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아이들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그들을 훔치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훔치는 일은 또 다른 사업이다.

그 아이들을 무엇에 썼을까?

괴물을 만들었다.

왜 괴물을 만들었을까?

웃기 위해서였다.


 -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중에서



 황정은의 '웃는 남자'는 주위 사물들의 온기를 견디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름은 d. 소설 속에서 그만 고유명사인 이름이 없다. 그래서 제목이 '웃는 남자'인가 보다. 대문자 D를 시계 방향으로 90도 돌리면 웃는 입이 되니까. '하지만 소설에선 소문자 d로 표기되잖아?' 하고 굳이 반박한다면 할 말은 없다. 어쨌든 그는 사물의 온기를 참을 수 없어한다. 계기가 있었다.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신성한 존재인 아내 dd가 죽었기 때문이다. 예고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레 다가온 상실. 그로 인해 그의 세계는 모든 의미를 잃었다. 어릴 때 그가 살았던 아버지의 목공소처럼 무의미한 잡음만 가득한 소음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존재가 아닌, 존재의 흔적만 보여주는 소리들로 넘쳐나는. 소설에 나오진 않으나 그가 사물의 온기를 싫어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온기는 존재에서 온다. 존재는 자신의 실재를 따스함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그는 안다. 지금 자신은 존재의 잔향만 남은, 비존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손으로 전해지는 사물의 온기는 기만이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려 한다. 무의미한 것들이 자신에게 의미의 환영을 심으려 하고 있다. 그러니 거부한다. 그는 말한다.


 사기를 치지 마라... 인간은 너무도 사물과 같이... 없으면 없어. 있지 않으면 없고, 없으니 여기 없다.(p. 20)


 이처럼 이 소설에서 '소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d가 처음 세들어 살았던 목2동 505번지의 소유주, 김귀자 할머니의 고백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서도 소리가 기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소설 초반에 나오는데, 이로써 작가가 소리를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로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여기서의 소리는 '사이렌' 이다. 6.25 전쟁 중 피난을 하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그녀는 아직도 전쟁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는 그 때 사이렌 소리를 듣고 주저 앉아 버린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전쟁을 경고하는 게 아니라 실은 이웅평 대위의 귀순을 알리는 것이었다. 파국의 도래가 아니라 김귀순 할머니가 살고 있는 여기가 더없이 좋고 안정적이라는 것의 확언이었다. 하지만 할머니 역시 d가 느끼는 사물의 온기처럼 그 소리가 기만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그토록 견고해 보였던 세계가 '하루 혹은 반나절도 되지 않은 폭격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 잿더미가 될 수(p. 23)' 있다는 것을 목격했기에 사이렌 소리가 아무리 과거와 절연된 현재를 말해도 자신이 '과거의 여전한 현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오히려 사이렌 소리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전쟁은 완전하게 중단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일깨울 뿐이다.


 소리가 그러하기에 d는 '웃는 남자'가 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은 아니고, '공각기동대 TV 시리즈'에 나왔던 '웃는 남자'다. 그 '웃는 남자' 심볼 주위엔 J.D 샐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왔던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I thought what I'd do was, I'd pretend I was one of those deaf-mutes.'




  말 그대로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다. d는 인간의 마음이 턱에 있다고 생각한다.(p. 26) 그것은 있는 힘껏 앙다문 턱이다. 하나의 강력한 의지로 된 마음이다. 나라도 기만의 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의지. 그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까지 되어 자신의 세계를 고립시킨다. 홀로 떨어져 녹슨 자물쇠로 단단히 채워진 오두막처럼 속지 않기 위하여 세계와 간격을 둔다. 이제 그렇게 살 것이었다.


 결국 '웃는 남자'는 어떤 이야기인가? 단적으로 소리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기만의 사이렌에 불과했던 소리에서 상실의 통증에 너무 빠져버린 나머지 자신이 그만 놓쳐 버렸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다. 소리의 의미에 집착하는 것은 곧 존재에 대한 집착이다. 존재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롭게 되면 잔영이라 하더라도 마냥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으로 구별되지 않고, 삶에서 그것들은 서로 넘나들거나 섞여든다. 추억이 그렇고, 그리움이 그렇듯이. 때로는 실재의 잔영이, 그 그림자가 삶의 속을 더 채우기도 한다. 더 애틋하고 간절하게. d는 여소녀의 가게에서 그런 것을 찾는다. 여소녀의 오디오 가게는 d의 아버지가 했던 목공소와 여러가지 면에서 대비된다. 다 같이 소리를 모으지만, 목공소는 오로지 소리를 집적할 뿐이나 여소녀의 오디오 가게는 소리를 내보낸다. 그 곳은 고립이 아니라 흐름의 장소이며 이는 여소녀의 가게가 있는 세운상가도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거기서 장사를 하고 있는 여소녀는 있는 것과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d는 상실로 무의미가 가득한 진공의 간격을 느끼지만, 여소녀는 그 진공에서 오히려 가득한 빛과 신호를 본다. 여소녀에게 그 곳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수많은 가능성이 태동하는 자궁인 것이다. 여소녀도 d와 같은 상실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귀를 막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귀를 열어준다. 존재에 집착하지 말고 잔영을 음미하라고. 존재의 확산인 잔영. 바로 그것이 d가 매일 같이 여소녀의 가게에서 듣게 되는 음악이다. d는 여소녀와 박준배를 통하여 그것을 체득한다. 멈춤이 흐름이 되자 소리가 음악이 되었다. 진정한 소통이 열리는 순간, d는 비로소 진실의 온기를 느낀다.


 황정은의 소설을 읽은 것은 처음이라 내가 이 소설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난 그저 소설이 보내는 신호를 해독하고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을 뿐. 그렇게 작가 역시 여소녀처럼 내 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고 보면 모든 글은 음악이다. 그것은 열기마저 지니고 있어 귀를 막아도 들리게 만든다. 소리에 공명한 마음이 여운의 진동을 못 이겨 자신만의 악보를 적어나간다. 그렇게 흐름이 된다. 진공에 또 하나의 빛과 신호가 홀연히 떠오르듯. 문득 작가의 다른 연주가 듣고 싶어졌다. 천천히 그리고 찬찬히 들어볼 생각이다.


* * *

 '웃는 남자'는 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이다. 책에는 '웃는 남자' 말고 후보로 오른 다른 작품이 6편 더 실려 있는데, 면면을 보자면 김숨, 김언수, 윤고은, 윤성희, 이기호 그리고 편혜영이다. 하나같이 이름 꽤나 들어본 작가들이다. 모든 단편을 '웃는 남자'처럼 리뷰하려고 하니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안되겠다. 간단하게 다들 '읽어볼만하다'는, 어쩌면 하나 마나한 말을 총평처럼 남기고 이 글을 맺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8-26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6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8-28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웃는 남자 하니 킹의 그것에서의 페니와이즈가 생각나는군요. 웃는 데 일가견이 있는 캐릭터 아닙니까..ㅎㅎ

ICE-9 2017-08-28 18:08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러네요. 이번 영화 편은 그 페니와이즈의 웃음을 더욱 실감나게 묘사해서 더욱 기대가 큽니다.^^
 
군함도 1
한수산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극적인 역사일수록 단단히 기억에 새겨두어야 한다. 망각은 언제나 비극의 반복을 부르기 때문이다. '군함도(하시마 섬)'. 지하 1.000m까지 내려간 갱도는 해저보다 더 깊은 곳이었기에 언제나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여건상 통로의 위 아래가 아주 좁을 수밖에 없어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채굴을 해야했다. 그래서 현지 일본에서도 막장 중의 막장으로 불렸고 당연히 갖은 인명 사고가 뒤따랐다. 태평양 전쟁 말기 노동력이 부족하자 일본은 조선인 남자들을 강제 징용하여 끌고 갔다. 처음엔 돈을 벌게 해 준다고 꼬드겼지만 나중엔 그런 것조차 없이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그렇게 강제로 군함도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마주한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갱도와 최소 12시간에서 최대 16시간에 이르는 탄광에서의 노동이었다. 그것도 몸에 걸친 곳이라고는 고무줄 속옷 하나에 머리에 쓴 헬멧 뿐이었으며 식사라고 주어지는 보통 비료로 사용되는 콩기름을 짜고난 찌꺼기로 만든 주먹밥을 먹으며 하루를 버텨야 했다. '군함도'는 일본의 식민지 역사상 가장 참혹한 강제 노동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선 잊혀진 기억이었다. 그러나 최근 나온 한 소설이 그것을 발굴하고 있다. 바로 한수산 작가의 '군함도'이다.



 원래 이 소설은 2003년에 '까마귀'란 제목으로 나왔었다. 그 때가 처음이었다. '군함도'의 비극이 대중들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그런데 이 '군함도'가 지닌 아픈 역사의 상처를 작가가 우리들에게 알릴 수 있었던 것도 '전두환의 군부 독재'라는 어둡고 아픈 우리네 역사 때문이었다.


 한수산. 그는 원래 70년대부터 잘 나가던 작가였다. 전두환이 군부 독재를 하던 1981년. 그는 한 신문에 '욕망의 거리'라는 소설을 1년째 연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설 중 어떤 인물이 전두환을 암시한다는 것과 군복 입은 이들을 비하했다는 단 두 가지 이유로 그는 당시 집필을 하고 있던 제주도에서 갑자기 보안사에 끌려가 갖은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그렇게 당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당시 연재를 한 신문사의 담당 기자들까지 모조리 연행되어 작가와 똑같이 심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이 때 시인 박정만도 한수산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끌려갔는데 역시나 온갖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박정만 시인은 그 때의 고통으로 늘 괴로워했으며 매일 소주 두 명을 마셔야만 겨우 잠들 수 있었다고 한다. 때로 이유없이 사라지는 일도 잦았는데 그러다 결국 전두환이 전 세계에 자신의 위세를 떨치려 개최한 서울올림픽이 폐막하던 날, 화장실 변기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수산 작가의 필화 사건은 독재 권력이 얼마나 개인의 삶을 쉽게 그리고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로 한수산 작가 역시 끝내 그 때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여 88년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 버린다. 그는 일본에 한 4년 정도 머물렀는데 바로 거기서 일제 식민지 시절, 실제 '군함도'에 강제 징용되었다가 나가사키 원폭 투하 때 피폭까지 된('군함도'는 '나가사끼' 인근에 있다.) 재일동포들을 만났고 바로 그들의 육성 고백을 통해 '군함도'에 대해 알게 된다. 당시는 '군함도'에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당한 아픔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때라 작가는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꼭 세상에 알릴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그는 93년, '군함도'에 대한 집필을 시작했고 10여 년만에 '까마귀'란 제목의 장편 소설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리고 다시 7년이 지난 현재, 그 '까마귀'를 다시 전부 개작하여 두 권의 책으로 내었으니, 그것이 바로 '군함도'이다.


 소설은 '군함도'가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지옥이며 죽음의 땅인지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이대로는 죽겠다 싶어서 탈출을 감행하는 조선인들이 있고 그 중 하나였던 태복은 도중에 체포되어 다시 군함도로 끌려와 모진 고문을 받다 고문하던 일본인 사이또오를 살해한다. 한 마디로 '군함도', 그 곳은 화해와 공존이 불가능한 곳이라는 암시다. 그것은 군함도만이 아니라 조선도 마찬가지다. 뒤어이 등장하는 지상과 서형은 서로 사랑해서 혼인한 부부다. 하지만 곧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 지상의 아버지는 친일파로 가진 재산도 꽤나 많은 이였는데, 그런 그 역시 일본의 강제 징용을 피해갈 수 없어 장남을 대신하여 둘째 지상을 징용에 보내기로 한다. 지상은 아버지의 친일이 민족에게 큰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 죄값을 자신이 강제 징용을 당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치를까 하여 기꺼이 응한다. 원래 지상의 아버지는 군수에게 돈을 써서 지상을 보다 편한 보직으로 보낼 심산이었으나 그렇게 뒷돈을 준 보람도 없이 지상은 결국 군함도로 오게 된다. 이렇게 하여 군함도의 실상이 펼쳐진다.  가혹한 노동 환경과 늘 당하는 죽음의 위협 그리고 일본인들의 갖은 폭행과 억압 속에서 하루하루가 늘 지옥이었던 지상은 뜻이 맞는 조선인들과 탈출을 결심하고 1권의 끝에서 조선인 여자 금화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탈출에 금화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곧 들통나 그녀는 일본인들에게 잡혀가고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죽게 된다. 한 편, 지상과 함께 탈출을 모의했고 금화에게 마음까지 준 우석은 탈출에 실패하고 섬에 남게 되는데 그러다 금화의 죽음을 알고 복수를 맹세한다. 얼마 가지 않아 일본의 폭압에 대한 조선 징용자들의 인내는 임계점에 이르고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들이 퍼져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모처럼 벌인 거대한 저항은 이전부터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던 일본과 내통하는 조선인들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예전부터 군함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나 탈출마저 초연해 있던 명국을 더욱 회의에 젖게 한다.


 한편, 군함도에서 무사히 탈출한 지상은 운좋게 한 일본인 노인의 도움으로 나가사키 항구에 이제 막 조선에서 징용되어 온 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는다. 그는 조선에서도 '상록회'에 소속되어 조선의 계몽을 위한 교육에 힘썼는데, 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제국의 첨병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을 하고 있다. 이 지상의 삶은 한 역사를 살아가는 삶을 다룰 때 한수산의 시선이 좀 더 어디에 가 닿는지 느끼게 한다. 특히나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한 경우, 그것에 대해 오늘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어떤 선험적 잣대를 가지고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삶 안으로 들어가서 바로 그들의 눈으로 그들이 한 선택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소설은 우리의 기대와 어긋나는 면이 좀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군함도에서 모처럼 일어난 봉기가 실패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솔직히 한국 독자로서 이 장면은 뭔가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는 장면이었는데, 소설은 그런 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소설의 성공을 바란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결정이라 바로 그런 면에서 작가의 신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이미 인기 소설을 여럿 발표한 그가 어떻게 써야 독자들이 좋아할 것인지 정도는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실망을 줄 지도 모를 구도를 택했다는 것은 작가 자신이 소설 '군함도'의 사명을 상업적 성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묻혀진 비극적 역사의 온전한 복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 어떤 문학적 과장이나 왜곡 없이 있었던 혹은 있음직한 사실 그것만의 재현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왜 맥락에 맞지 않는 대사들이 뜬금없이 튀어 나오는 지도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현실은 이야기처럼 매끄럽지 않고 다양한 군상들은 저마다 다른 말을 하니까 말이다. 역사적 현장의 진실된 재현과 그것을 통한 독자의 생생한 체험. 바로 이것이 저자가 부여한 '군함도'의 사명이며, 소설은 그것을 훌륭히 완수했다고 보여진다. 어쨌든 '군함도'가 어떤 곳이었으며, 반드시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비극의 장소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나가사키에서 일하게 된 지상은 결국 원폭 투하까지 경험한다. 그러나 '군함도' 보다 더한 지옥의 현장에서도 그는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여기엔 아마도 역사의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아직 고향에 오지 못한 상태라 볼 수 있는 '군함도'의 비극적 역사를 이 소설을 통하여 비로소 환향할 수 있게 하려는 작가의 비원(悲願)이 서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 역시 한동안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적이 있었던 지라 그 귀향의 염원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으리라. 부디 그 바람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장판사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소설집 '악마의 증명'이 출간되었다.

 악마의 증명. 그것은 원래 중세에서 토지 소유권 입증과 관련하여 사용되던 일종의 법률 용어로, 악마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쉬우나(존재하는 것을 데려오기만 하면 되니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우므로(모든 경우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증명해야 하므로) 이처럼 부재보다 존재를 증명하는 자가 입증의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장편은 아니고 단편집으로 표제작 '악마의 증명'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가장 처음에 나온 '악마의 증명'은 원래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 미스터리 단편선'의 게재 되었던 것으로 당시 여자 국선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의 한 에피소드가 먼저 출간된 이 단편의 설정과 유사하여 표절 논란이 일어나 본의 아니게 유명세를 탔다. 사실 표절 욕구를 일으킬만큼 아이디어가 꽤 좋은 단편인데, 외모로는 얼른 구분되지 않는 일란성 쌍둥이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문제는 범죄를 저지른 쌍둥이 하나가 자신이 일란성 쌍둥이인 것을 이용해 한 번 판결이 내려진 사건에 대해선 두 번 재판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으로 완전범죄를 꾀한다는 것인데 이 같은 범인의 전략을 검사가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것을 볼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법정물이다. 검사가 이미 무죄 판결을 받은 범인을 다시 법정에 세워 유죄를 받도록 입증해야 하므로 그런 검사의 입장에서 '악마의 증명'이란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역시 부장 판사 출신 작가답게 재판 과정의 묘사가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래서 얻게 되는 덤도 있다. 바로 최근 박근혜 뇌물 수수 재판에서 일어난, 증인으로 불려 나온 삼성 임원진들이 법정에서의 증언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 일 말이다. 많은 이들이 왜 그러는지 궁금 할텐데 바로 그 이유를 이 단편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주인공 격인 검사가 재판을 거듭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검찰 조서가 아니라 법정에서의 진술이 재판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것. 그래서 증언을 거부해 버리면 검찰 조서가 무용지물이 되어 아예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 증인으로 나온 삼성 임원진도 이와 똑같은 이유로 함구하는 것이다. 이재용을 위해서. 이것을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 그것이 검찰의 과제가 될 것인데 부디 단편 속 호연정 검사처럼 이재용 변호인단을 제대로 물먹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단편집 '악마의 증명'은 미스터리만 있지 않고 판타지와 미스터리가 섞여 있는데(문장의 경제를 위해 판타지라고 했지만 단순한 판타지는 아니고 타임 루프나 공포 같은 것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성에 호소하는 미스터리와 달리 감성에 호소하는 환상성이 가미된 단편들이기에 편의상 판타지라 명명했다.) 판타지 하나가 나오면 미스터리 하나가 나오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글의 꿈', '외딴집에서', '시간의 뫼비우스' 그리고 '죽음이 갈라 놓을 때'는 판타지고 '악마의 증명', '선택', '구석의 노인' 그리고 '킬러퀸의 킬러'는 미스터리다. 또 하나의 특징이 더 있다면 여기엔 도진기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진구'와 '고진'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스탠드 얼론'만 있다는 것이다.


 그간 작가의 많은 작품을 읽어왔지만 미스터리 쪽만 접했었기에 그가 다른 장르의 작품들을 썼는 줄은 몰랐는데 이번 단편집으로 만나게 되어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폭넓게 접해볼 수 있었다. 단편집 마지막엔 작가의 말이 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미스터리 쪽은 작가의 프로페셔널한 면이, 판타지 쪽은 프로페셔널한 면에 가려져 있었던 개인의 취향이 발현된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이 단편집을 통해 작가 도진기가 아닌 개인 도진기도 만나볼 수 있다고나 할까? 특히 '시간의 뫼비우스'는 자전적인 게 한껏 깃들어 있어 더욱 개인으로서의 그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쯤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가 하고 묻는다면, 역시 미스터리 한 쪽이 다른 쪽 보다 낫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선택'이다. '악마의 증명'에서 활약했던 호연정 검사가 다시 활약하는데, 인간미 넘치는 주인공이 현재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대표 적폐 세력인 검사로 계속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다고 나는 믿고 싶은데 아무튼 이번에는 변호사가 되어서 경찰이 이미 자살로 종결한 빗길 교통 사고를 죽은 피해자 어머니의 의뢰로 재수사 한다. 읽다보면 문득 기시 유스케의 '유리망치'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설정 같은 것을 따왔다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한 가지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 들고 계속 나타나는 반대 증거 앞에서 이전의 전제를 번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지라 그렇다. 경찰의 판단이 무리가 없을 만큼 자살이 확실한 정황 속에서 주인공이 찾아내는 반대의 진실이 꽤나 인상적이다. 그건 경찰이 결코 보지 못했고 또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곳을 호연정 변호사가 시선을 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인데, 이 단편과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빌려 온 할머니 탐정이 나오는 '구석의 노인(에마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은 흥미를 끄는 사건의 재판이 벌어지는 법정에 나가 재판을 구경하는 게 취미인데, 이 소설의 할머니도 그렇기 때문이다.)'과 연결하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어디로 이끄는지 드러난다. 바로 '사람'이란 것 말이다. 물리적 단서만 놓고보면 여지 없이 혼란스럽고 그릇된 결론이 도출되지만, 그 중심에 사람을 놓아두고 보면 모든 게 다 매끄럽게 정리되는 것이다. 호연정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정의를 가져오려는 법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분명하게 나타낸다.


 감정 없는 사실만을 불쑥 쌓듯 쌓아올린 거죠. 가드레일을 부수고 달려나간 자동차, 창밖으로 나와 동맥이 잘린 운전자의 왼손, 추락의 흔적, 메스와 지문, 이런 것들이 의미 없이 요철만 맞게 조합한, '사람'이 빠진 결론이에요'(p. 118)


 그리고 '구석의 노인'에 나오는 김옥선 할머니는 잘못된 판결이 나자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찬다.


 '사람'을 모르니 저런 판결이 나지...(p. 175)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바로 법인데, 정작 법에서 사람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이제 우리나라 사법 현실의 적나라한 진실을 정의하는 말이 되었다. 그 말이 처음 나왔던 때는 무려 1988년이었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우리나라 한 켠엔 그 올림픽을 결코 웃으며 바라볼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이 존재했다. 외국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계동을 비롯한 서울 각지에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거처를 철거 당해야 했던 가난한 이들이. 쇠파이프와 불도저에 속절없이 밀려나가야 했던 그들의 눈물과 피를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았다. 법도 팔짱을 낀채 모른 척 했다. 이후 내내 그런 모습이다. 봐야 할 사람은 보지 않고 안 봐도 좋을 사람은 당사자가 바라는 것보다 더 깊이 본다.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에 따라 그 헤아림의 깊이가 결정되기에 그렇다. 정유라가 두 번이나 영장 기각을 받은 것처럼. 이 소설집에 담긴 호소, 법이 정말 보호해야 할 사람을 보라는 것, 그것은 원래 법이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아마 제목도 바로 그런 뜻에서 붙인 것은 아니었을까?

 '악마의 증명'으로 입증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것,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은 덫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태어난 순간의 육체와 환경 또한 내 선택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처음 눈을 뜨는 그 순간, 내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었고 내게 허락된 것은 오직 지금 주어진 모든 것에 적응해야 한다는 강요밖에 없었으니, 우연히 덫을 밟아버린 그 순간에 발목이 단단히 붙잡혀 운명이 고정된 불쌍한 토끼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래도 살아왔다. 비록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덫의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였으나, 그 유예의 시간이나마 최선을 다해 의미롭게 채워보려 애썼다. 그나마 따뜻한 봄날의 숲속에서 뜯어먹을 풀들이 지천으로 널린 곳에서 덫에 걸린 이들은 그래도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밟은 덫은 하필이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눈밖에 없는, 매섭게 추운 겨울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먹을 것은커녕 의지할만한 무엇도 없었다. 그런 자에게 삶은 목에 걸린 올가미로 느껴진다. 내 의지로 주도하는 것보다 억지로 끌려가야 할 일이 많은 삶. 그렇지 않아도 ‘헬조선’, ‘오포세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지 오래인 지금. 애당초 그리 폭이 넓지 않은 올가미를 목에 두르고 태어난 나 같은 사람들은 하루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죄어오는 올가미에서 날마다 질식의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도선우의 소설, ‘스파링’의 주인공 장태주의 독백에 공감하게 된 것은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질식의 공포를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비로소 질식의 공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진정한 원천을 확인했는데 그것이 바로 덫이었다. 물론 덫은 하나의 비유다. 그것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편입하게 된 타인의 질서를 나타낸다. 내 뜻과 상관없이 나를 이물(異物)로 만드는 그런 질서다. 그것은 내가 그 질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내 의견과 이해를 용납하지 않으며 오로지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배제될 것인가만 허용하기에 더욱 덫을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속과 배제를 가르는 기준이 단 하나, 바로 나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타인의 질서는 나의 주체성을 온전히 죽여야만 나를 진정으로 편입시킨다. 그 때라야 나는 더이상 이물(異物)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러하니, 탈주 아니면 죽음만이 남아있는 덫만큼 그런 질서의 정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덫이 장태주에게 질식의 공포를 안긴 원천이었으며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이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여고생의 사생아로 그것도 화장실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척박한 곳의 덫에 걸려버렸다고 할 수 있는 장태주는 그런 점에서 나와 유사했고 그랬기에 갈수록 강고하고 교묘한 덫을 만나 벌어지는 그의 투쟁과 패배의 이야기는 내게 보다 살갑게 다가왔다. 그래, 세상에는 수 많은 덫이 있다. 내 포기와 방관을 강요하고 회유하는 덫들. 자라면서 보다 넓은 사회로 나아갈수록 처음엔 선명했던 그 덫들이 점점 더 교묘하게 은폐되거나 작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지 않을수록 더 강하게 내 발목을 붙잡는다는 것도.


 장태주가 만나는 덫들도 그랬다. 그는 크게 모두 세 개의 덫을 만난다. 초등학생이 되어 만나는 오재호, 중학생 때 만나는 재훈 그리고 프로 복서로 성공한 뒤 만나게 되는 한기영, 이렇게다. 처음의 덫은 오재호라는 한 개인의 모습과 장태주가 소중하게 기르는 새 ‘알리’를 죽이는 폭력으로 단순하고 선명하게 장태주 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장태주는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어 맞닥뜨린 재훈의 덫은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조직이었고 게다가 폭력마저 구조적으로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태주는 속절없이 희생자가 되어 버렸다. 그는 자신이 재훈에게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모른다. 주체성을 포기하라는 달콤한 유혹을 거부해버린 그는 강고한 타인의 질서에 의해 조용하고 은밀하게 배제된 것이다. 결국 그는 소년원으로 가게 되고 거기서 만난 담임의 ‘타인의 질서에 강요되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의 질서를 만들어라’라는 말에 감화되어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학교와 보육원을 떠나 자신을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는 프로 복서의 길로 들어선다. 재훈까지는 그래도 장태주가 싸워야 할 상대가 명확했다. 하지만 프로 복서로 성공한 뒤에 만난 한기영의 덫은 너무나도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어 대적해야 할 상대가 과연 누구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형체 없는 상대를 향해 어디로 어떻게 주먹을 뻗어야 할 지조차 모른 채, 그는 가중되는 혼란과 고독 속에서 끝내 자기 파멸의 길을 선택한다. 어쩌면 이것은 패배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덫에서 잘 빠져나오더라도 언제나 더 강하고 간교한 덫이 날 사로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요소가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결말의 장태주 기분이다. 파멸의 정점이랄 수 있는 방어전 패배의 기자회견 장에서 그는 부재(不在)를 본다.


 빛이 모두 소진되었고 어둠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 자리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 나는 해가 진 그늘 속에 홀로 핀 해바라기처럼, 빛이 사라진 곳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어느 곳을 봐야할 지 알지 못했다. 어느 곳을 바라봐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p. 355)


 이 부재(不在)로 인한 무지(無知)는 장태주에게 과연 비극적인 것일까? 얼른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소설의 처음이 바로 그 부재를 목격한 다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말에서 이제 어디를 봐야할 지 모르게 된 장태주가 다음과 같은 담임의 권고를 따라 자신이 진정 어디를 봐야할 지 알기 위해 지금까지의 자기 인생을 차분히 되짚어 생각해 보는, 그렇게 일종의 복기(復棋)의 과정이라고.


 “때론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살면 그게 제일 편한 것 같지만, 또 막상 자기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고 살면 명확히 제 세계를 구축하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휩쓸리게 돼. 문제는 그들이 세운 질서가 네가 원하는 질서와 다를 수도 있다는 거야. 너한테 무조건 불리하고, 너한테 무조건 억울한. 이해가 돼?” (…) “그걸 알고 뒤늦게 상황을 바꿔보려고 해도 그땐 쉽지 않아. 처음에 잘 생각해서 행동했을 때보다 적어도 만 배 이상은 힘이 들겠지.”(p. 178)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 끝에서 독서를 끝내지 말고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와 읽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결말의 장태주가 단순히 패배한 것은 아니며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겐 더 다행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담임도 생각을 강조했지만, 덫이 갈수록 은폐되고 교묘하게 작동하는 주된 이유는 당하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못하게 하는데 있다. 타인의 질서에게 있어 주체성의 발현이자 의지를 창출하고 행동까지 이르게 만드는 한 개인의 생각은 위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우리는 재훈의 조직은 구성원 모두가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고 한기영의 관리 또한 장태주가 제대로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구성원들과 장태주 모두 무엇이 정말 자신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채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타인의 말을 순순히 납득해 버린다. 장태주의 주먹은 자기 주체성의 표현이었으며 타자의 질서에 대한 사유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무책임과 방관 속에 진정한 자신을 포기하려는 작태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이다. 덫에서 빠져나오려는 토끼의 강렬한 몸부림과도 같은.


 하지만 복서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장태주는 그만 그 화려함과 달콤함에 도취되어 비슷한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재훈과 같은 길을 걷고 만다. 강력한 힘과 돈으로 자신이 질서의 중심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면 생각이란 게 없어도 원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커다란 패착이었다. 패착이었다는 것은 그가 그렇게 질서의 중심으로 나아갈수록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들인 아라, 담임, 누나 그리고 할아버지가 점차 사라진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거꾸로 힘이나 재력이 아니라 사유야말로 덫을 푸는 열쇠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에겐 타인의 질서와 결별이 있어야 했다. 결연한 단절을 통해 자신으로 온전히 돌아와야 했다. 취생몽사(醉生夢死)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머리로 또렷이 생각하기 위해. 소설 후반에 자기 파멸을 초래한 모든 폭행과 기벽들은 그런 단절을 위한 몸짓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 앞에 모든 것이 텅 비어버린 그 순간, 나는 감히 태주가 홀가분한 행복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랬기 때문에 비로소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는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게 만드는, 자신이 정녕 어디를 봐야하고 무엇을 붙잡아야 할 지 알게 만드는 그런 깨달음을.


 남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도록 방치하는 것은 종종 그 자체로 위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꾸만 내가 모르던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지고 또하나의 나로 자리잡히게 되면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내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급기야 나조차 내가 누구인지 헷갈릴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서서히 나를 잠식하고, 그러다보면 기어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내가, 정작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p. 11)


 두 번 읽게 된 이 말은 내게도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 역시 세번 째 덫에 걸린 태주와 상황과 그리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는데 나는 이 캄캄하고, 그 어둠조차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미래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고 내가 안심하고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는 더욱 더 작아져만 갔다. 세상에 대한 구토와 세상이 내리누르는 육신과 영혼의 통증을 낮과 밤처럼 오고가는 일상. 분노하는 것에도, 이해하는 것에도, 타협하는 것마저 이미 지쳐버렸다. 쌓여가는 울화, 차오르는 우울, 번져가는 무기력 속에서 몽유병 환자와도 같이 그저 관성과 타성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맞다. 나는 사각의 링에 내던져진, 그러나 그로기 직전의 선수였다. 하지만 상태는 태주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나는 태주보다 좋은 동체 시력도 없고 펀치도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은연중 이런 습성에 길들여 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태주처럼 문제와 맞써 싸우며 정면 돌파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덜 힘들고 귀찮은 길만을 찾아갔던 것이다. 타인의 질서에 대한 갑갑증을 누구보다 심하게 느꼈지만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게도 단 한 번도 그것과 단절하여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려고는 하지 않고 오히려 타인의 질서에 보다 더 잘 융화되도록 애쓰기만 했던 나였다. 나는 태주의 말에 따르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린’ 상태였다. 태주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진실된 나의 초상을 똑똑히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비록 패배가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라도 왜 단 한 번도 당당하게 주먹을 날려볼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 목에 걸린 올가미가 적다는 것도 알고 내가 약하다는 것도 알기에 더 커져버린 불안과 공포 때문이었다. 나는 승부의 결과가 이미 조작되어 있는 사각의 링에 오른 선수와 마찬가지였다.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인용한 말에 꽤 둔중한 울림을 느꼈고 이런 깨달음을 얻도록 만든 태주의 패배가 실은 구원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간절히 믿고 싶었다. 사유야말로 내 발목을 붙잡은 덫을 여는 열쇠라는 사실은 내게 지금 가진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는 위안과 희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태주의 복기(復棋)는 내게 크게 두 가지를 주었다. 하나는 현상(現象)된 물리적인 외양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는 경고였고 다른 하나는 제 아무리 강고하고 간교한 덫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유는 결국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사실 그 덫이 그토록 강력하게 된 것은, 소설 속 담임의 말마따나 바로 나 자신의 나약과 방관 그리고 무책임을 거름으로 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라면서 말이다.


 이로써 내 상황을 좀 더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덫이라는 물리적인 실체에 너무 좌지우지되었다는 것과 그렇게 현상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제대로 된 성찰없이 살다보니 그만 사는대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자기 관리와 계발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늘 모자르고 부족하기 마련인 개인의 모습을 오로지 결점으로 인식케 하여 제 쪽에서 먼저 사회의 부단한 요구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맞추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한 바 있다. 나도 이와 똑같았다. 그들의 질서를 깊이 내면화하여 살다보니 그들의 시각으로만 나를 보게 되었고 그 기준에 잘 부합하지 않는 내 모습에서 더욱 더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달리 보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태주역시 패배의 경험을 통해 타인의 삶에 대한 일면적(一面的)이었던 시각을 다면적(多面的)으로 변화시킨다. 내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이리라. 불안과 공포는 일면적(一面的)인 시야일 때 더욱 증식하는 법이니까. 물론 다면적(多面的)인 시야는 외양과 현상에 굴하지 않는 부단한 사유만이 가져다 줄 수 있다. 사유란 송곳과 같아서 모든 이의 개체성(個體性)을 지우고 동일한 관점과 사고를 가지도록 만드는 덫의 장막(帳幕)에 맞서 거기에 다양한 구멍을 뚫고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시야를 갖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게 나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달리 바라볼 여백을 갖게 만들 것이며 내가 정말 두려워하던 것들도 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인식과 함께 반대로 거기에서 내 삶에 유용한 것마저 찾아내게 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덫 또한 나 자신을 시험할 단련의 계기로 여기게 이끌 수도 있다.


 문득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스파링’으로 되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스파링’은 실전과 같은 연습 경기를 뜻한다. 아무리 실전처럼 치뤄져도, 실전은 아닌 것이다. 소설에서 스파링은 한 번 나온다. 그런데도 제목은 ‘스파링’이다. 아마도 이것은 작가가 지금의 태주에게 ‘넌 아직 실전을 치르지 않았어. 지금까진 모두 연습 경기일 뿐이야. 모든 것을 깨우친 지금이야말로 실전이니, 열심히 해 봐!’하고 보내는 위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내게도 해당된다. 나마저 이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 제목에서, 지금까지 환영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을 오로지 실체로만 생각하여 지레 겁먹고 피하기에 급급했던 나와 작별하고 이제라도 제대로 한 번 맞서 보라는 작가의 응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올가미는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다. 두려움에 주눅이 들어 싸움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비겁한 나를 정당화시키려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른다. 굴레는 보고자 하는 눈에서만 존재하는 것. 사유의 펀치는 휘두르는 것만큼 굴레를 지우고 나의 자유와 가능성을 확장시킬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도 자신의 시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마음은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으며 아무도 그에게 고삐를 맬 수 없다’고. 지금 이 순간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부단히 계속될 사유의 훈련을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와 아무래도 나란히 놓고 비교하게 되는 윤성희의 '웃는동안'과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두 소설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모두 버거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윤성희의 '웃는 동안'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물이 되려하고,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에 나오는 사람들은 동물이 되려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현대화가 진전될 수록 자기 반성과 성찰이 가능한, 즉 인간과 같은 '대자적 존재'는 욕망의 발현과 실현에 있어 즉각적인 실천이 가능한 '즉자적 존재'가 되고싶어 하는 경향이 더욱 짙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 한 마디로 퇴행의 욕망이 증식한다는 것인데 두 작품은 그런 사르트르의 말이 맞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듯 하다. 그러나 이런 퇴행을 단순한 바람, 다시 말해 삶이 너무 복잡하고 피곤해서 그저 단순하고 쉽게 살고 싶은 마음에 가지게 된 소망 같은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즉자적 존재로의 퇴행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현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장애가 되어 우리 자신을 압박하여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쥐를 몰아가듯 했기 때문에, 그렇게 낭떠러지 가장 자리로 내몰린 결과라는 것이다. 고무공을 손으로 억지로 누르면, 고무공은 압력에 완강히 저항하며 제 모양을 유지하려 버티다가 그것이 안되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버둥댄다. 그 버둥대는 육체가 향하고 있는 곳이 퇴행인 것이다.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이야 말로 이것을 적나라하게 이것을 보여 준다. 소설은 동물원에서 동물 탈을 쓰고 관람객 앞에서 정말 동물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진짜 동물은 관리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보다 값싼 비용으로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대치한 것인데, 이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가 동물 보다 더 추락해버린 것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주인공 역시 고릴라 탈을 쓰고 고릴라 우리 안에서 고릴라처럼 행동하는데,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구조 조정 당하고, 집에서 놀면서 마늘을 까거나 인형 눈알 붙이는 부업을 전전한 끝에 거기까지 내몰린 것이었다. 그렇게 동물이 되는 것은 사회라는 고양이가 쥐인 주인공을 막다른 골목까지 내 몬 끝에 다다른 종착지였고,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동물적인 능력만을 체력 테스트를 통해 증명하고는 동물이 되었다.(동물원에서 동물로 일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무원 시험보다 더 어렵고 엄격한 체력 테스트에 합격해야 동물로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굿바이 동물원'은 퇴행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이며, 이들은 그 퇴행의 압박 속에서 오직 동물이 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참으로 아이러니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한다. 


 동물원에 있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 구실 같은 건 안 해도 돼. 솔직히 이 나라에서 사람 구실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고. 난 거의 없다고 봐. 하지만 동물원은 달라.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동물원이야. 웃기지? 내가 그랬잖아. 사는 게 코미디라고. 자, 한잔해. 어때, 여기 죽여주지? (p. 214)


 한 편, 퇴행의 욕망은 원인을 가지고 있는 발현이기에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러한 욕망을 양산하는 사회가 진정 어떠한 민낯을 가지고 있는지 오롯이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들이 동물로 일하는 동물원은 단순히 노동의 현장만이 아니라 사회의 진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사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동물원인 것이다. 사람을 포기하고 오로지 동물처럼 살아야 간신히 버틸 수 있는 동물원. 소설은 그것을 설득력있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다보면 저절로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 사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툭튀'한 것은 아니니, 분명 어딘가의 것을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우리는 그 모델을 잘 알고 있다. 바로 근대가 창출한 서양 문명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 근대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근대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한다면, 한 마디로 인간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왜나하면 중세까지 종교의 그늘 속에서 귀족과 성직자의 재산 수호와 증식을 위한 농노의 의미 밖에는 가지지 못했던 보통의 인간들이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들 역시도 지배자들과 똑같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귀한 존재이며 자신 속에 잠재된 가능성을 이성을 통해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에 빗대어서 다시 말해 본다면, 근대란 동물원에서 동물로 살던 인간을 그 울타리의 문을 열고 이제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방시켜 준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실을 먹을 수 있었던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타고난 피가 아닌 실력이 주가 되었기에 이제는 귀족 혈통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산업 자본가만 근대의 햇살로 영근 과실을 마음껏 섭취했을 뿐,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 서민들의 처지란 중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산업혁명 초기, 면직 산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자 영국은 경작지를 목축지로 점점 더 많이 바꾸는 인클로저 운동을 시작했고 그로인해 다수의 농민들은 경작지를 잃고 살던 곳에서 도시로 쫓겨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했다.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긴 노동 시간과 그에 비해선 턱없이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말이다. 9세 미만의 아이들 조차 어른들 못지 않게 공장에서 12시간 이상을 일했다. 그래서 엥겔스는 이런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이들만은 살인적인 노동 조건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공장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만큼 사람들의 삶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다만 귀족의 농노에서 공장의 노예로 소속이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귀에 근대가 외친 '천부인권'은 한낱 공염불에 불과했다. 소설의 주인공 '김과장'(소설에 주인공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김과장'으로만 불릴 뿐이다. 주인공이 누구든지 가리킬 수 있는 김과장으로만 불린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상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그가 쓰기만 하면 그걸 쓰는 사람이 누구든지 똑같은 고릴라가 되는 탈을 쓰고 고릴라가 된다. 이것은 그대로 익명의 사람에서 익명의 동물로 전이되는 것과 같다. 그는 사회에서도, 동물원에서도 사회가 강제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한(고릴라 역시 주인공이 선택한 동물은 아니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결국 이 사실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또 동물원에서 동물로 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일하는 가짜 세렝게티가 아니라 정말 동물이 되어 살 수 있는 진짜 세렝게티를 염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곳은 정체성을 강요하는 철책이 없는, 오로지 자기가 선택한, 자신이 정립한 정체성만으로 살 수 있는 광할한 자유의 영토이다.)이 그랬듯이, 겨우 귀족의 동물원을 나와 곧장 자본의 동물원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수백년이 흐른 지금의 상황 역시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다. 중세 때, 사람들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기준은 이렇게 단순했다. 지금도 똑같다. 오로지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벌 수 없는 이들은 이제 사람 이하의 존재, 사물이 되거나 동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사람으로 남아있으려는 안간힘은 사실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벌려는 안간힘에 다름아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안간힘이라는 것이 더 처연하고 아프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돈이라는 것에 그 정도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이 우스꽝스럽기짝이 없는 현실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웃는다. 그러고보니 퇴행을 보여주는 윤성희의 '웃는 동안'과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모두 웃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웃음이 진짜 웃음인 것은 아니다. 보다 정확히는 '헛웃음'에 가깝다. 예전에 한참 유행한 개그인 최불암 시리즈를 들었을 때와 똑같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는 웃음. 아니,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저 웃음만 나오는데, 그렇게 웃는 자신이 또 어이가 없어서 웃게 되는 웃음. 바로 그런 웃음이다. 그저 그렇게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비웃음 같은 것. 한 마디로 '자조(自嘲)'.

 

 내 생각에 '자조'는 더욱 단단한 철창으로 우리를 가두고 오로지 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강요하는 지금 시대를 견뎌가는 하나의 방법이 된 것 같다. 조금 무리한 근거일지도 모르겠는데, 모든 TV 프로그램에서 예능이 대세를 이룬다는 사실이 '자조'가 돈 때문에 사람으로 살기 정말 힘든 이 시대에 그 때문에 더 활활 타오르기만 하는 우리의 광기를 참고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니체의 격언을 광범위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격언은 이러하다.

 '인간만이 웃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장 슬픈 동물이라 웃음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엔 반드시 따라붙는 부록 같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연민(憐憫)이다. 어쩌면 이 말은 틀렸을 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보내는 연민이 오히려 비웃음이란 형태로 나타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는 '굿바이 동물원'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행위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는 것'이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운다. 마늘을 까면서도 울고, 본드를 흡입하면서도 운다. 그렇게 울면서,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할 때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화장실을 찾았다가 모든 칸이 다 우는 남자들로 가득 차서 그냥 돌아나와야 했었던 때를 떠올린다. 우는 것은 그만이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에게 울음은 마치 기본 사양처럼 장착되어 있다. 돈이라는 콧두레에 끌려가는 소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은 그들 모두가 똑같은지라, 하나같이 소처럼 긴 목울음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는 것은 등장인물만이 아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우리 독자 역시 읽다가 얼핏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이 겪은 일이 꼭 그들만의 것은 아니기에, 읽는 이도 얼마든지 이미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겪을 수 있는 일이기에, 동병상련이 피워내는 물안개가 마음을 자욱하게 휩싸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 한 구석에서 시큰한 통증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아프다.


 웃음은 견디기 위해서라지만 울음으로 집약되는 연민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소설은 퇴행을 다룬다. 퇴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참담하여 헛웃음이 난다. 때로는 한번 길게 내쉬는 한숨이 고달픈 현실을 달콤한 노래보다 더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듯이, 이런 헛웃음 또한 버틸 힘을 준다. 하지만 웃음, 그것밖에 없다면 소설은 독자에게 살아가려면 그저 자신을 자조하면서 잠시 현실을 잊는 것밖에 없다는 말만 들려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바로 이 눈물로 대변되는 연민으로 인해 우리는 그 보다 더 진정한 모습의 버틸 힘을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래, 이 소설엔 자조와 연민이 있다.


 '자조(自嘲)'가 오늘을 위한 것이라면 연민은 내일을 위한 것이다. 소설에서 연민은 오늘의 비극을 그치게 할 대안으로 기능한다. 어쩌면 작가 역시 자조가 가진 한계를 이미 깨달아 연민을 다시 소설에 누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조의 한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로든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조를 통해 힘든 오늘을 견디더라도 그 효과는 오직 자신에게 한정된다. 자조는 내몰림 끝에 나온 것이었다. 그 내몰림은 혼자라 자신을 압박해 오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막다른 골목에서 진정 빠져나오고 싶다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퇴행을 강요하는 강도를 약화시켜야 한다. 그러러면 함께 변화를 도모할 타인이 필요하고, 그렇게 되려면 타인과 이어져야 한다. 바로 그 연결, 매개의 역할을 연민이 한다.


 연민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건 바로 우리가 겪은 슬픔 때문이라고 말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와는 삶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간이 다른 동물들 보다 더 많이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것도 아마 니체의 말마따나 가장 슬픈 동물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슬픔은 가장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공감을 쉽게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나와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 타인을 보면서 그 상황에 처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그래서 지금 타인의 처지를 쉽게 이해하게 되고 그 상황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그것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힘들지 잘 알고 있는 나는 저절로 그를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고 위로를 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연민의 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일한 경험이 불러 일으키는 공감의 확장. 그리고 그 공감을 통해 서로가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연대가 이뤄진다. 소설에 나오는 '마운틴 고릴라들의 모임' 그대로 말이다.


 주인공과 송과장의 관계처럼, 사람으로 있을 때는 이어질 수 없었던 관계들이 동물이 되어서는 이뤄진다. 그들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울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회에 내몰린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었고, 그런 경험 때문에 같이 내몰린 자의 눈물에 쉽게 공감하고 응답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진실된 교감은 오로지 그들이 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로에 대한 연민이 진솔한 소통과 두터운 연대를 이뤄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조를 넘어 연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보도록 한다. 연민을 통한 이해와 배려가 비록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이 가짜 세렝게티 동물원에 갇혀 있을 지라도 영혼만은 창살을 빠져나와 저 무한의 하늘을 날아다니며 어디에 있는 타인이든 이어지게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강태익 작가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뭣이 중한데? 공간이 그토록 중요해? 이 육체가 창살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이 그렇게 대단히 차이나냐?"고.

 

 작가는 물론 아니라고 대답한다. 공간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정말 우리에게 자유가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와 같이 느낄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유는 바로 타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몸은 비록 가둘 수 있을지라도 마음은 절대 가두지 못할 것이라 한다. 동물 탈을 아무리 써도 동물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그 안의 나를 사람으로 봐주는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작가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고릴라 탈을 쓰고 행동할 때, 관람객들이 그를 진짜 고릴라로 알고 하는 행동의 묘사를 통해 거꾸로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를 쓰고 동물원인 이 곳을 빠져나가려 하기 보다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배려를 통해 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이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랬기에 소설에서 주인공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굳이 진짜 세렝게티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 곳까지 찾아간 이들 역시 진짜 동물처럼 살게 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다. 멀리서도 자신을 여전히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던 덕분에.


 물론 이렇게 되려면 타인과의 연대를 가능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연민의 이랑을 마음 밭에 무던히도 많이 갈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한다. 남들에게 자주 연민을 느끼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우리의 어깨를 다독인다. 연민 그리고 슬픔이 오히려 당신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이다. 보다 더 사람답게 되기 위해 우리는 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설 막바지의 만딩고처럼 이 사회에 당당하게 '굿바이 동물원' 할 수 있게 만드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강태익 작가의 진심어린 조언이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은 지금, 난 그 말을 깊이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