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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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군대에 있을 땐, 열외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도 또 없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고 나선, 열외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불안한 일도 또 없다. 사회에서 열외란, 의자뺏기 게임에서 패배자가 된다는 뜻이다. 의자에 앉아야 안정된 삶을 가질 수 있는데, 내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열외 되는 것에 대한 공포도 같이 점점 더 자라난다. 다시 내 자리를 되찾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도, 뉴스도 연일 열외가 되어버린 자들의 불행한 처지를 열거하면서 경고를 쏟아낸다. 경고를 들을 것도 없이 눈으로 직접 보기도 한다. 열외자의 출현은 언론이나 소문으로만 접할 수 있는 나와 먼 생경한 현실이 아니라, 바로 내 지근거리에서 일어나는 이미 익숙한 현실인 것이다. 그런 삶의 목도는 마음 속 공포를 더 부풀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열외자가 생겨나는 속도도 거듭 빨라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휙휙 사라지는 사람들이 남겨 놓은 빈자리가 늘어난다. 어쩌면 저 빈자리가 내일은 내 자리가 되지 않을까 하여 나는 더욱 단단히 매달리기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죽인다. 조직이, 상사가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인간으로 철저히 변할 수 있게 노력한다. 사회에서 우리가 자존심을 굽힐대로 굽히고 더러는 굴욕마저 무릅쓰며 갖은 고생을 감수하는 것은 내가 속한 곳에서 열외가 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열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주원규의 '열외인종 잔혹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네 명의 열외된 인간들이 어쩌다 양머리를 한 수 십명의 테러리스트들이 획책한 열외가 되지 않은 자들의 성채라 할 수 있는 코엑스몰 점거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하루를 그리고 있다. 그 네명은, 이제 곧 어버이 연합에 스카우트 될 것만 같은 노인 장영달, '이태백'이 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비정규직인 이십대의 윤마리아, 회사에 개처럼 충성했지만 돌아온 것은 코 푼 휴지처럼 버려지는 것이 전부였던 중년의 노숙자 김중혁(이름 때문에 자꾸 동명의 소설가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마지막으로 게임 말고는 현실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없는 십대의 불량 청소년 기무로, 사실 현재 자신의 의자를 간신히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겐 가장 피하고 싶은 인생의 모습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네 명을 혼비백산 시켰던 양머리 테러리스트들도 결코 그들과 다르지 않았으니, 실은 양머리 테러리스트들 역시 열외자였고 그들이 일으킨 테러 또한 자신들과 같은 열외자들을 대량 생산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의 자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 재난 영화가 유난히 유행할 때 그 이유에 대해 어떤 평론가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재난 영화는 추락과 파산의 불안이 만연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의식적 소망을 담고 있다. 끝도 없이 불안을 가져다 주는 이 사회가 너무 진저리가 나서 어서 끝장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양머리 테러리스트들의 염원도 이와 같다. 그들의 테러는 줄기차게 야기되는 혼란과 불안을 서둘러 끝장내고 싶은 염원의 표현인 것이다. 코엑스몰의 점거 테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2부, '최악의 도시'는 알고 보면 요한계시록과 같은 종말론의 외피를 성글게 두르고 있다. 이 소설은 수박처럼 겉과 속이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소설의 분위기는 꽤나 희극적이지만, 속내는 종말을 희구하고 있고 굉장히 허무주의적이다.(그래서 희극적인 장면 또한 어쩐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로 보인다. 마치 작가가 '현실이 이토록 막장인데, 이런 걸 보고도 웃음이 나와?' 말하며 내 멱살을 잡는 느낌이다.) 양머리들이 그토록 찾았던 메시아가 간신히 나타나자마자 총알 한 방에 어이없이 죽고, 코엑스몰의 그 엄청난 테러 사건도 바로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결말은 오늘 날의 대한민국이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이며, 결국 우리 모두는 열외자가 되어버릴 운명에 처해있고 자신이 헌신하는 소설조차 그런 현실을 개선할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작가 자신의 말에 힘껏 마침표를 찍는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은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해야 하리라. 이미 열외자가 되어버렸거나 혹은 언제 열외자가 될 지 모를 우리들에게, 그래서 어쩌면 더욱 절박하게 원할, 그 어떤 위안도, 희망도 주지 않는다고. 다만 인도 신화에 나오는 '저그노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열외자로 만들어 짓누르는 이 천박한 시대가 어서 끝장 나기만 바랄 뿐인 것이다. 그의 소설은 무력하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열외 인간의 양산은 현대화의 불가피한 산물이니까. 그는 주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 쓰레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쓰레기가 된 인간들('잉여의', '여분의' 인간들, 즉 공인받거나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 집단)의 생산은 현대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이며 현대성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것이다. 또 질서 구축(각각의 질서는 현존 주민들 중의 일부를 '어울리지 않는다', '적합하지 않다' 또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쫓는다.)과 경제적 진보(이것은 이전에는 효과적인 생계 유지 방식이었던 것을 격하하고 평가절하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로 인해 과거의 생계 유지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생활수단을 박탈하지 않을 수 없다.)가 초래하는 피할 수 없는 부작용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p.22)


 열외자의 생산은 배제를 통해 질서를 유지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서둘러 낡은 것으로 만들어 계속 새 것을  소비시키는 것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는 현대성(모더니티)에 허파처럼 내재된 것이다. 현대는 바로 그런 열외자의 양산을 통해 지속되니까 말이다. 열외자의 생산을 그치게 하려면 현대성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를 떠받치고 있다는 아틀라스 신쯤 되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한낱 개인에게는 너무나 벅찬 짐이다. 이쯤 되면 주원규 작가의 고백은 차라리 정직하다고 해야 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제발 용건만 간단히"는 자신의 소설에 대한 비아냥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가지는 가치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본다. 예전의 나도 그랬듯이, 우리들은 열외자의 문제를 흔히 아주 개인적인 사안으로 치부하기 쉽다. 최근에 나온 영화 '부산행'에서 열차에 몰래 숨어든 노숙자를 보고 김의성이 분한 배우가 아이에게 "너도 열심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것이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시대 자체의 문제로 보게 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한 마디로 '파국의 지도'다. 막장이 되어버린 시대의 적나라한 모습과 그 아래 가리워져버린 열외자들의 목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주어 독자로 하여금 전체를 조망하도록 만드는 지도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문제라 여겼을 때, 내 시선은 언제나 내게로만 향했다. 그것도 늘 단점과 부족함만 찾아내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더 주눅이 들었고 더 불안했다. 하지만 지도의 조망은 내게만 향했던 시선을 타인으로 향하게 만든다. 나와 똑같이 힘들고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이들을 보고 헤아리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열외자가 되었다는 절망,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날 계발시킬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진실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시작이 되어 배우고 성찰하여 결국 자신의 목적지를 지도 위에 스스로 설정할 수도 있다. 너무 낙관적인 것일까? 그래도 나는 믿고 싶어진다. 이 '파국의 지도'를 본 이들이 추락과 절망을 강요하는 시대를 바꾸기 위해 점점 더 많이 노력할 것이라고.


 알고 보면 희망은 믿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동력도 이 믿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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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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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고은의 '무중력 증후군'의 주요 인물들은 바틀비의 후예들이다. 바틀비는 '모비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동명 단편에 나오는 인물로, 현대 조직 사회에서 개인에게 부여된 모든 정체성과 역할을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말로 모조리 거부하는 사람이다. 막스 베버는 현대 조직 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관료제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만큼 현대 조직 사회는 맨 위부터 가장 아래까지 맡은 역할이 세세하게 다 정해져 있으며, 그 모든 것이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유기적으로 돌아가도록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주인공  노시보가 일하고 있는 부동산 투기 조장 목적의 텔레마케터 회사가 바로 이런 관료제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그런 조직 내부에서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한 개인은 조직이 부여한 꽉 조인 정체성의 그물망에서 벗어난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 노시보도 날마다 회사로 출근하면서 자신을 회사라는 두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미꾸라지로 여기고 있지만 쉽사리 그만두지는 못한다. 회사에서 해방되고픈 마음은 누구보다 강렬하지만, 그저 항상 사직서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으로 소심하게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바틀비는 다르다.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관료제가 자신에게 부여한 정체성과 거기에 따르는 역할 모두를 실제로 단호하게 거부하고,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형성하고는 그것을 온전하게 지켜나가는 것이다. 허먼 멜빌은 산업 자본주의 여명기의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이 산업 자본주의라는 것이 철저한 분업화를 통해 한 개인을 도구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익명적인 존재로 만들 것이라 내다보고는, 그것에 대한 저항으로 바틀비란 인물을 구상한 것이었다. 바틀비의 거부는 도구화, 익명화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오직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정체성을 수호하는 분투였다. 그는 그렇게 시대의 중력을 거부했다. 정말로 무중력 증후군이 있다고 한다면, 바틀비는 그 증후군의 1호 환자였다.


 하지만 중력에 꽉 붙들려 있었던 노시보에게도 바틀비가 될 기회가 결국 찾아오고야 만다. 갑자기 달이 두 개로 늘어난 것이다. 영원히 하나일 것만 같았던 달이 두 개로 늘어나자, 세상이 이대로 영원히 한결같을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의 생각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사직서를 내는 사람들이 생기고, 노시보의 엄마와 같이 항상 동일했던 일상의 궤도를 주저없이 이탈하는 사람들이 출현하는가 하면, 노시보의 형처럼 이런 기회를 통해 남몰래 꿈꾸던 삶을 제대로 누려보려는 이들도 나타난다. 물론 자살을 통해 절대적인 무중력 상태가 되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변화가 하필이면 달의 출현을 통해 도래하는 것은, 달이야말로 중력이 소속의 은유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달과 지구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맴돈다. 지구의 중력에 붙잡힌 탓이다. 달은 달아나고 싶어도 지구의 중력 때문에 달아날 수 없다. 오로지 지구의 중력이 허락한 궤도만 돌고 또 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달이 지구에 속해 있다고 여긴다. 그런 달이 두 개로 늘어났다. 달의 횡적인 분열은 그만큼 종적인 중력의 강도가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강한 중력에 붙들려 있던 사람들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달은 두 개로 그치지 않고 세 개, 네 개 분열을 거듭한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생각은 일상과 멀어지고 예전엔 황당하게 보이던 것들마저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는다. 일상이 환상이 되고, 공상이 현실이 된다. '무중력 증후군'을 읽다보면, 그냥 소설 같기도 하고 판타지 소설 같기도 하다. 소설과 판타지가 뒤엉킨 모습이다. 이것이 누군가에겐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무중력은 소속을 상실시키는 힘이다. 거기엔 아무런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중력을 표방하는 소설이 분명한 경계를 가진다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무중력의 자유를 지향하는 이상 소설이 이렇게 마구 뒤엉키고 여러 가지가 혼합된 모양새가 되는 것은 필연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무중력을 추구한다. 표준 시간을 알려서 사람들의 시계를 일제히 거기에 맞추도록 만드는 시보(時報)만큼이나 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받는 우리들은 늘 시보(試補)로 잔존하는 현실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을 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무중력을 희구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이 표면상 추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작가는 무중력과 중력 중 어느 한 쪽에 선뜻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어느 하나를 딱 정해 정답처럼 제시하기 보다는 얼른 서로 대척(對蹠)으로 보이는 둘 모두가 실은 우리 삶에 다 필요한 부분이라며 역설한다.


 이는 시보라는 주인공 이름 자체에 이미 투영되어 있다. 사실 시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아직 정식으로 무엇이 되지 못한 존재라는 뜻으로 그래서 사회의 규정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기도 하는 시보(試補)이고, 다른 하나는 표준 시간을 알리는 뜻으로 그래서 사회의 인정에 대한 강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는 시보(時報)이다. 지금까지 한 논의에 따르자면, 앞의 시보(試補)는 무중력을 그리고 뒤의 시보(時報)는 중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둘은 대척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존재에 중첩되어 있다. 작가는 일부러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둘 중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는 둘 모두 삶에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름만이 아니다. 작가는 신체와 의식 또한 대척 관계로 만들어 이를 더욱 강화시킨다. 제목인 '무중력 증후군'은 사실 병이다. 무중력을 취하면 취할수록 마음은 자유를 얻지만 그만큼 몸은 고장을 일으킨다. 마치 신체가 마음이 원하는 무중력을 거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이것을 소설에 누벼댄다. 그래서 무중력으로 기우는 우리의 마음을 그러지 못하게 붙잡는다. 이런 반대의 움직임, 역행이 소설 한 쪽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반영된 작가의 마음은 소설 구성 자체에도 투여되고 있다. 만일 기승전결이 날렵한 직선처럼 잘 엮인 소설을 닫힌 부채라고 한다면 '무중력 증후군'은 펼친 부채에 가깝다. 독자를 정해진 이야기의 궤도로 따라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브뤼겔의 그림처럼 담고자 하는 이야기를 좍 펼쳐서 여러 모습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중력과 무중력이 가진 장점과 한계의 모습들을 말이다. 소설은 결과를 독자에게 제시하기 보다는 과정에 독자를 초대하려 한다. 그렇게 보다 많은 시야의 경험을 주려 한다. 결국 이름도, 신체와 의식 사이의 반목도 알고 보면 모두 이에 복무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애초에 문학의 역할은 경험의 나눔에 있었다. 여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연장자를 존중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많은 경험 때문이었다. 경험이 하나의 정보가 되어 듣는 이로 하여금 경험을 전수해 준 자는 했었던 시행착오를 피하도록 도왔던 것이다. 연장자의 입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한계가 있었기에 결국 문학이 그 짐을 나누어 받았다. 나는 문학을 잘 모르지만, '무중력 증후군'이 바로 이러한 문학의 본래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비록 간접적이며 파편적이고 거기다 문학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것이긴 해도, 이 소설은 무중력과 중력에 관계된 다양한 양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고 말이다. 경험을 전수하는 것의 목적은 해답의 제시가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성찰하는 데 있었다. 제시된 경험은 참조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기반으로 현명한 대안을 창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청자의 몫이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내 삶을 무중력과 중력 어느 한 쪽에 둘 것인가 아니면 그 모두를 적절히 조합하여 융통성있게 이쪽 저쪽을 모두 섭렵하며 살 것인가는 바로 독자의 몫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시보는 자신의 가슴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달을 찾아낸다. 서로 대척 관계에 있었던 중력과 무중력은 그렇게 통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보가 수많은 경험을 관통해 비로소 이룬 결과였다. 그렇게 독자도 자신의 달을 이 소설과 동행하는 동안 찾게 될 것이다.

 과연, 당신의 달은 어디에서 어떻게 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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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 (일반판)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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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북한의 소설이라고 하니 흥미로웠다. 옛날도 아니고, 90년대의 북한 실상을 보여준다는데, 현재 북한의 모습을 그 내부에 있는 목소리로 들여다 보고 싶었던 내게는 좋은 기회가 되어줄 것 같았다. 저자 '반디'는 필명으로(북한 사회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책이니 실명을 안 쓰는 것은 당연하겠지.), 책의 마지막에 있는 '출간에 부쳐'라는 글에 따르면, 1950년 태생의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소속 작가라고 한다. '고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시점에 시작된 소위 고난의 행군으로 자신과 인연을 맺고 살아왔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고, 먹고 살기 위해 고향땅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지금껏 살아왔던 북한 사회(p. 270)'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지게 된 작가가 폐쇄 정책으로 바깥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북한 사회의 참된 모습에 대해 '고발'할 생각으로 89년부터 96년 사이 완성한 7개의 단편을 담고 있다. 흥미가 동하여 읽긴 했지만 사실 별 기대를 하진 않았다. 고발 문학은 목적성이 분명한 글이라 그 선명한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문학적 가치와 재미를 상실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원고에 얽힌 사연도, 제목도 여기의 소설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얼른 보통의 고발 문학들이 거치는 궤적을 그대로 따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탈북기'까진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두 번째 단편 '유령의 도시'에서 그런 생각은 보기 좋게 깨어지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7개의 단편 중, 이 '유령의 도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전체주의가 어떻게 하나의 사회를 장악하고 개인들을 유령처럼 존재감 없는 것으로 만드는지 카프카적인 색채로 참으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평양. 국경일을 하루 앞두고 평양은 행사 준비로 한창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다. 무려 100만의 시민이 참여하는 시위 행사다. 이번 시위는 특히 전세계에 선전용으로 방송되는 것이라 정권의 시민 동원과 준비는 한층 더 가열차고 집요하다. 이런 상황이 주인공 한경희는 여간 괴롭지 않다. 자신의 아이 때문이다. 아이가 김일성 사진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며 크게 울어대는 것이다. 하필 자신이 참여하는 궐기대회 장소가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내려다 보고 있는 곳이라 아이를 도저히 데려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픈 애를 집에 혼자 둘 수도 없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한경희는 행사에 빠질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사정이 있어도 또 그녀가 공산주의 항쟁에 희생당한 이의 유가족이라는 신분으로 신변이 철저히 보호된다고 해도 북한의 전체주의는 그녀를 곱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하필이면 집의 창문에 김일성의 초상화가 보여서 아이 때문에 커튼을 쳐 놓았더니 이내 집에 커튼이 쳐져 있는지, 안 쳐져 있는지 관리하는(평양의 모든 집은 김일성 수령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김일성 초상화가 잘 보이도록 창문의 커튼을 내려서는 안 된다.) '가두 비서'가 찾아와 커튼을 걷으라고 닦달한다. 한경희는 할 수 없이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늦게 들어온 남편은 왜 그런 사실을 알렸느냐고 원망한다. 벌써 당간부인 남편 상관에게 그 말이 들어가 남편이 엄중한 경고를 받았던 것이다. '유령의 도시'는 유령처럼 아무런 존재감이 없게 되어버린 전체주의 안에서의 개인을 다양한 문학적 장치를 통해 신랄하게 보여준다. 아이는 마르크스를 괴물 '어비'로 여겨 우는데, 나중에 한경희는 평양이라는 도시 전체가 이미 '어비'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보게 된다.


 에구머니나! 저게 뭐지?... 두 고층 아파트 지붕을 양다리고 디디고 호통치는 털이 북실북실한 저 괴물 같은 것이!... 옳아! 저게 바로 '어비'로구나!

 한경희는 넋이 나가도록 질겁하며 어디로인가 냅다 뛴다. 그런데 어비가 디디고 선 아파트의 벌집처럼 총총한 창문마다 오종종 긴장하며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모두 토끼들이 아닌가! 아하, 저게 바로 남편이 걸핏하면 외우곤 하던 토영삼굴의 그 토끼들이구나. 한데 이상한 것은 한경희 자신도 어느새 토영삼굴에 뛰어들어 앉아 있는 것이었다.(p. 96)


  창문이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곳이 아니라 오직 체제 유지를 위한 감시의 구멍이 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그저 겁먹은 토끼일 뿐이다. 살던 굴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죽지 않으려면 '어비'의 눈 밖에 나지 않아야 한다. 그 '어비'는 아주 조금의 흠도 용납하지 않고 거역에 따른 처벌 역시 가차 없다. '탈북기'에서 일철이 가족들 전부를 데리고 탈북을 결심하게 된 건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적대군중'이란 신분 때문이었는데, 그런 신분이 붙게 된 연유는 너무나 사소했다. 아버지가 당에서 받은 한 파장의 '랭상모(벼농사를 위해 심는 모)'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까지 온갖 불이익을 받게 되니 일철은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디는 '탈북기'와 '유령의 도시'처럼 전체주의의 희생자로 주로 '가족'을 놓는다. 모든 작품에서 전체주의는 가족을 파괴시키는 주범으로 등장한다. 김일성 행차라는 '1호 행사' 때문에 통행이 금지되어 강 하나만 건너면 되는 지척에 두고도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아들의 이야기(지척만리)나, 역시 '1호 행사'로 인해 역이 폐쇄되어 그로 인한 혼잡 탓에 부상당한 가족의 이야기(복마전), 그리고 공장의 할당량을 채우느라 아내가 아궁이에 쓸 장작 좀 구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결국 재떨이를 던져 아내를 내쫓고 마는 한 노인의 이야기(준마의 일생)가 대표적이다. 더구나 그 눈이 '어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비' 아래서 지배받고 있는 모든 이들의 눈 또한 '어비'의 눈이라, 그 상호 감시 때문에 겁먹은 토끼들은 더욱 체제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각본에 따른 정확한 연기는 개인이 전체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몸짓이다. 단편 '무대'는 북한 사회 자체가 하나의 무대이며, 자신들은 그저 체제가 원하는 연기를 하고 살 뿐이라는 것을 절망 속에서 고백한다. 이 모든 단편들에 나오는 주역들은 하나같이 한 평생 체제를 믿고 그것에 헌신해 온 인물들이나 그것을 계기로 그들은 체제가 '빨간 버섯'과 같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경희가 '어비'를 보았던 것과 똑같이.


 "왜 자신해서 벽돌집 시녀가 됐던가 말야!"

 "간판에 속아서였지. 나처럼. 속엔 독재의 칼을 품고도 겉으로만 평등이요, 민주주의요, 역사의 주인이요, 지상낙원이요 하는 허울 좋은 그 간판에 속아서 말야."

 "맞네. 세상 만물은 독한 것일수록 고운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법이네."

 "그래, 독버섯처럼 말이지? 독버섯처럼!" ('빨간 버섯', p. 261 ~ 262)


 '고발'은 한 마디로 북한 사회라는 단일한 차원을 넘어, 전체주의가 얼마나 개인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겁먹은 토끼로 만들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기 때문에 박근혜나 김기춘 같은 존재들이 전체주의를 꿈꾸는 지도 모른다. 그들이 만들었던 '블랙리스트'야 말로 '어비의 눈'이 아니던가! '계엄령을 선포하라!'나 '촛불 시민 총살하라!'는 팻말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들고 다니는 '태극기 집회'의 사람들을 보노라면, '고발'은 '우린 북한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하고 읽어야 할 소설이 아니라 '이러다 우리도 이렇게 될 지 몰라' 하는 무서운 경고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혹시 고운 허울만 뒤집어 쓴 독버섯은 아닌지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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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무기 - 이응준 이설집
이응준 지음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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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응준. 잘 모르는 작가다. 고작 그의 소설 두 권만 읽었으니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소설로 만나 본 그는 문장을 참 잘 쓰는 작가였다. 왜 어떤 글을 읽으면 글 쓰는 솜씨를 훔치고 싶은 작가가 있지 않은가? 솔직히 그런 작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번에 나온 그의 책, '영혼의 무기'를 보고 알게 되었다. 요컨대, 이런 글을 통해서다.


 요즘은 누구든지 개인 미디어에 실시간으로 글을 올려버리는 가공할 자신감과 광기에 가까운 습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글을 쓰는 능력을 함양하고자 하는 이라면 아직은 미숙한 자신의 글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진정한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과거 우리의 작가들은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글이 발표되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그리고 대중은 그러한 작가정신을 흠모함으로써 자신의 소박한 문장을 되돌아볼 줄 아는 아름다운 교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작가들의 글은 한낱 철지난 상품이 돼버리고 그런 작가들을 자신의 분신보다 열등하게 여기는 대중의 문장은 변기 모양의 흉기다.(...) 글이 그 내용과 형태의 가치를 담보할 때까지 스스로 감추고 기다리는 태도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기법일진대 이 당연한 사실을 작가와 대중이 모를 때 그 사회는 언어의 무간지옥 속에 갇힌다.(p. 201 ~ 202)


 그는 쉽게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의 글을 세상에 내보는 것을 두려워 하며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된 글로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자였다. 얼른 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도자기 만드는 장인이 떠올랐다. 설령 단 한 개의 도자기도 세상으로 내보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격이 되지 않으면 모조리 깨버리는 장인. 이응준에게 글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쓴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에서 언뜻 그런 것이 감지된다. 그에게 있어 글은 그냥 글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 전부를 걸어야 할 지도 모를, 영적인 그 무엇이다.


 필사로 문장이 얻어진다는 것은 철저한 허상이다. 문장은 영적인 물질이다. 그것은 반 이상이 타고난다. 또 문장을 못 쓴다고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거칠고 아귀도 맞지 않는 문장을 쓰면서도 독특한 세계관으로 이름을 날린 작가들은 많다. 그러나 그들이 아름다운 문장의 소설가라는 말을 듣지는 못할뿐더러 문장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소설의 맨 처음이기는 하다. 더더욱 필사를 멀리 해야 하는 이유에 다름 아니다. 작가가 되려면 일단은 마음에 새겨진 것들을 글로 옮겨야 한다. 그것이 비록 누구의 영향을 받아 싹을 틔웠든 간에, 결국에는 작가 나름의 해석과 정신이 담긴 글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필사를 통해 작가가 됐다고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들 무슨 대단한 고행 중에 문학의 본령을 터득한 줄로 아는데, 알고 보면 그들의 글을 문학으로 승격시킨 요소는 무식한 필사가 아니라, 하다 못해 필사까지 감행하게 한 열정과 노력이었을 것이다.(p. 229)


 '영혼의 무기'를 읽다보면 그가 굉장히 종교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글은 그런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번제로 드리는 기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 말이나 막 할 때 눈을 뜨고 있는 우리는 눈을 감고서 기도한다. 세상은 살인적인 속도에 온갖 현란한 치장과 야비한 선전 들을 실어서 보여준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간이라는 상처는 참혹해지고 삶은 중심을 잃지 않았던가. 나를 보고 사랑한다고 하는 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듣고 뭔가를 깨달은 그 사람의 영혼을 믿는다.(p. 27)


 그것이 작가로써 가지는 세상과 대중에 대한 의무이기에. 쉽게 말하자면, 진정성. 그랬기에 그는 설사 자신의 문단 생활이 망쳐지더라도 신경숙의 표절에 대해 '침묵의 공범'이 되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내부고발자'가 되었을 것이다.


 신경숙은 한국문학의 당대사 안에서 처세의 달인인 평론가들로부터 상전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으며 동인문학상의 종신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등등'의 요인들로 인해 문단 최고의 권력이기도 하다. 그러한 신경숙이기에 신경숙이 저지른 표절이 이른바 순수문학에 대해서는 순진할 수밖에 없는 대중, 특히 한 사람의 작가만큼이나 그 개개인이 소중하기 그지없는 한국문학의 애독자들과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가 풍전등화인 한국문학의 본령에 입힌 상처는 그 어떤 뼈아픈 후회보다 더 참담한 것이다.(p. 389)


 '영혼의 무기'는 이런 이응준의 글들을 담고 있다. 시인으로 등단하여 소설가를 겸하는 그가, 시와 소설로 발표하지 않은 글을 다양하게 담고 있는 것이다. 문학적 장치로 여과되지 않은 것이라 더욱 자신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글을. 작가는 스스로 '이설(異說)집'이라 이름 붙였다.



 이설(異說). 그것은 왼손잡이와 같다. (너무 서툰 비유라 미안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계속해 보련다.) 다들 오른손으로 하라고 강요하지만 결코 굽히지 않는 왼손잡이. 당당히 왼손을 들고 오른손잡이가 보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을 외치는 왼손잡이. 이 책에 담긴 이설(異說)의 형상이다. 그것은 듣기에 편치 않은 말이다. 고개를 외로 꼬고, 삐딱한 시선으로 면전에서 대놓고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달라' 하는 말이니까. 실제로 불편한 글이 있다. 보수와 진보 양 쪽의 적대적이며 편협한 태도들을 공박하는 글을 읽노라면 팔짱만 끼고 말만 앞서는 양비론자 같기도 하고 혹은 잔혹한 괴물에게도 어느 정도 인간성이 있을 것이라 순진하게 기대하고 있는 이상주의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도중에 책을 던지지 않고 끝가지 읽게 되는 것은 설령 그런 글이라 하더라도 그 바탕에서 어떤 아집이나 타산 같은 것이 아니라 '나도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 우리 같이 고민해 보자.' 하는 식의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맞다. 그의 이설(異說)은 종착지가 없다. 누구나 종착지로 생각하는 곳에서 홀연히 나타나서는 '아직 우리는 더 걸어야 한다'고 말하는 길과 같다. 온전한 이해를 위한 부단한 회의(懷疑). 그것이 바로 그의 이설(異說)이다.


 인간에 대한 회의(懷疑)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p. 198)


 그러므로 '영혼의 무기'는 두 가지 점에서 이롭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작가 이응준의 영혼이 가진 전체적인 형상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해답 같은 것은 나와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해 평소 잘 생각해 보지 못했던 방향에서 전혀 새로운 쪽을 가리키며 진행되는 사유의 경로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아주 흥미로운 여정이었다. 그가 보여주는 색다른 풍경은 흥미로웠고,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은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무려 831 페이지의 책으로, 책 자체가 무기가 되는 책이지만 지루해서 하품이 나거나 난해해서 건너뛰는 곳은 없었다. 알뜰하게 읽게 되고 살뜰하게 다가오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하나는 확실하다. 이응준 작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작가는 그것 역시 회의(懷疑)해야 한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그의 반려견 '토토'에게 바쳐졌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모양이다(정확히는 2016년 7월 1일). '토토'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회의(懷疑)가 실은 좀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걸 드러낸다. 어떤 존재든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존재가 얇은 평면이 아니라, 저마다 살면서 감내해 온 과정이 있는 입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타자에 대한 존중이 먼저고,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바로 그런 것을 위한 회의(懷疑)이기 때문이다. 그런 눈을 가진 그이기에, 인간과 동물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나같이 묵직한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존재들이므로.


 세상의 혼돈 앞에서는 숨이 막히듯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그 혼돈을 견뎌내느라 날이 갈수록 강퍅해지고 잔인해지고 사나워지는 사람들 앞에서 다름 아닌 나 자신을 본다. 만약 공부라는 것이 있다면, 공부란 그 반대편으로 걸어가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이것이 공부의 시작이거나 공부의 전체가 될 수는 없겠지. 그러나 공부의 중간 점검 정도는 될 것이다. 그릇된 공부는 때려치워야 한다. (2016년 8월 7일 / p. 711)


 그에게 회의(懷疑)란 공부고 종국엔 사랑이다. 이런 이설(異說)을 어찌 감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독주(毒酒)가 약이 되기도 한다. '영혼의 무기'가 그렇다. 자주 흠뻑 취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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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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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문유석 작가의 소설 '미스 함무라비'를 읽고 가장 먼저 생각 났던 말이다. '오심즉여심'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뜻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몇 해 전에 한 드라마가 유행시킨 대사 그대로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이 말을 알게 된 것도 문유석 작가가 어디선가 했던 인터뷰 때문이었는데, 이 말은 그가 싫으면 싫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개인주의자가 되어 자유의 확장을 지향하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분인 판사로서의 책임 또한 다하고자 타인의 말을 타인의 입장에서 잘 헤아리기 위해서 지니고 있는 태도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으나 작가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자유와 책임을 하나로 융화(融和)시키는 지점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재밌게도 이런 그의 마음은 '미스 함무라비'의 인물 구성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모두 7부에 이르는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크게 두 사람이 이끌고 있는데, 한 사람은 제목인 '미스 함무라비'를 별명으로 가지고 있는 박차오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임바른이다. 둘 다 판사로 경력은 짧다. 박차오름은 이제 갓 판사로 부임했지만 권위와 보수(保守)의 굳건한 성채와도 같은 법원 조직 안에서 그런 분위기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거침없이 주어진 선을 뛰어넘는 소신과 패기를 보여 준다. 그야말로 작가가 바라마지 않는, 싫다는 것을 싫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온전히 구현된 것과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임바른은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다. 박차오름과는 달리 임바른은 함부로 재판 당사자들에게 감정 이입하지 않으려 애쓰고 법관으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보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를 더 많이 신경쓴다. 한 마디로 자신의 자유보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유와 책임을 박차오름과 임바른이 나눠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나 다른 이들이 서로에 대해 알며 이해해 나가는, '오심즉여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내게 소설은, 멀리 떨어져선 서로 외면하는 것들을 하나로 연결지어 가까운 곳에서 상호 이해와 포용으로 안을 수 있도록 만드는 매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박차오름과 임바른을 묶고, 그들과 그들의 직속 상관인 부장 판사 한세상을 묶으며,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사법부라는 조직과 옳고 그름을 쉽게 가릴 수 없는 세상을 묶는다.


 그러나 그 매듭이 정말 묶고자 하는 상대는 아마도 우리 독자들일 것 같다. 무엇보다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린 현재의 사법부를 곱게 보지 않는 바로 나 같은 사람 말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그 때 탈주한 지강헌이 외쳤던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전히 한국 사법 현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마음을 강하게 대변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재벌 앞에서 한없이 약한 사법부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었던 영화 '베테랑'이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으며 흥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교수가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에게 석궁으로 테러를 가한 사건을 다뤘던 영화 '부러진 화살'도 사법부를 부정적으로 묘사했었는데 300만이 넘는 관객이 들었었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영장 기각에 있어서도 이를 접한 많은 이들이 비난을 쏟아내자 사법부가 법관의 독립을 존중해야 한다고 변호했지만 되려 사람들은 '제발 재벌에게서 독립하라!'고 더 크게 외쳐대고 있는 형편이다. 작가 자신도 책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2014년 여론조사업체가 실시한 리얼미터 실시한 '국민으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기관'에 관한 설문 조사에서 법원이 5위 군대와 7위 국회 사이에 있었다(p. 141)고. 이토록 법관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우리는 그만큼 더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작가는 그런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현장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어려움과 고민은 물론 조직 내부의 불합리한 관행과 전관예우 같은 부끄러운 과오까지도 가져와 자신들이 진정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오롯이 보여주려 한다. 이것이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어떻게 잘 좀 봐달라 하는 의미는 아닐 것 같다. 아마도 여기에 깃든 본심은 소설에서 박차오름과 임바른이 제출된 기록이나 서류로는 알 수 없었던 진실들을 재판 당사자들을 직접 대면하고 친히 대화하는 가운데 알게 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바로 그렇게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직접 피부로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사실 작가 자신의 말마따나 지금껏 제대로 드러난 적이 거의 없었던 판사들의 삶이 아니었던가. 나도 이제야 책을 통해 실제 법관들에겐 법봉이 없다는 것과 골무가 그들의 가장 요긴한 도구이며 미처 읽지 못한 재판 기록들을 집으로 운반하기 위한 도구인 보따리와 캐리어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그들이 '월화수목금금금'의 과도한 노동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렇게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자 나 또한 그들을 보는 눈이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 프로도가 골룸을 곁에서 오래 가까이 지켜보고서 변했던 것처럼 바뀔 수밖에 없었다. 소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얼른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여전히 많은 다수의 법관들이 판사로서의 직업적 양심을 고수하며 정의 구현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도 하면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고 한다면 아직은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고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부장 판사 한세상은 처음엔 박차오름이 자신의 큰 딸처럼 사사건건 말꼬리나 잡고 대드는 데다  거친 풍파나 몰고오는 사고뭉치라서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끝에 가선 그녀의 됨됨이를 믿고는 그녀가 자신을 대신해서 정의를 잘 세워줄 것이라 생각하며 편한 마음으로 사직서까지 내게 된다. 이런 푸근한 아빠의 미소를 나 역시 소설의 말미에서 짓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정녕 오심즉여심을 하려면 나태주 시인의 '풀꽃'과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소설 속의 진실과 신뢰는 바로 그런 시선들을 통해 발견되고 형성된다. 문득 내가 너무 사람과 사물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보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와 안 것은 아니다. 실은 예전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는 게 바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이유로 사람과 사물을 내 멋대로 재단하는 나를 방치해 왔었다. 어쩌면 나는 소설에 나오는 성공충 판사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내 식대로 이해하고도 전혀 부끄러움을 몰랐으니. 최근 왠지 모르게 우울에 깊이 물드는 때가 자주 있다. 사람들에게 이것을 고백하면 갱년기가 온 게 아니냐면서 놀리기 바쁘다. 그런데 '미스 함무라비'를 읽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불현듯 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우울한 것은 전적으로 나 때문인데, 나는 남을 위해선 얼마나 우울을 느꼈거나 눈물을 흘렸던가?' 하고 말이다. 결국 내가 꽤나 타인의 상처와 아픔에 둔감해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설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타인에게 행패를 부렸던 노인처럼 나 역시 내게 있는 이기적인 모습을 정당화시키려고 타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신중한 이해도 없이 멋대로 단정하고 단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깊고 좁은 우물처럼 내 내부로만 파고드는 시야를 밖으로 넓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처럼 아프고 힘든 이들을 담을 수 있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정의라는 것도 누군가 우리 대신 실현시켜주거나, 우리에게 쥐어주기 보다는 우리가 삶에서 스스로 실천할 때 보다 온전하고 확고하게 세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악이 이기는 것은 딱 하나,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로 모두가 삶의 근본적 태도로써 정의를 일상에서 실천해 나간다면 그런 악들은 더이상 범접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도 이 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배심원인 일반인들이 주된 역할을 하는 국민참여재판인 것도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그런 정의를 구현하는데 있어서도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타인의 처지를 내 것처럼 여기는 '오심즉여심'일 것이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으며 너의 문제가 나 또한 같이 짊어지고 해결해야 할 것이라면 항상 실천을 유보시키는 대표적인 핑계들이라 할 수 있는 이것들을 -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나 '나 하나 안 한다고 별 티가 나겠어?' 혹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뭘.' - 생각하는 것조차 부끄러워서 더이상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미스 함무라비'는 신기한 소설이다. 나를 자신에게 묶었다가 슬며시 풀어주고는 나로 하여금 다른 이와 묶게 만든다. 작가 역시 오랜 재판 경험을 통해 깨달았던 것 그대로, 우리 모두가 실은 연약하며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점에서 공동 운명이라는 자각 속에서 말이다. 이제 내 삶과 아픔을 주시하는 것처럼 타인의 삶과 아픔도 세밀하게 오래도록 바라볼 것이다. 그렇게 신화 속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에 유혹 당하지 않으려고 돛대에 자신을 단단히 결박시킨 것과도 같이 나를 기꺼이 '오심즉여심'에 나를 묶어둘 것이다. 미니스커트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박차오름 때문에 생각난 말인데, 이탈리아 작가 다차 마리이니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진지한 말을 하려 들면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그녀의 허벅지가 유창한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외면의 허벅지보다 존재의 내면을 들려주는 입을 더 눈여겨 보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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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1-25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을 재미있게 지었네요 이 책 나왔을 때 라디오 방송에 나온 걸 들었어요 저는 우연히 그런 걸 듣기도 하는군요 그때 법봉 얘기했어요 실제로는 없다고... 그런 거 드라마나 영화에는 나오잖아요 예전에는 없었을까요 말만 하면 좀 심심할 것 같기도 한데...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겠네요

힘 있는 사람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주 없지 않겠지만, 힘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희선

ICE-9 2017-02-05 23:13   좋아요 0 | URL
오, 라디오에서 소개된 책이었군요. 희선님은 라디오를 자주 들으시는군요. 저는 예전엔 주로 새벽에 듣곤 했는데 요즘은 통 안 듣고 있네요. 맞아요. 지금도 드라마에는 판사가 법봉을 두드리는 장면이 나와서 저는 당연히 있는 걸로 알았는데 진실은 없다네요. 힘 없는 이들 편에 쓰는 판사들이 소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많다는 걸 저 역시 믿고 싶어요. 그렇지만 보이는 현실은 참 많이 다르죠. 특히 특검이 신청한 영장들이 말도 안되는 사유로 기각 당하는 걸 보노라면 ㅠ ㅠ. 그리고 댓글이 너무 늦었네요. 요즘은 왜 이리 서재 들어오기가 힘든지 흑흑 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