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발 (일반판)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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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소설이라고 하니 흥미로웠다. 옛날도 아니고, 90년대의 북한 실상을 보여준다는데, 현재 북한의 모습을 그 내부에 있는 목소리로 들여다 보고 싶었던 내게는 좋은 기회가 되어줄 것 같았다. 저자 '반디'는 필명으로(북한 사회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책이니 실명을 안 쓰는 것은 당연하겠지.), 책의 마지막에 있는 '출간에 부쳐'라는 글에 따르면, 1950년 태생의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소속 작가라고 한다. '고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시점에 시작된 소위 고난의 행군으로 자신과 인연을 맺고 살아왔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고, 먹고 살기 위해 고향땅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지금껏 살아왔던 북한 사회(p. 270)'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지게 된 작가가 폐쇄 정책으로 바깥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북한 사회의 참된 모습에 대해 '고발'할 생각으로 89년부터 96년 사이 완성한 7개의 단편을 담고 있다. 흥미가 동하여 읽긴 했지만 사실 별 기대를 하진 않았다. 고발 문학은 목적성이 분명한 글이라 그 선명한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문학적 가치와 재미를 상실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원고에 얽힌 사연도, 제목도 여기의 소설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얼른 보통의 고발 문학들이 거치는 궤적을 그대로 따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탈북기'까진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두 번째 단편 '유령의 도시'에서 그런 생각은 보기 좋게 깨어지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7개의 단편 중, 이 '유령의 도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전체주의가 어떻게 하나의 사회를 장악하고 개인들을 유령처럼 존재감 없는 것으로 만드는지 카프카적인 색채로 참으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평양. 국경일을 하루 앞두고 평양은 행사 준비로 한창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다. 무려 100만의 시민이 참여하는 시위 행사다. 이번 시위는 특히 전세계에 선전용으로 방송되는 것이라 정권의 시민 동원과 준비는 한층 더 가열차고 집요하다. 이런 상황이 주인공 한경희는 여간 괴롭지 않다. 자신의 아이 때문이다. 아이가 김일성 사진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며 크게 울어대는 것이다. 하필 자신이 참여하는 궐기대회 장소가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내려다 보고 있는 곳이라 아이를 도저히 데려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픈 애를 집에 혼자 둘 수도 없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한경희는 행사에 빠질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사정이 있어도 또 그녀가 공산주의 항쟁에 희생당한 이의 유가족이라는 신분으로 신변이 철저히 보호된다고 해도 북한의 전체주의는 그녀를 곱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하필이면 집의 창문에 김일성의 초상화가 보여서 아이 때문에 커튼을 쳐 놓았더니 이내 집에 커튼이 쳐져 있는지, 안 쳐져 있는지 관리하는(평양의 모든 집은 김일성 수령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김일성 초상화가 잘 보이도록 창문의 커튼을 내려서는 안 된다.) '가두 비서'가 찾아와 커튼을 걷으라고 닦달한다. 한경희는 할 수 없이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늦게 들어온 남편은 왜 그런 사실을 알렸느냐고 원망한다. 벌써 당간부인 남편 상관에게 그 말이 들어가 남편이 엄중한 경고를 받았던 것이다. '유령의 도시'는 유령처럼 아무런 존재감이 없게 되어버린 전체주의 안에서의 개인을 다양한 문학적 장치를 통해 신랄하게 보여준다. 아이는 마르크스를 괴물 '어비'로 여겨 우는데, 나중에 한경희는 평양이라는 도시 전체가 이미 '어비'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보게 된다.


 에구머니나! 저게 뭐지?... 두 고층 아파트 지붕을 양다리고 디디고 호통치는 털이 북실북실한 저 괴물 같은 것이!... 옳아! 저게 바로 '어비'로구나!

 한경희는 넋이 나가도록 질겁하며 어디로인가 냅다 뛴다. 그런데 어비가 디디고 선 아파트의 벌집처럼 총총한 창문마다 오종종 긴장하며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모두 토끼들이 아닌가! 아하, 저게 바로 남편이 걸핏하면 외우곤 하던 토영삼굴의 그 토끼들이구나. 한데 이상한 것은 한경희 자신도 어느새 토영삼굴에 뛰어들어 앉아 있는 것이었다.(p. 96)


  창문이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곳이 아니라 오직 체제 유지를 위한 감시의 구멍이 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그저 겁먹은 토끼일 뿐이다. 살던 굴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죽지 않으려면 '어비'의 눈 밖에 나지 않아야 한다. 그 '어비'는 아주 조금의 흠도 용납하지 않고 거역에 따른 처벌 역시 가차 없다. '탈북기'에서 일철이 가족들 전부를 데리고 탈북을 결심하게 된 건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적대군중'이란 신분 때문이었는데, 그런 신분이 붙게 된 연유는 너무나 사소했다. 아버지가 당에서 받은 한 파장의 '랭상모(벼농사를 위해 심는 모)'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까지 온갖 불이익을 받게 되니 일철은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디는 '탈북기'와 '유령의 도시'처럼 전체주의의 희생자로 주로 '가족'을 놓는다. 모든 작품에서 전체주의는 가족을 파괴시키는 주범으로 등장한다. 김일성 행차라는 '1호 행사' 때문에 통행이 금지되어 강 하나만 건너면 되는 지척에 두고도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아들의 이야기(지척만리)나, 역시 '1호 행사'로 인해 역이 폐쇄되어 그로 인한 혼잡 탓에 부상당한 가족의 이야기(복마전), 그리고 공장의 할당량을 채우느라 아내가 아궁이에 쓸 장작 좀 구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결국 재떨이를 던져 아내를 내쫓고 마는 한 노인의 이야기(준마의 일생)가 대표적이다. 더구나 그 눈이 '어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비' 아래서 지배받고 있는 모든 이들의 눈 또한 '어비'의 눈이라, 그 상호 감시 때문에 겁먹은 토끼들은 더욱 체제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각본에 따른 정확한 연기는 개인이 전체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몸짓이다. 단편 '무대'는 북한 사회 자체가 하나의 무대이며, 자신들은 그저 체제가 원하는 연기를 하고 살 뿐이라는 것을 절망 속에서 고백한다. 이 모든 단편들에 나오는 주역들은 하나같이 한 평생 체제를 믿고 그것에 헌신해 온 인물들이나 그것을 계기로 그들은 체제가 '빨간 버섯'과 같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경희가 '어비'를 보았던 것과 똑같이.


 "왜 자신해서 벽돌집 시녀가 됐던가 말야!"

 "간판에 속아서였지. 나처럼. 속엔 독재의 칼을 품고도 겉으로만 평등이요, 민주주의요, 역사의 주인이요, 지상낙원이요 하는 허울 좋은 그 간판에 속아서 말야."

 "맞네. 세상 만물은 독한 것일수록 고운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법이네."

 "그래, 독버섯처럼 말이지? 독버섯처럼!" ('빨간 버섯', p. 261 ~ 262)


 '고발'은 한 마디로 북한 사회라는 단일한 차원을 넘어, 전체주의가 얼마나 개인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겁먹은 토끼로 만들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기 때문에 박근혜나 김기춘 같은 존재들이 전체주의를 꿈꾸는 지도 모른다. 그들이 만들었던 '블랙리스트'야 말로 '어비의 눈'이 아니던가! '계엄령을 선포하라!'나 '촛불 시민 총살하라!'는 팻말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들고 다니는 '태극기 집회'의 사람들을 보노라면, '고발'은 '우린 북한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하고 읽어야 할 소설이 아니라 '이러다 우리도 이렇게 될 지 몰라' 하는 무서운 경고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혹시 고운 허울만 뒤집어 쓴 독버섯은 아닌지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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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무기 - 이응준 이설집
이응준 지음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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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응준. 잘 모르는 작가다. 고작 그의 소설 두 권만 읽었으니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소설로 만나 본 그는 문장을 참 잘 쓰는 작가였다. 왜 어떤 글을 읽으면 글 쓰는 솜씨를 훔치고 싶은 작가가 있지 않은가? 솔직히 그런 작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번에 나온 그의 책, '영혼의 무기'를 보고 알게 되었다. 요컨대, 이런 글을 통해서다.


 요즘은 누구든지 개인 미디어에 실시간으로 글을 올려버리는 가공할 자신감과 광기에 가까운 습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글을 쓰는 능력을 함양하고자 하는 이라면 아직은 미숙한 자신의 글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진정한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과거 우리의 작가들은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글이 발표되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그리고 대중은 그러한 작가정신을 흠모함으로써 자신의 소박한 문장을 되돌아볼 줄 아는 아름다운 교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작가들의 글은 한낱 철지난 상품이 돼버리고 그런 작가들을 자신의 분신보다 열등하게 여기는 대중의 문장은 변기 모양의 흉기다.(...) 글이 그 내용과 형태의 가치를 담보할 때까지 스스로 감추고 기다리는 태도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기법일진대 이 당연한 사실을 작가와 대중이 모를 때 그 사회는 언어의 무간지옥 속에 갇힌다.(p. 201 ~ 202)


 그는 쉽게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의 글을 세상에 내보는 것을 두려워 하며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된 글로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자였다. 얼른 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도자기 만드는 장인이 떠올랐다. 설령 단 한 개의 도자기도 세상으로 내보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격이 되지 않으면 모조리 깨버리는 장인. 이응준에게 글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쓴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에서 언뜻 그런 것이 감지된다. 그에게 있어 글은 그냥 글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 전부를 걸어야 할 지도 모를, 영적인 그 무엇이다.


 필사로 문장이 얻어진다는 것은 철저한 허상이다. 문장은 영적인 물질이다. 그것은 반 이상이 타고난다. 또 문장을 못 쓴다고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거칠고 아귀도 맞지 않는 문장을 쓰면서도 독특한 세계관으로 이름을 날린 작가들은 많다. 그러나 그들이 아름다운 문장의 소설가라는 말을 듣지는 못할뿐더러 문장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소설의 맨 처음이기는 하다. 더더욱 필사를 멀리 해야 하는 이유에 다름 아니다. 작가가 되려면 일단은 마음에 새겨진 것들을 글로 옮겨야 한다. 그것이 비록 누구의 영향을 받아 싹을 틔웠든 간에, 결국에는 작가 나름의 해석과 정신이 담긴 글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필사를 통해 작가가 됐다고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들 무슨 대단한 고행 중에 문학의 본령을 터득한 줄로 아는데, 알고 보면 그들의 글을 문학으로 승격시킨 요소는 무식한 필사가 아니라, 하다 못해 필사까지 감행하게 한 열정과 노력이었을 것이다.(p. 229)


 '영혼의 무기'를 읽다보면 그가 굉장히 종교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글은 그런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번제로 드리는 기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 말이나 막 할 때 눈을 뜨고 있는 우리는 눈을 감고서 기도한다. 세상은 살인적인 속도에 온갖 현란한 치장과 야비한 선전 들을 실어서 보여준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간이라는 상처는 참혹해지고 삶은 중심을 잃지 않았던가. 나를 보고 사랑한다고 하는 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듣고 뭔가를 깨달은 그 사람의 영혼을 믿는다.(p. 27)


 그것이 작가로써 가지는 세상과 대중에 대한 의무이기에. 쉽게 말하자면, 진정성. 그랬기에 그는 설사 자신의 문단 생활이 망쳐지더라도 신경숙의 표절에 대해 '침묵의 공범'이 되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내부고발자'가 되었을 것이다.


 신경숙은 한국문학의 당대사 안에서 처세의 달인인 평론가들로부터 상전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으며 동인문학상의 종신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등등'의 요인들로 인해 문단 최고의 권력이기도 하다. 그러한 신경숙이기에 신경숙이 저지른 표절이 이른바 순수문학에 대해서는 순진할 수밖에 없는 대중, 특히 한 사람의 작가만큼이나 그 개개인이 소중하기 그지없는 한국문학의 애독자들과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가 풍전등화인 한국문학의 본령에 입힌 상처는 그 어떤 뼈아픈 후회보다 더 참담한 것이다.(p. 389)


 '영혼의 무기'는 이런 이응준의 글들을 담고 있다. 시인으로 등단하여 소설가를 겸하는 그가, 시와 소설로 발표하지 않은 글을 다양하게 담고 있는 것이다. 문학적 장치로 여과되지 않은 것이라 더욱 자신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글을. 작가는 스스로 '이설(異說)집'이라 이름 붙였다.



 이설(異說). 그것은 왼손잡이와 같다. (너무 서툰 비유라 미안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계속해 보련다.) 다들 오른손으로 하라고 강요하지만 결코 굽히지 않는 왼손잡이. 당당히 왼손을 들고 오른손잡이가 보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을 외치는 왼손잡이. 이 책에 담긴 이설(異說)의 형상이다. 그것은 듣기에 편치 않은 말이다. 고개를 외로 꼬고, 삐딱한 시선으로 면전에서 대놓고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달라' 하는 말이니까. 실제로 불편한 글이 있다. 보수와 진보 양 쪽의 적대적이며 편협한 태도들을 공박하는 글을 읽노라면 팔짱만 끼고 말만 앞서는 양비론자 같기도 하고 혹은 잔혹한 괴물에게도 어느 정도 인간성이 있을 것이라 순진하게 기대하고 있는 이상주의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도중에 책을 던지지 않고 끝가지 읽게 되는 것은 설령 그런 글이라 하더라도 그 바탕에서 어떤 아집이나 타산 같은 것이 아니라 '나도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 우리 같이 고민해 보자.' 하는 식의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맞다. 그의 이설(異說)은 종착지가 없다. 누구나 종착지로 생각하는 곳에서 홀연히 나타나서는 '아직 우리는 더 걸어야 한다'고 말하는 길과 같다. 온전한 이해를 위한 부단한 회의(懷疑). 그것이 바로 그의 이설(異說)이다.


 인간에 대한 회의(懷疑)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p. 198)


 그러므로 '영혼의 무기'는 두 가지 점에서 이롭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작가 이응준의 영혼이 가진 전체적인 형상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해답 같은 것은 나와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해 평소 잘 생각해 보지 못했던 방향에서 전혀 새로운 쪽을 가리키며 진행되는 사유의 경로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아주 흥미로운 여정이었다. 그가 보여주는 색다른 풍경은 흥미로웠고,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은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무려 831 페이지의 책으로, 책 자체가 무기가 되는 책이지만 지루해서 하품이 나거나 난해해서 건너뛰는 곳은 없었다. 알뜰하게 읽게 되고 살뜰하게 다가오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하나는 확실하다. 이응준 작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작가는 그것 역시 회의(懷疑)해야 한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그의 반려견 '토토'에게 바쳐졌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모양이다(정확히는 2016년 7월 1일). '토토'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회의(懷疑)가 실은 좀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걸 드러낸다. 어떤 존재든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존재가 얇은 평면이 아니라, 저마다 살면서 감내해 온 과정이 있는 입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타자에 대한 존중이 먼저고,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바로 그런 것을 위한 회의(懷疑)이기 때문이다. 그런 눈을 가진 그이기에, 인간과 동물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나같이 묵직한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존재들이므로.


 세상의 혼돈 앞에서는 숨이 막히듯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그 혼돈을 견뎌내느라 날이 갈수록 강퍅해지고 잔인해지고 사나워지는 사람들 앞에서 다름 아닌 나 자신을 본다. 만약 공부라는 것이 있다면, 공부란 그 반대편으로 걸어가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이것이 공부의 시작이거나 공부의 전체가 될 수는 없겠지. 그러나 공부의 중간 점검 정도는 될 것이다. 그릇된 공부는 때려치워야 한다. (2016년 8월 7일 / p. 711)


 그에게 회의(懷疑)란 공부고 종국엔 사랑이다. 이런 이설(異說)을 어찌 감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독주(毒酒)가 약이 되기도 한다. '영혼의 무기'가 그렇다. 자주 흠뻑 취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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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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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문유석 작가의 소설 '미스 함무라비'를 읽고 가장 먼저 생각 났던 말이다. '오심즉여심'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뜻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몇 해 전에 한 드라마가 유행시킨 대사 그대로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이 말을 알게 된 것도 문유석 작가가 어디선가 했던 인터뷰 때문이었는데, 이 말은 그가 싫으면 싫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개인주의자가 되어 자유의 확장을 지향하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분인 판사로서의 책임 또한 다하고자 타인의 말을 타인의 입장에서 잘 헤아리기 위해서 지니고 있는 태도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으나 작가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자유와 책임을 하나로 융화(融和)시키는 지점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재밌게도 이런 그의 마음은 '미스 함무라비'의 인물 구성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모두 7부에 이르는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크게 두 사람이 이끌고 있는데, 한 사람은 제목인 '미스 함무라비'를 별명으로 가지고 있는 박차오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임바른이다. 둘 다 판사로 경력은 짧다. 박차오름은 이제 갓 판사로 부임했지만 권위와 보수(保守)의 굳건한 성채와도 같은 법원 조직 안에서 그런 분위기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거침없이 주어진 선을 뛰어넘는 소신과 패기를 보여 준다. 그야말로 작가가 바라마지 않는, 싫다는 것을 싫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온전히 구현된 것과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임바른은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다. 박차오름과는 달리 임바른은 함부로 재판 당사자들에게 감정 이입하지 않으려 애쓰고 법관으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보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를 더 많이 신경쓴다. 한 마디로 자신의 자유보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유와 책임을 박차오름과 임바른이 나눠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나 다른 이들이 서로에 대해 알며 이해해 나가는, '오심즉여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내게 소설은, 멀리 떨어져선 서로 외면하는 것들을 하나로 연결지어 가까운 곳에서 상호 이해와 포용으로 안을 수 있도록 만드는 매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박차오름과 임바른을 묶고, 그들과 그들의 직속 상관인 부장 판사 한세상을 묶으며,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사법부라는 조직과 옳고 그름을 쉽게 가릴 수 없는 세상을 묶는다.


 그러나 그 매듭이 정말 묶고자 하는 상대는 아마도 우리 독자들일 것 같다. 무엇보다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린 현재의 사법부를 곱게 보지 않는 바로 나 같은 사람 말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그 때 탈주한 지강헌이 외쳤던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전히 한국 사법 현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마음을 강하게 대변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재벌 앞에서 한없이 약한 사법부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었던 영화 '베테랑'이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으며 흥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교수가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에게 석궁으로 테러를 가한 사건을 다뤘던 영화 '부러진 화살'도 사법부를 부정적으로 묘사했었는데 300만이 넘는 관객이 들었었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영장 기각에 있어서도 이를 접한 많은 이들이 비난을 쏟아내자 사법부가 법관의 독립을 존중해야 한다고 변호했지만 되려 사람들은 '제발 재벌에게서 독립하라!'고 더 크게 외쳐대고 있는 형편이다. 작가 자신도 책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2014년 여론조사업체가 실시한 리얼미터 실시한 '국민으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기관'에 관한 설문 조사에서 법원이 5위 군대와 7위 국회 사이에 있었다(p. 141)고. 이토록 법관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우리는 그만큼 더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작가는 그런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현장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어려움과 고민은 물론 조직 내부의 불합리한 관행과 전관예우 같은 부끄러운 과오까지도 가져와 자신들이 진정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오롯이 보여주려 한다. 이것이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어떻게 잘 좀 봐달라 하는 의미는 아닐 것 같다. 아마도 여기에 깃든 본심은 소설에서 박차오름과 임바른이 제출된 기록이나 서류로는 알 수 없었던 진실들을 재판 당사자들을 직접 대면하고 친히 대화하는 가운데 알게 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바로 그렇게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직접 피부로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사실 작가 자신의 말마따나 지금껏 제대로 드러난 적이 거의 없었던 판사들의 삶이 아니었던가. 나도 이제야 책을 통해 실제 법관들에겐 법봉이 없다는 것과 골무가 그들의 가장 요긴한 도구이며 미처 읽지 못한 재판 기록들을 집으로 운반하기 위한 도구인 보따리와 캐리어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그들이 '월화수목금금금'의 과도한 노동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렇게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자 나 또한 그들을 보는 눈이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 프로도가 골룸을 곁에서 오래 가까이 지켜보고서 변했던 것처럼 바뀔 수밖에 없었다. 소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얼른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여전히 많은 다수의 법관들이 판사로서의 직업적 양심을 고수하며 정의 구현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도 하면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고 한다면 아직은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고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부장 판사 한세상은 처음엔 박차오름이 자신의 큰 딸처럼 사사건건 말꼬리나 잡고 대드는 데다  거친 풍파나 몰고오는 사고뭉치라서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끝에 가선 그녀의 됨됨이를 믿고는 그녀가 자신을 대신해서 정의를 잘 세워줄 것이라 생각하며 편한 마음으로 사직서까지 내게 된다. 이런 푸근한 아빠의 미소를 나 역시 소설의 말미에서 짓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정녕 오심즉여심을 하려면 나태주 시인의 '풀꽃'과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소설 속의 진실과 신뢰는 바로 그런 시선들을 통해 발견되고 형성된다. 문득 내가 너무 사람과 사물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보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와 안 것은 아니다. 실은 예전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는 게 바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이유로 사람과 사물을 내 멋대로 재단하는 나를 방치해 왔었다. 어쩌면 나는 소설에 나오는 성공충 판사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내 식대로 이해하고도 전혀 부끄러움을 몰랐으니. 최근 왠지 모르게 우울에 깊이 물드는 때가 자주 있다. 사람들에게 이것을 고백하면 갱년기가 온 게 아니냐면서 놀리기 바쁘다. 그런데 '미스 함무라비'를 읽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불현듯 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우울한 것은 전적으로 나 때문인데, 나는 남을 위해선 얼마나 우울을 느꼈거나 눈물을 흘렸던가?' 하고 말이다. 결국 내가 꽤나 타인의 상처와 아픔에 둔감해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설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타인에게 행패를 부렸던 노인처럼 나 역시 내게 있는 이기적인 모습을 정당화시키려고 타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신중한 이해도 없이 멋대로 단정하고 단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깊고 좁은 우물처럼 내 내부로만 파고드는 시야를 밖으로 넓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처럼 아프고 힘든 이들을 담을 수 있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정의라는 것도 누군가 우리 대신 실현시켜주거나, 우리에게 쥐어주기 보다는 우리가 삶에서 스스로 실천할 때 보다 온전하고 확고하게 세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악이 이기는 것은 딱 하나,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로 모두가 삶의 근본적 태도로써 정의를 일상에서 실천해 나간다면 그런 악들은 더이상 범접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도 이 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배심원인 일반인들이 주된 역할을 하는 국민참여재판인 것도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그런 정의를 구현하는데 있어서도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타인의 처지를 내 것처럼 여기는 '오심즉여심'일 것이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으며 너의 문제가 나 또한 같이 짊어지고 해결해야 할 것이라면 항상 실천을 유보시키는 대표적인 핑계들이라 할 수 있는 이것들을 -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나 '나 하나 안 한다고 별 티가 나겠어?' 혹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뭘.' - 생각하는 것조차 부끄러워서 더이상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미스 함무라비'는 신기한 소설이다. 나를 자신에게 묶었다가 슬며시 풀어주고는 나로 하여금 다른 이와 묶게 만든다. 작가 역시 오랜 재판 경험을 통해 깨달았던 것 그대로, 우리 모두가 실은 연약하며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점에서 공동 운명이라는 자각 속에서 말이다. 이제 내 삶과 아픔을 주시하는 것처럼 타인의 삶과 아픔도 세밀하게 오래도록 바라볼 것이다. 그렇게 신화 속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에 유혹 당하지 않으려고 돛대에 자신을 단단히 결박시킨 것과도 같이 나를 기꺼이 '오심즉여심'에 나를 묶어둘 것이다. 미니스커트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박차오름 때문에 생각난 말인데, 이탈리아 작가 다차 마리이니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진지한 말을 하려 들면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그녀의 허벅지가 유창한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외면의 허벅지보다 존재의 내면을 들려주는 입을 더 눈여겨 보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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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1-25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을 재미있게 지었네요 이 책 나왔을 때 라디오 방송에 나온 걸 들었어요 저는 우연히 그런 걸 듣기도 하는군요 그때 법봉 얘기했어요 실제로는 없다고... 그런 거 드라마나 영화에는 나오잖아요 예전에는 없었을까요 말만 하면 좀 심심할 것 같기도 한데...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겠네요

힘 있는 사람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주 없지 않겠지만, 힘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희선

헤르메스 2017-02-05 23:13   좋아요 0 | URL
오, 라디오에서 소개된 책이었군요. 희선님은 라디오를 자주 들으시는군요. 저는 예전엔 주로 새벽에 듣곤 했는데 요즘은 통 안 듣고 있네요. 맞아요. 지금도 드라마에는 판사가 법봉을 두드리는 장면이 나와서 저는 당연히 있는 걸로 알았는데 진실은 없다네요. 힘 없는 이들 편에 쓰는 판사들이 소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많다는 걸 저 역시 믿고 싶어요. 그렇지만 보이는 현실은 참 많이 다르죠. 특히 특검이 신청한 영장들이 말도 안되는 사유로 기각 당하는 걸 보노라면 ㅠ ㅠ. 그리고 댓글이 너무 늦었네요. 요즘은 왜 이리 서재 들어오기가 힘든지 흑흑 ㅠ ㅠ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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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에서 숫자 '7'은 '절대' 혹은 '완전'을 뜻한다.  따라서 제목인 '7년의 밤'을 기독교적 의미로 풀이하자면 그냥 7년이 아니라 무한한 세월 내내 지속되는 밤이 된다. 그 밤은 말 그대로 도저히 헤어나올길 없는 '절대'의 밤이다.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완전한 암흑의 밤. 소설의 주인공 '서원'이 보낸 지난 7년의 밤은 정녕 그랬다. 그의 아버지가 일으킨 '세령호의 재앙' 때문에 서원은 7년 동안 늘 쫓겨다니며 정처없이 지내야했고, 어디서든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며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했다. 그 7년은 오롯이 불면의 밤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당하는 기나긴 불면의 밤이라는 고통은 오로지 아버지가 일으킨 사건 때문이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해야 하는, 그렇게 아버지가 던져준 운명이니까. 한 번 읽으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인상적인 소설의 첫 문장,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는 이런 서원의 마음을 잘 나타낸다.

 하지만 소설은 제목 그대로 7년간 서원이 가졌던 고통의 밤을 담지 않는다. 소설은 과거로 뛰어든다. 서원이 왜 그러한 밤들을 맞게 되었는지, 원인을 추적한다. 과거의 복기. 서원의 아버지가 어쩌다 그만한 사건을 일으켰는지, 그 과정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다. 그 시간은 서원에게 원죄의 순간이다. 성경으로 치자면 창세기다. 인간이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현재도 남자는 노동으로, 여자는 출산의 고통으로 형벌을 치르고 있듯이, 서원 또한 아버지의 죄로 현재의 고통을 치르고 있으니까.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으니, 그가 고통 가득한 불면의 밤을 벗어나기 위한 길은 이제 단 하나밖에 없다. 원죄가 잉태된 시간 속으로 뛰어드는 것. 소설의 복기는 필연적이고, 오직 그 시간만이 서원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

 그렇게 재현된 원죄의 시간 속 세계는 어떠했나?

 편의상, 그 세계를 둘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오영제'의 세계와 '강은주'의 세계로 말이다. 굳이 이 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이 각자 자신의 세계에서 정점에 서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점이란 그들이 가진 힘을 기준으로 표현한 것이다. 권력은 흔히 타인의 의지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오영제와 강은주는 진정한 권력자다. 그들 모두는 상대방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의로 정하고 그 자리에다 있도록 만들 수 있다. 서원의 원죄는 결국 이들의 권력이 낳은 것이었다. 원죄가 태어난 당일, 오영제는 희생자인 오세령을 바깥으로 내몰았고, 강은주는 남편 최현수를 '세령호'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세령호의 재앙도 초래했다. 뱀이 하와와 아담에게 죄를 짓게한 것과 똑같이, 그들이야말로 서원의 고통을 가져온 실질적인 장본인이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선 하나의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강은주는 오영제의 고용인이니 사실 권력에 정점에 선 자는 오영제 하나라고 해야하지 않느냐고. 마치 이런 반론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작가는 정점에 서 있는 자들에게 한 가지 특성을 더 부여했다.

 바로 감정 표현에 있어 타인의 눈치를 안 본다는 것으로 말이다. 오영제와 강은주는 소설에서 가장 극렬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분노인데, 주로 자신의 권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그러하다. 분노와 폭력으로 휘청거리는 자신의 세계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감정을 쏟아내면서도 타인의 감정을 절대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권력의 정점에 선 자 뿐이다. 그렇기에 강은주도 비록 오영제의 피고용인이나 정점에 서 있는 자인 것이다. 그것은 고용주인 오영제와 대면할 때 드러난다. 자신의 세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강은주는 자주 오영제에게 이런 저런 요구를 하는데, 그런 요구를 함에 있어서 결코 오영제의 눈치를 안 본다. 언제나 당당하게 요구한다. 그로인해 오영제의 분노가 촉발 되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은주는 오영제에게 종속된 존재로 볼 수 없다. 작가는 어쩌면 이 사실을 이름을 통해서도 밝히고 있는 것 같다. 오영제에겐 제왕을 뜻하는 '제'가 들어있고, 강은주에겐 주인을 뜻하는 '주'가 들어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렇게 정점에 서 있다는 그들의 지위는 똑같지만, 그들의 세계 자체는 다른 것을 나타낸다. 한 마디로, 오영제의 세계는 '권력'을, 강은주의 세계는 '돈'을 상징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권력과 돈의 속성이 오영제와 강은주가 지향하는 목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영제는 자신의 세계가 늘 자신이 설정한 형태 그대로 유지되길 원한다. 즉 오영제의 세계는 현상유지를 추구한다. 강은주는 늘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길 바란다. 그녀가 어린 시절 늘 꿈꾸었던 것은 쪽방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보다 넓은 집에서 사는 것을 원했고 그 때문에 그 꿈을 이뤄줄 자본을 뒤쫓았다. 이 현상유지와 확장은 그대로 권력과 돈의 속성과 일치한다. 권력은 현재의 질서가 늘 똑같이 고정되도록 만드는 습성이 있고, 돈은 외부로 끊임없이 증식하는 습성이 있으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영제와 강은주의 세계를 권력과 돈의 세계라 달리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권력과 돈, 이 둘은 지금의 현대인들이 가장 욕망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은 권력과 돈 사이에 끼여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톱니바퀴 사이에 끼여 있는 존재가 톱니바퀴를 따라 돌 수밖에 없듯이, 그만큼 권력과 돈도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현대인의 영혼을 깊이 지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이제 우리는 가련한 희생자들인 '오세령'과 '최현수'를 달리 해석하게 된다. 바로 우리 현대인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오세령과 최현수가 오영제와 강은주에게 당하는 형태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권력은 폭력으로, 돈은 욕망으로 현대인을 지배하고 길들인다. 폭력은 육체로 직접 가해진다. 똑같이 오영제는 오세령을 학대한다. 돈은 무한 증식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남들도 갖도록 만든다. 그것도 스스로 원해서 그러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면서 말이다. 똑같이 최현수는 강은주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알고 기계처럼 강은주의 욕망을 이루며 살아간다. 이렇게 오세령과 최현수는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영제와 오세령, 강은주와 최현수가 이루는 세계는 서로 차별되는 또 다른 특징이 눈에 띈다.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와도 상관있다. 

 현상유지를 향한 권력이 폭력으로 발현되는 오영제, 오세령의 세계는 우리나라의 80년대를 연상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오로지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것을 향한 욕망만이 가득한 강은주, 최현수의 세계는 IMF 이후, 더욱 거세진 돈에 대한 집착이 거대한 사회적 조류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오늘까지의 우리나라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오영제와 강은주의 세계는 현재이자, 과거이다. 그것은 중첩되어 있다.

 왜 작가는 여기에 과거의 시간까지 겹치게 만들었는가?

 이 시간적 특성이 내게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여기서 독자가 참여하는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오세령과 최현수가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보라. 그렇다면 각각의 시간들, 그러니까 오영제의 80년대와 강은주의 96년 이후가 현재 우리의 고통을 낳은 원죄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소설의 구성과 일치한다. 서원이 현재의 고통을 풀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죄의 시간을 복기해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 역시도 오늘의 고통에서 제대로 헤어나려면 고통이 발아된 원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 직시(直視)는 정유정 작가가 소설에서 한결같이 추구하는 삶에 현상된 고통에 대한 윤리적 태도이다. 그녀는 어떤 것이든 진정한 대면 없이는 극복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것이 죄로 인한 것이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과거로 데려가는 것이다. 원죄가 태어났던 그 시간 자체로. 그녀는 독자 역시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오영제와 강은주의 시간은 이렇게 과거의 시간적 특성까지 지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오세령과 최현수가 당했던 고통이 바로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며, 동시에 우리 역시 서원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말이다. 서원이 가졌던 7년 동안의 불면으로 가득한 밤들은 사실 우리 모두의 밤이었다. 서원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자본 사이에 끼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었고, 그 때의 원죄가 낳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현재까지도 불가피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7년의 밤'은 결코 소설로 그치지 않는다. 서원의 여정은 그대로 우리가 밤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여정인 것이다. 오영제와 강은주, 두 세계가 수렴된 '세령호'는 그야말로 지금 우리 삶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구원의 여정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바로 문하영과 최현수 그리고 안승환과 최서원을 통해서다. 물론 그들은 같지 않다. 오히려 정유정 작가가 집요하게 추구하는 테마인 직시(直視)에 대해서라면 정반대다. 한 쪽은 직시를 거부하고 다른 한 쪽은 적극적으로 직시하려 든다.

 직시(直視)를 거부하는 존재들은 세계의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면모를 획책 하지는 않았어도 그 존속에는 일조하는 사람들이다. 오영제의 아내 문하영과 강은주의 남편 최현수(여기서 앞서 말한 부조리란, 강은주의 욕망을 최현수가 자신의 욕망으로 알고 강은주의 욕망에 봉사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가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도피와 방관을 통해 세계의 폭력과 부조리가 지속되는 것에 일조한다. 문하영은 자신의 딸이 오영제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면서도 혼자 도망친다. 더구나 오세령이 남편의 학대 끝에 숨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도피가 그저 자기 혼자만 어떻게든 피하고 보자는 얄팍한 심리의 발현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이렇게 스스로 증명한다. 최현수는 방관한다. 강은주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그리고 그 요구에 맞춰 사는 삶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늘 묵묵히 감내한다. 엄청난 거구의 몸을 가졌으면서도 그런 태도 때문에 그는 언제나 겁먹은 사슴처럼 행동한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것으로, 때로는 가장의 책임이라는 것으로 불행을 가져오는 원인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내일은 더 나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에만 의지하여 방관으로 일관한다. 이렇게 문하영과 최현수는 똑같은 존재들이다. 그들 모두 불행의 원천을 직시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피하고 미루기만 하느 것이다. 그 결과, 얼른 단절되어야 하는 세계의 폭력과 부조리가 항구적으로 지속된다.

 결국 하나의 파국과도 같이 오세령이 희생된다. 기이하게도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 장면에서 엄마인 문하영의 이미지와 아빠인 최현수의 이미지를 오세령에게 하나로 통합한다. 즉 오세령은 엄마의 복장을 한 채, 차에 부딪히고 최현수를 아빠라고 부르며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오세령은 문하영과 최현수의 교집합 같은 이미지로 희생된다. 이렇게 하여 작가는 그들의 방관이 아무런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도피와 방관은 더 커다란 비극을 부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단적으로 최현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오세령의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 회피만 했었던 최현수는 끝내 마을 전체마저 세령호 아래로 수몰시켜버렸다. 한 사람의 수장이 한 마을의 수몰로 거대해져 버렸다. 이보다 더 어떻게 도피와 방관이 가져오는 것은 단지 더 큰 비극 뿐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물에 가라앉힌다는 것은 방관을 비유하는 행위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게 되면 직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마을의 수장 역시 방관에 해당된다. 서원은 그것으로 인해 7년 동안 가장 끔찍한 형태의 벌을 받았다. 서원은 최현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작가는 이렇게 세령과 마을의 수장 그리고 서원으로 이어지는 연쇄를 통해 방관의 경로가 비극의 확장 밖에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도려낸다.

 이런 그들의 태도가 어딘가 낯이 익다면 그것은 아마도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하영과 최현수는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사실은 우리와 닮은 모습이다. 그것도 '세월호 참사' 이후의 우리 모습을 말이다. 이 소설이 마치 어떤 예언처럼 보이는 것은 '세령호'와 '세월호'가 유사하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거기다 회피와 방관이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마저 어찌나 흡사한지.

 '7년의 밤'은 '세월호 참사' 이후, 더욱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작품이다. 여기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습의 자화상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어 읽을 때 더욱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소설은 분명하게 경고했다.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대해 직시하고 분명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더 큰 비극이 중첩될 것이라고. 이 소설이 나온 2011년 벽두, 우리는 용산 참사를 겪었다. 우리는 분노했지만 그것은 잠깐에 불과했고 언제나 그랬듯이 곧 잊었다. 내게 닥쳐온 일이 아니었기에. 결국 뒤이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역시나 방관과 무관심 속에 흐지부지 되는 것 같더니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다. 사건은 점점 더 우리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이래도 남의 일처럼 방관할래?' 하는 것처럼.

 오세령의 죽은 모습엔 작가의 숨은 뜻이 하나 더 담겨 있다. 작가가 하필이면 문하영과 최현수를 통합시키면서 오세령을 죽게 한 것은 문하영과 최현수를 가해자로 비난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들 역시 피해자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을 통해 그들의 피해가 그들의 가해를 정당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영화 '올드보이'에 여기에 딱 맞는 대사가 있다. '절대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야'라고 말하는 오대수에게 유지태가 분한 인물은 이렇게 대답한다. "모래알이나 바위나 물에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다."라고. 똑같이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으로 회피와 방관 역시 가해자들만큼이나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가로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에게 고통을 가차없이 가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안승환과 최서원이다. 앞서 이 소설이 서원이 행하는 과거의 복기라고 말했다. 그대로 이것은 서원이 문하영과 최현수와 달리 자신의 불행을 낳은 근원을 직시하려는 움직임이다. 안승환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공교롭게도 똑같은 직시의 태도를 보여주는 안승환과 최서원을 동일하게 잠수부로 만들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물 아래 가라앉힌 것들을 건져내는 것이다. 안승환은 소설 초반 잠수부로 등장하여 '세령호' 아래 잠긴 마을을 관찰한다. 즉 아무도 보려하지 않던 수몰된 마을을 그는 직시하는 것이다. 최서원은 해류에 떠밀리다 실종된 잠수부 하나를 건져낸다. 이것은 그대로 세령호에 잠긴 오세령과 이어진다. 최현수가 가라앉힌 존재를, 그의 아들인 서원이 건져내는 것이다. 한 쪽엔 가라앉히는 자가 있고, 다른 한 쪽엔 건져내는 자가 있다. 직시를 거부하는 태도가 가라앉히며 적극적인 직시의 태도가 건져낸다. 한 쪽은 죽음을 초래하고 은페시켜 더 큰 비극을 양산했고 다른 한 쪽은 생명을 건져내어 비극을 종결시켰다. 너무나 선명한 대비가 아닐 수 없다. 작가의 대안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있다. 바로 안승환을 작가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안승환은 원죄가 태어났던 날 밤, 세령호에서 정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설로 쓴다. 진실을 찾기 위하여. 서원의 과거 복기는 바로 그 소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보다 더 어떻게 직시의 태도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을 통해 서원은 그토록 바랐던 구원을 얻는다.

 어떤 소설들은 자신이 상정했던 수명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남는다. 시대가 소설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런 소설은 시대가 가장 시급히 답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 응답할 수 있기에 요청받는다. 나는 '7년의 밤'이 그렇다고 본다. 이 소설은 나온 당시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금에 더 널리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지금은 '강남역 묻지마 살인'과 같은 여성 혐오 범죄, '구의역 스크린 도어 기사 사망 사건'과 같은 열악한 노동 계층에 대한 차별 문제, '흑산도 여교사 특수 강간'과 같은 인격 침해 범죄들이 곳곳에서 봇물 터지 듯,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사건과 사고의 원인과 대책에 대한 성실한 직시(直視)없이, 어떻게든 일부에게 일어난 특수한 사건으로 무마시키거나 껍데기 뿐인 대책으로 덮으려고만 한다. 문하영과 최현수가 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더 큰 커다란 비극밖에 없다는 것이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뚜렷하게 밝혀진 바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 바보 놀음을 계속할 것인가? 이제 진지하게 안승환과 최서원의 직시(直視)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정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세월호와 함께 수장된 아이들 시신을 건져올렸던 민간 잠수사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분을 세월호 청문회 자리에서도 보았고, 정청래가 컷오프 된 날 시민들이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필리버스터를 할 때도 보았다. 세월호 진실 규명을 위해 일한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잘랐다며 강하게 성토했다. 박주민 변호사가 선거 운동을 할 때도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던 분이라, 설마 그렇게 돌아가시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차가운 물 속에서 서로 얽혀 있는 아이들 시신을 '엄마 만나러 가야지' 달래면서 건져낸 사람이었다. 세월호가 얼마나 참혹한 참사였는지 정면에서 직시(直視)한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한다는 누구보다 확고한 생각으로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한 분이었다. 비록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직시가 어떤 삶을 살도록 하는지 그분의 생애만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직시하려 했던 이들이 잠수부였기에, 그 분을 보면서 '7년의 밤'이 많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쓰게 되었다. 사실 이 분의 죽음은 우리 책임이다. 우리의 회피와 방관이 이 분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회피와 방관이 있는 한, 비극은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고통과 불안만이 가득한 불면의 밤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 밤을 응시해야 할 때다. 어둠에 대한 정직한 대면과 적극적인 참여만이 비극의 연쇄를 끊을 수 있다. 이 소설과 한 민간 잠수사의 삶을 보면서 난 진실로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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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6-2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읽으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손을 놓았던 기억이 있네요.
읽을 수가 없었어요. 맘이 불편했어요. ㅠ

세월호 잠수부가 돌아가셨다는 뉴스, 저도 봤어요. 찹찹하고, 사회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고.
응시해야 할 사건들이 하나가 아닌, 점점 수십 개로, 수백 개로 늘어나는 느낌에, 지치는 느낌도 들어요.
그래도..... 그 밤들을 응시해야겠죠,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헤르메스 2016-06-22 02:44   좋아요 0 | URL
지금 새벽인데 잠이 안 와서 글이나 쓸까 들렀다가 마녀고냥이님 댓글을 이렇게 발견하네요.^^
지금 제가 세상을 보며 느끼는 기분이 마녀고양이님과 비슷한 것 같아요. 선거 이후로 더 실망하고, 요즘은 고인이 되신 분 소식도 있고 해서 제법 우울하네요. 이럴 때는 특히 기독교적 구원관에 매달리곤 합니다. 그것은 세계 때문에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개인 때문에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죠. 한 사람의 선의와 그 지속이 세계 전체를 지탱하는 것이라고. 소돔과 고모라가 단 한 명의 선인이 없어서 파멸 되었듯이. 세월호 잠수부 님도 그 중 한 분이셨을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분들이 부디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텨주시길,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세계가 조금은 더 아나지기를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누구는 그래 봐야 지옥이 더 지속되는 것 뿐 아니냐라고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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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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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년생 여성 작가의 첫 단편집. 2012년에서 2015년 사이에 발표한, 모두 10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꼬치처럼 모두를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으니, 바로 불안이다. 불안, 그것은 현대의 페스트다.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도, 그럴 수 있는 곳도 없다. 구조조정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들리고, 경제에 대한 불길한 예언이 연일 쏟아지고 있는 지금, 드리워지고 있는 불안이란 장막은 날마다 더욱 넓어지고  두터워져 간다. 그러므로 '지극히 내성적인' 단편집은 문학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란 말을 믿는다면 지금 문학이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


 여기 단편의 인물들을 비유하자면, 높고 가느다란 막대 위에서 흔들리면서 돌고 있는 10개의 접시라 해야 하리라. 그것은 정말 불안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소설의 카메라는 돌리고 있는 손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담아내는 피사체는 오로지 위태롭게 돌고 있는 접시 뿐이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안에 갈팡질팡 하지만 독자들은 정작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불안의 진짜 이유는 마치 제목처럼 '지극히 내성적인' 곳에 꼭꼭 감춰진 듯 하다. 그렇게 소설은 불안의 여파만 훑는다. 우리가 음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엄습한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는가 뿐이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고 말한다면, 거기에 대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제목을 살짝 바꿔 '나는 어떻게 근심을 멈추고 불안이란 폭탄을 해체하게 되었나'하고 응수하는 격이다. 그런 면에서 10개의 접시들은 지극히 개성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균형의 경로가 다 적절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비열하고, 어떤 것은 한심하며 또 어떤 것은 자기 파괴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소설은 건조한 묘사 만큼이나 모든 경로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배제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현상학적이라 할 만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치중하고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는 의미다. 분명 독자는 판단이든, 공감이든 어떤 식으로든 소설에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언젠가의 자기 모습을 보게 될 것이므로.


 두 번째로 나오지만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있는 '팜비치'는 그녀에게 창비신인소설상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안정된 가정을 이룬 30대의 남자가 주인공인데, 그는 휴가를 맞아 해변에 갔다가 자신의 일상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마지막에 그는 발가락에 상처를 입는데, 그것은 마치 자신이 가져온 상어 튜브의 이빨에 물린 것 같다. 상어 튜브가 불안을 상징한다. 그는 휴가를 맞아 아이와 해변에서 놀고 있다가 아내의 명령으로 상어 튜브를 가져오기 위해 해변을 벗어난다. 그의 과거 회상에 의하면 어떤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안을 가져왔다. 회사 동료와 같이 걸어가다 우연히 맡게된 음식 냄새 때문에 멈춰 섰을 때, 그는 승진에서 누락하고 동료는 승진해 결국 혼자가 되었다. 해변에서 벗어날 때 그는 물내음을 맡으며, 슬리퍼 한 짝을 잃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상어 튜브를 찾아가는 길은 불안 속으로 점점 빠지는 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간신히 상어 튜브를 가지고 돌아오니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눈길이 가 있고 아이는 상어 튜브를 타려 하지 않는다. 아내는 마음을 두고 있는 남자가 진짜 팜비치에 살고 있다고 부러워한다. 그들이 현재 묶고 있는 리조트 이름은 '팜비치'. 그는 발가락의 상처처럼 엄습한 불안을 통해 자신이 진짜라 여겼던 삶이 가짜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이후에 발표된 '구두', '오가닉 코튼 베이브', '틀니',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타투'는 그렇게 불안을 안게 된 이들이 삶에 매달리기 위해 어떻게 그것을 지워가는 지 보여 준다.


 '구두'는 자신보다 못한 타인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으로, '오가닉 코튼 베이브'는 진짜 믿지는 않지만 뭔가 거창하게 느껴지는 이념에 동참하는 것으로, '틀니'와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나보다 더 우월한 누군가에 기대는 것으로 그리고 '타투'는 그저 회피하고 해결을 지연하는 것으로 불안을 잠시 잠재운다. 맞다. 잠시다. 결국 그들의 모든 시도는 실패하니까. 작가는 그들의 패배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시도의 실패는 다른 경로를 찾게 만든다. '홍로', 대머리' '파란책' 그리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가 그렇다. '홍로'는 거짓을 진짜처럼 믿는 것으로, '대머리'는 끝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으로, '파란책'은 잘 알지도 못하고 성공에 대한 보장도 없지만 무작정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타자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으로 그리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는 환상에 대한 믿음을 통해 불안을 관통해 나간다. 혹은 '극복한다'고 말해도 좋다. 사실, 이 경로의 인물들은 성공하니까.


 그렇게 이 단편집은 '팜비치'를 시작으로 하여 불안을 대하는 두 경로가 나와 있으며 하나는 실패로, 다른 하나는 성공으로 귀결된다. 발표된 시점이 두 경로 모두 섞여 있기 때문에 작가가 실패에서 성공으로 나아가게끔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정말은 이 모든 것을 우리들이 흔히 취할 수 있는 태도 중의 하나로 그저 제시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현상학적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내게는 말한 바와 같이, 비관과 낙관으로 나뉘어 보이고, 낙관의 경로에서 은연 중에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작가의 조언을 듣는 것 같다.


 그런데 낙관의 경로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여기에도 뭔가 공통된 것이 보인다. 이 경로에선 '파란책'이 가장 먼저 발표되었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가 가장 나중이다. 

 

 '파란책'은 '팜비치'처럼 안정된 일상을 영위하던 중년 여성이 주인공인데, 그녀는 딸의 책상을 자신만의 간이 책장으로 만들었다가 새삼스레 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책이란 특정한 책이 아니라 책 그 자체, 즉 '보편으로서의 책'이다. 이것은 그녀가 결국 책을 사려고 서점에 들리는데 오직 책의 두께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서 드러난다. 책은 그녀에게 전적으로 타자였다. 알지도 못했고 실용적인 목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작정 책의 세계로 빠져든다. 책이 가진 허구 속으로.

 '파란책'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허무주의를 강의하면서 허무주의엔 부정적 허무주의와 긍정적 허무주의가 있다고 이야기했고 니체의 것을 긍정적 허무주의로 보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불안은 궁극적으로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고 결국 그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불안의 성격도 달라지게 된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통하여 허무, 즉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꿨다. '죽음 때문에'가 아니라 '죽음이 있기에' 오히려 삶의 긍정적 전망이 열린다고 보았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그녀도 그렇게 된다. 물론 그런 하이데거의 말은 검증할 수 없다. 전적으로 허구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과 허무를 삶의 끝이자 비관이라 생각하는 것도 허구일 지 모른다. 정직하게 보자면 우리는 두 허구 중의 하나를 선택해 믿는 것이 아닐까?


 낙관의 경로는 허구의 믿음을 선택한 자들의 것이다. '파란책'의 주인공은 하이데거의 말을 전혀 모르는 남편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이미 하나의 강을 건너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p. 228)


 강, 그것은 현실과 허구 사이에 놓인 강이었고 그녀는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듯이 허구의 영토로 강을 건너고 말았다. 순전히 자의로. 바로 이것이 공통점이다. '파란책'에 나오는 남편과 같이, '홍로', '대머리, '집이 넓어지고 있어' 모두에서 우리는 주인공과 대립하고 있는 현실 세력들을 볼 수 있다.


 '홍로'에서는 여자의 남편이(진짜 남편은 아니고 주인공에게 월급을 주면서 아내로 고용한 사람이다. 즉 여자의 세계는 허구였다. 그녀는 아내를 연기하고 있었고 그 사실에서 늘 커다란 불안을 느꼈다. 그런데 오히려 그 허구를 껴안자, 스스로 진짜 아내라는 거짓말을 믿고 그렇게 행동하자 삶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대머리'에선 암투병 때문에 벗겨진 머리를 가발로 가리고 있는, 주인공이 결혼하려는 여자의 언니가, '집이 넓어지고 있어'는 그녀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 자체가 그러하다. 대립하는 현실 세력 모두 패배한다. '홍로'에선 자신은 아직 벗어던져지 못한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허구를 믿은 여자가 마침내 벗어던진 것을 보며(p. 126), '대머리'에선 '구두'처럼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과 '가발'이라는 위장으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던 현실이 주인공에게 가발이 벗겨져 대머리라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꾸며 결혼하려 하고 있었다. 사실 여자가 가발을 쓰고 주인공을 경멸한 것도, 주인공이 그 가발을 벗겼던 것도 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인공의 자존심이 진짜 상처 받았던 것은 자신이 결혼하려는 여자가 원래 패배자에게 잘 끌리는 성향으로 실은 그녀를 유혹할 때 전혀 거짓말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결국 그는 허구로 지탱해 온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꿈꾸던 결혼이 끝장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가발을 벗겼고, 거꾸로 그로 인해 현실의 한없이 약하고 초라한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는 그것을 보며 격한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집이 넓어지고 있어'에선 불가사의한 이유로 자꾸만 넒어지는 집이, 이미 그것만으로도 허구가 현실에게 이기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만, 자기 집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집까지 넓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현실 세계는 패배하고 허구를 믿었던 이들은 승리한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허구를 믿었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는 아무런 보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믿음을 통해 이전엔 결코 알 수도, 볼 수도 없었던 삶이 가지고 있었던 긍정적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을 작가의 조언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일단 한 번 강을 건너 보라며 그녀가 손짓하고 있다고. 어쩌면 이런 조언은 그녀가 소설가이기에 나온 것일 수도 있다. 허구에 대한 강한 믿음 없이 어떻게 허구를 생산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요즘 아주 인기 있다는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란 책에서 호모 사피엔스 자체가 허구의 생산에 있어서도, 허구의 믿음에 있어서도 유달리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끝내 그 때문에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허구를 짓고, 허구를 먹었다. 허구가 여기까지 우리를 끌고 왔다. 사실이 이렇다면 작가의 조언을 망상이라며 내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허구에 대한 믿음은 '지극히 내성적인' 망상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믿음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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