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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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장판사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소설집 '악마의 증명'이 출간되었다.

 악마의 증명. 그것은 원래 중세에서 토지 소유권 입증과 관련하여 사용되던 일종의 법률 용어로, 악마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쉬우나(존재하는 것을 데려오기만 하면 되니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우므로(모든 경우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증명해야 하므로) 이처럼 부재보다 존재를 증명하는 자가 입증의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장편은 아니고 단편집으로 표제작 '악마의 증명'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가장 처음에 나온 '악마의 증명'은 원래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 미스터리 단편선'의 게재 되었던 것으로 당시 여자 국선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의 한 에피소드가 먼저 출간된 이 단편의 설정과 유사하여 표절 논란이 일어나 본의 아니게 유명세를 탔다. 사실 표절 욕구를 일으킬만큼 아이디어가 꽤 좋은 단편인데, 외모로는 얼른 구분되지 않는 일란성 쌍둥이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문제는 범죄를 저지른 쌍둥이 하나가 자신이 일란성 쌍둥이인 것을 이용해 한 번 판결이 내려진 사건에 대해선 두 번 재판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으로 완전범죄를 꾀한다는 것인데 이 같은 범인의 전략을 검사가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것을 볼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법정물이다. 검사가 이미 무죄 판결을 받은 범인을 다시 법정에 세워 유죄를 받도록 입증해야 하므로 그런 검사의 입장에서 '악마의 증명'이란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역시 부장 판사 출신 작가답게 재판 과정의 묘사가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래서 얻게 되는 덤도 있다. 바로 최근 박근혜 뇌물 수수 재판에서 일어난, 증인으로 불려 나온 삼성 임원진들이 법정에서의 증언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 일 말이다. 많은 이들이 왜 그러는지 궁금 할텐데 바로 그 이유를 이 단편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주인공 격인 검사가 재판을 거듭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검찰 조서가 아니라 법정에서의 진술이 재판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것. 그래서 증언을 거부해 버리면 검찰 조서가 무용지물이 되어 아예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 증인으로 나온 삼성 임원진도 이와 똑같은 이유로 함구하는 것이다. 이재용을 위해서. 이것을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 그것이 검찰의 과제가 될 것인데 부디 단편 속 호연정 검사처럼 이재용 변호인단을 제대로 물먹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단편집 '악마의 증명'은 미스터리만 있지 않고 판타지와 미스터리가 섞여 있는데(문장의 경제를 위해 판타지라고 했지만 단순한 판타지는 아니고 타임 루프나 공포 같은 것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성에 호소하는 미스터리와 달리 감성에 호소하는 환상성이 가미된 단편들이기에 편의상 판타지라 명명했다.) 판타지 하나가 나오면 미스터리 하나가 나오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글의 꿈', '외딴집에서', '시간의 뫼비우스' 그리고 '죽음이 갈라 놓을 때'는 판타지고 '악마의 증명', '선택', '구석의 노인' 그리고 '킬러퀸의 킬러'는 미스터리다. 또 하나의 특징이 더 있다면 여기엔 도진기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진구'와 '고진'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스탠드 얼론'만 있다는 것이다.


 그간 작가의 많은 작품을 읽어왔지만 미스터리 쪽만 접했었기에 그가 다른 장르의 작품들을 썼는 줄은 몰랐는데 이번 단편집으로 만나게 되어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폭넓게 접해볼 수 있었다. 단편집 마지막엔 작가의 말이 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미스터리 쪽은 작가의 프로페셔널한 면이, 판타지 쪽은 프로페셔널한 면에 가려져 있었던 개인의 취향이 발현된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이 단편집을 통해 작가 도진기가 아닌 개인 도진기도 만나볼 수 있다고나 할까? 특히 '시간의 뫼비우스'는 자전적인 게 한껏 깃들어 있어 더욱 개인으로서의 그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쯤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가 하고 묻는다면, 역시 미스터리 한 쪽이 다른 쪽 보다 낫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선택'이다. '악마의 증명'에서 활약했던 호연정 검사가 다시 활약하는데, 인간미 넘치는 주인공이 현재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대표 적폐 세력인 검사로 계속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다고 나는 믿고 싶은데 아무튼 이번에는 변호사가 되어서 경찰이 이미 자살로 종결한 빗길 교통 사고를 죽은 피해자 어머니의 의뢰로 재수사 한다. 읽다보면 문득 기시 유스케의 '유리망치'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설정 같은 것을 따왔다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한 가지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 들고 계속 나타나는 반대 증거 앞에서 이전의 전제를 번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지라 그렇다. 경찰의 판단이 무리가 없을 만큼 자살이 확실한 정황 속에서 주인공이 찾아내는 반대의 진실이 꽤나 인상적이다. 그건 경찰이 결코 보지 못했고 또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곳을 호연정 변호사가 시선을 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인데, 이 단편과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빌려 온 할머니 탐정이 나오는 '구석의 노인(에마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은 흥미를 끄는 사건의 재판이 벌어지는 법정에 나가 재판을 구경하는 게 취미인데, 이 소설의 할머니도 그렇기 때문이다.)'과 연결하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어디로 이끄는지 드러난다. 바로 '사람'이란 것 말이다. 물리적 단서만 놓고보면 여지 없이 혼란스럽고 그릇된 결론이 도출되지만, 그 중심에 사람을 놓아두고 보면 모든 게 다 매끄럽게 정리되는 것이다. 호연정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정의를 가져오려는 법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분명하게 나타낸다.


 감정 없는 사실만을 불쑥 쌓듯 쌓아올린 거죠. 가드레일을 부수고 달려나간 자동차, 창밖으로 나와 동맥이 잘린 운전자의 왼손, 추락의 흔적, 메스와 지문, 이런 것들이 의미 없이 요철만 맞게 조합한, '사람'이 빠진 결론이에요'(p. 118)


 그리고 '구석의 노인'에 나오는 김옥선 할머니는 잘못된 판결이 나자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찬다.


 '사람'을 모르니 저런 판결이 나지...(p. 175)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바로 법인데, 정작 법에서 사람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이제 우리나라 사법 현실의 적나라한 진실을 정의하는 말이 되었다. 그 말이 처음 나왔던 때는 무려 1988년이었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우리나라 한 켠엔 그 올림픽을 결코 웃으며 바라볼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이 존재했다. 외국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계동을 비롯한 서울 각지에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거처를 철거 당해야 했던 가난한 이들이. 쇠파이프와 불도저에 속절없이 밀려나가야 했던 그들의 눈물과 피를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았다. 법도 팔짱을 낀채 모른 척 했다. 이후 내내 그런 모습이다. 봐야 할 사람은 보지 않고 안 봐도 좋을 사람은 당사자가 바라는 것보다 더 깊이 본다.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에 따라 그 헤아림의 깊이가 결정되기에 그렇다. 정유라가 두 번이나 영장 기각을 받은 것처럼. 이 소설집에 담긴 호소, 법이 정말 보호해야 할 사람을 보라는 것, 그것은 원래 법이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아마 제목도 바로 그런 뜻에서 붙인 것은 아니었을까?

 '악마의 증명'으로 입증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것,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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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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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덫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태어난 순간의 육체와 환경 또한 내 선택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처음 눈을 뜨는 그 순간, 내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었고 내게 허락된 것은 오직 지금 주어진 모든 것에 적응해야 한다는 강요밖에 없었으니, 우연히 덫을 밟아버린 그 순간에 발목이 단단히 붙잡혀 운명이 고정된 불쌍한 토끼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래도 살아왔다. 비록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덫의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였으나, 그 유예의 시간이나마 최선을 다해 의미롭게 채워보려 애썼다. 그나마 따뜻한 봄날의 숲속에서 뜯어먹을 풀들이 지천으로 널린 곳에서 덫에 걸린 이들은 그래도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밟은 덫은 하필이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눈밖에 없는, 매섭게 추운 겨울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먹을 것은커녕 의지할만한 무엇도 없었다. 그런 자에게 삶은 목에 걸린 올가미로 느껴진다. 내 의지로 주도하는 것보다 억지로 끌려가야 할 일이 많은 삶. 그렇지 않아도 ‘헬조선’, ‘오포세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지 오래인 지금. 애당초 그리 폭이 넓지 않은 올가미를 목에 두르고 태어난 나 같은 사람들은 하루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죄어오는 올가미에서 날마다 질식의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도선우의 소설, ‘스파링’의 주인공 장태주의 독백에 공감하게 된 것은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질식의 공포를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비로소 질식의 공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진정한 원천을 확인했는데 그것이 바로 덫이었다. 물론 덫은 하나의 비유다. 그것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편입하게 된 타인의 질서를 나타낸다. 내 뜻과 상관없이 나를 이물(異物)로 만드는 그런 질서다. 그것은 내가 그 질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내 의견과 이해를 용납하지 않으며 오로지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배제될 것인가만 허용하기에 더욱 덫을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속과 배제를 가르는 기준이 단 하나, 바로 나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타인의 질서는 나의 주체성을 온전히 죽여야만 나를 진정으로 편입시킨다. 그 때라야 나는 더이상 이물(異物)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러하니, 탈주 아니면 죽음만이 남아있는 덫만큼 그런 질서의 정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덫이 장태주에게 질식의 공포를 안긴 원천이었으며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이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여고생의 사생아로 그것도 화장실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척박한 곳의 덫에 걸려버렸다고 할 수 있는 장태주는 그런 점에서 나와 유사했고 그랬기에 갈수록 강고하고 교묘한 덫을 만나 벌어지는 그의 투쟁과 패배의 이야기는 내게 보다 살갑게 다가왔다. 그래, 세상에는 수 많은 덫이 있다. 내 포기와 방관을 강요하고 회유하는 덫들. 자라면서 보다 넓은 사회로 나아갈수록 처음엔 선명했던 그 덫들이 점점 더 교묘하게 은폐되거나 작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지 않을수록 더 강하게 내 발목을 붙잡는다는 것도.


 장태주가 만나는 덫들도 그랬다. 그는 크게 모두 세 개의 덫을 만난다. 초등학생이 되어 만나는 오재호, 중학생 때 만나는 재훈 그리고 프로 복서로 성공한 뒤 만나게 되는 한기영, 이렇게다. 처음의 덫은 오재호라는 한 개인의 모습과 장태주가 소중하게 기르는 새 ‘알리’를 죽이는 폭력으로 단순하고 선명하게 장태주 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장태주는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어 맞닥뜨린 재훈의 덫은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조직이었고 게다가 폭력마저 구조적으로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태주는 속절없이 희생자가 되어 버렸다. 그는 자신이 재훈에게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모른다. 주체성을 포기하라는 달콤한 유혹을 거부해버린 그는 강고한 타인의 질서에 의해 조용하고 은밀하게 배제된 것이다. 결국 그는 소년원으로 가게 되고 거기서 만난 담임의 ‘타인의 질서에 강요되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의 질서를 만들어라’라는 말에 감화되어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학교와 보육원을 떠나 자신을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는 프로 복서의 길로 들어선다. 재훈까지는 그래도 장태주가 싸워야 할 상대가 명확했다. 하지만 프로 복서로 성공한 뒤에 만난 한기영의 덫은 너무나도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어 대적해야 할 상대가 과연 누구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형체 없는 상대를 향해 어디로 어떻게 주먹을 뻗어야 할 지조차 모른 채, 그는 가중되는 혼란과 고독 속에서 끝내 자기 파멸의 길을 선택한다. 어쩌면 이것은 패배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덫에서 잘 빠져나오더라도 언제나 더 강하고 간교한 덫이 날 사로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요소가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결말의 장태주 기분이다. 파멸의 정점이랄 수 있는 방어전 패배의 기자회견 장에서 그는 부재(不在)를 본다.


 빛이 모두 소진되었고 어둠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 자리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 나는 해가 진 그늘 속에 홀로 핀 해바라기처럼, 빛이 사라진 곳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어느 곳을 봐야할 지 알지 못했다. 어느 곳을 바라봐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p. 355)


 이 부재(不在)로 인한 무지(無知)는 장태주에게 과연 비극적인 것일까? 얼른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소설의 처음이 바로 그 부재를 목격한 다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말에서 이제 어디를 봐야할 지 모르게 된 장태주가 다음과 같은 담임의 권고를 따라 자신이 진정 어디를 봐야할 지 알기 위해 지금까지의 자기 인생을 차분히 되짚어 생각해 보는, 그렇게 일종의 복기(復棋)의 과정이라고.


 “때론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살면 그게 제일 편한 것 같지만, 또 막상 자기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고 살면 명확히 제 세계를 구축하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휩쓸리게 돼. 문제는 그들이 세운 질서가 네가 원하는 질서와 다를 수도 있다는 거야. 너한테 무조건 불리하고, 너한테 무조건 억울한. 이해가 돼?” (…) “그걸 알고 뒤늦게 상황을 바꿔보려고 해도 그땐 쉽지 않아. 처음에 잘 생각해서 행동했을 때보다 적어도 만 배 이상은 힘이 들겠지.”(p. 178)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 끝에서 독서를 끝내지 말고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와 읽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결말의 장태주가 단순히 패배한 것은 아니며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겐 더 다행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담임도 생각을 강조했지만, 덫이 갈수록 은폐되고 교묘하게 작동하는 주된 이유는 당하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못하게 하는데 있다. 타인의 질서에게 있어 주체성의 발현이자 의지를 창출하고 행동까지 이르게 만드는 한 개인의 생각은 위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우리는 재훈의 조직은 구성원 모두가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고 한기영의 관리 또한 장태주가 제대로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구성원들과 장태주 모두 무엇이 정말 자신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채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타인의 말을 순순히 납득해 버린다. 장태주의 주먹은 자기 주체성의 표현이었으며 타자의 질서에 대한 사유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무책임과 방관 속에 진정한 자신을 포기하려는 작태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이다. 덫에서 빠져나오려는 토끼의 강렬한 몸부림과도 같은.


 하지만 복서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장태주는 그만 그 화려함과 달콤함에 도취되어 비슷한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재훈과 같은 길을 걷고 만다. 강력한 힘과 돈으로 자신이 질서의 중심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면 생각이란 게 없어도 원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커다란 패착이었다. 패착이었다는 것은 그가 그렇게 질서의 중심으로 나아갈수록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들인 아라, 담임, 누나 그리고 할아버지가 점차 사라진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거꾸로 힘이나 재력이 아니라 사유야말로 덫을 푸는 열쇠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에겐 타인의 질서와 결별이 있어야 했다. 결연한 단절을 통해 자신으로 온전히 돌아와야 했다. 취생몽사(醉生夢死)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머리로 또렷이 생각하기 위해. 소설 후반에 자기 파멸을 초래한 모든 폭행과 기벽들은 그런 단절을 위한 몸짓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 앞에 모든 것이 텅 비어버린 그 순간, 나는 감히 태주가 홀가분한 행복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랬기 때문에 비로소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는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게 만드는, 자신이 정녕 어디를 봐야하고 무엇을 붙잡아야 할 지 알게 만드는 그런 깨달음을.


 남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도록 방치하는 것은 종종 그 자체로 위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꾸만 내가 모르던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지고 또하나의 나로 자리잡히게 되면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내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급기야 나조차 내가 누구인지 헷갈릴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서서히 나를 잠식하고, 그러다보면 기어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내가, 정작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p. 11)


 두 번 읽게 된 이 말은 내게도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 역시 세번 째 덫에 걸린 태주와 상황과 그리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는데 나는 이 캄캄하고, 그 어둠조차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미래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고 내가 안심하고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는 더욱 더 작아져만 갔다. 세상에 대한 구토와 세상이 내리누르는 육신과 영혼의 통증을 낮과 밤처럼 오고가는 일상. 분노하는 것에도, 이해하는 것에도, 타협하는 것마저 이미 지쳐버렸다. 쌓여가는 울화, 차오르는 우울, 번져가는 무기력 속에서 몽유병 환자와도 같이 그저 관성과 타성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맞다. 나는 사각의 링에 내던져진, 그러나 그로기 직전의 선수였다. 하지만 상태는 태주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나는 태주보다 좋은 동체 시력도 없고 펀치도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은연중 이런 습성에 길들여 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태주처럼 문제와 맞써 싸우며 정면 돌파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덜 힘들고 귀찮은 길만을 찾아갔던 것이다. 타인의 질서에 대한 갑갑증을 누구보다 심하게 느꼈지만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게도 단 한 번도 그것과 단절하여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려고는 하지 않고 오히려 타인의 질서에 보다 더 잘 융화되도록 애쓰기만 했던 나였다. 나는 태주의 말에 따르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린’ 상태였다. 태주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진실된 나의 초상을 똑똑히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비록 패배가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라도 왜 단 한 번도 당당하게 주먹을 날려볼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 목에 걸린 올가미가 적다는 것도 알고 내가 약하다는 것도 알기에 더 커져버린 불안과 공포 때문이었다. 나는 승부의 결과가 이미 조작되어 있는 사각의 링에 오른 선수와 마찬가지였다.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인용한 말에 꽤 둔중한 울림을 느꼈고 이런 깨달음을 얻도록 만든 태주의 패배가 실은 구원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간절히 믿고 싶었다. 사유야말로 내 발목을 붙잡은 덫을 여는 열쇠라는 사실은 내게 지금 가진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는 위안과 희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태주의 복기(復棋)는 내게 크게 두 가지를 주었다. 하나는 현상(現象)된 물리적인 외양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는 경고였고 다른 하나는 제 아무리 강고하고 간교한 덫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유는 결국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사실 그 덫이 그토록 강력하게 된 것은, 소설 속 담임의 말마따나 바로 나 자신의 나약과 방관 그리고 무책임을 거름으로 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라면서 말이다.


 이로써 내 상황을 좀 더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덫이라는 물리적인 실체에 너무 좌지우지되었다는 것과 그렇게 현상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제대로 된 성찰없이 살다보니 그만 사는대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자기 관리와 계발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늘 모자르고 부족하기 마련인 개인의 모습을 오로지 결점으로 인식케 하여 제 쪽에서 먼저 사회의 부단한 요구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맞추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한 바 있다. 나도 이와 똑같았다. 그들의 질서를 깊이 내면화하여 살다보니 그들의 시각으로만 나를 보게 되었고 그 기준에 잘 부합하지 않는 내 모습에서 더욱 더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달리 보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태주역시 패배의 경험을 통해 타인의 삶에 대한 일면적(一面的)이었던 시각을 다면적(多面的)으로 변화시킨다. 내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이리라. 불안과 공포는 일면적(一面的)인 시야일 때 더욱 증식하는 법이니까. 물론 다면적(多面的)인 시야는 외양과 현상에 굴하지 않는 부단한 사유만이 가져다 줄 수 있다. 사유란 송곳과 같아서 모든 이의 개체성(個體性)을 지우고 동일한 관점과 사고를 가지도록 만드는 덫의 장막(帳幕)에 맞서 거기에 다양한 구멍을 뚫고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시야를 갖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게 나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달리 바라볼 여백을 갖게 만들 것이며 내가 정말 두려워하던 것들도 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인식과 함께 반대로 거기에서 내 삶에 유용한 것마저 찾아내게 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덫 또한 나 자신을 시험할 단련의 계기로 여기게 이끌 수도 있다.


 문득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스파링’으로 되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스파링’은 실전과 같은 연습 경기를 뜻한다. 아무리 실전처럼 치뤄져도, 실전은 아닌 것이다. 소설에서 스파링은 한 번 나온다. 그런데도 제목은 ‘스파링’이다. 아마도 이것은 작가가 지금의 태주에게 ‘넌 아직 실전을 치르지 않았어. 지금까진 모두 연습 경기일 뿐이야. 모든 것을 깨우친 지금이야말로 실전이니, 열심히 해 봐!’하고 보내는 위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내게도 해당된다. 나마저 이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 제목에서, 지금까지 환영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을 오로지 실체로만 생각하여 지레 겁먹고 피하기에 급급했던 나와 작별하고 이제라도 제대로 한 번 맞서 보라는 작가의 응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올가미는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다. 두려움에 주눅이 들어 싸움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비겁한 나를 정당화시키려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른다. 굴레는 보고자 하는 눈에서만 존재하는 것. 사유의 펀치는 휘두르는 것만큼 굴레를 지우고 나의 자유와 가능성을 확장시킬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도 자신의 시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마음은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으며 아무도 그에게 고삐를 맬 수 없다’고. 지금 이 순간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부단히 계속될 사유의 훈련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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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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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와 아무래도 나란히 놓고 비교하게 되는 윤성희의 '웃는동안'과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두 소설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모두 버거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윤성희의 '웃는 동안'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물이 되려하고,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에 나오는 사람들은 동물이 되려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현대화가 진전될 수록 자기 반성과 성찰이 가능한, 즉 인간과 같은 '대자적 존재'는 욕망의 발현과 실현에 있어 즉각적인 실천이 가능한 '즉자적 존재'가 되고싶어 하는 경향이 더욱 짙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 한 마디로 퇴행의 욕망이 증식한다는 것인데 두 작품은 그런 사르트르의 말이 맞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듯 하다. 그러나 이런 퇴행을 단순한 바람, 다시 말해 삶이 너무 복잡하고 피곤해서 그저 단순하고 쉽게 살고 싶은 마음에 가지게 된 소망 같은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즉자적 존재로의 퇴행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현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장애가 되어 우리 자신을 압박하여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쥐를 몰아가듯 했기 때문에, 그렇게 낭떠러지 가장 자리로 내몰린 결과라는 것이다. 고무공을 손으로 억지로 누르면, 고무공은 압력에 완강히 저항하며 제 모양을 유지하려 버티다가 그것이 안되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버둥댄다. 그 버둥대는 육체가 향하고 있는 곳이 퇴행인 것이다.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이야 말로 이것을 적나라하게 이것을 보여 준다. 소설은 동물원에서 동물 탈을 쓰고 관람객 앞에서 정말 동물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진짜 동물은 관리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보다 값싼 비용으로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대치한 것인데, 이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가 동물 보다 더 추락해버린 것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주인공 역시 고릴라 탈을 쓰고 고릴라 우리 안에서 고릴라처럼 행동하는데,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구조 조정 당하고, 집에서 놀면서 마늘을 까거나 인형 눈알 붙이는 부업을 전전한 끝에 거기까지 내몰린 것이었다. 그렇게 동물이 되는 것은 사회라는 고양이가 쥐인 주인공을 막다른 골목까지 내 몬 끝에 다다른 종착지였고,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동물적인 능력만을 체력 테스트를 통해 증명하고는 동물이 되었다.(동물원에서 동물로 일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무원 시험보다 더 어렵고 엄격한 체력 테스트에 합격해야 동물로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굿바이 동물원'은 퇴행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이며, 이들은 그 퇴행의 압박 속에서 오직 동물이 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참으로 아이러니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한다. 


 동물원에 있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 구실 같은 건 안 해도 돼. 솔직히 이 나라에서 사람 구실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고. 난 거의 없다고 봐. 하지만 동물원은 달라.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동물원이야. 웃기지? 내가 그랬잖아. 사는 게 코미디라고. 자, 한잔해. 어때, 여기 죽여주지? (p. 214)


 한 편, 퇴행의 욕망은 원인을 가지고 있는 발현이기에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러한 욕망을 양산하는 사회가 진정 어떠한 민낯을 가지고 있는지 오롯이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들이 동물로 일하는 동물원은 단순히 노동의 현장만이 아니라 사회의 진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사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동물원인 것이다. 사람을 포기하고 오로지 동물처럼 살아야 간신히 버틸 수 있는 동물원. 소설은 그것을 설득력있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다보면 저절로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 사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툭튀'한 것은 아니니, 분명 어딘가의 것을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우리는 그 모델을 잘 알고 있다. 바로 근대가 창출한 서양 문명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 근대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근대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한다면, 한 마디로 인간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왜나하면 중세까지 종교의 그늘 속에서 귀족과 성직자의 재산 수호와 증식을 위한 농노의 의미 밖에는 가지지 못했던 보통의 인간들이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들 역시도 지배자들과 똑같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귀한 존재이며 자신 속에 잠재된 가능성을 이성을 통해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에 빗대어서 다시 말해 본다면, 근대란 동물원에서 동물로 살던 인간을 그 울타리의 문을 열고 이제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방시켜 준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실을 먹을 수 있었던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타고난 피가 아닌 실력이 주가 되었기에 이제는 귀족 혈통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산업 자본가만 근대의 햇살로 영근 과실을 마음껏 섭취했을 뿐,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 서민들의 처지란 중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산업혁명 초기, 면직 산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자 영국은 경작지를 목축지로 점점 더 많이 바꾸는 인클로저 운동을 시작했고 그로인해 다수의 농민들은 경작지를 잃고 살던 곳에서 도시로 쫓겨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했다.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긴 노동 시간과 그에 비해선 턱없이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말이다. 9세 미만의 아이들 조차 어른들 못지 않게 공장에서 12시간 이상을 일했다. 그래서 엥겔스는 이런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이들만은 살인적인 노동 조건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공장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만큼 사람들의 삶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다만 귀족의 농노에서 공장의 노예로 소속이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귀에 근대가 외친 '천부인권'은 한낱 공염불에 불과했다. 소설의 주인공 '김과장'(소설에 주인공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김과장'으로만 불릴 뿐이다. 주인공이 누구든지 가리킬 수 있는 김과장으로만 불린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상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그가 쓰기만 하면 그걸 쓰는 사람이 누구든지 똑같은 고릴라가 되는 탈을 쓰고 고릴라가 된다. 이것은 그대로 익명의 사람에서 익명의 동물로 전이되는 것과 같다. 그는 사회에서도, 동물원에서도 사회가 강제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한(고릴라 역시 주인공이 선택한 동물은 아니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결국 이 사실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또 동물원에서 동물로 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일하는 가짜 세렝게티가 아니라 정말 동물이 되어 살 수 있는 진짜 세렝게티를 염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곳은 정체성을 강요하는 철책이 없는, 오로지 자기가 선택한, 자신이 정립한 정체성만으로 살 수 있는 광할한 자유의 영토이다.)이 그랬듯이, 겨우 귀족의 동물원을 나와 곧장 자본의 동물원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수백년이 흐른 지금의 상황 역시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다. 중세 때, 사람들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기준은 이렇게 단순했다. 지금도 똑같다. 오로지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벌 수 없는 이들은 이제 사람 이하의 존재, 사물이 되거나 동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사람으로 남아있으려는 안간힘은 사실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벌려는 안간힘에 다름아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안간힘이라는 것이 더 처연하고 아프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돈이라는 것에 그 정도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이 우스꽝스럽기짝이 없는 현실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웃는다. 그러고보니 퇴행을 보여주는 윤성희의 '웃는 동안'과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모두 웃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웃음이 진짜 웃음인 것은 아니다. 보다 정확히는 '헛웃음'에 가깝다. 예전에 한참 유행한 개그인 최불암 시리즈를 들었을 때와 똑같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는 웃음. 아니,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저 웃음만 나오는데, 그렇게 웃는 자신이 또 어이가 없어서 웃게 되는 웃음. 바로 그런 웃음이다. 그저 그렇게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비웃음 같은 것. 한 마디로 '자조(自嘲)'.

 

 내 생각에 '자조'는 더욱 단단한 철창으로 우리를 가두고 오로지 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강요하는 지금 시대를 견뎌가는 하나의 방법이 된 것 같다. 조금 무리한 근거일지도 모르겠는데, 모든 TV 프로그램에서 예능이 대세를 이룬다는 사실이 '자조'가 돈 때문에 사람으로 살기 정말 힘든 이 시대에 그 때문에 더 활활 타오르기만 하는 우리의 광기를 참고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니체의 격언을 광범위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격언은 이러하다.

 '인간만이 웃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장 슬픈 동물이라 웃음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엔 반드시 따라붙는 부록 같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연민(憐憫)이다. 어쩌면 이 말은 틀렸을 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보내는 연민이 오히려 비웃음이란 형태로 나타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는 '굿바이 동물원'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행위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는 것'이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운다. 마늘을 까면서도 울고, 본드를 흡입하면서도 운다. 그렇게 울면서,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할 때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화장실을 찾았다가 모든 칸이 다 우는 남자들로 가득 차서 그냥 돌아나와야 했었던 때를 떠올린다. 우는 것은 그만이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에게 울음은 마치 기본 사양처럼 장착되어 있다. 돈이라는 콧두레에 끌려가는 소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은 그들 모두가 똑같은지라, 하나같이 소처럼 긴 목울음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는 것은 등장인물만이 아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우리 독자 역시 읽다가 얼핏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이 겪은 일이 꼭 그들만의 것은 아니기에, 읽는 이도 얼마든지 이미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겪을 수 있는 일이기에, 동병상련이 피워내는 물안개가 마음을 자욱하게 휩싸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 한 구석에서 시큰한 통증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아프다.


 웃음은 견디기 위해서라지만 울음으로 집약되는 연민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소설은 퇴행을 다룬다. 퇴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참담하여 헛웃음이 난다. 때로는 한번 길게 내쉬는 한숨이 고달픈 현실을 달콤한 노래보다 더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듯이, 이런 헛웃음 또한 버틸 힘을 준다. 하지만 웃음, 그것밖에 없다면 소설은 독자에게 살아가려면 그저 자신을 자조하면서 잠시 현실을 잊는 것밖에 없다는 말만 들려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바로 이 눈물로 대변되는 연민으로 인해 우리는 그 보다 더 진정한 모습의 버틸 힘을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래, 이 소설엔 자조와 연민이 있다.


 '자조(自嘲)'가 오늘을 위한 것이라면 연민은 내일을 위한 것이다. 소설에서 연민은 오늘의 비극을 그치게 할 대안으로 기능한다. 어쩌면 작가 역시 자조가 가진 한계를 이미 깨달아 연민을 다시 소설에 누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조의 한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로든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조를 통해 힘든 오늘을 견디더라도 그 효과는 오직 자신에게 한정된다. 자조는 내몰림 끝에 나온 것이었다. 그 내몰림은 혼자라 자신을 압박해 오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막다른 골목에서 진정 빠져나오고 싶다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퇴행을 강요하는 강도를 약화시켜야 한다. 그러러면 함께 변화를 도모할 타인이 필요하고, 그렇게 되려면 타인과 이어져야 한다. 바로 그 연결, 매개의 역할을 연민이 한다.


 연민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건 바로 우리가 겪은 슬픔 때문이라고 말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와는 삶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간이 다른 동물들 보다 더 많이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것도 아마 니체의 말마따나 가장 슬픈 동물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슬픔은 가장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공감을 쉽게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나와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 타인을 보면서 그 상황에 처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그래서 지금 타인의 처지를 쉽게 이해하게 되고 그 상황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그것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힘들지 잘 알고 있는 나는 저절로 그를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고 위로를 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연민의 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일한 경험이 불러 일으키는 공감의 확장. 그리고 그 공감을 통해 서로가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연대가 이뤄진다. 소설에 나오는 '마운틴 고릴라들의 모임' 그대로 말이다.


 주인공과 송과장의 관계처럼, 사람으로 있을 때는 이어질 수 없었던 관계들이 동물이 되어서는 이뤄진다. 그들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울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회에 내몰린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었고, 그런 경험 때문에 같이 내몰린 자의 눈물에 쉽게 공감하고 응답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진실된 교감은 오로지 그들이 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로에 대한 연민이 진솔한 소통과 두터운 연대를 이뤄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조를 넘어 연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보도록 한다. 연민을 통한 이해와 배려가 비록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이 가짜 세렝게티 동물원에 갇혀 있을 지라도 영혼만은 창살을 빠져나와 저 무한의 하늘을 날아다니며 어디에 있는 타인이든 이어지게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강태익 작가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뭣이 중한데? 공간이 그토록 중요해? 이 육체가 창살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이 그렇게 대단히 차이나냐?"고.

 

 작가는 물론 아니라고 대답한다. 공간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정말 우리에게 자유가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와 같이 느낄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유는 바로 타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몸은 비록 가둘 수 있을지라도 마음은 절대 가두지 못할 것이라 한다. 동물 탈을 아무리 써도 동물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그 안의 나를 사람으로 봐주는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작가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고릴라 탈을 쓰고 행동할 때, 관람객들이 그를 진짜 고릴라로 알고 하는 행동의 묘사를 통해 거꾸로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를 쓰고 동물원인 이 곳을 빠져나가려 하기 보다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배려를 통해 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이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랬기에 소설에서 주인공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굳이 진짜 세렝게티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 곳까지 찾아간 이들 역시 진짜 동물처럼 살게 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다. 멀리서도 자신을 여전히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던 덕분에.


 물론 이렇게 되려면 타인과의 연대를 가능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연민의 이랑을 마음 밭에 무던히도 많이 갈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한다. 남들에게 자주 연민을 느끼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우리의 어깨를 다독인다. 연민 그리고 슬픔이 오히려 당신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이다. 보다 더 사람답게 되기 위해 우리는 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설 막바지의 만딩고처럼 이 사회에 당당하게 '굿바이 동물원' 할 수 있게 만드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강태익 작가의 진심어린 조언이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은 지금, 난 그 말을 깊이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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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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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에 있을 땐, 열외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도 또 없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고 나선, 열외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불안한 일도 또 없다. 사회에서 열외란, 의자뺏기 게임에서 패배자가 된다는 뜻이다. 의자에 앉아야 안정된 삶을 가질 수 있는데, 내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열외 되는 것에 대한 공포도 같이 점점 더 자라난다. 다시 내 자리를 되찾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도, 뉴스도 연일 열외가 되어버린 자들의 불행한 처지를 열거하면서 경고를 쏟아낸다. 경고를 들을 것도 없이 눈으로 직접 보기도 한다. 열외자의 출현은 언론이나 소문으로만 접할 수 있는 나와 먼 생경한 현실이 아니라, 바로 내 지근거리에서 일어나는 이미 익숙한 현실인 것이다. 그런 삶의 목도는 마음 속 공포를 더 부풀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열외자가 생겨나는 속도도 거듭 빨라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휙휙 사라지는 사람들이 남겨 놓은 빈자리가 늘어난다. 어쩌면 저 빈자리가 내일은 내 자리가 되지 않을까 하여 나는 더욱 단단히 매달리기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죽인다. 조직이, 상사가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인간으로 철저히 변할 수 있게 노력한다. 사회에서 우리가 자존심을 굽힐대로 굽히고 더러는 굴욕마저 무릅쓰며 갖은 고생을 감수하는 것은 내가 속한 곳에서 열외가 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열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주원규의 '열외인종 잔혹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네 명의 열외된 인간들이 어쩌다 양머리를 한 수 십명의 테러리스트들이 획책한 열외가 되지 않은 자들의 성채라 할 수 있는 코엑스몰 점거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하루를 그리고 있다. 그 네명은, 이제 곧 어버이 연합에 스카우트 될 것만 같은 노인 장영달, '이태백'이 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비정규직인 이십대의 윤마리아, 회사에 개처럼 충성했지만 돌아온 것은 코 푼 휴지처럼 버려지는 것이 전부였던 중년의 노숙자 김중혁(이름 때문에 자꾸 동명의 소설가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마지막으로 게임 말고는 현실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없는 십대의 불량 청소년 기무로, 사실 현재 자신의 의자를 간신히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겐 가장 피하고 싶은 인생의 모습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네 명을 혼비백산 시켰던 양머리 테러리스트들도 결코 그들과 다르지 않았으니, 실은 양머리 테러리스트들 역시 열외자였고 그들이 일으킨 테러 또한 자신들과 같은 열외자들을 대량 생산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의 자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 재난 영화가 유난히 유행할 때 그 이유에 대해 어떤 평론가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재난 영화는 추락과 파산의 불안이 만연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의식적 소망을 담고 있다. 끝도 없이 불안을 가져다 주는 이 사회가 너무 진저리가 나서 어서 끝장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양머리 테러리스트들의 염원도 이와 같다. 그들의 테러는 줄기차게 야기되는 혼란과 불안을 서둘러 끝장내고 싶은 염원의 표현인 것이다. 코엑스몰의 점거 테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2부, '최악의 도시'는 알고 보면 요한계시록과 같은 종말론의 외피를 성글게 두르고 있다. 이 소설은 수박처럼 겉과 속이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소설의 분위기는 꽤나 희극적이지만, 속내는 종말을 희구하고 있고 굉장히 허무주의적이다.(그래서 희극적인 장면 또한 어쩐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로 보인다. 마치 작가가 '현실이 이토록 막장인데, 이런 걸 보고도 웃음이 나와?' 말하며 내 멱살을 잡는 느낌이다.) 양머리들이 그토록 찾았던 메시아가 간신히 나타나자마자 총알 한 방에 어이없이 죽고, 코엑스몰의 그 엄청난 테러 사건도 바로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결말은 오늘 날의 대한민국이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이며, 결국 우리 모두는 열외자가 되어버릴 운명에 처해있고 자신이 헌신하는 소설조차 그런 현실을 개선할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작가 자신의 말에 힘껏 마침표를 찍는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은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해야 하리라. 이미 열외자가 되어버렸거나 혹은 언제 열외자가 될 지 모를 우리들에게, 그래서 어쩌면 더욱 절박하게 원할, 그 어떤 위안도, 희망도 주지 않는다고. 다만 인도 신화에 나오는 '저그노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열외자로 만들어 짓누르는 이 천박한 시대가 어서 끝장 나기만 바랄 뿐인 것이다. 그의 소설은 무력하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열외 인간의 양산은 현대화의 불가피한 산물이니까. 그는 주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 쓰레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쓰레기가 된 인간들('잉여의', '여분의' 인간들, 즉 공인받거나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 집단)의 생산은 현대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이며 현대성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것이다. 또 질서 구축(각각의 질서는 현존 주민들 중의 일부를 '어울리지 않는다', '적합하지 않다' 또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쫓는다.)과 경제적 진보(이것은 이전에는 효과적인 생계 유지 방식이었던 것을 격하하고 평가절하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로 인해 과거의 생계 유지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생활수단을 박탈하지 않을 수 없다.)가 초래하는 피할 수 없는 부작용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p.22)


 열외자의 생산은 배제를 통해 질서를 유지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서둘러 낡은 것으로 만들어 계속 새 것을  소비시키는 것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는 현대성(모더니티)에 허파처럼 내재된 것이다. 현대는 바로 그런 열외자의 양산을 통해 지속되니까 말이다. 열외자의 생산을 그치게 하려면 현대성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를 떠받치고 있다는 아틀라스 신쯤 되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한낱 개인에게는 너무나 벅찬 짐이다. 이쯤 되면 주원규 작가의 고백은 차라리 정직하다고 해야 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제발 용건만 간단히"는 자신의 소설에 대한 비아냥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가지는 가치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본다. 예전의 나도 그랬듯이, 우리들은 열외자의 문제를 흔히 아주 개인적인 사안으로 치부하기 쉽다. 최근에 나온 영화 '부산행'에서 열차에 몰래 숨어든 노숙자를 보고 김의성이 분한 배우가 아이에게 "너도 열심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것이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시대 자체의 문제로 보게 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한 마디로 '파국의 지도'다. 막장이 되어버린 시대의 적나라한 모습과 그 아래 가리워져버린 열외자들의 목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주어 독자로 하여금 전체를 조망하도록 만드는 지도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문제라 여겼을 때, 내 시선은 언제나 내게로만 향했다. 그것도 늘 단점과 부족함만 찾아내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더 주눅이 들었고 더 불안했다. 하지만 지도의 조망은 내게만 향했던 시선을 타인으로 향하게 만든다. 나와 똑같이 힘들고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이들을 보고 헤아리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열외자가 되었다는 절망,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날 계발시킬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진실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시작이 되어 배우고 성찰하여 결국 자신의 목적지를 지도 위에 스스로 설정할 수도 있다. 너무 낙관적인 것일까? 그래도 나는 믿고 싶어진다. 이 '파국의 지도'를 본 이들이 추락과 절망을 강요하는 시대를 바꾸기 위해 점점 더 많이 노력할 것이라고.


 알고 보면 희망은 믿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동력도 이 믿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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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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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고은의 '무중력 증후군'의 주요 인물들은 바틀비의 후예들이다. 바틀비는 '모비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동명 단편에 나오는 인물로, 현대 조직 사회에서 개인에게 부여된 모든 정체성과 역할을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말로 모조리 거부하는 사람이다. 막스 베버는 현대 조직 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관료제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만큼 현대 조직 사회는 맨 위부터 가장 아래까지 맡은 역할이 세세하게 다 정해져 있으며, 그 모든 것이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유기적으로 돌아가도록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주인공  노시보가 일하고 있는 부동산 투기 조장 목적의 텔레마케터 회사가 바로 이런 관료제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그런 조직 내부에서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한 개인은 조직이 부여한 꽉 조인 정체성의 그물망에서 벗어난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 노시보도 날마다 회사로 출근하면서 자신을 회사라는 두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미꾸라지로 여기고 있지만 쉽사리 그만두지는 못한다. 회사에서 해방되고픈 마음은 누구보다 강렬하지만, 그저 항상 사직서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으로 소심하게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바틀비는 다르다.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관료제가 자신에게 부여한 정체성과 거기에 따르는 역할 모두를 실제로 단호하게 거부하고,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형성하고는 그것을 온전하게 지켜나가는 것이다. 허먼 멜빌은 산업 자본주의 여명기의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이 산업 자본주의라는 것이 철저한 분업화를 통해 한 개인을 도구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익명적인 존재로 만들 것이라 내다보고는, 그것에 대한 저항으로 바틀비란 인물을 구상한 것이었다. 바틀비의 거부는 도구화, 익명화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오직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정체성을 수호하는 분투였다. 그는 그렇게 시대의 중력을 거부했다. 정말로 무중력 증후군이 있다고 한다면, 바틀비는 그 증후군의 1호 환자였다.


 하지만 중력에 꽉 붙들려 있었던 노시보에게도 바틀비가 될 기회가 결국 찾아오고야 만다. 갑자기 달이 두 개로 늘어난 것이다. 영원히 하나일 것만 같았던 달이 두 개로 늘어나자, 세상이 이대로 영원히 한결같을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의 생각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사직서를 내는 사람들이 생기고, 노시보의 엄마와 같이 항상 동일했던 일상의 궤도를 주저없이 이탈하는 사람들이 출현하는가 하면, 노시보의 형처럼 이런 기회를 통해 남몰래 꿈꾸던 삶을 제대로 누려보려는 이들도 나타난다. 물론 자살을 통해 절대적인 무중력 상태가 되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변화가 하필이면 달의 출현을 통해 도래하는 것은, 달이야말로 중력이 소속의 은유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달과 지구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맴돈다. 지구의 중력에 붙잡힌 탓이다. 달은 달아나고 싶어도 지구의 중력 때문에 달아날 수 없다. 오로지 지구의 중력이 허락한 궤도만 돌고 또 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달이 지구에 속해 있다고 여긴다. 그런 달이 두 개로 늘어났다. 달의 횡적인 분열은 그만큼 종적인 중력의 강도가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강한 중력에 붙들려 있던 사람들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달은 두 개로 그치지 않고 세 개, 네 개 분열을 거듭한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생각은 일상과 멀어지고 예전엔 황당하게 보이던 것들마저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는다. 일상이 환상이 되고, 공상이 현실이 된다. '무중력 증후군'을 읽다보면, 그냥 소설 같기도 하고 판타지 소설 같기도 하다. 소설과 판타지가 뒤엉킨 모습이다. 이것이 누군가에겐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무중력은 소속을 상실시키는 힘이다. 거기엔 아무런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중력을 표방하는 소설이 분명한 경계를 가진다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무중력의 자유를 지향하는 이상 소설이 이렇게 마구 뒤엉키고 여러 가지가 혼합된 모양새가 되는 것은 필연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무중력을 추구한다. 표준 시간을 알려서 사람들의 시계를 일제히 거기에 맞추도록 만드는 시보(時報)만큼이나 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받는 우리들은 늘 시보(試補)로 잔존하는 현실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을 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무중력을 희구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이 표면상 추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작가는 무중력과 중력 중 어느 한 쪽에 선뜻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어느 하나를 딱 정해 정답처럼 제시하기 보다는 얼른 서로 대척(對蹠)으로 보이는 둘 모두가 실은 우리 삶에 다 필요한 부분이라며 역설한다.


 이는 시보라는 주인공 이름 자체에 이미 투영되어 있다. 사실 시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아직 정식으로 무엇이 되지 못한 존재라는 뜻으로 그래서 사회의 규정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기도 하는 시보(試補)이고, 다른 하나는 표준 시간을 알리는 뜻으로 그래서 사회의 인정에 대한 강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는 시보(時報)이다. 지금까지 한 논의에 따르자면, 앞의 시보(試補)는 무중력을 그리고 뒤의 시보(時報)는 중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둘은 대척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존재에 중첩되어 있다. 작가는 일부러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둘 중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는 둘 모두 삶에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름만이 아니다. 작가는 신체와 의식 또한 대척 관계로 만들어 이를 더욱 강화시킨다. 제목인 '무중력 증후군'은 사실 병이다. 무중력을 취하면 취할수록 마음은 자유를 얻지만 그만큼 몸은 고장을 일으킨다. 마치 신체가 마음이 원하는 무중력을 거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이것을 소설에 누벼댄다. 그래서 무중력으로 기우는 우리의 마음을 그러지 못하게 붙잡는다. 이런 반대의 움직임, 역행이 소설 한 쪽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반영된 작가의 마음은 소설 구성 자체에도 투여되고 있다. 만일 기승전결이 날렵한 직선처럼 잘 엮인 소설을 닫힌 부채라고 한다면 '무중력 증후군'은 펼친 부채에 가깝다. 독자를 정해진 이야기의 궤도로 따라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브뤼겔의 그림처럼 담고자 하는 이야기를 좍 펼쳐서 여러 모습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중력과 무중력이 가진 장점과 한계의 모습들을 말이다. 소설은 결과를 독자에게 제시하기 보다는 과정에 독자를 초대하려 한다. 그렇게 보다 많은 시야의 경험을 주려 한다. 결국 이름도, 신체와 의식 사이의 반목도 알고 보면 모두 이에 복무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애초에 문학의 역할은 경험의 나눔에 있었다. 여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연장자를 존중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많은 경험 때문이었다. 경험이 하나의 정보가 되어 듣는 이로 하여금 경험을 전수해 준 자는 했었던 시행착오를 피하도록 도왔던 것이다. 연장자의 입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한계가 있었기에 결국 문학이 그 짐을 나누어 받았다. 나는 문학을 잘 모르지만, '무중력 증후군'이 바로 이러한 문학의 본래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비록 간접적이며 파편적이고 거기다 문학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것이긴 해도, 이 소설은 무중력과 중력에 관계된 다양한 양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고 말이다. 경험을 전수하는 것의 목적은 해답의 제시가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성찰하는 데 있었다. 제시된 경험은 참조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기반으로 현명한 대안을 창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청자의 몫이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내 삶을 무중력과 중력 어느 한 쪽에 둘 것인가 아니면 그 모두를 적절히 조합하여 융통성있게 이쪽 저쪽을 모두 섭렵하며 살 것인가는 바로 독자의 몫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시보는 자신의 가슴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달을 찾아낸다. 서로 대척 관계에 있었던 중력과 무중력은 그렇게 통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보가 수많은 경험을 관통해 비로소 이룬 결과였다. 그렇게 독자도 자신의 달을 이 소설과 동행하는 동안 찾게 될 것이다.

 과연, 당신의 달은 어디에서 어떻게 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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