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윤고은의 '무중력 증후군'의 주요 인물들은 바틀비의 후예들이다. 바틀비는 '모비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동명 단편에 나오는 인물로, 현대 조직 사회에서 개인에게 부여된 모든 정체성과 역할을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말로 모조리 거부하는 사람이다. 막스 베버는 현대 조직 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관료제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만큼 현대 조직 사회는 맨 위부터 가장 아래까지 맡은 역할이 세세하게 다 정해져 있으며, 그 모든 것이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유기적으로 돌아가도록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주인공  노시보가 일하고 있는 부동산 투기 조장 목적의 텔레마케터 회사가 바로 이런 관료제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그런 조직 내부에서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한 개인은 조직이 부여한 꽉 조인 정체성의 그물망에서 벗어난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 노시보도 날마다 회사로 출근하면서 자신을 회사라는 두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미꾸라지로 여기고 있지만 쉽사리 그만두지는 못한다. 회사에서 해방되고픈 마음은 누구보다 강렬하지만, 그저 항상 사직서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으로 소심하게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바틀비는 다르다.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관료제가 자신에게 부여한 정체성과 거기에 따르는 역할 모두를 실제로 단호하게 거부하고,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형성하고는 그것을 온전하게 지켜나가는 것이다. 허먼 멜빌은 산업 자본주의 여명기의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이 산업 자본주의라는 것이 철저한 분업화를 통해 한 개인을 도구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익명적인 존재로 만들 것이라 내다보고는, 그것에 대한 저항으로 바틀비란 인물을 구상한 것이었다. 바틀비의 거부는 도구화, 익명화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오직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정체성을 수호하는 분투였다. 그는 그렇게 시대의 중력을 거부했다. 정말로 무중력 증후군이 있다고 한다면, 바틀비는 그 증후군의 1호 환자였다.


 하지만 중력에 꽉 붙들려 있었던 노시보에게도 바틀비가 될 기회가 결국 찾아오고야 만다. 갑자기 달이 두 개로 늘어난 것이다. 영원히 하나일 것만 같았던 달이 두 개로 늘어나자, 세상이 이대로 영원히 한결같을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의 생각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사직서를 내는 사람들이 생기고, 노시보의 엄마와 같이 항상 동일했던 일상의 궤도를 주저없이 이탈하는 사람들이 출현하는가 하면, 노시보의 형처럼 이런 기회를 통해 남몰래 꿈꾸던 삶을 제대로 누려보려는 이들도 나타난다. 물론 자살을 통해 절대적인 무중력 상태가 되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변화가 하필이면 달의 출현을 통해 도래하는 것은, 달이야말로 중력이 소속의 은유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달과 지구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맴돈다. 지구의 중력에 붙잡힌 탓이다. 달은 달아나고 싶어도 지구의 중력 때문에 달아날 수 없다. 오로지 지구의 중력이 허락한 궤도만 돌고 또 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달이 지구에 속해 있다고 여긴다. 그런 달이 두 개로 늘어났다. 달의 횡적인 분열은 그만큼 종적인 중력의 강도가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강한 중력에 붙들려 있던 사람들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달은 두 개로 그치지 않고 세 개, 네 개 분열을 거듭한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생각은 일상과 멀어지고 예전엔 황당하게 보이던 것들마저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는다. 일상이 환상이 되고, 공상이 현실이 된다. '무중력 증후군'을 읽다보면, 그냥 소설 같기도 하고 판타지 소설 같기도 하다. 소설과 판타지가 뒤엉킨 모습이다. 이것이 누군가에겐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무중력은 소속을 상실시키는 힘이다. 거기엔 아무런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중력을 표방하는 소설이 분명한 경계를 가진다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무중력의 자유를 지향하는 이상 소설이 이렇게 마구 뒤엉키고 여러 가지가 혼합된 모양새가 되는 것은 필연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무중력을 추구한다. 표준 시간을 알려서 사람들의 시계를 일제히 거기에 맞추도록 만드는 시보(時報)만큼이나 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받는 우리들은 늘 시보(試補)로 잔존하는 현실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을 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무중력을 희구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이 표면상 추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작가는 무중력과 중력 중 어느 한 쪽에 선뜻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어느 하나를 딱 정해 정답처럼 제시하기 보다는 얼른 서로 대척(對蹠)으로 보이는 둘 모두가 실은 우리 삶에 다 필요한 부분이라며 역설한다.


 이는 시보라는 주인공 이름 자체에 이미 투영되어 있다. 사실 시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아직 정식으로 무엇이 되지 못한 존재라는 뜻으로 그래서 사회의 규정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기도 하는 시보(試補)이고, 다른 하나는 표준 시간을 알리는 뜻으로 그래서 사회의 인정에 대한 강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는 시보(時報)이다. 지금까지 한 논의에 따르자면, 앞의 시보(試補)는 무중력을 그리고 뒤의 시보(時報)는 중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둘은 대척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존재에 중첩되어 있다. 작가는 일부러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둘 중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는 둘 모두 삶에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름만이 아니다. 작가는 신체와 의식 또한 대척 관계로 만들어 이를 더욱 강화시킨다. 제목인 '무중력 증후군'은 사실 병이다. 무중력을 취하면 취할수록 마음은 자유를 얻지만 그만큼 몸은 고장을 일으킨다. 마치 신체가 마음이 원하는 무중력을 거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이것을 소설에 누벼댄다. 그래서 무중력으로 기우는 우리의 마음을 그러지 못하게 붙잡는다. 이런 반대의 움직임, 역행이 소설 한 쪽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반영된 작가의 마음은 소설 구성 자체에도 투여되고 있다. 만일 기승전결이 날렵한 직선처럼 잘 엮인 소설을 닫힌 부채라고 한다면 '무중력 증후군'은 펼친 부채에 가깝다. 독자를 정해진 이야기의 궤도로 따라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브뤼겔의 그림처럼 담고자 하는 이야기를 좍 펼쳐서 여러 모습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중력과 무중력이 가진 장점과 한계의 모습들을 말이다. 소설은 결과를 독자에게 제시하기 보다는 과정에 독자를 초대하려 한다. 그렇게 보다 많은 시야의 경험을 주려 한다. 결국 이름도, 신체와 의식 사이의 반목도 알고 보면 모두 이에 복무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애초에 문학의 역할은 경험의 나눔에 있었다. 여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연장자를 존중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많은 경험 때문이었다. 경험이 하나의 정보가 되어 듣는 이로 하여금 경험을 전수해 준 자는 했었던 시행착오를 피하도록 도왔던 것이다. 연장자의 입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한계가 있었기에 결국 문학이 그 짐을 나누어 받았다. 나는 문학을 잘 모르지만, '무중력 증후군'이 바로 이러한 문학의 본래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비록 간접적이며 파편적이고 거기다 문학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것이긴 해도, 이 소설은 무중력과 중력에 관계된 다양한 양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고 말이다. 경험을 전수하는 것의 목적은 해답의 제시가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성찰하는 데 있었다. 제시된 경험은 참조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기반으로 현명한 대안을 창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청자의 몫이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내 삶을 무중력과 중력 어느 한 쪽에 둘 것인가 아니면 그 모두를 적절히 조합하여 융통성있게 이쪽 저쪽을 모두 섭렵하며 살 것인가는 바로 독자의 몫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시보는 자신의 가슴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달을 찾아낸다. 서로 대척 관계에 있었던 중력과 무중력은 그렇게 통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보가 수많은 경험을 관통해 비로소 이룬 결과였다. 그렇게 독자도 자신의 달을 이 소설과 동행하는 동안 찾게 될 것이다.

 과연, 당신의 달은 어디에서 어떻게 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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