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어떤 책은 마치 내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내가 평소 궁금해왔던 그 문제에 대해 풀어놓을 때가 있다. 바로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란 책이 그렇다. 이 책은 기독교든 불교든 신앙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번쯤은 해 보았을 바로 그 의문으로 다시금 인도한다. 즉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그것을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 보여 주는 괴리를 보았을 때 가지게 되는 의문 말이다. 그러니까 종교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윤리적이고 자비로로워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오히려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볼 때면 스스로 도대체 종교라는 게 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 주커먼의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의문에 천착하는 책이다. 단적으로 그는 가장 종교적인 국가 미국과 가장 비종교적인 국가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보여주는 모순된 모습을 통해 이것을 풀어나간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가장 종교적인 국가인 미국이 가장 윤리적이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가장 비종교적인 국가 덴마크와 스웨덴이 가장 윤리적이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람에 대해서 보았던 그러한 괴리가 이제는 국가로 확장된 것 같은 모습인데 이에 대한  필 주커먼의 말을 다소 길지만 직접 인용해 본다.

 

 미국은 확실히 서구 민주주의국가 가운데 가장 종교적인 나라다. 그리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확실히 서구민주주의국가 가운데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다. 그렇다면 신앙심을 자랑스레 내보이는 미국에 총이 범람하고 형벌이 가혹하고 매주 사형선고가 이루어지고 약물 중독자들은 범죄자 취급을 받고 수많은 어린이와 임산부가 기본적인 건강보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수많은 노인들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사회복지사들은 저임금과 과로에 시달리고 정신병 환자들은 길거리에 방치돼 있고 선진국 중 빈곤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반면 비종교적이 덴마크와 스웨덴, 대부분의 미국인이 보면 거의 '하느님이 없다'고 까지 할 수 있는 이 두 나라에서는 어디서도 총이 보이지 않고 형벌 체계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인정과 자비가 넘쳐서 재활에 중점을 두고 있고 사형은 이미 오래전에 폐지되었고 약물 중독자는 의학적 치료나 심리적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져 보살핌을 받고 모든 사람이 훌륭한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노인들도 세계 최고의 보살핌을 받고 사회복지사들은 괜찮은 임금을 받으며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일을 맡고 정신병 환자들은 최상급 치료를 받고 빈곤율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나는 어떻게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건지 궁금했다.(p.64)

 

 

 

 '신 없는 사회'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속화가 진전된 국가가 더 윤리적이고 행복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이 의문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소 느끼는 의문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의문엔 또 한가지가 더 결부되어 있다. 이렇게  보여지는 현실 그대로 딱히 종교가 제대로 살게 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한다면 과연 우리에게 있어 종교가 가지는 의미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시대가 필 주커먼이 이 책의 서문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종교 과잉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종교로 넘쳐나는 시대이기 때문에 꼭 한번은 음미해 보아야 할 동시대적 물음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그 주요한 방법으로 필 주커먼은 면접법을 가져 온다. 대표적인 사회과학연구 방법중 하나이기도 한 면접법은 일종의 인터뷰 같은 것으로 연구 대상자와 직접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개인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라 할 수있는 '종교에 대한 가치관(이것은 또한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도 직접 연결되는 문제기 때문에)'을 다루는 것이기에 그와 같은 방법은 적절해 보인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종교사회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진면목을 보여준 바 있었던 막스 베버 역시도 종교사회학에 있어 이러한 개인적인 접근 방법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한 바 있다.

 

내가 사회학자가 된 주된 이유는... 아직까지도 우리 학문을 둘러싸고 있는 집합적 개념이란 유령을 추방하기 위해서였다. 사회학이란 학문 자체는 단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따로 따로 분리된 개인들의 행위에서부터만 연구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엄격히 '개인주의적' 연구방법을 채용해야만 한다.

 

- 막스 베버가 그의 친구 리이프만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이렇게 필 주커먼은 많은 수의 인터뷰를 통하여 세속화가 진전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종교가 없으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왜 그들이 지금처럼 신과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멀어진 상태에서의 삶은 또 어떠한지 바로 그 심층적인 모습을 인터뷰 대상자들의 생생한 경험까지 더해서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책은 개개인의 특수 사실에서 일반적인 대답을 끌어내는 일종의 귀납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셈이다. 그렇게하여 결국 필 주커먼은 덴마크와 스웨덴이 '세속주의 국가'가 된 이유를 찾아낸다. 이유가 모두 일곱개다.

 

 각각을 살펴보면, 그 하나는 게으른 독점이다. 즉 이미 오래전부터 루터교가 국교가 되어 있어 그 스스로 확장할 필요를 못 느껴 구태어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종교는 특히 사회에 대해 안전의 확신이 없는 가운데 번성하게 되는데 아시다시피 덴마크와 스웨덴을 세계 최고의 안정된 사회이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여성들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가 캘럼 브라운에 의하면 남성과 아이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게 만든 것은 순전히 여성들 덕분이라고 한다. 즉 전업 주부인 여성들이 주일마다 남편들과 아이들을 거의 반 강제적으로 종교 행위에 참여시키기 때문에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도왔는데 지금의 덴마크와 스웨덴은 여성들이 대부분 직업 여성들이라 그럴 여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성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문화적 방어욕구의 결여라 말한다. 그러니까 문화적, 종교적 독점이 위협을 받으면 바로 그 종교적 독점이 사람들의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여 저항의 중심 기관이 되어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한 필요를 불러일으켜 왔는데 덴마크와 스웨덴은 단일민족국가라서 굳이 종교를 통해 정체성을 강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의 발달이다. 덴마크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가장 먼저 시행한 나라이기도 하다. 시작이 무려 1814년이다. 그만큼 교육 수준이 높다. 통계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종교성이 약해진다고 한다. 또 하나는 그들의 대표적인 정책이기도 한 사회민주주의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는 동안 공립교육에서 특정 종교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 접할 기회를 많이 상실하는 바람에 종교성이 약화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원래 종교가 유포되었던 역사적 경험 또한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모두 부족장과 왕들이 자신들의 정략적인 이유로 종교를 유포시켰다. 즉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위로 부터 강제적으로 종교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애초 부터 존재한 이런 경험 때문에 종교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가질 수 없어 지금의 종교성 약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상의 일곱가지 이유는 그러나 단순히 덴마크와 스웨덴의 종교성 약화를 나타내는 이유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 이유들은 더 나아가 가장 종교적인 국가라는 미국이 왜 그렇게 강한 종교성을 나타낼 수 밖에 없었는지 바로 그 이유를 드러내기도 한다. 즉 미국이 그렇게 가장 종교적인 국가가 된 데에는 우선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 종교가 어떻게 유포되었는지에 대한 차이를 말한다. 즉 덴마크와 스웨덴이 위로 부터 '상명하달' 식으로 유포되었던 것과 달리 미국은 처음부터 청교도 신자들이 이주해와서 건국하게 된 것이므로 민중들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확립했다. 바로 그 위로 부터냐 아니면 아래에서 부터냐 때문에 종교성마저 차이를 가져왔다고 한다. 거기다 지금 미국이 처한 사회적 원인들 역시도 한 몫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이자 그렇게 인종적으로 계급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성원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단일 성원, 단일 국가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종교에 대한 욕구가 커질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종교가 무엇보다 정체성 확보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성원들이 뒤섞여 살 수 밖에 없는 미국의 환경이 정체성 확보의 욕구를 낳았고 그 욕구를 종교를 통해서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구조적 요인도 있다. 일단 미국은 정교 분리의 국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덴마크와 스웨덴 처럼 '게으른 독점'이 성립할 수 없다. 할 수 없이 교회는 자유경쟁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대중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발할 수 있는 온갖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후반의 모르텐의 고백에 따르면 이것이야 말로 사람들이 미국 교회를 다니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는 또한 한국 교회가 번성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다 미국 사회가 아주 불안하기 때문이다. 안전의 욕구가 바로 종교의 욕구로 나타난다는 건 앞서도 언급했다.

 

 그런데 이렇게 미국과 덴마크와 스웨덴에 상이한 종교성의 차이를 가져와 버린 그 이유들을 살피다 보면 종교가 지금 사회에서 무슨 의미마저 알 수 있게 된다. 아마도 필 주커먼은 그래서 이러한 공통된 원인들을 중심으로 비교 접근법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종교성의 차이가 바로 역사나 사회 환경 같은 것들에서 유래된 것임을 밝혀 종교가 자발적 생성이 아니요 외부적 요건들로 인해 형성되는 것이며 그래서 종교가 바로 문화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 말이다. 즉 필 주커먼은 미국과 덴마크, 스웨덴의 비교를 통해 바로 이러한 종교가 가지는 문화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교가 반드시 신자들을 위한 깊은 신학적 확신으로 가득한 것이 될 필요는 없다. 신자들이 반드시 독실하고 경건하게 종교를 믿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최후에 문화적 정체성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있는 종교가 전통적인 종교다.

 - 한스 라운 이베르센 - (p.252)

 

 

 종교가 일종의 문화적 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종교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내내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체성 확인의 통로로 문화로서의 종교가 기능하는 것이다. 즉 종교는 굳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더구나 자신의 정체성만 내내 확보해 줄 수 있으면 오로지 종교 활동만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필 주커먼은 '문화적 종교'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적 종교'란,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적 전통에 일체감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 안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확연히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현상이다. (p. 261)

 

 

  그런데 이는 어떤 의미로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그렇게 종교에 있어 가장 알맹이는 빠지고 오로지 껍데기인 행위만이 남아 그것이 전부가 된 현상을 말할 수도 있다. 즉 신앙이 아니라 형식이 전부가 되어버린 종교이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단지 종교 행사만 있어도 자신의 뿌리를 그렇게 정체성을 내내 확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하고 같은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섞이어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종교 행위만으로도 충분해서 그런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 확인을 통한 소속감과 안정감이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꼭 종교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이것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는 그 두가지가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것 하나가 무색해지는 바람에 결국 남게 된 한가지를 의미하는 것일까? 필 주커면은 이성의 발달과 합리화의 진전이 결국은 초월자의 믿음을 희석시키고 그렇게 남게되어 버린 기능으로 여기는데 그래서 합리화가 가장 진전되었고 또한 미국처럼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아도 되는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는 종교가 그 힘을 잃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면 미국이나 한국이 보여주는, 모르텐의 말처럼 '광신'에 가까운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가 남는다. 그러니까 미국이나 우리나라가 합리화가 많이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문화적 종교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사실은 종교 자체가 문화적 종교이고 그래서 미국과 우리 나라 역시 이 경향에 깊숙히 함몰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필 주커먼은 물론 전자 쪽이다. 왜냐하면 결론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문화적 종교가 가장 강렬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아마도 유대인과 덴마크인, 스웨덴인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p.276)

 

 내가 문화적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필 주커먼의 이와 같은 말은 좀 수정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쪽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종교란 그같은 정체성 확보를 위한 문화적 수단 밖에는 없었으며 덴마크와 스웨덴은 문화적 종교가 가장 강렬하게 나타난 곳이 아니라 사실은 종교 자체의 의미가 희석화되어 버린 곳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종교의 사르갓소 같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필 주커먼이 말하는 문화적 종교의 핵심은 신앙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신앙(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 종교'는 오로지 행위만이 내재된 신앙을 가늠하는 것에 대한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미국 같은 경우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공직자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요식행위의 집착이 바로 문화적 종교를 더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경우 이러한 문화적 종교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를테면 내가 아는 어떤 장로는 조의금 때문에 교회 장례식으로 하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를 억지로 자기가 있는 교회로 옮겨오게 한 분도 계시다. 물론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선진국 선교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은 어떨까?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직접 겪은 바로 얼마전의 일이다. 다니는 교회에서 프랑스로 선교 활동을 가야할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기독교를 믿어왔고 사회적 성숙도도 우리보다 앞서는 나라에 왜 굳이 선교를 가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반대를 천명했다. 하지만 곧 찬성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반박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선교를 가야하는 주된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기도 했다. 즉 프랑스 교회에 출석하는 신도수가 급감하고 있으며 교회의 수 또한 날로 감소 추세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프랑스의 신앙이 죽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그렇기에 우리의 선교로 식어버린 이들의 믿음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도 드러나듯이 한국 교회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교회 출석, 주일 성수, 헌금, 기도와 같은 요식 행위에 집착한다. 아마도 기복 신앙의 '치성'의 개념과 관련되어 더 강조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바로 그렇게 보이는 행위를 통해 신앙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주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프랑스든 독일이든 무모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선교를 감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보이는 행위에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책에서 모르텐은 미국은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회라고도 꼬집었는데 과연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베버는 아주 좋은 대답을 해주고 있다. 베버는 바로 여기에서 종교에 대한 갈망이 비롯된다고 했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만으로 좀처럼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 이상으로 그는 그가 자신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는 그가 자신의 행운을 마땅히 누릴 만한 자격이 있음을 - 특히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보다 운이 덜 좋은 사람들도 단지 그들이 응당 치뤄야 될 대가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라는 믿음이 인정되기를 원한다.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종교의 역할이 정체성을 확보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바로 이러한 정체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즉 자기는 남보다 낫다는 확인을 신앙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교회가 자꾸만 대형화되고 화려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정작 실생활에서 종교적 명령을 실천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기독교적 요식 행위는 오로지 기독교 공동체내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필 주커만이 말한 '문화적 종교'의 진짜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요식 행위의 집착은 분명 문화적 종교의 현상 중 하나이며 그 가장 부작용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걸 마르틴 부버의 말로 표현해 보자면, 철학자이자 신학자로도 유명한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를 만나고 '너'를 '너'로 받아들이는 길 이외에 '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리고 유한한 '너' 속의 무한한 '너'의 만남과 수용 없이는 '너'를 만나며 받아들일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관계는 계속적으로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변형되는 존재의 비극적 운명 아래 놓이게 된다.

 

  문화적 종교란 종교가 바로 부버가 말했던 이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부버가 말하길 '나와 그것'와 관계가 되면 더 이상 '그것'은 존재론적 관심을 잃고 단순히 인식적 관심 그리고 행위적 관심 밖에는 얻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렇게 '그것'은 다만 대상일 뿐이며 그것도 하느님으로 인해 확장되는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그냥 획일적인 '나'로 항구적으로 있게 하는 도구적 의미 밖에는 남지 않는다. 현재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나와 그것'의 관계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아간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화적 종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 종교는 어떻게 보면 종교의 가장 진실한 모습일지 모르며 덴마크나 스웨덴 처럼 긍정적인 결과도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과 같이 사회 안전망이 부실하거나 계층간 격차가 자꾸 심해지는 나라들에서 문화적 종교는 훨씬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문제다. 문화적 종교는 정체성 확보를 위해 주로 이루어지는데 이런 나라들에서 정체성 확보는 나의 뿌리가 아니라 나의 우월함(미국 보다는 단일성의 정도가 강한 우리나라에 국한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드러내는데 더 맞춰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 필 주커먼의 책은 우리(특히 신앙인)에게 또 한 가지의 의미를 더 가지게 된다. 즉 과연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종교를 믿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책이 신앙과 관계된 주제에 대해 내밀한 자기 고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고민들은 언젠가의 내가 했던 고민이거나 누군가로 부터 상담 받던 고민들이기도 하다. 즉 누구나 한번쯤을 떠올려 보았던 그런 고민이나 생각들인 것이다. 그 친숙함 때문에 그들의 고백을 듣는 한 편 그 말에다 바로 나의 모습을 비쳐보게 된다. 즉 나는 어떻게 생각해 왔던가 혹은 나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려 하는가를 비춰보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리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 표트르와는 달리 신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윤리적이 될 수 있고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여겨도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으며 삶의 궁극적 의미따위 신경쓰지도 걱정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타인에 대해 관대할 수 있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그런 고백들을 보면서 더우기 신을 믿는다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들이 이정도로 허무와 무상함을 인정하는 가운데에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외부에 전혀 기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외부의 어떤 인정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신을 요청하는 궁극적 이유도 사실은 신 앞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신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때문인 것 같다. 즉 그 인정을 통해서 나를 더욱 더 높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해서 정말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또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종교마저도 내 우월을 위한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기에 특히나 더욱 행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오히려 그 때문에 정작 삶을 희생하는 결과를 낳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 생각에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에서 그 '신'은 그저 '신'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더 나아가서는 내 우월을 인정받으려는 모든 수단화된 타자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마르틴 부버의 말대로 '너'가 아닌 '그것'이 되어버린 타자들 말이다. 그러므로 '신 없는 사회'란 제목에 포함된 뜻은 그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을 끊는 것 부터가 먼저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스칸디나비아의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즉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주어진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언어와 틀에 박힌 행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를 통해 믿음을 드러내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문득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이런 얘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말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어냐고 예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예수가 하나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자 그래도 굳이 하나만 지킨다면 무엇을 지켜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이웃사랑이라고 말했다. 그 이웃사랑이 바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예수마저도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포용하고 사랑하는 행위가 곧 신을 믿는 신앙 자체라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신'이란 단일한 가면 아래에는 내가 포용하고 사랑해야 할 무한의 타자들이 있는 것이다. '신 없는 사회'란 아마도 '신'이라는 그 단일한 가면을 벗어버린 사회를 말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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