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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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드디어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아홉 번째 작품, '팬텀'이 나왔습니다. 여덟 번째인 '레오파드'가 우리나라에 나온 것이 2012년이니,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이 작품을 빨리 읽고 싶었던 제겐 그만큼 고통의 시간이었죠. 이제 그 시간이 끝났네요. 그러나 해리 홀레는 아직 고통의 시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더 깊어집니다.


 해리 홀레가 정말 살아있었다면 요 네스뵈를 아주 증오했을 것 같습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그의 고통과 비애는 깊어지고 격해지기만 하니 말이죠. '레오파드'의 리뷰를 썼을 때 저는 해리 홀레를 단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지옥을 여행하는 순례자로서 말이죠. 단테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옥의 더 심층부로 내려갑니다. '스노우맨'에서 '레오파드' 그리고 '팬텀'으로 이어지는 여정도 그러합니다. 해리 홀레는 작품이 거듭될수록 더 심한 죄악과 더 커다란 아픔과 절망을 겪으니까요. '팬텀'의 마지막에서 당신은 보게 될 것입니다. 해리 홀레가 차라리 이대로 유령이 되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고통을 겪는 것을... 그가 시리즈 초반부터 내내 트라우마로 짋어지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동생 죽음만큼이나 거대하고 끈질긴 트라우마를 다시 한 번 가지게 될 순간을...

 '팬텀'은 지옥을 배회하는 유령의 절규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전작 '레오파드'와 유사하게 '팬텀'에서도 해리 홀레는 누군가 때문에 다시 노르웨이를 찾아옵니다. '레오파드'에선 아버지가 곧 세상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었죠. '팬텀'에서는 자신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올레그가 살인 누명을 쓰게 됩니다. 그것이 정말 그의 죄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해리 홀레는 노르웨이로 온 것입니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동생의 죽음이 남긴 트라우마의 기억을 공유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해리 홀레는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갔다가 동생을 잃게 되었죠. 그러므로 해리 홀레를 부른 것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자신이 지고 있는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평생 억누르고 회피해왔던 고통스런 기억과 마주하라고 말이죠. 아마도 그런 이유로 '레오파드'에서 해리 홀레가 노르웨이로 오게 되는 것이 소환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일 겁니다. 심판에 회부되는 것과 비슷하게.


 만약 해리 홀레가 심판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분명 해리 홀레가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라켈과 올레그와 가족이 되지 못하는 이유와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레오파드'가 은연 중에 보여주는 것은 억압과 회피였죠. 그는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고 그동안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고통이 자기 옆으로 흘러가게 내버려뒀습니다. 요 네스뵈가 해리 홀레를 이런 모습으로 만든 것은 이것이 노르웨이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레드 스패로우'에서 요 네스뵈는 2차 대전 때의 노르웨이 과거를 빌려와 현재의 노르웨이가 죄악의 땅이라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노르웨이는 거기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이 그저 억압과 무시의 암막으로 가려두기 바빴습니다. 정면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고개를 돌리고 못본 척 해버린 것입니다. 해리 홀레가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죠. 이처럼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를 지금의 노르웨이가 잘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던 결과를 바로 이 '팬텀'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죠.


 '레오파드'일 때만 해도 노르웨이의 죄악은 화려한 외관 아래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팬텀'에선 더이상 아닙니다. 위장막은 이미 걷혀져 죄악으로 일그러진 민낯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 네스뵈는 '바이올린'이란 '마약'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노르웨이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마약 유통 국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생산 국가까지 되었다고 말이죠. '팬텀' 소설 초반은 그렇게 마약에 깊이 오염된 노르웨이란 지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엔 우리가 생각했던 노르웨이의 모습은 더이상 없습니다. 오히려 전 세계에 고통을 퍼뜨리는 만악의 근원입니다.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토르 슐츠가 그것을 암시하죠. 그는 국제선 항공기 기장인데 러시아 마피아와 손잡고 다른 나라로 마약을 몰래 운반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노르웨이로 다시 돌아온 해리 홀레는 '레오파드' 보다 훨씬 더 깊은 지옥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그 사실을 나타내듯 그에게 가장 끔찍한 비극과 조우하고 말죠. 아들과 다름없는 올레그가 구스토란 십대를 살해한 혐의로 감옥에 갇혀 있는 비극을.


 그와 같이 일했던 동료말고는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해리 홀레는 자신의 조국에서 이제 완전히 이방인이 되어버렸다는 걸 느끼며 홀로 올레그 사건의 진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것은 더이상 손쓸 수 없게 망가져 버린 노르웨이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올레그 자신이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죠. 전작에서 그토록 죄와 멀어보였던 올레그가 어느새 마약에 중독되어 마약을 중개하는 일을 돕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므로 해리 홀레에게 올레그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곧 노르웨이의 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건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아무래도 물음표를 달 수밖에 없습니다.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대한 해리 홀레의 태도는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으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해리 홀레의 모든 시도와 노력이 결국 좌절하게 될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단서는 해리 홀레만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홀레가 싸우는 거대한 마약 조직의 수장 두바이가 가진 과거 신분 역시 이를 보여줍니다. 그가 신부였다는 사실 말이죠. 한 때 신부였던 사람이 지금은 마약을 유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얼른 떠오르는 것은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일 겁니다. 마르크스가 그 말을 했던 건, 종교가 아편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은 현실을 스스로의 의지로 변화시키기 보다는 방관과 회피를 일삼게 만들기 때문이었죠. 


 결국 해리 홀레와 두바이는 닮은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올레그의 비극과 구스토의 죽음은 해리 홀레와 두바이가 속한 아버지 세대의 죄악을 미래 세대가 대신 속죄하는 것이라 해야겠죠. 정말 의미심장한 것은 소설에 유령이 된 구스토의 독백이 장마다 삽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홀레의 이야기 곳곳에서 구스토는 햄릿 앞에 홀연히 나타난 아버지 유령처럼 끼어들어 그와 똑같이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햄릿이 그랬듯 이렇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들려주는 것은 그 책임을 묻기 위함입니다. 내 죽음이 누구의 책임이고 이런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다시 말해 구스토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당한 비극은 계속 반복될 거예요.'


 '팬텀'이 정녕 놀라운 것은 이런 구스토의 예언이 현실로 이뤄졌다는 겁니다.

 '팬텀'이 나온 2011년, 세상 전체를 놀라게 만든 대학살이 노르웨이에서 일어났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청소년 여름 캠프로 가장 유명한 우퇴위아 섬에서 76명의 십대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건 말이죠. 그 범인은 극우주의자에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였습니다. '레드 스패로우'에서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의 병폐로 지목한 바로 그런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학살이 일어난 우퇴위아 섬의 모습


 노르웨이가 은폐하고 있는 죄악을 이대로 방관한다면 미래 세대가 커다란 비극을 당할 것이다라는 요 네스뵈의 예감은 이렇게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 처음부터 나타나 곳곳에서 등장하는 쥐에게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쥐 역시 해리 홀레, 두바이와 똑같이 아버지이고 자신에게 딸린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오직 이 쥐만이 다른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눈 앞에 나타난 장애물을 피해가려 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관통하려 합니다. 이러한 회피가 아닌 정면 대응이야 말로 미래 세대를 위한 아버지 세대의 제대로 된 처사가 아니겠느냐고 쥐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조는 위험이 닥치면 그 빠른 발로 얼른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머리를 처박는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위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해리 홀레와 두바이가 한 것은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은 지금까지 노르웨이가 취했던 태도이기도 했었죠. 이제 그런 것을 끝낼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 것이 가져오는 건, 다음 세대가 더 커다란 고통을 당하는 것밖엔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제목처럼 유령이 아니라 실체가 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닥쳐오는 위험과 죄악에 온 몸으로 부딪치는 것입니다. 해리 홀레가 소설의 마지막에서 자신을 향하고 있는 총구를 정면으로 응시한 것처럼. '팬텀'은 그런 직시를 위한 지옥의 순례입니다.


  미래 세대. 우리는 그 말을 곧잘 언급하지만 과연 어떤 것이 진정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선 잘 생각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그 말을 할 뿐. 그러면서도 현실 문제에 대해선 나만 당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태도로 그 해결의 책임을 다음 세대로 얼른 넘겨버리죠. 자기 중심주의가 낳은 방관과 회피는 우리 역시 노르웨이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수 많은 적폐가 뿌리는 내리고 쑥쑥 자라나 미래 세대의 생기와 희망을 흡혈귀처럼 쭉쭉 빨아들이고 있으니 요 네스뵈가 '팬텀'에서 강조한 태도는 우리 사회에도 참으로 절실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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