의 부제는 더더욱 도전적으로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이다. 부제만 놓고 보자면 지은이가 불교에 상당히 조예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기 쉽겠지만 천만에 그는 스스로도 밝히지만 이제 겨우 불교에 입문한 초심자에 불과하다. 이처럼 종교 경험이 일천한데도 감히 한국 불교의 문제에 대해서 들고 나온 것은 그저 상식적인 견지에서 아무리 따지고 보아도 한국 불교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또 정말은 무엇을 중생들에게 주고자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너무나 고담준론이라 수양이 깊지 못한 미천한 존재들이라 그런지 그저 뜬구름 잡기 식의 허황된 담론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은이 김영명은 그걸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도 서울대학교를 나오고 뉴욕주립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까지 받은 소위 먹물을 먹을만큼 먹은 인사(人士)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불교의 이론이 심오하다해도 그래도 이정도 가방끈이면 수박 껍질에 그려진 줄들의 개수 정도는 헤아릴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개수마저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말들은 한문 투성이고 논리는 비약과 과장으로 범벅이 되어 있으며 강해하는 자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이론으로 가득하니 절망하기도 전에 분노부터 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불교의 내공은 깊지 못하나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라고 벽력뇌성으로 일갈하며 오직 그의 무기라곤 그동안 닦은 학자적 수련과 상식 밖에는 없지만 '불교'라는 비약과 허장성세 그리고 고담준론들의 춘추전국과도 같은 강호로 나선 것이다. 그렇게 그는 초심자들의 의문과 답답함을 제대로 풀어주겠다는 일념으로 전체 11장에 걸쳐 불교라는 난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거기에는 어려운 한문만 고집하며 불교의 가장 기본적 개념 조차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하는 한국 불교계 뿐만아니라 흔히들 소승불교는 개인 수양 대승불교는 세상에 대한 자비 실천을 주 이념으로 하나 제대로 둘 다 살펴보니 정작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그리 다르지 않는데 굳이 그러는 것은 그냥 자신들을 구분지으려고 억지로 그러한 것들을 갖다 붙인 것은 아닌가 하며 대승불교를 논박하고 거기다 아예 석가모니에게까지 나아가 그가 정말 사람들이 말한는 겸손과 자비의 인물인가를 논하며 아울러 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고해와 그것을 벗어나는 경지인 해탈과 열반이 사실 제대로 된 개념인지마저 검증한다.

 

  이렇게 그의 칼날은 거침이 없고 위 아래를 따로 두지 않는다. 마치 제대로 살풀이를 하려는 듯 이참에 그는 평신도로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의문점들을 다 해소하려 덤벼든다. 윗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불교라는 것이 도대체 뭣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으니 스스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한 번 단단히 마음먹고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제천대성 손오공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부처님 손가락에다 자신이 세상의 끝까지 도달했노라 남기듯 그가 찾은 불교의 핵심을 책 마지막에 새겨 둔다. 그가 이해한 불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불교의 핵심은 수행을 통한 나와 남의 괴로움 제거이다.(P.274)

 

 대단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초심자이자 평신도인 그가 오래도록 고군분투 끝에 도달했어야 할 만큼 한국 불교는 이 단순한 진리를 어렵게 말하고 배배 꼬이고 또한 잔뜩 부풀려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선 이해를 못하면 친절히 가르쳐 주기는 커녕 믿음이 부족하다는 둥 수양이 덜 되었다는 둥 오히려 못하는 자를 타박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강조한다.

 

  그들이 아무리 많이 알고 수양이 높더라도 무턱대고 그들의 말에 기대지 말 것을. 아무리 믿음이 강조되는 종교라 하더라도 그 모든 이론과 교리에 관해 자신의 이성을 가지고 맞는지 아닌지 제대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한 마디로 그들의 권위에 쫄지마라는 것이다. 종교의 이론이나 교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모든 건 다 똑같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니 스스로 찾고 구하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실증하기 위해 지은이 김영명은 이 책을 통해 몸소 시전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그것은 나 역시 기독교 생활을 해 오면서 생각했던 것이었고 그래서 이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지은이에게 적잖이 감명을 받았다. 애초에 내가 불교에 대한 책을 읽기로 한 것은 현재 한국 기독교가 정말로 문제가 많아서였다. 바로 그것을 불교나 여타 다른 종교들을 배워 봄으로써 그 상대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란 한 마디로 딱 장사아치에 불과하다.(물론 여전히 소명을 가지고 일하시는 목사님들이 많다. 하지만 그분들의 노고보다 더 많이 드러나는 건 돈 밖에는 중심에 두지 않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다.) 이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성경이 정말 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성경의 진의를 왜곡하여 설교한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 그리고 기복신앙에만 빠져 무분별하게 목사들의 말을 맹종했던 신도들의 책임 또한 크다. 다행히 지금은 헌금이나 십일조에 대해서 비성경적임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고 그렇게 스스로 자정하려는 노력들을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기독교가 진정으로 기독교다워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험란한 고비들이 많다. 이 고비들을 제대로 넘기 위해서라도 이제 평신도가 깨어나야 할 때라고 많은 분들이 목소리를 모아 말한다. 더 이상 예전처럼 목사의 말이라고 무분별하게 수용하지 말고 늘 깨어서 스스로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또한 그대로 이 책의 주제와 상통하는 바이기도 하다.

 

 즉 불교나 기독교나, 그 종교가 제대로 자기답기 위해서는 일반 신도가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설교나 강론에 있어 그저 듣기만 하는 객체가 아니라 스스로 참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진리를 앎이 귄위있는 소수에게만 허락되었을 때는 항상 부패와 타락이 뒤따랐다. 혹세무민은 늘 남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그렇게 스스로는 생각할 줄 모르는 다수가 있을 때 일어났다. 말들은 언제나 참여하는 자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보다 더 정확해지고 제대로 된 의미를 찾게 되는 법이다. 바로 집단 지성이 그 오염된 말을 정화시키기 때문이다. 흔히들 종교는 믿음이라며 그래서 따지기 보다는 그냥 믿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헛소리다. 교부철학의 아우구스티누스나 스콜라 철학의 토마서 아퀴나스, 종교개혁을 가져온 루터나 지금의 개신교를 낳게 한 칼뱅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어디 그저 믿기만 햇던가 제대로 따지고 들었기 때문에 바로 오늘의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보다 많은 이들이 권위에 주눅들지 말고 자신 역시도 당당히 하나의 대등한 참여자라는 생각으로 핵심, 이론 그리고 교리에 대해 사유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불교와 기독교 아니 모든 종교를 본래의 모습 그대로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 믿음이 무슨 마법의 지팡이라도 되는 양 얼버무리지 말고 아무리 알 수 없는 것이나 모호한 것이라 해도 끝까지 따지고 의미와 이유를 추구하고 사유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 갓 입문한 초심자인 김영명이 이 책에서 제대로 보여준 것 처럼 말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이 말은 단순히 믿음, 기도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바로 종교의 모든 것을 그대로 믿지말고 스스로 사유할 것을 요청하는 말이기도 했다. 즉 진리는 그저 다가오지 않는다. 스스로 나서서 찾고 두드리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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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의 심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6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마디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상처였다.

 

  오로지 군산복합체의 돈벌이만을 위해서 벌어졌던 그 전쟁은 그 전까지 급속도로 끓어오르던 미국 내의 모든 이상을 향한 움직임에 동결을 가져왔다. 젊은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장으로 끌려가야 했고 살아남은 자들 역시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돌아와야 했다. 60년대의 다채롭게 빛나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의해 롤링스톤즈의 노래 제목 그대로 'PAINT IT BLACK'이 되고 마이클 코넬리가 '라인업'에서 술회했듯이 해리 보슈를 낳아버린 터널 속 어둠이 되어 버렸다. 보슈는 베트남 전쟁에서 '땅굴쥐'가 됨으로써 어머니의 상실과 더불어 속해버렸던 세상의 어둠 속 그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때로 절망은 그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야 희망의 발판을 마련한다고 하던가. 그 말 그대로 그는 더 이상 그 어떤 외부도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음을 거기서 깨닫고 이제 스스로가 직접 구원을 찾아 나서려 한다. 어둠만이 존재하는 터널 속에 스스로 빛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형사가 되고 자신에게 어둠을 가져다 준 그리고 바로 그 어둠이 뱉어 낸 죽음들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같은 글에서 코넬리는 살인 사건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쨌든 살인사건 현장이란 세상이 뒤집힌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살인 사건 조사란 결국 혼돈과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조사가 아니겠는가? 라고 (라인업, P.75)

 

 그렇게 그는 관찰자요 순례자다. 광막한 어둠 가운데 빛을 가져와 스스로 경계가 되려는 자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미키 할러.

 그는 변호사다. 보슈가 진실을 찾는 자라면 그는 진실을 만들어내는 자다. 그는 그 어떤 진실이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공할 수 있다. 사실 그는 진실이란 것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이란 것 자체가 온통 거짓말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경찰도 거짓말을 하고, 변호사도 거짓말을 하고, 증인도 거짓말을 하고, 피해자도 거짓말을 한다. 재판은 거짓말 경연장이다.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판사도 알고, 심지어 배심원도 안다. (P.11)

 

 

 그래서 그에겐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다. 그래서 돈에 매달린다. 보슈를 어둠으로 몰고 간 돈이 그에겐 진실인 것이다. 계좌에 찍히는 현금의 액수만이 그가 가진 '정의'라는 법전의 전부다. 그렇게 그는 이 소설 1부의 제목 그대로 '밧줄에 묶인 얼간이'로 살았다. 왜 '얼간이'냐고? 결국 그 '돈'에 의해 총을 맞았으니까. 그렇게 그는 그 자신이 믿었던 진실에 의해 보기 좋게 배신을 당했버렸거든.

 

 

  '탄환의 심판'은 '제리'라는 한 변호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 제리는 1부에서 할러가 돈을 위해서라면 진실이고 뭐고 물 불 안 가리던 관선변호사였던 시절 법정에서 겨룬 검사였다. 그는 할러에게 패했고 결국 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런 그를 돈 좀 만지는 변호사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 바로 할러였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할러는 흡혈귀였다. 정의를 수호하던 검사를 돈만 수호하는 자신의 동류로 만들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제리의 시작은 할러의 시작과 같았다. 그 역시 돈만 수호하던 변호사였던 아버지에 의해 그런 변호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할러와 제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할러의 관계의 복제이고 결국 제리는 할러인 것이다. 그렇게 둘은 도플갱어다. 제리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수임된 안건을 할러가 유산처럼 물려받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러므로 제리가 왜 살해당했느냐가 주가 되는 '탄환의 심판'에서 할러가 제리의 죽음을 밝히는 과정은 그대로 전작에서 자신이 (상징적으로)죽어야 했던 그 이유를 밝히는 과정과도 같다. 단적으로 부활한 할러가 자신의 죽음을 다시 조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영화 '킬빌'에서 했던 것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예수의 부활편' 같은 것이다.

 

  보슈는 진실을 찾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매개로 순례를 하지만 할러는 자신의 죽음을 반복한다.

 

  정확히 이것은 보슈의 원래 모델 15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히에로니머스 보슈가 그렸던 그리고 코넬리에게 영감을 주어 그 자신의 탐정이 바로 그 이름을 가지게 만들었던 그림 '쾌락의 3부작'의 구도와 같다.

 

  보슈가 가장 오른쪽의 지옥도에 속한다면 할러는 그 가운데, 두번째 화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보슈와 할러가 각각 하나는 진실을 찾는 자요 다른 하나는 진실을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다. 보슈가 진실을 찾는 자가 된 것은 그 어둠으로 떨어지는 데 있어서 그 스스로에게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당한 자다. 어머니가 살해 당함과 동시에 내던져졌으니까.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아니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저 바깥에, 어딘가에 있다. 그래서 진실을 찾는 자가 된다. 미노타우르스를 찾아 미궁을 헤메는 테세우스와도 같이. 하데스에게 끌려간 에우리디케를 찾아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와도 같이. 그렇게 진실을 찾는 자는 코넬리 스스로가 말했듯이 관찰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단적으로 객체와 주체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지옥이란 보슈에게 바로 그 객체이며 그래서 보슈의 우주는 바로 지옥이 된다. 하지만 할러는 그와 다르다. 할러의 비극은 오로지 할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세계가 그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습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인 오로지 주체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관찰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그저 끊임없이 그가 하고 있는 생각이 혹은 일이 옳은지 그른지 되새기는 것 뿐이다. 그에겐 반복만이 전부다. 중세의 지배적 가치관에 따르면 이 세상은 천국, 연옥, 지옥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아마도 쾌락의 정원 3부작 역시도 어쩌면 이 구도에 그대로 들어맞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할러는 연옥에 속한 자가 될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질만한 죄를 짓시 않은 자는 연옥(림보)에 갇힌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내내 자신이 저질렀던 결국 천국으로 가지 못하게 만든 죄를 영겁에 걸쳐 반복하면서 상처받고 뉘우치게 된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 소설 '탄환의 심판'은 정확히 할러가 거기에 속해 있는 자임을 보여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탄환의 심판'은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의 할러의 여정과 참으로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게 이제 보슈와 할러는 같은 라인에 선다.

 

 사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 할러가 즐겨들었던 '2-PAC'의 'TO LIVE AND DIE IN LA'의 가사처럼 로스엔젤레스와 베트남 전장은 그리 다르지 않다. 로스엔젤레스의 삶 역시도 이 소설 미키 할러의 첫 독백에서 드러나듯이 베트남 전장만큼이나 혼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돈을 위해 일으켰던 전쟁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 했던 어린 병사들만큼이나 LA 역시 돈 때문에 죽어나가는 이들이 지천으로 널린 곳이다. 제리와 할러 역시도 그 희생자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머리를 관통하는 총알에 대한 공포는 그대로 LA에서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이러한 LA 의미는 할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나타난다.(수트케이스 시티는 2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로고 때문에 가방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수트케이스 시티는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자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는 타지인들끼리 모여 살면서 아무도 진정한 의미의 닻을 내리지 않는 곳이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 꿈에 이끌린 사람들, 악몽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오는 곳. 1천2백만 명의 시민들은 모두 필요하다면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유적으로도 문자 그대로도 LA의 모든 사람들은 항상 여행 가방을 꾸려놓은 상태였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P.83)

 

 

  이러한 LA에 대한 시선은 그대로 베트남에 대한 시선과 닮아 보이지 않는가? LA와 베트남의 유사성은 비단 공간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만일 둘이 비슷하다면 베트남을 초래한 미국이나 현재의 LA를 초래한 미국이나 같다는 것이며 그건 보슈에게 어둠을 안겼을 때의 미국이나 할러에게 상징적 죽음을 가져다 준 지금의 미국이나 똑같다는 그렇게 시간적으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보슈는 여전히 그 땅을, 그리고 그 때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베트남의 '땅굴 쥐'라는 지하에서 LA의 형사라는 지상으로의 삶의 전이는 문자 그대로 무덤에서 다시 걸어 나온 자를 형상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대로 다시 되살아난 할러가 '수트케이스 시티'로 재정의되는 LA로 다시 돌아오는 것과 또 닮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코넬리의 의도는 여기서 명백해진다. 즉 그는 보슈에게 두번째의 기회를 주었듯이 할러에게도 역시 그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보슈와 할러는 서로 만나야했을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장면이 바로 보슈가 할러에게 자기가 듣고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장면이다. 보슈는 자기가 듣고 있는 뮤지션이 프랭크 모건이라고 말해준다. '라인업'에 실린 글에 의하면 프랭크 모건은 보슈의 캐릭터를 형성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영감을 준 음악가였다. 코넬리는 말한다.

 

 "내 탐정은 프랭크 모건 처럼 생존자로서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과거를 극복하는 남자여야 했다.(라인업, P.69)"

 

  말하자면 프랭크 모건은 보슈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코넬리 자신도 작품을 쓸 때는 꼭 프랭크 모건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프랭크 모건은 코넬리가 작품 전체에 걸쳐 구현해내려는 우주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독자들이 가장 반대할만한 캐릭터를 창조하기 원했던 코넬리가 그 이유로 만들어낸 할러는 바로 거기에서 코넬리의 우주로 초대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와도 같다. 그런데 할러 역시도 그 뮤지선을 알고 있다고 한다. 어릴때 모건이 아버지의 의뢰인 중 하나였다고. 아마도 그 유년 기억의 소환은 코넬리가 초대한 것에 대한 기꺼운 응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슈와 할러는 동반자가 된다. 이는 다른 면에서도 확인되는데 할러가 소원했던 딸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슈 역시도 2009에 나온 '9 DRAGONS'에선 태어난 지 몰랐던 딸을 찾게 된다고 한다. 둘이 결국은 동반자라는 사실에 이 보다 더 결정적인 증거가 또 있을까?)

 

  지금껏 같은 산에 살면서도 서로의 반대편에 있었지만 이제는 같은 정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슈는 순례를 통해 할러는 반추를 통해 둘 모두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거짓말에 더 이상 오염될 수 없는 밝고도 분명한 진실, 즉 말하자면 쾌락의 정원 3부작중 가장 왼 편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가고자하기 때문에 말이다. 어둠이 없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곳. 말 그대로  'THE BRASS VERDICT'의 세상으로. (BRASS는 소설에서 보슈의 말처럼 총알이란 뜻도 있지만 '녹슬지 않는 황동'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거기서 보슈는 '엔젤스 플라이트'에서 성냥갑에 적혀 있던 '내면의 안식'을 얻게 될 것이고 할러는 5부의 제목 처럼 'THE BRASS VERDICT'의 근본적 의미인 '마지막 평결'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뒤로 베란다에 남아 도시를 바라보았다. 불빛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움직였다. 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걸러져서 저 위의 구름처럼 하늘로 날아갔다. 아름답지만 아주 멀어서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구름. 다시는 보슈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내가 산의 양편을 하나씩 차지하고 그냥 이대로 살아갈 것만 같은 느낌.(P. 550)

 

 

 아마도 우리가 코넬리의 작품에 열광하는 건 그것이 그저 읽는 재미만을 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적 구성의 완벽함, 놀라운 반전 등이 물론 한 몫을 하긴 하겠지만 보슈와 할러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삶이 결국은 우리들 자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라는 공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보슈는 여전히 내면의 안식을 가져다 줄 진실을 찾아 헤메이고 할러는 마지막의 저 독백 처럼 결코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구름(아마도 이것은 삶에 있어 종국적인 의미라는 'THE BRASS VERDICT' 가진 또 하나의 의미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을 쫓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도 내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보슈와 할러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 어떤 거대한 세력이 앞을 막아도 배에 총알을 빵빵 맞아도 그들의 시도는, 추적은 포기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래서 아마도 응원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들처럼 세상의 거대한 벽을 느낄 때마다 안정이란 유혹속에 쉽게 자신의 신념을 포기할 때 우리는 종종 원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왜소함과 자괴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누군가 자신만의 신념으로 세상과 대적하는 살아있는 모범이 되어 달라고... 아마도 우리는 보슈에게서 그것을 보았고(아마도 이제는 할러에게서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응원하게 되었을 것이고 또 계속 그들의 따라 걷게 되었을 것이다. 보슈가(그리고 이제 할러도) 우리들이 치뤄야 할 싸움을 대신해서 혹은 미리 치뤄주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물론 코넬리는 그들이 그러한 사람들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아마도 그래서 이들은 그 어느 캐릭터 보다 생생하게 빚어졌을 것이다. 읽다보면 분명히 느껴진다. 코넬리가 자신의 캐릭터를 얼마나 공들여 형상화 시키고 있는지. 그의 말투, 몸짓, 등장하는 장면 하나 하나마다 말이다. 할러가 헐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의뢰인 엘리엇에게 이제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엘리엇의 개인 사무실이 아니라 중립적인 회의실에서 만날 것을 강요하는 건 얼마나 디테일한 묘사인가? 코넬리는 이 모든 인물들이 그저 텍스트 상의 가상이 아니라 실제 우리들의 곁에서 호흡하고 행동하는 살아있는 인물들로 여겨지길 원한다. 왜? 여기에 하나의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변하지 않는, 바래지 않는 종국적인 진실인 'THE BRASS VERDICT'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그건 소설에서 할러에게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바로 자신의 새로운 운전기사가 된 패트릭 헨슨과의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할러는 그 자신의 믿음과 본성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어려움에 빠진 패트릭을 돕는다. 패트릭이 그 까닭을 묻자 할러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잘 몰라, 패트릭. 하지만 내가 자네를 돕는 게 나 자신을 돕는 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

 

  그 전에 할러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난 48시간 동안 새로 맡게 된 사건들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유혹을 느끼는 것이, 역이 내게 줄 수 있는 포근한 세계로 가고 싶은 욕망이 느껴졌다. 약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과 벽돌담 같은 현실 사이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공간을 점점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심이었다. 어쩌면 패트릭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P. 287)

 

  코넬리가 말한대로 자신의 캐릭터가 프랭크 모건 처럼 과거와 싸우는 인물이기를 원한다면 할러가 두려워하는 약은 돈 밖에 몰랐던, 그래서 죽음을 초래한 예전의 자신이 될 것이다. 그는 세상과 섞일 때 마다 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그 과거란 전부인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나듯이 딸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미지 역시 코넬리는 고정된 공간으로 표현한다. 마치 이대로 정지하면 죽는다는 듯이. 그래서 그는 죽지 않기 위해,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오로지 자신에게 이익일 돌아올 경우에만 희생을 지불하던 자신을 버리듯이 아무 까닭없이 곤경에 빠진 패트릭을 돕는 것이다. 거기다 그를 정처없이 내내 떠돌아다니게 할 링컨차의 운전기사로까지 고용한다.(이건 내내 탐문을 위해 떠돌아다녀야 할 보슈의 또 얼마나 비슷한가?) 그런 패트릭이 운전기사를 맡는 건 또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인가? 그렇게 패트릭은 내내 할러를 움직여갈 것이다. 그렇게 할러를 살려나갈 것이다. 이 모든 코넬리의 정교한 세팅 속에서 드러나는 목소리는 단 하나다. 내면의 안식을 가져다 줄 변하지 않을 진실을 찾고 싶은가? 그렇다면 머리로만 꿈꾸지 말고 적어도 행동을 하라! 그 것이다. 보슈 처럼 결국은 타인을 살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할러 처럼 자그마한 것이라도 타인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바로 그 행위가 그게 언제가 되었든 결국엔 원하는 그것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보슈와 할러의 기꺼운 동지가 되기로 작정했다면 아마도 이런 식의 진심에 감응한 결과라고... 그래서 우리는 응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 주기를... 마치 보슈와 할러가 희망이란 신기루에 몇 번이나 속아가면서 정처없이 헤메고 있는 사막 위를 우리를 대신 업고 가기라도 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게오르크 루카치란 한 철학자는 무엇보다도 큰 이 세상의 비극은 우리를 인도해 줄 그 어떤 별자리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루카치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보슈와 할러를 가리켜 보이며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당신의 돈을 걸어라, 몽땅! 그들은 영원히 지지 않는 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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