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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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인기 있었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주인공 삼순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삶엔 정말 그런 바람이 생겨나는 순간들이 참 많다. 하도 많이 넘어지고 상처받는 게 우리네 삶이라 그런가 보다.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의 또 다른 책, '그녀 이름은'은 그러한 신신한 삶들을 엽편의 길이로 줄줄이 엮어낸 소설집이다. 그야말로 특별하지도 별나지 않는 여성들의 삶이 더 많이 드러나고 기록되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이 충실하게 반영된 책인 것이다. 가장 앞부분에 있는 소진의 삶부터 가장 마지막에 있는 초등학생 최은서의 삶까지, 여기에는 여성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연령도 직업도 처지도 다른 이들의 삶이 스펙트럼처럼 죽 나열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을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전시회'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모든 여성들이 심장이 딱딱해져버렸으면 하는 상황을 만난다. 소진은 직속 상사에게서 성추행을 당하고 계약서 한 장 없이 업무 내용도 시간도 페이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일을 시작하여 퇴근도 제대로 못하고 회사에서 칼잠을 자야할만큼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는 막내 방송 작가도 있다. 어릴 때 엄마에게 버림 받은 기억 때문에 갑작스런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만남조차 허락받지 못한 딸이 있는가 하면 양승태 대법원장이 재판 거래하여 대법원에서 어이없는 판결이 나는 바람에 갑자기 날아온 배상금 상환 명령 때문에 어마어마한 액수를 감당할 수 없어 자살한 동료를 보아야 하는 전 KTX 여승무원도 있다. 이처럼 소설엔 성별로 차별받는 이만 나오지 않는 것이다. 흙수저라서, 사회적 약자라서 차별을 당해야 했던 삶도 허다한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소설집에 모아 독자에게 들려주려 했던 것 같다. 특별하지 않다는 이유로, 별 거 아니라는 이유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삶이라는 이유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었고 용기를 내어 말해도 잘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던 목소리들을. 기껏 반응을 받아도 그저  '너만 왜 그래?' 혹은 '괜히 과민 반응 하는 거 아니야?' 또는 '거 참 예민하게 구네.' 같은 것만 있었던 목소리들을. 그런 목소리를 채집하여 되도록 온전히 복원, 이 소설집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삶은 당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 분명 어느 순간 당신의 발길이 머물고 한참을 응시하게 되는 삶의 초상화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땐 그랬지' 하면서 잊혀졌던 추억을 소환하거나, 그 때 참 아팠던 당신을 위로하는 느낌도 받게 되리라. 그리고 대답하리라. 당신의 눈길이 머문 초상화의 그녀 이름은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다고.


 '82년생 김지영'이 그랬듯, '그녀 이름은'도 발굴에 중점을 둔다. 몰라서 내버려두기도 했고 알긴 하지만 누구나 다 겪는 흔한 것이기에 시류에 편승하여 바로 잡을 생각도 없이 무심히 흘려 보냈던 것들을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 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당신을 단순한 감상자를 넘어 고고학자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의 삶일 수도 있고 혹은 부모나 자식의 삶일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이웃의 삶일 수도 있는 것들을 보며, 아무렇지 행한 말과 일 속에 상처 입히는 가시는 없었는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남들도 다 이러고 사는 거라고 합리화 하면서 더 많은 상처들을 더 심하게 곪게 만들진 않았는지 따져보게 되니까 말이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은 복수하려는 유지태에게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은 고의가 아니었고 아주 사소한 잘못에 불과했다고 항변한다. 그런 최민식에게 유지태는 이렇게 답한다.

 '모래든 자갈이든 가라앉는 건 똑같아.'


 사소하다는 것, 별거 아니라는 것은 그저 상처를 준 자에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당하는 입장에선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온갖 갑질들, 비리들은 늘 이런 변명을 해댄다. 한 집의 귀한 자식을 무릎 꿇리고 억 대의 돈을 특별 활동비로 많아 사적인 일에 마음껏 유용하면서도 그리 큰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 관례였다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알고 보면 우리 사회의 적폐들은 거악에 의해 쌓인 게 아니라 이러한 사소한 범행들의 누적이다. 그 사람의 신분에 비해 저지른 잘못이 별 거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부가 쉽게 눈 감아 준 덕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우리 사회는 사소하고 별 거 아닌 것도 사람을 가린다고 봐야 한다. 돈 많고 위세 등등한 이들에겐 일반인이 저지르면 엄청난 죄도 별 거 아니게 되고, 뒷배도 없고 돈도 없는 일반인은 아주 별 거 아닌 잘못도 크게 처벌 받으니까 말이다. 오늘도 편의점에서 겨우 담배 두 갑 훔쳤고 그걸 돌려줬는데도 판사가 징역 1년을 선고하고 구속시켰다는 보도가 있었다. 같은 날 법원은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수백 억에 달하는 세금을 탈루했음에도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로 구속 영장을 기각했다. 담배 두 갑에는 보장되는 않는 피의자의 방어권이 어찌하여 수백 억 탈루에는 보장되는 것인지. 대기업 회장 쯤 되면 그 정돈 별 거 아닌 잘못이라 그런 건가? 사소한 잘못도 별 거 아니라고 해서 자꾸 눈 감게 되면 이처럼 사소한 잘못의 범위가 점점 늘어난다. 이재용 재판처럼 우리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말이다. 사소하다고 해서 방치하면 안 되는 이유다.


 '그녀 이름은'은 그런 사소함의 중요성을 차분히 되새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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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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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공포 소설이다.

 나는 정녕 그렇게 여긴다. '저스티스맨'이란 제목과 모두 10명의 희생자가 나오는 연쇄 살인이라는 것 때문에 이 소설을 얼른 스릴러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공포 소설이다. 물론 피칠갑 된 살인이나 토막 사체 같은 것이 나와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소설 속 살인 장면 묘사는 그닥 무서울 게 없다. 연쇄살인범은 언제나 이마에 두 개의 탄흔만 깔끔하게 남긴다. 물론 빠져나온 탄환이 머리 뒤로 피의 무늬를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만들어놓긴 하나 그건 범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현상일 따름이다. 이야기 자체에 무서운 것은 전혀 없다. 거기다 독자에게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형식이 아니라 중간에 매개자를 두고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왜 나는 이 소설을 공포 소설로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소설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바깥 현실에서 우리가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불안과 공포가 소설의 언어와 재현을 통해 비로소 구체화 되고 명확해지는 것에서 오는 호러(horror)인 것이다. '아, 내가 느끼고 있던 무서움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오는 소름 같은 것 말이다. 소름은 불현듯 어떤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우리 몸이 일으키는 무의식적인 반응이라 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진정한 의미의 소름을 가져다 준다. 감정이 아닌 이성의 공포, 정체 불명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정체 확인에서 비롯되는 공포니까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기에 글의 초장부터 공포 운운하느냐고? 인내심이 바닥까지 내려간 당신을 위해 얼른 말하자면 그건 바로 악에 대한 것이다.





 우선 한 학자의 말 하나를 인용하고 싶다. 그 사람은 미국의 윤리철학자 수잔 니먼이다.

 그녀는 자신이 쓴 '근대 사상의 악'이란 책에서 라이프니츠로 하여금 신에 대해 변론하게 만들었던 재난이기도 한 1755년, 리스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이 근대철학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악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근대 철학자들은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를 인간이 저지르는 악과 구별했다.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자연 재해엔 의도나 목적이 없지만 인간이 범하는 악은 그런 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인간의 악 보다 자연 재해를 근대철학자들은 더 두려워했다. 의도와 목적은 명확하고 구체적이라 사전 예방이 가능한(그리하여 포이에르바흐는 예방에 기초하여 독일 형법을 최초로 정립시키기도 했다.) 반면에 자연재해는 원인과 이유가 불명확하고 예측도 어려워서 예방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 재해를 막는 것에 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생각이 보기좋게 빗나간 비극이 일어났다. 바로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제노사이드'였다. 이 사건은 인류에게 이제는 인간의 악 역시도 자연 재해만큼인 모호함과 혼돈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것의 계시였다. 여기에 대해 니먼은 이렇게 정리했다.


 리스본은 세계가 인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인간과 다른 인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 때 인류는 처음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 사이에 놓인 심연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지고 깊어졌다. 처음엔 유태인이든, 흑인이든, 여성이든 또 이민자이든지 간에 낙인이 찍히고 그에 따라 온갖 차별과 위해를 받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그가 속한 집단과 연계되어 이뤄졌을 뿐, 한 개인에 대한 심판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통신 기술이 발달하고 이제는 제자리에 앉아서 세계의 모든 곳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광대한 네트워크 시대에 접어들자 개인마저 언제 어디서든 심판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은 범죄처럼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만 해당되지 않았다. 사소한 도덕적인 잘못이나 우연히 저지르게 된 실수마저 그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실은 모든 사람이 예기치 않게 심판의 무대 위로 오를 수 있었다. 더하여 지금은 누구나 손쉽게 핸드폰으로 다른 이들을 촬영할 수 있고 그것을 각종 네트워크 매개체를 통해 대중에게 유포할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은 24시간 카메라가 돌아가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도 아무런 규칙도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프로그램에.


 이처럼 사생활의 보호막이 허약해진 우리들은 껍질 없는 갑각류나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조그만 악의로도 우리는 커다란 비명을 지를 수 있다. 악의적인 왜곡과 편집이 행해지면 인격 살인마저 당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이런 상황을 잘 느끼고 있다. 인간의 악이라는 게 자연 재해와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실은 모두가 잠재적인 피해자이며 운이 좋아서 자연 재해에서 벗어난 것과 똑같이 단지 불운과 아직 만나지 아니하여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이것은 당연히 우리 모두에게 공포가 될 수밖에 없다.

 언제 나를 익사시키는 쓰나미가 몰려올지 모르는 상황인데 어찌 공포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아직은 내게 닥쳐오지 않아서 실감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당사자가 숨기고 싶은 사생활을 누군가 멋대로 찍어 올린 동영상이 많은 사람들을 돌아다니며 조소의 대상이 되거나 경멸적인 명칭이 붙은 것을 보노라면 막연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나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말이다. 다만 나의 언어로 구체화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저스티스 맨'이 바로 그것에 언어를 찾아주고 실체를 부여한 것이다. 무차별이고 몰인정하며 예측 불허로 넘치는 인간의 악을, 거기서는 누구도 쉽게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것도 섬뜩하게 말이다. 막연하게 두려워만 하고 있던 것을 이토록 확실한 형태로 섬세하게 세공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어떻게 이 소설이 공포 소설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설엔 연쇄 살인범이 저지른 열 개의 살인이 나온다.

 그 중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아홉 개의 살인들은 실은 최초 희생자에게서 파생된 살인들이다. 그 최초 희생자란 사회가 정한 옷에 맞지도 않는 몸을 억지로 맞추느라 뜻하지 않게 실수를 저지르고 그만 만인에게 '오물충이 되어버린 '보험 설계사'와 우연한 일탈이 그만 치명적인 동영상으로 남게 되어버린 여고생 그리고 엄마와 단 둘이 잘 살아 보겠다는 사소한 욕망이 파멸의 굴레가 되어버린 펜션 여주인, 이렇게 셋이다. 이 세 명의 최초 희생자에서 파생되어 각각 세 건의 살인이 이뤄진다. 그렇게 아홉 개의 살인이 되는 것이다. 최초의 희생자들은 연쇄 살인의 피해자가 아니다. 최초의 희생자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 즉 '파생된 살인'의 피해자야 말로 연쇄 살인범이 죽인 자들이다. 그런데 최초의 희생자들이 그렇게 된 것은 뭔가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우연이, 또 때로는 별 것 아닌 흥미가, 또 때로는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단순한 욕망이 일으킨 결과일 뿐이었다. 공포는 바로 여기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누구든 최초의 희생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든 파생된 살인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속에서.


 현대에 이르러 보편화된 이러한 악의가 지니고 있는 무작위와 무차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세 사람에게 각각 얽힌 세 개의 살인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처음의 보험설계사는 자신과 불화 중인 '잿빛 무지개'와 같은 사회에서 비록 위태로울 망정 그래도 간신히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오물충'이 되기 바로 전 도로 위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장면은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희생자로 만든 가해자들 역시 따지고 보면 똑같은 경로를 걷고 있었다. 물론 저마다 적응의 방식은 달랐지만 사회가 강요하는 틀을 벗어나 삶을 주체적으로 형성하려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선 주체화의 경로는 죽음의 심판이 예정된 길이었다. 어째서?


 이 의문의 답은 조금 미루고 두 번째의 여고생을 일단 살펴보려 한다.

 그녀는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날로 쌓여가는 권태를 견디지 못해 더위를 피해 냇물로 뛰어들듯 일탈을 감행했다. 냇물 속 수영이 실은 다시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이듯, 그녀의 일탈도 본래는 자신의 삶을 더 잘 지속하기 위해 잠깐 뛰어든 '아른아른한 물결'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를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들 그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었다. 그녀와 똑같은 일탈이자 그 일탈에 대해 그녀가 품었던 것과 똑같은 별 것 없는 흥미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펜션 여주인도 다르지 않다. 좀 더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에 스스로 취했던 '연보랏빛 안개'와 같은 소박한 욕망이었고 그것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한 것일 뿐이었다. 그녀의 가해자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악행의 수위는 그녀와 많은 차이가 났을지라도 그들 모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동원했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작가는 이렇게 자기가 행한 이유 그대로 당하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뫼비우스의 띠가 연상되는 것도 너무 엇나간 상상은 아니지 않을까?


 이렇게 놓고 보니 작가는 우리에게 마치 어떤 유형들을 보여주려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유형들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실 이런 유형들은 알고 보면 과거 우리가 한 때 취했거나 현재 우리가 취한 모습이지 않을까? 우리 역시도 보험설계사처럼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와 맞지 않는 세상 속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맞춰 살아가며 또한 여행사에서 날아오는 팜플렛을 보며 여기 한 번 갖다오면 앞으로의 일상을 더욱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으로 일탈을 꿈꾸고 보다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에 따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 우리이기에 소설 속 희생자들이 결코 나와 별개로 여겨지지 않고 그런 자들에게 가차 없이 무자비한 죽음을 선사하는 이 소설이 한층 더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항변하고 싶다.

 왜 이런 우리의 경향과 사소한 동경 그리고 욕망으로 심판 받아야 하는가? 더구나 처음의 경우엔 사회가 강요하는 것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 하려다 당하는 것인데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게 아닌가? 작가의 전작 '스파링'은 무엇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저스티스맨'의 심판은 모순이 아닌가? 마치 그런 반론을 작가가 예상하기라도 한 듯, 작가는 하나의 살인을 더 부가한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열 번째의 살인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누가 희생되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다만 그 이유만 말하겠다. 그것은 오직 타인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을 드높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 살인의 진실과 그 이유는 소설 거의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데, 거기서 다시 아홉 개의 살인으로 되돌아가 보면 그 모든 상황마다 바로 이런 욕망이 깔려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형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을 추동시킨 기저에는 바로 이런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저자는 그 욕망을 바로 '권력 욕망'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이런 권력욕이 전혀 통제되지 않고 '저스티스맨 카페'에 몰려든 수많은 누리꾼들처럼 날로 확장되면 어떻게 되는가의 결과가 바로 '불꽃' 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 재해와 같은 인간의 악이 메가 쓰나미처럼 일어난, 한 마디로 지옥도이다.


 잭슨 폴록의 '불꽃'


 사실 이 '불꽃' 장은 뜬금 없는데, 소설의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도 않고 분명 누군가의 상상일 터이나 그 주체가 특정되지도 않는다. 분명 누군가는 이 '불꽃' 장 때문에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의 골격을 허약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작가가 그런 약점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 장을 구태여 집어넣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떤 의도가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이 장의 묘사가 아홉 개의 살인에 동일하게 흐르고 있는 본질적인 욕망의 최종적 결과라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 의도란 분명 그러한 비극적 결과를 막기 위하여 작가가 제시하고 싶은 대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대안이란 무엇인가?

 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바로 열 번째 살인의 이유가 된 권력 욕망, 즉 타인을 이용해 자신을 드높이고 싶은 욕망을 적어도 자제하거나 최대한 없애는 것이다. 첫 유형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려 했던 이들이 심판 받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특히 세 번째 희생자 기자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기자는 그동안의 성공에 염증을 느끼고 이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기로 결심한 순간(그렇게 자신의 삶에 온전히 주체가 된 순간)에 죽음의 심판을 받는다. 이것은 전작 '스파링'과 완전히 모순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기자가 처형되는 것은 그렇게 주체적으로 살기를 결심했으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서는 여전히 타인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향점은 달라졌을지 모르나 가고자 하는 방식은 변한 게 없으므로 단죄의 총알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주체로 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저스티스 맨'은 '스파링'과 비교해 보다 확장된 시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스파링'에서 삶의 주체가 되는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면, '저스티스 맨'에선 단순히 주체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 달리 더 필요한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권력 욕망의 배제가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이다.


 작가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해서 살인자의 목소리를 빌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정의한 바 있다.


 무엇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지혜 자체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므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판단도 그들에겐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 맹목적으로 타자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배척했다. 그러니 그것은 이중적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양면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잣대라는 자체가 아예 사라진 시대를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p. 242)


 이처럼 모든 잣대가 사라진 시대이지만 사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남을 이용해 나를 높이라는 권력 욕망이다. 어쩌면 그 명령이 너무가 강고하기에 거기에 방해되는 모든 잣대들이 사라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만행 또한 결국엔 유태인 말살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영속하려 한 것이었다. 이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지금 자신을 공포에 젖게 만드는 무차별적이고 무작위적인 인간의 악 또한 권력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욕망의 근절을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더욱 피부로 와 닿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소설 속 인물들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모든 악행이 끝내 똑같은 형태로 부머랭이 되어 돌아온 것에 있어서도 작가가 거기에 뒤집어 놓은 형태로 결부시킨 또 다른 해법 하나를 우리는 찾을 수 있다. 악행이 그런 식으로 되돌아 온다면 우리의 선행 역시 그러하리라 추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타인을 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의 목적으로 대할 때, 나 역시 타인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질 것이며 이런 가운데 우리의 불안과 공포 역시 한결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게 암시되어 있다. 결국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그 시작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문득 보들레르의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다.


 '저스티스 맨'은 피해자로 자임하고 있지만, 그래서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바깥만 탓하고 있지만 거기에 가해자로서의 우리 책임은 없는지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듯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궁극엔 왜 이 모든 악의 사슬을 끊기 위한 첫 발자국을 바로 나부터 내딛어야 하는지 깨닫도록 하기 위한.


 소설의 마지막은 비행으로 대지의 중력을 곧 벗어날 공항(그것은 곧 규격화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해방되는 의미이기도 하다.)에서 하염없이 자신의 의문과 사유에 빠져 있는 살인자의 모습이다. 가장 타자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전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삶을 만들어 나간 존재가 소설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거듭 되돌아 보면서 과거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왜 이 모습을 마침표로 찍었을까 궁금했다. 분명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길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는 것일 게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그의 말마따나 '결계처럼 제한된 규범의 세계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자신의 영혼을 되돌아 보는 일(p. 9)'이었던 것처럼. 그러한 작가의 제안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저스티스 맨'은 토템과 부적이 되어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들의 여정을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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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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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판사 '다산책방'에서 새로운 소설 시리즈 하나를 런칭한 것 같다. 바로 '페미니즘' 소설이다. 첫 시작을 연 것은 이번에 나온 '현남 오빠에게'. 단편집이다.



 이번에 '82년 김지영'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조남주와 작년에 '쇼코의 미소'로 특히 여성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최은영을 비롯하여 오늘날 가장 핫(hot)하다고 할 수 있는 일곱 명의 여성 작가가 쓴 단편이 여기에 들어있다. 기존에 쓴 작품을 모은 게 아니고, 먼저 작가들에게 여성주의 소설이라는 주제가 부여되고 거기에 따라 쓴 작품을 모은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읽으면서 언뜻 일곱 작가의 백일장을 구경하는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아, 왜 이 소설을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생각하는지 이유를 아직 말 안했다. 그건 뒤에 있는 책날개에 '다산책방 페미니즘 소설 1'이라고 나와있기 때문이었다. 1이라는 건, 2가 있다는 뜻이니 시리즈라 여길 수밖에. 말하고 보니 별 거 아닌 단서이긴 하다만.


 그러나 이 단편집은 결코 별 거 아닌 게 아니다. 미리 주어진 주제에 따라 집필된 단편집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나 읽을만 했다. 시작은 조남주 작가의 '현남 오빠에게'가 연다. 연인인 현남 오빠에게 청혼을 받은 여인이 1인칭 화자가 되어 왜 그 청혼을 거절하는지 밝히는 게 단편의 주된 줄거리다. '현남'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느껴지듯이, 이 여인의 메시지는 그저 한 개인의 남자가 아니라 '현대 남자' 전체라고 볼 수 있다. 그 보통의 현대 남자에게 단편은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 들지 말라고 통박한다.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더라.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p. 38)


 뒤이은 최은영의 '당신의 평화'는 유진이라는 주인공의 엄마인 정순의 며느리를 맞이하면서 생긴 울화에 관한 것인데, 이 정순이란 인물은 어떻게 보면 '현남 오빠에게'에 나왔던 여성 화자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현남 오빠와 결혼하여 내내 살았다면 되었을 것 같은 인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자기 주체적인 삶을 전혀 누려보지도 못하고 그저 남성 가부장제에 매몰되어 있었던 인물. 그런 정순이 새 며느리 선영을 맞아 문득 자신의 인생에 정작 자신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울화를 하나밖에 없는 딸 유진에게 며느리에 대한 험담으로 풀려한다. 그러나 그런 엄마와 대학 때 진보 운동에 참여하면서 진보를 부르짓는 남성들마저 아무렇지 않게 여성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의 남성 가부장제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진작에 깨달은 유진은 그동안 그토록 정순을 무가치하게 대했던 할머니의 모습을 엄마인 정순이 닮으려 하자 이렇게 매섭게 비판한다.


 "그래서 할머니가 엄마에게 어떻게 했는데. 나쁘고 부당하게 대했다는 걸 엄마도 잘 알잖아, 왜 그걸 부정해. 지금 엄마 누구에게 화났어? 정말 선영씨야?"(p. 69)


 계속되는 김이설의 '경년'는 '갱년'을 '재생 혹은 다시'라는 뜻을 더 강조하기 위하여 살짝 바꾼 것으로, 그런 갱년기에 도달한 중학생 아들을 둔 중산층 엄마의 이야기다. 소설 속 내용이 다소 충격적이라 이게 정말 현실인지, 아니면 소설적인 과장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어느날 주인공은 중학생인 자기 아들이 여러 여자와 문란한 성관계를 맺었다는 말을 듣는다. 충격 속에서 아들을 닥달해 보니, 아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엄마가 하라는 공부 잘 하고 원하는 대학 가려면 나도 숨통 트일 곳이 필요하니 거기에 대해선 간섭하지 마라'고 하면서 당당하다. 남편과 상의해도, 자식만 두둔할 뿐 어울린 여학생들이 문제지 아들은 아무 문제없다고 말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은 지금 사람들에게 여자를 가르는 기준이 '골빈애'와 '되바라진 애', 두가지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윤서 엄마의 논리대로라면 성적에 목숨 건 여자아이는 되바라진 여자애였고, 성적에 관심 없는 여자애들은 아이돌이나 따라다니면서 화장이나 하는 골빈 여자애였다. 윤서도 내 딸아이도 요즘 여자애들이라는 것을 잊은 사람 같았다.(p. 111~112)


 혼란에 빠진 주인공은 이 시간이 그저 갱년기처럼 푹풍우가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저 겪고 참아내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 아니라 변화를 위해 뭔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네번 째인, 최정화의 '모든 것을 제자리에'는 남성에게 당한 성폭력이 트라우마로 남은 여성의 이야기다. 자기 신체의 일부분마저 그 남자의 것으로 여겨질만큼 삶 깊숙이 자리한 상처를 그녀가 주로 하는 일인 붕괴된 빌딩 촬영을 통해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다섯 번째인 손보미의 '이방인'은 근미래의 어딘가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 고립을 자처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느와르 적으로 그리며 여섯 번째인 구경모의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은 회사 동료를 대신하여 여장 축제에 참여한 '표'가 축제가 열리는 고립된 섬에서 느닷없이 당하게 된 살육의 밤을 그린다. 알고보니 그 축제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여성을 성추행하거나 성폭력을 행한 가해자 남성들을 모아 피해자의 모습으로 만들어 처벌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던 표는 하지만 그런 추행이나 폭행을 보면서도 그저 내 일이 아니기에 관망했던 자로 소설은 그런 자마저 가차없이 처벌함으로써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켜만 봤던 자 역시 가해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은연 중 강조한다. 마지막은 김성중의 '화성의 아이'다. 제목에서 얼른 느껴지듯, SF다. 화성으로 쏘아올린 열두 마리 실험 동물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개가 주인공이다. 화성에 도착한 뒤, 그는 '라이카'란 개를 만나는데, 그 '라이카'란 57년에 소련에서 쏘아올린 스푸트닉 2호에 탔던 바로 그 개다. 이 두 마리의 개가 중심이 되어 인간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에서 모든 인간적인 관념에서 해방된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그려간다.


 다 소개한 김에 총평하자면, 재밌게 읽었다. 마지막 단편은 좀 모호하게 여겨졌지만 그래도 장르마저 다양하여 계속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여성의 오늘과 달라져야 할 지금의 현실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 각성의 시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목소리를 더 많이 만나봤으면 좋겠다. 의욕적으로 시작된 '페미니즘 소설 시리즈'에 건투를 비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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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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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독서란 언제나 의문에서 비롯된다'82년생 김지영' 그랬다지금까지 여성이 당하고 있는 차별과 억압의 현실을 그린 작품은 많았다그런데도 ‘82 김지영 마치 인제야 그런 현실에 처한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품이 나온 것만 같은 반응을 받고 있었다 책을 읽었던 주위의 많은 여성이 ‘맞아맞아 연발했고 남자도  읽어봐야 한다면서 앞다투어 내게 권했다노회찬 의원이  책을 영부인에게 선물하고 금태섭 의원은 200권을 사서 동료 의원들에게 돌렸다는 보도도 접했다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의 가장 높은 곳을 오래도록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어째서이런 소설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궁금했다아무래도 ‘82년생 김지영만이 가지고 있는 뭔가 새로운 게 있나 보다 생각되었다그것도 압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김지영과 만나야 했다흡사 소설 마지막에 나오는 남성 정신과 의사처럼 그녀의 삶을 읽어나갔다.

 

 일단 김지영의 삶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그녀가 겪은 차별소외부당함두려움외로움우울은 그녀만의 것은 아니었다이런저런 풍문이나 소설 혹은 드라마와 영화로 많이 접해본 것이었다우리나라 여성  누구라도 김지영이   있었다지영의 엄마와 정신과 의사 아내의 삶이 김지영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듯이소설 자신도 그것을 암시하고 있었다간간이 인용하는 통계가 그러했다유독 김지영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그녀의 삶은 사실 우리나라 여성의 삶이 가진 보편적인 양태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대 역시도, 너무나 낯익은 풍경이어서 따분했어야  텐데도  이국의 땅에 처음  관광객처럼  모든 광경이 아주 새롭게 다가왔다그런  반응이 나조차 낯설었다 그래도 페미니즘 책을  읽은 편이라고 자부하지 않았던가그런데도  이리 처음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기분일까이처럼 소설에 대한 의문은 나에 대한 의문으로 전이되었고 결국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소설은 지금까지 나온 비슷한 주제의 소설과 다른 층위를 재현하기 있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이 달랐다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위해 거창한 서사를 담지 않았다여성 차별을 이야기하는 소설들은 흔히 남성 중심 사회와의 갈등이나 대립을 전면에 내세웠다그러다 보니 소설은 자연히 일상보다는 사건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러한 갈등과 대립이 있어야만 보이는 여성 차별의 거시적인 면만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런 위치에 있는 여성만이   있는 특수한 경험이었다그러다 보니 그것과 별로 연관이 없는 대다수 여성은 구경꾼이 되기에 십상이었고 더욱이 그런 위치에 있어야 공감할  있는 갈등과 대립이었기에 자신의 삶과 유리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공감보다는 흥미연대보다는 선망을 낳았다작품 세계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현실을 돌아다 보면 여성이 받는 부당한 차별은 온데간데없고 그런 여성이 되지 못한 자신의 못나고 부족함만 곱씹게 했다.


 그러나  소설은 반대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흔한 일상으로 들어갔다삶의 가장 낮은 층위에 재현의 시선을 갖다 대어 날마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부각했다일상이었고 보편이었기에 우리나라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었고 그래서 누구도 구경꾼으로 있을  없었다모두 억압과 차별을 받는 당사자가 되었다김지영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일이 되었다. 자연히 자신의 못남과 부족함을 되새기도록 하는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응시하도록 만들었다 시선 속에서 그동안 당하면서도 그러 줄조차 몰랐 일들이아픔을 막연히 느낄지언정 미처 언어로 자아낼 수는 없었던 것들이 마침내 얼굴을 찾고 목소리를 가졌다자기의 삶으로 경험한 일이었기에 다른 누구의 말에 기댈 필요도 없었다자신의 언어로 충분히  일을 규명하고 아픔의 연유 또한 구술할  있었다나는 이 소설에 대한 많은 여성의 공감이 바로 여기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른 누구의 언어도 아닌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통찰하고 증언할  있게 되었다는 것이 공감의 진정한 초상이라고.


 여성이야 그렇다 치고 나는 왜 이 이야기를 새롭다고 느낀 것일까? 그건 지금까지 내가 너무 거시적 차원에만 경도되어 있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흔하게 범하는 생각의 오류가 하나 있다. 바로 거시적 차원의 문제가 해결되면 미시적 차원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오류다. 진실은 오히려 반대다. 미시적 차원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거시적 차원의 문제도 비로소 해결된다. 자신의 삶 속에서, 일상 속에서 내 생각과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거시적 차원 역시 바뀌지 않는 것이다. 억지로 바꾼다 해도 일상적 차원에서 태도 변화와 실천으로 뒷받침 하지 않으면 언제고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사회를 바라보면서 어떤 것이 정말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나부터 바꾸어야 한다. 개인, 그가 영유하는 일상이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거대한 변화의 파문을 일으킬 소중한 첫 동심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저마다의 삶이 도미노의 첫 조각이다.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을 잊고 있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의 삶, 일상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작가 역시 그것을 알기에 이처럼 보통의 삶, 일상이라는 미시적 차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제야 그것을 보았고 여기에 대하여 사실은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영의 할머니나 아버지까진 아니더라도, 나도 지영의 남편만큼은 여자들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도. 나는 그렇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별생각도 없이 얼마나 쉽고 태연하게 남발해 왔던가? 소설 속 어떤 순간은 내가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적도 있어서 더 남모를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도 여태껏 잘못한 것을 몰랐다니. 진짜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런 사소한 편견,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차별, 습관처럼 내뱉는 말들, 잘못이라는 걸 모르기에 무한정 쌓이기만 하는 이것들이 결국 여성에게 불필요하고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질서를 떠받치는 토대가 되니까 말이다.


 하루는 심야 상영을 보고 밤늦게 걸어서 집으로 왔다. 버스마저 끊긴 시간이라 도로는 조용했고 당연히 인적마저 드물었다. 분주한 일상에만 있다가 고요하고 한적한 길을 걸으니 기분이 참 좋았다. 걸으며 콧노래마저 흥얼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만일 내가 여자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즐기면서 걸었을까? 아닐 것이다. 김지영이 고등학생일 때 같은 학원 다니는 남학생에게 당할 뻔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앞에 놓인 거리는 오로지 불안과 공포만 가득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같은 모임 여성분이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집에 혼자 살면 시켜 먹는 것도 무섭다고. 더구나 배달하는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여자 혼자 사는 집 정보까지 공유한다고 하니 너무 무서워서 시켜먹는 것은 생각도 못 한다고 했다. 세상에 음식 배달시키는 것을 무서워하는 남자는 없다. 남자라면 당연히 하는 일이 여자에겐 불안과 공포가 되어, 할 수 없는 일이 되다니. 이런 상황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난 아무래도 차별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것은 누가 주었는가? 남자다. 더 엄밀히 말하면 문화라 할 것이다. 그런 짓을 저질러도 엄중한 처벌이 내려지지도 않고 피해자만 불쌍하게 된다는 믿음이 사회에 널리 퍼져있어서 그리된 것이니 말이다. 그런 믿음을 주는 문화를 바꿔야 하고 그 문화의 변화를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한 사회의 문화란 알고 보면 그에 속한 개인이 가진 생각과 태도의 총합과도 같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변화라고 했지만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 향방이 명확해야 들을만한 말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소설에서 들을 수 있다. 소설 후반에 나오는, 김지영의 삶을 오롯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를 통해 절절하게 경험까지 했는데도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전혀 변하지 않는 정신과 의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시선이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타자의 처지보다 더 우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을 볼 때, 칸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목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에 놓고 보기에 시선의 변화 역시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영이 차별과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다 비슷했다. 모두가 자신의 마음, 욕망만 고려했다. 명절날에 지영이 시어머니가 그러했고, 보육은 부부가 함께 져야 할 책임인데도 자신이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있던 지영의 남편도 그러했으며, 지영이를 겁탈할 뻔 했던 고등학교 때의 남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카페에서 지영을 두고 '맘충'이라 비아냥거렸던 남자 회사원들도 그러했다. 물론 이 리스트는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영이 다니던 회사에서 발생한 몰래 카메라 사건에 연루된 동료 남자 사원들을 비롯하여 손자만 위했던 지영이 할머니도, 딸을 낳으면 어쩌나 하는 지영이 엄마의 말에 "말이 씨가 된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라고 했던 지영이 아빠도, 남자라고 집안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 지영이 남동생도, 지영이 엄마가 자신을 위해 꿈을 희생한 것을 알면서도 정작 도움은 남동생에게만 줘 버렸던 지영이 외삼촌들도 있다. 모두가 나보다 상대를 중심에 놓고 생각했다면 소설에 새겨진 고통의 길이는 훨씬 줄어들었을 터였다.


 그러고 보면 소설 초반에 나오는 빙의된 것만 같은 지영의 모습이야말로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진정한 대안의 형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거기에는 타자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주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은 타자에게 결코 자신을 내어줄 리 없는 이들에겐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해 본 적도 없고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던 모습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보는 이들의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틈을 통하여 비로소 지영의 참된 모습을 바라보게 했다. 소설의 순서는 그러한 지영의 모습이 없었다면 그녀의 생애 또한 듣지 못했을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하나의 태도가 변하면 그것은 여파를 만든다는 것을 내용과 형식 양면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러니 '대안의 형상'이라는 표현이 그리 무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소설 역시 그것이 되고자 하는 것 같다. 빙의가 존재의 전적인 겹침인 것을 고려한다면 지영의 전 생애를 한 폭의 두루마리처럼 쫙 펼쳐서 삶 전부를 바라보게 한 것도 어쩌면 독자 또한 지영의 존재에 빙의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가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경험이 되도록 말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문화를 바꾸는 소중한 첫 걸음이기에. 내 솔직한 소감이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고 헤아리지 못한 것을 헤아리게 되었다. 타자의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면 체득할 수 없는 것들이라 생각되기에 그리 말했다. 이 책으로 내디딘 첫 발걸음을 단단히 기억해두려 한다. 읽으면서 느꼈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다시는 갖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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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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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의 기록처음엔 그렇게 보였다 나쁜 쪽으로’(동명 제목인  책에서  처음 나오는 단편을 말한다.) ‘천국에서라는 전작에서 천국으로 그려졌던 뉴욕의 일상을 담는다그러나 그곳마저 더는 천국이 아니다작가는 그곳을 마치 천국처럼 묘사한다주인공 여자가 사랑하고 매달리는 남자를  거리가 아무것도 없던 때에 와서 이제는 중심이 된,  마디로 신과 같은 존재로 그리는 것을 보면 그렇다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그와 만날  없다사실 그녀는  남자도천국으로 알았던  거리도 믿지 않는다거리는 내내 그녀에게 구원의 역이 있다고 말하지만그녀는 알고 있다역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지도와 표지판 모두가 쇼윈도에 전시된 화려한 상품들만큼이나 현란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는 천국이 있다는 믿음 속에서  곳에 닿고자 열심히 걸어가는 사람들과 달리 나침반의 자침과도 같이 천국에 맞춰져 있는, 자신이 지닌 양의 주광성 죽인다스스로 음의 주광성 되려 한다이제 그녀는 ‘ 나쁜 쪽으로’ 걷는다이어지는 이야기는 절망의 심화 과정이자 그것을 낳은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의 추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김사과가 말하는 천국의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이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다세속적 의미의 천국이다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욕망하는 모든 것의 구현이자 본향(本鄕)으로써의 천국인 것이다그래서 미국이다누가 뭐래도 자본주의 하면 미국이니까 말이다아마도  천국이라는 말은 미국을 가리키는 말이자 비아냥하는 은어이기도  천조국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천국엔 무엇이 있는가? ‘ 나쁜 쪽으로 주인공 여자처럼 오욕뿐이라는  알면서도 매달릴만한 무언가가 과연 존재하는가그것을 알아보는  1부의 이야기다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 나쁜 쪽으로 단편집이다. 2011년과 16 사이에 여러 지면에 발표한 7개의 단편과 2개의 미발표 단편이 실려있다. 1  , 2  , 3 2이렇게 담겨 있다. 1부가 ‘천국 이야기라면, 2부는  하나의 ‘천국 되려 하는 이곳 현실의 이야기다. 3부는  모든  뒤섞여 정확히 어디가 어딘지   없는 곳의 이야기며 결국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를 찾을  없어 유령이 되어버린 자들의 실체 없는 목소리다김사과는 사람을 허망하면서도 이기적인 욕망의 노예로 만들고 서로 진정한 소통과 관계를 단절하여 한낱 수단으로 전락시키고야 마는 자본주의를 꾸준히 공격해왔다그런데  공격의 양상이 달라졌다지금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테러가 물리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여기서는 정신적인 것이라   있다무작정 외부에서 치고받기보다는  내부로 들어가서 양파 껍질을 까듯   근원의본질적인 면을 파헤치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1  편의 이야기는 얼른 보면 아무런 연속성이 없어 보인다그러나 단편마다 언급하는 음악과 미술 소재가  단편들이 실은 시간상으로 역순되는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처음  나쁜 쪽으로 70년대에 유행한 펑크라는 음악 장르가 나왔다이어지는 샌프란시스코 60년대를 주름잡았던 히피의 메카이다 단편의 주인공 남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로지 감각할  있는 물질적인 면만 중시했는데 이제  영혼을 헤아리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나 정신 추구했던 히피 그대로다다음의 ‘증기그리고 속도 자본주의의 시원(始原)이라   있는 근대가 창출한 가장 대표적인 변화를 포착한 풍경화다 그림은 기차를 처음   터너의 충격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터너가 받았던 충격과 보았던 기세 그대로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많이 그리고 급격하게 변화시켰다무엇보다 직업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없게 되었다이것이 이전 중세와 가장 많이 다른 점이었다사람의 본질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그의 전부를 좌우했다마치 이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단편은 실업자 등장시키고 돈이 없어 남에게 빌붙을 수밖에 없는 주인공에게 아시아 창녀라는 소리까지 듣게 만든다그녀의 남자 친구가 하필이면 포르투칼 국적인 것도 눈에 띈다. 포르투칼 하면 가장 먼저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어 자본주의를 유포시킨  마디로 근대의 첨병(尖兵) 같은 국가가 아니던가이처럼  단편은 근대의 시간을 슬그머니 끌어들인다그리고 이런 식으로 ‘ 나쁜 쪽으로에서 ‘증기 그리고 속도까지 역순의 역사가 형성된다작가는 착란하는 피난민들 양산하고 있는 자본주의에게 그래도 희망을 걸만한 무언가가 있는지 거슬러 올라가며 탐사하고 있는 것이다애초부터 잘못된 것이기에 오늘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아니면 원래는 좋은 것이었으나 오용의 결과인지 알고자  것이다그렇게까지  결과 확인하게 되는 진실은 지극히 비관적이다근대의 시원이 되는 ‘증기 그리고 속도에서 주인공 여자와 실업자 모두 추방에 추방을 거듭하다 아무런 실체 없는 귀신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목도하니까 말이다.


 나는 궁금했다그들은 누구이며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그들도 묻고 싶은 듯했다너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서 귀신이 되었는가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떠돌고 있는가어떤 희망을 가졌던가?


   마디로 자본주의는 애초부터 유령의 생산 운명지어져 있었다는 것이다마르크스였던가자본주의가 소외의 숙명을 가졌다고 말한 것은소외 바깥으로 내모는  뜻한다정주(定住)하는 존재를 유랑토록 하는 것이 소외다더하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소외를 가장 격렬하게 만든다고 했다방랑의 지속이다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간다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그리게  궤적이다. 1부의 마지막 단편인 지도와 인간 그것을 보여준다. ‘지도가 있으면 인간이   있다 믿음 속에서 그토록 추방당하고 정처없이 헤매이면서도 지도를 찾을  있다는 희망으로 감내해왔는데 그런 희망은 다만 착란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제는 지도조차 바랄  없게  현실을 그린다.



 지도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그것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작정이다.(그렇다고 한다.) 지도가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사람들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묻는 것이 허용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지도를 가질  있는 존재가 유령이 되었기 때문이고 지도와 소통할  있는 말을  믿게  탓이다자본주의는 그동안 사람들에게 지도였다그것은 황무지와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그래도 좋은 쪽으로 가고 있다고 말해왔다언젠가는 히브리 사람들이 그랬듯 가나안으로 가게  것이라고그러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모든   거짓이라는 사실이다현재의 착란을 제거해 주리라 믿었던 지도는 오히려 착란을 부풀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1부의 계보는 착란이 어떻게 가중되는지 보여주는 계보이기도 하다지도는 진실을 보증하지 못했다그것은   역시 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마지막 단편에 갑자기 침범하여 자꾸만 늘어나는 영어는 그런 정황을 독자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아닐까 싶다소통의 가장 근본적인 단위가 되는 말조차 이제 착란의 먼지구름이 되었다착란의 피난민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숙명이었다작가는 그것을 태초의 시간이자 여전한 현재에서 아프게 통감한다.


 3부의 미발표 단편  개는 작가가 여전히 절망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케 한다소설가는 무엇보다 말로 지어 먹고 살아가는데  말을 믿을  없게 되었으니  통렬했던  같다세계의 에선 영어와 우리말이 착란을 일으키듯 뒤섞인 가운데 작가는  불안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 속에서 기록하는 것을 그만뒀다고 고백하고 마지막 단편에선 차라리 제목처럼 자동  판매 기계 되길 원한다거기의 언어들은 모두 조각나 있고  어떤 것도 일련의 이야기로 묶이지 않는다우리가   있는 것은 발굴 현장의 도자기 파편처럼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말의 더미일 뿐이다이것은 이제 이런 것밖에   없다는 고백인 걸까 아니면 그래도 말을 믿고 다시 소설을 쓰기 위해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말을 배우고 있다는 과정을 드러낸 것일까물론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착란을 정물화로 그린 것만 같은  단편은 속 시원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모호한 가운데 마치 자신의 착란을 내게 감염시키려 하는 느낌마저 든다.


 나름 매끄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2부에 대한 말을 빠뜨렸는데앞서도 말했듯여기서는 미국을 모방하여  하나의 천국이 되려고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2부도 물론 1부처럼 역순의 계보를 이룬다2  단편 ‘박승준씨의 경우 주인공 박승준이 외롭고 초라한 자신의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남의 아파트 재활용 장소에서 몰래 건져  외국 유명 브랜드 정장을 입는데 그것은 미국에 견주어 우리의 고유한 정체성을 비루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방하여  정체성을 우리에게 이식하기에 여념이 없는 씁쓸한 오늘의 현실을 나타낸다 몸에 맞지도 않고 누가 일러주지 않으면 뭔지도 모르는 남의 옷에다 억지로 걸쳐 입고 살아가는  아니냐고뒤이은 카레가 있는 책상 조금  거슬러 올라가 군부 독재의 시절을 은연중에 끌어온다약한 존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시원에서 핍박받다가 살해당하는 조선족은 그런 사건이 바로 자신이 살던 장소에서 일어났는데 아무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것에서 전두환이 광주 시민을 학살한 것이나 박정희가 긴급조치로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 잡아들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단편의 주인공은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감을 남을 혐오하고 남에게서 혐오를 받는 것을 통해 충전시켜 나가는데(그가 즐겨 먹는 카레는  마디로 자존감을 확보하려는 수단이다강하고 널리 퍼지며 피할  없는 카레 냄새로 그는 자기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군부 독재가 자신의 허약한 정당성을 오직 증오와 혐오를 통해 이루려 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박승준씨의 경우 같은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보여준다빈약한 자존감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없는 용기의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오로지 타인에게 기대어 형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단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침묵하는 고시원처럼 군부 독재의  극단적인 억압과 감시의 경험은 주체가 자립할 힘을 빼앗아 버렸고 공백이 되어버린 내면에서  이상 자기 존립의 근거를 찾지 못하게  사람들은 타인을 통해 충전해야 했다주인공이 마지막에 카레가 되어 누군가의 입에서 으깨어져 그와 완전한 하나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처럼.


 마지막 이천칠십X 부르조아 6 암시하는 시간대가   거슬러 올라간다단편이 비록 과거와 현재미래가 마구 뒤썪여 있긴 하나귀족 계급이 존재하고 도포자락이 나오며 말로 왕래할 뿐만 아니라 두루마리로  서찰이 오간다는 점에서 독자로 하여금 분명히 일본에 의해 자본주의가 한창 이식되던 시절의 조선 말기를 떠올리도록 하기에 하는 말이다뭐랄까모방의 시원이 되는 시간대를 담은 느낌이다주인공 민정남은 검시관인데 서울 장충동에 있는  도로에서 발견된  사체 때문에  유력 자본가 가문의 자제인 엘리자베스 수지 윤과  알란 정의 연애에 끼어들게 된다그러나 진심어린 사랑의 밀어인  알았던 서찰은 사실 탐욕에 물든 흉계였고 본의 아니게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민정남 또한 파멸하게 된다그가 그렇게  것은 말이 진실을 보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그가 마지막에 보게 되는 신비한 홀로그램 정원은 진실이 완벽하게 보증되는 세계였다 풍경을 위해 목숨도 바칠  있을 만한하지만 그조차 환영이었다진실한 말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다만 영원한 그리움과 그에 맞먹는 무력감 속에 자리할 뿐이었다있는  다만 그런 말이 있었다는 사체.


 말과 똑같은 음을 가진 말의 사체 바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었다우리가 믿을  있는 말은 죽었다는 그런 의미에서 엘리자베스 수지 윤과  알란 정이란 존재는 한편으로 미국이 자신의 위엄을 최초로 알린 해방 정국 시기우리나라를 양분했던 소련과 미국의 이데올로기 동조된 이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이데올로기가 진실된 말을 전하기보다 진실에 상관없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말의 사체에 함유된, 진실한 말의 죽음이라는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고 하겠다.


 모방의 태초가 되는 시간에 이미 말이 죽어 있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파악하고 드러낼 고유의 언어를 잃고 남의 시선에 맞춰진 남의 언어로 그런 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애초부터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번역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알고보면 줄곧 소외되고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2 또한 소외의 계보를 역순으로 훑는다우리의 경우엔그렇지 않아도 착란의 계보로 점철된 ‘천국 무분별하게 모방까지 하는 바람에 혼란이  가중되었다이렇게 말하면 3부의 단편이 가진어쩌면 황당하게 보이기도 하는  파격적인 형태가 조금은 이해될지도 모르겠다3부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며 1 그리고 2부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결론이라는  강조하고 싶다.


 나는 앞서 3부에 대해 말하면서 작가가 느낀 절망의 정직한 고백인지 아니면 상황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배우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같다리뷰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다가 나는 문득 작가가 소설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불확실과 불안정 얘기하고 있다는  깨달았다. ‘ 그랬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어쩌면 부정 보다는 긍정의 몸짓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단편의 주인공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택했다나를 잃는 것을 받아들이거나(‘샌프란시스코’, ’카레가 있는 책상’, ‘이천칠십X 부르조아 6’) 혼란과 불안 속에 계속 머물렀다.(‘증기 그리고 속도’, ‘박승준씨의 경우’) 그들은 모두 ‘ 나쁜 쪽으로 주인공처럼 안정과 정답을 희구하는 무리의 행렬을 이탈하여  나쁜 쪽으로 걸어갔다스스로의 선택으로.


 이것이 눈에 들어오자 처음 읽었을 때는 무력감의 표현이자 타협과 순응으로만 보였던 모습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혼란과 불안을 기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껴안는그것을 삶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으로 삼는그런 모습을그래서 후자라고 생각한 것이다작가가 혼란과 불안 속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의심과 질문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고 있다고이런 모습은 솔직히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나는 이와 반대편이기 때문이다살면서 나는 어떻게든 혼돈과 불안을 피하려 했다느닷없이 그것과 마주할 때면  부족함과 무력함을 먼저 탓했다작가가 바라보았던 것과 같이 잃는 것을 통해 새로 얻을 가능성 따위 생각해보지 않았다어떻게 가느냐가 아니라  만큼 왔느냐가 중요한 나였다.


 그런데 소설은 ‘ 나쁜 으로 걸으라 한다작가가 그렇게 말한  아니다그냥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그런데도  말이 뇌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내가 뭔가 잘못 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일까 역시 착란의 계보 속에서 아무런 의심과 질문 없이 남들이 정한 해답을 수용한  아닌가 하는 의혹으로   주위를 계속 서성이게 되는 것일까작가가 재현한 착란의 계보가 설득력이 있었기에 그가 암시한 태도 또한 받아들이고 싶어진다그동안 확실하고 굳건한 돌만 디디며 삶이란 징검다리를 건너온 내게 과연 ‘ 나쁜 쪽으로’ 걸어갈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다그래도 앞으로는 혼란과 불안 앞에서 지금까지 꼭꼭 잠궈두기만 했던 마음의 문을 말을 처음 배울  그러하듯이 천천히 열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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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인용문에 페이지 숫자를 명기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전자책으로 읽어 그럴 수 없군요. 혹시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알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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