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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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일단은 사회 전체가 원하지 않는  자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프레드 진네만의 걸작 서부영화 '하이눈'을 닮았다. '하이눈'에서 그 초대 받지못한 손님은 악명 드높은 무법자로 총솜씨는 귀신 같은데다 사람 죽이기를 우습게 알기 때문에 모든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존재다. 그런 자가 감옥에서 풀려나 마을로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감옥에 가두었던 보안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 소식을 미리 들은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 자신의 안전 보다는 마을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아니 아예 마을 전체를 위해서 그 한 몸 희생하는게 어떻겠느냐고 말하는 이들까지 있다. 그렇게 무법자에게 찍혀버린 보안관은 그 역시 무법자와 마찬가지로 사회로 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된다. 이러한 '하이눈'은 50년대의 미국에 광풍처럼 불었던 찍히기만 하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을 당해야 했던 '메카시즘'을 은유하면서 사회가 '낙인에 의한 고립 효과'로서 얼마나 손쉽게 희생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낙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게 처음이 아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하나님으로 부터 낙인을 받은 바 있고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 또한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낙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사회가 존립을 이어가기 위해 기꺼이 희생양을 재생산하는 것은 인류의 그 시작에서 부터 지금까지 반복되어 오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희생양'이라는 책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가 낙인을 통한 희생양을 줄기차게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이 내부 갈등을 봉합하는 데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은 사회 내부에 갈등들이 점증하여 더 이상 기존 사회의 역량으로는 그것을 무마하기 어려울 때 생겨난다. 즉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불만의 물꼬를 다른 쪽으로 비틀어 일시적으로나마 그 끓는 열기를 식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생양이란 일종의 진통제와도 같다. 궁극적인 치유는 가져오지 못하지만 한 순간의 분풀이로 일시적인 무마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이렇게 낙인의 원인은 낙인을 받는 대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낙인은 오로지 사회의 일방적인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다. 역사적으로 사회는 그 존속을 위해서라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낙인을 찍어 희생양을 양산해왔다. 나치의 유태인이 그랬고 십자군 원정에서의 이슬람 교도가 그랬다. 그건 종교가 같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1572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유명한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에서 보여지듯 카톨릭 교도에게 있어 개신교 교도 역시 희생양인 건 마찬가지였다.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 역시도 이러한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이다. 여기에선 남자 주인공 토비아스가 그 초대받지 못한 손님의 역할을 맡는다. 그는 갓 스물 살이 되었던 10년 전 같은 동급생 소녀 둘을 죽였다는 혐의로 10년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배척한다. 고향에 돌아와보니 토비아스의 집안은 예로부터 고향에서 알아주던 유지였지만 그 일로 인해 파괴된 지 오래였다. 토비아스는 아버지를 도와 그런 집안을 다시금 일으키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마을 사람들이 일치단결하여 그를 10년 전의 죄로 배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비아스는 억울하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절대 자신이 저지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정말 거기에 대해 무죄라는 것을 살아가는 모습 자체로서 마을 사람들에게 입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쉽지가 않다. 한 번 찍혀버린 낙인은 결코 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 배척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질 뿐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익히 많이 보아온 이야기일 수 있다. 전과자를 주인공으로 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사실 이와 비슷하지 않았던가? 집단적인 배척을 받는 무죄한 희생양의 이야기는 영국의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도 참 많이 다루었던 소재였다. 하지만 크리스티는 그걸 개인의 문제로 풀지않고 집단의 문제로 풀었다. 그건 당시 사회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다. 그녀가 그런 작품을 한창 쓰던 무렵의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이 모조리 파괴되어 살길이 막막해진 러시아와 동유럽의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영국으로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그렇게 섞여든 동유럽과 러시아 사람들로 인한 마을의 변화를 담아내려 했었고 거기에 그 존재들은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로 자주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우리는 크리스티의 대표적 탐정 미스 마플 시리즈에서 전쟁 이후 몰려 든 러시아와 동유럽의 어중이 떠중이들 때문에 전과 같이 마을이 순수하지만은 않고 비밀과 안 좋은 소문들이 가득한 음험한 곳이 되어버렸다는 푸념을 곧잘 듣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넬리 노이하우스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를 그저 하나 더 더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넬리 노이하우스도 이걸 토비아스 개인의 비극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가사 크리스티와 비슷하다. 이것은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집단적 배척의 모습을 묘사하는데서 드러나는데 그들의 똘똘뭉침엔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고 그저 달리 분노할데가 없으니까 마침 잘 걸렸다는 식의 배척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토비아스는 그들에게 있어 두더쥐 잡기 게임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넬리 노이하우스가 더욱 드러내려 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를 잃어버린 사회적 증오이다. 이런 면이 아가사 크리스티와 비슷한 것이며 그렇기에 그 아가사 크리스티가 그랬듯이 이것도 어쩌면 현실 사회의 상황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토비아스는 무엇을 은유하는 것이고 또 넬리 노이하우스는 이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 것일까? 넬리 노이하우스가 독일인임을 생각하면 여기에 대한 답은 한결 쉬워진다.

 

  그러니까 토비아스는 바로 독일 통일 이후에 동독에서 서독으로 내려온 사람들을 은유하는 존재라는 것이 말이다. 다시 말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통해 통일 독일 이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때 같이 있었으나 저편에서 건너온 자들이 되어버린 동독인들과 같이 토비아스 역시 누명을 쓰고 고향에서 쫓겨나 10년간 수감되어 있다 풀려난 존재이고 토비아스가 오래도록 감옥에 있었듯이 동독 역시도 소련 연방에 의해 강제적으로 편입되어 오래도록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넬리 노이하우스가 토비아스에게 그러한 이력을 선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동독과 비슷한 과거를 가지게 하여 토비아스가 바로 서독에 내려온 동독인들의 은유적 존재임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토비아스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 배척 역시 은유이다. 그러니까 독일이 통일 된지도 벌서 십 수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는 서독인들의 동독인들에 대한 배척, 즉 그들의 무분별한 희생양 만들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흥미로운 텍스트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볼 수 있었던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은 사실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같은 독일 출신 감독 볼프강 베커를 통해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바로 영화 '굿바이 레닌'을 통해서 말이다. 거기서 주인공 아들은 동독 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동독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연극을 벌여 어머니를 안심시킨다. 이렇게 '굿바이 레닌'은 체제가 무너진 뒤의 동독 사람들이 겪게되는 정체성의 혼란을 다루고 있었다. 동독인들이 그만큼 혼란을 겪었다면 몰려 내려온 동독인들로 인해 서독인들 역시 혼란을 겪게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바로 그 '굿바이 레닌'에 대한 서독인들의 대답인 셈이다. 

 

  하지만 노이하우스는 그러한 정체성의 혼란만은 아닌 왜 그러한 혼란이 생겼느냐까지 물으려 한다. 그것은 토비아스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일어난 범죄 때문에 마을에 온 보텐하우스와 피아 형사 콤비로써 드러낸다. 이 원인의 추구에 있어 노이하우스는 수사 과정 뿐만 아니라 보텐하우스와 피아 콤비의 사생활까지 가져와 보여주는데 결과적으로 거기에 대한 해답은 둘의 결혼생활로 제시된다.

 

  소설에서 보텐하우스는 이미 결혼이 파탄나 있고 피아는 새로이 결혼 생활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둘은 모두 삶의 변화를 앞두고 있는데 바로 이를 통해, 정확히는 이들의 변화에 대한 태도를 통해 노이하우스는 궁극적으로 그 혼란이 생기게 된 까닭을 탐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둘의 사생활은 작품의 중심이 되는 토비아스의 귀환으로 비롯되는 범죄 이야기와는 맥락상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이 작품엔 두 개의 이야기가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의문은 노이하우스가 왜 굳이 이런 설정을 했느냐로 향한다. 결국 깨닫게 되는 건 그녀가 사실상은 두 개의 이야기를 병행시킨 것은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른 걸 천착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토비아스의 이야기로는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으로 수렴되는 야기된 정체성 혼란의 상태를 천착하고 보텐하우스- 피아 콤비의 이야기로는 그렇게 혼란을 야기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지 천착하려 했다는 말이다. 굳이 둘로 나눠야 했던 것은 이게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넬리 노이하우스는 현상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그 원인과 대안까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둘의 이야기로 나누어 전자엔 현재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유추하고 후자엔 자신이 생각하는 그 원인과 극복가능한 대안을 담기위해 두 개의 물길을 작품에다 열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토비아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단 사회가 작위적으로 행하는 낙인을 통한 희생양 생산을 충실히 보여준 다음 거기 가세하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은연중에 동독인들에 대한 서독인들의 모습으로 가져오면서 넬리 노이하우스는 묻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바로 동독인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느냐고. 이들의 불합리가 우리들이 가진 증오의 불합리가 아니냐고. 그리고 그러한 증오에 대한 다른 이들의 방관과 무시는 또 우리들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증오를 보았을 때 방관하고 무시했던 것과 같지 않냐고. 넬리 노이하우스는 바로 이 질문을 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고 거기에 대한 대답 또한 작품에서 하려한다. 그래서 보텐하우스와 피아가 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특히 피아가 중요하다. 유일하게 토비아스에게 관심을 갖고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피아라는 존재는 최소한 방관과 무시만은 하지 말자고 하는 넬리 노이하우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다시 말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그 피아처럼 자신의 과거를 고집하지 말며 새로운 변화에 마음을 열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 제안을 위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더 가져온다. 그가 바로 토비아스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존재인 '아멜리'이다. 아멜리는 토비아스의 귀향과 비슷한 시기에 마을에 온다. 원래 오기 싫었지만 할 수 없이 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멜리는 적극적으로 적응하려 애쓴다. 새롭게 다가온 변화를 할 수 있는 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건 상황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을 모두가 배척하는 토비아스를 비롯 사람들이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존재까지 아멜리는 다 받아들인다. 한 마디로 그녀는 변화를 긍정하는 태도의 상징이다. 이는 피아와 아멜리 모두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보텐하우스를 고려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그는 결혼의 파국이 가져온 변화를 결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더구나 같은 수사관을 이렇게 설정했다는 것은 통일 이후 변해버린 체제에 대한 서독인들의 태도를 대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였기도 하다. 결국 사건의 해결을 누가 하는가가 넬리 노이하우스가 가지고 있는 대안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일본식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파 미스터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일 통일 이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동독인들에 대한 서독인들의 증오를 '낙인으로 희생양 만들기'라는 소재로 풀어가 본 작품인 것이다. 결국 그녀가 제시하는 대안은 단순하게 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피아와 아멜리가 보여주는 대로 변화에 대한 긍정이다. 내가 처한 변화된 현실에의 긍정이 결국은 타인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아멜리와 피아의 이야기를 통해 충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분단 국가로서 독일의 현실은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정말 중요한 것은 통일이 아니라 그 이후가 아닐까 한다. 수십년간이나 서로 다르게 살아온만큼 아무래도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조선족이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 시선을 생각해 보면 통일 이후 북한 주민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도 서독인들의 시선과 별로 다를 것 같지 않다. 갈등을 현명하게 푸는 방법은 일단 상대를 긍정한 상태에서 그들의 처지를 먼저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를 긍정하고 들으려는 귀를 준비시키는 넬리 노이하우스의 이 작품은 충분히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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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2-17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면서 보텐하우스와 피아에 대한 일은 왜 나올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했는데...
무엇인가 달라지는 것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개인의 일은 그럴지라도 나라에 일어난 일은 좋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언젠가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에 대해 안 좋게 여기지 않아야 할 텐데
그 반대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누가 진짜 범인이야 하는 것만 생각하며 봤는데...
사회파 미스터리였군요


희선

bggg 2013-05-2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이책재밌게봤어요.추리물을워낙좋아라하는지라…^^
요즘보는책은<너무예쁜소녀>라는독일스릴러소설인데요,마치한편의스릴러영화를보는듯한느낌이에요.
너무재밌어서책읽자마자절반가까이읽어버렸어요.이제아까둔결말부분을읽을차례인데요…아직풀리지않는의문하나!도대체왜죽였을까??


자운영 2019-12-13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책 내용은 읽는자의 몫이지만 한권의 추리소설을 읽고 사회현상, 사회 와 국가, 사회집단의 심리까지 들어야 볼 수 있는 독후감을 써 낸다는게 쉽지 않음을 , 그래서 독자는 혼자 읽고 느끼는 것 보다 더 폭넓은 독서를 할 수 있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되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에 한 줄 남깁니다. 독후감 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쿠퍼 수집하기
폴 클리브 지음, 하현길 옮김 / 검은숲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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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컬렉션이 된 걸 환영해"(P. 74)

 

 폴 클리브의 데뷔작 '쿠퍼 수집하기'는 이 스릴러가 뉴질랜드 산(産)인 것만큼이나 독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두 가지나 되는데 하나는 위에 인용한 말처럼 이 소설이 '연쇄 살인마'를 모으는 사람의 이야기 라는 것입니다. 연쇄 살인마를 사냥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미드로도 만들어진 '덱스터'를 통하여 본 적이 있지만 정말로 그가 왜 연쇄 살인을 하며 그런 일을 하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듣기 위해서 그냥 모으는 사람의 이야기는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지만 이 작품엔 또 하나의 독특성이 있는데요. 그것은 보통 스릴러의 경우 쫓기는 자와 쫓는 자가 일대일로 겨루는 이를테면 '톰과 제리'식의 게임인데 반하여 이 스릴러 '쿠퍼 수집하기'는 그 구도에 앞서 말한 연쇄 살인마를 수집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끼어드는 '3파전'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지운 감독의 영화 중에 세 명의 캐릭터가 서로 물고 물리는 레이스를 펼쳤던 영화가 있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같은 게임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소설을 주로 이끌어가는 그 세 명을 잠깐 소개해 본다면,

 

 

 PROFILE NO.1 : GOOD GUY

 

  먼저 '좋은 놈'인 테이트 전직 형사가 있습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하고 범인 체포에 아주 능력있는 형사였지만 자신의 딸과 아내를 차로 들이받고 그 때문에 딸을 죽인 자를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사로이 처형한 일로 죄의식을 느껴 결국 형사를 그만두고 경력을 살려 사립탐정을 했으나 딸 아이는 영영 떠나버렸고 사랑스러웠던 아내는 그 사고로 거의 식물인간이 되어 요양원에 있어 그 괴로움에 거의 삶을 포기하듯 살아가다 결국 음주 운전으로 한 여자아이를 들이받고는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이제 막 풀려난 자입니다. 출감하자마자 예전 그의 형사 동료 슈로더가 그들이 살고 있는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를 가장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는, 제복 입은 사람만 살해한다고 해서 '제복살인마'란 별명이 붙은 여성 연쇄살인마 '멜린다 X'를 추적하는 걸 도와달라고 의뢰해 옵니다. 하지만 그 의뢰에 채 뛰어들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변호사 도노반 그린의 방문을 받습니다. 사실 그는 테이트가 음주운전으로 들이받았던 여자, 엠마 그린의 아버지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원수와 다를바 없는 테이트의 변호사가 된 건 그 역시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테이트를 직접 처단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죽이려는 찰라 테이트의 간곡한 설득으로 딸 아이의 생사여부를 지켜보고 결행하기로 작정하게 되었고 결국 기적적으로 딸 아이가 살아나자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죠. 그렇게 도노반 그린과 테이트는 같은 죄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테이트의 처단을 도노반 그린만 유일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찾아와 말합니다. 엠마 그린이 사라졌으니 찾아 달라고. 그 때 살려준 빚을 그것으로 갚으라고.

 

 

 PROFILE NO.2 : BAD GUY

 

 그리고 나쁜 놈, '쿠퍼'가 있습니다. 그는 엠마 그린도 다니고 있는 대학의 범죄 심리학 교수입니다. 주로 연쇄살인마를 상담하여 정신분석을 하고 있는데 책도 한 권 저술했지만 그리 빛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도 수집하는 게 있습니다. 연쇄살인마의 신체 부위 입니다. 그는 그러한 병적인 수집욕을 범죄심리학자로서 범죄자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애써 자위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언제 돌출될지 모르는 살인 충동을 그것으로 애써 잠재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 그 연쇄살인마의 엄지손가락을 페덱스로 받았던 날 그는 테이져를 맞고 납치됩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한 남자가 '내 컬렉션이 된 걸 환영해'라고 말하더니 사람을 죽일 때의 느낌을 들려줘 라고 말하죠. 가까스로 살인 충동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스스로는 선량한 시민이라 여기고 있는 쿠퍼로서는 정말 미치고 펄쩍 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PROFILE NO.3 : STRANGE GUY

 

 

 쿠퍼를 가두고 광기로 몰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이상한 놈', 에이드리안입니다. 그는 오래도록 살인 병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정신병원에 있었고 그 때문에 연쇄살인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관련된 책도 많이 읽은 사람입니다. 정신적 성숙은 채 자라지 못해 자신의 욕망을 어디까지 실현해야 하는지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상한 놈'입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뿐이니까요. 책으로만은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연쇄살인마의 병적인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연쇄살인마의 신체 부위를 수집하는 '쿠퍼'를 수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에이드리안은 그 쿠퍼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에서 읽은 대로 그의 살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그의 기호에 맞는 여인까지 납치해오는 성의를 보이죠. 그는 쿠퍼에게 연쇄살인마의 심리적 상태에 대해 집요하게 묻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비극적인 과거와 관련된 것이었죠. 그가 쿠퍼를 수집해 알고 싶어했던 건 그 과거와 관련해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쿠퍼는 에이드리안에게 있어 일종의 대차대조표와 같은 것이었죠. 그에게는 살인도 수집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자신이 진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었죠.

 

 

 소설은 이렇게 세 명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면 떠오르는 의문은 이것이죠. 왜 작가 폴 클리브는 이런 설정을 택했던 것일까? 그러게 정말 왜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요? 잠시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 영화로 돌아가보죠.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유명한 서부 영화 'GOOD, BAD AND UGLY'에 대한 오마쥬이기도 합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그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남북전쟁이었습니다. 북부의 산업자본주의가 남부의 전통적인 농경자본주의를 대체하던 순간이었죠. 그렇게 현대 자본주의의 한 원형이 만들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레오네는 일부러 그 시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영화에 나오는 'GOOD, BAD AND UGLY'의 세 사람을 모두 지금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이들의 원형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이죠. 거기엔 타인이 어떤 처지에 빠져있던 아무런 관심없이 ㅇ로지 자신이 원하는 돈만 추구하는 'GOOD'이 있고 자신이 원하는 돈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타인의 삶 따윈 파괴해 버리는 BAD'이 있으며 있는 거라곤 오로지 돈에 대한 저급한 욕망 밖에 없어서 신념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그저 비굴하게 이리저리 오고가면서 돈 벌 궁리만 하는, 그래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렘의 후예라고도 할 수 있는 'UGLY'도 있습니다. 즉 레오레는 보여주려 했던 것이죠.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셋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김지운 감독도 비슷한 생각에서 그 영화의 설정을 가져왔습니다. 그가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은 굳이 웨스턴 틀을 가져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은유였습니다. 레오네의 미국 남북전쟁과 똑같이 일제라는 돈에 종속된 한국 사회를 나타내는. 그러니 거기에 나오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도 사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은유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많이 이상화되고 키치화되어 본래의 그 뜻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아무튼, 폴 클리브가 하고자 하는 것도 레오네와 김지운과 비슷합니다. 그 역시 이 세 인물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투영하려 한 것이죠. 특히 이 '신자유주의'라는 지옥 속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을 말이죠.

 

 네, 이 소설 '쿠퍼 수집하기'는 이 지옥을 견뎌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크라이스트처치'에 대한 묘사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소설의 '크라이스트처치'는 어떠한 도시입니까? 폴 클리브는 소설 초반에 그 곳이 어떠한 곳인지 꽤나 공들여 묘사합니다. 그를 통해 밝혀지는 그 도시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그 곳은 '도살자'나 '멜린다 X'와 같은 연쇄살인마들이 활보하는 도시이고 테이트가 교도소에 4개월 가량 갇혀있는 동안 범죄율이 50%나 증가한 도시이며 엠마 그린의 사소한 친절조차 범죄로 오해되어 따귀를 얻어맞는 그렇게 타인에 대한 불신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도시였습니다. 테이트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렇게 바로 대답할 정도로 말이죠.

 

 "이 도시 말이야. 아니, 사회라고 해야 하나? 나도 잘 모르겠어. 자넨 이 크라이스트처치를 어떻게 생각하지?"

 "이전보다 아주 나빠졌지."

 난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즉시 대답했다. (P. 21)

 

 폴 클리브는 이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 얼마나 지옥인지 보여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결정타까지 날려줍니다.

 

 이제 그들은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라는 글자가 가로로 새겨진 2미터 높이의 회색 벽돌담을 지나쳤다. 이 도시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환영합니다'란 문구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누군가가 처치(CHURCH)에 스프레이로 X 자를 긋고 '도와주소서(HELP US)라고 적어놓기까지 했다.(P. 22)

 

 '크라이스트처치'는 이런 장소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중에 밝혀지는, 에이드리안도 있었던 '그로버 힐스'와 닮았죠. 겉으로는 사회의 부적응자를 요양하고 치료하는 병원이었으나 그 실상은 수감된 자들에게 가족을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그 사적인 복수를 허용해 주었던 그 '그로버 힐스' 말이죠. 그렇게 '그로버 힐스'는 '크라이스트처치'의 원형과도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늘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할 수 밖에요. 하지만 신은 죽었고 구원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사적 복수의 공공연한 실행은 이것을 뜻하는게 아닐까요). 자신이 저질렀던 사적 복수로 인한 죄책감을 이제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갚으려 하는 테이트, 오로지 혼자 살아남는 것에만 전념하는 쿠퍼 그리고 사회가 가한 억압 속에서 정말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려 자기 존재의 진실을 알기 원하는 에이드리안은 어쩌면 우리의 것과도 닮아있을지 모르는 각 자가 만들어가는 그 구원의 궤적을 보여주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쿠퍼가 에이드리안에게 대차대조표였듯이 테이트, 쿠퍼 그리고 에이드리안 역시도 우리의 대차대조표인 것이죠.

 

 장장 631페이지에 걸친 여정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접해보는 뉴질랜드산 스릴러에다 연쇄살인마를 수집하는 이야기에다 3파전으로 전개되는지라 더욱 흥미를 느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특히나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고조되어 더욱 읽을 맛이 났습니다. 그러니 이 흥미로운 '대차대조표'를 여러분도 한 번 보심이 어떨까 싶어요. 어쩌면 이 소설을 읽고나서 쿠퍼를 수집한 에이드리안이 그에게 처음했던 말을 여러분 역시도 하게 될 지 모르겠네요.

 

"내 컬렉션이 된 걸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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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0-06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흥미로운 설정이네요.
굉장히 독특한 부분을 집어서 말씀해주셔서, 정말 손이 절로 갑니다.
헤르메스님 서재에 들어오면 항상 꼴까닥 넘어간다니까요,, ㅎㅎ.

잘 지내고 계시죠?
작성한 글을 하나 잃어버리셔서, 속상하시겠어요... ^^

ICE-9 2012-10-07 23:59   좋아요 0 | URL
우와! 마녀고양이님. 또 이렇게 깜짝 방문을 해 주셨군요! ^ ^
저는 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 같지만
마녀고양이님은 어떠세요?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요즘 마녀고양이님의 그 주옥같은 글들을 못 읽으니 너무 허전해요.
많이 바쁘셔서 그런 것이겠죠. 여유가 되실 때 꼭 글 좀 올려주세요^ ^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끝을 알 수 없는 작가.

 그가 바로 피에르 르메트르이다.

 이게 결말이겠거니 싶으면 어느 순간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나고 그 열린 문으로 들어선 순간! 그 결말은 또 다른 출발로 이어진다. 그렇게 진실과 거짓이 능수능란하게 뒤바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서로 바꾸며 해결이 오해로, 비극이 희극으로 마구 반전되는 작가 그가 바로 피에르 르메트르이다. 그가 다시 찾아왔다. 여름 미스터리 독서계를 뒤흔들었던 수작 '알렉스'에 뒤이어 그와는 스탠드얼론인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로 돌아온 것이다. 이 작품 역시 피에르 르메트르에게 있어 '플롯의 귀재'라는 별명은 여전히 마땅함을 보여준다. 더구나 이 소설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한 대칭적 구도마저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소설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여주인공이라고 할만한 소피가 자신이 보모로서 돌보는 레오가 죽었을 때 그를 품에 안고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처럼 절규하는 부분이 소설의 가장 마지막 이제 과거와는 완전히 결별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기에 상징적으로는 죽었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는 딸과 아버지의 대화 부분과 서로 댓구를 이루는 것 처럼 소설 속의 모든 에피소드들이 정확히 자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마치 정교하게 쌓아올려진 블럭과도 같이 그 미세한 부분조차 정확한 계산으로 이쪽으로나 저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맞추어진 것을 보노라면 흡사 매우 공정한 심판관을 보는 듯 하다. 아니, 사실 르메트르 그는 심판관이다. 말하자면 매우 최소화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이 소설은 일종의 권투시합과도 같다. 소피라는 여자와 프란츠라는 남자가 맞부딪히는 총 4 라운드의 권투시합. 바로 그 시합의 심판이 작가 르메트르이며 독자인 우리들은 관객인 것이다.

 

 

 ROUND 1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라운드는 소피의 절규로 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돌보는 여섯 살 밖에 안되는 레오가 죽었기 때문인데 소피는 혹시 자신이 죽이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마다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확신하지는 못한다. 다만 정황상 자신이 범인이 아닐까 의심될 뿐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전남편도 그런 식으로 죽었다. 그래서 소피의 정신은 온전하지 못하다. 잦은 건망증에 기억 상실증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몰려드는 불안에 겹쳐지는 사랑을 잃은 탓에 번져 나오는 우울증까지. 자신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상태다. 그래서 그녀는 진실을 확인할 생각도 않고 달아난다. 겨우 안정을 찾았나 싶었던 그녀의 삶은 다시금 불안한 도피자의 정처없는 유랑 속으로 떨어진다. 작가 르메트르의 매의 눈 같은 날카로운 필치는 이러한 소피의 마음 한 조각까지 모두 남김없이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세세하게 확인하게 된다. 그녀의 영혼이 지금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그래서 뒤이어 그녀와 관계했던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이제 그녀의 의심은 우리들에게도 전염된다. 혹시 정말로 그녀가 레오를 죽였을지 모른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는 무려 8개월 동안이나 도피한다. 하지만 경찰의 추적은 점점 조여오고 최종적으로 신분을 세탁해 완전히 달아나려 한다. 신분을 세탁할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를 찾는다. 물론 영원히 결혼할 생각은 없다. 필요한 때까지만 살 작정이다. 그 기한이 지나면 남편은 소피에 의해 폐기되어야 한다.

 

 이렇게 1 라운드는 오로지 소피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르메트르가 선택한 3인칭 관찰자 시점 때문에 관찰자로 머무르면서 남김없이 드러내는 르메트르의 필치를 따라 소피가 지금 어떤 존재인지 그 모든 것을 보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소피는 그야말로 병든 영혼이며 세상으로 부터 격리되어 마땅한 가해자로 보인다. 그리고 순결한 희생자가 그녀 앞에 도래한 순간 2라운드가 시작된다.

 

 ROUND 2

 

 2 라운드에서 시점의 주인공이 바뀐다. 뿐만아니라 서술 스타일 역시 달라진다. 2 라운드에서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일기다. 프란츠라는 남자의 것으로 놀라운 것은 쓰여있는 시점이 소피의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라는 것이다. 프란츠는 일기에 우연히 소피를 보고 자신이 포기했던 계획을 다시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녔다고 쓴다. 단순히 따라다닌 것만 아니라 치밀한 계획하에 그녀의 삶을 조금씩 파괴하기까지 한다. 일기는 그러한 파괴의 기록이다. 그녀를 육체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다. 일부러 물건을 숨겨서 소피로 하여금 스스로 건망증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사람들로 부터는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한다. 프란츠는 점점 강도를 높여 그녀를 히스테리에 빠지게 하고 결국 그녀의 삶을 뿌리 째 파괴해 버린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라운드에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된다. 소피가 왜 그렇게 병든 영혼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에 대한 진실이다. 그것은 소피 탓이 아니었다. 그 배후에서 그녀가 모르게 그녀의 삶을 유린한 프란츠 때문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프란츠는 왜 소피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 긴 세월에 걸친 프란츠의 치밀하고 집요한 파괴 계획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혹한 프란츠의 행위를 보며 저절로 이런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1라운드와 2라운드에 대해서만 말하자.

 

 '알렉스'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피에르 르메트르는 그냥 평범한 스릴러 작가는 아니다. 그건 이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왜 1 라운드와 2 라운드의 서술 스타일을 바꾸었던 것일까? 문제는 1 라운드의 소피는 가해자인 줄 알았는데 피해자였다는 점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신적 문제는 사실은 프란츠가 의도한 결과였다. 진정한 가해자는 바로 2 라운드의 프란츠였다. 그런데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서로 바꾸는 것 말고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한 가지는 1 라운드와 2 라운드의 서술 스타일이 정확히 문학의 역사에 있어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은 순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문학의 역사로 보자면 그 서술 스타일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흘러왔다. 그것은 근대가 되고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야기가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어 결국 소설이 발명된 것과 일치하는데 사실 바로 여기에 3인칭 시점으로 변해야 했던 까닭이 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의 접근이 자유로워짐으로 인해 그 이야기들이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에 있어서도 공감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히 수신자 하나만 놓고 썼던, 그렇게 1인칭이 주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내간체와는 달랐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에게서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무래도 한 가지 밖에는 없다. 이야기가 진실인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일의 기록처럼 여기게끔 하는 것이다. 진실은 개인의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모두 무릎 꿇릴 수 있는 만능열쇠와도 같은 것이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임을 알려줄 수 있는 서술 방법이 고안된다. 그것이 바로 3인칭 서술 이었다. 3인칭이 1인칭과 달리 사람들에게 보다 진실로 다가갈 수 있는 건 그것에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3인칭을 읽을 땐 그들이 직접 본다고 생각하지 누군가의 필터로 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1인칭을 읽을 때는 언제나 '나'라고 하는 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다고 여기게 된다. 즉 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3인칭을 읽으면 보다 진실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나아감은 보다 진실에 가깝게 나아가는 것이었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의 역사에서 서술 스타일이 발전했던 그 까닭과 그럴 수 있게 한 원인이 모두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에서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 '1 라운드'에서는 진실이 '2 라운드'에서는 관찰이 주가 되어 나타나지 않았던가. 더욱 놀라운 것은 소피 마음의 작은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그 매의 눈처럼 날카로웠던 르메트르의 필치마저 작가 자신의 정교한 계산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3인칭 시점이 객관적 진실을 담보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더욱 선명히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말이다. 물론 그것은 독자들의 뒤통수를 내려치기 위함이다. 그 세세하게 묘사되었던 것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누군가의 설정이요 의도된 효과였음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진실이라 믿었던 것은 '2 라운드'에서 전면적으로 펼쳐지는 누군가의 관찰과 개입의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진실을 향해 나아갔던 역사는 소설에서는 거꾸로 퇴보했다. 그 어떤 진실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환영일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우리 역시도 3인칭을 읽으면서 어떤 진실을 본다고 생각했기 보다는 다만 그러한 관습적 믿음만을 소비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는 스스로의 것이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이든 아무튼 그러한 작위가 만들어낸 판타지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이 작위적 판타지. 진실로 보이게끔 설정된 환영.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르메트르는 1 라운드를 그렇게 공들여 소피의 심리를 3인칭 객관적 시점으로 묘사하다가 2 라운드를 1인칭 시점의, 소설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단계의 스타일로 바꾸어 썼던 것이다. 근데 왜 갑자기 '진실로 보이게끔 설정된 환영'이 툭 튀어나오는 것인가? 이게 바로 르메트르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 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어 접근하고 있는 것. 프로이트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 라캉에 의해서 모든 문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도 말해졌던 것. 그것이 바로 작위적 판타지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건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다. 이 소설의 저변을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은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다. 그것의 근거는 너무도 많다. 스포일러를 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소설 첫 부분 부터 소피는 '유사 엄마의 자리'에 서 있다. 레오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소피의 모습은 그대로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가져와 모성으로서의 소피를 더욱 구체화한다. 그런데 프란츠가 소피를 그토록 괴롭히는 것은 자신의 엄마와 관계가 있다. 좌절된 엄마를 향한 그의 욕망을 소피를 통해 대리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소피와 프란츠의 관계에 있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것이 '돌봄'이라는 것도 한 근거가 된다. 사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돌보는 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러한 '돌봄'이 많이 나온다. 서로 상처입히고 죽이기만 하는 스릴러 장르로서는 상당히 이채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독특한 설정 역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를 드러내는데 있다. 소피와 프란츠는 그 욕망의 삼각형 안에서 여러 번 자리를 이동한다. 소피는 딸이었다가 엄마이기도 하고 프란츠는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소피의 욕망도 프란츠의 욕망도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늘 그렇듯이 충족되었다가 좌절되고 대리 만족으로 변질되기를 반복한다.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에서 중요한 것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징계의 개입이다. 아들은 2자 관계에서 아버지의 개입으로 인한 3자 관계에로의 변화로 결국 자신은 엄마의 욕망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아버지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된다. 유사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해서나마 엄마의 욕망 대상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바로 그 권위의 받아들임이 상징계의 개입을 통해서 일어난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언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일 때 그 아버지가 이루는 모든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를 진리라 여기고 그것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간다. 그것이 주체화의 과정이다. 진짜 자기 주체는 아니가 아버지가 설정한, 하지만 그 사회를 살아가려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주체이다. 만들어진 주체. 진실이라 여기게끔 설정된 환영에 지나지 않는 주체. 이것은 그대로 '1 라운드'에서 보여준 소피와 일맥상통한다.

 

 바로 그렇게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 우리가 이 근대라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을 보여주는 그런 소설이다. 그런데 그것은 2 라운드에서 알게되듯 진실이 아니다. 그건 다만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환영에 불과하다. 거짓의 놀음. 그 안에서 우리는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는 욕망을 이루러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고 있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분명히 보여준다. '1 라운드'에서의 소피와 '2 라운드'에서의 프란츠처럼 우리가 주체가 되면 될 수록 왜 스스로에게서 더 소외될 수 밖에 없는지를. 그건 바로 우리에게 주체가 되도록 강요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자체가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거짓 환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그 뿌리에 자리잡은 본성은 오로지 허위와 기만 뿐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욕망을 이루려고 하면 할 수록, 그렇게 주체가 되면 될 수록 늘어나는 것은 오로지 자기 파괴 뿐이다. 소설의 결말은 더욱 분명히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스포일러상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겠고 단순히 말하자면 그것은 완전히 타자의 자리에 서는 수 밖에 없다. 소설의 결말이 보여주는 것 처럼 내가 아닌 '나'가 되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의 나란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만들어낸 환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속 나로 남아 있어서는 자기 소외의 여정에서 달아날 수 없다. 지금의 나를 벗어나 완전히 다른 자의 위치에 서는 것. 그것만이 그 파괴의 여정에서 발을 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결국 '1 라운드'에서 소피의 도피 여정이 보여주는 의미도 이것이다. 거기서 소피는 소피 아닌 자가 되기 위해 계속 달아나는데 그 여정은 결코 자기를 포기하는 여정이 아니라 정말은 오히려 본래의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가는 여정인 것이다. 이것은 특히 '2 라운드'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집요하게 소피를 추적하는 프란츠의 여정과 대비되어 더욱 뚜렷이 강조된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런 식으로 구성과 내용의 모든 조각들을 가지고서, 그것도 아주 흡인력 있는 이야기로 이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안에서 만들어 놓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의 자아라는 것이 과연 정말 '나'인지 아니면 '남'에 의해 설정되어진 한낱 거짓된 환영에 지나지는 않는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다소 투박하게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이 소설은 한 여성의 진정한 자신의 모습 찾기라고 할 수 있지만 보다 깊은 쪽에선 소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지금 내가 진짜라고 여기고 있는 내가 누군가로 부터 설정된 나일수 있다는 가능성을 통해 타자의 위치로 옮겨가 나를 다시 한 번 스스로 재설정해보도록 하는 소설이다. 놀랍도록 빨리 읽히지만 그런 면에서 기억에서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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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55세의 나이에 뒤늦게 데뷔한 프랑스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는 정말 조금의 과장도 거짓도 없이 올 여름의 발견작이다

 

 

 옮긴이의 말을 빼고 장장 528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을 그야말로 열흘 굶은 사람이 밥을 삼키듯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이 소설은 정말 두 가지가 매력적이다. 첫째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를 마구 휘몰아쳐가는 팔색조처럼 변화무상한 플롯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지만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해가는지는 예측할 수 없다. 어느 순간 불현듯이 전혀 다른 맥락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때문이다. 희생자인가 싶으면 가해자이고 가해지인가 싶으면 또 피해자이다. 때문에 연민을 느끼기가 무섭게 분노를 느끼고 또 분노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안타까움에 마구 젖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배설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는다.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속에서 그저 따라잡기에 급급할 뿐이다. 헤르만 코흐의 '디너'는 객관화가 가능한 음미의 여유가 있지만 '알렉스'에게는 보여지는 이야기가 너무 압도적이라 그저 소화시키는 것만 하는데도 벅차다. 우리는 '이 타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여유조차 없다. 그저 만날 뿐이다. 이해불가능한 대상 그대로 대면할 뿐이다. 마치 작품속에서 알렉스와 같이 있자마자 그저 욕정말고는 다른 건 느낄 수 없었던 펠릭스와도 같다. 알렉스란 타자는 날 '이해하겠어? 못 이해하겠어?'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물을 뿐이다.

 '여기서 끝까지 볼거야? 아님, 다른 데로 갈거야?'

 

 

 

 W A R N I N 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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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부터 스포일러가 노출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이왕이면 소설을 읽고 아래를 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소설이 초반부터 반전이 펼쳐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스포일러를 유출시킬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당신은 이 이야기에 동참할 것인가? 아님, 내버려두고 다른 곳을 갈 것인가?

 

 

 '알렉스'의 건너편에서 작가 르메트르는 내게 이렇게 물어온다. 이 말은 내게 이 작품은 그저 재미로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것은 내게 저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이 예수 이야기를 두고 말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불트만은 예수 이야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게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전설에 불과한 것인지 나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칸트를 빌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중요하냐고. 예수의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전설이냐가 아니라 그 이야기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결단을 촉구한다는 데 있다. 윤리적 결단말이다. 즉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지켜본 너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나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척 하고 그냥 하던 대로 살 것인가?' 이것이다. 예수가 진정 실존한다면 바로 우리의 결단 위에서이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기억과 인상이 뒤범벅이 된 말이니만큼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는지 자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뉘앙스의 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난 이 책에서 불트만의 목소리를 빌린 르메트르의 말을 들었다.

 

 

 사실 이 소설의 결말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공감이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바로 이 공감의 여부가 소설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내게 그 두 번째의 매력을 가진다. 즉, 프랑스의 대표적인 형사 '매그레에로 복귀'가 가져다 주는 매력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정말 매그레적이다. 당신이 매그레를 읽어보았다면 이 소설의 결말을 읽을 때 당신 역시 떠올릴 것이다. 도대체 정말 정의로운 것은 무엇일까? 그냥 법대로 하는 게 정의로운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 매그레는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이것이 매그레가 다른 탐정이나 형사들과 구별되는 그 만의 가장 커다란 매력이다. 그는 법보다 사람을 더 중심에 놓는다. 그래서 그 사람에 따라 적용해야 할 법도 적용하지 않고 적용하지 않아야 되는 법도 적용한다. 이 소설의 형사 '카미유'도 마찬가지다. 카미유도 오로지 사람을 위해 적용할 수 없었던 법을 사실은 교묘한 수법을 쓰면서까지 과감히 적용해버린다. 문제는 그 사람이 연쇄 살인마라는 점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살인마에게 충분히 동정이 갈 만한 사연이 있었고 살인 역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그 전에 펼쳐진 엽기적인 살인 모습은 쉽게 그에게로 마음 문을 열지 못하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카미유는 그러한 행위를 취하는 것이다. 공감한다면 이 결말이 정말 마음에 들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어리둥절한 가운데 페이지를 넘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이 소설이 압도적인 재미와 그만한 깊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언하지만 이 소설은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카미유 시리즈 첫 권부터 제대로 소개되었도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바로 그 가치란 것이 카미유와 알렉스가 서로 아무리 형사와 연쇄 살인마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사실은 동병상련의 관계라는 것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계의 맥락을 헤아리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정말 중요한데 아무래도 그것을 위해서는 첫 권부터 읽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의 소설도 어느 정도 풀어놓고 있기는 하다. 카미유와 알렉스의 유사성에 대해서 말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카미유가 결국 알렉스의 삶에 연민을 느끼게 되는 건 거기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카미유는 유명한 여류화가이기도 한 자신의 어머니 작품을 하나도 소장하지 않으려 든다. 사람들은 그런 카미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또한 145CM의 단구이기도 하다. 그 작은 키로 인해 그는 어쩔 수 없이 편입되지 못하고 경계 위에 서 있게 된다. 아니 그 작은 키가 늘 뇌리에 새겨져 있어 카미유 스스로 경계 위에 일부러 머무르려 한다. 그래서 그는 외롭고 하지만 그런 생활은 자신에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건 무엇보다도 어머니 때문이다.

 

 

 우선 그는 키가 14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아 의자에 앉기만 하면 두 다리가 지면에서 20센티미터 이상 떠올라 대롱거리게 되는 단구의 사내이다. 이러한 그의 신체 조건은 오로지 자신의 그림에만 일생을 마친 모친이 임신 중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담배를 피워댄 데서 비롯된 영양 장애성 발육부진의 결과이다. (P. 532.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렇게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는 일 보다 자신의 일이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카미유는 늘 그림만 그리는 어머니만 보았다. 한 번도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래서 카미유는 자신의 이 고독, 이 홀로 있음이 어린 시절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기울여주지 않았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머니 조차도 자기 일에 빠져 있는데 하물며 그 누가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 주겠는가!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으며 그 마음을 그녀의 그림을 남김없이 처분함으로써 표현하려 한다. 가장 사랑을 받아야 할 가정에서 조차 내버려져 있음. 카미유가 알렉스의 삶에서 보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 역시 자기처럼 버려진 존재였다는 것. 그래서 카미유는 소문난 민완형사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이 소설에서만큼은 무능하게 비쳐진다. 카미유가 싫어하는 예심판사는 대놓고 그를 무능하다고 비난하고 과연 그 자리에 적합한지 의심스럽다라고까지 말한다. 전작과는 다른 그의 머뭇거림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알렉스와 자기와의 비슷함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카미유와 알렉스 사이의 유사성은 르메트르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사실 '알렉스'의 삶을 읽으면서 떠올린 소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였다.'

 

 

 

 

 알렉스와 보바리(그리고 카미유)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녀들이 속한 가정 자체가 그녀들을 가두는 새장이요 억죄는 굴레라는 것이다. 보바리와 알렉스는 모두 고통만 가중시킬 뿐인 가정이라는 감옥으로 부터 자유롭고 싶어한다. 그 자유로움을 그녀들은 책 읽기를 통해 표현한다. 보바리가 자신의 자유를 위해 그토록 많은 책을 읽었듯이 알렉스 역시 정말 많은 책을 읽는다. 하지만 결국 보바리는 완전한 해방을 성취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유로움을 구하기 위해 저질렀던 불륜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그녀를 파멸시켜 버린다. 알렉스 역시 마찬가지다. 보바리의 불륜과 알렉스의 살인은 모두 그 원죄가 되는 대상을 지워버리려는 행위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르메트르는 교묘하게도 알렉스의 살인이 먼저 대상을 유혹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이러한 공통점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렇게 보바리의 불륜과 마찬가지였던 알렉스의 살인 역시 결국 그녀 자신을 파괴시키는 결정적인 방아쇠가 된다.

 

 보바리는 말하자면 알렉스와 카미유의 원본과도 같은 존재다. 개인적으로 바로 여기에 르메트르가 말하고 싶은 진정한 주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보바리를 읽어보면 알게되겠지만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히스테리의 여자다. 그는 조금도 현실에 안주할 줄을 모른다. 늘 책을 통해 발견해낸 세상을 자기가 몸소 직접 느껴보고자 한다. 더 넓고 더 높은 곳을 언제나 꿈꾸기에 그녀는 현실에서 늘 히스테리를 부린다. 그런데 이 히스테리는 알렉스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녀는 살인을 하면서도 늘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울에 젖는다. 그러니까 그녀는 전형적인 사이코 패스는 아니다. 그녀는 늘 외로워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에 괴로워한다. 술을 마시면 그녀는 발작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린다. 이건 카미유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관계를 맺는데 그리 좋지 못하다. 그래서 탐문중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이 필요할 때는 동료 형사가 도맡는다. 그는 악담과 빈정거림 그리고 위협의 명수이다. 그건 일종의 히스테리적 반응이다. 자신의 모친에 대해서 부리는 성질 또한 히스테리의 일종이지 않은가. 보바리와 알렉스 그리고 카미유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이 히스테리이다.

 

 르메트르는 고의적으로 이 히스테리를 주요한 정서로 부각시킨다. 느닷없이 이루어지는 살인은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히스테리의 징후와 또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왜 르메트르는 히스테리를 가져오는 것인가?

 

 그건 르메트르가 프로이트와 라캉이 히스테리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했었다. 히스테리는 무의식(이 무의식은(특히 라캉에게 있어) 그야말로 '타자' 자체를 의미한다.)으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무의식은 도착증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착은 언제나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을 구축하는 태도인 반면에 히스테리는 그것을 전복시키며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히스테리는 굳건한 체제를 아래에서 부터 뒤흔드는 지진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는 규범화된 사회에 지속적인 생채기를 일으키며 정상성이라는 것에 계속 "정말?"이라며 의혹을 제기한다. 히스테리란 현실이라는 것이 교묘한 위장에 불과한 것임을 폭로하며 그렇게 틈집을 내고 헤집어서 속에 감추인 이면을 노출시킨다. 결정적으로 히스테리는 지속적으로 '타자'와의 조우를 가능케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르메트르는 소설 '알렉스'에게 '마담 보바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히스테리를 전면적으로 가져온 것이다. 카미유와 알렉스에게 고통만을 안겼던 지배적이고 정상적인 사회의 표본과 같은 '가정'을 뒤흔들기 위해. 바로 그 '가정'이 카미유의 엄마가 그랬고, 알렉스의 가족들이 그랬던 것 처럼 도착증으로 가득한 공간임을 밝혀 결국 타자를 돌아보지 않음이 이 모든 비극을 가져온 이유임을 독자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과연 그것을 증명하듯 카미유는 정상적인 사회의 견지에서 보자면 예외적인 방법으로 최종 해결을 가져온다. 그러고보면 알렉스의 죽음이 그러했던 것도 절대적 타자를 소설 속으로 가져오려는 르메트르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알렉스는 엔터테인먼트로도 더없이 훌륭하지만 이런 맥락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마담 보바리'가 근대라는 것에 대해 히스테리적 탈주의 선을 가져왔듯이 '알렉스'는 지금 현대라는 것에 대해 히스테리적 탈주의 선들을 가져온다.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더없는 패권적 지위를 누리며 지금까지 군림해온 자본주의가 침몰하는 타이타닉 처럼 좌초되고 있는 요즘 자본주의가 가장 당연시 여겼던 것들에게 차례로 히스테리적 경련을 선사하여 굳건한 포장을 허물고 그 이면의 속내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알렉스'는 보다 징후적이다. 2011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유로 위기가 극심해지고 여기저기서 이민자들의 폭동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일어나던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알렉스'의 살인은 어쩌면 그 과정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말에서 드러나는 진짜 동기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헤르만 코흐의 '디너'도 그렇고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도 그렇고 '흔들기'가 시작되고 있다. 네델란드와 프랑스 이렇게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출간된 소설들이 나란히 흔들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이 소설들이 모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그토록 많은 대중들의 호응이 그들의 무의식적 바람을 반영한 것은 아닐지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들은 어쩌면 이후로 터져나오게 될 거대한 흐름의 첫 표출인 것은 아닐까? 어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첫 태동과도 같은 작품은 아닐까? 내게는 이게 보다 더 흥미롭게 보인다. 결국 롤링 스톤즈의 노래 가사처럼 시간이 가면 절로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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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과 표지에 나오는 가재 다리 때문에 얼른 보기엔 요리가 주가 되는 소설 같지만 사실 이 소설은 정찬의 음미 보다는 내면의 여정에 가까운 작품이다. 물론 소설 자체가 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그렇게 독자는 그 화자의 눈으로 사물과 사람을 보고 그의 기억을 통해 사건을 회상하며 그의 판단을 매개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해석한다.

 

 이를테면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그 존 말코비치 안으로 들어간 존 쿠색과도 같다. 아니, 작가 헤르만 코흐는 정확히 당신이 바로 그 존 쿠색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지금 소설에서 독자가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진 내면의 풍경을 마음껏 음미하길 원한다. 이것이 바로 '디너'란 제목이 붙은 진짜 이유이다. 즉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등장인물들이 모여 식사하는 '디너'가 아니라 소설이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주인공의 내면을 마치 풀 코스의 정찬처럼 맛볼 수 있기에 '디너'인 것이다.

 

 식사란 독서와 같다.

 포크와 나이프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요리란 이를테면 책과 같은 텍스트이다. 식당에서 주인공과 같이 식사를 하는 주인공의 형이자 네델란드의 유력한 차기 수상 후보 세르게는 그 자리에서 자주 요리나 와인에 대한 얘기를 즐겨 하는데 바로 이 장면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요리라는 것도 하나의 텍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의 전반부는 많은 텍스트들로 채워진다. 바로 뒤이어 세르게는 우디 알렌의 영화를 얘기하고 주인공은 이미 본 그 영화에 대해 형이 가진 속물적 취향과 자신의 고상한 취향이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반박할 거리를 찾는다. 즉 형이 가진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음미하고 그에 따라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행위는 그가 프랑스의 별장에서 세르게 부부와 같이 보내면서 그들 부부가 가진 프랑스의 무분별한 추종을 그가 직접 본 것들을 텍스트화 시켜 그것들을 토대 삼아 해석할 때 절정에 이른다. 그렇게 코흐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주어지기 전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텍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요리도 텍스트가 되고 한 개인의 내면 또한 텍스트가 된다.

 

 

  이 소설에선 이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헤르만 코흐는 '디너'라는 소설이 가진 이야기를 음미시키기 위해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가 정말 주의깊게 조리하고 제대로 맛보게 하려는 것은 주인공 '파울'의 내면 자체이다. 그래서 그는 마치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과도 같이 주인공의 내면을 어느 것 하나 빼거나 덜어내지 않고 충실히 복원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세세하게 보여준다. 말 그대로 제대로 음미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음미란 따지고 보면 '객관화'의 과정이다. '맛'이 감각이라면 그 맛을 분석하고 나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음미의 과정이다.

 

 즉 코흐가 이 소설에서 우리들에게 진짜로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주인공 파울의 내면을 객관화하고 '맛이 어떻다.'라고 말하듯 스스로 평가내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현명한 요리사가 먹는 이가 어떤 맛을 느꼈든 상관하지 않듯이 그 역시 우리들이 거기서 어떤 정답을 구했든 괘념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체험하는 것이다. 사유를 촉발시킬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쟁반 위에 놓여진 요리가 그러하듯이. 코흐는 그렇게 스스로 설정한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건 몰라도 주인공 파울의 내면만은 정말 마치 정말 먹는 듯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자, 그럼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왜, 코흐는 굳이 이러한 방식을 택하는 것인가?

 아니, 왜 이런 소설을 쓴 것인가? 라고 물어야 하나...

 

 아무튼, 이 '디너'란 소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질문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코흐의 이 소설은 그저 픽션이 아니라 소설이 쓰여진 당시의 네델란드의 사회적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의 도표를 가져와 본다.

 

 

  이 그래프는 2003년 현재 네델란드 청소년들의 폭력 범죄 증가율을 나타낸 것이다. 소설 '디너'에서 주인공 형제가 만나게 된 진짜 이유도 이와 같은 자기 자녀들의 폭력 범죄 때문이었다. 주인공들의 자녀들은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으러 갔다가 실내에 가로누운 노숙자에게 한 마디 욕을 듣게되자 구타를 하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들이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이 그 곳에 있던 CCTV에 찍혀 전국적으로 방송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촬영 각도상 부모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인지 알기란 불가능 했는데 바로 그 때문에 사후대책을 의논하고자 소원하던 형제가 다시 만나 '디너'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프에서 보듯이 청소년들의 이러한 이유없는 범죄는 그저 픽션만은 아니었다. 90년대 초 부터 꾸준히 증가한 청소년 폭력 범죄에 있어 흔히 벌어지고 있던 범죄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이 소설의 범죄는 현실 사회의 반영인데 '디너'란 소설은 2009년에 발간되었다. 왜 굳이 코흐는 이 시점에 이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것일까? 여기에 주목할만한 네델란드 발 보도가 하나 눈에 띈다. 2009년 한 범죄연구율 학자가 여기에 대해 의미심장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지금까지 네델란드에서 일어난 청소년 범죄를 분석해보니 그 중 3분의 2가 바로 이민자 가정 출신의 청소년들이 저지른 범죄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던 외국인 혐오증에 기름을 부운 격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연구결과는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만 해왔던 것을 사실로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네델란드 국민들은 이민자 자녀들을 의혹의 눈으로 보아왔고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결국 코흐로 하여금 이 '디너'란 소설을 쓰게 만든 것이다.

 

  아마도 읽어보면 바로 알아차리겠지만 이 소설은 기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분명 위쪽을 걸어갔는데도 결국 다다르는 곳은 아래쪽인 것이다. 그렇게 표면과 이면이 전복적으로 뒤바뀌는 소설이다. 물론 이 소설이 충실히 담아내는 것은 주인공의 내면이므로 여기서 전복적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주인공에 대한 시각이 그렇게 바뀐다는 의미가 되겠다. 다시 말해 초반에 그리도 합리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이던 주인공이 나중에 가면 그야말로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비합리주의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코흐의 능수능란함이 작열하는 땡볕처럼 눈부시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표면 아래에 놓여있는 이면의 진실을 목도하게 한다.

 

 그런데 그 진실이란 그저 주인공 개인만의 진실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보편적이다. 그러니까 그 주인공의 내면을 근본부터 구축하고 있는 서양 정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냉혹한 진실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것은 바로 '디너' 맨 앞 부분에 인용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에 나오는 대사들이다. 코흐는 하필이면 자기는 팁 같은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팁을 주지 않겠다는 대사를 인용한다. 왜 하필이면 이 대사일까? '팁'이라는 것은 서양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것이 아닌가? 일종의 교양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그런 규범말이다. 사실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반박을 하려는 이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팁'이라는 것은 서양 문명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바로 이 때문에, 그러니까 '팁'이라는 것이 교양을 갖춘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으례히 행해야 할 보편적 규범이기 때문에 코흐는 일부러 인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아마도' 이지만 분명 코흐는 이 말을 인용할 때 어떤 학자의 이론을 떠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때문에 일부러 '디너', 즉 '정찬'이라는 '팁'처럼 '예법'이란 이름으로 규격화된 규범의 지배를 받는 형식을 구태여 가져왔을 것이다. 코흐는 초반에 지배인과 웨이터들의 규격화된 서비스 모습들을 세밀히 묘사하는데 이 또한 '디너'를 이루고 있는 형식화된 예절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디너'는 그야말로 대표적인 문명의 소산임을 알리는 것이다.

 

 코흐는 그렇게 문명, 또 문명을 가져온다. 그럴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학자는 노베르트 엘리아스이다. 엘리아스는 서양 문명이 인위적인 발명품임을 증명하여 유명해진 역사학자다. 그의 대표작은 바로 '문명화과정'이다. 제목 그대로 지금 우리들에게 자리잡은 지배적 서양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히는 책인데 그는 문명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 단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차별'을 위해서라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양 레스토랑에서 지켜야 할 그 많은 식사 규범들, 그렇게 '디너'를 형성하고 있는 형식화된 예절들은 모두 왕이 귀족을, 귀족이 평민을 차별화하고자 만들어낸 전략적 결실에 다름아닌 것이다. 우리들은 서양의 식사 예법이 너무도 복잡한 것에 혀를 내두른다. 그리고 어이없어 한다. 그저 입에 넣으면 되는 것을 뭐 그리 복잡하게 절차를 따지냐고! 그런데 그래야 했었다. 규칙이 복잡해져야 했었다. 그래야 먹고 사는데 바쁘고 지친 평민들이 쉽게 따라하지 못할 테니까. 이렇게 흔히 '에티켓'이라 말하는 그 복잡한 예절 규칙들은 모두 구별짓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감히 귀족이 왕고 맞먹으려고!', '감히 평민주제에 귀족과 맞먹으려고!' 이런 생각 끝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엘리아스는 분명히 보여주었다. 문명이란 타자를 배제하는데서 탄생했다고.  그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문명은 일부러 필요하지도 않은 그 많은 규칙들을 만들고 그것에 인위적 진리를 부여하여 단지 지키고 못 지키느냐만 가지고 단죄하더라도 아무런 양심상 가책을 받지 않게 하였다고. 그래서 문명이 발달할 수록 인간의 감각 중 시각이 특권화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인이 그것을 지키는가 못 지키는가를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또한 보이는 외양만이 전부이고 그 안데 깃든 보이지 않는 내면은 가치없어 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인종주의는 날로 극심해지고 가진 자의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은 더욱 깊어졌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므로 또한 보이는 것의 진실은 오로지 보는 자만이 판단하는 것이므로 배제된 자, 차별받는 자들의 저항과 호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코흐는 놀랍게도 주인공 내면에 이 서양 문명이 가진 특성들을 그대로 버무려 넣는다. 마치 서양 문명이 그대로 인격화한 것 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앞에서 말한 세르게를 더없이 경멸하게 되었던 프랑스 체류 경험도 사실 알고 보면 오로지 그의 시각에 기초한 판단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그 시각이야말로 사실을 전혀 보증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개인 편견의 산물임을 깨닫게 된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코흐는 이런 식으로 서양 문명이 가진 근본적 문제를 주인공의 내면을 통하여 드러낸다. 그래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코흐가 초대한 이 '디너'에 참여하여 음미하게 되는 것은 지금의 '서양 문명' 자체라고 할 수있다.

 

 물론 그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뿌리 깊이 주관화 시켜버린 '서양 문명'을 다시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하는 것은 2009년 범죄율 조사 보도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 외국인 혐오증을 온전히 합리적으로 다시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덮어놓고 범죄의 3분의 2가 이민자 가정 출신 청소년이 저질렀다고 말하는 그 이면에 바로 오로지 차별과 배제 위에 형성되었던 그 서양 문명이 가진 '나 밖에 없다' '나만 괜찮으면 만사 OK!'라는 오만과 이기심은 없는지 스스로 돌이켜 헤아려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소설에서 바로 입증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거기서 이민자를 대표하는 존재는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배제되어 버린다.

 

  소설 자체로도 '디너'는 정말 재미있고 사실 주인공의 개인적 의견도 흥미로운 것이 많다. 이야기를 자유자대로 능수능란하게 이끌어가는 코흐의 눈부신 필력 덕분에 조금의 지루함도 없이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디너'는 보여지는 것들 너머 더 많고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책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그 사유의 촉발을 위해 나타난 작품이다. 보다 정확히는 근자에 범람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이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그것을 서양 문명이라는 가장 근본으로 부터 따져보려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걸 전혀 어렵지 않게 자연스럽게 음미하도록 만든다는 것이 더욱 놀랍게 한다.

 

 아베 야로의 만화 '심야 식당'에서 느낀 것이지만 정말 좋은 요리사란 단순한 재료를 가지고도 마음을 울릴만한 깊은 맛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디너'를 읽고난 지금 헤르만 코흐야 말로 그런 요리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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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21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마치 이 리뷰는 전문 평론가 내지는 전문 작가가 쓴 글과 비슷한 수준이 아닙니까!
역시, 아무리 늦어도 마감 일은 칼같이 지키시는 군요.
성실함에 심심한 박수 쳐드립니다~ 짝짝 ㅋㅋㅋ