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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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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의 대선용 여론 몰이를 위한 댓글 선동 공작이 계기가 되어 쓰여졌다는 장강명의 '댓글부대'는 정작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는 않고 에둘러 돌아가선 그저 댓글 조작의 위험성만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실망스럽긴 했어도 장강명 작가의 소설답게 이번에도 역시 빠르게 술술 잘 읽혔다. 흡인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줘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이 꼭 재미만이 아니라 동시대에 뭔가 의미있는 목소리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댓글부대'가 꽤나 아쉬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장강명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추구했던 것일까? 댓글이 어떻게 조작되고 대중을 선동하는 지를 여과없이 담아내자는 정도였을까? 사실 소설은 딱 그 정도만 보여준다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댓글 선동에 뛰어든 팀-알렙의 시작과 성공 과정이 이야기의 전부니까 말이다. 겨우 세 명으로만 이루어진 팀-알렙이 인터넷으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한 것을 그 중 한 멤버가 기자에게 내부고발 하는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국정원의 뉘앙스를 풍기는 인물이 둘 정도 나와 그들과 얽히고 나름 반전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풍부한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경마장의 말처럼 한 라인만 직선으로 돌파하는 소설이다. 그래서일까? 이야기가 한없이 얄팍하게 느껴진다.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갈등인데, 이 소설엔 아무런 갈등이 없다. 팀-알렙은 한 몸의 유기체처럼 잘 통일되어 움직이고 별다른 고난도 없이 하는 일마다 척척 성공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뭔가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도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그들에게 접근해 오고 성공의 달콤한 향기를 맡게 하더니 정치와 여론 조작이라는 더 큰 판으로 끌어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전체를 이끌어 가는 인터뷰는 얼른 보면 그들의 패망 같지만 실은 그들 성공의 정점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인물의 깊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종잇장처럼 한없이 얇게만 보인다. 때문에 소설은 다큐멘터리 보다는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후속편에 가깝다. 인물과 이야기가 아무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니 소설이 들려주고자 하는 목소리가 마음에 채 와닿기도 전에 그저 영상만 현란하게 스쳐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은 독자를 대화 상대자가 아니라 아이-쇼핑 하는 이로 만든다. 공감이 차단 당한 쇼윈도 안의 진열품을 눈으로 훑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인물들이 편하게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이 가진 최대의 약점 같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그저 장기말 이상의 존재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러니 당하는 자들은 마냥 바보 같고 덕분에 댓글 공작은 그 위험성이 원래보다 더 과잉되어 보인다. 그리고 그 과잉된 위험은 독자로 하여금 설마 댓글이나 이런 저열한 조작이 그 정도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냉철하게 생각해 보기도 전에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한다. 하지만 '댓글부대'는 그런 영향력을 경고하고 스스로 먼저 그것의 진리치를 독립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성찰할 것을 고취하자는 목적에서 나왔다. 이건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소설은 원래 자신이 가진 목적과 정반대를 독자에게 행하고 있다. 자기 모순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실패작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은 실패작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미 출발부터 작가가 우월적 시선에서 작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한다면, 이 소설은 위험하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유명한 대사, '대중들은 개, 돼지 입니다. 조금 짖어대다가 조용해 질 겁니다' 처럼 대중에 대한 경멸을 은근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잡한 조작에도 이토록 쉽게 흔들리는 대중이라니! 이런 작가의 조소가 팀-알렙이 인터넷으로 뭔가 저지를 때마다 은연중 느껴지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감정을 성급히 일반화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립적으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중을 소설 속 인물들만큼이나 얄팍하게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나라가 망해도 여전히 여당을 지지하는 35%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소설의 주제를 강조하다 보니 조금 무리를 해버렸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런 우월의 시선은 날 불편하게 만든다. 결국 여기엔 이 현실이 아무리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이런 대중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가 있을 뿐, 이 현실을 타개하고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자발적 노력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내 생각일 뿐이지만, 좋은 소설은 독자를 홀로 유폐시키지 않고 타인과 연대하게 만든다. 우리가 유포되는 흑색선전에 휘둘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제대로 성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연대를 강고히 만들기 위함이다. 하지만 소설은 나 아닌 타자를 그저 의심하거나 경멸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 위험하다. 이 소설은 달콤하다.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삼키면 독약이 된다. 이런 설정이 설득력이 있는가, 이런 태도에 문제는 없는가 천천히 따져보며 삼켜야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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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7 2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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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8 04: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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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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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과 윤리.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읽고 얼른 떠올리게 된 두 단어다. 니체 덕분이다. 그는 이 둘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행위 할 때 언제나 우리가 가진 기억의 한 단면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는 충분히 수긍이 간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우리는 필요한 기억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은 망각하니까. 행위는 망각이 선행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서 오히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망각은 어디까지나 선택과 배제로 인한 결과다. 그런 면에서 비윤리적이다. 필요에 따라선 타인마저도 쉽게 망각할 수 있다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도덕은 이러한 부당한 망각에 저항하여 단면이 아니라 전체를 기억하려 애쓰는 양심을 만들었다고 니체는 말했다. 내게 '그믐'의 주인공 남자는 바로 그런 니체의 양심이 구현된 존재로 보였다. 사춘기 시절에 동급생을 칼로 찔러 죽인 그는 후일 병원에서 그믐달이 뜬 어느 날 '우주 알'이란 존재를 영접하고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건 다름 아닌 전체 기억을 볼 수 있는 힘이었다. 소설에서는 이를 패턴이라 부른다. 그것은 표면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전체적인 흐름을 볼 수 있는 창구와 같다. 그런 점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된 기억을 대등하게 복원하려는 니체의 양심과 닮아 있다. 그런데 소설엔 그렇지 않은 이들이 나와 남자와 대비를 이룬다. 이들은 남자를 둘러싼 여자들로 하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고 다른 하나는 남자가 죽인 아이의 엄마다. 둘은 모두 과거의 아픔에 사로잡혀 니체가 비윤리적이라 칭했던 행위 중심의 부분적인 기억들을 가지고 남자를 찾아와선 고백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어려움과 고통만 토로할 줄 알았지 정작 남자의 삶은 어떤지, 그 내면엔 무엇이 움트고 있는지 전혀 묻지 않는다. 한 마디로 두 여자는 자기중심인 것이다. 반면 전체를 기억하는 남자는 언제나 더 많이 들으려 애쓰고 그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맞춰주기도 한다. 그녀들에게 기억이란 지금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만 남자에겐 자기변호를 위한 기억의 수집 보단 타인의 행복을 창출하는 기억의 창조가 더 중요하다. 즉 남자는 타인중심이다. 소설은 이렇게 자기중심과 타인중심으로 선명하게 나눠진다. 물론 소설은 후자를 지향한다. 단적으로 소설이 타인을 없애는 흉기로 지극히 자기중심 적인 로 시작해서 오로지 상대를 드러내야만 자신을 보일 수 있기에 타인중심이라 할 만한 으로 끝난다는 점과 여주인공이 남자의 궁극적인 희생 후, 비로소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라는 질문을 시작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치 소설에서 여자가 작두로 원고를 잘못 잘라 모든 게 뒤섞여 버린 것 같은 형태를 취한 소설의 형식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여자가 이야기를 잇기 위해 원고를 최대한 집중해서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듯이 소설도 이런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타인중심을 더욱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단면을 만드는 작두가 줄 수 있는 '확실한 앎' 보다는 여자의 머리를 뒤덮는 스카프에 간직된 '모호성'으로 우리를 더 열려고 하며 그 개방을 통해 입체로서의 타인을 응시케 하여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그믐달이 되도록 이끈다.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해가 지기 전에 사라져 버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존재지만 그 달엔 다음과 같은 힘이 있다.

 달빛에는 이상한 힘이 생겨 잘라진 것을 붙이고, 끊어진 것을 잇게 되지. 그리고 고통을 멈추게 해 줘.(p. 140)

 여기엔 타인중심의 이해로 서로 연결될 때, 우리의 고통은 비로소 끝날 것이라는 작가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오직 한 가지, 나 자신이 그믐달처럼 사라져야 한다. 이것은 나의 기억으로 타인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자세를 필요로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는 여자 모습처럼 타인에 대한 단정이 아닌 무수한 질문으로 나를 채우는 것이야 말로 소설이 도래시키고 싶어 하는 그믐의 상황이다. 이야기 속의 아내가 스카프로 자신의 시야를 모두 가렸을 때 홀연히 자기가 정말 원하는 곳에 있게 된 것처럼 바로 그 그믐에서 우리 역시 그토록 원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 소설은 약속한다. 그러고 보니 버지니아 울프도 무언가를 규정하기 힘든 밤이야 말로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말했었다. 진정한 사랑은 오히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을 통해 타인중심이 무엇이며,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가득 경험한 지금, 버지니아 울프의 말도 있고 하니 나는 더욱 소설의 약속을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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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2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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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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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1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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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2 2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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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2 0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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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6 1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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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6 01: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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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6 1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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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30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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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5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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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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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엔 하나의 열망이 있다. 시간을 붙잡고 싶어 한다. 김중혁 작가의 단편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작가 말대로 연애 소설이라면 여기엔 오로지 단 하나의 연애만 존재하는 셈이다. 바로 시간과의 연애다. 생각해 보면 시간이란 연인과 같다. 내 사람이 아닐 땐 빨리 내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하고, 내 사람이 되어도 행여나 내게 이 많은 행복을 주는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곧잘 불안에 빠진다. '뱀들이 있어'의 정민철이 짝사랑하는 류영선에게 그랬듯이, 혹은 '요요'의 차선재의 삶에서 불현듯 사라진 장수영처럼 말이다. 손아귀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것일수록 단단히 잡고 싶은 법이라서 그런지 시간이든 연인이든 불안할수록 더욱 움켜쥐게 된다. 소설엔 바로 그런 시간의 포획을 향한 갈망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시간일까?

 그건 바로 시간이 코스모스(cosmos) 세계의 상징이기에 그렇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어김없이 정해진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러기에 예측도 쉽다. 아침 조례 시간의 교실 모습과도 같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반듯이 돌아가는 세계. 시간은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의 지그소 퍼즐이나 '종이 위의 욕조'에 나오는 박물관 전시 회장도 다 시간이다. 퍼즐은 자기 자리가 정해져 있고 박물관 전시 회장 역시 큐레이터가 계획한 대로 관객의 동선이 다 정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보트가 가는 곳'의 비행물체 또한 마찬가지다. 그 역시 박물관 전시 회장과 똑같이 사람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몰아가지 않았던가. 이런 시간을 장악하려는 열망이 8개의 단편 곳곳에 배여있다. 때로 그것은 '상황과 비율'에서의 차양준이나 '힘과 가속도의 법칙'에서의 현수처럼 상황 통제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의문은 계속된다. 하나 같이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편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삶이 조그만 바람에도 쉬이 날아가는 땅콩 껍질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을.

 규호의 입으로 전해지는 인물인 '피존'은 그것을 더욱 명확하게 한다. 그는 알콜중독자인데 술에 취하면 자기를 비롯하여 주위의 열려 있는 모든 것을 채우거나 닫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문을 모조리 '잠근다'고 말한다. 그가 그러는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을 지 모르기 때문이다. '힘과 가속도의 법칙'에 나오는 현수와 똑같이 그는 자신을 파괴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열린 모든 것을 잠그는 그의 행위는 기실 자신을 살리려는 노력에 다름아니다. 


 저는 위스키를 마실 때마다 창문을 꼭 걸어 잠급니다. 술에 취해서 저도 모르게 뛰어내릴까봐서요. 제가 비집고 나갈 수 없을만큼 작은 창문인데도 매번 창문을 잠갔습니다. 비겁한 제가 부끄러웠고, 소심한 제가 창피했습니다.(p. 125)


 이런 그의 고백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는 스스로를 땅콩 껍질만큼 한없이 엷은 존재로 여긴다. 아니나 다를까 술을 마시면 언제나 몸이 붕 뜨고, 무중력 상태를 체험하는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앞의 세상은 무정하기만 하다. 자신 속에서 아무리 고통의 뱀들이 날뛰어도 세상의 시간은 그저 무심히 흐를 뿐인 것이다. 마치 먼저 이별을 통보하는 연인의 모습과 같다. 실연을 겪어본 이들은 잘 알 것이다. 이별을 결심한 상대의 마음이란 어찌나 냉담으로 단단한지 그대로 두꺼운 얼음과 같다는 것을. '보트가 가는 곳'에서 정화가 말하는 얼음 그대로다.


 "카메라가 얼음 아래에서 얼음 위로 올려다보는데, 사람들이 다 보여요.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들도 먹먹하게 들려요. 다 보이고, 다 들리는데 그 사이를 엄청나게 두꺼운 얼음이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끔찍하죠?"(P. 257)


 차갑게 뒤돌아선 연인에게 지금 내가 너로 인해 얼마나 아픈지 말하는 나는 두꺼운 얼음 아래에서 소리를 내지르는 사람과 같다. 상대에게 전혀 가 닿지 못하는 것이다. 김중혁이 '피존'의 이야기를 이미 헤어진 연인 사이인 규호와 정윤과 엮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규호가 아무리 아파도 정해진 시간이 되자 정윤은 술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린다. 피존과 규호 모두에게 정윤은 세상의 가면인 것이다. 세상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결코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작가 역시 규호(7시)와 정윤의 시간(11시)이 서로 다르게 엇갈린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피존은 이렇게 토로하는 것이다.


 맺힌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 자, 여기 술잔을 잡아 봅시다.(...)

 여기에 왜 맺히는지 압니까? 이것은 온도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차가운데, 바깥은 차갑지 않아서. 나는 아픈데, 바깥은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맺히는 겁니다.(p. 133)


 여기서 내 존재의 엷어짐이 실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작가는 은연 중에 내비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내 시간의 소외에서 온다는 것을.

 세상의 시간이 두터운 벽으로 가리워져 내 인지와 의지의 시야와 정도를 한없이 벗어나기에 나란 존재는 점점 작아져만 가는 것이다. 그런 내게 세상의 시간이란 온전히 예측불허다. '뱀들이 있다'에서 일어난 대지진, '보트가 가는 곳'에서의 검은 구멍과 같다. 언제 내 발 밑에 불쑥 나타나서 나를 삼킬 지 모른다. 그러기에 나란 존재는 더 쪼그라들고 장악의 갈망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그 갈망이란 알고 보면 신이 되고픈 욕망이기도 하다.

 신의 속성은 흔히 전지와 전능으로 일컬어진다. 전지와 전능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예측 불허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은 결코 자신이 모르는 것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지 않는다. 예측 불허는 완벽한 계산 속에서 설 자리를 잃고 모든 우연마저 필연의 부분이 된다. 똑같이 코스모스의 세계를 염원하는 것이다. 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소설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 '상황과 비율'의 차양준이 대표적이다. 그는 포르노를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겐 정사 보다 상황이 더 중요하다. 그에겐 수십 개의 상황이 미리 계획되어 있고 포르노는 정확히 그 계획대로 연출되어야 한다. 그는 신처럼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상대의 마음을 몰라 불안하기만한 연인이 가장 되고픈 모습을 바로 그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상대방이 설 자리가 없다. 신적인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이 소설이 하필이면 포르노 세계를 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헤겔은 남녀간의 정사를 타자를 상호 인정하는 가장 개인적이며 친밀한 행위로 꼽은 바 있다. 하지만 포르노는 서로를 도구로 이용할 뿐이다. 타인의 존재 가치는 거의 제로에 가까울만큼 엷어진다. 일례로 여배우 송미는 정사를 나누며 언덕을 굴러가다 누군가에 짓밟히는 탁구공을 상상한다. '피존'과 현수에게서 보았던 자기 파열의 열망을 송미 역시 드러내는 것이다. 신을 향한 열망은 점점 엷어져만 가는 자신을 구원하려는 소망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제 그 열망은 자신이 가졌던 통증의 시간에다 타인마저 빠뜨린다. 공교롭게도 소설엔 차양준과 같이 '신'이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이 나온다. 바로 '뱀들이 있어'의 정민철이다. 그는 게임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현한다. 그런데 차양준과 비슷하게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향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사상자가 무려 200명이 넘고 가장 친한 친구마저 생사 불명인데도 그는 걱정과 위로가 아니라 마치 불구경을 가듯 '이상한 호기심과 설명할 수 없는 쾌감 때문에(p.167)' 고향을 찾는 것이다.


 정민철은 타인의 슬픔을 잘 느낄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자주 되묻곤 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언제나 관찰할 뿐 공감하지는 못했다.(p. 168)


 신이라 할만한, 다른 의미에서 시간을 포획했다고 보여지는 이들이 왜 한결 같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마지막 단편인 '요요'를 읽다보면 이것이 바로 시계를 발명한 근대의 패배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요요'의 주인공 차선재는 시계 제작자다. 그는 '사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계를 만든 적이 있다. 그런데 '사계'는 대표적인 중세의 시간이었다. 중세의 시간은 하나의 흐름이었고 유일하게 외계의 변화에 따라서만 분절되었다. 하지만 근대의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시침과 분침 그리고 초침은 외계의 변화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본위로만 흘렀다. 외계가 전적으로 거기에 맞춰야 했다.


 그렇게 시간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이것을 근대의 가장 커다란 패착이라고 보았다. 진정한 시간이란 그저 물처럼 흐르는 것인데 근대는 그것을 인위적으로 구분하여 공간화시켜서는 가짜 시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건 통제와 배제로 이루어졌고 타자를 고려하려는 맥락은 손쉽게 무시되었다. 결국 이 시간이 타자를 지배하거나 제거하는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낳았다고 그는 보았다. 작가가 소설에서 그리는 과정이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마치 이것을 드러내듯 갈망을 가진 소설 속 인물 대부분은 시간 포획에 실패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목의 가짜 팔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눈치챌 수 있을 듯 하다. 그것은 마네킹의 팔이 아니라 사실은 지금 우리의 삶을 포옹하고 있는 근대의 발명품인 시침과 분침이라는 두 팔로 이루어진 시계 바늘이라는 것을 말이다. 즉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가리키는 것은 규호가 꿈에서 본 것처럼 자기 구원을 위해 잡았으나 끝내 자기 파멸로 이끄는 자기 본위적인 팔들인 시간 자체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차원까지 고려해 생각한다면소설에 투영된 작가의 내심은 보다 분명해지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다음과 같지 않을까? 불안이 갈망을 낳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갈망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된다. 그럴수록 타인 역시 나만큼 불안하며 나처럼 거기서 빠져 나오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헤아려야 한다. '지진이 날 때 뱀들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안은 몸에서 나처럼 '작은 생명이 그 품 안에서 팔딱이는' 걸 알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움켜쥐려 내미는 자기 본위의 팔에서 상대의 손을 맞잡기 위해 내미는 타인본위의 팔로 나아가기 위한 생각 혹은 시야의 전환.

 그것은 '요요'에서 다음과 같은 장수영의 말로 구체화 된다.


 '네가 만들어준 시계를 들여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시침과 분침이 겹쳐다가 떨어지는 순간, 그건 멀어지는 걸까, 아니면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 걸까. 난 생각했어. 나쁘지 않아. 그래, 나쁘지 않아.'(p. 336 ~ 337)     


 가까이서 보면 멀어지기만 하는 시침과 분침. 그러나 보다 멀리에서 보면 그것은 오히려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보다 먼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가까이에 있는 근대가 조밀하게 공간화시킨 가짜 시간만 소유하려 애써온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작아지고 구속된 나만 느끼게 될 뿐이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자유는(존재감이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의 자유가 수반되는 것이므로) 보다 먼 시야로 진짜 시간을 바라보고 그 너나없는 흐름에 온전히 나를 내어줄 때 찾아올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네델란드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시간이란 바로 타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진짜 시간'에게 나를 맡김은 타인에게 나를 내어줌과 같은 행위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의 진짜 의미와 타인은 겹쳐지고 이제 우리는 왜 '요요'에서 차선재가 장수영에게 주기 위해 만든 'Station'('머뭄'을 뜻하는 제목 자체가 시간의 포획을 상징하고 있다. 차선재는 유일하게 시간 포획에 성공한 사람이다. 그것도 가짜 시간이 아닌 진짜 시간을)'이란 시계를 미완성인 채로 봉인하는 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발 아래에서 유유히 흐르는 보다 더 거대한 시간에 맡기는 것이며, 그 자체로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의미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때, 차선재는 드디어 '요요'로 형상화 되는 참된 시간 속에다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게 된다.


 삶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나친 갈망은 감옥이 되기 쉽다. 프랑스의 사르트르는 문학의 주제는 자유에 있으며 작품은 그것을 위한 작가의 기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우리 모두의 자유를 위한 김중혁 작가의 기도인 셈이다. 기도라고 하니 '뱀들이 있다'에서 정민철이 류영선의 기도를 들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 때 정민철은 류영선의 눈빛에 '다른 세상이 담겨 있으며 어디 먼 곳을 다녀온 여행자의 눈빛(P. 163)'인 걸 본다. 류영선도 정민철의 눈 속에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 깊이 들여다 본다. 여기엔 팔의 포옹이 아니라 시선의 포옹이 있다. 나를 내려놓고 타인을 더 깊이 헤아리려는 시선들이 서로 얼싸 안는 것. 이런 시선이야말로 작가가 바라는 '진짜 팔'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도 어서 그런 시선을 가지고 싶다. 먼저 누군가를 힘껏 안아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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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2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2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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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고 도라에몽이 생각났다. 표지의 빈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빈틈에서 나온 존재가 바로 도라에몽이니까. 책상 서랍에서 홀연히 튀어나온 그는 시간의 빈틈을 지나왔고 내부에 광막한 빈틈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 사람처럼 말하고 감정도 느끼는 데다 인간의 음식마저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그는 로봇이라고 하지만 생물에 가까우며 생물이라고 하기엔 생물에게는 불가능한 무한한 공간을 내부에 지니고 있어 우리의 지성으론 얼른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존재다. 따라서 도라에몽은 신비의 영역에 속해 있고 빈틈의 존재라는 점에서 꿈에 가깝다. 프로이트의 말마따나 꿈도 이성의 빈틈으로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도라에몽은 환상성을 갖는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상징계에 포섭되지 않는 '상상적인 것'. 그건 언어라는 빛이 들어가기 전의 어둠이며 규정으로 구획되기 이전의 물컹물컹한 점액질 덩어리와 같다. 소설에 나오는 존재에 빗대어서 말하자면 '이물'에 나오는 털뭉치다.


 도라에몽이 찾아온 것은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서다. 바로 노진구란 아이다. 그는 한없이 약골에다 운동은 젬병이고 성적은 반에서 꼴찌다. 노진구는 사회의 승자가 될만한 자질을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노진구는 사회의 가장 아래쪽에 거하는, 인도로 치면 '불가촉천민'이라 할 만하다. 노진구는 매일 비실이와 퉁퉁이란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비실이는 기업체 사장인 아버지를 둔 부잣집 도련님이고 퉁퉁이는 덩치가 크고 힘이 쎄 싸움을 잘 한다. 노진구를 사회적 약자로 약호화할 수 있다면 비실이는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 그를 도와주는 퉁퉁이는 그들을 비호하는 경찰이나 검찰 같은 사법 세력으로 약호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노진구가 괴롭힘 당하는 것은 현실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가 당하는 것과 똑같다. 노진구는 늘 비실이와 퉁퉁이에게 패한다. 현실의 사회적 약자들이 그러하듯이 그가 가진 힘으로는 절대 그들을 이기지 못한다. 한계를 절감한 그는 도라에몽에게 도움을 청한다. 환상의 힘이 현실의 빈틈으로 들어올 것을 요청한다. 상상적인 것이 도구의 몸을 빌려 현실로 물컹 들어오자 현실의 질서는 전복된다. 비실이와 퉁퉁이는 노진구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사죄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현실로 들어와 한 번 입을 벌린 환상은 때로 블랙홀처럼 현실 세계를 모조리 빨아들이기도 한다. 현실의 위계질서와 가치가 모조리 뒤엉키고 어떻게도 풀기 어려운 혼돈의 덩어리로 만든다. 참으로 강한 환상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도라에몽에 대해 구구절절 말한 것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 '도라에몽'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창'과 마지막 '어디까지를 묻다'를 제외하고는 곳곳에서 마치 도라에몽이 '어디든지 문'이라도 세워놓은 것처럼 환상이 들어와 있었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선 하이가 겪는 경험이 그랬고 '파르마코스'에서는 우물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이란 존재로 나타났으며 '관통'에서는 루초 폰타나의 그림에 난 틈으로 '식우'에선 도시 전체를 부식시키는 비가 그랬고 '이물'에서는 정체불명의 털뭉치가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선 이제 곧 사회의 안전망 바깥으로 내몰릴 이들이 거대한 덩굴로 변해버렸다.


 게다가 그렇게 나타나서는 모두 도라에몽의 도구가 그랬듯이 현실을 뒤집어 버렸다. 하이의 사라짐은 화자인 나의 변화를 초래했으며  '파르마코스'에선 고대 그리스의 파르마코스(고대 그리스에선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해질 때마다 제물을 바친다는 의미로 폴리스의 몇몇 사람을 뽑아 폴리스 밖으로 데려가서는 돌로 쳐 죽였다. 그렇게 죽은 자들을 '파르마코스'라 불렀다.) 그대로 희생양인 존재가 자신을 내쫓고 착취한 마을 전체를 수장시켜 버렸고 '관통'에선 틈 밖에 세계에서 지금의 처지와는 완전 반대의 나로 살아가게 되는가 하면 '식우'에선 국가의 중심이었던 도시가 모두가 기피하는 폐허로 돌변하고 '이물'에선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방식을 되짚어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선 사회에서 내몰린 자가 오히려 사회를 장악해 버렸다. 이렇게 비슷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동기도 노진구랑 비슷할까? 이제 내 힘으론 도저히 안된다는 마음이 환상에게 의지하도록 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정말 그럴 지도 모른다. 읽고나서 솔직히 난 '작가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란 생각까지 했으니까. 그만큼 이 소설집은 문학이 봉착한 절망적인 상황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제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화자의 말은 내게 '이런 세상에서 과연 언제까지 문학이란 걸 할 수 있을까요?'라는 작가 자신의 하소연처럼 들리기도 했다. 사실 이 소설집은 첫 문장부터 '이번에야말로 진짜 장례식이다.'라며 끝을 선언하고 있었다. 그처럼 여기엔 문학이 뭔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느낌, 현실 어디서도 희망을 길어올릴 수 없다는 낙담이 가득해 보였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선 생후 9개월 때 어머니를 엘리베이터 추락 사고로 잃고 습관처럼 건물을 기어올라 마치 추락으로 죽은 어머니가 개인적이면서 특수한 비극이 아니라 실은 우리 모두가 얼마든지 맞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비극임을 몸소 증명하며 그 자신 타인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문학이 되었던 하이가 44층까지 오르다가 끝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파르마코스'에서는 고통스런 글쓰기에 비유할 수 있는 지렁이와 개구리를 게워내는 행위로 이루어진 문학이 소통 중이던 세상을 그야말로 끝장내 버렸으며(사실 이 단편이 놀라운 것은 독자가 읽고 있는 동안에도 파멸의 비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맹인 소년이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독자도 읽어나감에 따라 종말로 점차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여인의 마지막 문장과 함께 세상도 망한다. 때문에 이 단편은 문학의 분노로 보이며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보내는 문학의 가장 단호한 결별 선언이 아닐까 한다.)


 '관통'에서 문학은 아이에게 젖을 주는 것으로 비유되는데, 그 소통이 중단되는 것을 보여 준다. 그녀는 홀연히 빈틈을 지나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고 세상엔 아이만 남는다. 그녀가 빈틈으로 들어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보다 젖을 물릴 때 한 여자가 그녀에게 한 욕설 때문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같은 여자임에도 아기에게 젖을 주는 것을 전혀 이해 못하고 오직 자신의 연주가 방해받는 것만 생각하는 여자의 욕설은 그대로 '어디까지를 묻다'의 상담원이 듣는 허다한 욕설과 연결되어, 자기 내면에 갇힌 사람들 사이에선 문학이 존재할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문학의 절망은 '이창'에서 더욱 강조된다. 우연히 건너편 집에서 엄마가 아이를 학대하는 것을 목격한 여인은, 남의 일이니 신경끄라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그 엄마와 맞선다. 하지만 아이는 결국 죽고 사람들은 오히려 여인에게 그 죽음을 책임지라는 비난을 한다. 타인을 향한 나의 선의는 남들에게 제 멋대로 곡해되어 비아냥의 대상이 된다. 한 마디로 말이 점점 더 남을 찌르기 위한 무기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적의가 아닌 호의가 바탕이 된 타인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의 고민을 전하고 있었다. '식우'에선 재난이 온전히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이대로는 안된다.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여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긍정적인 가능성이 분명 있는데도 냉혹한 현실 논리는 그마저도 예전 질서를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여 상황이 더욱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듯 했으며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선 마치 그런 '식우'의 절망으로 아예 현실에다 거센 보복을 하는 것 같았고 '어디까지를 묻다'에서는 이것 저것 다 해보았는 데도 도저히 길이 안 보이니 어디로 가야 할 지 당신이 제발 가르쳐 달라는 호소가 묻어 나왔다.(아마도 여기서 그녀의 말을 듣는 애니메이션 성우 출신 택시 운전사는 얼마전 세상을 떠난 '짱구 아버지'의 성우였던 오세홍씨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분도 성우 일로 받는 돈으로는 생활비가 부족해 택시 운전사를 병행했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성우라 이 이야기는 내게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다.)


 작가는 정말 소설 속 인물의 대사 그대로 세상의 멱살을 잡고 "대체 어디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으로 보였다. 이는 그대로 한없이 자신의 내면에만 갇혀있는 사람들에 대한 일갈이나 다름없었다. 특히나 세월호 참사후 지난 1년간 잘 보았듯이 설령 제 아무리 거대한 재난이 닥쳐와 엄청난 피해를 낳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나와 내 주위의 사람만 피해 입지 않으면 빠르게 잊었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지냈다. 문학의 절망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알고보면 문학은 나와는 다른, 타인의 낯선 삶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으로 생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창'이란 단편이 하필이면 인간의 관음증적 욕망을 묘사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와 똑같은 제목을 가져온 것도 은연 중에 문학 역시 동일한 욕망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시사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싶다.


 이왕 '이창'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환상'의 개입이 별로 없는 두 편, '이창'과 '어디까지를 묻다'는 그대로 문학 자신의 호소로 보인다. 그 까닭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창'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디까지를 묻다'는 작가의 글쓰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목소리를 내는 직업을 가진 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문학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은유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이것이 호소라고 보는 직접적 이유이기도 한데 주인공이 곤경에 처하는 상황이 참으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이창'의 주인공은 타인에게 정말 도움이 되고 싶은 자신의 진심을 의심하고 오히려 가만있지 않고 나섰다고 공격하는 댓글들 때문에 힘들어하며(사실 이 단편 전체는 거기에 대한 항변이라 할 수 있다.) '어디까지를 묻다'의 주인공은 듣는 사람의 입장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오로지 자기에게 쌓인 감정만 배설하기 바쁜 이들로 인해 엄청난 상처를 받는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얼마나 깊이 갇혀 있으며 거기서 조금도 나가려고 하지 않는지 똑똑히 보게 되는데 그럴수록 문학은 질식할 수밖에 없다. 문학은 오로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허물고 타인을 받아들일 때라야 호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당하는 주인공의 곤경은 그대로 문학의 곤경이다. '이창'의 주인공이 '그럼에도 나는 세상 모두가 합심하여 이웃집 아이의 불행과 재난에 한몫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p.114)'며 고독을 토로할 땐 그대로 문학의 고독을 호소하는 것이며 '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주인공에게 한 고객이 "괜찮으세요?"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을 고려하는 듯한 반응을 하자 그만 울어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문학의 대성통곡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문학은 타자인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 탐욕이 가져온 사대강의 녹조 라떼 속 물고기처럼 질식 중인 것이다.


 이로써 왜 두 편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이 지속적으로 환상을 요청하는 지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환상이 전적으로 타자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내면에 갇혀 있기에 강한 충격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내면의 벽을 허물기 위한 충격은 그대로 순전히 낯선 것일수록 더욱 강하기에 도라에몽의 신비한 도구만큼이나 우리의 힘으론 정체를 결코 규명할 수 없어 그대로 절대적 타자일 수밖에 없는 환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너무나 규정하기 어렵기에 환상은 그대로 한 덩어리의 점액질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설은 정확히 이러한 환상의 모습을 촉각이나 청각 혹은 시각으로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나타내고 있다. 하이는 처음 환상의 영역으로 들어섰을 때 손으로 물컹한 촉감을 느끼고 '파르마코스'가 된 여인은 처음으로 지렁이 무더기와 개구리를 목에서 뱉어낼 때 '차갑고 끈적끈적한 점액질 덩어리'가 비집고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관통'에서 미온은 환상이 열어보인 빈틈에서 살아 움직이는 어둠에 손을 넣었다가 실해파리처럼 스멀거리는 암흑을 느끼며 '식우'의 비는 사물과 나와 너를 모조리 녹여 물컹한 상태로 만들며 '이물'은 문자 그대로 정체 불명의 털 뭉치로 존재한다. 그리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선 '한 장짜리 고막의 떨림이 아닌 온 몸을 써서만 들을 수 있는' 덩굴의 말을 느낀다.


 이런 식으로 환상은 미끌거리는 점액질처럼 외형이 따로 없고 나뉨없이 한데 뭉쳐서만 나타난다.

 이런 특성은 내면에 갇힌 자들이 하는 행동으로 거꾸로 더 강조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이창'에서 아동을 학대하는 집의 거실과 '식우'에서 정부가 G시의 피난민을 막으려는 O시의 시민들에게 하는 행동이 그러하다. 그 집의 거실은 '때가 타기 쉬운 색인데도 아이보리 소파는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고 책장의 책들은 '표정 없이 냄새 없이, '읽는 용도보단 인테리어의 일부로 착각될 만큼 질서 정연하게 그 자리에 투척되어'(p.128)있다. 한 마디로 반듯하게 정리되어 개체를 명확히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식우'의 정부는 어떠한가. 그들은 한데 뭉쳐 저항하고 있는 O시의 시민들을 나누고 쌓아놓은 컨테이너를 낱낱이 해체한다. '이창'에 나오는 거실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분리와 정리 가능성은 현실의 속성이고 뭉침과 규정 불능은 환상의 속성이라는 게 이로써 분명해진다. 더구나 'G시'와 'O시'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G는 그대로 덩어리인 O를 분리한 것과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대립은 자주 합리와 불합리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이창'의 주인공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타인에게 선의를 베푸려는 자의 행위는 대부분 불합리로 규정되었다. 이것은 특히 '파르마코스'에 나오는 수의 이복 언니가 대표적인데 그녀는 '당신 때문에 우리가 떼죽음을 해야 하냐?'며 도움을 요청하는 외지인 여자에게 물을 나눠주지 않는다. 이 때 그녀가 하는 변명은 사실 더없이 합리적인데 그것은 오직 공리주의적 입장을 따를 때만 그러하다. 그런데 여기엔 그와 대립되는 또 하나의 윤리적 입장이 나온다. 바로 칸트의 의무주의다. 이는 수의 행위에서 나타난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드릴 물이 없어지는 것을 무릅쓰고서라도 바로 눈 앞에서 도움을 바라는 이에게 물을 나눠주는데 그것은 아무 계산 없이 그저 도와주라는 도덕적 명령에 따른 것으로 의무주의적 행동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의무주의 행동은 그러나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오직 불합리할 뿐이다. 그대로 수의 이복 언니는 수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합리와 불합리의 대립은 실은 공리주의와 의무주의의 대립이다. 대부분 타인에 대한 관심과 선의를 거부하는 이들은 공리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식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디귿'은 치매 걸린 조모를, 설령 피난가는데 더없이 방해되더라도 함께 데리고 가는 의무주의적 행동을 보여준다. 반면 '니은'은 그것을 바라보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문을 열어주면 차에 다 태우지도 못할 뿐더러 다른 사람들이 몰려들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공리주의적인 변명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이 환상이 의도하는 타인에 대한 응시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길 원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무주의로, 거기에 있으니까 바라보는 무조건적인 응시이다. 


 이렇게 하여, 제목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도 비로소 드러나는 것 같다. 그것은 단순히 나만 예외이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이 아니라 '나만이어서는 안된다!'라는 호소임이 말이다. 헤아림의 시선이 오로지 나에게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먼저 타인으로 향해야 한다는 우리를 향한 간구가 여기엔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건 바로 이를테면 '이물'에서 타인의 '온기와 감촉을 아는 순간', '그것의 권리와 자격을 숙고'(p.192)하여 베풀게 되는 양선의 선의를 가로막는 집게 손가락을 더이상 내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부푼 희망이나 다짐이 소각로에 던져져 티끌과 재로 사그라지고 심장과 머리가 냉각되는 계기란 이처럼 단순하다. 블록의 누적이 한계에 도달하고 균형을 상실한 채로 버티고 있을 때 그것을 직접 쓰러뜨리는 것은 어디선가 급습하는 대단한 토네이도가 아니라 부주의한 어린애의 집게손가락이다.(p.191)


 작가는 비록 상황이 아주 절망적이라고 해도 정작 그것을 가져오는 것은 재난과도 같은 거대한 파국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실은 무심히 던진 차가운 한 마디, 뜻없이 해버린 한 순간의 무시와 같은 아주 사소한 행위들이 집적되어 결국엔 절망을 낳는 파국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문학의 절망은 실은 아주 작은 것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 역시도 비슷할 것이다. 원대한 포부도, 거창한 의지도 필요없다. '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주인공을 울린 한 마디처럼 아주 작은 부분으로나마 타인을 신경쓰고 좀 더 배려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쩌면 '카오스 이론'처럼 나의 작은 선의가 거대한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믿었기에 절망을 딛고 소설이 이렇게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이 요청한 환상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만들 동기의 유인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문학이 자맥질 할 수 있는 작은 연못을 만들어 주는 것. 아마도 문학이 좀 더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도록 그것을 보다 넓히는 일은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도라에몽의 도구도 결국엔 매개에 지나지 않았다. 노진구가 바라는 진정한 구원은 오로지 그 자신이 성장에 달려있었으니까. 그렇게 작가가 정말 바라는 것도 환상인 신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라도 거기에 도움을 주고 싶다. 좀 더 시야를 넓혀 타인을 담고 미력이나마 선의를 베풀려 노력하는 것으로. 이대로 문학의 숨이 다하는 것은 나 역시 바라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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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9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4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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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잠에다 밥먹을 시간조차 쫓기는 일상이라 각잡고 정색하며 읽어야 하는 문학 보단 내 주변 이야기 같아서 공감을 향한 진입장벽이 낮고 흔들리는 지하철에서나 잠깐 커피 마실 때 흘깃 읽어도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절실하다. 바쁜 우리를 위한 살가운 위안. 최은미의 `근린`을 응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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