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환의 심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6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마디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상처였다.

 

  오로지 군산복합체의 돈벌이만을 위해서 벌어졌던 그 전쟁은 그 전까지 급속도로 끓어오르던 미국 내의 모든 이상을 향한 움직임에 동결을 가져왔다. 젊은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장으로 끌려가야 했고 살아남은 자들 역시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돌아와야 했다. 60년대의 다채롭게 빛나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의해 롤링스톤즈의 노래 제목 그대로 'PAINT IT BLACK'이 되고 마이클 코넬리가 '라인업'에서 술회했듯이 해리 보슈를 낳아버린 터널 속 어둠이 되어 버렸다. 보슈는 베트남 전쟁에서 '땅굴쥐'가 됨으로써 어머니의 상실과 더불어 속해버렸던 세상의 어둠 속 그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때로 절망은 그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야 희망의 발판을 마련한다고 하던가. 그 말 그대로 그는 더 이상 그 어떤 외부도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음을 거기서 깨닫고 이제 스스로가 직접 구원을 찾아 나서려 한다. 어둠만이 존재하는 터널 속에 스스로 빛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형사가 되고 자신에게 어둠을 가져다 준 그리고 바로 그 어둠이 뱉어 낸 죽음들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같은 글에서 코넬리는 살인 사건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쨌든 살인사건 현장이란 세상이 뒤집힌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살인 사건 조사란 결국 혼돈과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조사가 아니겠는가? 라고 (라인업, P.75)

 

 그렇게 그는 관찰자요 순례자다. 광막한 어둠 가운데 빛을 가져와 스스로 경계가 되려는 자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미키 할러.

 그는 변호사다. 보슈가 진실을 찾는 자라면 그는 진실을 만들어내는 자다. 그는 그 어떤 진실이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공할 수 있다. 사실 그는 진실이란 것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이란 것 자체가 온통 거짓말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경찰도 거짓말을 하고, 변호사도 거짓말을 하고, 증인도 거짓말을 하고, 피해자도 거짓말을 한다. 재판은 거짓말 경연장이다.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판사도 알고, 심지어 배심원도 안다. (P.11)

 

 

 그래서 그에겐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다. 그래서 돈에 매달린다. 보슈를 어둠으로 몰고 간 돈이 그에겐 진실인 것이다. 계좌에 찍히는 현금의 액수만이 그가 가진 '정의'라는 법전의 전부다. 그렇게 그는 이 소설 1부의 제목 그대로 '밧줄에 묶인 얼간이'로 살았다. 왜 '얼간이'냐고? 결국 그 '돈'에 의해 총을 맞았으니까. 그렇게 그는 그 자신이 믿었던 진실에 의해 보기 좋게 배신을 당했버렸거든.

 

 

  '탄환의 심판'은 '제리'라는 한 변호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 제리는 1부에서 할러가 돈을 위해서라면 진실이고 뭐고 물 불 안 가리던 관선변호사였던 시절 법정에서 겨룬 검사였다. 그는 할러에게 패했고 결국 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런 그를 돈 좀 만지는 변호사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 바로 할러였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할러는 흡혈귀였다. 정의를 수호하던 검사를 돈만 수호하는 자신의 동류로 만들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제리의 시작은 할러의 시작과 같았다. 그 역시 돈만 수호하던 변호사였던 아버지에 의해 그런 변호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할러와 제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할러의 관계의 복제이고 결국 제리는 할러인 것이다. 그렇게 둘은 도플갱어다. 제리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수임된 안건을 할러가 유산처럼 물려받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러므로 제리가 왜 살해당했느냐가 주가 되는 '탄환의 심판'에서 할러가 제리의 죽음을 밝히는 과정은 그대로 전작에서 자신이 (상징적으로)죽어야 했던 그 이유를 밝히는 과정과도 같다. 단적으로 부활한 할러가 자신의 죽음을 다시 조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영화 '킬빌'에서 했던 것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예수의 부활편' 같은 것이다.

 

  보슈는 진실을 찾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매개로 순례를 하지만 할러는 자신의 죽음을 반복한다.

 

  정확히 이것은 보슈의 원래 모델 15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히에로니머스 보슈가 그렸던 그리고 코넬리에게 영감을 주어 그 자신의 탐정이 바로 그 이름을 가지게 만들었던 그림 '쾌락의 3부작'의 구도와 같다.

 

  보슈가 가장 오른쪽의 지옥도에 속한다면 할러는 그 가운데, 두번째 화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보슈와 할러가 각각 하나는 진실을 찾는 자요 다른 하나는 진실을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다. 보슈가 진실을 찾는 자가 된 것은 그 어둠으로 떨어지는 데 있어서 그 스스로에게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당한 자다. 어머니가 살해 당함과 동시에 내던져졌으니까.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아니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저 바깥에, 어딘가에 있다. 그래서 진실을 찾는 자가 된다. 미노타우르스를 찾아 미궁을 헤메는 테세우스와도 같이. 하데스에게 끌려간 에우리디케를 찾아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와도 같이. 그렇게 진실을 찾는 자는 코넬리 스스로가 말했듯이 관찰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단적으로 객체와 주체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지옥이란 보슈에게 바로 그 객체이며 그래서 보슈의 우주는 바로 지옥이 된다. 하지만 할러는 그와 다르다. 할러의 비극은 오로지 할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세계가 그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습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인 오로지 주체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관찰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그저 끊임없이 그가 하고 있는 생각이 혹은 일이 옳은지 그른지 되새기는 것 뿐이다. 그에겐 반복만이 전부다. 중세의 지배적 가치관에 따르면 이 세상은 천국, 연옥, 지옥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아마도 쾌락의 정원 3부작 역시도 어쩌면 이 구도에 그대로 들어맞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할러는 연옥에 속한 자가 될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질만한 죄를 짓시 않은 자는 연옥(림보)에 갇힌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내내 자신이 저질렀던 결국 천국으로 가지 못하게 만든 죄를 영겁에 걸쳐 반복하면서 상처받고 뉘우치게 된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 소설 '탄환의 심판'은 정확히 할러가 거기에 속해 있는 자임을 보여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탄환의 심판'은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의 할러의 여정과 참으로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게 이제 보슈와 할러는 같은 라인에 선다.

 

 사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 할러가 즐겨들었던 '2-PAC'의 'TO LIVE AND DIE IN LA'의 가사처럼 로스엔젤레스와 베트남 전장은 그리 다르지 않다. 로스엔젤레스의 삶 역시도 이 소설 미키 할러의 첫 독백에서 드러나듯이 베트남 전장만큼이나 혼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돈을 위해 일으켰던 전쟁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 했던 어린 병사들만큼이나 LA 역시 돈 때문에 죽어나가는 이들이 지천으로 널린 곳이다. 제리와 할러 역시도 그 희생자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머리를 관통하는 총알에 대한 공포는 그대로 LA에서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이러한 LA 의미는 할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나타난다.(수트케이스 시티는 2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로고 때문에 가방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수트케이스 시티는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자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는 타지인들끼리 모여 살면서 아무도 진정한 의미의 닻을 내리지 않는 곳이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 꿈에 이끌린 사람들, 악몽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오는 곳. 1천2백만 명의 시민들은 모두 필요하다면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유적으로도 문자 그대로도 LA의 모든 사람들은 항상 여행 가방을 꾸려놓은 상태였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P.83)

 

 

  이러한 LA에 대한 시선은 그대로 베트남에 대한 시선과 닮아 보이지 않는가? LA와 베트남의 유사성은 비단 공간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만일 둘이 비슷하다면 베트남을 초래한 미국이나 현재의 LA를 초래한 미국이나 같다는 것이며 그건 보슈에게 어둠을 안겼을 때의 미국이나 할러에게 상징적 죽음을 가져다 준 지금의 미국이나 똑같다는 그렇게 시간적으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보슈는 여전히 그 땅을, 그리고 그 때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베트남의 '땅굴 쥐'라는 지하에서 LA의 형사라는 지상으로의 삶의 전이는 문자 그대로 무덤에서 다시 걸어 나온 자를 형상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대로 다시 되살아난 할러가 '수트케이스 시티'로 재정의되는 LA로 다시 돌아오는 것과 또 닮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코넬리의 의도는 여기서 명백해진다. 즉 그는 보슈에게 두번째의 기회를 주었듯이 할러에게도 역시 그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보슈와 할러는 서로 만나야했을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장면이 바로 보슈가 할러에게 자기가 듣고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장면이다. 보슈는 자기가 듣고 있는 뮤지션이 프랭크 모건이라고 말해준다. '라인업'에 실린 글에 의하면 프랭크 모건은 보슈의 캐릭터를 형성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영감을 준 음악가였다. 코넬리는 말한다.

 

 "내 탐정은 프랭크 모건 처럼 생존자로서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과거를 극복하는 남자여야 했다.(라인업, P.69)"

 

  말하자면 프랭크 모건은 보슈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코넬리 자신도 작품을 쓸 때는 꼭 프랭크 모건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프랭크 모건은 코넬리가 작품 전체에 걸쳐 구현해내려는 우주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독자들이 가장 반대할만한 캐릭터를 창조하기 원했던 코넬리가 그 이유로 만들어낸 할러는 바로 거기에서 코넬리의 우주로 초대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와도 같다. 그런데 할러 역시도 그 뮤지선을 알고 있다고 한다. 어릴때 모건이 아버지의 의뢰인 중 하나였다고. 아마도 그 유년 기억의 소환은 코넬리가 초대한 것에 대한 기꺼운 응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슈와 할러는 동반자가 된다. 이는 다른 면에서도 확인되는데 할러가 소원했던 딸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슈 역시도 2009에 나온 '9 DRAGONS'에선 태어난 지 몰랐던 딸을 찾게 된다고 한다. 둘이 결국은 동반자라는 사실에 이 보다 더 결정적인 증거가 또 있을까?)

 

  지금껏 같은 산에 살면서도 서로의 반대편에 있었지만 이제는 같은 정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슈는 순례를 통해 할러는 반추를 통해 둘 모두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거짓말에 더 이상 오염될 수 없는 밝고도 분명한 진실, 즉 말하자면 쾌락의 정원 3부작중 가장 왼 편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가고자하기 때문에 말이다. 어둠이 없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곳. 말 그대로  'THE BRASS VERDICT'의 세상으로. (BRASS는 소설에서 보슈의 말처럼 총알이란 뜻도 있지만 '녹슬지 않는 황동'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거기서 보슈는 '엔젤스 플라이트'에서 성냥갑에 적혀 있던 '내면의 안식'을 얻게 될 것이고 할러는 5부의 제목 처럼 'THE BRASS VERDICT'의 근본적 의미인 '마지막 평결'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뒤로 베란다에 남아 도시를 바라보았다. 불빛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움직였다. 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걸러져서 저 위의 구름처럼 하늘로 날아갔다. 아름답지만 아주 멀어서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구름. 다시는 보슈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내가 산의 양편을 하나씩 차지하고 그냥 이대로 살아갈 것만 같은 느낌.(P. 550)

 

 

 아마도 우리가 코넬리의 작품에 열광하는 건 그것이 그저 읽는 재미만을 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적 구성의 완벽함, 놀라운 반전 등이 물론 한 몫을 하긴 하겠지만 보슈와 할러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삶이 결국은 우리들 자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라는 공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보슈는 여전히 내면의 안식을 가져다 줄 진실을 찾아 헤메이고 할러는 마지막의 저 독백 처럼 결코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구름(아마도 이것은 삶에 있어 종국적인 의미라는 'THE BRASS VERDICT' 가진 또 하나의 의미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을 쫓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도 내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보슈와 할러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 어떤 거대한 세력이 앞을 막아도 배에 총알을 빵빵 맞아도 그들의 시도는, 추적은 포기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래서 아마도 응원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들처럼 세상의 거대한 벽을 느낄 때마다 안정이란 유혹속에 쉽게 자신의 신념을 포기할 때 우리는 종종 원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왜소함과 자괴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누군가 자신만의 신념으로 세상과 대적하는 살아있는 모범이 되어 달라고... 아마도 우리는 보슈에게서 그것을 보았고(아마도 이제는 할러에게서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응원하게 되었을 것이고 또 계속 그들의 따라 걷게 되었을 것이다. 보슈가(그리고 이제 할러도) 우리들이 치뤄야 할 싸움을 대신해서 혹은 미리 치뤄주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물론 코넬리는 그들이 그러한 사람들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아마도 그래서 이들은 그 어느 캐릭터 보다 생생하게 빚어졌을 것이다. 읽다보면 분명히 느껴진다. 코넬리가 자신의 캐릭터를 얼마나 공들여 형상화 시키고 있는지. 그의 말투, 몸짓, 등장하는 장면 하나 하나마다 말이다. 할러가 헐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의뢰인 엘리엇에게 이제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엘리엇의 개인 사무실이 아니라 중립적인 회의실에서 만날 것을 강요하는 건 얼마나 디테일한 묘사인가? 코넬리는 이 모든 인물들이 그저 텍스트 상의 가상이 아니라 실제 우리들의 곁에서 호흡하고 행동하는 살아있는 인물들로 여겨지길 원한다. 왜? 여기에 하나의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변하지 않는, 바래지 않는 종국적인 진실인 'THE BRASS VERDICT'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그건 소설에서 할러에게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바로 자신의 새로운 운전기사가 된 패트릭 헨슨과의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할러는 그 자신의 믿음과 본성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어려움에 빠진 패트릭을 돕는다. 패트릭이 그 까닭을 묻자 할러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잘 몰라, 패트릭. 하지만 내가 자네를 돕는 게 나 자신을 돕는 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

 

  그 전에 할러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난 48시간 동안 새로 맡게 된 사건들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유혹을 느끼는 것이, 역이 내게 줄 수 있는 포근한 세계로 가고 싶은 욕망이 느껴졌다. 약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과 벽돌담 같은 현실 사이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공간을 점점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심이었다. 어쩌면 패트릭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P. 287)

 

  코넬리가 말한대로 자신의 캐릭터가 프랭크 모건 처럼 과거와 싸우는 인물이기를 원한다면 할러가 두려워하는 약은 돈 밖에 몰랐던, 그래서 죽음을 초래한 예전의 자신이 될 것이다. 그는 세상과 섞일 때 마다 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그 과거란 전부인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나듯이 딸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미지 역시 코넬리는 고정된 공간으로 표현한다. 마치 이대로 정지하면 죽는다는 듯이. 그래서 그는 죽지 않기 위해,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오로지 자신에게 이익일 돌아올 경우에만 희생을 지불하던 자신을 버리듯이 아무 까닭없이 곤경에 빠진 패트릭을 돕는 것이다. 거기다 그를 정처없이 내내 떠돌아다니게 할 링컨차의 운전기사로까지 고용한다.(이건 내내 탐문을 위해 떠돌아다녀야 할 보슈의 또 얼마나 비슷한가?) 그런 패트릭이 운전기사를 맡는 건 또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인가? 그렇게 패트릭은 내내 할러를 움직여갈 것이다. 그렇게 할러를 살려나갈 것이다. 이 모든 코넬리의 정교한 세팅 속에서 드러나는 목소리는 단 하나다. 내면의 안식을 가져다 줄 변하지 않을 진실을 찾고 싶은가? 그렇다면 머리로만 꿈꾸지 말고 적어도 행동을 하라! 그 것이다. 보슈 처럼 결국은 타인을 살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할러 처럼 자그마한 것이라도 타인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바로 그 행위가 그게 언제가 되었든 결국엔 원하는 그것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보슈와 할러의 기꺼운 동지가 되기로 작정했다면 아마도 이런 식의 진심에 감응한 결과라고... 그래서 우리는 응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 주기를... 마치 보슈와 할러가 희망이란 신기루에 몇 번이나 속아가면서 정처없이 헤메고 있는 사막 위를 우리를 대신 업고 가기라도 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게오르크 루카치란 한 철학자는 무엇보다도 큰 이 세상의 비극은 우리를 인도해 줄 그 어떤 별자리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루카치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보슈와 할러를 가리켜 보이며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당신의 돈을 걸어라, 몽땅! 그들은 영원히 지지 않는 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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