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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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에 있을 땐, 열외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도 또 없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고 나선, 열외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불안한 일도 또 없다. 사회에서 열외란, 의자뺏기 게임에서 패배자가 된다는 뜻이다. 의자에 앉아야 안정된 삶을 가질 수 있는데, 내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열외 되는 것에 대한 공포도 같이 점점 더 자라난다. 다시 내 자리를 되찾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도, 뉴스도 연일 열외가 되어버린 자들의 불행한 처지를 열거하면서 경고를 쏟아낸다. 경고를 들을 것도 없이 눈으로 직접 보기도 한다. 열외자의 출현은 언론이나 소문으로만 접할 수 있는 나와 먼 생경한 현실이 아니라, 바로 내 지근거리에서 일어나는 이미 익숙한 현실인 것이다. 그런 삶의 목도는 마음 속 공포를 더 부풀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열외자가 생겨나는 속도도 거듭 빨라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휙휙 사라지는 사람들이 남겨 놓은 빈자리가 늘어난다. 어쩌면 저 빈자리가 내일은 내 자리가 되지 않을까 하여 나는 더욱 단단히 매달리기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죽인다. 조직이, 상사가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인간으로 철저히 변할 수 있게 노력한다. 사회에서 우리가 자존심을 굽힐대로 굽히고 더러는 굴욕마저 무릅쓰며 갖은 고생을 감수하는 것은 내가 속한 곳에서 열외가 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열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주원규의 '열외인종 잔혹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네 명의 열외된 인간들이 어쩌다 양머리를 한 수 십명의 테러리스트들이 획책한 열외가 되지 않은 자들의 성채라 할 수 있는 코엑스몰 점거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하루를 그리고 있다. 그 네명은, 이제 곧 어버이 연합에 스카우트 될 것만 같은 노인 장영달, '이태백'이 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비정규직인 이십대의 윤마리아, 회사에 개처럼 충성했지만 돌아온 것은 코 푼 휴지처럼 버려지는 것이 전부였던 중년의 노숙자 김중혁(이름 때문에 자꾸 동명의 소설가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마지막으로 게임 말고는 현실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없는 십대의 불량 청소년 기무로, 사실 현재 자신의 의자를 간신히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겐 가장 피하고 싶은 인생의 모습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네 명을 혼비백산 시켰던 양머리 테러리스트들도 결코 그들과 다르지 않았으니, 실은 양머리 테러리스트들 역시 열외자였고 그들이 일으킨 테러 또한 자신들과 같은 열외자들을 대량 생산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의 자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 재난 영화가 유난히 유행할 때 그 이유에 대해 어떤 평론가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재난 영화는 추락과 파산의 불안이 만연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의식적 소망을 담고 있다. 끝도 없이 불안을 가져다 주는 이 사회가 너무 진저리가 나서 어서 끝장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양머리 테러리스트들의 염원도 이와 같다. 그들의 테러는 줄기차게 야기되는 혼란과 불안을 서둘러 끝장내고 싶은 염원의 표현인 것이다. 코엑스몰의 점거 테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2부, '최악의 도시'는 알고 보면 요한계시록과 같은 종말론의 외피를 성글게 두르고 있다. 이 소설은 수박처럼 겉과 속이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소설의 분위기는 꽤나 희극적이지만, 속내는 종말을 희구하고 있고 굉장히 허무주의적이다.(그래서 희극적인 장면 또한 어쩐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로 보인다. 마치 작가가 '현실이 이토록 막장인데, 이런 걸 보고도 웃음이 나와?' 말하며 내 멱살을 잡는 느낌이다.) 양머리들이 그토록 찾았던 메시아가 간신히 나타나자마자 총알 한 방에 어이없이 죽고, 코엑스몰의 그 엄청난 테러 사건도 바로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결말은 오늘 날의 대한민국이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이며, 결국 우리 모두는 열외자가 되어버릴 운명에 처해있고 자신이 헌신하는 소설조차 그런 현실을 개선할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작가 자신의 말에 힘껏 마침표를 찍는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은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해야 하리라. 이미 열외자가 되어버렸거나 혹은 언제 열외자가 될 지 모를 우리들에게, 그래서 어쩌면 더욱 절박하게 원할, 그 어떤 위안도, 희망도 주지 않는다고. 다만 인도 신화에 나오는 '저그노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열외자로 만들어 짓누르는 이 천박한 시대가 어서 끝장 나기만 바랄 뿐인 것이다. 그의 소설은 무력하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열외 인간의 양산은 현대화의 불가피한 산물이니까. 그는 주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 쓰레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쓰레기가 된 인간들('잉여의', '여분의' 인간들, 즉 공인받거나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 집단)의 생산은 현대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이며 현대성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것이다. 또 질서 구축(각각의 질서는 현존 주민들 중의 일부를 '어울리지 않는다', '적합하지 않다' 또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쫓는다.)과 경제적 진보(이것은 이전에는 효과적인 생계 유지 방식이었던 것을 격하하고 평가절하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로 인해 과거의 생계 유지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생활수단을 박탈하지 않을 수 없다.)가 초래하는 피할 수 없는 부작용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p.22)


 열외자의 생산은 배제를 통해 질서를 유지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서둘러 낡은 것으로 만들어 계속 새 것을  소비시키는 것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는 현대성(모더니티)에 허파처럼 내재된 것이다. 현대는 바로 그런 열외자의 양산을 통해 지속되니까 말이다. 열외자의 생산을 그치게 하려면 현대성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를 떠받치고 있다는 아틀라스 신쯤 되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한낱 개인에게는 너무나 벅찬 짐이다. 이쯤 되면 주원규 작가의 고백은 차라리 정직하다고 해야 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제발 용건만 간단히"는 자신의 소설에 대한 비아냥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가지는 가치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본다. 예전의 나도 그랬듯이, 우리들은 열외자의 문제를 흔히 아주 개인적인 사안으로 치부하기 쉽다. 최근에 나온 영화 '부산행'에서 열차에 몰래 숨어든 노숙자를 보고 김의성이 분한 배우가 아이에게 "너도 열심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것이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시대 자체의 문제로 보게 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한 마디로 '파국의 지도'다. 막장이 되어버린 시대의 적나라한 모습과 그 아래 가리워져버린 열외자들의 목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주어 독자로 하여금 전체를 조망하도록 만드는 지도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문제라 여겼을 때, 내 시선은 언제나 내게로만 향했다. 그것도 늘 단점과 부족함만 찾아내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더 주눅이 들었고 더 불안했다. 하지만 지도의 조망은 내게만 향했던 시선을 타인으로 향하게 만든다. 나와 똑같이 힘들고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이들을 보고 헤아리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열외자가 되었다는 절망,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날 계발시킬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진실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시작이 되어 배우고 성찰하여 결국 자신의 목적지를 지도 위에 스스로 설정할 수도 있다. 너무 낙관적인 것일까? 그래도 나는 믿고 싶어진다. 이 '파국의 지도'를 본 이들이 추락과 절망을 강요하는 시대를 바꾸기 위해 점점 더 많이 노력할 것이라고.


 알고 보면 희망은 믿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동력도 이 믿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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