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 우리는 왜 부정행위에 끌리는가
댄 애리얼리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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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경제학'의 댄 애리얼리의 또 하나의 카운터 펀치.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거짓말 하는 착한 사람들'이란 책이다. 여전히 그는 우리가 익히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다만 편견으로 점철된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고안하고 실시한 풍부한 연구 사례를 통해 다소 충격 속에 보여준다. 저번이 경제학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라면 이번엔 도덕성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인들의 도덕성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알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기회만 되면 얼마든지 비도덕적으로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 이러한 믿음은 바로 얼마 전에 방영된 드라마 '추적자'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주인공과 아무리 가까운 친구, 동료라 하더라도 거액의 유혹을 받는 순간 여지없이 배신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그 누구도 설마 어떻게 저럴 수가 하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회의 단면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냈다고 여겼다. 거액의 돈에 굴복하여 친구의 우정과 동료의 신뢰를 져버리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추적자'는 아예 더 나아가 이 사회 전체가 쉽게 비도덕적이 될 수 있는 곳임을 보여주었다. 돈과 권력 앞에서 검찰이든 언론이든 정부 관료든 무엇보다 도덕적이어야 할 존재들이 꼬리를 살살 흔드는 개로 변해버렸다. 그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사람은 도덕적으로 태어나지만 사회가 비도덕적으로 만든다고 상세하게 밝힌 바 있는데 바로 그대로였다. 이런 사회이기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쉽게 남을 믿지 말라고 되뇌인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우리 곁에 있는 타인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었다.

 

 

  여기에 바로 댄 애리얼리의 '거짓말 하는 착한 사람들'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시선이 오해에 불과함을 알려주고 결국 그것을 교정시켜 주기 때문이다. 댄 애리얼리가 사람들의 도덕성에 대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뒤 흔들고 부셔버리는 데도 이것이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책 전체에 걸쳐 그가 사람들의 도덕성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 위해 고안한 독창적인 실험 결과 때문이다. 그것이 너무도 객관적인 데이터로 실증적으로 우리의 도덕성에 대한 생각들이 오해와 편견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주기에 댄 애리얼리의 말에 절로 귀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덕성에 가장 흔한 사람들의 생각을 한 예로 들어보자. 플라톤의 책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도 있듯이 우리들은 사람들이 들키지 않는 확신만 있다면 얼마든지 비도덕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흔히들 투명인간이 되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냐 하는 질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만 봐도 알 수 있다. '은행에 몰래 들어가서 원 없이 돈을 가져오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투명인간이 된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의 상식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댄 애리얼리의 실험 결과는 다르다. 댄 애리얼리는 실험을 통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듯이 남의 시선이 아님을 밝혀내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남의 시선이 아닌 바로 자신의 시선이었다. 놀랍게도 댄 애리얼리의 실험에서 사람들은 아무리 들키지 않는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커다란 부정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것이 아주 고액의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부정만 저질렀다. 이 놀라운 반전에 댄 애리얼리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실험을 통해 이 이유를 알아내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남들이 자신의 부정을 모른다 하더라도 사소한 부정만 저질렀던 이유는 남들은 모르지만 자기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상 자신이 도덕적 인간이라는 확신에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부정을 용인했던 것이다. 즉 사람들이 보다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쁜 놈으로 보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양심이란 게 실제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또한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이제껏 우리가 알아왔던 대로 이득을 먼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도덕성인 것이다. 아무리 경제적 선택이라 하더라도 나 자신이 도덕적이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한에서 우리는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굉장한 충격이지 않는가? 당신이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상식을 뒤집는 것은 아닌가?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리고 그 결론이 거듭된 실험 결과를 통해 입증된 것이었기에 납득될 수밖에 없어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 사회에는 이득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은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댄 애리얼리에 따르면 그 사람들은 그냥 요즘 인기 있는 개그 캐릭터 '갸루상'의 말대로 '사람이 아니무니다'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다. 사람에겐 최소한의 도덕적 자부심이란 마지노선이 본성상 존재한다. 그들은 그러한 마지노선 자체마저도 무너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인간(非人間)', 즉 괴물이다. 그들은 우리의 도덕적 인간이 되려는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 노력을 포기하게 만든다. 하지만 댄 애리얼리에 따르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기에 그들에게 사람다움의 기준을 갖다 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그러한 모습은 괴물을 닮기 위해 사람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은 제대로 교정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존재론적인 이유 말고도 여기엔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그건 이미지다. 댄 애리얼리는 실험을 통하여 실제 물질적인 현금일 때보다도 현금을 나타내는 이미지 상징 같은 것이 될 때 훨씬 더 많이 거대한 부정을 저지른다는 것을 밝혀낸다. 즉 진짜 돈이 오고갈 때는 사람들은 커다란 부정을 저지르지 못하지만 그것이 돈을 나타내는 수치이거나 다른 표식이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부정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 실험은 이번 미국의 서브 프라임 경제 위기 때 굴지의 금융 회사들이 보여준 후안무치한 비도덕적 태도가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말해준다. 그것이 진짜 돈이 아니라 다만 수치로 표시된 돈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미국의 서민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었으면서도 반성은 커녕, 스톡 옵션을 행사하고 성과급을 받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철저히 챙기면서도 아무런 양심상 가책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번에 저축 은행 사건에서 보듯 너무도 자주 금융 사기나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아마 그 이유 역시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어떤 면에선 과연 사람들이 이러한 사소한 차이 하나로 쉽게 비도덕적이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할 것이다. 댄 애리얼리는 거기에 대해 그건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아주 교활한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말하자면 현실의 돈이 아니라 수치로 변환된 가상의 돈은 실제 물리적으로 오고가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기 위해 좋은 변명거리로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한편 도덕적이지만 또 스스로 도덕적 인간이라는 자부심에 상처를 입지 않으면서 비도덕적으로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우회로를 또한 만들어내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대개 그럴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변명거리는 세 가지다. 하나는 '남들도 다 하는 것이잖아' 또 다른 하나는 '이번 한 번 뿐이야' 마지막은 '나 하나쯤 그런다고 티나 나겠어' 하는 생각이다. 이런 사소한 마음들이 결국엔 커다란 부정을 낳게 되는 그 첫걸음이 됨을 댄 애리얼리는 잘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겠지만 사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본성상 아주 능수능란한 교활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아무리 말이 안된다 하더라도 필요하면 거침없이 거짓의 이야기를 꾸미는 존재다.

 

  그러니까 결국 이미지란 시선의 교란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을 혼란시키기 위해 마술사가 현란한 손동작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 자신이 정말 하고 있는 것을 숨기듯이 그렇게 우리의 도덕적 자부심을 상처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도덕적이라는 자부심을 계속 가지기 위하여 타인에 대한 시선을 가지고 내 자신의 시선을 교묘하게 뒤트는 것이다. 남들이 저러니까 나도 괜찮아 하는 식으로... 결국 우리들은 스스로 속이기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이 다 그렇게 때문에 내가 날 비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비도덕적이 되기 위하여 남들을 물귀신 작전처럼 끌어내리는 것이다.

 

 

  댄 애리얼리의 이 책이 정말 중요한 것은 보다 자신에게 정직한 시선을 던지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편하게 남 핑계를 댄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것도 결국은 다 남들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일상에서 참 많이도 하고 산다. 하지만 댄 애리얼리는 그 핑계 아래 정말 움트고 있는 우리의 밑바닥을 보게 한다. 사실은 내가 비도덕적 유혹에 쉽게 굴복하기 위하여 괜스레 남들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우리의 이웃들은 어떤 선택을 할 때 무엇보다 도덕성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선하디 선한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곳에서도 그런 선함을 찾아 볼 수 없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런데 사실 그 아우성은 나의 도덕적인 자부심에 상처를 입지 않고 비도덕적이고 싶다는 아우성에 다름 아니었다. 모든 변화는 자기에게 정직해 질 때이다. 진정한 변화 또한 그렇다. 아무런 기교나 협잡 없이 정직하게 나의 도덕성을 지키려 할 때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또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댄 애리얼리는 진정한 변화를 위한 가장 소중한 첫 걸음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하여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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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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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으로 지금은 한국 팩션계에 있어 최고 자리에 서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작가 이정명의 신작 '별을 스치는 바람'은 다시 한 번 그가 얼마나 글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믿는지 또한 그가 작가로서 가지는 신념이 얼마나 강한지 깨닫게 한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는 '드릴'과 같은 작가라 생각된다. 그렇게 늘 한 곳을 맴돌며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드릴처럼 이정명 작가의 작품들 또한 궁극적으로 다루는 세계의 모습과 주제는 늘 유사한 언저리를 맴돌지만 그 깊이는 좀 더 파고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정명 작가가 다루는 세계의 궁극적은 유사성은 무얼까?

 

 우선은 항상 닥쳐올 해방 직전의 어둔 상황을 배경으로 삼는다, 그것이다. 그의 소설이 그려내는 시대는 마치 동 트기 직전의 여명과도 같다. 진정한 변화가 도래하기 전의 과도기. 이정명의 소설은 바로 그 위에서 잉태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 대왕의 한글 반포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고 '바람의 화원'에서는 정조가 정적의 반대를 막고 그의 뜻을 펼치기 직전이었으며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해방 되기 직전을 그린다. 그렇게 그의 소설들이 그려내는 시대는 어둡지만 그것은 곧 몰려나갈 어둠이다. 이는 그가 역사에 대해 낙관적임을 시사한다.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신념이 굳게 배여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대의 어둠이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곧 걷혀질 어둠의 장막이기에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장막을 누가 걷는가가 된다. 바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체. 역사를 보다 희망적으로 만들어가는 존재. 그것이 작가가 정말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들이 하늘에서 저절로 땅으로 뚝 떨어졌을 리는 없다. 무언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그랬듯이 존재에 대한 탐구는 저절로 그 존재들을 생성시킨 힘에게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그의 작품은 바로 그것을 담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 힘을 드러내는 계기가 하나의 살인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여전히 반복되는 유사성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자꾸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연상된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더욱 그랬다. 철저하게 책과 글이 통제된 후쿠오카 감옥은 그대로 중세의 수도원 같았고 그 같은 압박에 저항하여 비밀리에 도서관으로 통하는 통로를 만든 것이나 교묘하게 이중의 의미를 가미함으로써 검열을 피하는 것 또한 아무리 통제를 해도 변화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따지고 보면 이정명은 이 작품에 이르러 가장 어둠 속으로 걸어간 셈이다. 일제 시대 그것도 감옥이라는 철저한 어둠으로 말이다. 그는 왜 하필이면 이 어둠을 가져와야 했던 것일까? 그래서 어쩌면 이 시대적 설정 자체가 거꾸로 그가 이 작품을 통해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아무리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라 해도 변화의 싹은 태동하며 바로 그 태동으로 인해 결국은 절망의 어둠마저 끝내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즉 앞서 말한 그 세 꼭지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가는 이정명의 소설들 중에서 이 소설은 '그 힘'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오고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잡초처럼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라도 잘 자라나는지 또한 한 번 자라나면 쉬이 제거되지 않고 궁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때까지 얼마나 질기게 견뎌가는지 그것을 확신에 찬 음성으로 들려주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소설에서 그 힘은 오로지 그 힘을 만들어내는 주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과 그의 뜻에 동조하는 학자들로 나름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체였고 '바람의 화원'에서는 예술하는 주체들로 그들 역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자들이었다. 그렇게 전작들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 자체를 하나의 수레 로 비유한다면, 앞에서 끌고 나가는 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 '별을 스치는 바람'이 보다 드러내려 하는 것은 거기가 아니다. 그 보다는 뒤... 그러니까 뒤에서 수레를 미는 기층 민중들에게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말해 그 힘을 궁극적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동력으로 만드는 민중적 차원으로 시야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별을 스치는 바람'이 가지는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이정명 작가의 드릴은 가장 깊은 곳까지 파내려 간 셈이다. 이를 위해 일제 치하를 시대적 배경으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약자의 자리에 서야 했던 시대를. 그리고 바로 그것은 은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가 바깥 사회에서 어떤 일을 했든지간에 '죄수'라는 단일한 신분 밖에 가질 수 없는 형무소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윤동주나 최치수를 비롯하여 조선 사람들은 바깥에서 그 무슨 일을 했던지 간에 일본인들에게 '악랄하고 교활한 조선인'으로만 불리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인들에게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배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선인'이라는 단일한 기표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얼른 생각하기엔 이러한 묘사는 우리가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건 아니다. 작가 이정명이 이런 묘사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일을 하고 있든 간에, 소설 속 후쿠오카 감옥에서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이든 자유주의자이든 민족주의자이든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였듯이, 지금의 우리들도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타고난 지연에 관계없이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 하나된 운명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그는 일부러 가장 어두운 시대로 들어가 그것도 가장 깊은 어둠의 장소라 할 수 있는 '형무소'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선택된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 자체에서 그가 보다 민중적 차원에서 그 힘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이 드러나는 셈이다.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그는 두 가지 장치를 아울러 첨가한다. 하나는 조선인들이 부르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어가 철저히 금지되고 그 어떤 조선인 죄수들도 책을 소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조선인들이 휴식시간 내내 책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나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소설이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 둘 모두 보통 사람들의 참여라는 점이다. 합창은 물론 '함께'라는 차원이 강조된 것임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탐정 역할을 맡고 있으며 결국엔 윤동주를 이해하게 되는 일본인 간수 와타나베 유이치는 윤동주에게서 일본 고관들이 참석한 앞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를 것이라는 말을 듣고 조선의 독립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노래를 불러서 그것이 장차 일으킬 파장을 도대체 어떻게 책임질 셈이냐고 묻는다. 거기에 윤동주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아. 내가 생각한 건 최고의 무대뿐이야." (P. 91)

 "이 노래는 남의 나라 형무소에 갇혀 있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가장 절절하게 표현해 줄거야. 조선인이든 유대인이든 일본인이든 이탈리아인이든 노래에 담긴 진심은 듣는 사람에게 분명히 전달될 수 있어" (P. 92)

 

 그에게 최고의 무대는 모두가 다 함께 그들의 진심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의 시가 조선인과 책에 대해 더없이 악랄했던 스기야마 도잔을 변화시켰듯이 일본의 고관들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하나가 아니라 함께가 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 민중적 차원으로의 확장은 바로 여기에 드러난다. 이는 다음 책의 보존에 이르면 더욱 적극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독방행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을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은 아니었어. 그들은 일주일 동안 최대한 많은 분량의 책 내용을 외웠어. 독방에서 나간 그들은 감방으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자신이 외운 책의 내용을 전달해 주었지. 책의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기억하고 한 사람이 기억할 수 없을 때에는 두 사람, 세 사람이 나누어 기억했지. 한 사람이 한 파트씩, 아니면 몇 페이지씩 나누어서 기억한거야. 짧은 시를 몇 편씩 외워서 시집 한 권을 완성하기도 했어.(P.173)

 

 이렇게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초래될 변화의 힘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보존되어 나간다. 이 설정이 보다 정교한 것은 이것이 그대로 윤동주와의 일대일 대면을 통해 변화하게 될 스기야마 도잔과 와타나베 유이치 각자와 일대일 대응관계를 이루며 그것의 보다 확장된 형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합창'은 피아노 조율사였던 스기야마 도잔의 확장된 형태이며 '책의 보존'은 헌책방 일을 하며 책벌레이기도 했던 와타나베 유이치의 확장된 형태라는 것이다. 이 둘이 각각 집단적 형태로 진화한다는 것이 이 소설이 무엇보다 그 변화를 이끌어내고 지속시키는 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그 바탕에 민중적 참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바로 이 측면이 이해되어야지만 왜 하필이면 와타나베 유이치라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 가해자였던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는지 그 까닭이 제대로 드러난다. 뿐만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시를 통한 변화와 민중의 참여를 역설하는 이 작품이 하필이면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났는지 또한 드러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윤동주가 검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이중의 의미를 지닌 교묘한 문장을 썼듯 바로 그러한 이중의 의미를 가진 소설이다. 즉 이 소설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윤동주 생애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지금 이 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설이다. 윤동주가 소설에서 시어가 삶의 비유임을 말했듯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세계 역시도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시대의 비유인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참여가 강조된 것이며 그래서 그 부분은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럼 먼저 와타나베 유이치로 들어가 본다. 그는 일본인이다. 하지만 그는 시를 사랑한다. 그에게 전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이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한다. 전쟁이 싫지만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다 그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윤동주를 만나서 그는 변한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생각한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시민들이 아니라 권력을 쥐고 있던 몇몇 미친놈들이었다. 누구도 거리를 활개 치는 그 미친 개들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때려죽이지도 않았다. 결국 그 미친개들이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이 전쟁에 죄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는 직접 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고 그렇기에 죄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막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가려는 자들의 음모를 알지도 못했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았거나 알고도 모른척 했던 것이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P.224)

 

 나는 감히 말하지만 바로 이 말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정명 작가가 우리 모두가 공동운명체임을 일깨우는 것도 변화를 가져오는 궁극적 힘이 바로 모두의 적극적 참여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와타나베 유이치의 깨달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이치 그는 고통스럽게 깨닫는다. 역사적 비극에는 단지 방관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비극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세상을 고통과 지옥으로 만드는 상황에서는 무관심 또한 죄악임을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 글을 쓸 때 이정명 작가가 청자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당연히 오늘의 우리였다고 생각된다. 사실 소설 속 후쿠오카의 세계는 그대로 지금 우리 세계로 옮겨 놓아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정명 작가는 아마도 그 동일성을 암시하기 위해서인 듯 후쿠오카 감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모를 첨가한다. 그런데 그 음모가 오늘날의 뭔가를 연상시키게 만든다. 그 음모로 인해 사람들에게 주로 일어나는 현상은 의식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기억을 잊고 생각을 잊으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는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제대로 된 진실을 감춰서 민중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를 막으려는 미디어 통제 그대로가 아닌가. 그 후쿠오카 형무소가 보다 강한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 조선인들의 의식과 생명을 좀먹었듯이 지금의 우리나라 또한 소수의 권력자들이 더 강해지기 위해서 우리의 의식과 생명을 좀먹고 있지 않나...  아니 그대로다. 소설 속 일본의 잔학한 행위들은 그대로 지금 권력자들이 하는 행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더구나 스포일러가 될까봐 말하지 못한 진짜 스기야마 도잔의 죽음에 대한 비밀마저 그렇다.

 

 이정명은 사실 지금 우리 시대와 그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검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중의 의미가 간직된 문장을 쓰던 윤동주의 모습은 바로 이 진실에 다다르기 위한 단서였던 셈이다. 그는 앞에서 인용한 와타나베 유이치의 말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처한,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어둠을 바꾸길 원한다면 무엇을 해야할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아니 작품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되새겨준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 소설은 그러한 변화는 참여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당신이 뭔가 바꾸기를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참여부터 하라는 것이다.

 어둠에 눈감지 말고 못 본척 말고 뭔가 이대로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책의 보존을 위해 조선인 죄수들이 몇 페이지씩 나누어 암기했듯이 그렇게 시대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다는 생각으로 뛰어들라는 것이다. 그 죄수 하나하나가 외운 양은 보잘 것 없었는지 모르지만 결국 모두가 참여하여 그토록 많은 책들을 보존할 수 있었듯이 우리가 바라는 변화 또한 그렇게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시에 대해서, 윤동주에 대해서 알려주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이 아로새긴 망막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 당신이라면

 지금 이 순간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소설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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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을 위하여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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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토 가나에의 'N을 위하여'는 이제야 소개되지만 사실 '야행관람차' 앞에 쓰여진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순서를 미리 알려두는 게 좋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이 작품이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 세계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전 '왕복서간'에 대해 글을 쓸 때 그녀의 작품이 점차 '고백'과는 정반대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었고 그 과도기에 속하는 작품이 '야행관람차'라고 밝힌 적이 있다. 오로지 타자의 제거에만 하던 주체가 타자가 짊어진 짐을 나누어 받으려고 한다는 게 보인다는 이유로...

 (보다 자세한 것은 여기를 참조 http://blog.aladin.co.kr/748481184/5718450 )

 

 하지만 사실 그 과도기로서의 시작은 '야행관람차'가 아니었다. 그 진정한 시작은 바로 이 소설 'N을 위하여'였다. 단적으로 'N을 위하여'는 '야행관람차'에서 보여주고 '왕복서간'에 이르러 완성되어진 그 변화에 있어 '발아'와도 같은 작품이다.

 

 

 

 책 날개를 보면 미나토 가나에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지금까지 저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그로 인해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이번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자기주장을 다소 억제하기로 했습니다.

 

- 출간에 즈음하여, 미나토 가나에의 말 중에서 -

 

 본편을 읽기전에 이 말 부터 읽었는데 그 때부터 이 소설이 '고백' '속죄' '소녀'로 이어진 흐름과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읽어보니 과연 달랐다. 고백과 똑같은 형식이지만 'N을 위하여'의 독백의 주체들은 '고백'의 독백 주체들과 명백하게 반대되는 것을 위해 말하고 있었다. '고백'은 그야말로 타자의 제거를 위한 '독(毒, POISON)백'이었지만 'N을 위하여'에서는 타자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독을 삼키는 독백이었다. 단적으로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아예 사랑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다.

 

  "그럼, 말이지, 스키시타에게 사랑이란 뭐지? 아니 바꿔 말하지 궁극의 사랑이란?"

  (...)

 "죄의 공유."

 스키시타가 중얼거렸다.

  (...)

 "... 공유란 것은 아무도 모르게 상대의 죄를 절반 짊어지는거야. 아무도. 그러니까 상대도 모르게 죄를 떠안고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                                                                               

(P. 154)

 

 사실 'N을 위하여'는 이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바로 이 말은 이후에 성취되어지는 가나에의 변화그 자체를 나타내는 정의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후의 작품들 자체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나타났던 '죄의 공유'가 '야행관람차'에서도 '왕복서간'에서도 내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야행관람차'에서는 살인죄를 가족과 이웃들이 나누어 짊어지고 '왕복서간'에서는 친구나 연인들이 짊어진다. 이렇게 내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나에가 궁극적 사랑의 모습으로 죄의 공유를 믿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 같은 변화가 왜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는 어쩌다 '죄'라는 것을 타자의 제거를 위한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궁극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통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이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대부분 살펴보는 것은 작품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다. 작가도 어차피 시대와 별개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고 독자들의 공감 또한 당시 시대적 상황과 불가분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N을 위하여'는 2010년에 나왔다. 2009년의 일본은 2008년 초래된 위기를 어느 정도 해결해 가는 양상이었으나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실업률은 역사 이래로 최고조에 달했고 극빈자들의 수 또한 200만명을 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어딜가나 절망과 곤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미나토 가나에가 보여준 변화는 어쩌면 거기에 공명한 것은 아니었을까?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웃들의 비극적인 삶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작품으로나마 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 배척과 심판 보다는 먼저 이해와 배려가 주어질 수 있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전과는 달리 자기 주장을 굽히고 먼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 'N을 위하여'을 보다 의미심장한 작품으로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소설을 주의깊게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소설에 미나코 가나에의 분신이라고 해도 좋을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 같은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가나에의 내면이 그대로 투영된 존재가 말이다.

 바로 그 존재가 초보 미스터리 작가로 나오는 '니시자키 마사토' 이다.

 

 그는 아직 정식 데뷔도 치르지 못한 무명 작가이지만 수 년간 백수로 지내면서도 작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데 그런 그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다. 그건 어릴 때 겪었던 학대 때문이었다. 그는 학대로 인한 고통의 이유를 찾으려 했고 바로 그 때문에 결국은 문학을 하게 되었다. 미나토 가나에는 그가 직접 쓴 작품까지 소설에서 보여준다. 그 때문에서 소설의 구성이 다소 산만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위험을 무릎쓰면서까지 가나에가 마사토의 소설을 그것도 두 편이나 인용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답은,

 흥미롭게도 두 편에 담긴 마사토 소설의 여정이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여정과 비슷하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작열하는 새'와 '낙원'에 이르는 여정이 그야말로 '고백'과 'N을 위하여'에 이르는 여정과 닮았다는 이야기이다. '작열하는 새'는 당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그린다. 거기엔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에, 오로지 가해자의 전적인 의사에만 달린 것이기에 더 공포스럽다. 때문에 당하는 이로서는 오로지 순응하는 것 밖에는 생존할 길이 없다. 이건 마사토 뿐만이 아니다. 여주인공 스키시타 역시 이 고통스런 과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벗어나는 것으로 앙갚음 하려고 한다. 마사토는 새가 되고 싶어하고 스키시타는 아버지가 지배하고 있는 섬을 벗어나려 한다. 이 벗어남은 바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존재가 버티고 있는 세계를 버림이니 그 벗어남 자체가 바로 타자의 배제에 다름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열하는 새'는 그대로 가나에의 데뷔작 '고백'과 닮았다. 사실 '고백'의 모든 이들 또한 자신을 얽매고 고통을 주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실 그들의 '살인'조차 알고보면 그들의 벗어남이 좌절되었을 때 찾아온다. 벗어남을 통한 타자의 제거가 불가능함으로 아예 그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이렇게 '작열하는 새'는 '고백'의 미나토 가나에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과거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즉 스키타시와 마사토는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다. 마사토는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문학이라는 소재를 택한다. 하지만 '작열하는 새'를 쓸때만 해도 마사토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행위와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한 쌍인 것일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 뒤늦게 이유를 늘어놓아 봐야 사실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동기다, 경위다, 이유다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p.247)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과거는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글을 썼던 것은 상상적으로나마 거기에 복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불을 지르면 중대한 범죄가 된다. 설령 사랑을 위해 지른 불이라도. 방화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폭력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광기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어리석은 행위라며 멸시받고, 매도당하고, 존재했던 사랑마저 부정되고 만다. 하지만 문학의 세계에서는 이런 것들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평가된다. 과거의 인생에서 사랑을 찾아내고 싶으면 사실을 문학이라고 승화시키면 된다. 그러려면 각색이 필요하다.(P. 260)

 

 그렇게 애초엔 타자의 제거가 초점이었다. 하지만 '작열하는 새'를 쓰면서 그는 변한다. 글 자체가 자신을 객관화하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객관적인 자아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글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됨을 뜻한다. 즉 글을 읽고 쓴다는 것 자체가 타자에게 자신을 여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 이야기를 쓰면서 작가는 여러 인물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그와 하나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덕분에 그는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게 된다.

 

 마침내 나는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 쓰고 나서 그런 예감과 보람을 느낀 작품, 그것이 바로 '작열하는 새'였다. (P. 261)

 

 그래서 그에 뒤이은 두 번째의 소설 '낙인'은 완전히 변한다. 그건 치유의 이야기이고 이것은 바로 '작열하는 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열하는 새'와 '낙인'이 보여주는 궤적은 그대로 '고백'과 'N을 위하여'가 이루는 궤적과 같다.  이 말은 마사토에게 일어난 것과 동일한 것이 바로 미나토 가나에 자신에게도 일어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과거에 있었던 어떤 트라우마 때문에 그녀는 '고백'이란 소설을 쓰게 되었지만 타자의 제거에만 맞추어진 '고백', '속죄', '소녀'를 쓰다가 그 과정을 통해 어느 순간 그녀 역시 시선을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 또한 아울러 보게 되었고 그것이 2009년 이래로 범람하는 이웃들의 고통들에 눈을 돌리게 하여 결국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N을 위하여'를 쓰게 되었다고 말이다.

 

 가나에는 자신의 그러한 변신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마사토가 글만이 아니라 실제 행위까지 하게 함으로써(스포일러상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강조한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러한 가나에의 결심은 '왕복서간'에 이르기까지 내내 지속되고 있다.

 

 지금에서야 만나는 'N을 위하여'는 그런 소설이었다.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를 아예 자신의 분신까지 만들어 넣어서 친절하게 말해주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얘기하자면 약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변화를 설명해 주려는 것에 대한 과도한 친절 때문에 구성이 다소 산만해진다는 점 뿐만아니라 주인공들이 왜 그리해야 했는지 그 동기도 잘 와닿지 않는다. 다소 무리가 있는 전개란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데 개인적으론 오히려 그래서 미나토 가나에의 진심이 더 잘 드러나게 된 것 같다. 무언가 꼭 전할 말이 있으면 사실 그 때문에 무리를 하게 되는 법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실 데뷔작 제목인 '고백'은 바로 이 작품에 쓰여져야 했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지금 미나토 가나에가 작가로서 어떻게 시작했고 글을 쓰면서 어떻게 변했으며 그래서 이제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 그 내면에 일어났던 풍경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말그대로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과도 같은 작품이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에 작가 자체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정말 꼭 읽어야 될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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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아멘 아멘 - 지구가 혼자 돌던 날들의 기억
애비 셰어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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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나이 때 정말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시작은 아마도 추석 때 성묘를 다녀와서 일 것이다. 무덤을 보면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 같다. 아무튼 다녀와서 죽음에 대해 나름 진지하게 상상했었다. 죽음이 영원한 결별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서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영원히. 그런데 어떻게 영원히 나로 있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니까 지금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생각을 하고 있는 이 나라는 것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 과연 내가 나를 생각하지 않은 채 영원히 있는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나는 그러한 것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는 확실히 좀 이상한 아이였던 것 같다. 결별로 인한 슬픔 보다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상태로 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그런 것들이나 상상해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죽음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이성으로 헤아리기 힘든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다. 존재 자체가 삶의 절대적 외부에 자리잡고 있기에 우리 사유에 있어 언제나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영원히 불가해한 것이기에 그 반응에 있어서도 천차만별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자끄 드와이용 감독의 영화, '뽀네트'가 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4살짜리 여자 아이다. 감독은 주인공을 연기하는 여자 아이의 실제 나이 또한 꼭 네 살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연구 결과 5세 이상이 되면 죽음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시각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문명에 포획된 의미의 죽음이 아닌, 언어 이전의, 사회적 의미 이전의, 죽음에 대한 원초적 시선을 담으려 한 것이다. 바로 거기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떠난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 아이는 당연히 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그 상실의 '영원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는 엄마가 돌아올 것을 굳게 믿으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결국 엄마의 무덤으로 몰래 가서 파헤치기까지 한다. 아이에게 죽음은 인식할 수 없는 무한이 입을 벌린 것과 같았다. 그것은 아이가 절대 이해란 이름으로 포획할 수 없는 존재였으며 그래서 레비나스가 말한 대로 '타자란 바로 무한성'을 입증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죽음이란 '뽀네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이 있음을 알게하는 것이었다. 내가 절대도 넘어설 수 없는 경계 저 편에서 내 한계를 깨닫게 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죽음은 대부분 우리에게 부정의 존재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한계를 깨닫게 하고 내 자아의 영역을 위축시키는 존재이기에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지키고 싶듯이 죽음을 밀어내고 설사 죽음과 맞딱드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강한 반작용으로 오히려 더욱 자신의 자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영원한 상실을 열어보인 무한의 틈을 의식적으로 없는 것 처럼 메우려든다는 것이다. 마치 죽음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네델란드의 세계적 석학, C. A. 반 퍼슨은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에서 죽음에 대한 서양의 태도를 기준으로 역사적으로 세 단계로 나눈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현대를 죽음을 망각하는 태도로 정의했다.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1세기 전만 하더라도 다반사로 있었던 일이지만 이제 죽음은 교묘하게 은폐되고 있다. 겉으로는 죽음과 애도를 감추려는 사회 규칙에 의해, 안으로는 진정제나 흥분제의 사용으로 인해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되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이웃이 함께 슬퍼하는 일도 이제 없어졌거니와 상복을 입는 일도 이제 드물게 되었다. 진정제나 흥분제의 사용으로 주의 사람은 물론이고 죽어가는 당사자 조차도 죽음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며 따라서 죽음도 '소비 가능한 것(소모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C.A 반 퍼슨,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 P. 213)

 

 현대에 이르러 유독 이렇게 의도적으로 죽음을 은폐시키고 망각하려 드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무래도 근대에 이르러 태어난 '나'라는 자아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확장되어 가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 점점 강해져만 가는 자아에게 있어 유일하게 '한계'라는 상처를 입히는 절대적 타자인 죽음이기에 은폐와 망각을 통해 상상적으로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는 고전 추리 소설이라면 흔히 나오는  탐정의 마지막 추리 쇼와도 일맥상통한다는 게 흥미롭다. 거기서 탐정은 꼭 예전에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세부에 있어서까지 정확하게 복원한다. 그것은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같다. 아니,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추리 소설은 에드가 알란 포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과 더불어 태어난 근대의 산물이고 그런 추리 소설에 있어 범죄란 늘 진보를 향해 나아간다고 설파하는 근대성에게 상처를 입히는 얼룩 같은 존재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즉 추리 소설의 시간 되돌리기 추리쇼는 말하자면 지나간 시간을 그대로 복원해 그 상처가 마치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드는 행위에 다름아닌 것이다. 한 마디로 은폐와 망각인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범죄에 대해 근대가 보여주는 태도가 동일하다는 것은 근대에 의해 태어난 자아라는 주체성이 타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척도가 된다. 즉 은폐와 망각이라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이 바로 기본적인 태도라는 사실이다.

 

 즉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대면함에 있어 중요해지는 것은 '나라는 '자아'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이다. 그 절대적 타자가 열어보이는 무한 앞에서,  나의 한계를 끊임없이 일깨우고 그래서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끔 강요하는 무한 앞에서 어떻게 내게 존재하는 절대적 한계를 무시하고 나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것인가가 더없이 중요한 물음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대로 집착이요 그래서 하나의 강박이다. 그것도 내 쾌락의 원인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벌이는 것이기에 프로이트의 분류에 따르면 도착증적 강박이다.

 

 정확히 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애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 이라는 소설이다.

   

 

 

 

 이는 정확한 의미에서 소설은 아니다.

 물론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여기에 실려있는 내용들은 작가 애비 셰어의 실제 경험과 내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의 고백록이라고 불러야 한다. 애비 셰어는 자신이 사랑했던 고모와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 이 소설에서 정직하게 밝힌다. 그것은 일종의 강박증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불행이 바로 자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강박증이다. 제목의 '아멘 아멘 아멘'은 현실속에서 그녀가 불행한 사건을 만날 때마다 올리는 기도이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늘 빌며 그것을 위해 노력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가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되므로 행동을 조심하는 것. 또는 길가의 날카로운 쇠붙이나 유리 따위를 줍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행여나 행인들을 다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 강박적으로 노력한다. 오로지 세상이 불행없이 이대로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데 이러한 그녀의 강박증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죽음이 가져온 영원한 상실, 그 변화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죽음에 대한 반응은 무엇보다 자아의 보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녀의 강박적인 노력들 역시도 그와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녀가 세상에 불행이 없기를 바라며 하는 모든 노력들은 사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싶다는 그런 의미에 다름아니다. 그러한 현재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겠다는 열망은 그대로 변화에 대한 거부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있어 일어났던 진정한 변화는 모두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애비 셰어의 그러한 강박적인 노력은 사실 그녀에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 아버지의 죽음을 지우고 그것이 없었을 때의 세계를 되돌리려는 노력에 다름아닌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죽음이 각인시키는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애비 셰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리스트의 의미다. 그녀는 여러가지 리스트를 만드는데 그러한 계보의 작성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증명했듯이 근대에 이르러 탄생한 것이었다. 즉 이는 자기 세계의 확고한 보존을 드러내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죽음이 열어보인 자기를 삼키려 드는 무한 앞에서 강박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분이라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소설 속에서 애비 셰어는 정말 많은 죄책감을 보여준다. 그녀는 세상에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에 다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죄책감은 자신과 타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대로 애비 셰어 역시 타자에게로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애비 셰어의 죄책감이 일종의 도착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녀는 왜 세상 모든 불행한 일에 끊임없이 강박적일 정도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가. 이 질문은 죄책감의 진짜 목적을 묻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애비 셰어에게서 혹시 지젝이 '까다로운 주체'에서 말했던 중세의 수사가 신자들에게 금욕적일 것을 요구하여 유혹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유혹에 대한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집요하게 떠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나? 과도한 선이 오히려 과도한 악을 창조하는 모순을... 푸코는 권력 자체가 저항을 생산한다고 말하고 라캉은 금기 자체가 욕망을 낳는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런 말을 한다.

 

  법 자체야 말로 죄의 영역이다. 법을 위반하려는 사악한 충동들의 영역을 열어놓고 지탱하는 곳이며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도착적이며 병적인 만족감을 얻게 만든다. 그리하여 법의 지배의 궁극적 결과는 잘 알려져 있는 대로 그 모든 초자아의 비틀림과 역설들로 이루어진다.: 나는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한에서만 즐길 수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자기-반성적 전회를 통해 죄책감 속에서 쾌감을 취한다는 의미이며 사악한 생각을 하는 나를 응징하는 속에서만 향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P. 244)

 

 

 

 

 애비 셰어가 느끼는 죄책감의 본질은 이 말대로다. 사실 그것은 그녀의 은밀한 쾌락 추구 행위인 것이다. 그녀는 그 죄책감으로 자신을 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쾌락을 공급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은 쾌락을 위한 하나의 제스쳐였고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강박은 도착증과 다를바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도착증이 애비 셰어만의 독특한 반응이 아니라 사실은 근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주체성이 가지는 근본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도착증과 히스테리를 구분한 적이 있다. 거기서 도착증은 히스테리와 달리 전혀 자신과 세계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게 특징이었다. 당연하다. 도착증은 자신의 쾌락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세계마저도 그 쾌락을 위해 능동적으로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새디스트를 생각하면 된다. 그는 자신의 쾌락이 피학에서 오는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 앞에서 그 피학으로 유도하는 연기를 한다. 바로 이것이 도착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타자에게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자와 세계마저 마음대로 조작해 가는 것. 이런 의미에서 애비 셰어의 모습은 그야말로 죽음에 대한 현대의 반응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으로 죽음이 열어보인, 삶을 궁극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그 변화를 받아들임이야 말로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의 모습인 것이다. 소설은 다행히 사랑을 매개로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녀가 진정으로 변화를 받아들일 때 진정한 사랑 또한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사랑이란 전적으로 나를 내어주는 것, 그렇게 타자에게 나를 맡김이다. 후반에 그녀는 서서히 강박적인 것이 줄어듦과 동시에 타인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을 병행시킨다. 그렇게 강박으로 집요하게 보존하려 했던 자아에 대한 포기가 바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통로임을 암시라도 하듯이 말이다.

 

 소설 초반에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삶과 죽음에는 질서가 있다.

 나쁜 짓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진짜 나쁜 짓을 하면 죽는다.(P. 27)

 

 하지만 마지막에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내 나머지 이야기는 불확실성으로 시작한다.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시작한다. (P. 461)

 

 말하자면, 이런 변화가 바로 애비 셰어의 고백이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은 노래로 끝난다. 고정적일 수 없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인. 기계적으로 복제되는 것 말고 세상에 같은 노래는 있을 수 없다. 노래는 혼자가 같은 노래를 부르나 모두가 같은 노래를 부르나 다 다르다. 왜냐하면 악보에 표시된 음은 다만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음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나와 세계가 하나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우연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음이 상징하는 것, 이 노래 자체가 상징하는 주체가 근대이후로 수많은 비극을 잉태시킨  도착증적인 주체를 극복할 하나의 대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주체가 늦지 않고 '제 때에 도착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애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은 그 기도의 공감을 위한 진솔하면서도 설득력있는 여정이라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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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8-1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비 셰어는 변화를 했고 그럼으로써 타인을 받아들이게 되었나보네요.
타인에 대한 신뢰는, 즉 자신을 내맡긴다는 진정한 행위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세계와 분리된 자아 형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은 항상, 실존적 한계로써 나는 혼자라는 사실과 함께 사람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런 한계가 있기에, 삶이 소중한게 아닐까 싶어져요. 제가 얼마 전에 유사한 문제로 고민할 때, 교수님이 켄 윌버의 책을 추천해주셔서 구입하고 아직 못 읽었어요....

만일 말이죠, 우리 사회가, 처음부터 세상은 불확실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이 거의 항상 발생한다는 분위기를 가지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발전했다면, 아마 발전 속도는 늦지만 실존적 고독은 훨씬 적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제맘대로 생각을 해본답니다.

참 좋은 글이세요, 언제나 그렇듯이...
헤르메스님, 오랜만이신데, 건강하게 잘 계시죠? ^^

추신.
저는 뽀네트를 고등학교 때 문고판으로 읽었는데 읽다가 미치는줄 알았습니다.

ICE-9 2012-08-24 01:00   좋아요 0 | URL
아, 닉네임이 바뀌셨군요.
와!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공부는 원하시는 만큼 잘 되고 계신지 정말 궁금합니다. '불확실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이 거의 항상 발생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발전했다면 실존적 고독은 훨씬 적어졌지 않았을까 하는 말씀에는 저 역시 크게 공감되네요. 한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질라 같은 것들이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었죠. 그런데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뭔가를 해 놓으면 갑자기 고질라가 나타나 짓밟고 지나가고 악착같이 쌓아놓으면 고질라의 불길 한번에 다 타버리고... 그렇게 시지프스와 똑같이 주기적으로 허무를 안을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정말 불행해지는 것일까 하고 말이죠. 어쩌면 제 리뷰들은 바로 거기의 연장선상인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 고질라가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고질라만큼 압도적으로 모두에게 체험되지 않기 때문이겠죠. 죽음이라는 절대적 타자의 체험이 오로지 개인적인 문제로만 인식되지 않고 중세처럼 좀 더 사회적인 체험으로 자리잡으면 우리의 생각 역시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그렇다고 중국과 우리 나라의 장례문화를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죽은 자를 기리기 보다는 산자들의 눈을 더 많이 고려하는 의식이니까요. 아마도 중국과 우리나라가 씨족 마을 중심으로 발전해서 자리잡게된 의식이겠죠. 좀 더 죽음을 헤아리고 그것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냥 단순히 이런 생각이 드네요.^ ^; 그런데 저는 뽀내뜨 영화로만 봤는데 문고판으로 나왔던 모양이네요. 처음 알았아요^ ^
 
과학편집광의 비밀서재
릭 바이어 지음, 오공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읽는 것도 먹는 것과 같다.

 어떤 책들은 지루해서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듯 읽게 되지만 또 어떤 책들은 너무도 재밌어서 숟가락으로 떠 먹는 것도 성에 안차서 숫제 주걱으로 퍼먹듯 읽게 된다.

 

 역사 속 발견과 발명의 순간에 일어났던 자잘한 일들을 소상히 알려주는 책,

 릭 베이어의 '과학편집광의 비밀서재'는 내게 있어 후자 쪽에 속했다.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연금술과 성경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서 그 자리에서 보너스 페이지의 마지막 유명인들의 특허까지 다 읽어버렸다. 그만큼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도록 재밌게 쓰여진 책이기도 하지만 마치 알사탕을 한 개씩 까먹듯 한 알 한 알 새롭게 드러나는 과학적 발견 발명에 얽힌 사연들이 달콤한 흥미로움으로 자꾸만 뒷 얘기들을 읽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새삼 릭 베이어가 다큐멘터리쪽 뿐만아니라 글에도 무척 재능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릭 베이어는 역사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법한 작가다.

 

 

 

릭 베이어의 모습

 

 

 무엇보다도 '라이트 형제의 도전'이 있고 각 종 상을 수상하여 더욱 그를 유명하게 만든 미국 혁명이 일어난 그 첫 순간을 다룬 '혁명이 시작된 날'이라는 다큐멘터리도 있으니까. 그 중 특이한 것으로 'Timelab 200'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건 역사 속에 일어난 200가지 사건들을 모아 만든 다큐멘터리로 지금 말하고 있는 책인 '과학편집광의 비밀 서재'는 바로 이것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릭 베이어는 그 'Timelab 200'을 기초로 하여 죽 분야별로 계속 써오고 있는데 그렇게 2003년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알아두면 좋을만한 놀라운 이야기를 묶어 'The Greatest Stories Never Told'를 2003년에 썼었고 그 뒤 2005년엔 잘 알려지지 않은 대통령들의 놀라운 일화를 다룬 'The Greatest Presidential Stories Never Told'를 썼었으며 바로 그 뒤이어 나온 것이 2007년 'The Greatest Science Stories Never Told', 즉 '과학 편집광의 비밀 서재' 이 책인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과학 이야기가 '과학 편집광의 비밀 서재'라는 제목으로 바뀐 내막을 잘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제목 그대로 이 책엔 모두 100개의 잘 들어보지 못했던 놀라운 과학 이야기가 실려 있다.

 

 

 

 

워낙에 역사 지식에 있어 해박하기로 유명한 작가인데다가 독자의 관심을 잡아 두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 또한 탁월하기에 100여 가지의 이야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또한 각 이야기마다 새로이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 지적 만족 또한 채워준다. 아마도 이 책이 아니었다면 여성들이 세상을 지배해야 이 사회가 멸망당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러한 젊은 여성들을 대변할 강력한 영웅 캐릭터로 원더우먼을 창조한 사람이 바로 최초로 거짓말 테스트 방법을 만들어 그 때문에 거짓말 탐지기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마스턴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윌리엄 마스턴이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창조한 최초의 여성 슈퍼 히어로 원더우먼.

사진은 영원한 원더우먼의 히로인인 린다 카터가 TV시리즈에서 원더우먼으로 변신한 모습.

 

 

 또한 최초의 기계식 컴퓨터가 사실은 에디슨의 백열전구 보다 50년 앞서 발명되었다든지 최초의 인터넷은 무려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일어났던 해인 1969년에 이미 비밀리에 탄생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또한 청진기는 사실 신사 체면으로 여자 가슴에 바로 귀를 대로 들을 수가 없어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도 지금은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대 관람차가 사실은 1893년 컬럼비아 박람회 때 파리 박람회 때 만들어진 에펠탑을 능가하기 위해서 의욕적으로 만들어진 전시물이었다는 사실 또한 몰랐을 것이다. '과학편집광의 비밀 서재'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정확한 제목이 된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과학에 편집광적이지 않았다면 찾아낼 수 없었을 사실들로 가득하니까 말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그런 즐거움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뷔페에 갔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만 가득 나와있는 기쁨을 느낄만한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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