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무기 - 이응준 이설집
이응준 지음 / 비채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응준. 잘 모르는 작가다. 고작 그의 소설 두 권만 읽었으니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소설로 만나 본 그는 문장을 참 잘 쓰는 작가였다. 왜 어떤 글을 읽으면 글 쓰는 솜씨를 훔치고 싶은 작가가 있지 않은가? 솔직히 그런 작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번에 나온 그의 책, '영혼의 무기'를 보고 알게 되었다. 요컨대, 이런 글을 통해서다.


 요즘은 누구든지 개인 미디어에 실시간으로 글을 올려버리는 가공할 자신감과 광기에 가까운 습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글을 쓰는 능력을 함양하고자 하는 이라면 아직은 미숙한 자신의 글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진정한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과거 우리의 작가들은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글이 발표되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그리고 대중은 그러한 작가정신을 흠모함으로써 자신의 소박한 문장을 되돌아볼 줄 아는 아름다운 교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작가들의 글은 한낱 철지난 상품이 돼버리고 그런 작가들을 자신의 분신보다 열등하게 여기는 대중의 문장은 변기 모양의 흉기다.(...) 글이 그 내용과 형태의 가치를 담보할 때까지 스스로 감추고 기다리는 태도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기법일진대 이 당연한 사실을 작가와 대중이 모를 때 그 사회는 언어의 무간지옥 속에 갇힌다.(p. 201 ~ 202)


 그는 쉽게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의 글을 세상에 내보는 것을 두려워 하며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된 글로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자였다. 얼른 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도자기 만드는 장인이 떠올랐다. 설령 단 한 개의 도자기도 세상으로 내보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격이 되지 않으면 모조리 깨버리는 장인. 이응준에게 글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쓴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에서 언뜻 그런 것이 감지된다. 그에게 있어 글은 그냥 글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 전부를 걸어야 할 지도 모를, 영적인 그 무엇이다.


 필사로 문장이 얻어진다는 것은 철저한 허상이다. 문장은 영적인 물질이다. 그것은 반 이상이 타고난다. 또 문장을 못 쓴다고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거칠고 아귀도 맞지 않는 문장을 쓰면서도 독특한 세계관으로 이름을 날린 작가들은 많다. 그러나 그들이 아름다운 문장의 소설가라는 말을 듣지는 못할뿐더러 문장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소설의 맨 처음이기는 하다. 더더욱 필사를 멀리 해야 하는 이유에 다름 아니다. 작가가 되려면 일단은 마음에 새겨진 것들을 글로 옮겨야 한다. 그것이 비록 누구의 영향을 받아 싹을 틔웠든 간에, 결국에는 작가 나름의 해석과 정신이 담긴 글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필사를 통해 작가가 됐다고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들 무슨 대단한 고행 중에 문학의 본령을 터득한 줄로 아는데, 알고 보면 그들의 글을 문학으로 승격시킨 요소는 무식한 필사가 아니라, 하다 못해 필사까지 감행하게 한 열정과 노력이었을 것이다.(p. 229)


 '영혼의 무기'를 읽다보면 그가 굉장히 종교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글은 그런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번제로 드리는 기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 말이나 막 할 때 눈을 뜨고 있는 우리는 눈을 감고서 기도한다. 세상은 살인적인 속도에 온갖 현란한 치장과 야비한 선전 들을 실어서 보여준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간이라는 상처는 참혹해지고 삶은 중심을 잃지 않았던가. 나를 보고 사랑한다고 하는 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듣고 뭔가를 깨달은 그 사람의 영혼을 믿는다.(p. 27)


 그것이 작가로써 가지는 세상과 대중에 대한 의무이기에. 쉽게 말하자면, 진정성. 그랬기에 그는 설사 자신의 문단 생활이 망쳐지더라도 신경숙의 표절에 대해 '침묵의 공범'이 되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내부고발자'가 되었을 것이다.


 신경숙은 한국문학의 당대사 안에서 처세의 달인인 평론가들로부터 상전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으며 동인문학상의 종신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등등'의 요인들로 인해 문단 최고의 권력이기도 하다. 그러한 신경숙이기에 신경숙이 저지른 표절이 이른바 순수문학에 대해서는 순진할 수밖에 없는 대중, 특히 한 사람의 작가만큼이나 그 개개인이 소중하기 그지없는 한국문학의 애독자들과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가 풍전등화인 한국문학의 본령에 입힌 상처는 그 어떤 뼈아픈 후회보다 더 참담한 것이다.(p. 389)


 '영혼의 무기'는 이런 이응준의 글들을 담고 있다. 시인으로 등단하여 소설가를 겸하는 그가, 시와 소설로 발표하지 않은 글을 다양하게 담고 있는 것이다. 문학적 장치로 여과되지 않은 것이라 더욱 자신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글을. 작가는 스스로 '이설(異說)집'이라 이름 붙였다.



 이설(異說). 그것은 왼손잡이와 같다. (너무 서툰 비유라 미안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계속해 보련다.) 다들 오른손으로 하라고 강요하지만 결코 굽히지 않는 왼손잡이. 당당히 왼손을 들고 오른손잡이가 보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을 외치는 왼손잡이. 이 책에 담긴 이설(異說)의 형상이다. 그것은 듣기에 편치 않은 말이다. 고개를 외로 꼬고, 삐딱한 시선으로 면전에서 대놓고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달라' 하는 말이니까. 실제로 불편한 글이 있다. 보수와 진보 양 쪽의 적대적이며 편협한 태도들을 공박하는 글을 읽노라면 팔짱만 끼고 말만 앞서는 양비론자 같기도 하고 혹은 잔혹한 괴물에게도 어느 정도 인간성이 있을 것이라 순진하게 기대하고 있는 이상주의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도중에 책을 던지지 않고 끝가지 읽게 되는 것은 설령 그런 글이라 하더라도 그 바탕에서 어떤 아집이나 타산 같은 것이 아니라 '나도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 우리 같이 고민해 보자.' 하는 식의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맞다. 그의 이설(異說)은 종착지가 없다. 누구나 종착지로 생각하는 곳에서 홀연히 나타나서는 '아직 우리는 더 걸어야 한다'고 말하는 길과 같다. 온전한 이해를 위한 부단한 회의(懷疑). 그것이 바로 그의 이설(異說)이다.


 인간에 대한 회의(懷疑)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p. 198)


 그러므로 '영혼의 무기'는 두 가지 점에서 이롭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작가 이응준의 영혼이 가진 전체적인 형상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해답 같은 것은 나와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해 평소 잘 생각해 보지 못했던 방향에서 전혀 새로운 쪽을 가리키며 진행되는 사유의 경로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아주 흥미로운 여정이었다. 그가 보여주는 색다른 풍경은 흥미로웠고,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은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무려 831 페이지의 책으로, 책 자체가 무기가 되는 책이지만 지루해서 하품이 나거나 난해해서 건너뛰는 곳은 없었다. 알뜰하게 읽게 되고 살뜰하게 다가오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하나는 확실하다. 이응준 작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작가는 그것 역시 회의(懷疑)해야 한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그의 반려견 '토토'에게 바쳐졌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모양이다(정확히는 2016년 7월 1일). '토토'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회의(懷疑)가 실은 좀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걸 드러낸다. 어떤 존재든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존재가 얇은 평면이 아니라, 저마다 살면서 감내해 온 과정이 있는 입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타자에 대한 존중이 먼저고,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바로 그런 것을 위한 회의(懷疑)이기 때문이다. 그런 눈을 가진 그이기에, 인간과 동물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나같이 묵직한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존재들이므로.


 세상의 혼돈 앞에서는 숨이 막히듯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그 혼돈을 견뎌내느라 날이 갈수록 강퍅해지고 잔인해지고 사나워지는 사람들 앞에서 다름 아닌 나 자신을 본다. 만약 공부라는 것이 있다면, 공부란 그 반대편으로 걸어가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이것이 공부의 시작이거나 공부의 전체가 될 수는 없겠지. 그러나 공부의 중간 점검 정도는 될 것이다. 그릇된 공부는 때려치워야 한다. (2016년 8월 7일 / p. 711)


 그에게 회의(懷疑)란 공부고 종국엔 사랑이다. 이런 이설(異說)을 어찌 감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독주(毒酒)가 약이 되기도 한다. '영혼의 무기'가 그렇다. 자주 흠뻑 취할 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