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 무한경쟁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
플로리안 오피츠 지음, 박병화 옮김 / 로도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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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4년 영국의 화가 조셉 말러드 윌리엄 터너는 '비 증기 그리고 속도'라는 그림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70세에 그린 이 그림은 기차 여행중 기차의 빠른 속도로 인해 유리창에 그려지는 빗방울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 속도감으로 인해 달라지는 세계의 인상을 이렇게 화폭에 옮겨 놓은 것이었다.

 

 터너의 그림에서 보듯 근대에 들어와 놀랄만큼 빨라진 속도는 사람들에게 경이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체험이었고 단시간에 보다 멀리까지 가게 함으로써, 그렇게 그들의 세계를 보다 확장시켰으므로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그 때부터 사람들은 빠른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삼 시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루 걸릴 거리를 한 시간만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시간 단위들이 중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생활은 이제 하루, 반나절 이런 단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빨라진 속도에 맞춰 시간 혹은 분 더 나아가서는 초 단위까지 나뉘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 우리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시간 테이블은 근대에 들어와 나타나게 된 일종의 발명품이었고 그것을 정형화시킨 이는 바로 미국의 프레데릭 테일러였다. 테일러는 1910년대 당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던 생산 공정에 표준화를 가져온 이로 유명하다. 그것이 가장 최초의 정형화된 일련의 공정이었으므로 '테일러주의'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테일러는 생산 공정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공정을 세부적으로 단계를 나누어 그 순서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단순 반복 작업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숙련성'을 노동자에게서 박탈하였고 그래서 보다 쉽게 노동자들을 교체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무튼 테일러는 그 단순 반복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시간을 분단위까지 잘게 나누어 시간표를 짰는데 바로 그러한 시간의 분할이 오늘날 자본주의 시간적 생활양식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원인과 결과란 종종 되먹임의 과정이다. 원인이 촉발시킨 결과가 다시 그 원인을 가속화시키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분과 초 단위까지 관리되기에 이르자 생활의 속도 역시 더욱 빨라지게 되었다. 시간 여행에 대한 영화를 보게 되면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도 과거의 사람이 현재의 도시로 왔을 때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장면이다. 그것은 과거에서 온 여행자가 자신의 시대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의 행렬을 놀란 표정으로 보게 되는 장면이다. 왜 영화들은 자주 이것을 묘사하는가? 바로 이 속도의 체험, 가속화된 시간의 체험이 과거의 사람에게 무엇보다 시간적 단절의 느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의 시간 리듬이란 근대와는 달라서 보다 더 긴 시간 단위 그러니까 하루나 한달 어쩌면 계절을 주기로 흘러갔으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가속화'란 어디까지나 근대에 의해 창출된 이른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각을 우리는 독일의 다큐멘터리 작가 플로리안 오피츠의 '슬로우'란 책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시간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이유는 요즘 부쩍 늘어난 시간 관리 상담가라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시간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잡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아끼려는 개인의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 문제를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많지 않습니다.(P.89)

 

 

 

 

 오피츠의 '슬로우'도 이와 같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속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아니 이 책 자체가 오피츠가 살면서 가지게 된 하나의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그 의문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든 한 번은 떠올려 보았을 그런 의문이다. 즉 '왜 이렇게 시간에 쫓기듯이 살아야 하는걸까?' '시간을 벌려 바쁘게 살아가는데도 휴식은 커녕 왜 더 바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바쁘게 지내야 하는 걸까? 대체 여기에 해결책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다.

 

 기술적 발달로 절약한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는 간단하게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손편지 하나 쓰는 것보다 이메일을 작성하는 것이 두 배는 빠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루에 편지 10통 쓰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면 이제는 30분이면 이메일을 10개 쓸 수 있죠. 그런 30분의 여유가 생깁니다. (...) 하지만 실제로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이메일을 10개가 아니라 50개 60개씩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린 셈이지요. (...) 우리는 이메일 기술의 발달로 시간을 벌었지만 그만큼 읽고 처리해야 할 뉴스도 많아졌기 때문에 이를 도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신기술의 발달로 얻는시간 보다 뉴스의 양이 훨씬 더 빨리 늘어나기 때문입니다.(P. 73~74) 

 

 

 그렇게 단순히 오피츠 개인의 의문이란 것을 넘어서 어쩌면 사회 보편적 의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의문들을 말 그대로 오피츠 스스로 풀어나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 '슬로우'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다큐멘터리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기 때문에 인터뷰가 중심이다.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파문처럼 보다 확장되는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즉 1장 '우리는 왜 불안하게 쫓기며 살까?'가 개인 차원의 시간 관리 문제를 다뤄 개인적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밝혀낸다면 2장 '속도와 경쟁에 집착하는 세상'은 거기서 보다 확장되어서 사회적 차원을 다루는데 즉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사회가 이미 구조적으로 가속화 사회이기 때문임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논리가 시간을 부족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시간은 곧 돈이고 돈은 늘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 불가능한 겁니다. 우리를 몰아세우는 것은 비단 자본주의나 경제만은 아닙니다. 경쟁 논리도 한 몫 거들죠. (...) 바로 이 경쟁 논리가 이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며 이 경쟁 논리 때문에 인간은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언제가는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 세상이 조금씩 빨리 돌아가고 있으며 우리도 그에 맞춰 빨라져야 한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빨라진 속도는 이제 활동의 자유를 가져다주지도 못하고 자기 발전에 대한 희망도 심어주지 못합니다. 압박은 점점 심해지는데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없지요. (..) 우리는 속도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 이런 구조에서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빨라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P.112 ~ 113) 

 

그리고 3장 '행복과 속도, 그 대안을 찾아서'는 이미 구조로 자리잡은 가속화 사회에서 과연 그 속도에서 해방되어 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진정한 여유를 가질 수 있는지, 그 대안을 탐색한다. 이 모든 과정은 오피츠 개인의 체험으로 접속되어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경험과 함께 보다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누구나 한번쯤 해 보았을 의문에다가 그 과정이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의 해답 찾기 과정이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 않게 그리고 마치 내 문제 처럼 그 여정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 그래서 오피츠의 고민과 더불어 첫 페이지를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앞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거기다 대답의 추구 대부분이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는지라 각 사람들의 체험을 통하여 보다 더 생생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다.

 

  이 책은 특정한 대안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사람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주된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그들의 육성으로 생생한 체험들을 들으면서 독자 자신이 자기에게 맞는 대안들을 찾아 가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이 꼭 건네는 충고는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한계를 알아라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얼마든지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다는 과욕을 부리지 말 것을 경고한다. 바로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식의 내겐 한계가 없다는 과신이 속도의 강박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래서 엄연히 존재하는 육체의 한계를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은 신체와 정신의 피로만 가중시킨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진정한 '슬로우 라이프'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기 절제'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겸허히 내 한계를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삶을 꾸려나가는 것. 그렇게 스스로 제동 장치를 두는 것. 이것이 가장 필요한 자세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단 이것은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사회 역시도 이러한 제동 장치가 필요한데, 오늘의 거대한 위기를 초래한 신 자유주의가 바로 그러한 제동장치가 없는 체제였기 때문에 이 '자기 한계의 긍정에서 나오는 절제'라는 제동 장치는 정말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가속화는 장기적인 안정이 보장될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안정은 다시 제동 장치의 기능이 원활할 때 보장되지요. 최근 수 십년간 지속되는 신자유주의는 이 제동장치를 체계적으로 제거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안전도 사라졌죠. 신자유주의 정치는 처음부터 자본의 흐름뿐 아니라 교육제도와 노동시장에서도 제동장치를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제동 효과가 있거나 유연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 그리고 자본이나 상품, 투자의 흐름을 방해하는 모두 제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P. 132)

 

 '슬로우'는 한번쯤 삶이 가진 바쁜 속도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느림'을 추구하는 책이 아니라 '속도'라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책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지는 속도의 강박은 삶의 충실에 대한 강박과 맞닿아 있었다. 즉 우리가 그렇게 분초를 다투며 바쁘게 시간을 메우는 것은 그것이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어'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속도의 집착이 삶을 보다 충실하게 만들어준다고 여겼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거기서 주로 성공한 엘리트들의 삶은 자주 회사의 복도를 부단히 이동하는 가운데 정신없이 말을 주고 받는 장면으로 묘사되곤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충실은 삶이 가진 시간의 아주 작은 단위조차 허투르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슬로우'는 그것이 일종의 강박이며 오해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느 만큼의 속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느 만큼의 속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는어느 만큼의 속도가 필요한가? 무엇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가?" 입니다.(p. 137)

 

 말하자면 '슬로우'는 바람직한 삶을 위해 당신으로 하여금 제대로 질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제대로 된 해답은 늘 제대로 된 질문이 있는 가운데 있어왔다는 건 불변의 진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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